'분류 전체보기' 카테고리의 글 목록 (5 Page) :: 영화 보는 영알못

 라라(빅터 폴스터)는 발레리나를 꿈꾸고 있다. 아버지, 남동생과 함께 사는 그는 벨기에 최고의 무용학교에 진학하게 되고, 진학을 위해 가족 모두가 학교 인근으로 이사하게 된다. 남들보다 뒤늦게 발레를 시작했기에 부족한 면이 많지만, 라라에게서 인내와 가능성을 발견한 학교의 선생들은 그를 적극적으로 돕는다. 방과 후 홀로 라라의 연습을 도와주기도 한다. 라라의 아빠는 라라가 트랜지션을 받는 것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라라는 호르몬 치료를 시작했지만 빠르게 변화하지 않는 몸을 답답해하고, 매일같이 거울로 가득한 연습실에서 자신의 몸을 보며 혹독한 훈련을 거쳐야 하는 라라의 내면은 점점 혼란스러워진다. 루카스 돈트의 데뷔작 <걸>은 칸 영화제에서 그해 출품된 퀴어영화를 대상으로 삼는 퀴어종려상을 수상했던 작품이다. 영화에 크레딧에 올라가진 않았지만, 루카스 돈트는 실제로 트랜스여성 발레리나인 노라 몽세쿠흐의 이야기를 접한 뒤 그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각본을 썼다고 한다.

 <걸>이 북미에서 공개되었을 때 꽤나 많은 비판이 쏟아졌다. 평론가 올리버 휘트니는 영화의 카메라가 라라의 몸, 특히 성기 부분에 집중하고 있으며, 영화 후반부의 특정 장면을 “트랜스 트라우마 포르노”라 부르며 강하게 비판한다. 게다가 루카스 돈트는 물론 라라를 연기한 빅터 폴스터가 시스젠더 남성이라는 점 또한 하나의 비판 요소가 되었다. 노라 몽세쿠흐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걸>의 이야기는 시스젠더 남성의 환상이 아니며, 자신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라 말했다. 물론 몽세쿠흐의 말이 휘트니의 비판을 완전히 무력화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몽세쿠흐의 말과 존재는 <걸>이 정당화되는 것에 도움을 준다. 루카스 돈트는 빅터 폴스터를 캐스팅한 이유에 대해 다양한 성별의 배우 수십 명이 오디션에 참가했지만 연기와 춤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대신 기존에 캐스팅 물망에 있던 댄서들 중 폴스커를 발견해 캐스팅했다고 밝혔다. 그와 더불어 몽세쿠흐가 다녔던 병원 젠더 센터의 자문을 받아 트랜지션 과정 중에 있을 트랜스 청소년들이 영화에 참여하는 것은 그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조언을 구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걸>은 몸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영화다. 라라는 발레리나를 꿈꾼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발레이기에 그는 더욱 혹독한 훈련을 거쳐 그들을 쫓아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라라는 매일같이 자신의 몸을 본다. 영화의 오프닝은 잠을 자던 라라를 남동생이 깨우는 장면이다. 라라는 침대에서 스트레칭을 하면서 일어난다. 학교에 간 라라는 항상 자신의 몸을 본다. 몸을 극한의 상태로 훈련해야 하는 발레의 특성은 그의 신체적 디스포리아를 자극한다. 탈의실에서, 연습실의 거울에서, 샤워실에서, 딱 붙는 발레복에서, 라라는 자신과 타인의 몸을 본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발레를 연습하는 라라를 담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거칠어진다. 카메라는 춤을 촬영한다기보단 고행에 가까운 발레 훈련과 트랜지션이 진행 중인 라라의 신체를 찍고 있다. 학교 동급생의 생일파티 장면을 제외하면 라라가 타인으로부터 직접적인 혐오 발화를 듣는 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영화에 묘사되는 라라의 상황은 그렇게 나쁘지 않다. 아버지는 트랜지션을 적극 지지하고, 학교의 선생들은 그가 다른 학생들을 따라잡는 것을 돕고, 학교엔 성중립 화장실이 있으며, 돈이 부족해 학비나 트랜지션 비용을 지불하지 못하는 상황도 아니다. 하지만 그의 신체를 향한 모종의 혐오들은 배려의 말속에 숨겨진 함의로, 배제의 말속에 암시된 것으로 다가온다. 

 <걸>이 주목하는 것은 그 속에서 고뇌하는 라라의 모습이다. 사실 자신의 현재에 대해 고민하는 라라의 모습은 여느 사춘기 성장영화 속 주인공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의 플롯 또한 그러한 영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주인공은 자신이 꿈꾸는 것을 위해 움직이고, 행동에 옮기고, 무언가 잘 안 풀리고, 정신적 임계점이 찾아오고,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발산한다. 때문에 <걸>은 익숙한 성장영화의 플롯 안에서 라라만이 지닌 내면의 혼란과 고민을 풀어내는 작품이다. 나도 휘트니가 지적한 영화 후반부의 장면이 꼭 필요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바깥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맞서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트랜스 캐릭터들의 영화들이 있다면, 그 반대에서 내면의 태풍에 대한 영화의 존재 또한 소중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걸>은 의미를 지닌다.

 최초로 히틀러와 괴벨스를 인터뷰한 외신기자 가레스 존스(제임스 노턴)는 소련의 자금출처에 의문을 갖고 취재를 시작한다. 이를 위해 모스크바로 향해 퓰리처상을 받은 뉴욕타임스의 모스크바 지국장 월터 듀란티(피터 사스가드)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그는 이를 거절한다. 하지만 존스는 듀란티의 밑에서 일하는 기자 에이다 브룩스(바네사 커비)를 통해 취재의 실마리를 발견하고, 소련 당국의 눈을 피해 우크라이나의 공동농장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그가 목격한 것은 혁명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기근과 혹한에 죽어가는 사람들이었고, 그는 이를 폭로하려 한다. 존스의 폭로기사는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의 바탕이 된다. 연출을 맡은 아그네츠카 홀란드는 국내에서 <토탈 이클립스>나 <카핑 베토벤> 등 할리우드에서 작업한 작품들로 알려져 있지만, 안제이 바이다의 <단톤>의 각본을 썼고 나치 독일부터 팔레스타인까지 유럽을 둘러싼 이슈들을 폭넓게 다루는 <유로파 유로파>부터 ‘에코 페미니즘 블랙코미디 블록버스터’라 자칭하는 최근작 <스푸어>까지 다양한 영화를 연출해온 폴란드의 거장이다. 동구권 출신 감독으로서 그가 스탈린과 결부된 이야기를 다루는 것은 어찌 보면 다소 뒤늦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미스터 존스>가 다루는 ‘언론’에 대한 이야기는 현재의 러시아, 더 나아가 우경화되는 서구권 전체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해 볼 수 있으며, 이는 최근 할리우드나 유럽에서 쏟아져 나오는 여러 영화들의 경향과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다.

 <미스터 존스>에서 흥미로운 것은 세 번 등장하는 기차 시퀀스다. 존스가 처음 모스크바로 향하는 길에 등장한 기차 시퀀스는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숏의 지속시간도 짧고, 지가 베르토프의 영화처럼 달리는 기차의 모습을 인간의 눈이 닿을 수 없는 구도로 촬영하고, 그것을 유리창에 비쳐 분열된 존스의 얼굴과 디졸브시키기도 한다. 더 나아가 존스 및 기차의 모습과 함께 공장에서 노동하는 소련 노동자들의 모습이 담긴 아카이브 푸티지가 삽입된다. 존스가 우크라이나의 스탈리노로 향하는 기차 시퀀스에서 그는 자신을 감시하는 이와 함께한다. 이 장면에서도 앞선 기차 시퀀스의 편집과 유사한 리듬과 디졸브 등의 기법이 등장하지만 아카이브 푸티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말한 뒤 옆에 있던 우크라이나 주민들이 이용하는 기차로 숨어든 존스가 목격하는 것은 혁명을 위해 힘차게 노동하는 노동자들이 아닌, 먹고 버린 오렌지 껍질에 달려들어 그것을 주워 먹는 빈민들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기차 시퀀스는 소련 경찰에게 붙잡혀 모스크바로 돌아온 존스가 자신이 본 것을 발설하지 않겠다 약속하고 런던으로 돌아가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단순하게 화면에서 멀어지는 기차를 고정된 카메라로 찍은 하나의 숏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스터 존스>의 세 기차 시퀀스는 존스의 심리적 변화를 드러낸다. 존스의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에서 교사로 일했으며, 종종 그곳의 곡창지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고 언급된다. 때문에 그가 처음 소련을 찾을 때 기대했던 것은 아카이브 푸티지로 등장했던 것과 같은 노동자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목격한 것은 동료가 소련당국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정황 증거, 소련에게 협력하며 마약과 섹스로 가득한 파티를 벌이는 듀란티, 그리고 죽어가는 인민들이다. 그가 우크라이나 인민들이 이용하는 기차를 타자마자 영화의 편집 리듬은 느려진다. 똑같이 핸드헬드로 촬영되고 있음에도 숏의 길이가 늘어난다. 이는 추위와 굶주림을 직접 경험하며 도착한 스탈리노 역에서 내리자마자 동사한 시체를 목격한 존스의 심리를 반영한다. 존스의 시점숏은 등장하지 않지만, 관객은 충격받은 존스의 시점에서 당시의 우크라이나를 체험하게 된다. 때문에 고생 끝에 런던으로 돌아가는 그의 모습이 멀리 사라지는 기차를 담은 숏 하나로 마무리되는 것은, 그것을 전달해야 한다는 일념 이외엔 그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자신이 본 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에는 상당한 위험부담이 뒤따른다. 그의 폭로에 반대하는 것은 소련과 소련의 협력자 듀란티뿐만이 아니다. 1차 대전과 대공황 이후 극심한 경제적 위기엔 놓인 영국의 정치인들은 소련을 적으로 돌리지 않기 위해 존스의 폭로를 막고자 한다. 영화에서는 존스가 고향 웨일스로 돌아가 지역신문사에서 일하다 그곳의 별장을 찾은 언론재벌 윌리엄 허스트를 만나 대대적인 폭로기사를 쓰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 과정에서 존스는 동네 아이들에게 “미친 사람”이라며 놀림받기도 한다. 권력이 자신이 포섭하지 못한 누군가를 광인으로 몰아가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벌어지는 일이다. 그럼에도 존스는 자신이 본 것을 분석해 기사로 작성한다. <미스터 존스>는 그 치열한 과정을 착실히 쫓는다. 

 

 이 영화는 러닝타임이 840분, 14시간이나 되는 다큐멘터리이다. <우먼 메이크 필름>이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영화는 여성감독이 연출한 작품들에 대한 다큐멘터리이다. 다만 영화의 부제는 원래 ‘영화사가 잊은 영화들’이 아니라 ‘A New Road Movie Through Cinema’로, 번역하자면 ‘영화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로드무비’ 정도의 의미가 된다. 영화는 오프닝, 분위기, 대화, 프레이밍, 스테이징, 발견, 시점, 클로즈업, 꿈, 죽음, 사랑, 종교, 노동, 정치, 긴장감, 기억, 시간, 신체, 섹스, 엔딩 등 40개의 키워드를 183명의 여성감독이 연출한 400여 편의 영화를 통해 설명한다. 탠디 뉴튼, 데브라 윙거, 제인 폰다, 케리 폭스, 아드조 안도, 샤밀라 타고르 등의 여성 배우들이 내레이션을 맡았고, 틸다 스윈튼은 내레이션과 함께 영화의 제작도 맡았다.

 영화는 틸다 스윈튼의 내레이션이 설명하듯 여성감독들의 영화들로 영화사를 다시 쓰거나 기존의 영화사를 해체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성감독이 연출한 영화의 리스트를 제공하려는 것도 아니다. (물론 상당히 유용하고 충실한 리스트이긴 하다) 이 영화는 “모든 선생님이 여성인 영화학교”에 가깝다. 생각해보면 마크 커즌스가 뽑은 40여개의 키워드는 루이스 자네티의 [영화의 이해]나 데이비드 보드웰, 크리스틴 톰슨의 [영화예술]과 같은 ‘교과서’들의 목차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사랑, 꿈, 기억 등 추상적인 키워드들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영화는 수많은 영화들에서 각 키워드에 알맞은 장면들을 뽑아, 그들이 해당 키워들을 영화 속에서 어떻게 수행했는지, 어떻게 보여주었는지를 설명한다. 가령 신체에 대해 이야기할 때 아녜스 바르다의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 셀린 시아마의 <톰보이>, 레니 리펜슈탈의 <올림피아>, 마야 데렌의 <변형된 시간의 의식> 등이 차례로 언급되는 방식이다. 바르다와 시아마, 그리고 야스민 아메드와 안드레아 아놀드가 신체를 젠더권력이 교차되고 드러나는 장소로서 사용했다면, 리펜슈탈이나 데렌은 신체 자체의 조형성을 영화에 담으려 했다는 식의 설명이 붙는 방식이다.

 때문에 <우먼 메이크 필름>은 흔히 말하는 ‘오디오-비주얼 크리틱’의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비평’보다는 기술적인 ‘분석’ 작업에 가깝다. 마크 커즌스는 자신이 인용하는 모든 영화에 대해 ‘위대한 영화들’이라는 상찬만을 건넬 뿐, 별다른 평가를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영화는 어떤 영화에 대한 가치평가와 미적 우위를 가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우먼 메이크 필름>의 목적은 여성이 연출한 영화만으로 모종의 영화 교육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에 가깝다. 그간 여성감독의 영화는 영화사의 어떤 국면, 가령 프랑스 누벨바그의 아녜스 바르다, 할리우드 황금기의 아이다 루피노, 90년대 액션영화엔 캐서린 비글로우를 언급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언급되었을 뿐이다. 위의 문단에서 언급한 책을 펼쳐보면 대부분의 키워드는 찰리 채플린, 알프레드 히치콕, 오손 웰즈, 장 뤽 고다르,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들을 예시로 꼽고 있다. <우먼 메이크 필름>은 그 예시들을 아녜스 바르다, 도로시 아즈너, 아이다 루피노, 클레르 드니, 캐서린 비글로우, 알리스 기 블라쉐로 대체하는 작업이다. 그 지점에서 <우먼 메이크 필름>은 얼핏 유사한 기획인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들)>과 갈라선다.

  <우먼 메이크 필름>은 픽션과 다큐멘터리, 실험영화, 무성영화와 유성영화, 단편과 장편 등을 가리지 않고 인용한다. 이 리스트는 <웨스트월드>나 <시녀 이야기> 등의 TV 시리즈를 포괄하고, 마지막 키워드인 ‘노래와 춤’에서는 비욘세의 ‘레모네이드’ 뮤직비디오를 인용한다. 이 영화 안에선 연출된 영상이라면 그 안에 이렇다할 위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다. 콘텐츠의, 매체의 위계가 없는 영화학교를 꿈꾸는 것일까? 영화가 인용하는 다양한 시대의, 국적의, 언어의 영화들은 마크 커즌스의 인용을 통해 하나의 덩어리로 묶인다. 바르다, 아이다 루피노, 키라 무라토바 등 이미 ‘정전’에 오른 이들의 이름뿐 아니라, 켈리 라이카트나 에바 듀버네이, 림 렌지, 패티 젠킨스 같은 최근의 이름들, 더 나아가 율리야 솔른세바, 트린 T. 민하, 몰리 수리아, 다나카 카누요, 알리체 로르바커, 마티 디옵, 데니즈 겜즈 에르구벤 등 동유럽, 동남아시아, 동아시아, 아프리카, 중동의 감독들 또한 언급된다. 한국의 감독으로는 남한의 첫 여성감독 박남옥의 <미망인>과 김소영의 <나무 없는 산>이 인용되었다. 

 여기서 <우먼 메이크 필름>의 비평적 기능이 드러난다. 마크 커즌스는 자신이 인용하는 개별작품에 대한 비평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비평대상은 개별영화나 영화사가 아닌 영화에 대한 교육이 무엇을 통해 이루어졌는지, 즉 영화교육에 대한 비평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우먼 메이크 필름>은 한 작가를 파고드는 <오손 웰즈의 눈으로>나 도시에 대한 에세이필름인 <아이 엠 벨파스트> 등의 전작과 구분된다. <우먼 메이크 필름>은 그간 자연스럽게 남성감독의 영화, 남성주연의 영화, 남성중심 서사의 영화로 구성된 영화교육을 뒤바꿔 놓는다. 14시간에 달하는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데브라 윙거의 내레이션은 이렇게 말한다. “여성 감독들의 영화엔 더 많은 여성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의 말과 함께 세상을 떠난 여성감독들의 사진이 등장하고, 알리스 기 블라쉐의 사진과 함께 마크 커즌스가 직접 찾아간 알리스 기 블라쉐의 묘지가 등장한다. 이 영화는 영화사에서 잊힌 영화들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영화교육에서 자연스레 잊히게 된 여성 영화인들에 대한 영화이자, 그들이 해낸 것들에 대한 영화다. 

 다만 그 과정에서 인용된 모든 영화와 장면을 동일선상에 두고 이야기할 필요성을 인정한다 해도, 모든 방식의 연출을 긍정하는 듯한 병렬적 인용과 내레이션은 다소 아쉽게 느껴진다. 가령 ‘신뢰성’ 챕터에서 디나라 아사노바의 <당신이 선택한 것>을 언급하며, 한 여자아이가 위태롭게 지붕 위를 걷는 장면에 대해 단순히 ‘영화에 신뢰성을 부여하기 위한 방법’ 정도로 묘사하는 것은 다소 위험하게 느껴진다. 혹은 ‘SF’ 챕터에서 발리 엑스포트의 <인비저블 애드버서리>에서 살아있는 물고기와 곤충을 칼로 죽이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 또한 단순히 하나의 방법으로써 제시될 뿐이다. 이는 <우먼 메이크 필름>을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새로운 질문을 던져주지만, 스스로 ‘영화학교’를 표방하고 있는 만큼 다양한 방법론과 함께 그것의 윤리에 대한 언급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고 보니 키워드에 ‘윤리’가 없다는 사실이 살짝 의아하다.

 클레어(아이슬링 프란쵸시)는 영국군에 의해 아일랜드에서 오스트레일리아로 끌려온 죄수다. 그곳에서 형기를 살며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 그와 남편은 영국군 중위 호킨스(샘 클라플린) 밑에서 일하고 있다. 하지만 형기를 다 채운 이후에도 호킨스가 약속한 통행증을 주지 않자, 클레어의 남편은 호킨스를 때리고 만다. 그날 밤, 호킨스와 부하들은 클레어의 오두막에 찾아와 남편과 아기를 살해하고 클레어를 강간한 뒤 다른 마을로 떠난다. 살아남은 클레어는 길잡이인 원주민 빌리(베이컬리 거넴바르)를 고용해 이들의 뒤를 쫓는다. <바바둑>으로 이름을 알린 제니퍼 켄트의 신작 <나이팅게일>은 익숙한 여성수난극/복수극의 전개를 쫓는다. 하지만 136분의 짧지 않은 러닝타임은 수단에서 복수로 이어지는 전개를 성실하게 따라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클레어와 빌리의 동행은 클레어가 겪은 고통과 수난을 넘어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의 식민지였다. <나이팅게일>은 영국의 식민지배 하에 놓인 1825년의 오스트레일리아를 담아낸다. 원주민들은 학살당하고,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숲 속을 이동하는 백인들의 길잡이로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클레어처럼 끌려온 죄수들은 영국군의 노예처럼 살아간다. 영화는 크게 두 종류의 폭력을 묘사한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 타인종에 대한 백인의 폭력. 이는 곧 제국주의적 침략을 본격화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지역을 식민화하는 영국-백인-남성의 폭력이다. 그 인해 밑바닥으로 끌려내려 온 두 사람은, 고향에서 먼 곳으로 끌려오거나 고향 자체를 상실한 이들이다. 때문에 두 사람의 만남은 우연이지만 동시에 필연적이다. 백인 여성인 클레어가 빌리를 경계하다 동행이 길어지며 모종의 연대감을 나누는 과정은 그 우연을 필연으로 변화시킨다. 

 이 지점에서 지난 10월에 본 켈리 라이카트의 <퍼스트 카우>가 떠올랐다. 사실 두 영화는 꽤 많은 부분에서 닮았다. 19세기 초라는 시간적 배경, 서부개척시대와 식민시대라는 제국주의적 시공간, 두 영화의 숏들을 섞어 놓더라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유사한 숲의 이미지, 1.37:1이라는 화면비. 광활해 보이는 숲의 높이 솟은 나무와 화면을 가득 뒤덮은 덤불 사이에서 쪽잠을 청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좁은 화면비 속에서 어떤 감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퍼스트 카우>의 숲은 두 주인공이 은신하는 공간이었다면, <나이팅게일>의 숲은 두 주인공이 추격을 펼치는 곳이자 생명의 위협에 대비해 항상 긴장해야 하는 곳이며, 더 나아가 클레어가 겪은 고난의 트라우마가 미로처럼 펼쳐지는 공간이다. 때문에 <퍼스트 카우>가 자발적이고 사적인 연대와 우정을 다룬다면 <나이팅게일>은 밑바닥으로 내몰린 아일랜드인 여성과 원주민 남성의 생존에 대한 연대라는 점에서 크게 달라진다. 

 즉 <나이팅게일>은 영국 제국주의의 주요 희생자인 여성과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뜻밖의 연대를 향해 나아간다. 여기엔 통쾌한 복수는 없다. 그런 복수는 클레어와 빌리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다. 더군다나 영화 속에서 가장 통쾌하다고 할 복수는 클레어와 그의 가족을 공격한 이들 중 가장 소극적인 이에게 가해진다. 문명의 탈을 쓴 가부장제적 제국주의는 그것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는 이를 탈락시켜버린다는 것일까?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나이팅게일>은 단순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방식으로 복수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영화는 ‘나이팅게일’의 목소리를 가졌다고 불리는 클레어와, 부족의 거의 유일한 생존자인 빌리가 각자 노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클레어는 영국군 앞에서 부르던 영어 노래 대신 아일랜드어로 된 노래를, 빌리는 부를 수 없었던 부족의 노래를 부른다. 그러고 보니 클레어는 나이팅게일이고 빌리는 망가나(그의 원주민 이름으로 ‘검은 새’라는 뜻)이다. 두 사람은 마침내 자신의 말로 노래한다. 두 사람의 동행은 이 노래를 향한 것이었다. 

 전편 이후 다이애나(갤 가돗)은 정체를 숨기고 고고학자로 살아가고 있다.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서 일하는 그는 이제 막 새로 입사한 바바라(크리스틴 위그)와 친밀해진다. 그러던 중 FBI가 감정을 부탁한 유물들이 들어오고, 그 중엔 소원을 들어주는 대가로 무언가를 가져가는 능력을 지닌 ‘드림스톤’이 섞여 있다. 그 스톤을 노린 사업가 맥스 로드(페드로 파스칼)은 바바라에게 접근한다. 얼떨결에 드림스톤에 소원을 빌어 죽은 스티브(크리스 파인)을 되살린 다이애나는, 드림스톤을 차지한 뒤 자신의 욕망을 분출하는 맥스와 다이애나처럼 되길 욕망하는 바바라에게 맞서게 된다. 코로나 19로 인해 몇 차례 개봉이 연기됐던 <원더우먼 1984>는 제목처럼 1984년을 배경으로 한다. 얼떨결에 MCU 영화가 한 편도 개봉하지 못한 2020년에 DCFU는 <버즈 오브 프레이: 할리 퀸의 황홀한 해방>과 이 영화 두 편을 개봉하게 되었다.

 <원더우먼>은 DCFU의 다른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독특한 위치에 놓여 있다. 다른 영화들을 떠올려보자. <맨 오브 스틸>부터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수어사이드 스쿼드>, <버즈 오브 프레이>는 현실을 비튼 평행우주를(메트로폴리스, 고담), <아쿠아맨>은 신화적 소재를(아틀란티스), <샤잠!>은 슈퍼히어로들이 존재하는 일종의 대체역사를 택했다. 반면 <원더우먼>의 배경은 (물론 신화적 공간인 데미스키라가 등장하지만) 언제나 현실의 역사에 속한 공간이었다. 전편의 배경은 세계 1차대전 당시의 유럽이고, 이번에는 1984년 냉전시기의 세계 곳곳이다. 이러한 기조는 DCFU뿐 아니라 애로우버스(혹은 CW버스)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유독 <원더우먼> 시리즈만이 여기서 벗어나 있다. 전작은 주제적인 측면에서 이를 적절하게 활용했다. 나치가 등장했던 2차대전이 아닌 1차대전을 배경으로 삼으면서 역사적으로 ‘악’으로 판명난 집단에게 단순하게 응징을 가하는 것이 아닌, 언제든지 악해질 수 있는 것이 인간임을 드러내는 방식을 택했다. 물론 이 때문에 영화가 다소 납작해지긴 했지만, ‘No Man’s Land’ 등의 인상적인 장면을 담아내었고 잭 스나이더가 구축한 DCFU 특유의 비주얼과 액션 스타일을 가져오며 나름의 성공을 거뒀다. 다시 말해, <원더우먼> 1편이 현실 역사를 배경으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나갈 당위는 영화 내에서 충분히 설명되었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그렇지 않다. 영화를 보는 내내 왜 배경이 1984년인지 당최 알 수 없었다. 팝컬처가 부흥하고 이미지 소비의 극한을 달리던 1984년 미국의 소비문화를 보여주는 초반부는 얼핏 그 시기가 얼마나 거품으로 가득했는지를, 잔뜩 부풀려진 껍데기와 포장의 시대였는지를 보여준다. 적어도 그 장면들을 볼 때만큼은 그러했다. <기묘한 이야기>의 대성공 이후 쏟아지는 80년대 배경의 영화, 혹은 그 시기의 창작물을 활용하는 일련의 작품들처럼 느껴지지만, <원더우먼 1984>의 초반부는 그 작품들이 묘사하는 80년대의 이미가 팝컬처와 미디어가 과장하고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들을 착취함으로써 얻어지는 이미지들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과장이라 여겨질 정도로 그 당시의 방식대로 쇼핑몰, 패션, 노출이 심한 운동복 등을 재현하고, 그 속에서 스포츠카를 타고 폭주하는 젊은 남성들이나, 길거리의 여성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남성들을 반복해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스티브의 복귀 이후 이 영화가 80년대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특히 (아마도) 석유파동 이후 망한 사업가처럼 보이는 맥스 로드의 존재는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있다는 것과, 냉전시대와 핵무기를 바로 연결 짓는 단순함은 도리어 영화의 배경이 1984년이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를 계속 상기하게끔 한다.

 캐릭터의 서사를 현실 역사와 밀착시켜온 엑스맨 프랜차이즈의 사례를 떠올려보자. 매그니토는 아우슈비츠를 탈출한 유대인이고 울버린은 남북전쟁부터 베트남전까지 참전해온 군인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냉전시기를 관통하며 쿠바 핵전쟁 위기를 비롯한 여러 역사적 사건들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이는 엑스맨 캐릭터의 기원 자체가 서구권의 여러 인종적, 페미니즘적, 퀴어적 민권운동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반면 DCFU의 캐릭터들 대부분 신화적 기원을 갖추고 있다. 신적인 존재에 가까운 외계인이거나, 자본주의 신화가 만들어낸 재벌이라거나, 아니면 아예 신화와 마법 속에서 튀어나온 존재들이다. 때문에 이들은 뉴욕 등의 실제 도시가 아닌 가상의 도시에서 활동한다. 어쩌면 <원더우먼 1984>가 실패한 것은 여기서 출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패티 젠킨스는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80년대 영화처럼 촬영했다고 이야기했다. 여러 액션 시퀀스에서 CG대신 와이어를 활용하였고, 빌런을 묘사하는 방식 또한 80년대 SF 액션 영화의 것과 유사하게 연출되었다. 맥스 로드가 전세계인을 향해 생방송을 진행하는 시퀀스에서 푸른 불빛 안에 놓인 얼굴 클로즈업은 그 당시의 SF영화들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것이 1984년을 영화가 활용하는 것에 대한 당위를 제공하진 않는다. TV 시리즈 <원더우먼>의 린다 카터가 카메오출연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TV 시리즈처럼 냉전시기라는 배경을 적극적으로 끌어오지도 않는다. 진실을 강조하고 탐욕을 멈춰야 한다는 다소 뻔한 교훈적 메시지는 직설적으로, 그것도 대부분 연설조의 대사로만 구성되어 이렇다할 감흥을 주지 못하며, 미디어가 부풀린 이미지의 거품에 대한 이야기도 진부하게만 언급된다. 이 과정에서 80년대는 다시 한번 껍데기로만 존재한다. 예고편에 등장한 뉴 오더의 “Blue Monday '88 Dub”은 어디로 갔는가? 1984년이 배경이기에 1986년에 발매된 노래는 예고편에서만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라면, <원더우먼 1984> 또한 80년대의 껍데기가 남긴 부스러기만을 주워담는 또 하나의 영화일 뿐이다. 

 

p.s. 여담이지만 DC의 여러 실사화 프로젝트 중 가장 성공한 것은 애로우버스라 생각한다. MCU <스파이더맨 3>에 이전 스파이더맨들이 출연한다는 루머가 도는 와중에 2019년 말 공개된 ‘크라이시스 온 인피닛 어스’ 크로스오버는 이를 썩 훌륭하게 만들어냈다. <슈퍼걸>에서 대통령으로 출연하던 린다 카터가 원더우먼으로 출연하는 것이 불발되어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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