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카테고리의 글 목록 (6 Page) :: 영화 보는 영알못

 어텀(시드니 플래너건)은 펜실베니아 시골 지역에 사는 가수 지망생이다. 그는 학교를 다니며 사촌 스카일라(탈리아 라이더)와 함께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어느 날, 그는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자신이 임신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펜실베니아는 임신중절이 불법이다. 집 인근의 클리닉에서는 임신중절에 대한 도움 대신 낙태 반대 비디오를 보여줄 뿐이다. 그는 모아둔 돈을 털어 스카일라와 함께 의학적 도움을 구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난다. <전혀 아니다, 별로 아니다, 가끔 그렇다, 항상 그렇다>라는 긴 제목(원제는 <Never, Rarely, Sometimes, Always>)을 지닌 이 영화는 어텀과 스카일라의 짧은 여정을 담아낸다. 임신중절에 대해 어떤 운동을 보여준다거나, 두 사람의 여정이 대단한 모험을 동반한다든가, 어텀이 가족과 대치하고 도망간다거나, 임신중절을 위한 거창한 계획을 세운다든가 하는 등의 큰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다. 이 영화는 <시티즌 루스>와 같은 영화가 아니다. 두 사람은 그저 임신중절이 합법인 도시에 가서 임신중절 수술을 받고 돌아올 뿐이다.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영화의 제목은 설문조사의 응답 항목이다. 뉴욕의 임신중절 클리닉을 찾은 어텀은 수술을 받기 전 구두로 진행되는 설문조사 과정을 거친다. 이는 17살 미성년자인 어텀의 임신이 폭력에 의한 것인지, 혹은 다른 사연에 의한 것인지 등을 조사한다. 다분히 사무적이지만 점점 격해지는 어텀의 감정에 따라 천천히 이야기해도 된다고 말하는 상담가의 말은 어텀이 펜실베니아에서 듣지 못했던 종류의 말이다. 이는 그와 동행한 스카일라 또한 해내지 못한 말이기도 하다. 이들에게 그러한 종류의 말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전혀 아니다, 별로 아니다, 가끔 그렇다, 항상 그렇다”라는 지극히 객관적이고 사무적인 단어들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암컷 반려견을 ‘Bitch’라 부르는 가부장의 언어로 가득한 펜실베니아에서 접할 수 없었던 종류의 언어다. 때문에 뉴욕을 찍고 다시금 집으로 돌아오는 어텀의 여정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자신의 상황을 헤아려 줄 최소한의 언어와 만나는 여정이다. 

 영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만약 이 여정이 어텀의 이야기만으로 끝나는 것이었다면 스카일라는 등장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스카일라는 다소 소심한 어텀과 다르다. 그가 마트 점장을 상대하는 모습은 소위 ‘사회생활’이라는 이름으로 삭제되는 직장 내 성희롱을 견뎌내는 모습이다. 그는 그것에 익숙해져 있으며, 필요할 때는 그것을 이용하기도 한다. 물론 스카일라가 그것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한다고 하여 그에게 가해지는 성착취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어텀이 뉴욕으로 떠날 용기와 지지에 스카일라가 필요했듯이, 스카일라 또한 어텀의 손길과 연대가 필요한 존재다. 버스를 타고 뉴욕에 도착한 두 사람은 재스퍼라는 남자를 만난다. 두 사람보다 약간 나이가 많아 보이는 그는 두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등의 호의를 베푼 대가로 스카일라의 전화번호를 얻는다. 여정의 마지막, 펜실베니아로 돌아가야 하는 두 사람은 어텀의 수술로 인해 돈이 떨어진 상황이다. 스카일라는 어쩔 수 없이 재스퍼에게 도움을 청하고, 그는 두 사람과 함께 볼링을 치고 가라오케에 들러 시간을 보내다 어텀이 없는 사이 스카일라에게 키스한다. 두 사람을 찾아 버스터미널을 헤매던 어텀은 기둥 뒤에서 키스하는 스카일라의 손을 잡는다. 어텀의 여정에 스카일라가 동행했듯, 어텀은 스카일라에게 손을 내민다. 자신에게 필요한 언어와 의료적 조치를 위해 떠난 어텀의 여정은, 서로가 서로에게 손을 내어줄 수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펜실베니아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밖에서 들어오는 햇볕을 받으며 한층 불안이 가신 어텀의 표정에서 환하게 드러난다.

*스포일러 포함

 

 쇠락해가는 야쿠자 조직의 멤버 카세(소메타니 쇼타)는 부패경찰 오토모(오모리 나오)와 손잡고 마약을 빼돌릴 계획을 세운다. 그 계획이란 조직의 마약 운반책이 감금하고 있는 모니카(코니시 사쿠라코)가 마약을 훔쳐 도망간 것으로 위장하는 것. 한편 권투선수인 레오(쿠보타 마사타카)는 시합에서 다운된 이후 진행된 병원 검사에서 뇌종양 판정을 받고 밤거리를 방황하고 있다. 레오는 우연히 오토모에게 쫓기던 모니카를 구해주고 함께 도주하게 되며, 카세가 세운 계획에 휘말리게 된다. 끔찍했던 <테라포마스>를 포함해 <악의 교전>, <신이 말하는 대로>, <죠죠의 기묘한 모험> 등 원작 기반의 영화를 꾸준히 연출해온 미이케 다카시의 신작 <퍼스트 러브>는 그가 <도쿄 아포칼립스> 이후 5년 만에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제작한 작품이다. <도쿄 아포칼립스> 이후로 오랜만에 야쿠자물을 내놓았다는 것 또한 흥미로운 지점이다.

 사실 미이케 다카시의 최근작들은 거의 보질 않았다. <악의 교전>과 <신이 말하는 대로> 정도만 챙겨봤는데, 두 작품 모두 원작 소설/만화보다 못한 작품이고, 전형적인 양산형 일본영화에 가까웠기 때문에 꽤나 실망했었다. 물론 2010년대 이전의 미이케 다카시도 <크로우즈 제로>나 <용과 같이>, <착신아리>처럼 만화나 게임, 소설 등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을 꾸준히 연출해왔고, 김지운의 <조용한 가족>을 리메이크한 <카타쿠리가의 행복> 같은 작품도 있었다. 다만 앞선 영화들은 V시네마로 데뷔한 감독의 취향에 맞춰져 있는, 일본 B급 영화들의 계보를 충실히 이어가는 작품들에 대부분이었다. <이치 더 킬러>나 <오디션> 등의 대표작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다만 2010년대 들어 그가 연출한 원작 기반 영화들은 조악한 CG와 특수분장 등을 통해 원작(주로 만화나 아니메)을 실사로 옮겨왔을 뿐, 과거의 작품들과 같은 재미를 주진 못했다. 

 미이케 다카시의 커리어에 대해서 좀 길게 이야기한 이유는 <퍼스트 러브>가 미이케 다카시의 필모그래피라는 맥락 안에서 나름대로 흥미로운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퍼스트 러브>는 <후도>, <신주쿠 흑사회>, <풀 메탈 야쿠자> 등 그가 V시네마 시절이나 데뷔 초에 연출해온 장르 혼종적 B급 야쿠자물을 이어가는 작품이다. 이는 야쿠자물이 몰락을 맞이했음에도 그것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아웃레이지>를 3편까지 만들어낸 기타노 다케시의 근작들과도 구분된다. <퍼스트 러브>는 고레에다 히로카즈부터 소노 시온, 구로사와 기요시, 그리고 미이케 다카시 본인까지 꾸준히 언급하고 있는 일본영화의 몰락에 대한 나름의 (뒤늦은) 답변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고레에다는 프랑스와 한국에서 영화를 제작하고, 소노 시온은 아마존 프라임을 비롯한 미국의 자본으로, 기요시는 NHK와의 합작으로, 즉 일본의 ‘거장’이라 불릴 만한 최근의 감독들이 모두 일본의 3대 스튜디오(토호, 닛카츠, 토에이)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그런 와중에 미이케 다카시는 필름 그레인이 자글자글한 토에이 파도 로고와 함께 시작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 내내 언급되는 것은 무력으로 세력을 유지하는 야쿠자 조직의 문제다. 카세가 몸 담고 있는 조직은 스스로가 몰락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 다른 조직들이 국외로 진출하여 살길을 찾거나, 중국 조직이 야쿠자의 빈자리를 차지하는 상황이 그려진다. 극에 등장하는 카세의 조직 또한, 상부조직이 있다고 언급되긴 하지만 6~7명 정도가 조직원의 전부다. 극 후반부 조직의 보스 곤노(우치노 세이요)가 레오에게 “야쿠자가 되면 바로 넘버3가 될 수 있어”라 말하는 것은 정말로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카세의 계획은 야쿠자로써의 생존을 위한 것이라기보단, 조직을 등쳐먹고 자신 혼자 살겠다는 것에 가깝다. 중국 조직의 멤버가 “야쿠자들이 맹자의 ‘인의’를 강조하는 것을 보고 왔다가 실망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상황을 이상한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카세의 계획은 레오의 갑작스러운 개입으로 실패한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굳이 레오의 개입 없이도 카세의 계획은 높은 확률로 실패했을 가능성이 크다. 마약과 트라우마로 인한 모니카의 환각, 주리(베키)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움직임, 카세의 바보 같은 실수들 등이 수차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끝은 당연하게도 파국이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퍼스트 러브>의 이야기는 카세가 속한 야쿠자 조직의 (완전한) 몰락 과정이자, 이들의 대척점에 놓인 중국 조직의 몰락이며, 야쿠자라는 폭력조직이 더 이상 이어질 수 없는 시대적 조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상징적 아버지들이 죽는 것들로 이어진다. 모니카는 자신을 쫓아오던 착취자 아버지의 환영에 대고 그것의 고간을 발로 차 버리며, 두 조직의 보스는 서로의 몸에 칼을 꽂아 넣어 죽음을 맞이한다. 그중에서 곤노가 죽음을 맞는 방식이 독특하다. 모든 것이 끝나고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경찰에 쫓기던 그는 레오와 모니카를 내려주고 차를 운전하다 죽음을 맞이한다. 그는 죽기 전 “야쿠자에게 아침해는 어울리지 않아”라고 말한다. 밤새 혈투를 벌이다 온몸이 피를 바르고 뜨는 해를 바라보며 죽음을 맞이하는 그의 모습은, 언뜻 뱀파이어의 죽음을 묘사하는 것과 유사하다. 뱀파이어는 어떤 괴물인가? 그것은 영속적이지만 햇빛에 의해 죽을 수 있는 존재이고, 목을 물어 후계자를 만들어내는 세습 과정을 거치며, 이곳저곳을 방랑하기보단 (물론 그렇게 묘사된 뱀파이어 캐릭터도 있지만) 한 곳에 정착하여 그 일대를 자신의 영토로 삼는 존재다. 즉 뱀파이어는 귀족의 속성을 지닌다. 그것은 손가락을 자르고, 세습 과정을 거치고, 활동영역을 지니는 야쿠자의 생태와 유사하다. 

그 생태계를 최종적으로 교란하는 레오와 모니카의 존재는 뱀파이어의 존재적 지위와 반대에 위치해 있다. 우선 이들은 집 없이 떠돌며 살아간다. 모니카는 아버지가 그를 팔아버렸으며, 감금상태에 놓여 있다. 레오는 집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 숏에서나 등장한다. 레오가 모니카를 만나기 전까지 관객은 방랑하는 그를 볼 수 있을 뿐이다. 더불어 두 사람은 병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다. 모니카는 마약중독과 트라우마로 인한 환각을, 레오는 뇌종양으로 인한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갈 곳 없이 본능적으로 떠도는 두 사람의 모습은 얼핏 의식 있는 좀비와 같이 보인다. 둘 모두는 영화의 마지막, 즉 뱀파이어적 존재인 야쿠자들의 괴멸 이후에 이를 극복한다. 아니, 뱀파이어적 존재의 괴멸 과정 자체가 이들이 지닌 질병의 극복 과정이다. 

 <퍼스트 러브>가 그려내는 인물 구성을 이렇게 재편하고 바라볼 때, 카세는 뱀파이어적 존재의 몰락을 가져온 하나의 극단이자, 그 스스로 몰락을 체현하고 있는 인물이다. 모든 계획이 들통나고 야쿠자 및 중국 조직 모두에게서 도주하던 그는 총상을 입는데, 그 과정에서 주머니에 숨겨둔 필로폰이 상처로 들어가게 된다. 강렬한 마약 흡입 상태가 된 카세는 한 상점 안에서 벌어지는 혈투 속에서 총격이나 팔이 잘리는 상황에서 어떤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 주리에 의해 목이 잘린 그의 모습은 오토모의 대사처럼 어딘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즉 폭력에 무뎌진 채 야쿠자들의 의리나 인의를 이야기하는 일련의 영화와의 단절을 카세의 죽음으로 드러낸다. 특히 특정한 상황에서만 튀어나오는 카세의 과장된 야쿠자 말투는 그 자체로 웃음을 유발하는 요소임과 동시에 몰락한 야쿠자들을 놀리는 블랙코미디로 기능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야쿠자들의 뱀파이어적 속성과 일본영화의 현재의 연결을 가능케 한다. 일본 영화들은 원작(만화, 아니메, 소설, 게임)의 실사화라는 미명 하에 서사의 세습을 반복하며 고착화되고 있다. 고레에다의 말처럼 “갈라파고스화 되고 있”으며, 미이케 다카시 스스로도 다년간 줄기차게 실사화 영화들을 연출하며 염증을 얻었을 법한 상황이다. 때문에 “국산차를 믿어봐”라며 상가 주차장에서 도로 바닥으로 차를 몰도록 시키는 곤노의 대사와, (아마도 예산 문제 때문이겠지만) 애니메이션으로 대체된 국산차의 비행 장면은 영화를 믿지 못한 채 상품화에 매진하는 상황을 다소 당황스럽게 드러낸다. 이것이 당황스러운 이유는 장면 연출 자체가 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용 감독으로서 수많은 상품을 만들어낸 미이케 다카시의 영화에서 이러한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소노 시온이 뱀파이어를 전면에 내세우며 <도쿄 뱀파이어 호텔>이라는 거대한 폐허를 만들어내고 있을 때,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유럽과 일본이 아닌 동아시아 곳곳을 떠돌고 있을 때, 미이케 다카시는 자신의 자리에 남아 무언가 해볼 여력이 아직은 남아 있음을 소심하게나마 드러내고 있다.

 엘리너 루스벨트의 이야기를 뮤지컬로 만들어 성공하길 바랬으나 평단의 혹평만을 듣고 좌절한 브로드웨이 스타 디디 앨런(메릴 스트립)과 베리 글릭먼(제임스 코든)은 스스로를 홍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사회적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들을 돕기로 한다. 뮤지컬 [시카고]에서 매번 코러스만 하는 배우 앤지(니콜 키드먼)가 트위터에서 인디애나 주의 시골 마을에 사는 레즈비언 소녀 에마(조 엘런 펠먼)의 사연을 발견하고, 왕년의 시트콤 스타 트렌트(앤드류 라넬스)까지 합세해 인디애나로 향한다. 에마는 자신의 여자친구 알리사(아리나아 데보스)와 함께 프롬에 가는 것이 꿈이었으나, 교장 톰(키건 마이클 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는 프롬에 올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프롬 자체를 취소해버린 그린 부인(케리 워싱턴)의 학부모회에 의해 가로막힌다. 학부모회, 학생회, 에마와 교장 톰이 참석한 회의장에 난입한 디디의 일행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뉴욕 셀럽인 자신들이 이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글리>부터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포즈>, <래치드>, <더 폴리티션> 등 수많은 TV쇼의 쇼러너로 활약한 라이언 머피의 연출작 <더 프롬>은 매끈하고 안전한 상업적 감각 속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설파하는 뮤지컬 영화다. 커밍아웃한 게이인 라이언 머피의 고향인 인디애나를 배경으로 삼은 이 영화는 라이언 머피 자신의 고향과 유년시절에 메시지를 보내는 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도 자신을 투영한 듯한 게이 캐릭터 베리와 게이 아이콘 메릴 스트립, 그리고 니콜 키드먼과 키건 마이클 키, 케리 워싱턴과 같은 스타들을 대동한 채 뉴욕과 할리우드에서 한없이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 올린 뒤 금의환향하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 초반 네 명의 브로드웨이 배우들은 뉴욕의 셀럽인 자신들의 긍정적인 영향력을 노래하며 인디애나 촌놈들에게 정치적 올바름을 알려주고 촌놈들 사이에 둘러 쌓인 소녀를 위험에서 구해내겠다고 말한다. 나는 지극히 시혜적인 시각에서 시작한 이 영화가 후반부에 다가갈수록 그러한 입장을 내려놓을 것이라 기대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이루어진다. 베리는 고향을 마주하고 디디는 스타로서의 자신을 일정 부분 내려놓으며, 트렌트는 새로운 길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는 나르시시스트라 비판받았던 이들의 시혜적인 태도를 뒤바꾸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더욱 견고한 나르시시스트가 된다. 이들의 난입은 어쨌든 성공으로 향했으며, 자신의 방식을 찾고자 했던 에마의 길은 이들의 자기 계발을 돕는 밑거름이 될 뿐이다. 이들의 활약은 화려해 보이지만 무색무취의 영화 속 뮤지컬 시퀀스들과 다른 바 없다.

 

 이러한 방향은 메릴 스트립과 같은 대형 스타이자 아이콘을 활용하기 위한 것에 그칠 뿐이다. 브로드웨이 스타와 인디애나 소도시에 레즈비언 소녀 사이의 유대는 뻔하고 도식적이며, 이들의 난입은 에마가 톰과 같은 지지자들의 도움과 노력을 통해 스스로 얻어낼 수 있었던 성취를 약탈한다. 차라리 브로드웨이 스타들이 등장하는 파트가 모조리 빠진, 온전히 에마의 이야기로 진행되는 뮤지컬 영화였다면 더욱 깔끔하고 집중력 있는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131분의 러닝타임 내내 에마는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디디와 베리는 주인공의 위치에서 내려올 것이라 선언하지만, 영화의 마지막까지 주인공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그들이다. 때문에 <더 프롬>은 아이콘으로서 배우들이 지닌 이미지를 안전하게 끌어와 설교하고 훈계하는, 공익적인 이야기를 가장 비-공익적인 방식으로 전달하는 재수 없는 영화가 되었다.

 

 영화의 시작은 이렇다. ‘내언니전지현’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박윤진 감독은 넥슨의 클래식 RPG 게임 [일랜시아]를 10여 년 동안 하고 있다. 1999년 서비스를 시작한 [일랜시아]는 이제 운영진마저 떠나버린 망겜이 되었다. 박윤진 감독은 자신처럼 오랜 시간 [일랜시아]를 플레이하는 길드원과 유저들에게, 운영진도 없고 각종 매크로와 버그가 판치는, 영화 한 편의 파일보다 용량이 작은 이 게임을 왜 하는지 묻기 시작한다. 이는 감독이 자신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인디다큐페스티발을 시작으로 여러 영화제들에서 공개된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이러한 영화의 출발점을 확실하게 담고 있었다. 우리는 왜 아직도 [일랜시아]를 붙잡고 있는가? 현실이 너무 힘들어서? 가상공간에서 모종의 유토피아를 발견했기 때문에? 게임 안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어서? 박윤진 감독이 인터뷰한 유저들의 대답은 이를 반쯤 반박하고 반쯤 긍정한다. [일랜시아]가 만들어낸 공간은 현실의 도피처임과 동시에 또 다른 현실이고, 아름다운 유토피아의 단면을 만난 것만 같지만 되려 그런 것은 없음을 어느 순간 드러내고, 누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선 유저들이 만들어낸 비공식적 루트를 철저하게 따라가야 하는, 그런 모순의 공간이다.

 

 러닝타임 71분의 영화제 버전보다 15분가량의 분량이 추가된 개봉 버전은 약간 다른 길을 간다. 전자가 위의 질문을 충실하게 따라간다면, [일랜시아]를 ‘망겜’이라 못 박는 게임 유튜버들의 영상으로 시작한 개봉 버전은 영화의 홍보 카피처럼 “16년 차 고인물, 망겜을 구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다”라는 내러티브에 조금 더 무게가 실려 있다. 그렇다고 영화 자체가 망가졌고 실망스럽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의 강조점이 조금 바뀌었다. 영화제 버전의 경우 [일랜시아]라는 게임 속에서 사람들이 새롭게 만들어낸 규칙, 즉 매크로를 통해 [일랜시아]의 규칙을 어기는 것을 새로운 규칙으로 삼는 상황에 집중한다. 영화제 버전 후반부에 등장하는 ‘팅버그’ 사건은 게임의 규칙을 과하게 어긴 누군가의 등장 때문에 벌어진 것이며, 넥슨의 개입으로 일단락된 사건은 [일랜시아]에 남은 이들의 규칙이 모두가 공평하게 적당히 [일랜시아]의 규칙을 어긴다는 것임을 확실히 알려준다. 그리고 이러한 규칙을 공유하는 이들, 더 이상 매크로 없이는 플레이할 수 없는 게임을 붙잡고 그 시간을 함께 견뎌내는 이들은 그 안에서 독특한 자생적 커뮤니티를 구성하고 있다. 이들은 힘을 합쳐 규칙을 세우고 무엇인가를 해내기 위해 모인, 전통적인 의미의 공동체가 아니다. 이들의 유대감은 매크로가 돌아가는 시간에 대한 감각을 공유하고, 정작 매크로를 돌리지 않는 시간에는 어딘가 무의미한 시간(가령 채팅으로 노래를 부른다던가, 게임 내 절벽에서 자살한다던가)을 함께 보냄으로써 발생한다. 이는 온라인 게임, 특히 MMORPG라는 장르가 제공할 것이라 기대되는 유토피아적 공동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즉, 이들은 소위 ‘현실’이라는 곳과 [일랜시아]라는 가상공간 사이를 오가며 일종의 ‘죽은 시간’을 공유하고, 그럼으로써 발생된 유대감을 유지하기 위해 [일랜시아]에 접속한다. 내언니전지현의 길드원들이 엠티를 떠나 촬영한 사진과 게임 내에서 모여 찍은 사진이 오버랩되는 장면은, 이들이 어느 한쪽의 세계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두 세계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개봉 버전에는 이러한 공동체에 대한 언급보단 ‘디지털 노스탤지어’라 부를 수 있는 것에 더욱 집중한다. 새로 추가된 것은 영화제에서의 상영과정 및 넥슨에서 주최한 유저간담회, 그리고 [일랜시아]의 개발자 ‘아레수’와의 만남이다. 한국 게임산업의 초기부터 활동하던 개발자인 그는 [바람의 나라]를 플레이하며 만난 이들과 짧은 유대감을 나눈 일화를 공개한다. 그러고 보니 <내언니전지현과 나>를 관람한 이들의 감상평은 대부분 추억과 연결되어 있다. 소위 ‘밀레니얼 세대’라 불리는 90년대 생들에게 [일랜시아]나 [바람의 나라]를 비롯한 여러 온라인 게임은 추억의 공간이다. 길드원들이 엠티를 위해 찾은 펜션의 직원이 “[일랜시아]가 아직도 있어요?”라고 말하며 반갑고 신기하다는 듯이 게임 내 몇몇 요소를 길드원들과 공유하는 모습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메이플스토리]와 같은 게임이 여전히 인기를 유지하고 있지만, 게임의 과거 모습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지점에서 [일랜시아]는 게임을 플레이했었던 이들에게 존재를 잊고 있었던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오랜만에 방문한 것만 같은 느낌을 제공한다. 

 

 이런 노스탤지어는 최근 몇 년간 공개된 여러 영화들에서도 드러난다. 자신의 이야기를 기술하기 위해 홈비디오 등을 꺼내오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버블 패밀리>, <94’ 비디오앨범>, <ㅅㄹ, ㅅㄹ, ㅅㅇ>, 혹은 어떤 기록물을 발견함으로써 자신의 과거를 톺아보는 <8mm>와 같은 작품들. 다만 이러한 영화들은 비디오 테이프와 같은 특정한 기록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반면 <내언니전지현과 나>와 같은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일랜시아]라는 특정한 기표가 가져오는 노스탤지어의 연상작용이다. 이 영화와 관련된 인터뷰 영상이나 예고편 등을 유튜브에서 찾아보면, 대부분의 댓글은 각자의 추억을 늘어놓고 있다. <내언니전지현과 나>의 개봉 버전은 이 부분에 보다 집중한다. 동세대 관객들에겐 자신의 추억을 꺼내어 보길 요청하고, 위 세대 관객들에겐 우리에게 이러한 추억이 존재하며 그것을 간직하고 싶다고 말한다. 때문에 새로 추가된 영화의 후반부는 우리의 노스탤지어를 앗아가지 말아 달라는 부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이를 부정적으로 보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게임 내에서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모종의 유토피아로 여길 수 있는 여지를 많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아쉽게 느껴진다. 영화제 버전에서 내언니전지현의 동료 유저 ‘하루히로’가 아이템 사기를 당하고 게임을 떠나기 전 작별인사를 하는 장면이나, 공무원 시험 준비를 위해 로그아웃하는 레렐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이곳이 유토피아일 수 없음을 두 장면은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 두 장면은 개봉 버전에서도 그대로 등장하지만, [일랜시아]라는 망겜에 사람들이 왜 남아 있는지에 집중하기보단, 그러한 망겜이 지닌 추억과 그것을 보존하기 위한 여정으로 영화가 기능하기에 두 사람의 사라짐은 그저 게임을 떠난 누군가의 등장 정도로만 일축된다. 개봉 버전이 지닌 나름의 장점, 가령 [일랜시아]를 비롯한 온라인 MMORPG 게임에 무지한 사람이 보기에도 부담이 없고 친절해졌으며 확실한 내러티브를 지녔다는 점이 있지만, 영화 이후의 수많은 고민을 던져준다는 매력이 다소 사라졌다는 점에서 아쉽다. 

 

 그럼에도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올해 공개된 여러 한국영화 중에서 중요한 위치에 놓일 것이다. 이는 단순히 국내 최초로 게이머가 연출 및 제작한 다큐멘터리가 극장에 개봉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레디 플레이어 원>과 같은 세계는 다른 방식으로 도래했고,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그것을 흥미롭게 짚어보는 영화 중 하나다. [일랜시아]는 도피처가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사회실험이 진행되는 공간이며, 인터넷이 민주주의적 유토피아가 될 것이라 예언했던 이들이 말이 틀렸음을 다시 한번 증명하는 것이며, 그럼에도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가 등장하는 곳이며, 현실과 가상공간을 평생 오가며 살아야 할 첫 세대의 경험담이다. 그것만으로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존재감 없는 왕따 고등학생 밀리(캐서린 뉴튼)의 동네에 전설처럼 전해 내려 오던 연쇄살인마 블리스필드 도살자(빈스 본)가 나타난다. 동네에 하나뿐인 고등학교의 홈커밍 파티가 예정된 13일의 금요일, 도살자가 몇몇 고등학생을 살해하며 동네엔 위기감이 맴돈다. 그러던 중 도살자가 집으로 돌아가던 밀리를 공격하고, 도살자가 들고 있던 고대의 단검의 힘으로 둘의 몸이 바뀐다. 도살자의 몸을 한 밀리는 자신의 유일한 두 친구 조슈아(미샤 오쉐로비치), 나일라(셀레스트 오코너)를 설득해 자신의 몸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는 도살자를 찾아 몸을 되찾고자 한다.

 <해피 데스데이> 연작으로 나름의 상업적 성공을 거뒀던 크리스토퍼 랭던이 블룸하우스와 함께 내놓은 신작 <프리키 데스데이>는 그의 전작들에서 볼 수 있었던 재기 발랄함이 살아 있는 작품이다. 도살자의 가면을 포함해 도살자와 밀리가 처음 대면하던 장면은 존 카펜터의 <할로윈>을, 13일의 금요일을 향하 카운트되는 자막은 대놓고 <13일의 금요일>의 제목 폰트를 차용한다. 더 나아가 <스크림>, <죽여줘! 제니퍼>, 2018년 버전의 <할로윈> 등의 영향이 영화 곳곳에서 드러난다. 다시 말해 <프리키 데스데이>는 <할로윈>의 마이클 마이어스와 <13일의 금요일>의 제이슨 부하스를 적당히 뒤섞어 놓은 살인마와 몸이 뒤바뀌는, 그러면서 여러 슬래셔 장르의 대표적인 장면들을 차용하는 작품이다. 여기서 주인공의 두 친구를 백인 게이 남성과 흑인 여성으로 설정해, 기존 슬레셔 영화에서 초반에 사망할 법한 인물들로 설정하고 그것을 대사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슬래셔 장르의 패러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쉽게도 영화의 미덕은 이 정도에서 그친다. 블룸하우스의 2018년 <할로윈>이 슬래셔 장르의 고전을 지금에 걸맞게 여성중심적 이야기로 리부트 하려다 결국 장르의 관습 안에서 죽어가는 인물들을 착취하는 영화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프리키 데스데이> 또한 표면적으로는 슬래셔라는 오래된 하위장르의 성격을 패러디함으로써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할로윈>이 시도했던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팝콘무비로서의 매력은 있지만, <할로윈>과 마찬가지로 현재에 걸맞은 방식의 슬래셔를 선보이려다 결국 장르의 전통으로 회귀하거나 새롭게 주인공으로 내세운 캐릭터(성소수자, 여성, 유색인종)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그것들 대부분은 각 캐릭터가 대표하는 것들의 긍정적인 스테레오 타입에 불과할 뿐이며, 코미디의 소재로 활용되기만 한다. 물론 일탈하며 가족을 등한시하던 여성 주인공을 징벌하듯 살해당함을 반복하게 한 <해피 데스데이>나 이도 저도 되지 못한 <해피 데스데이 2>보다는 한발 나아간다. 육체적 강함이 아닌 다른 방식의 강함을 이야기하고, 그것이 장르적 쾌감으로 발현되는 엔딩은 크리스토퍼 랭던의 두 전작이나 <할로윈>보다는 조금이라도 괜찮은 지점이다. 다만 그곳까지 나아감에 있어 이야기에 군더더기가 많고, 결국 백인 중산층 여성이 아닌 다른 정체성의 소수자들은 주변적 존재로서 기능할 뿐이라는 점에서 아쉽기만 하다. 

'영화 리뷰 > 2020'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 프롬> 라이언 머피 2020  (0) 2020.12.05
<내언니전지현과 나> 박윤진 2020  (1) 2020.12.04
<애비규환> 최하나 2020  (0) 2020.11.18
<내가 죽던 날> 박지완 2020  (0) 2020.11.15
<웰컴 투 X-월드> 한태의 2019  (0) 2020.11.13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