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카테고리의 글 목록 (3 Page) :: 영화 보는 영알못

  캐시(캐리 멀리건)는 7년 전 의대를 중퇴하고 카페에서 일하고 있다.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 니나가 그곳에서 비극적인 사건을 겪었기 때문이다. 캐시는 주말마다 클럽을 찾아 여성들을 성적인 먹잇감으로 여기는 남자들을 사냥한다. 그러던 중 캐시는 우연히 자신이 일하는 카페를 찾은 의대 동창 라이언(보 번햄)을 만난다. 그는 라이언을 통해 7년 전 사건의 당사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게 된다. 캐시는 오랜 시간 계획해온 친구의 복수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의대 동창인 매디슨(알리슨 브리), 의대 학과장과 당시 사건 담당 변호사, 가해자인 알(크리스 로웰) 찾아간다. <프라미싱 영 우먼>은 <킬링 이브>의 각본과 제작을 맡았으며 <더 크라운> 등에서 배우로도 활약한 에머랄드 펜넬의 첫 장편영화 연출작이다. 영화의 줄거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미투 운동 이후에도 만연한 여성에 대한 성적 물화와 2차 가해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캐시는 독특한 캐릭터다. 사건 이후 친구를 보살피기 위해 함께 대학을 중퇴한 그는 친구의 죽음 이후 그를 대신해 복수를 계획하고 실행한다.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남자 사냥’은 그것의 예행연습인 것처럼 등장한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영화의 메시지는 전달된다. 캐시의 사냥 대상이 된 남성들은 자신이 하룻밤을 함께 보내려던 여성의 직업도, 사는 곳도, 취미도, 심지어 이름도 모른다. 그러한 남성들의 입장에서 상대 여성은 대화 상대가 아니라 단순히 성적인 대상일 뿐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착한 사람’이라 칭하지만,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캐시에게 접근하는 순간부터 그들이 착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영화는 캐시의 ‘남자 사냥’을 통해 메시지의 구조를 만들어내고, 라이언의 등장과 함께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간다.     


 캐시의 복수 대상이 되는 네 사람은 사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충분히 기억하고 있지만, 그것을 다른 기억으로 덮어둔 채 살아간다. 이들의 변명은 이러하다. 그때는 어렸으니까, 이미 7년 전의 이야기니까, 매주 그러한 사건이 벌어지기 때문에, 가해자는 창창한 미래를 가질 사람이기 때문에. 이들은 사건의 피해자인 니나 또한 어렸으며, 창창한 미래를 가진 청년이었음을, 그리고 니나 및 캐시가 오롯이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7년의 시간을 빼앗겼음을 망각한다. 그리고 그들 앞에 나타난 캐시의 말 몇 마디에 앞서 언급했던 변명들을 늘어놓는다. 참회 비슷한 것을 수행하는 이는 니나의 사건과 유사한 수많은 사건을 담당했던 변호사가 (아마도 자신의 신변과 관련한 이유 때문에) 캐시의 손을 부여잡고 용서를 구하는 것뿐이다. 영화는 그렇게 직접적인 가해자 혹은 2차 가해자인 자신의 과거를 여러 이유를 들어 정당화하고, 용서를 구하는 대신 자신은 그렇지 않다며 변명만을 늘어놓는 이들을 관객과 대면시킨다. 영화는 그들의 한심함을,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되돌아올 그들의 범죄를 드러낸다. 미투 운동이 증명했든, 그들의 범죄는 비록 오랜 시차를 두고 있더라도 되돌아온다는 것을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가 보여준다.     


 다만 영화가 복수를 보여주는 과정이 다소 손쉽게, 그리고 낮은 밀도로 진행된다는 점이 아쉽다. 캐시가 벌이는 복수의 과정은 대부분의 경우 짧은 대화 장면으로 마무리되며, 그 안에서 드러나는 맥락은 풍부할지언정 거칠게 끝맺음된다는 인상이 강하다. 영화에 뜬금없이 자막을 집어넣는 방식 대신 에피소드로 이야기를 세분화하여 각 이야기의 밀도를 높일 수 있는 TV시리즈에 조금 더 적합한 구성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영화 후반부 등장하는 장면은 여성 복수극 서사의 전통적인 결함, 즉 여성의 복수를 보여주기 위해 피해를 입는 여성을 지나치게 길게 보여주는 것을 피해 가지 못한다. 롱테이크가 많지 않은 영화 내에서 몇 안 되는 롱테이크가 그러한 장면에 등장했을 때, 그것은 의도와 상관없이 낡은 방식으로 느껴질 뿐이다.     

 희주(김시은)는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었다. 그는 결혼과 남편의 죽음으로 5년 동안 떠나 있던 공장에 복직한다. 같은 공장 사내식당에서 일하는 영남(염혜란)의 남편은 교통사고로 2년째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 희주의 남편과 영남의 남편은 같은 교통사고를 당했다. 우연히 영남을 마주친 희주는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그러는 와중에 영남의 딸 은영(박지후)이 희주의 주변을 떠돈다. 2020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염혜란 배우에게 배우상을 안긴 <빛과 철>은 두 남편이 휘말린 교통사고를 둘러싸고 당시의 진실 파헤치려는 희주와 그것을 더는 언급하지 않으려는 영남이 부딪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리고 은영을 비롯해 회사 동료, 희주의 친오빠, 사건 담당 경찰 등이 교통사고에 대해 알면서도 모르는 척, 혹은 모르면서 아는 척을 하며 두 주인공의 주변을 맴돈다.    

 영화가 시작하면 카메라는 어두운 시골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 조수석의 시점을 보여준다. 어두운 도로 위에 교통사고를 당해 널브러진 두 대의 차가 있다. 교통사고 직후의 순간을 보여준 영화는 바로 공장으로 돌아오는 희주의 시점으로 넘어간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 이후부터 영화는 교통사고 시점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갑자기 2년 뒤의 시간으로 넘어가 관객에게도 희주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당시의 진실에 대한 이야기로 돌입한다. 그리고 영화의 끝에 가서도 당시의 진실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교통사고를 둘러싼 여러 이야기, 가령 “무사고 1000일”이라는 현수막을 자랑스레 달고 있는 공장에서 3년 전에 벌어진 사고와 그로 인해 드러난 원청-하청 관계에 끼어버린 노동자, 희주와 희주의 남편 사이의 관계 등이 이어질 뿐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이미 벌어진 교통사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들은 희주가 찾고 싶은, 영남이 덮어버리고 싶은 진실과 연관이 없다. 아니, 아주 미약하고 느슨한 연관 속에서 사고를 당해 죽거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가 된 이들이나 그들의 가족과 지인들을 끝없는 죄책감의 늪에 빠져들게 하는 이야기다. <빛과 철>이 다루려는 것은 교통사고의 진실보단 그것을 둘러싼 이들이 겪는 감정적 상태에 집중한다. 하지만 영화의 표면은 진실을 두고 각자의 방식으로 동분서주하는 희주와 영남의 이야기다. 즉, 교통사고가 어떻게 벌어지게 되었고 그것이 누구의 책임이냐는 서사가 영화를 추동하지만, 영화 내적으로는 그것이 크게 필요치 않은 내적인 이야기가 진행된다. 영화의 두 결은 서로 충돌하고, 영화를 보는 나는 둘 중 어느 것을 따라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실 <빛과 철>의 많은 부분이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희주, 영남, 은영과 두 남편의 과거사는 계속해서 등장하지만 영화는 그것을 소화하지 못한다. <빛과 철>은 진실을 추적해 나아가는 추리극도, 원청-하청 관계 사이에 끼인 노동자의 이야기도, 돌봄노동에 지쳐버린 사람의 이야기도, 끝없는 죄책감의 늪에 계속해서 빠져들어가는 사람들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도 되지 못한다. 때문에 영화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도 같은 결말부의 사건 이후엔, 영화 내내 어질러진 사건들을 갑작스레 마무리할 제의적 성격의 마지막 숏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영화의 시놉시스대로 빛과 빛, 철과 철이 부딪힘으로써 시작된 이야기를 끝내기 위해선, 빛과 철로 이루어진 자동차를 멈출 제의적 존재가 등장할 수밖에 없다. 너무나 간단한 해법 앞에서 어떤 허탈함을 느꼈다. 

 90년대 말부터 00년대 초반까지 한국에서 요요 붐이 일었다. 당시 학생이던 문현웅, 곽동건, 윤종기, 이대열, 이동훈은 함께 길거리 요요 공연을 진행하고, 요요 콘테스트에 출전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최고의 위치에 오른 이들은 어느새 군대도 다녀오고, 대학 졸업을 앞둔 나이가 되었다. 사회로의 진입을 앞둔 이들은 ‘요요현상’이라는 이름의 팀으로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 참가한다. 영화 <요요현상>은 여기서 출발한다. 해외 공연을 통해 요요 인생 최고의 행복을 맛본 이들이 마주한 것은 요요로 생계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이를 알고 있었음에도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요요에 열정을 불태워 왔다. 영국에서 돌아온 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요요에 쏟았던 열정을 이어간다. <요요현상>은 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열정을 전환하는 방식을 담아낸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제니퍼 M. 실바의 책 [커밍 업 쇼트]가 떠올랐다. 이 책은 사회학자인 저자가 100명의 미국 노동계급 청년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하고 있다. 이 책에 담긴 청년들의 이야기는 얼핏 개인의 자유와 능력에 따른 성공을 보장하는 듯한 신자유주의 체제가 실은 젠더적, 인종적, 계급적, 지역적 맥락 안에서 수많은 선을 긋고 있으며, 그렇게 격자처럼 갈라진 사회 속에서 무드 경제와 같은 개념을 통해 ‘리스크 관리’라는 함정에 빠지게 됨을 이야기한다. 물론 이 이야기를 <요요현상>의 다섯 주인공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들 또한 자유롭게 자신의 꿈을 좇으라는 신자유주의적 강령 속에서 열정을 불태우다가, 그것에 동반되는 리스크 관리의 요구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한 맥락을 공유한다.      

 <요요현상>이 담아내는 것은 2011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부터 2017년까지의 시간이다. 모두가 함께한 영국에서의 시간 이후 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 동건과 동훈은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취업해 취미활동을 즐길 시간조차 사라져 버린다. 현웅과 대열은 길거리를 비롯한 공간에서 요요 공연을 계속 이어나가기도 한다. 같은 팀이지만 개인적 사정으로 인해 에든버러에 가지 못했던 종기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거쳐 아이들에게 요요를 가르치고 판매하는 등의 엔터테인먼트-완구 사업에 뛰어든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는 요요를 놓기도 하고, 누군가는 계속해서 요요를 통한 꿈을 꾸기도 한다. 각기 다른 삶의 모습과 방향을 선택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요요를 향한 열정을 그대로 유지하던 다른 방향으로 돌리던, 그것을 항상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에든버러에서의 공연 이후 이들에게 들이닥친,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한 순간 이후에 찾아오는 어떤 허탈감은 이들을 흩어지게 한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 다른 방향성을 지닌 각자의 선택을 믿는다. 각자의 길 앞에 놓인 생계라는 거대한 리스크를, 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살아내고 영화는 그것을 묵묵히 따라간다.    

 <요요현상>의 영어 제목은 ‘Loop Dreams’다. 이 제목은 스티브 제임스의 걸작 다큐멘터리 <Hoop Dreams>를 연상시킨다. 이 영화는 NBA 스타를 꿈꾸던 두 흑인 학생과 그들의 가정을 쫓는다. 이들의 꿈은 다양한 이유 앞에서 가로막힌다. 3시간의 러닝타임 속에서 이들은 실패하지만, 그 이유는 단지 이들의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두 사람과 가정을 쫓는 과정에서 영화가 드러내는 것은 이들의 꿈이 가로막히게 된 구조다. <요요현상>이 보여주는 것 또한 그와 유사하다. 무엇이든 꿈꿀 수 있다는 환상은 어느 순간 장애물로 되돌아온다. 누군가는 그 꿈을 계속 좇고, 누군가는 다른 길을 찾아 나선다. 영화는 꿈을 좇는 이들 우상으로 그리지도, 꿈을 포기한 이들을 패배자로 묘사하지도 않는다. 그저 어떤 열정을 품었던 이들이 이제 각기 다른 방향으로 그 열정을 옮겨가는 과정을 오랜 시간에 걸쳐 담아낼 뿐이다. 그리고 이들의 열정이 다른 누군가의 열정으로 전이될 수 있음을,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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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N 합동 보안 작전부 대위 아르테미스(밀라 요보비치)는 실종된 팀원들을 찾기 위해 수색하던 중 폭풍에 휘말려 다른 차원의 세계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몬스터의 습격을 받고 동료들을 잃은 그의 앞에 몬스터 헌터(토니 자)가 나타난다. 아르테미스는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헌터는 동료들을 찾기 위해 몬스터 사냥을 시작한다. 캡콤의 히트작 [몬스터 헌터] 시리즈를 원작으로 삼아,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의 폴 W.S. 앤더슨이 연출하고 밀라 요보비치가 주연을 맡은 작품이다. 원작 게임 자체가 스토리 중심의 게임이 아니기에, 영화의 이야기는 원작 캐릭터의 외양과 몬스터 등 몇몇 설정만을 따왔을 뿐 전혀 다른 스토리를 선보이고 있다.     

 영화 자체는 단순하다. 원작과는 다른 이야기를 선보인다고는 했지만, 당연하게도 이야기가 크게 중요한 영화는 아니다. <슈퍼 소닉>처럼 원작에 없는 이야기를 적절하게 풀어내 즐거움을 선사한 경우도 있지만, <몬스터 헌터>의 경우엔 스토리는 액션을 보여주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에 불과하다. 애초에 <이벤트 호라이즌>을 제외한 폴 W.S. 앤더슨의 영화들이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긴 한다. 1편 이후의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는 거대하게 변형된 좀비와 엘리스가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고, <폼페이> 속 두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는 화산 폭발이라는 거대한 재난의 스펙터클을 보여주기 위해 당시의 폼페이를 묘사하기 위한 수단에 머무르며, <삼총사> 또한 원작 소설의 뼈대만이 액션을 위한 이음매로 존재할 뿐이었다. 그나마 <데스 레이싱> 정도가 나름의 흥미로운 설정과 맞물린 액션의 재미를 주었달까? 이러한 맥락에서 <몬스터 헌터> 역시 이야기가 중요한 영화는 아니다. 종종 폴 W.S. 앤더슨의 영화들이 마이클 베이 영화들과 유사한 경향을 띤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번 영화는 몬스터들이 등장하는 <트랜스포머>나 다름없다.     

 이는 딱히 <몬스터 헌터>가 불만족스러웠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렇기에 적당한 만족감을 품고 극장을 나설 수 있었다. <몬스터 헌터>는 폴 W.S. 앤더슨이 가장 잘하는 것을 한 영화다. 무언가가 끊임없이 부서지고, 실없는 농담이 오가는 와중에 애매한 우정이 피어오르고, 원작으로 삼은 것의 몇몇 요소만이 파편적으로 영화에 등장한다. 가령 <몬스터 헌터>에서는 원작의 탐험 요소는 거의 사라졌지만, 사냥과 채집이나 조사단의 외모와 무기, 고양이 주방장 등의 요소들은 적절한 순간에 등장한다. 물론 아르테미스가 UN 소속 군인이라는 설정 때문에 영화가 절반 가까이 진행된 상황에서야 원작의 게임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등장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말이다. 그 지점까지의 기다림이 다소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지만, 그 이후에 찾아오는 여러 눈요깃거리는 <몬스터 헌터>를 가벼운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팝콘무비로 완성시켜준다. 사실 팝콘무비를 만든다는 것이 폴 W.S. 앤더슨이나 마이클 베이, 더 나아가 롤랜드 에머리히 같은 감독들의 쓸모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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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92년의 지구, 행성이 황폐해지자 설리반(리처드 아미티지)이 이끄는 거대기업이 지구 주변 궤도에 인류를 위한 보금자리 UTS가 만들어진다. 그간 지구에서 쏘아 올린 인공위성들의 잔해가 UTS를 위협하자, 몇몇 이들은 지구 궤도를 떠도는 쓰레기들을 처리하는 우주 청소부를 자처한다. 조종사 태호(송중기), 우주 해적단을 이끌었던 장 선장(김태리), 마약상 두목이었던 타이거 박(진선규), 피부이식 수술을 받길 원하는 로봇 업둥이(유해진)는 ‘승리호’라는 우주선을 타고 우주의 쓰레기들을 처리한다. 그러던 중, 사고로 파괴된 UTS의 우주선에서 실종된 인간형 폭탄 로봇 도로시(박예린)를 발견한다. 이들은 도로시를 노리는 세력 ‘검은여우’가 있음을 알게 되고, 도로시를 거액에 거래하려 한다. 하지만 도로시를 노리는 다른 세력이 존재하고, 이들은 거대한 사건에 휘말린다. <늑대소년>,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등의 조성희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영화의 전체적인 방향성은 조성희 감독들의 전작과 유사하다.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성인 남성과 어린 소녀 두 사람이 전체 서사의 주축이 되고, 주변 인물들과의 앙상블 속에서 두 사람이 휘말린 어떤 사건이 전개된다. 두 주인공의 나이가 유사했던 <늑대소년> 정도를 제외하면 단편 <남매의 집>부터 <승리호>까지 조성희의 영화는 대체로 이런 설정에서 출발한다. 단지 영화가 택하는 장르만이 다를 뿐이다. 그간 조성희는 미스터리를 기반으로 한 재난물(<남매의 집>, <짐승의 끝>), 늑대인간 로맨스(<늑대소년>), 탐정물(<탐정 홍길동>) 등을 만들어왔다. <승리호>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니, <승리호>는 조성희의 앞선 영화들보다 더욱 착실하게 장르 클리셰를 쫓아간다. UTS와 같은 우주 거주지가 등장하는 <엘리시움> 등의 작품, ‘우주 해적’이 등장하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 모든 언어를 통역하는 통역기, 인간과 유사한 행동과 감정을 지닌 안드로이드 등등. 이 영화는 그러한 클리셰를 이리저리 짜 맞추고, 다소 부실한 캐릭터를 배우의 퍼포먼스로 때운다(특히 장 선장과 설리반). 신파로 비판받는 다른 한국의 텐트폴 영화들에 비해 신파 요소가 강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부산행>의 그 장면처럼 배경을 모두 새하얗게 날려 버린 장면에선 어쩔 수 없이 기시감과 거부감이 든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나름 재밌게 보았는데, <승리호>라는 영화의 제작 소식을 들었을 때 기대했던 부분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김태리 배우의 팬이고, 적당히 괜찮은 비주얼을 선사하는 킬링타임용 SF 영화에 관대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그 때문이겠지만. 어떤 지점에서 <승리호>를 보는 경험은 <반도>를 관람했을 때를 떠올리게 하는데, 두 영화 모두 ‘한국영화 최초’의 어떤 장르를 표방하며 그에 걸맞은 비주얼을 선보인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승리호>가 한국영화 최초의 블록버스터 우주 영화라면, <반도>는 블록버스터 포스트-아포칼립스일 것이다. <승리호>의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은 <반도>의 오목교나 홈플러스 건물과 같다. 단순히 한국을 배경으로 한 폐허 혹은 한국어를 사용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에서 오는 반가움은 아니다. 도리어 두 영화가 영화의 국적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한 디테일들에서 오는 길티 플레저가 있다. 그러니까 좀비들을 가득 풀어놓은 투기장에서 “지금은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 흘러나온다든가, 2092년의 우주에서 우주 해적들이 섰다를 치는 그런 순간들의 어처구니없음이 도리어 즐거움으로 다가온달까? 이 분야에서 가장 훌륭한 영화는 아무래도 <기묘한 가족>이라 생각하지만, <승리호> 또한 그 대열에 집어넣어도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자. 모든 언어를 통역 가능한 통역기가 있는 세계에서 굳이 자신을 숨긴다고 음성변조를 거친 스페인어로 대화하는 태호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고 재밌다. 아, 물론 <승리호>의 만듦새는 <반도>보다 낫다.     

 결국 <승리호>는 그간 한국의 텐트폴 영화들이 해온 것을 우주를 배경으로 호들갑스럽게 답습하는 영화다. 다만 쓸데없는 로맨스를 제거하고, 인종을 비롯한 다양성을 추가하고, 배경을 우주로 옮겼을 뿐이다. <승리호>는 코로나 19 이전에 쏟아져 나온 온갖 상황 속에서 신파를 위한 플래시백과 슬로모션을 남발해대는 그런 유의 영화는 아닐지라도, 조성희 감독의 전작들과 궤를 함께한다기엔 너무나도 평범하다. <탐정 홍길동>의 시대 배경을 도저히 분간할 수 없는 마을의 모습이나, 늑대인간으로 시작하여 팀 버튼의 <가위손>처럼 마무리되는 <늑대소년>, 폭력적인 상황이 제공하는 불쾌감 속에서 피어나는 기묘한 몰입감이 <승리호>엔 없다. 대신 기술력과 스타 배우를 등에 업고 매끄럽게 만들어진 영화들이 주는, 맥주 한 캔을 비우며 보기 좋은 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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