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의 얼굴들> 자파르 파나히 2018 :: 영화 보는 영알못

 영화는 스마트폰의 세로 화면으로 촬영된 영상에서 시작된다. 예술학교에 합격했지만, 가족의 반대로 가지 못하게 된 마르지예가 자살을 택하는 과정이 담겨 있다. 영상 속 마르지예는 유명 배우인 베흐나즈 자파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제 카메라는 자파르 파나히의 자동차 조수석에 탄 채로 영상을 보는 자파리의 모습을 비춘다. 영화 촬영 중 영상을 접한 그는 자파르 파나히의 도움으로 마르지예가 사는 시골 마을로 향한다. 자파르 파나히의 카메라는 이번에도 자동차를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다. 종종 자동차 자체가 삼각대나 카메라 리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는 2009년 이란 당국으로부터 반국가적 영화를 만들었다는 혐의로 출국금지와 장기간의 가택연금을 당한 자파르 파나히가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부터 전작 <택시>까지 시도해온, 저항 자체로서의 영화 만들기의 연장선상에서 도출된 것이다. 극 중 자파르 파나히가 잠드는 상황이 아니라면, 카메라는 자동차 인근을 맴돌거나 자파르 파나히 곁에 머물러 있다.     

 카메라가 자파르 파나히 혹은 <택시>에 이어 그와 동질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자동차를 벗어나는 장면은 단 한 번 등장한다. 자파리가 촬영 중이던 영화 제작진에게 전화하기 위해 잠시 마을에 왔다가, 어느 노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다. 노인은 아들의 할례식을 이야기하며, 할례를 통해 발생한(?) 아들의 피부 조각의 신성함을 예찬하고 그것을 마초적인 이미지의 이란 남성 배우에게 전달해달라 부탁한다. 흥미롭게도 그 배우는 이란 정부로부터 입국을 금지당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는 상태다. 노인은 자파르 파나히 감독을 통해 그것을 전달해달라 부탁하지만, 그는 출국이 불가능하다. 유사한 에피소드들은 영화 내내 이어진다. 테헤란으로 돌아가려던 자파르 파나히 일행 앞에 절벽에서 떨어진 소가 나타난다. 소의 주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스마트폰의 신호는 잡히지 않고, 만약 수의사를 부른다 해도 때는 이미 늦었을 것이고, 동시에 죽어가는 소의 고통을 빠르게 끝내주기엔 자신의 손으로 살생하길 원하지 않는다. 죽어가는 소 앞에서 소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그는 파나히에게 소의 정력에 대한 상찬을 늘어놓는다. 고환이 좋은 소라 하룻밤에 10마리의 암소와 교미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암소를 태운 트럭들이 다음 날 올 예정이라는 이야기, 그것의 괴상한 연장선상에서 정력을 위해 죽은 소의 고기로 케밥을 해서 보내주겠다는 이야기.      

 마르지예의 가족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그의 예술학교 진학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것이 생존에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TV에서 방영되는 드라마와 영화를 즐겨보고, 마을을 찾은 스타 배우인 자파리를 알아보지만, 마르지예가 마을의 생존에 대한 쓸모에서 이탈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바라지 않을 뿐 아니라 이탈의 가능성 자체를 봉쇄하고, 더 나아가 마르지예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마을에 보탬이 될만한 그의 아이디어나 행동도 쓸데없는 짓으로 여겨진다. 마을 사람들은 이란 혁명 이전 시기에 배우로 활동하던 셰라드를 배척하고, 마을 외곽의 외딴집에서 살게 한다. 이들은 자파리의 앞에서 “배우는 광대”라는 발언을 하기도 한다. “생존을 위해서”라는 말은 상당히 논리적인 요건처럼 보인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 공부도, 예술가의 꿈을 꾸는 것도, 여성이 무엇인가를 시도하는 것을 가로막으면서, 동시에 남성성과 정력에 대한 선호와 찬양은 끝없이 이어진다. 이는 신앙과도 같은 어떤 것으로 발전하여 삶 자체를 지배한다.     

 자동차와 자파르 파나히를 벗어나지 않던 카메라는, 영화의 세 배우가 등장하는 장면을 차의 시점으로 잡는다. 셰라드의 집에 함께 머무는 마르지예와 자파리의 모습은 창문에 비친 그림자로만 등장한다. 혁명 이전과, 혁명 이후의 현재와, 현재 이후를 꿈꾸는 세 배우의 모습은 하나의 그림자로 뭉쳐진다. 자파르 파나히의 자동차-카메라의 시점은 생존이라는 논리로 인해 배제된 이들의 그림자가 영사되는 창문을 바라본다. 영화의 마지막 숏, 카메라는 자동차 정면에 고정된 채 자동차가 움직이는 방향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한편엔 마르지예의 남동생이 돌을 내리쳐 만들어낸 금이 보인다. 좁은 길 반대편에서는 이미 죽어버린 소와 교미시키려는 암소들을 가득 태운 트럭들이 오고 있다. 트럭들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동안 자파리는 그 길을 걸어가고, 마르지예가 자파리의 뒤를 따른다. 자파르 파나히-자동차-카메라는 그것을 길게 바라본다. 그와 그의 카메라는 자동차 밖으로 유유히 걸어 나가지 못한다. 대신 앞으로 나아가는 이들을 바라본다. 그는 그저 이란의 과거-현재-미래를 매개자로서, 국가로부터 어떤 가능성을 제한당한 사람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가능성을 바라보고 전달할 뿐이다. 이동을 제한된 카메라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을, 자파르 파나히는 꾸준히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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