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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트로덕션>을 보며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독일(이번엔 함부르크가 아닌 베를린이지만)과 강릉이 등장하고, 더군다나 후자의 영화에 등장했던 해변과 식당이 다시 등장한다. 홍상수는 예고편을 통해 영화의 제목이 <인트로덕션>이 된 이유를 밝힌다. 그가 영화의 제목을 한국어가 아닌 언어로 지은 것은 단편영화 <리스트>를 제외하면 예외적이며, ‘리스트또한 이미 한국어처럼 사용되는 외래어에 가깝다는 점에서 <인트로덕션>이 그의 첫 영어 제목 영화제목이다. 예고편은 파란 글씨의 자막으로 프랑스 배급사가 영화의 불어 제목을 문의하자, "불어처럼 한국말도 영어의 인트로덕션에 하나의 단어로 대응하는 말이 없습니다. 인트로덕션의 소개, 입문, 서문, (새것의)도입 등의 뜻을 다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한국제목도 영어를 그대로 썼습니다..."라고 답했다는 것을 밝힌다. 이후 영화의 장면들과 함께 인트로덕션의 네 가지 사전적 의미가 등장한다. 한사람을 다른이에게 소개하는 행위, 한사람이 뭔가를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 어떤 것의 처음부분, 새로운 것을 (세상에) 가져옴. 네 가지 각기 다른 뜻은 어떤 식으로든 처음혹은 시작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인트로덕션><밤의 해변에서 혼자>에 대한 소개, 입문, 서문, 도입인가?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인트로덕션>을 들여다보는 것은 지루한 퍼즐 맞추기가 될지도 모른다.

 

<인트로덕션>3부로 구성되어 있다. 한의사인 아버지(김영호)를 만나러 간 아들(신석호)의 이야기, 패션디자인 공부를 위해 독일로 떠난 딸(박미소)과 엄마(서영화)의 이야기, 연극배우(기주봉)을 소개시켜 주기 위해 아들을 강릉으로 부른 엄마(조윤희)의 이야기. 세 편의 이야기에는 모두 아들과 딸이 등장한다. (여기서 아들과 딸은 인물의 이름 대신 사용되고 있다) 때문에 세 개의 이야기는 각각 몇 달, 혹은 몇 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진행되는 것처럼 다가온다. 실제로 몇몇 이야기는 이어지기도 한다. 1부에서 한의원을 찾은 연극배우는 3부에서 재등장하고, 아들과 연극배우는 이미 만났던 사이로 등장한다. 3부의 꿈 장면에서 등장하는 딸은 2부의 내용대로 독일에 다녀온 것으로 묘사된다. 딸은 1부 초반에 아들과 함께 있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했다. 전작 <도망친 여자>3부 구성이 순서를 바꿔도 큰 무리가 없었던 것과 다르게, <인트로덕션>3부 구성은 비교적 명확한 시간선을 유지한다. 그것을 채우는 이야기는 소개, 입문, 서문, 도입으로 채워진다. 가령 1부는 아들과 아버지가 서로를 다시 삶 속으로 도입하려 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2부는 엄마가 딸을 독일에 사는 친구(김민희)에게 소개해주는 이야기다. 3부 또한 엄마가 아들을 연극배우에게 소개하는 자리다. 하지만 이러한 도입과 소개는 영화의 프레임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들은 아버지 대신 오랜만에 만난 간호사와 포옹한다. 딸은 자신에게 거처를 내어준 엄마의 친구 대신 갑자기 독일로 찾아온 남자친구(1, 3부의 아들)과 포옹한다. 아들은 엄마가 소개해준 연극배우와 화합하는 대신 바다로 뛰어들고, 겨울바다의 추위에 떠는 그를 그의 친구(하성국)가 끌어안는다. 이들의 포옹은 새로운 대상 대신 사랑, 기억, 고향, 우정 등 과거의 성격을 지닌 것과 이루어진다.

 

하지만 1부에서 드러나지 않은 아들과 아버지의 만남은 아버지에게 유학비를 부탁해보려는 2부에서 아들의 대사를 통해 관객에게 알려진다. 딸의 독일 유학의 결과는 3부에서 아들이 겪은 꿈 장면을 통해 알려진다. 포옹으로 이어지지 못한 인트로덕션들은 영화의 다음 부분에서 그것이 이어졌다는 암시를 통해 확인된다. 영화에서 가시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인트로덕션들은 과거의 것으로 다뤄질 때만 성사된다. 영화의 프레임 속에서 벌어지는 인트로덕션은 도리어 단절과 파열을 초래한다. 한의원에서 연극배우와 다른 환자를 가리고 있던 진료실의 커튼, 엄마와 딸이 바라보던 이상하게 생긴 나무가 뒤늦게 저화질의 이미지로 등장한 쇼트, 아들이 배우의 꿈을 접은 이유를 듣고 흥분해 목소리를 높이는 연극배우를 잡은 자꾸만 포커스 아웃되는 카메라. 그리고 이와 대비되는 여백들이 존재한다. 아들과 간호사가 포옹하는 장면에서 노출을 높게 잡아 새하얗게 보이는 배경, 노출이 높아 그저 새하얗게 보일뿐인 창밖 풍경들. 그리고 아들이 뛰어드는 바다의 새하얀 파도에 이르러 영화 내내 존재하던 여백들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새로운 인트로덕션을 과거의 것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일렁이는 여백들로 아들은 들어간다. 예고편에서 새로운 것을 (세상에) 가져옴이라는 인트로덕션의 의미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함께 등장한다. 저화질의 이미지 속에서(영화 전체가 저화질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인트로덕션><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김민희가 홀로 누워있던 해변에 새로운 것을 가져온다. 매서운 겨울바다의 바람을 맞으며 서로에게 기대어 서 있는 두 남성의 모습. 이 모습이 어떤 방식의 새로운 것이 될지는 모르겠다. 다만 서로를 지탱하는 것으로서의 포옹이라는 점에서, 1부와 2부에서의 포옹과는 질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스크린에 등장했다는 것만은 충분히 감각할 수 있다.

 

 광주(光州)의 뜻은 ‘좋은 빛’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의 뜻은 ‘좋은 공기’다. 임흥순 감독의 다섯 번째 극장용 장편인 <좋은 빛, 좋은 공기>는 1980년 전후로 군부독재정권에 의해 학살당한 두 도시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는 지금껏 제주 4.3 항쟁(<비념>), 공단 여성노동자(<위로공단>), 탈북 여성(<려행>), 베트남전과 빨치산 사건의 피해자(<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등을 통해 국가폭력, 이데올로기 싸움,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죽고 다치고 가족과 친구를 잃은 이들의 모습을 담아왔다. 그의 <좋은 빛, 좋은 공기>는 비슷한 시기에 국가폭력을 겪은 두 도시에서 여전히 살아가는 생존자와 유가족, 행방불명자의 가족,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을 비춘다.

 1980년 5월의 광주가 여전히 잊을 수 없는 사건인 것과 마찬가지로, 1976~83년 동안 벌어진 납치, 감금, 살해 등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들에 대한 군부의 탄압은 그들에게도 여전히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광주에 남은 생존자와 유가족 등은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 옛 전남도청 건물을 복원할 것을 요청하며 농성 중에 있다. 이들은 자신과 이미 세상을 떠난 희생자들의 기억이 사라지길 원치 않는다. 광주에 남아 있는, 여전히 핏자국과 총탄 자국이 남이 있는 건물들은 그 자체로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비에 다름 아니다. 희생자 및 행방불명자의 어머니들은 ‘광주오월어머니회’를 결성하고 이를 기억하기 위해 매년 5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행진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희생된 자녀가 마무리하지 못한 투쟁을 이어가는 어머니들이 있다. 이들은 ‘5월 어머니회’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 광장에 나서 집회를 주도했다. 어머니들이 결성한 두 단체는 (영화에는 등장하진 않지만) 서로의 도시에 방문해 서로의 경험을 나누기도 했다. 

 두 단체가 영화를 구성하는 하나의 축이라면, 또 다른 축은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해 과거를 기록하는 이들의 모습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위치한 수감소에 묻힌 유해와 여러 물건들을 발굴하는 것은, 단순히 희생된 이들을 기리고 당시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려는 의미도 있지만, 더 나아가 생존자 혹은 유가족의 기억을 다시 쓸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광주에서도 희생자들이 암매장되었을 것이라 추정되는 장소에서의 발굴작업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발굴이 진행될수록 드러나는 것은 발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시신을 한 구라도 더 찾을 수 있기를 바라는 염원은 영화가 촬영된 2018~19년에서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요원하다. 대신 임흥순 감독은 당시의 생존자 및 죽음의 문턱에 있던 그를 수술한 의사와 함께 광주 국군병원을 찾는다. 이미 폐허가 된 그곳에서 이들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린다. 유령이 되어 사라져버린 이들을 찾지는 못해도, 이들의 기억은 명확한 형체를 지닌 채 보존되고 있음을, 영화는 보여준다.

 그의 장편영화 작업들은 대부분 미술관에서의 전시를 먼저 거친 뒤, 그곳에서 공개된 영상설치작업의 재편집본이었다. <좋은 빛, 좋은 공기> 또한 이러한 방식을 통해 제작되었다. 이번 영화는 2019년 있었던 그의 개인전 [고스트가이드]에서 2채널 영상작업으로 상영되었다. 해당 작품에 더해 전시 당시의 영상을 비롯, 전시와 동명의 작품인 <고스트가이드>의 제작과정을 담은 영상 등이 포함되어 재편집되었다. 전시 때와는 다르게 흑백으로 변환된 이미지 속에서 챕터가 바뀔 때마다 등장하는 그린 스크린과 광주 및 부에노스아이레스 청소년들의 활동을 담은 컬러 영상이 <고스트가이드>의 제작과정이다. 전시에서 보여준 것을 극장의 스크린에서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다. 당시 전시장을 찾은 이들은 자유로운 동선 속에서 전시장에 배치된 작품들을 관람했을 것이다. 특히 전시 당시의 <좋은 빛, 좋은 공기>는 광주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촬영된 영상을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스크린에 각각 상영하는 형태였다. 때문에 전시를 이루던 각 작품은 관객이라는 매개자를 통해 맥락을 형성한다. 하지만 극장 버전의 <좋은 빛, 좋은 공기>는 전시장의 작품들을 분해/재조립한 결과물이다. 재편집의 과정에서 작품 사이의 맥락을 매개하는 관객, 즉 광주와 부에노스아이레스 사이를 이어 줄 관객의 자리는 뒤로 물러나게 된다. 영화가 담아낸 이야기들의 무게감과는 별개로, <위로공단>에서 보았던 형식적 측면의 훌륭함은 어딘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영화는 2020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되었다. 그리고 2021년 3월 미얀마에서 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고, 미얀마 국민들은 군부에 의해 탄압받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두 도시의 청소년들이 참여한 영상 위로 ‘#SaveMyanma’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광주와 부에노스아이레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질 미얀마, 홍콩, 알레포, 태국 등의 이름들이 있음을, 항상 알고 있어야 한다.

 1968년, FBI 국장 J. 에드가 후버는 당시 기세를 넓혀가고 있던 흑표당을 견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FBI 요원 미첼(제시 플레먼스)은 FBI를 사칭한 자동차 절도범 빌(키스 스탠필드)을 흑표당에 잠입시키고자 한다. 미첼의 요구를 수락하지 않으면 몇 년 간의 감옥살이를 해야 하는 빌은 흑표당에 잠입한다. 목표는 흑표당 일리노이 지부장 프레드 햄프턴(다니엘 칼루야)에게 접근하는 것. 하지만 빌은 점차 민중의 힘을 믿는 프레드의 활동에 감화되어 가며 갈등하기 시작한다.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는 <블랙 팬서> 등 최근 메이저 시장에서 블랙-시네마의 경향을 주도하고 있는 라이언 쿠글러가 제작자로 참여했고, 여러 TV쇼 및 흑인 커뮤니티에 대한 단편영화들을 연출했던 샤카 킹이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참고로 이 영화는 아카데미 시상식 역사 최초로 흑인 제작자들만이 참여한 작품상 후보이기도 하다.

 영화는 실제 인물인 빌 오닐이 1989년 증언한 내용을 담은, 1990년 TV를 통해 방영된 다큐멘터리 <아이즈 온 더 프라이즈 2>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영화의 첫 장면은 해당 다큐멘터리에 삽입될 인터뷰를 진행하는 빌의 모습을 보여주고, 영화의 마지막에 실제 다큐멘터리 속 푸티지가 등장한다. 영화 전체가 빌의 플래시백인 것 마냥 진행된다. 영화 자체는 잠입요원이 등장하는 수많은 범죄, 누아르, 액션 영화의 전형을 따라간다. 흑표당에 잠입한 이가 등장하다는 점에서 스파이크 리의 <블랙클랜스맨>이 연상되는 지점도 있다. 그만큼 이 영화는 익숙한 틀에서 출발하여 익숙한 문법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체 게바라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언변을 지닌 프레드, 그런 그에게 접근하며 흑표당이 조직해낸 민중의 활동을 지켜보고 그것에 점차 마음이 움직이는 빌. 영화는 흑표당의 지도자들을 비롯해 60년대 미국 내 흑인 민권운동의 지도자들을 ‘블랙 메시아’라 부른 J. 에드가 후버의 말을 차용해, 영화 내내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빌을 신약성서 속 가롯 유다로 위치시킨다. 가롯 유다는 은화 30냥에 예수를 배신한 인물이다. 그는 예수의 죽음 이후 자살을 택한다. 빌은 미첼이 제공하는 경제적 보상에 프레드를 배신한다. 엔드크레딧 전에 등장하는 자막은 그가 다큐멘터리가 방영되는 날 자살했음을 알린다. 

 영화의 제목이 암시하는 거친 성경의 비유는 얼핏 당시 흑표당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만 같다. 극 중에서 감옥에 갇힐 위기에 처한 프레드는 자신이 해외로 도주할 수 있는 정도의 금액으로 차라리 흑인들을 위한 병원을 세워줄 것을 부탁한다. 그가 생각하는 반-자본주의, 마오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 국가는 민중에 대한 것이지 한 명의 지도자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를 인지하고 있다는 듯이 125분의 러닝타임에 모두 담아내기엔 벅찰 정도로 다양한 시사점을 쏟아낸다. 가령 프레드의 연인인 데보라의 상황에서 드러나는 블랙 페미니즘, 프레드가 자경단의 성격을 띤 갱 ‘크라운’, ‘백인 쓰레기(White Trash)’라 불리는 ‘젊은 애국자’나 푸에르토리코 출신 이민자들의 그룹인 ‘젊은 영주’ 등의 다른 빈민 및 소수인종과 연대하여 ‘무지개 연합’을 구성하는 장면에서 드러나는 소수자 연대, 60년대 흑인 민권운동이 마틴 루터 킹과 말콤X는 물론 유럽 68혁명의 영향을 받았음을 드러내는 많은 대사. 생존을 위해 흑표당에 반강제로 잠입하게 된 빌의 눈 앞에 들어온 것은 이들이 투쟁 대상이 단순히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것뿐만이 아닌, 굉장히 복잡한 상황과 맥락 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프레드가 어처구니없는 혐의로 투옥되었다 돌아온 이후 진행된 연설회 장면은 이러한 복잡한 맥락 속에 빌의 생존이라는 맥락이 강력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FBI가 씌운 ‘블랙 메시아’라는 프레임이 거짓된 것임을, 그러한 프레임만으로 빌의 행동을 판단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가 그간 수없이 제작되어 온 흑인 민권운동에 대한 영화들에 비해 차별되는 지점이 있다고 말하기는 망설여진다. 소위 ‘웰-메이드’라 불리는 작품들이 대게 그러하듯, 이 영화도 잠입요원이 등장하는 영화들의 특성을 따르며 말끔한 완성도를 선보일 뿐이다. 영화가 다루는 내용상의 무게감이나 영화가 BLM 운동과 ‘Stop Asian Hate’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는 지금의 시점에 제시하는 시사점이 여럿 존재하지만, 이는 영화 내의 맥락을 벗어난 이야기이지 영화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위의 문단에서 언급한 연설회 장면을 제외하면, 너무나 매끄럽게 잘 만들어져 이렇다 할 이야기를 보탤 것이 없다. <라이온 킹>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왕위 다툼 이야기를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 대한 현대적 우화로 각색해낸 라이언 쿠글러의 매끄러운 솜씨와 이 영화의 만듦새가 유사하달까? 그러고 보니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도 <블랙 팬서>가 보여준 영화에 삽입되지 않을 유명 흑인음악 뮤지션들의 컴필레이션 앨범을 함께 제작했다는 점에서 두 영화의 전략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대단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다니엘 칼루야, 흑표당과 FBI 사이에서 갈등하고 불안해하는 모습을 섬세하게 묘사해낸 키스 스탠필드의 빼어난 연기들이 이 영화를 다른 영화들과 구분 짓는 몇 안 되는 차별점일 것이다. 

*스포일러 포함

 

 2008년 금융위기의 여파로 2011년 네바다 주에 위치한 ‘US석고’의 공장이 문을 닫는다. 그곳에서 일하던 펀(프랜시스 맥도먼드)은 남편이 죽은 이후 방랑자 생활을 이어간다. 영화는 아마존 물류센터, 국가나 기업이 운영하는 캠핑장, 국립공원, 휴게소 내 식당 등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그의 모습과 함께, 그가 그리는 동선을 따라 마주치게 되는 다른 방랑자들의 모습을 담아낸다. 클로이 자오의 세 번째 장편영화 <노매드랜드>는 펀처럼 각자의 이유로 미국 어딘가를 떠돌며 살아가는 ‘노매드’들의 모습을 담아낸 작품으로, 제시카 브루더가 쓴 동명의 논픽션을 원작으로 한다. 프랜시스 맥도먼드와 데이브로 출연한 데이빗 스트라단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출연진이 본인으로 출연한다. 즉 <노매드랜드>에 등장한 방랑자들은 현재 실제로 방랑자 생황을 이어가고 있는 이들이다. 극 중 RV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밥 웰스는 실제로 극 중 등장하는 공동체를 조직한 인물이며, 유튜브를 비롯한 SNS를 통해 활동하는 인물이다. 

 다소 뜬금없지만 영화 초반 ‘노매드’라는 단어가 등장할 때마다 게임 <사이버펑크 2077>의 ‘노마드’들이 떠올랐다. 거대기업이 하나의 도시국가를 이루고 있는 2077년을 배경으로 한 이 게임에서, 오염된 도시에서의 삶 대신 방랑자의 삶을 택한 ‘노마드’들은 거대기업-국가의 존재로 인해 흘러나오는 다양한 일들을 처리하며 살아가는, 방랑하는 흥신소라 불러도 좋을 생활을 하는 이들로 묘사된다. <노매드랜드>의 방랑자들이 자동차를 자신의 집으로 여기는 것처럼, 방랑자이기에 자동차는 이들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집이나 다름없는 이동수단을 통한 방랑, 기업-국가-자본의 연결고리 바깥의 삶을 꿈꾸지만 결국 자본과 용역을 교환하며 살아가는 삶. <사이버펑크 2077> 속 ‘노마드’들의 삶은 <노매드랜드>의 방랑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남편의 유품을 정리하고 방랑을 시작한 펀은 아마존 물류창고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그의 RV가 주차된 곳은 아마존이 제공하는 캠핑구역이다. 그는 물류창고에서도, 캠프지기로도 일하며 돈을 번다. 펀을 비롯해 그가 방랑생활을 이어가며 마주치는 다른 이들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데이브는 국립공원 가이드로, 휴게소의 식당 보조로 일한다. 영화가 쫓는 펀의 방랑은 네바다에서 시작해 노스 다코다 등을 거쳐 다시 네바다로 돌아온다. ‘US석고’ 공장을 출발해 아마존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그의 방랑생활은 영화의 최후반부에서 다시금 반복된다. 펀은 방랑자지만 그의 동선은 결혼반지의 모양처럼 끝나지 않는 원을 그린다. 자본주의는 많은 노동자와 중산층의 삶을 실패로 몰아갔고, 방랑자들의 동선을 구성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거친 상황에서 “부동산은 기다리면 오르게 되어 있다”라고 말하는 한 중산층 인물의 대사는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영화에서 RV를 타고 방랑하는 이들의 공동체를 꾸리는 인물로 등장하는 밥 웰스는 자신의 유튜브 영상에서 자본주의 밖의 삶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들의 삶은 자본주의 밖에 위치하는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들의 삶은 자본주의 바깥으로 벗어나지 못한다. 국가-기업의 연결고리 속에 위치한 자본주의는 방랑자들의 동선마저 결정한다. 방랑자들 개인이 방랑을 택한 각각의 이유에 대해서는 각자의 해명이 가능하겠지만, 이들은 결국 펀처럼 큰 단위의 동선을 그리며 살아가는 자본주의 내의 철새와 같은 삶을 살아간다. 원작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발생한 방랑자들의 삶을 추적했다면, 영화는 방랑하는 삶을 택한 이들이 어쨌든 자본주의 밖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모순을 담아내려는 것만 같다. 하지만 영화는 그 모순을 내적으로 보여주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TV쇼에 등장한 자연인이 자연스럽게 산 밑으로 내려가 장을 봐오는 그림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자연화된 모순으로 영화 여기저기에 흩뿌려져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방랑은 어떤 여정인가? 자본주의의 동선을 따르면서 자본이 가린 미국의 풍경을 (재)발견하는 것? 혹은 펀의 친자매가 이야기한 것처럼 과거의 서부 개척자들이 했던 일을 반복하는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해선 펀이 어떤 인물인지를 알아내야 한다. 하지만 영화 내내 펀은 모호할 뿐이다. 실제 방랑자들을 캐스팅한 다른 방랑자 캐릭터들 사이에서, 펀은 초보 방랑자로서 이들 사이를 떠돌고 있을 뿐이다. 그는 왜 남편이 죽은 뒤 방랑을 택한 것인지, ‘US석고’ 인사과와 기간제 교사와 할인마트 등에서 일하던 그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관객은 알 수도 없고 그것을 알아낼 의지를 지니지도 못한다. 영화가 그의 과거를 숨기지 않지만 그것을 묘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매드랜드>는 2018년 가을에 촬영되었다. 2018년을 살아가는 방랑자들은 2011년 말에서 2013년 초에 이르는 시간을 연기한다. 그것이 만들어낸 간극 속에 펀이라는 가상의 캐릭터가 놓인다. 이 캐릭터는 영화가 보여주는 방랑생활의 일상, 동선, 풍경 속에서 부유한다. 펀은 고아이고 자식도 없는 죽은 남편을 기억하는 이가 자신밖에 없기에 살아간다고 한다. 처음의 그는 다른 방랑자들과 공동체를 형성할 생각도 없었다. 관객이 그에게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그가 살아가고 있는 공허하고 동질적인 순간뿐이다. 그의 삶은 북미대륙 중서부의 광활하고 황량한 풍경 속에서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것도, 다른 방랑자인 스왱키처럼 자연 자체에 대해 대단한 감동을 느끼는 것도, 과거의 기억에 대해 계속 반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펀은 <노매드랜드>가 실제 방랑자들의 삶을 담은 프레더릭 와이즈먼 식의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배우와 각본이 요구되는 픽션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다. 다시 말하자면 카메라가 그와 그의 주변에 놓인 다른 방랑자들을, ‘매직 타임’의 황홀한 태양빛도 아무런 감정적 효과를 주지 못하는 미국 중서부의 황량한 풍경을, 방랑하는 삶에서도 계속되는 자본주의적 노동 현장을, 방랑의 삶을 택한 펀에 대해 말을 보태는 중산층 계급 사람들의 말을 담기 위해 펀이 존재한다. 프랜시스 맥도먼드의 (언제나처럼) 놀라운 연기는 러닝타임을 지탱해줄 뿐 영화와 펀이라는 캐릭터의 존재 논리를 성립하게 하진 못한다. 클로이 자오의 전작 <로데오 카우보이>는 전문 배우가 아닌 극 중 주인공과 같은 사건을 겪은 실제 인물이 주인공이었다. 그의 삶을 재연하는 그의 연기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15시 17분 파리행 열차>에서처럼 실제와 픽션의 이미지를 동질화시키며 양자 사이의 간격을 메꾸는 방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노매드랜드>의 주인공 펀은 그 반대의 위치에 놓인다. 그는 과거에 존재했던 실제를 탐색하는 허구다. 

 이러한 접근방식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본래 논픽션이었던 원작이 픽션으로 가공되며 발생한 간극은 자본주의 바깥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자본의 동선에 귀속되고 마는 이들의 모순적 사태를 보여주기 위한 영화의 내적 논리로 작동하지 못한다. 이 간극은 차라리 2020년의 픽션이 2010년대 초반의 방랑자들을 만나러 떠난 다크 투어리즘에 가깝게 느껴진다. 데이브가 방랑생활을 마치고 아들의 집에 자리 잡은 뒤, 그곳에 초대받은 펀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추수감사절이 지난 아침, 지붕 밑에서 맞이하는 밤이 어색해진 펀은 자신의 차로 돌아가 잠을 청한다. 다음날 아침 펀이 들어간 집에는 아무도 없다. 함께 추수감사절을 보낸 가족이 갑작스레 먼지가 되어 사라진 것처럼, 집 안에는 이들이 생활했다는 흔적만 남아있다. 다소 판타지적인 이 장면의 분위기는 영화 최후반부에 반복된다. 펀은 ‘US석고’의 공장과 그 인근의 위치한 남편과 살았던 집을 다시 찾는다. 먼지가 자욱하게 낀 텅 빈 공장과 사무실, 아무런 가구도 없는 텅 빈 트랙하우스(Tract House). 펀은 집의 뒷문으로 향한다. 그가 앞서 말한 대사처럼, 집의 뒷마당에서는 황량하고 드넓은 사막과 그 끝에 위치한 산의 풍경이 모든 시선을 사로잡는다. 펀은 마치 <수색자>의 존 웨인처럼 문 밖으로 나간다. 하지만 펀은 존 웨인처럼 광활한 사막을 향해 직진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화면 왼쪽으로 사라진다. 그는 그가 러닝타임 내내 보여준 동선을 반복할 것이다. 그가 사라진 화면엔 ‘US석고’ 공장에서 내뿜어졌을 석면과 같은 색의 풍경이 남아있다. 여기엔 <수색자>가 보여준 미래도, 아니면 <미나리>가 불타버린 ‘빅 가든’ 위에서 보여준 낙천성도 없다. 그래서 이 영화는, 황폐화된 ‘배드랜드’라는 과거로 떠나는 다크 투어리즘일 수밖에 없다. 애초에 관광이라는 것은 그곳의 현재가 아닌 과거를 목격하는 일이니까. 

 

 매주 쓰레기차를 놓쳐 쓰레기통 하나 비우지 못하고, 아내 베카(코니 닐슨)의 가족이 운영하는 회사에 얹혀 일하며, 다른 친척들과 달리 참전군인이면서 사무직만 했다고 아들에게 존경도 받지 못하는 갱년기의 남성 허치(밥 오덴커크)에겐 숨겨진 비밀이 있다. 어느 날, 집에 찾아온 강도가 돈과 함께 딸의 고양이 팔찌를 같이 가져가고, 그것을 되찾기 위해 길을 나선 허치는 버스에서 우연히 러시아 마피아 패거리와 다툼을 벌이게 된다. 알고 보니 과거 ‘감찰관’으로 불리는 직책을 맡아 비밀스럽고 폭력적인 업무를 계속해오던 그, 러시아 마피아 보스 율리안(알렉세이 세레브리아코프)의 명령으로 마피아들이 그를 잡으러 오자, “과도하게 개과천선”했던 그는 과거의 자신으로 되돌아온다.     

 <노바디>에 관련된 인물들의 면면이 상당히 화려하다. 영화 전체를 1인칭으로 연출했던 액션영화 <하드코어 헨리>를 비롯해 자신의 밴드 ‘Biting Elbows’와 러시아 밴드 ‘Leningrad’, 그리고 The Weeknd의 ‘False Alarm’ 등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해온 일리야 나이슐러가 연출을 맡았다. <존 윅> 시리즈의 각본가 데릭 콜스타드가 각본을, <존 윅>의 첫 영화를 비롯해 <아토믹 블론드>, <데드풀2>, <분노의 질주: 홉스&쇼> 등을 연출했던 데이빗 레이치가 제작을 맡았다. 뭔가 대단한 액션영화가 나올 것만 같은 제작진이지만, 영화의 주연은 <브레이킹 배드>와 <배터 콜 사울>로 알려진 코디미언이자 배우 밥 오덴커크다. <존 윅>의 키아누 리브스, 혹은 <테이큰> 시리즈의 리암 니슨 등과 상반된 그의 이미지는, “건드려서는 안 될 과거를 지닌 중년 남성” 캐릭터라기엔 어딘가 이상해 보인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건드려서는 안 될 과거를 지닌 중년 남성”을 건드린 적들을 주인공이 싹 쓸어버리는 부류의 영화들을 패러디한 것만 같다. 그래서일까, 주인공 허치의 성향은 존 윅이나 <테이큰>의 브라이언과는 다르다. 허치의 지루한 일상을 보여주는 영화의 초반부는 에드가 라이트가 편집한 <패터슨>처럼 느껴지는데, 이는 그를 자신의 과거를 떨쳐내고 사랑하는 가족과 새 인생 새 출발 하려는 캐릭터들과는 다른 성격을 부여한다. 존 윅이나 브라이언처럼 허치 또한 가족 혹은 그에 근접한 이들이 위협당함에 따라 적들을 몰살하게 되지만, 그는 가족을 이유로 자신의 본성을 억누른 채 살아가고 있으며 그것을 드러낼 순간을 항상 꿈꾸는 사람이다. 그가 버스에서 굳이 자신을 위협하지도 않는 러시아 마피아들을 공격한 것은, 단순히 자신이 폭력을 마음껏 휘둘러도 되는 악인들을 찾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동기에 따라 허치는 그간 자신이 돌아가길 소망했던 순간으로 되돌아간다. 주먹과 총을 휘두르고, 집안의 집기들을 통해 적과 결투를 벌이고, 가족 몰래 만들어둔 지하실 벙커를 활용하고, 재수 없는 이웃집 남자의 자동차를 훔쳐 카체이싱을 벌이며, 율리안의 사무실에 있는 고흐의 그림을 들고 유유히 집에 돌아간다. R등급 <나 홀로 집에>를 연상시키는 후반부 장면은 그러한 소망이 마침내 실현되는 순간이다. 심지어 그 소망은 전직 FBI인 늙은 아버지(크리스토퍼 로이드)와 의붓형제 해리(RZA)와 함께 이루어진다. 이들 또한 각자의 이유로 억누르던 본능을 마음껏 뽐내며 러시아 마피아들을 몰살한다. 이들의 목적은 선이 아니다.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서, 혹은 타의에 의한 본래 세계로의 복귀나 복수도 아니다. 이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구실이다. 영화도 그것을 알고, 캐릭터도 그것을 안다. 영화는 훵크와 올드팝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죽여도 괜찮다고 여겨지는 이들에게 무절제한 폭력을 휘두르며 자아를 회복하는 갱년기 중년 남성을 액션 코미디의 톤으로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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