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매드랜드>클로이 자오 2020 :: 영화 보는 영알못

*스포일러 포함

 

 2008년 금융위기의 여파로 2011년 네바다 주에 위치한 ‘US석고’의 공장이 문을 닫는다. 그곳에서 일하던 펀(프랜시스 맥도먼드)은 남편이 죽은 이후 방랑자 생활을 이어간다. 영화는 아마존 물류센터, 국가나 기업이 운영하는 캠핑장, 국립공원, 휴게소 내 식당 등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그의 모습과 함께, 그가 그리는 동선을 따라 마주치게 되는 다른 방랑자들의 모습을 담아낸다. 클로이 자오의 세 번째 장편영화 <노매드랜드>는 펀처럼 각자의 이유로 미국 어딘가를 떠돌며 살아가는 ‘노매드’들의 모습을 담아낸 작품으로, 제시카 브루더가 쓴 동명의 논픽션을 원작으로 한다. 프랜시스 맥도먼드와 데이브로 출연한 데이빗 스트라단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출연진이 본인으로 출연한다. 즉 <노매드랜드>에 등장한 방랑자들은 현재 실제로 방랑자 생황을 이어가고 있는 이들이다. 극 중 RV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밥 웰스는 실제로 극 중 등장하는 공동체를 조직한 인물이며, 유튜브를 비롯한 SNS를 통해 활동하는 인물이다. 

 다소 뜬금없지만 영화 초반 ‘노매드’라는 단어가 등장할 때마다 게임 <사이버펑크 2077>의 ‘노마드’들이 떠올랐다. 거대기업이 하나의 도시국가를 이루고 있는 2077년을 배경으로 한 이 게임에서, 오염된 도시에서의 삶 대신 방랑자의 삶을 택한 ‘노마드’들은 거대기업-국가의 존재로 인해 흘러나오는 다양한 일들을 처리하며 살아가는, 방랑하는 흥신소라 불러도 좋을 생활을 하는 이들로 묘사된다. <노매드랜드>의 방랑자들이 자동차를 자신의 집으로 여기는 것처럼, 방랑자이기에 자동차는 이들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집이나 다름없는 이동수단을 통한 방랑, 기업-국가-자본의 연결고리 바깥의 삶을 꿈꾸지만 결국 자본과 용역을 교환하며 살아가는 삶. <사이버펑크 2077> 속 ‘노마드’들의 삶은 <노매드랜드>의 방랑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남편의 유품을 정리하고 방랑을 시작한 펀은 아마존 물류창고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그의 RV가 주차된 곳은 아마존이 제공하는 캠핑구역이다. 그는 물류창고에서도, 캠프지기로도 일하며 돈을 번다. 펀을 비롯해 그가 방랑생활을 이어가며 마주치는 다른 이들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데이브는 국립공원 가이드로, 휴게소의 식당 보조로 일한다. 영화가 쫓는 펀의 방랑은 네바다에서 시작해 노스 다코다 등을 거쳐 다시 네바다로 돌아온다. ‘US석고’ 공장을 출발해 아마존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그의 방랑생활은 영화의 최후반부에서 다시금 반복된다. 펀은 방랑자지만 그의 동선은 결혼반지의 모양처럼 끝나지 않는 원을 그린다. 자본주의는 많은 노동자와 중산층의 삶을 실패로 몰아갔고, 방랑자들의 동선을 구성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거친 상황에서 “부동산은 기다리면 오르게 되어 있다”라고 말하는 한 중산층 인물의 대사는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영화에서 RV를 타고 방랑하는 이들의 공동체를 꾸리는 인물로 등장하는 밥 웰스는 자신의 유튜브 영상에서 자본주의 밖의 삶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들의 삶은 자본주의 밖에 위치하는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들의 삶은 자본주의 바깥으로 벗어나지 못한다. 국가-기업의 연결고리 속에 위치한 자본주의는 방랑자들의 동선마저 결정한다. 방랑자들 개인이 방랑을 택한 각각의 이유에 대해서는 각자의 해명이 가능하겠지만, 이들은 결국 펀처럼 큰 단위의 동선을 그리며 살아가는 자본주의 내의 철새와 같은 삶을 살아간다. 원작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발생한 방랑자들의 삶을 추적했다면, 영화는 방랑하는 삶을 택한 이들이 어쨌든 자본주의 밖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모순을 담아내려는 것만 같다. 하지만 영화는 그 모순을 내적으로 보여주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TV쇼에 등장한 자연인이 자연스럽게 산 밑으로 내려가 장을 봐오는 그림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자연화된 모순으로 영화 여기저기에 흩뿌려져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방랑은 어떤 여정인가? 자본주의의 동선을 따르면서 자본이 가린 미국의 풍경을 (재)발견하는 것? 혹은 펀의 친자매가 이야기한 것처럼 과거의 서부 개척자들이 했던 일을 반복하는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해선 펀이 어떤 인물인지를 알아내야 한다. 하지만 영화 내내 펀은 모호할 뿐이다. 실제 방랑자들을 캐스팅한 다른 방랑자 캐릭터들 사이에서, 펀은 초보 방랑자로서 이들 사이를 떠돌고 있을 뿐이다. 그는 왜 남편이 죽은 뒤 방랑을 택한 것인지, ‘US석고’ 인사과와 기간제 교사와 할인마트 등에서 일하던 그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관객은 알 수도 없고 그것을 알아낼 의지를 지니지도 못한다. 영화가 그의 과거를 숨기지 않지만 그것을 묘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매드랜드>는 2018년 가을에 촬영되었다. 2018년을 살아가는 방랑자들은 2011년 말에서 2013년 초에 이르는 시간을 연기한다. 그것이 만들어낸 간극 속에 펀이라는 가상의 캐릭터가 놓인다. 이 캐릭터는 영화가 보여주는 방랑생활의 일상, 동선, 풍경 속에서 부유한다. 펀은 고아이고 자식도 없는 죽은 남편을 기억하는 이가 자신밖에 없기에 살아간다고 한다. 처음의 그는 다른 방랑자들과 공동체를 형성할 생각도 없었다. 관객이 그에게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그가 살아가고 있는 공허하고 동질적인 순간뿐이다. 그의 삶은 북미대륙 중서부의 광활하고 황량한 풍경 속에서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것도, 다른 방랑자인 스왱키처럼 자연 자체에 대해 대단한 감동을 느끼는 것도, 과거의 기억에 대해 계속 반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펀은 <노매드랜드>가 실제 방랑자들의 삶을 담은 프레더릭 와이즈먼 식의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배우와 각본이 요구되는 픽션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다. 다시 말하자면 카메라가 그와 그의 주변에 놓인 다른 방랑자들을, ‘매직 타임’의 황홀한 태양빛도 아무런 감정적 효과를 주지 못하는 미국 중서부의 황량한 풍경을, 방랑하는 삶에서도 계속되는 자본주의적 노동 현장을, 방랑의 삶을 택한 펀에 대해 말을 보태는 중산층 계급 사람들의 말을 담기 위해 펀이 존재한다. 프랜시스 맥도먼드의 (언제나처럼) 놀라운 연기는 러닝타임을 지탱해줄 뿐 영화와 펀이라는 캐릭터의 존재 논리를 성립하게 하진 못한다. 클로이 자오의 전작 <로데오 카우보이>는 전문 배우가 아닌 극 중 주인공과 같은 사건을 겪은 실제 인물이 주인공이었다. 그의 삶을 재연하는 그의 연기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15시 17분 파리행 열차>에서처럼 실제와 픽션의 이미지를 동질화시키며 양자 사이의 간격을 메꾸는 방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노매드랜드>의 주인공 펀은 그 반대의 위치에 놓인다. 그는 과거에 존재했던 실제를 탐색하는 허구다. 

 이러한 접근방식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본래 논픽션이었던 원작이 픽션으로 가공되며 발생한 간극은 자본주의 바깥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자본의 동선에 귀속되고 마는 이들의 모순적 사태를 보여주기 위한 영화의 내적 논리로 작동하지 못한다. 이 간극은 차라리 2020년의 픽션이 2010년대 초반의 방랑자들을 만나러 떠난 다크 투어리즘에 가깝게 느껴진다. 데이브가 방랑생활을 마치고 아들의 집에 자리 잡은 뒤, 그곳에 초대받은 펀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추수감사절이 지난 아침, 지붕 밑에서 맞이하는 밤이 어색해진 펀은 자신의 차로 돌아가 잠을 청한다. 다음날 아침 펀이 들어간 집에는 아무도 없다. 함께 추수감사절을 보낸 가족이 갑작스레 먼지가 되어 사라진 것처럼, 집 안에는 이들이 생활했다는 흔적만 남아있다. 다소 판타지적인 이 장면의 분위기는 영화 최후반부에 반복된다. 펀은 ‘US석고’의 공장과 그 인근의 위치한 남편과 살았던 집을 다시 찾는다. 먼지가 자욱하게 낀 텅 빈 공장과 사무실, 아무런 가구도 없는 텅 빈 트랙하우스(Tract House). 펀은 집의 뒷문으로 향한다. 그가 앞서 말한 대사처럼, 집의 뒷마당에서는 황량하고 드넓은 사막과 그 끝에 위치한 산의 풍경이 모든 시선을 사로잡는다. 펀은 마치 <수색자>의 존 웨인처럼 문 밖으로 나간다. 하지만 펀은 존 웨인처럼 광활한 사막을 향해 직진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화면 왼쪽으로 사라진다. 그는 그가 러닝타임 내내 보여준 동선을 반복할 것이다. 그가 사라진 화면엔 ‘US석고’ 공장에서 내뿜어졌을 석면과 같은 색의 풍경이 남아있다. 여기엔 <수색자>가 보여준 미래도, 아니면 <미나리>가 불타버린 ‘빅 가든’ 위에서 보여준 낙천성도 없다. 그래서 이 영화는, 황폐화된 ‘배드랜드’라는 과거로 떠나는 다크 투어리즘일 수밖에 없다. 애초에 관광이라는 것은 그곳의 현재가 아닌 과거를 목격하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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