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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는 러닝타임이 840분, 14시간이나 되는 다큐멘터리이다. <우먼 메이크 필름>이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영화는 여성감독이 연출한 작품들에 대한 다큐멘터리이다. 다만 영화의 부제는 원래 ‘영화사가 잊은 영화들’이 아니라 ‘A New Road Movie Through Cinema’로, 번역하자면 ‘영화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로드무비’ 정도의 의미가 된다. 영화는 오프닝, 분위기, 대화, 프레이밍, 스테이징, 발견, 시점, 클로즈업, 꿈, 죽음, 사랑, 종교, 노동, 정치, 긴장감, 기억, 시간, 신체, 섹스, 엔딩 등 40개의 키워드를 183명의 여성감독이 연출한 400여 편의 영화를 통해 설명한다. 탠디 뉴튼, 데브라 윙거, 제인 폰다, 케리 폭스, 아드조 안도, 샤밀라 타고르 등의 여성 배우들이 내레이션을 맡았고, 틸다 스윈튼은 내레이션과 함께 영화의 제작도 맡았다.

 영화는 틸다 스윈튼의 내레이션이 설명하듯 여성감독들의 영화들로 영화사를 다시 쓰거나 기존의 영화사를 해체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성감독이 연출한 영화의 리스트를 제공하려는 것도 아니다. (물론 상당히 유용하고 충실한 리스트이긴 하다) 이 영화는 “모든 선생님이 여성인 영화학교”에 가깝다. 생각해보면 마크 커즌스가 뽑은 40여개의 키워드는 루이스 자네티의 [영화의 이해]나 데이비드 보드웰, 크리스틴 톰슨의 [영화예술]과 같은 ‘교과서’들의 목차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사랑, 꿈, 기억 등 추상적인 키워드들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영화는 수많은 영화들에서 각 키워드에 알맞은 장면들을 뽑아, 그들이 해당 키워들을 영화 속에서 어떻게 수행했는지, 어떻게 보여주었는지를 설명한다. 가령 신체에 대해 이야기할 때 아녜스 바르다의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 셀린 시아마의 <톰보이>, 레니 리펜슈탈의 <올림피아>, 마야 데렌의 <변형된 시간의 의식> 등이 차례로 언급되는 방식이다. 바르다와 시아마, 그리고 야스민 아메드와 안드레아 아놀드가 신체를 젠더권력이 교차되고 드러나는 장소로서 사용했다면, 리펜슈탈이나 데렌은 신체 자체의 조형성을 영화에 담으려 했다는 식의 설명이 붙는 방식이다.

 때문에 <우먼 메이크 필름>은 흔히 말하는 ‘오디오-비주얼 크리틱’의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비평’보다는 기술적인 ‘분석’ 작업에 가깝다. 마크 커즌스는 자신이 인용하는 모든 영화에 대해 ‘위대한 영화들’이라는 상찬만을 건넬 뿐, 별다른 평가를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영화는 어떤 영화에 대한 가치평가와 미적 우위를 가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우먼 메이크 필름>의 목적은 여성이 연출한 영화만으로 모종의 영화 교육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에 가깝다. 그간 여성감독의 영화는 영화사의 어떤 국면, 가령 프랑스 누벨바그의 아녜스 바르다, 할리우드 황금기의 아이다 루피노, 90년대 액션영화엔 캐서린 비글로우를 언급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언급되었을 뿐이다. 위의 문단에서 언급한 책을 펼쳐보면 대부분의 키워드는 찰리 채플린, 알프레드 히치콕, 오손 웰즈, 장 뤽 고다르,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들을 예시로 꼽고 있다. <우먼 메이크 필름>은 그 예시들을 아녜스 바르다, 도로시 아즈너, 아이다 루피노, 클레르 드니, 캐서린 비글로우, 알리스 기 블라쉐로 대체하는 작업이다. 그 지점에서 <우먼 메이크 필름>은 얼핏 유사한 기획인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들)>과 갈라선다.

  <우먼 메이크 필름>은 픽션과 다큐멘터리, 실험영화, 무성영화와 유성영화, 단편과 장편 등을 가리지 않고 인용한다. 이 리스트는 <웨스트월드>나 <시녀 이야기> 등의 TV 시리즈를 포괄하고, 마지막 키워드인 ‘노래와 춤’에서는 비욘세의 ‘레모네이드’ 뮤직비디오를 인용한다. 이 영화 안에선 연출된 영상이라면 그 안에 이렇다할 위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다. 콘텐츠의, 매체의 위계가 없는 영화학교를 꿈꾸는 것일까? 영화가 인용하는 다양한 시대의, 국적의, 언어의 영화들은 마크 커즌스의 인용을 통해 하나의 덩어리로 묶인다. 바르다, 아이다 루피노, 키라 무라토바 등 이미 ‘정전’에 오른 이들의 이름뿐 아니라, 켈리 라이카트나 에바 듀버네이, 림 렌지, 패티 젠킨스 같은 최근의 이름들, 더 나아가 율리야 솔른세바, 트린 T. 민하, 몰리 수리아, 다나카 카누요, 알리체 로르바커, 마티 디옵, 데니즈 겜즈 에르구벤 등 동유럽, 동남아시아, 동아시아, 아프리카, 중동의 감독들 또한 언급된다. 한국의 감독으로는 남한의 첫 여성감독 박남옥의 <미망인>과 김소영의 <나무 없는 산>이 인용되었다. 

 여기서 <우먼 메이크 필름>의 비평적 기능이 드러난다. 마크 커즌스는 자신이 인용하는 개별작품에 대한 비평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비평대상은 개별영화나 영화사가 아닌 영화에 대한 교육이 무엇을 통해 이루어졌는지, 즉 영화교육에 대한 비평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우먼 메이크 필름>은 한 작가를 파고드는 <오손 웰즈의 눈으로>나 도시에 대한 에세이필름인 <아이 엠 벨파스트> 등의 전작과 구분된다. <우먼 메이크 필름>은 그간 자연스럽게 남성감독의 영화, 남성주연의 영화, 남성중심 서사의 영화로 구성된 영화교육을 뒤바꿔 놓는다. 14시간에 달하는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데브라 윙거의 내레이션은 이렇게 말한다. “여성 감독들의 영화엔 더 많은 여성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의 말과 함께 세상을 떠난 여성감독들의 사진이 등장하고, 알리스 기 블라쉐의 사진과 함께 마크 커즌스가 직접 찾아간 알리스 기 블라쉐의 묘지가 등장한다. 이 영화는 영화사에서 잊힌 영화들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영화교육에서 자연스레 잊히게 된 여성 영화인들에 대한 영화이자, 그들이 해낸 것들에 대한 영화다. 

 다만 그 과정에서 인용된 모든 영화와 장면을 동일선상에 두고 이야기할 필요성을 인정한다 해도, 모든 방식의 연출을 긍정하는 듯한 병렬적 인용과 내레이션은 다소 아쉽게 느껴진다. 가령 ‘신뢰성’ 챕터에서 디나라 아사노바의 <당신이 선택한 것>을 언급하며, 한 여자아이가 위태롭게 지붕 위를 걷는 장면에 대해 단순히 ‘영화에 신뢰성을 부여하기 위한 방법’ 정도로 묘사하는 것은 다소 위험하게 느껴진다. 혹은 ‘SF’ 챕터에서 발리 엑스포트의 <인비저블 애드버서리>에서 살아있는 물고기와 곤충을 칼로 죽이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 또한 단순히 하나의 방법으로써 제시될 뿐이다. 이는 <우먼 메이크 필름>을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새로운 질문을 던져주지만, 스스로 ‘영화학교’를 표방하고 있는 만큼 다양한 방법론과 함께 그것의 윤리에 대한 언급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고 보니 키워드에 ‘윤리’가 없다는 사실이 살짝 의아하다.

 클레어(아이슬링 프란쵸시)는 영국군에 의해 아일랜드에서 오스트레일리아로 끌려온 죄수다. 그곳에서 형기를 살며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 그와 남편은 영국군 중위 호킨스(샘 클라플린) 밑에서 일하고 있다. 하지만 형기를 다 채운 이후에도 호킨스가 약속한 통행증을 주지 않자, 클레어의 남편은 호킨스를 때리고 만다. 그날 밤, 호킨스와 부하들은 클레어의 오두막에 찾아와 남편과 아기를 살해하고 클레어를 강간한 뒤 다른 마을로 떠난다. 살아남은 클레어는 길잡이인 원주민 빌리(베이컬리 거넴바르)를 고용해 이들의 뒤를 쫓는다. <바바둑>으로 이름을 알린 제니퍼 켄트의 신작 <나이팅게일>은 익숙한 여성수난극/복수극의 전개를 쫓는다. 하지만 136분의 짧지 않은 러닝타임은 수단에서 복수로 이어지는 전개를 성실하게 따라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클레어와 빌리의 동행은 클레어가 겪은 고통과 수난을 넘어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의 식민지였다. <나이팅게일>은 영국의 식민지배 하에 놓인 1825년의 오스트레일리아를 담아낸다. 원주민들은 학살당하고,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숲 속을 이동하는 백인들의 길잡이로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클레어처럼 끌려온 죄수들은 영국군의 노예처럼 살아간다. 영화는 크게 두 종류의 폭력을 묘사한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 타인종에 대한 백인의 폭력. 이는 곧 제국주의적 침략을 본격화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지역을 식민화하는 영국-백인-남성의 폭력이다. 그 인해 밑바닥으로 끌려내려 온 두 사람은, 고향에서 먼 곳으로 끌려오거나 고향 자체를 상실한 이들이다. 때문에 두 사람의 만남은 우연이지만 동시에 필연적이다. 백인 여성인 클레어가 빌리를 경계하다 동행이 길어지며 모종의 연대감을 나누는 과정은 그 우연을 필연으로 변화시킨다. 

 이 지점에서 지난 10월에 본 켈리 라이카트의 <퍼스트 카우>가 떠올랐다. 사실 두 영화는 꽤 많은 부분에서 닮았다. 19세기 초라는 시간적 배경, 서부개척시대와 식민시대라는 제국주의적 시공간, 두 영화의 숏들을 섞어 놓더라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유사한 숲의 이미지, 1.37:1이라는 화면비. 광활해 보이는 숲의 높이 솟은 나무와 화면을 가득 뒤덮은 덤불 사이에서 쪽잠을 청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좁은 화면비 속에서 어떤 감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퍼스트 카우>의 숲은 두 주인공이 은신하는 공간이었다면, <나이팅게일>의 숲은 두 주인공이 추격을 펼치는 곳이자 생명의 위협에 대비해 항상 긴장해야 하는 곳이며, 더 나아가 클레어가 겪은 고난의 트라우마가 미로처럼 펼쳐지는 공간이다. 때문에 <퍼스트 카우>가 자발적이고 사적인 연대와 우정을 다룬다면 <나이팅게일>은 밑바닥으로 내몰린 아일랜드인 여성과 원주민 남성의 생존에 대한 연대라는 점에서 크게 달라진다. 

 즉 <나이팅게일>은 영국 제국주의의 주요 희생자인 여성과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뜻밖의 연대를 향해 나아간다. 여기엔 통쾌한 복수는 없다. 그런 복수는 클레어와 빌리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다. 더군다나 영화 속에서 가장 통쾌하다고 할 복수는 클레어와 그의 가족을 공격한 이들 중 가장 소극적인 이에게 가해진다. 문명의 탈을 쓴 가부장제적 제국주의는 그것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는 이를 탈락시켜버린다는 것일까?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나이팅게일>은 단순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방식으로 복수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영화는 ‘나이팅게일’의 목소리를 가졌다고 불리는 클레어와, 부족의 거의 유일한 생존자인 빌리가 각자 노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클레어는 영국군 앞에서 부르던 영어 노래 대신 아일랜드어로 된 노래를, 빌리는 부를 수 없었던 부족의 노래를 부른다. 그러고 보니 클레어는 나이팅게일이고 빌리는 망가나(그의 원주민 이름으로 ‘검은 새’라는 뜻)이다. 두 사람은 마침내 자신의 말로 노래한다. 두 사람의 동행은 이 노래를 향한 것이었다. 

 전편 이후 다이애나(갤 가돗)은 정체를 숨기고 고고학자로 살아가고 있다.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서 일하는 그는 이제 막 새로 입사한 바바라(크리스틴 위그)와 친밀해진다. 그러던 중 FBI가 감정을 부탁한 유물들이 들어오고, 그 중엔 소원을 들어주는 대가로 무언가를 가져가는 능력을 지닌 ‘드림스톤’이 섞여 있다. 그 스톤을 노린 사업가 맥스 로드(페드로 파스칼)은 바바라에게 접근한다. 얼떨결에 드림스톤에 소원을 빌어 죽은 스티브(크리스 파인)을 되살린 다이애나는, 드림스톤을 차지한 뒤 자신의 욕망을 분출하는 맥스와 다이애나처럼 되길 욕망하는 바바라에게 맞서게 된다. 코로나 19로 인해 몇 차례 개봉이 연기됐던 <원더우먼 1984>는 제목처럼 1984년을 배경으로 한다. 얼떨결에 MCU 영화가 한 편도 개봉하지 못한 2020년에 DCFU는 <버즈 오브 프레이: 할리 퀸의 황홀한 해방>과 이 영화 두 편을 개봉하게 되었다.

 <원더우먼>은 DCFU의 다른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독특한 위치에 놓여 있다. 다른 영화들을 떠올려보자. <맨 오브 스틸>부터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 <수어사이드 스쿼드>, <버즈 오브 프레이>는 현실을 비튼 평행우주를(메트로폴리스, 고담), <아쿠아맨>은 신화적 소재를(아틀란티스), <샤잠!>은 슈퍼히어로들이 존재하는 일종의 대체역사를 택했다. 반면 <원더우먼>의 배경은 (물론 신화적 공간인 데미스키라가 등장하지만) 언제나 현실의 역사에 속한 공간이었다. 전편의 배경은 세계 1차대전 당시의 유럽이고, 이번에는 1984년 냉전시기의 세계 곳곳이다. 이러한 기조는 DCFU뿐 아니라 애로우버스(혹은 CW버스)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유독 <원더우먼> 시리즈만이 여기서 벗어나 있다. 전작은 주제적인 측면에서 이를 적절하게 활용했다. 나치가 등장했던 2차대전이 아닌 1차대전을 배경으로 삼으면서 역사적으로 ‘악’으로 판명난 집단에게 단순하게 응징을 가하는 것이 아닌, 언제든지 악해질 수 있는 것이 인간임을 드러내는 방식을 택했다. 물론 이 때문에 영화가 다소 납작해지긴 했지만, ‘No Man’s Land’ 등의 인상적인 장면을 담아내었고 잭 스나이더가 구축한 DCFU 특유의 비주얼과 액션 스타일을 가져오며 나름의 성공을 거뒀다. 다시 말해, <원더우먼> 1편이 현실 역사를 배경으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나갈 당위는 영화 내에서 충분히 설명되었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그렇지 않다. 영화를 보는 내내 왜 배경이 1984년인지 당최 알 수 없었다. 팝컬처가 부흥하고 이미지 소비의 극한을 달리던 1984년 미국의 소비문화를 보여주는 초반부는 얼핏 그 시기가 얼마나 거품으로 가득했는지를, 잔뜩 부풀려진 껍데기와 포장의 시대였는지를 보여준다. 적어도 그 장면들을 볼 때만큼은 그러했다. <기묘한 이야기>의 대성공 이후 쏟아지는 80년대 배경의 영화, 혹은 그 시기의 창작물을 활용하는 일련의 작품들처럼 느껴지지만, <원더우먼 1984>의 초반부는 그 작품들이 묘사하는 80년대의 이미가 팝컬처와 미디어가 과장하고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들을 착취함으로써 얻어지는 이미지들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과장이라 여겨질 정도로 그 당시의 방식대로 쇼핑몰, 패션, 노출이 심한 운동복 등을 재현하고, 그 속에서 스포츠카를 타고 폭주하는 젊은 남성들이나, 길거리의 여성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남성들을 반복해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스티브의 복귀 이후 이 영화가 80년대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특히 (아마도) 석유파동 이후 망한 사업가처럼 보이는 맥스 로드의 존재는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있다는 것과, 냉전시대와 핵무기를 바로 연결 짓는 단순함은 도리어 영화의 배경이 1984년이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를 계속 상기하게끔 한다.

 캐릭터의 서사를 현실 역사와 밀착시켜온 엑스맨 프랜차이즈의 사례를 떠올려보자. 매그니토는 아우슈비츠를 탈출한 유대인이고 울버린은 남북전쟁부터 베트남전까지 참전해온 군인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냉전시기를 관통하며 쿠바 핵전쟁 위기를 비롯한 여러 역사적 사건들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이는 엑스맨 캐릭터의 기원 자체가 서구권의 여러 인종적, 페미니즘적, 퀴어적 민권운동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반면 DCFU의 캐릭터들 대부분 신화적 기원을 갖추고 있다. 신적인 존재에 가까운 외계인이거나, 자본주의 신화가 만들어낸 재벌이라거나, 아니면 아예 신화와 마법 속에서 튀어나온 존재들이다. 때문에 이들은 뉴욕 등의 실제 도시가 아닌 가상의 도시에서 활동한다. 어쩌면 <원더우먼 1984>가 실패한 것은 여기서 출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패티 젠킨스는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80년대 영화처럼 촬영했다고 이야기했다. 여러 액션 시퀀스에서 CG대신 와이어를 활용하였고, 빌런을 묘사하는 방식 또한 80년대 SF 액션 영화의 것과 유사하게 연출되었다. 맥스 로드가 전세계인을 향해 생방송을 진행하는 시퀀스에서 푸른 불빛 안에 놓인 얼굴 클로즈업은 그 당시의 SF영화들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것이 1984년을 영화가 활용하는 것에 대한 당위를 제공하진 않는다. TV 시리즈 <원더우먼>의 린다 카터가 카메오출연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TV 시리즈처럼 냉전시기라는 배경을 적극적으로 끌어오지도 않는다. 진실을 강조하고 탐욕을 멈춰야 한다는 다소 뻔한 교훈적 메시지는 직설적으로, 그것도 대부분 연설조의 대사로만 구성되어 이렇다할 감흥을 주지 못하며, 미디어가 부풀린 이미지의 거품에 대한 이야기도 진부하게만 언급된다. 이 과정에서 80년대는 다시 한번 껍데기로만 존재한다. 예고편에 등장한 뉴 오더의 “Blue Monday '88 Dub”은 어디로 갔는가? 1984년이 배경이기에 1986년에 발매된 노래는 예고편에서만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라면, <원더우먼 1984> 또한 80년대의 껍데기가 남긴 부스러기만을 주워담는 또 하나의 영화일 뿐이다. 

 

p.s. 여담이지만 DC의 여러 실사화 프로젝트 중 가장 성공한 것은 애로우버스라 생각한다. MCU <스파이더맨 3>에 이전 스파이더맨들이 출연한다는 루머가 도는 와중에 2019년 말 공개된 ‘크라이시스 온 인피닛 어스’ 크로스오버는 이를 썩 훌륭하게 만들어냈다. <슈퍼걸>에서 대통령으로 출연하던 린다 카터가 원더우먼으로 출연하는 것이 불발되어 아쉬울 뿐이다.

 

 어텀(시드니 플래너건)은 펜실베니아 시골 지역에 사는 가수 지망생이다. 그는 학교를 다니며 사촌 스카일라(탈리아 라이더)와 함께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어느 날, 그는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자신이 임신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펜실베니아는 임신중절이 불법이다. 집 인근의 클리닉에서는 임신중절에 대한 도움 대신 낙태 반대 비디오를 보여줄 뿐이다. 그는 모아둔 돈을 털어 스카일라와 함께 의학적 도움을 구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난다. <전혀 아니다, 별로 아니다, 가끔 그렇다, 항상 그렇다>라는 긴 제목(원제는 <Never, Rarely, Sometimes, Always>)을 지닌 이 영화는 어텀과 스카일라의 짧은 여정을 담아낸다. 임신중절에 대해 어떤 운동을 보여준다거나, 두 사람의 여정이 대단한 모험을 동반한다든가, 어텀이 가족과 대치하고 도망간다거나, 임신중절을 위한 거창한 계획을 세운다든가 하는 등의 큰 사건은 벌어지지 않는다. 이 영화는 <시티즌 루스>와 같은 영화가 아니다. 두 사람은 그저 임신중절이 합법인 도시에 가서 임신중절 수술을 받고 돌아올 뿐이다.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영화의 제목은 설문조사의 응답 항목이다. 뉴욕의 임신중절 클리닉을 찾은 어텀은 수술을 받기 전 구두로 진행되는 설문조사 과정을 거친다. 이는 17살 미성년자인 어텀의 임신이 폭력에 의한 것인지, 혹은 다른 사연에 의한 것인지 등을 조사한다. 다분히 사무적이지만 점점 격해지는 어텀의 감정에 따라 천천히 이야기해도 된다고 말하는 상담가의 말은 어텀이 펜실베니아에서 듣지 못했던 종류의 말이다. 이는 그와 동행한 스카일라 또한 해내지 못한 말이기도 하다. 이들에게 그러한 종류의 말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전혀 아니다, 별로 아니다, 가끔 그렇다, 항상 그렇다”라는 지극히 객관적이고 사무적인 단어들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암컷 반려견을 ‘Bitch’라 부르는 가부장의 언어로 가득한 펜실베니아에서 접할 수 없었던 종류의 언어다. 때문에 뉴욕을 찍고 다시금 집으로 돌아오는 어텀의 여정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자신의 상황을 헤아려 줄 최소한의 언어와 만나는 여정이다. 

 영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만약 이 여정이 어텀의 이야기만으로 끝나는 것이었다면 스카일라는 등장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스카일라는 다소 소심한 어텀과 다르다. 그가 마트 점장을 상대하는 모습은 소위 ‘사회생활’이라는 이름으로 삭제되는 직장 내 성희롱을 견뎌내는 모습이다. 그는 그것에 익숙해져 있으며, 필요할 때는 그것을 이용하기도 한다. 물론 스카일라가 그것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한다고 하여 그에게 가해지는 성착취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어텀이 뉴욕으로 떠날 용기와 지지에 스카일라가 필요했듯이, 스카일라 또한 어텀의 손길과 연대가 필요한 존재다. 버스를 타고 뉴욕에 도착한 두 사람은 재스퍼라는 남자를 만난다. 두 사람보다 약간 나이가 많아 보이는 그는 두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등의 호의를 베푼 대가로 스카일라의 전화번호를 얻는다. 여정의 마지막, 펜실베니아로 돌아가야 하는 두 사람은 어텀의 수술로 인해 돈이 떨어진 상황이다. 스카일라는 어쩔 수 없이 재스퍼에게 도움을 청하고, 그는 두 사람과 함께 볼링을 치고 가라오케에 들러 시간을 보내다 어텀이 없는 사이 스카일라에게 키스한다. 두 사람을 찾아 버스터미널을 헤매던 어텀은 기둥 뒤에서 키스하는 스카일라의 손을 잡는다. 어텀의 여정에 스카일라가 동행했듯, 어텀은 스카일라에게 손을 내민다. 자신에게 필요한 언어와 의료적 조치를 위해 떠난 어텀의 여정은, 서로가 서로에게 손을 내어줄 수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펜실베니아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밖에서 들어오는 햇볕을 받으며 한층 불안이 가신 어텀의 표정에서 환하게 드러난다.

*스포일러 포함

 

 쇠락해가는 야쿠자 조직의 멤버 카세(소메타니 쇼타)는 부패경찰 오토모(오모리 나오)와 손잡고 마약을 빼돌릴 계획을 세운다. 그 계획이란 조직의 마약 운반책이 감금하고 있는 모니카(코니시 사쿠라코)가 마약을 훔쳐 도망간 것으로 위장하는 것. 한편 권투선수인 레오(쿠보타 마사타카)는 시합에서 다운된 이후 진행된 병원 검사에서 뇌종양 판정을 받고 밤거리를 방황하고 있다. 레오는 우연히 오토모에게 쫓기던 모니카를 구해주고 함께 도주하게 되며, 카세가 세운 계획에 휘말리게 된다. 끔찍했던 <테라포마스>를 포함해 <악의 교전>, <신이 말하는 대로>, <죠죠의 기묘한 모험> 등 원작 기반의 영화를 꾸준히 연출해온 미이케 다카시의 신작 <퍼스트 러브>는 그가 <도쿄 아포칼립스> 이후 5년 만에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제작한 작품이다. <도쿄 아포칼립스> 이후로 오랜만에 야쿠자물을 내놓았다는 것 또한 흥미로운 지점이다.

 사실 미이케 다카시의 최근작들은 거의 보질 않았다. <악의 교전>과 <신이 말하는 대로> 정도만 챙겨봤는데, 두 작품 모두 원작 소설/만화보다 못한 작품이고, 전형적인 양산형 일본영화에 가까웠기 때문에 꽤나 실망했었다. 물론 2010년대 이전의 미이케 다카시도 <크로우즈 제로>나 <용과 같이>, <착신아리>처럼 만화나 게임, 소설 등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을 꾸준히 연출해왔고, 김지운의 <조용한 가족>을 리메이크한 <카타쿠리가의 행복> 같은 작품도 있었다. 다만 앞선 영화들은 V시네마로 데뷔한 감독의 취향에 맞춰져 있는, 일본 B급 영화들의 계보를 충실히 이어가는 작품들에 대부분이었다. <이치 더 킬러>나 <오디션> 등의 대표작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다만 2010년대 들어 그가 연출한 원작 기반 영화들은 조악한 CG와 특수분장 등을 통해 원작(주로 만화나 아니메)을 실사로 옮겨왔을 뿐, 과거의 작품들과 같은 재미를 주진 못했다. 

 미이케 다카시의 커리어에 대해서 좀 길게 이야기한 이유는 <퍼스트 러브>가 미이케 다카시의 필모그래피라는 맥락 안에서 나름대로 흥미로운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퍼스트 러브>는 <후도>, <신주쿠 흑사회>, <풀 메탈 야쿠자> 등 그가 V시네마 시절이나 데뷔 초에 연출해온 장르 혼종적 B급 야쿠자물을 이어가는 작품이다. 이는 야쿠자물이 몰락을 맞이했음에도 그것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아웃레이지>를 3편까지 만들어낸 기타노 다케시의 근작들과도 구분된다. <퍼스트 러브>는 고레에다 히로카즈부터 소노 시온, 구로사와 기요시, 그리고 미이케 다카시 본인까지 꾸준히 언급하고 있는 일본영화의 몰락에 대한 나름의 (뒤늦은) 답변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고레에다는 프랑스와 한국에서 영화를 제작하고, 소노 시온은 아마존 프라임을 비롯한 미국의 자본으로, 기요시는 NHK와의 합작으로, 즉 일본의 ‘거장’이라 불릴 만한 최근의 감독들이 모두 일본의 3대 스튜디오(토호, 닛카츠, 토에이)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그런 와중에 미이케 다카시는 필름 그레인이 자글자글한 토에이 파도 로고와 함께 시작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 내내 언급되는 것은 무력으로 세력을 유지하는 야쿠자 조직의 문제다. 카세가 몸 담고 있는 조직은 스스로가 몰락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 다른 조직들이 국외로 진출하여 살길을 찾거나, 중국 조직이 야쿠자의 빈자리를 차지하는 상황이 그려진다. 극에 등장하는 카세의 조직 또한, 상부조직이 있다고 언급되긴 하지만 6~7명 정도가 조직원의 전부다. 극 후반부 조직의 보스 곤노(우치노 세이요)가 레오에게 “야쿠자가 되면 바로 넘버3가 될 수 있어”라 말하는 것은 정말로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카세의 계획은 야쿠자로써의 생존을 위한 것이라기보단, 조직을 등쳐먹고 자신 혼자 살겠다는 것에 가깝다. 중국 조직의 멤버가 “야쿠자들이 맹자의 ‘인의’를 강조하는 것을 보고 왔다가 실망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상황을 이상한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카세의 계획은 레오의 갑작스러운 개입으로 실패한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굳이 레오의 개입 없이도 카세의 계획은 높은 확률로 실패했을 가능성이 크다. 마약과 트라우마로 인한 모니카의 환각, 주리(베키)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움직임, 카세의 바보 같은 실수들 등이 수차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끝은 당연하게도 파국이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퍼스트 러브>의 이야기는 카세가 속한 야쿠자 조직의 (완전한) 몰락 과정이자, 이들의 대척점에 놓인 중국 조직의 몰락이며, 야쿠자라는 폭력조직이 더 이상 이어질 수 없는 시대적 조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상징적 아버지들이 죽는 것들로 이어진다. 모니카는 자신을 쫓아오던 착취자 아버지의 환영에 대고 그것의 고간을 발로 차 버리며, 두 조직의 보스는 서로의 몸에 칼을 꽂아 넣어 죽음을 맞이한다. 그중에서 곤노가 죽음을 맞는 방식이 독특하다. 모든 것이 끝나고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경찰에 쫓기던 그는 레오와 모니카를 내려주고 차를 운전하다 죽음을 맞이한다. 그는 죽기 전 “야쿠자에게 아침해는 어울리지 않아”라고 말한다. 밤새 혈투를 벌이다 온몸이 피를 바르고 뜨는 해를 바라보며 죽음을 맞이하는 그의 모습은, 언뜻 뱀파이어의 죽음을 묘사하는 것과 유사하다. 뱀파이어는 어떤 괴물인가? 그것은 영속적이지만 햇빛에 의해 죽을 수 있는 존재이고, 목을 물어 후계자를 만들어내는 세습 과정을 거치며, 이곳저곳을 방랑하기보단 (물론 그렇게 묘사된 뱀파이어 캐릭터도 있지만) 한 곳에 정착하여 그 일대를 자신의 영토로 삼는 존재다. 즉 뱀파이어는 귀족의 속성을 지닌다. 그것은 손가락을 자르고, 세습 과정을 거치고, 활동영역을 지니는 야쿠자의 생태와 유사하다. 

그 생태계를 최종적으로 교란하는 레오와 모니카의 존재는 뱀파이어의 존재적 지위와 반대에 위치해 있다. 우선 이들은 집 없이 떠돌며 살아간다. 모니카는 아버지가 그를 팔아버렸으며, 감금상태에 놓여 있다. 레오는 집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 숏에서나 등장한다. 레오가 모니카를 만나기 전까지 관객은 방랑하는 그를 볼 수 있을 뿐이다. 더불어 두 사람은 병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다. 모니카는 마약중독과 트라우마로 인한 환각을, 레오는 뇌종양으로 인한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갈 곳 없이 본능적으로 떠도는 두 사람의 모습은 얼핏 의식 있는 좀비와 같이 보인다. 둘 모두는 영화의 마지막, 즉 뱀파이어적 존재인 야쿠자들의 괴멸 이후에 이를 극복한다. 아니, 뱀파이어적 존재의 괴멸 과정 자체가 이들이 지닌 질병의 극복 과정이다. 

 <퍼스트 러브>가 그려내는 인물 구성을 이렇게 재편하고 바라볼 때, 카세는 뱀파이어적 존재의 몰락을 가져온 하나의 극단이자, 그 스스로 몰락을 체현하고 있는 인물이다. 모든 계획이 들통나고 야쿠자 및 중국 조직 모두에게서 도주하던 그는 총상을 입는데, 그 과정에서 주머니에 숨겨둔 필로폰이 상처로 들어가게 된다. 강렬한 마약 흡입 상태가 된 카세는 한 상점 안에서 벌어지는 혈투 속에서 총격이나 팔이 잘리는 상황에서 어떤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 주리에 의해 목이 잘린 그의 모습은 오토모의 대사처럼 어딘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즉 폭력에 무뎌진 채 야쿠자들의 의리나 인의를 이야기하는 일련의 영화와의 단절을 카세의 죽음으로 드러낸다. 특히 특정한 상황에서만 튀어나오는 카세의 과장된 야쿠자 말투는 그 자체로 웃음을 유발하는 요소임과 동시에 몰락한 야쿠자들을 놀리는 블랙코미디로 기능한다. 

 이러한 요소들은 야쿠자들의 뱀파이어적 속성과 일본영화의 현재의 연결을 가능케 한다. 일본 영화들은 원작(만화, 아니메, 소설, 게임)의 실사화라는 미명 하에 서사의 세습을 반복하며 고착화되고 있다. 고레에다의 말처럼 “갈라파고스화 되고 있”으며, 미이케 다카시 스스로도 다년간 줄기차게 실사화 영화들을 연출하며 염증을 얻었을 법한 상황이다. 때문에 “국산차를 믿어봐”라며 상가 주차장에서 도로 바닥으로 차를 몰도록 시키는 곤노의 대사와, (아마도 예산 문제 때문이겠지만) 애니메이션으로 대체된 국산차의 비행 장면은 영화를 믿지 못한 채 상품화에 매진하는 상황을 다소 당황스럽게 드러낸다. 이것이 당황스러운 이유는 장면 연출 자체가 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용 감독으로서 수많은 상품을 만들어낸 미이케 다카시의 영화에서 이러한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소노 시온이 뱀파이어를 전면에 내세우며 <도쿄 뱀파이어 호텔>이라는 거대한 폐허를 만들어내고 있을 때,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유럽과 일본이 아닌 동아시아 곳곳을 떠돌고 있을 때, 미이케 다카시는 자신의 자리에 남아 무언가 해볼 여력이 아직은 남아 있음을 소심하게나마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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