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2020' 카테고리의 글 목록 (3 Page) :: 영화 보는 영알못

 영화는 한태의 감독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다. 감독의 집에는 세 명이 산다. 감독, 엄마, 할아버지. 여기서 할아버지는 감독의 친할아버지, 즉 엄마의 시아버지다. 엄마는 아빠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지 1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시아버지의 변덕스러운 성격 때문에 엄마는 고생해왔다. 동시에 따로 사는 시어머니와는 각별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대학교 영상과에 들어간 감독은 엄마와 함께 공모전에 낼 영상을 촬영하며 친구처럼 지낸다. 엄마도 영상을 촬영하고 거기에 출연하는 것에 거부감이 크지 않다. <웰컴 투 X-월드>는 그렇게 촬영된 무수한 일상의 영상 속에서 시작된다.

 제목의 X는 미지수 X다. 영화의 중반 이후 할아버지는 엄마에게 분가할 것을 요청하고, 엄마는 망설이다 집을 알아보기 시작한다. 한태의 감독의 카메라는 그 과정을 따라간다. 감독은 엄마가 지난 20여 년 동안 고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그 때문에 결혼을 싫어한다. 먼 친척의 결혼식장을 돌아다니는 엄마를 종종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누가 결혼하는 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구로에서 익산까지 내려가 참석한 결혼식장의 풍경을 보며, 감독은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지닌 모종의 소속감을 깨닫는다. 그 미묘한 소속감은 결혼생활을 ‘견뎌온’ 여성들이 공유하는 모종의 유대감일 수도, 가부장제가 제시한 속박된 생활에 적응한 결과일 수도, 그 밖에 다른 어떤 감정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가족이라는 제도 자체가 그러한 틀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틀은 그것이 제공하는 감정적인 것 외에도 제사와 명절 노동, 부양과 돌봄 노동, (남편이 부재한 상황에서의) 생계유지 등을 떠맡는다.

 여기서 엄마와 엄마를 지켜보던 감독이 미묘한 소속감을 느낀 장소가 결혼식장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곳에서 엄마는 자신을 만날 것이라 생각지도 못했던 친척들을 오랜만에 만나고, 재회한 이들은 온종일 덕담을 나눈다. 결혼하는 이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던 엄마는 결혼식 사진 속에 속함으로써 미묘한 소속감을 굳건한 감정으로 변환하고 딸의 카메라를 향해 V자 제스처를 보낸다. 하지만 결혼식이라는 이벤트는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결혼식장에서 친척과 재회하는 것은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명절보다 더욱 큰 거리감을 동반한다. 큰 틀에서 가족이라는 범주화는 모종의 소속감을 제공하지만 그것은 상시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에 가깝다. 엄마가 돌아오는 곳은 어쨌든 시아버지를 모셔야 하는 집이다. 

 물론 시아버지와 엄마의 사이의 격한 갈등이 영화에 등장하진 않는다. (영화에 실리지 않은 영상 중에 그런 장면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엄마가 결혼식장에서 느낀 소속감엔 익산까지 친척들을 만나러 갔다는 능동성에 투영되지만, 단 세명이 매일 얼굴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집이라는 공간에서의 소속감은 의무나 굴레, 속박에 가까운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을 소속감으로 내면화하여 며느리의 의무를 지키는 것과, 거기서 벗어나 독립하는 것 중에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것은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다. 때문에 분가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시아버지의 제안에 엄마는 갈등하고, 집을 알아볼 때도 무의식적으로 시아버지가 남을 구로동 인근의 집을 알아본다. 딸이 원래 집에서 조금이라도 멀리 떨어진 집들을 제안하지만, 결국 결정된 것은 원래 집에서 5분 거리의 집을 매매하는 것이다.

 그리고 ‘5분의 거리감’이 주는 해방감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달랑 5분가량 걸으면 시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되돌아올 수 있지만, 엄마는 몇 분, 몇 시간, 며칠 뒤가 아닌 몇 개월 뒤에나 시아버지를 볼 것이라 말한다. 겨우 5분 정도의 거리감이지만, 그것은 드디어 ‘시월드’의 밖으로 나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사하는 날, 원래 집에서 쓰던 냉장고는 버려진다. 어딘가 이상한 성격의 시아버지가 라면을 보관하고, 엄마가 시아버지의 요구에 따라 라면을 끓이기 위해 매일 같이 열던 그 냉장고는 누구의 집에도 머물지 않는다. 혈연관계도, 엄마가 원한다면 더 이상 인척 관계도 아닐 시아버지와의 관계는 냉장고라는 상징을 통해 정리된다. ‘시월드’를 빠져나올 미지수 X-월드가 어떤 것일지는 엄마도 감독도 관객도 알 수 없다. 다만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일궈내고, 그 이후를 꿈꿀 수 있는 것에 필요한 것은 단지 ‘5분의 거리감’이었음을 엄마와 감독은 깨닫는다. 다음 명절에 엄마와 시아버지의 재회는 먼 친척과의 재회처럼 반가울까? 그것 또한 미지수이지만, 그 가능성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는 점에서 영화 속 모녀는 개척자가 된다. 그 세계에 발을 들인 모녀가 그곳에 관객들을 초대하는 것이 <웰컴 투 X-월드>의 목표였다면, 그 지점에 대해 이 영화는 성공을 거둔다.

 

*영화 후반부 눈에 띄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모녀가 자전거 타기를 연습하는 장면에서 모녀는 물론 주변 행인들도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작년 영화제 상영 때도 이 장면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장면이 영화제 공개 이후 추가 촬영된 장면이라면 올해 한국에 개봉한 작품에서 처음으로 코로나 19 팬데믹의 흔적을 본 것이 되어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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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동훈이 <범죄의 재구성>, <타짜>, <도둑들> 등을 연이어 성공시키며 한국 상업영화에는 일종의 범죄영화 붐이 일었다. 물론 이는 류승완의 <부당거래>와 박훈정의 <신세계> 등이 만들어낸 조폭-검사-경찰 범죄영화는 궤를 달리한다. 사기든 도박이든 도둑질이든, 한 분야의 ‘꾼’들이 모여 서로를 속고 속이는 도돌이표 같은 서사. 이는 최동훈이 <전우치>나 <암살> 같은 시대극을 연출하고 SF인 <외계인>을 준비하는 동안, <타짜>의 속편들과 더불어 수많은 한국 상업영화들이 반복한 이야기다. 어딘가 껄렁껄렁하고 허세 가득한 남자 주인공, 미모와 지식 혹은 기술을 겸비한 여자 주인공, 각기 다른 기술을 하나씩 지닌 조연들, 갑자기 등장한 남자 주인공의 과거 플래시백과 함께 시동이 걸리는 복수의 서사, 결국 도박이든 도둑질이든 무엇 하나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채 끝나는 영화. <도굴>은 이 전형을 정확히 따라간다. 단지 소재가 ‘도굴’일뿐이다.

 영화는 도굴꾼 강동구(이제훈)가 어느 절의 불상을 훔치는 것으로 시작된다. 문화재들을 몰래 사들이던 호텔 재벌 상길(송영창)은 그것을 탐내고, 자신의 오른팔 격인 윤세희(신혜선)를 통해 동구에게 일을 맡긴다. 동구는 벽화 전문 도굴꾼 존스 박사(조우진), 전설의 삽질 달인 삽다리(임원희) 등을 섭외해 큰 건수를 하나 시작한다. 그러던 중 동구와 세희는 각기 다른 꿍꿍이를 숨기고 있다. 영화는 초반에 동구가 무엇인가 복수할 것이 있음을 암시한다. 영화는 초반에 상길이 보유한 거대한 수장고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결말은? 아마 영화를 보는 모두가 같은 결말을 생각했을 것 같다.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선릉을 도굴한다는 컨셉에서 뽑아낼 수 있는 상상력이라곤 그저 조폭을 동원해 선릉 인근의 룸살롱을 매입하고 거기서부터 굴을 판다는 정도다. 허세 넘치는 남자 주인공, 예쁘지만 어딘가 재수 없게 묘사되는 여자 주인공, 되지도 않는 코미디를 시도하는 조연들, 거기에 조선족 출신 조폭과 성소수자 혐오적인 농담까지, <도굴>이 예상을 벗어나는 지점은 러닝타임을 채우고 긴장감을 불어넣기 위해 이 정도로까지 쓸모없는 장면들을 욱여넣었구나 싶은 장면의 향연뿐이다. 거기엔 스펙터클도, 서스펜스도, 놀라운 반전이나 리듬감 넘치는 편집도, 복수의 쾌감이나 하이스트의 스릴도, 하다못해 ‘도굴’이라는 소재가 지닌 ‘민족주의’도 없다. 단지 최동훈 같은 영화를 찍고 싶었던 누군가의 욕망만 있을 뿐이다. 

 

 <밀그램 프로젝트>,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등으로 알려진 마이클 알메레이다 감독의 신작 <테슬라>는 제목 그대로 오스트리아 출신의 발명가 니콜라 테슬라의 삶을 다룬 전기영화다. 영화는 테슬라(에단 호크)가 에디슨(카일 맥라클란)의 밑에서 잠시 일했던 19세기 말엽의 시간부터, 그가 당대 최고의 자본가 J. P. 모건(도니 케샤워츠)에게 투자를 받기 위해 노력했던 때, 그리고 J. P. 모건의 딸 앤 모건(이브 휴슨)과 함께 한 시간들, 그리고 그의 죽음까지를 다루고 있다. 다만 영화는 익숙한 전기영화의 형태를 띠고 있지는 않다. 당시의 사진이나 테슬라가 설계한 기계의 도면 등이 등장하는 것은 발명가의 전기영화라는 측면에서 익숙한 연출이지만, 마이클 알메레이다는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세트장 배경 부분에 거대한 배경 사진을 프린팅하거나 영사한 채 테슬라와 그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풀어가기도 하고, 어느 순간 시작된 앤의 내레이션은 테슬라의 삶을 설명해주는 듯하더니 직접 화면에 등장해 4의 벽을 깨고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걸어오기도 한다. 더군다나 앤이 테슬라의 삶을 설명해주는 장면에서, 그가 20세기 초반을 살았던 인물임을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앤은 맥북을 열고 프로젝터에 연결해 테슬라와 에디슨의 이름을 구글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쯤 되니 테슬라와 에디슨이 각각 교류와 직류에 대해 논쟁하며 맥도날드 소프트아이스크림을 할짝거리는 장면은 그다지 새롭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아무런 정보 없이 영화를 보러 갔기에 (심지어 카일 맥라클란이 나오는 줄도 몰랐다) 이러한 연출이 다소 당혹스러웠다. 특히 테슬라가 Tears For Fears의 “Everybody Wants To Rule The World”를 부르는 영화 후반부는 난감하기 그지없다. 이러한 연출은 테슬라가 당시에 머물며 더 많은 돈과 특허를 갈구한 사람이 아니라, 에너지, 빛, 전기를 통해 세계 전체를 연결하려는 야망을 지닌 인물이었다는 영화 속 설명에 의해 어느 정도 정당화된다. 우리는 내레이터로 등장한 앤처럼 니콜라 테슬라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구글링하고, 그렇게 찾을 수 있는 4,400만 개의 정보 중에서 테슬라에 대한 어떤 이미지를 뽑아낸다. 알메레이다가 이 영화의 각본을 쓰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테슬라에 대해 조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테슬라>가 테슬라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방법은 거기서 출발한다. 그가 발명한 형광등과 네온등, 테슬라코일 등은 테슬라의 업적이나 발명품보단 미래를 내다보고자 했던 그의 삶에 대한 오브제와 같다. 그가 자력으로 도달할 수 없었던 세계, 그가 죽은 지 80여 년이 지난 지금 얼추 구현된 그가 바라던 이상적 세계는 영화 내에서 그의 주변부에 놓이지만 그가 닿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그가 발명한 것들은 당장 내 머리 위에 놓여 있는 형광등처럼 당연한 것이 되었지만, 이상주의자인 테슬라는 당연하게도 그가 꿈꾸던 이상에 닿지 못한다. “이상주의는 자본주의에 가로막힌다”는 앤의 말처럼, 빚더미에 앉은 테슬라는 이상을 향해 다가가지 못한 채 이룰 수 없는 이상에 파묻혀 버린다.

 

 다만 이러한 방식이 테슬라의 삶을 그려내는 것에 과연 효과적인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그간 독특한 형식을 취한 전기영화들은 많았다. 밥 딜런의 생애를 여러 자아로 분열시켜 6명의 다른 배우가 각기 다른 자아를 연기한 <아임 낫 데어>, 관객에게 말을 걸고 실재 푸티지를 뒤섞는 방식의 <바이스>,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세 배우가 인물의 각기 다른 시간대를 연기하고 이를 하나의 굿판으로 엮어낸 김금화 만신에 대한 영화 <만신> 등등. 이러한 영화들은 각 인물에 생애나 그들의 직업적, 예술적 활동 및 성취에 알맞은 영화적 형식을 선보인다. 다만 <테슬라>는 영화의 형식적 욕심이 그것을 앞서 나간다는 인상이 강하다. 앞서 언급한 테슬라가 갑자기 80년대의 팝송을 노래하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테슬라의 불안정한 뒷모습으로 시작한 영화는 자신의 미완성의 삶을 노래하는 테슬라의 모습으로 끝난다. 영화의 시작과 끝 사이의 간극은, 알메레이다 감독이 취한 방식으로 채워지지 못한 채 겉돌고 만다. 

 말을 하지 않는 태인(유아인)과 한쪽 다리가 불편한 창복(유재명)은 트럭을 타고 시장에서 계란을 판다. 하지만 이들의 주된 수입원은 부업이다. 그것은 지역 조직폭력배가 사람을 납치해 죽이면 그 뒤처리를 맡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던 중, 조직의 실장이 사람 하나를 며칠간 맡아 달라고 부탁한다.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던 둘은 그 사람을 찾아간다. 두 사람이 맡아야 할 사람은 11살의 아이 초희(문승아)였다. 당황한 둘은 얼떨결에 유괴된 초희를 떠맡게 되고, 인적이 드문 곳에 사는 태인의 집에 초희를 머물게 한다. 홍의정 감독의 장편 데뷔작 <소리도 없이>의 포스터와 캐스팅은 익숙한 한국 상업영화의 범죄극을 연상시킨다. 조직폭력배, 폭력, 유괴라는 소재는 얼마 전 개봉한 또 다른 한국영화 <담보>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소리도 없이>는 포스터와 간단한 시놉시스를 보고 떠올렸을 이야기를 대부분 빗겨나간다. 이 영화는 잔혹한 범죄극도, 범죄극을 빙자한 철 지난 휴먼드라마도 아니다.

 

 홍의정 감독은 [별주부전]에서 <소리도 없이>의 모티프를 따왔다고 한다. 유괴된 초희는 토끼 가면을 쓴 채 처음 등장한다. 머리를 빡빡 밀고 있는 태인이 잠들자 초희보다도 어린 그의 동생 문주(이가은)가 그를 끌어안고 자는 모습은 영락없는 별주부의 형상이다. 별주부는 용왕에게 충성을 표하기 위해 자진해서 뭍으로 나가 토끼를 찾는다. 반면 태인은 우연히 초희를 떠맡게 된다. 때문에 이 영화는 유괴한 사람보단 유괴된 사람의 이야기다. 토끼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 별주부와 용왕의 비위를 맞춰주고, 간이 물 밖에 있다는 거짓말을 한다. 초희의 상황도 비슷하다. 초희는 유괴되었지만 살아남아야 한다. 운 좋게도 그를 유괴한 셈이 된 태인과 창복은 역설적으로 범죄와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태인은 순진무구한 야생동물(홍의정 감독은 ‘영역을 침범당한 고릴라’ 같은 연기를 부탁했다)과 같고, 창복은 자신이 처리한 시체 앞에서 성경을 들고 기도하다가도 풍수지리에 맞게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게 시체를 묻는 인물이다. 이들은 초희를 해코지할 생각이 없다. 이들은 생계를 위해 업무를 수행하는 직업인과 다름없다. 초희를 맡긴 조직의 실장이 죽은 뒤, 초희를 직접 납치한 또 다른 직업인들과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업무적 계약 협상의 그것처럼 묘사된다. 이들은 범죄자이면서 범죄자가 아니다. 마치 누군가를 죽음 혹은 그와 비슷한 단계로 몰아붙이는 구조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범죄자는 아니지만 종종 그와 유사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초희는 그런 세계에서 살아온 인물이다. 그의 남동생은 삼대독자인데, 때문에 초희의 부모님은 초희를 데려올 수 있는 몸값을 쉬이 지불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경찰이 적극적으로 초희를 찾는 상황도 아니다. 플래시백 등을 통해 정확히 묘사되지는 않지만, 초희는 11살의 어린 나이에도 스스로 생존하는 법을 터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을 것이다. 사립 초등학교에 다니고, 몸값을 위해 유괴될 정도의 재력이 있는 집안의 자녀일지라도, 초희는 스스로 생존해야 하는 사람이다. 반면 태인과 그의 동생은 흔히 말하는 생존과는 거리가 멀다. 문명적인 생활과 거리가 있어 보이는 둘은 먹고 자고 일하고 먹고 잔다. 초희는 그들의 생활공간을 문명적인 생활공간으로 바꾼다. 그는 자신보다 어린 문주에게 청소, 빨래, 식사예절, 머리 묶기 등을 알려준다. 그렇다. 사실 초희가 문주에게 알려주는 생활양식은 자신이 부모와 함께 살던 가정에서 생존하는 방식이다. 그는 그 방식을 태인의 집에서 생존하기 위한 방식으로 끌어온다. 부모님을 만족시키듯 태인과 창복을 만족시키고, 문주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태인의 시점으로 등장하는 초희의 모습들은 얼핏 스톡홀름 신드롬에 빠진 피유괴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초희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태인, 창복, 문주의 얼굴에서 종종 만족스러운 행복감이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소리도 없이>는 태인과 창복, 두 사람의 구원이나 개과천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는 선악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징벌적 죽음을 등장시키지도 않는다. 다만 범죄자 아닌 범죄자가 얼떨결에 주도적인 범죄의 영역에 발을 들였을 때의 당연한 실패를 보여주고, 서로의 말을 온전히 믿지 않는 것이 생존의 기술임을 보여준다. 때문에 태인이 직접 초희를 집으로 데려다 주기로 결심하고 행동으로 옮겼을 때 초희가 취한 행동은, 배신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당연한 선택이다. [별주부전]의 다양한 결말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던) 것은 별주부의 자살, 혹은 잠적이다. 사실 용왕의 위치에 놓일 수 있는 인물인 실장이 부재해버린 상황에서, 태인이 택할 수 없는 것은 자살 혹은 잠적뿐일 것이다. 영화는 그것을 비극 혹은 징벌로 표현하지 않는다. 초희는 살고자 했고, 자의로 행동한 것이 아닌 태인 또한 생존하고자 했다. 생존에 초점을 맞춰 유괴를 소재로 한 범죄극을 새롭게 쓴 <소리도 없이>는, 이들이 또다시 각자 생존해야 함을 암시하며 끝난다. 그래서 태인, 초희, 창복, 문주의 즐거운 한 때를 다시 보여주는 듯한 영화의 결말은 당혹스럽다. 그것은 마치 태인과 창복이 시체 청소라는 자신의 직업으로 유지되던 세계가 전혀 다른 성질의 업무를 통해 균열이 일어났을 때, 그 균열 속으로 두 사람이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빛 비슷한 것이 뿜어져 나왔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구원의 빛과 같은 것은 등장하지 않았다. 등장할 수 없는 것이 <소리도 없이>가 그리는 세계다. 태인은 도망자 신세가 될 것이며 초희는 성차별적인 문화가 엄습해오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네 사람의 행복해 보이는 과거의 순간이 재등장하는 것은 연대도 생존도 행복도 구원도 아닌 어떤 잉여의 순간과도 같다. 그 잉여가 달려가는 태인의 눈 앞에 왜 다시 펼쳐졌는지 정말 모르겠다.

 이 영화는 피에트로 마르첼로의 첫 장편 극영화이다. 물론 그의 여러 전작들이 논픽션과 픽션이 혼재된 방식의 다큐멘터리를 표방하고 있지만, <마틴 에덴>처럼 영화 전체를 극으로 꾸민 것은 처음이다. 영화는 20세기 중반 무렵의 이탈리아 나폴리를 배경으로 한다. 가난한 선원 마틴 에덴(루카 마리넬리)은 우연히 깡패에게 맞고 있는 한 청년을 구한다. 부잣집 자제였던 그는 마틴 에덴에게 가족을 소개해주고, 마틴은 그곳에서 만난 엘레나(제시카 크레시)와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엘레나는 초등학교도 끝마치지 못한 마틴 에덴에게 마저 공부하길 바란다고 말하며 여러 책들을 빌려준다. 총명한 마틴은 문법을 공부하고 새로운 어휘들을 익혀가며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하고, 어느새 문학 작가의 꿈을 꾼다. 마틴은 계속 여러 신문과 잡지에 소설과 시를 투고하기 위해 교외 지역에 방을 얻고 글쓰기에 매진한다. 하지만 투고는 계속 실패하고, 엘레나의 부모님은 그와 마틴의 결혼에 반대한다. 영화는 잭 런던이 1909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소설은 미국 오클랜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당연히 이번 영화와 시대적 배경도 다르다.

 

 그런데 <마틴 에덴>의 시대적 배경은 어딘가 불분명하다. 국내 수입사가 제공한 시놉시스에 따르면 ‘20세기 중반’으로 표기되어 있다. 영화가 시작하면 60년대 중반 이후 상용화된 테이프 녹음기가 등장한다. 마틴 에덴이 자신의 이야기를 마이크에 대고 녹음하고 있다. 그다음 숏은 열화되어 녹아내리기 직전처럼 보이는 몇몇 아카이브 푸티지이다. 20세기 초에 촬영된 영상처럼 보이는 이 화면은 기차가 출발하고 그것을 지켜보는 군중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장면은 기차가 터널로 들어가며 터널 외부의 빛이 점점 작아지는 모습과 함께 영화의 타이틀이 등장하며 마무리된다. 이러한 아카이브 푸티지가 종종 등장한다. 침몰하는 배, 패딩을 입고 춤추는 두 아이, 항구를 떠나는 배 등등. 마틴의 심상처럼 등장하는 아카이브 푸티지들은 그가 살고 있는 시간대의 과거와 미래를 포괄한다. 사실 이는 아카이브 푸티지가 아닌 장면들에서도 이어진다. 부둣가에 앉아 있는 마틴의 뒤로 지금의 나폴리 컨테이너 터미널의 모습이 보이고, 이탈리아에는 70년대 후반에나 보급된 컬러 TV가 등장하기도 한다. 동시에 여러 빈민들이 공장에서 노동하는 모습이 등장하고, 파업을 주도하는 사회주의자들이 등장하는 모습을 보면 1950~60년대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한 이탈리아 경제기적 시기의 끝무렵, ‘납탄 시대’라 불리는 60년대 말~70년대임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즉, <마틴 에덴>의 마틴 에덴은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사이 언젠가의 이탈리아라는 시대에 정박해 있지만, 선원이라는 그의 정체성처럼 그가 경험하는 이미지는 20세기의 곳곳을 떠돈다. 

 

 피에트로 마르첼로는 첫 장편영화 <늑대의 입>에서 유사한 형식을 선보였었다. <늑대의 입>은 오랜 시간 수감되었던 한 남성이 고향인 항구마을로 돌아와 자신을 기다리던 아내를 만나는 모습을 담고 있으며, 영화는 이들의 생활 모습, 인터뷰, 그리고 도시를 촬영한 여러 아카이브 푸티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20여 년 만에 마을로 돌아온 남성이 마주하는 도시의 현재와 그곳에서 그를 기다려온 아내가 경험한 도시의 역사 등이 아카이빙된 이미지들로 펼쳐진다. <마틴 에덴>은 이러한 형식을 마틴 에덴이 집필하는 글들의 심상처럼 사용한다. 그가 몸으로 직접 경험한 나폴리를 비롯한 이탈리아 곳곳의 과거-현재-미래는 ‘경험’이라는 심상으로 농축되고, 그의 글 안에서 드러난다. 16mm 필름으로 촬영된 영화는 과거(마틴 에덴이 존재하는 시대)를 향하지만, 언뜻 마틴 에덴과는 관계없어 보이는 아카이브 푸티지들은 그를 20세기 전체에 걸쳐 존재하는 인물로 변화시킨다.

 

 마틴은 사회주의자들을 니체의 ‘노예 도덕’ 개념으로 반박하고 비난한다. 이는 1909년 잭 런던의 소설에서 이미 정립된 것이다. 이 질문을 영화가 제작된 2019년으로 고스란히 끌어오는 것은 당연히 무리고, 영화도 그렇게 하진 않는다. 다만 영화는 소설과는 조금 다른 결말을 제시한다. 마틴 에덴이 물에 빠져 자살하는 소설의 결말과 달리, 영화는 마틴 에덴이 과거의 자신을 본듯하며 바다에 빠지는 듯한 암시만을 준다. 그리고 어느 해변에 떠밀려온 마틴 에덴은 “전쟁이 일어났다”라고 말하는 어느 노인과 장비를 정비하는 군인들을 목격한다. 군인들은 노인을 조롱한다. 마틴 에덴은 석양이 지는 바닷속으로 달려 들어간다. 여기서 마틴 에덴의 애매한 열정, 다시 말해 엘리트 문학계에 오롯이 속할 수 없었던 프롤레타리아 출신의 노동자라는 그의 상황과, 마초적이며 다소 폭력적이고 자의식과잉이라 느껴질 수 있는 그의 면모는 20세기라는 시공간에 정박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정박한다는 것은 사람이 아닌 배의 행위이다. 그는 선원이지만 끝내 배에 타지 못하고 맨몸으로 바다에 뛰어든다. 과거의 이미지를 따라 바다에 뛰어들었던 그는 내일을 예고하는 석양을 따라간다. 지극히 20세기적인 인물인 그는 영원히 20세기라는 바다를 떠돌 것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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