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2017' 카테고리의 글 목록 :: 영화 보는 영알못

 박찬경 감독은 김금화 만신의 자서전 『만신 김금화』와 『복은 나누고 한은 푸시게』, 『김금화의 무가집』 등을 읽고 영화 <만신>을 제작하기로 결심했다. “한 사람의 자서전이지만 한국 현대사가 기술되어 있다는 점이 끌렸다.”라고 제작 동기를 밝힌 박찬경의 말처럼, <만신>이 담아내고 그려낸 김금화 만신의 일생에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독재정권을 아우르는 한국 현대사가 녹아있다. 현실의 삶은 물론, 영화나 TV 드라마, 소설 등의 대중매체에서도 발견할 수 있듯 가장 힘든 시기에 한국인들은 무당을 찾아가고 무속신앙에 의지했다. 만신의 굿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일종의 쇼로써 한국 현대사에 존재해왔다.



 박찬경 감독이 <만신>을 통해 무당과 무속신앙의 쇼 비즈니스적인 성격을 부각하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영화 속 김금화 만신이 굿을 준비하기 위해 가사를 외우고, 소품을 준비하고, 굿의 동선을 맞춰보는 장면들은 콘서트를 앞둔 엔터테이너의 모습과 흡사하게 느껴진다. 시대에 따라 빨갱이로, 불온한 것으로 여겨지며 탄압당하던 모습도 시대를 거쳐온 대중예술인의 모습과 겹쳐진다. 지금껏 무당이 굿을 준비하며 노래 가사를 외우는 모습을 보여준 매체가 있었을까? 그 모습을 <만신>을통해 처음 목격한 관객은 만신이라는 존재가 단순히 무속 신앙에 묶여있는 존재가 아닌, 예술과 노동의 관점에서 만신이라는 존재와 굿이라는 퍼포먼스를 생각하게 된다.



 <만신>이 김새론, 류현경, 문소리 세 배우를 캐스팅해 김금화 만신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풀어낸 것은 위와 같은 맥락에서 흥미롭다. 자료화면과 인터뷰 등으로 채워 넣을 수 있었던 이야기를 세 배우의 몸을 통해 재연하고, 종종 실제 김금화 만신이 본인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와 같은 공간에 존재하기도 한다. 김금화 만신의 삶은 신내림 받는 장면을 연기하는 류현경과 굿판을 재연하는 문소리, 쇠걸립을 하며 마을을 돌아다니는 김새론의 모습으로 스크린에 재현된다. 이를 통해 김금화 만신의 삶과 퍼포먼스는 다시 한번 쇼로써 재현된다. 김금화의 퍼포먼스를 배우들이 다시 공연하고, 이것을 다시 바라보는 김금화의 시선은 무당과 굿이라는 존재 위에 덮인 겹을 관통한다.



 70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버텨 온 김금화 만신은 계속해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동시에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간 사람이었다. 그는 깊은 산속부터 DMZ와 같은 지역, 연평해전이 벌어진 서해바다까지 자신의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만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굿이라는 퍼포먼스는 위로와 치유의 쇼가 된다. 현대사를 관통하는 김금화 만신의 쇼는 역사로 인해 상처 입은 사람을 보듬어준다. 때문에 쇠걸립하러 다니는 어린 김금화, 김새론을 따라가던 카메라가 하늘로 날아올라 마을과 산을 굽어 살피는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김금화 만신의 일생을 고스란히 담은, 한국인의 기저에 깔린 정서를 보듬어 주는 시선으로 느껴진다.

 MTF 트랜스젠더이자 매춘부인 신디(키타나 키키 로드리게즈)는 구치소에 구금된 지 28일째 되는 날 출소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출소한 그녀는 친구인 알렉산드라(마이아 테일러)를 만난다. 신디는 알렉산드라에게 자신의 남자친구이자 포주인 체스터(제임스 랜슨)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웠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분노한 신디는 체스터를 찾아 LA 시내를 활보한다. 한편 신디와 알렉산드라를 비롯한 트랜스젠더 매춘부들의 단골손님인 아르메니아 출신의 택시기사 라즈믹(카렌 카라굴리안)은 갑작스레 집으로 온 장모를 피해 크리스마스이브에도 택시를 몬다. 이런저런 손님들을 받던 그는 저녁식사를 하고 알렉산드라의 공연을 보기 위해 집을 빠져나온다.


 아이폰 5s로 촬영한 션 베이커의 데뷔작 <탠저린>은 2015년 선댄스 영화제를 한 번 뒤집어 놓았던 작품이다. 스마트폰의 영상이 보여주는 거친 디지털 그레인과 인물들의 얼굴에 집중한 다양한 앵글, 종종 홈비디오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장면들과 분노하여 LA를 활보하는 신디의 마음을 대변하듯 영화에 거칠게 끼어들어오는 음악들, 여기에 욕설로 가득한 대사와 막장드라마에 한 장면 같은 클라이맥스. <탠저린>은 속칭 ‘날것의 강렬함’으로 대변되는 온갖 강렬한 체험으로 가득한 영화다. 트랜스젠더, 매춘부, 이민자 등의 소수자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단지 재미있는 에피소드의 모음일 뿐만이 아니다. 우정, 갈등, 싸움, 거래, 배신, 사랑, 연대 모든 것이 뒤섞여 벌어지는 강렬한 난장판이다. 아이폰으로 촬영한 영상들은 관객을 그러한 난장판 한가운데로 불러올뿐만 아니라 난장판 안으로 관객을 동참시킨다.



 <탠저린>은 어쭙잖게 연민이나 이해를 요구하는 영화가 아니다. 마이너리티들의 문화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그것만의 매력을 88분 동안 펼쳐내 보이는 것이 영화의 목표처럼 보인다. 매력적인 난장판의 한가운데로 끌려온 관객들은 영화가 담아내는 맹렬함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몇 줄의 글로는 설명되지 않는 강렬함을 품은 영화를 정말로 오랜만에 만난 것 같다. 영화의 마지막, 알렉산드라에게 화가 난 신디는 혼자 거리로 뛰쳐나가고 알렉산드라는 그녀의 뒤를 쫓아간다. 그러던 중 신디는 차를 타고 지나가던 백인 남성들에게 공격을 당한다. 알렉산드라는 신디를 데리고 코인세탁소로 가 그녀의 옷을 벗기고 세탁기에 돌린다. 그녀는 가발까지 오물에 젖어 세탁기에 돌리고 있는 신디에게 자신의 가발을 벗어서 준다. 둘이 맞잡은 손은 난장판의 끝에 등장한 짧은 연대의 모습이다. 맹렬하게 관객에게 다가오던 영화는 마지막에 잠시 멈춰 선다. 그 순간에 느끼게 된 어떤 감정, 감동이라는 단어로는 온전히 표현되지 않는 순간은 이 영화를 통해 발견된다.

*스포일러 포함


 대학원을 준비하는 수현(조현철)과 방송국에서 일하는 지영(김새벽)은 7년 차 커플이다. 동거생활을 하던 둘은 이사를 준비하고, 그러던 중 각자의 부모님을 찾아 뵐 일이 생긴다. 각자의 부모님들은 그들의 인생에 조언 아닌 조언을 건네려 한다. <초행>은 제목 그대로 ‘처음 가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우스갯소리처럼 ‘모두가 인생 1회차’라고 말하며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개인의 삶이라는 것에 대해 마치 지켜져야 하는 사회적 합의인 양 정해진 길이 존재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령 초중고를 무난히 졸업하고 20살에는 대학에 꼭 가야 한다거나, 20대 중반에는 졸업하고 취직을 해야 한다거나, 30살 내외에는 결혼을 해야 하고 30대 중반에는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등 모두의 삶이 일반적인 무언가로 정해진 것처럼 그들은 이야기한다. 하지만 지금 20~30대의 삶은 어떨까, 과연 일반적으로 정해진 삶을 따라가기에도 버거운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그게 무엇일지는 몰라도)마저 저버리라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요구처럼 느껴진다. 그렇다고 아무도 가보지 못한 길을 처음 내딛는 사람들이 온전할 수는 없다. 하이퍼 리얼리즘에 가깝도록 현실적으로 묘사된 <초행> 속 커플의 이야기는 어느 곳에 가도 초행길인 인생 1회차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화가 시작하면 수현은 형에게 아버지의 환갑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전화를 받는다. 지영은 생리가 멈춘 지 꽤 되었다며 임신을 의심한다. 이사를 앞둔 뒤숭숭한 집에서 둘은 마지막 남은 음식인 계란을 먹는다. 그들은 먼저 지영의 집을 찾는다. 인천으로 이사한 지영의 부모님은 공무원이고 부동산업자다. 안정된 생계를 꾸리고 살아가는 그들은 지영과 수현에게 결혼을 묻는다. 당연히 당장의 여건도 되지 않는 데다가 임신을 의심 중인 지영은 그런 질문들이 못마땅하다. 며칠 뒤 그들은 삼척에 있는 수현의 집을 찾는다. 별거 중인 수현의 부모님은 각각 공장 경비원과 횟집에서 일한다. 지영은 삼척에 도착하자마자 수현의 어머니를 도와 전을 부치고, 수현은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임신, 대학원 입시, 결혼, 이사 등 어디 하나 지영과 수현에게 초행이 아닌 것이 없다. 수현은 계속해서 “몰라”라는 말을 반복하고 지영은 끝내 “무섭다”라고 외친다. 구체적인 대사 없이 상황만 제시하면서 촬영했다는 <초행>의 이러한 대사와 제스처들은 영화 속 주인공들과 동년배인 김새벽, 조현철 두 배우의 자연스러운 현재가 녹아들어 있는 것만 같다. 그 둘 역시 배우라는 직업만이 있을 뿐, 현재 대한민국의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는 젊은 세대라는 점에서 수현과 지영을 비롯한 인물들, 영화를 보는 관객들과 다르지 않은 사람이다. 그렇기에 더욱 돋보이는 순간들이 <초행> 속에 존재한 것이 아닐까?



 영화는 두 사람이 삼척에서 서울로 돌아와 광화문 광장의 촛불시위를 목격하고, 차에서 내려 행진에 참여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영화 내내 집, 학원, 식당, 자동차 등 실내의 답답한 프레임 속에 있던 둘은 인파로 가득한 촛불 광장에서야 숨통이 트여 보인다. 마지막 장면의 카메라는 내내 두 인물의 뒤통수만을 쫓아 가지만 굉장히 자유롭게 움직인다. 실제 작년 촛불의 현장에서 촬영된 이 장면에서 수현과 지영은 사람들의 흐름을 따라가다가 “응? 다들 반대로 가는 것 같은데?”라면서 다시 반대 방향으로 걷는다. “반대 방향으로 걸으니 다들 또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 같은데?” 둘이 주고받는 대사는 방향성이 정해지지 않는 당시의 정국과 그들의 삶이 묘하게 교차되는 지점이다.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행진, 바로 다음 주의 정국을 예측할 수 없는 땅, 보통의 삶을 따르기에는 버겁고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엔 처음 가는 그 길을 전혀 모르겠고 무서운 상황. 영화 말미에 등장한 촛불 광장은 지금을 가장 명확하게 담아내는 공간이다. 모든 길이 정해져 있다고 믿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사실 매일 지나가는 길도 처음 가는 곳이잖아요. 그 길을 어떻게 정할 수 있나요.”

*스포일러 포함


 금산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는 모금산(기주봉)은 보건소에서 위암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매일 출근하고, 수영장에 들르고, 치킨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집에서 자는 일상을 반복하던 그는 젊은 시절 꿈꿔왔던 영화배우의 꿈을 다시금 떠올린다. 모금산은 서울에서 영화학과에 다니던 아들 스데반(오정환)과 그의 애인 예원(고원희)을 불러 자신이 직접 각본을 쓰고 주연을 맡을 단편영화 <사제폭탄을 삼킨 사나이>의 제작을 도와달라 부탁한다. 임대형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죽음을 영화라는 예술로 승화시킨다던가 하는 고리타분한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는 ‘예술’ 같은 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보다도 영화, 특히 찰리 채플린의 영화로 대표되는 쓸쓸함과 사랑스러움이 공존하는 캐릭터와 시간에 관심을 둔 작품이다.



 영화의 내용은 아주 단순하고 직선적이다. 다섯 개의 챕터로 나눠져 있는 영화는 모금산의 일상을 보여주고, 오랜만에 아들을 만나고, 단편영화라는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영화를 촬영하고, 완성하여 상영하는 것에 이른다. 흑백으로 촬영된 영화는 묘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고, 동문서답이나 혼잣말로 이어지는 대화, 모금산의 단편영화를 비롯하여 슬랩스틱을 포함한 유머 등은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의 감정을 단순히 쓸쓸함에 머물지 않게 만든다. 영화가 보여주는 감정적인 섬세함은 모금산을 둘러싼 여러 캐릭터를 다루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가령 모금산이 수영장에서 만나게 된 은행원 자영(전여빈)이나 아들의 애인인 예원 등의 캐릭터는 단순히 영화를 진행시키기 위한 존재로 남거나, 모금산의 감정선을 고조시키기 위한 장치로 낭비되지 않는다. 모금산이 자신의 과거를 추억하고, 존 웨인, 잉그리드 버그만, 제인 폰다와 같은 배우들을 추억하듯이 각 캐릭터들 또한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추억한다. 다시 말해 각자의 삶이 쌓여 <사제 폭탄을 삼킨 사나이>라는 단편영화와 그 영화를 관람하는 각 캐릭터가 된달까?



 <사제 폭탄을 삼킨 사나이>는 제목 그대로 폭탄을 삼킨 사나이가 주인공이다. 찰리 채플린처럼 양복에 모자를 쓴 주인공은 홀로 강냉이 폭탄을 개발했다. 어느 날 집에서 강냉이를 집어 먹다 실수로 강냉이 폭탄까지 집어 먹은 그는 기폭 스위치를 누를 곳을 찾아 서울 곳곳을 돌아다닌다. 한강의 다리 위, 국회 앞, 교회 앞 등의 장소를 돌아다니지만 실패하고, 밤이 되자 남산의 어느 공원에 오른다. 그는 결심한 듯 기폭장치를 누르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다 입에서 연기만 뿜어져 나올 뿐 폭탄은 불발되고 만다. 영화 속에서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모금산은 서울의 병원에서 수술을 받을 준비를 한다. 잠들지 못하고 깬 그는 창 밖의 불꽃놀이를 바라본다. 모금산의 영화 속에서 불발된 폭탄은 아름다운 불꽃의 모습으로 그의 눈 앞에 나타난다. 그가 암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았는지, 아니면 이미 너무 진행되어 시한부의 삶을 살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극복이나 희망 같은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 않는다. 대신 삶의 어떤 순간이라도 그저 지나갈 뿐이며, 쓸쓸함과 사랑스러움이 뒤섞여 공존하는 어느 중년의 삶을 긍정하는데 그친다. 그렇기에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어떤 정도를 아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사제 폭탄을 삼킨 사나이>가 상영되는 장면을 보는 많은 관객들이 눈물을 글썽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누군가의 삶을 착취하면서 눈물을 짜내는 것은 쉽지만, 누군가의 삶을 긍정하면서 눈물을 얻어내기는 어렵다.

*스포일러 포함


 2017년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이었던 일디코 엔예디의 18년 만의 컴백작이다. 장르적으로는 판타지와 로맨틱 코미디를 오가는 것 같기도 하고, <옥자>의 도살장 장면보다 더욱 적나라하게 실제 도살장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며, 오프닝 시퀀스부터 등장하는 눈 덮인 숲 속의 사슴들은 등장할 때마다 자연 다큐멘터리 같다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영화의 단편적인 부분만 늘어놓고 본다면 종잡을 수 없는 작품이지만, 영화를 관통하는 서사와 주제는 명확하다. 안드레(게자 모르산이)는도살장의 재무이사다. 그는 도살장에 새로 온 품질관리사 마리어(알렉상드라 보르벨리)를 보고 묘한 감정을 느낀다. 어느 날, 도살장에서 교미 약품 도난사건이 일어나고, 범인을 찾기 위해 전 직원이 연례 정신위생검사를 앞당겨 받게 된다. 그 과정에서 안드레와 마리어는 서로가 같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꿈속에서 둘은 사슴이 되어 눈 덮인 숲 속을 거닌다. 둘은 서로가 꿈을 공유하는 것에 대해 묘한 끌림을 느낀다.



 안드레는 왼팔이 불구다. 전혀 움직이지 않아 오른팔로 붙잡고 있거나 축 늘어진 상태로 내버려둔다. 신체적으로 결핍이 있는 안드레가 등장하는 장면들은 대부분 톤 다운되어 있다. 혼자 살기에 제대로 집안 청소도 하지 않는 그의 집은 항상 어두컴컴하고, 축 늘어진 그의 왼팔처럼 소파 위에서 TV를 보다 늘어져 잠드는 게 그의 일상이다. 왼팔 때문에 왼쪽으로 조금 기운듯한 그의 몸은 카메라의 잡히는 모습 자체로 그의 결핍을 설명한다. 미리어는 기억력이 불가사의할 정도로 좋다. 자신이 수두에 걸렸다 완치된 날짜를 기억하는 것은 물론이고, 안드레가 그녀에게 내뱉은 17번째 문장을 정확하게 읊어주기도 한다. 놀라운 기억력 때문일까, 망각의 동물이 망각을 하지 못하면 고장 나기 마련이다. 때문에 마리어는 정신적 결핍을 겪는다. 여전히 아동 전문 심리상담사에게 찾아가며, 자신이 정한 선과 규칙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다. 식탁에 떨어진 음식 부스러기를 치우는 장면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은 마리어가 결벽증이 있다고 보여주는 것만 같다. 카메라는 계속해서 마리어를 어떤 선 안에 두려 한다. 그림자, 계단 손잡이, 거울, 기둥 등의 선들은 영화의 프레임을 더욱 잘게 쪼개 그 안에 마리어를 위치시킨다. 타인과 대화도, 신체적 접촉도 수월하지 않은 그는 스스로가 만들어낼 수밖에 없던 선 안에 갇혀있다.



 안드레와 마리어는 꿈속에서 사슴이 되어 만난다. 그들이 만나는 눈 덮인 숲은 각자가 가진 결핍을 넘는 환상의 공간이다. 둘은 자연스럽게 몸을 비비고, 먹을 풀을 찾고, 시냇물을 마신다. 수직으로 곧게 뻗은 나무들로 가득한 공간이지만, 그들은 자연스럽게 그 선들을 지나친다. 아니, 나무라는 선들은 스크린 내부에 존재하는 두 사슴과 분리되어 스크린의 외피에 누군가 그어버린 선처럼 붕 떠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들은 나무들을 자연스럽게 지나치기도, 그사이를 맹렬하게 돌파하기도 한다. 결국 꿈이라는 공간에서 둘의 영혼은 몸을 벗어나 교감한다. 안드레는 마리어를 자신의 단골 식당으로 데려가지만 변해버린 식당 때문에 실패한 데이트가 되고, 마리어는 음악을 들으며 감정을 익히려 하고 안드레와의 연락을 위해 핸드폰도 사보지만 그의 한 마디에 무너져 내린다. 꿈이 아닌 현실의 공간에서 그들은 계속 다양한 결핍을 마주하고 한 순간 좌절한다. 안드레와의 관계가 실패했다고 느낀 마리어는 (아마도) 생애 처음으로 시도한 감정적 관계의 실패 앞에 자신의 왼팔을 그어 자살을 시도한다. 담배도, 유흥도, 여자관계도 끊었다는 안드레는 다시 전 애인(아내?)과 섹스를 한다. 얼핏 보면 각각의 정신적, 신체적 결핍이 뒤바뀌어 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 그들은 결국 만나 섹스를 하고, 더 이상 같은 꿈을 꾸지 않는다. 꿈-환상의 공간에서 겪는 영혼의 교감이 필요했던 그들은 육체를 지닌 현실에서 감정을 나눈다. 때문에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는 영혼과 육체에 어떤 위계를 부여하는 대신, 현실-꿈이라는 각각의 세계에서 각각의 역할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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