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2017' 카테고리의 글 목록 (4 Page) :: 영화 보는 영알못

<족구왕>, <범죄의 여왕> 등의 영화들을 제작한 광화문시네마의 신작이다. 광화문시네마는 서로가 서로의 작품에 카메오 혹은 스태프로 품앗이해가면서 새로운 작품들을 내놓는, CGV아트하우스 등에 의해 자본화되어가는 독립영화 속에서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낸 제작사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광화문시네마의 작품은 항상 자본의 틈바구니에서 공간과 취향을 잃어버린 청년들의 이야기를 다루어 왔다. <족구왕>의 족구, <범죄의 여왕>의 연립주택이 그러한 소재로서 등장했다. 광화문시네마 작품들의 제작과 각색을 맡아온 전고운 감독의 장편 데뷔작 <소공녀>는 집을 소재로 삼는다. 빛 없이 사는 게 삶의 목표인 주인공 미소(이솜)는 일당 4만 5천 원에 가사도우미 일을 하며 생활하고 있다. 그녀의 집은 얼음장처럼 차가워 옷을 대여섯 겹씩 껴입어야 하고, 너무 추워서 남자친구 한솔(안재홍)과 섹스도 하지 못한다. 적은 일당을 쪼개 살지만 자신의 유일한 낙인 담배와 위스키는 포기할 수 없는 미소. 담뱃값이 2,500원에서 4,500원으로 인상된 2015년, 월세 마저 인상되자 미소는 방을 빼기로 결심한다. 남자친구는 회사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고 당장에 밤을 보낼 곳이 없는 상황, 미소는 대학시절 함께 밴드를 하던 멤버들의 집을 하나씩 찾아간다.



 <소공녀>는 미소가 다섯 멤버들의 집을 하나씩 찾아가는 과정을 담아낸다. 영화는 마치 그들의 집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미소가 만나는 다섯 친구의 집은 모두 제각각이다. 링거까지 맞아가며 직장에 매여 있어 집으로 미소를 초대하지도 못 하는 친구(강진아)가 있는가 하면,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반갑게 맞이하지만 요리도 잘못하면서 결혼해 적성에도 맞지 않는 집안일을 하는 신세를 한탄하는 친구(김국희)도 있고,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이혼했지만 대출로 인해 신혼집인 아파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친구(이성욱), 가부장제의 안락함 속에 자리 잡는 것이 안정이라 믿는 친구(최덕문), 돈 많은 중년과 결혼해 큰 집에서 남 부러울 것 없이 살아가지만 젊은 시절의 염치는 잃어버린 친구(김재화)까지. 집이라는 공간은 각각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함의를 품은 공간으로 변모한다. 집이지만 집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곳, 가사노동에 함몰된 곳, 감옥처럼 벗어날 수 없는 곳, 가부장제에 하에 봉사하는 곳, 자신의 과거와 단절되어야 존재할 수 있는 곳. 미소는 담배와 위스키를, 자신을 자신으로 남게 해주는 것 대신 집을 포기한 채 계란 한 판을 들고 친구들의 집을 찾는다. 친구들은 집이라는 공간은 있지만 자신이 공간을 소유하고 있는 것인지, 공간이 그들을 정의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들에게 잠을 자고 요리를 할 수 있는 공간은 있지만, 그들은 그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인지 혹은 그곳이 자신이 존재하도록 정해진 공간이기에 머무를 뿐인지 모를 상황이다. 때문에 담뱃값도, 월세도, 심지어 위스키 값 마저 오르는 세상에서 계란 한 판이라는 염치와 가사노동이라는 노동력을 지니고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며 일당 4만 5천 원으로 살아가는 미소의 모습이야말로 ‘생활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공녀>는 집과 집 사이를 오가는 여정이다. 영화의 후반부, 미소는 집을 구하기 위해 부동산 중개인과 함께 어느 산동네를 돌아다니지만 그가 머물 집은 그곳에도 없다. 한솔의 벌이와 미소의 벌이를 합쳐도 둘이 함께할 공간을 구할 수 없다. 한솔은 사우디아라비아로의 발령을 선택한다. 그곳에 가면 생명수당이 나와 2년 뒤에 둘이 함께할 곳을 구할 수 있다고 말하고 떠난다. 미소는 한솔에게 “담배, 위스키, 그리고 너만 있으면 돼”라고 말한다. 한솔은 만화가가 되겠다는 꿈마저 “헛된 희망일 뿐이야”라며 포기한다. 함께할 공간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해야 하고, 그렇다고 그 집이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한국, 서울에 살아가는 청년들은 선택의 기로에서 스스로의 선택인 것처럼 보이도록 은폐된 강요된 길을 따른다. 이 길에서 벗어나기 위한 미소의 포기는 한솔과 밴드 멤버들을 포함한 그녀의 인간관계 속 사람들 중 유일하게 주체적인 선택이다.



 영화 내내 미소는 정체불명의 한약을 먹는다. 한쪽 앞머리가 하얗게 샌 미소는 약을 먹지 않으면 머리 전체가 하얗게 되어버릴 것이라고 말한다. 선천적인 이유인지, 어떤 병이라도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 약은 미소의 가계부에 고정비용으로써 존재한다. 미소의 약값과 같은 고정비용은 누구에게나 각각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 그것은 학자금 대출의 이자일 수도 있고, 허리디스크나 천식 같은 지병일 수도 있다. 영화의 마지막, 관객은 하얗게 변해버린 미소의 머리를 본다. 계속해서 오르기만 하는 담뱃값과 위스키 값에, 또 남자친구를 만나 작은 데이트를 위해 미소는 월세에 이어 또 하나의 고정비용을 포기해버린다. 결국 미소는, 그의 주변 사람들은, 영화를 보던 관객들은 강요된 선택 사이에서 고민하는,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사라지는 제로섬 게임 속에서 살아간다. 단순히 나의 취향과 안정된 (것으로 보이는) 공간 두 선택지를 놓고 고르는 게임이 아니다. 스스로의 선택이라고 꾸며진 강제를 따르게 되는 상황은 이미 공정한 게임을 벗어나 있다. 영화는 그 사이에서 은폐된 선택지를 찾아내 선택하고 살아가는 미소의 삶을 담는다. 미소는 게임 밖에서 강제된 선택을 따르는 사람들을 지켜본다. 그렇기에 <소공녀>는 한 발 떨어져서 사람들을 지켜보는 우화이다.

여권신장운동의 바람이 불던 1973년, 여성 테니스 1위인 빌리 진 킹(엠마 스톤)은 남성 선수들에 비해 턱없이 적은 여성 토너먼트의 상금에 불만을 가진다. 이에 기존의 열리던 토너먼트를 보이콧하고 여성테니스협회를 설립해 여성 선수들만의 토너먼트를 이어간다. 남성 중심의 스포츠 업계의 냉담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빌리 진 킹과 여성테니스협회는 스폰서의 협찬까지 따내면서 나름 성공적으로 투어를 이어간다. 그러던 중 빌리의 이러한 행보를 주목하던 왕년의 챔피언이자 도박을 즐기는 바비 릭스(스티브 카렐)가 그녀에게 10만 달러의 상금을 건 경기를 제안한다. 평범한 회사원의 생활에 무료함을 느낀 바비는 다시금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위해 이러한 판을 벌인다. 빌리는 처음에는 이 제안을 거절하지만, 이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회임을 깨닫고 세기의 빅 매치를 준비한다.



 <빌리진 킹: 세기의 대결>은 1973년에 있었던 빌리 진 킹과 바비 릭스의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세기의 성대결>(Battle of Sexes)라는 원제처럼 영화는 121분의 러닝타임 내내 테니스계, 스포츠계, 더 나아가 사회 전반에 깔린 “남성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여성보다 우월하며, 때문에 스포츠, 정치, 가정 등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는 남성이어야 한다.”는 인식에 맞선 빌리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영화는 테니스협회 회장인 잭 크레이머(빌 풀먼)이나 바비 릭스의 노골적인 여성 비하 발언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이를 끊임없이 되받아 치는 빌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세기의 대결을 준비하며 훈련하고 고민하는 빌리의 모습과 특유의 쇼맨십을 선보이며 사람들을 휘어잡는데 집중하는 바비의 모습을 보여주는 교차편집에서 이미 테니스 공을 주고받는 랠리가 시작된 것만 같다. 기대보다 더욱 흥미진진하게 연출된 테니스 경기 장면을 보고 있자면, 마치 빌리와 바비의 경기가 열린 돔 경기장에 앉아있는 관중이 된 것처럼 1973년 당시의 열기와 흥분이 느껴진다.



 영화에는 분명 아쉬움도 존재한다. 예상보다 빠르게 흘러가는 전개와 좁은 공간 속에 모인 사람들을 훑는 핸드헬드 촬영은 산만하게 느껴지고, 바비 릭스의 비중은 단순히 빌리 진 킹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러닝메이트 수준보다 조금 과하게 많아 보인다. 후반부 바비가 아내인 프리실라(엘리자베스 슈)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장면이나, 오만한 모습을 전시하는듯한 장면들은 이따금씩 빌리에게서 정말로 스포트라이트를 앗아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다행히도 <빌리 진 킹>은 중심을 놓치지는 않는데, 이는 배우들의 공이 크다. 엠마 스톤은 <라라랜드>가 아닌 이 영화로 오스카를 받았다 해도 놀랍지 않을 연기를 선보인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다 내가 살면서 겪을 거라 상상하지 못한 감정이 연기를 통해 전달되고 관객인 나 역시 그러한 감정 속으로 들어갈 때 놀라곤 한다. <빌리 진 킹>의 엠마 스톤은 그러한 순간을 몇 차례고 만들어낸다. 바비를 연기한 스티브 카렐은 수다스러우며 오만한 캐릭터 그 자체가 되었으며, 엘리자베스 슈, 사라 실버맨, 알란 커밍 등의 연기 역시 영화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빌리가 자신의 레즈비언 정체성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준 마릴린 역의 안드레아 라이즈보로와 남편 래리 킹 역의 오스틴 스토웰은 영화에 안정감을 더한다. 성 정체성에 대한 빌리의 고민을 담은 마릴린과 조신하게 내조하는 래리의 캐릭터는 빌리의 이야기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영화를 보며 <히든 피겨스>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자신이 속한 세계의 성차별과 맞서는 천재들. 자신의 능력을 통해 유리천장을 부수고 정상을 향해 가는 사람들. 주변의 여성들과 연대해 어떤 흐름을 만들어가는 여성들. 물론 두 영화 모두 어떤 분야의 천재이기에 유리천장을 깰 수 있었다는 서사로 귀결된다는 점이나, 인종적/계급적 함의를 담아내는 데 있어서 부족한 부분이 보인다는 점(<빌리 진 킹>의 마지막 장면에서 게이인 테이(알란 커밍)와 클로짓 레즈비언인 빌리 사이의 연대가 드러나는 부분은 좋았다)은 아쉽다. 그러나 나사의 컴퓨터로 불리는 여성 직원들을 모아 복도를 행진하는 <히든 피겨스>의 천재들이나, 단숨에 테니스협회의 토너먼트를 보이콧하고 여성테니스협회를 설립해 기어이 성공시키는 빌리의 모습은 그 자체로 기념비적인 모델이 된다. <고스트 버스터즈>나 <원더우먼>과 같은 픽션 속 여성 영웅과 더불어 현실 속 여성 영웅들이 계속해서 스크린으로 소환되는 흐름이 이어졌으면 한다.

“한 2~30년 전쯤 과거로 돌아가서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이 나오는 영화가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이 나오는 영화보다 훨씬 성공했다고 말하면 누가 믿을까” 모 트친분이 <저스티스 리그>를 보고 남긴 말이다. 1966년 처음으로 배트맨이, 1979년 슈퍼맨이 영화화될 때만 해도, 아니 팀 버튼과 크리스토퍼 놀란이 각각의 배트맨 영화로 큰 성공을 거두었을 때만 해도 <저스티스 리그>라는 빅 이벤트가 이렇게 처참한 기록을 남길 줄 누가 알았을까? 엄청난 물량공세와 흥행으로 다른 프랜차이즈들을 압도하는 MCU와 <로건>, <데드풀> 등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찾은 엑스맨 유니버스와 비교하면, 후발주자인 DCEU의 모습은 아쉽기만 했다. 앞선 세 영화의 (흥행은 성공했지만) 실패 끝에 등장한 <원더우먼>의 성공 이후, 팬들은 다시금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드디어 실현된, 팀 버튼과 크리스토퍼 놀란과 조지 밀러 등의 이름들이 오간 빅 이벤트인 <저스티스 리그>는 다시 살아난 희망마저 앗아간다.



 “<저스티스 리그>가 그렇게까지 재미없는 영화인가?”라고 물어보면 러닝타임 120분 정도는 금방 지나간다고 답할 수 있다. <수어사이드 스쿼드>나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처럼 견디기 힘들 정도로 지루하지는 않다. 플래시(에즈라 밀러)나 사이보그(레이 피셔)처럼 새로 등장하는 캐릭터들을 나름 괜찮게 선보이고, 슈퍼맨(헨리 카빌)의 예견된 부활까지 영화가 담아내야 될 이야기는 모두 담아낸다. 문제는 영화의 속도와 톤이 영화보다는 드라마에 맞혀진 것 같다는 인상이다. 이러한 지적은 MCU에서부터 이야기가 나왔다. MCU는 ‘어벤저스’라는 이벤트를 향해 개별 영화들이 드라마의 각 에피소드처럼 진행된다. 각각의 이야기가 개별적으로 진행되지만, 모두가 모이는 이벤트를 위해 떡밥을 뿌리는 소모적인 행태가 이어진다. 그럼에도 MCU의 작품들은 캐릭터 쇼라는 기본적인 정체성을 유지하며 개별 작품의 매력을 유지한다. <저스티스 리그>는 온전히 드라마의 한 에피소드처럼 느껴진다. <저스티스 리그>에서는 배트맨(벤 애플렉)이 원더우먼(갤 가돗), 아쿠아맨(제이슨 모모아) 등의 메타휴먼들을 모아 저스티스 리그를 결성하고, 스테판 울프(시아란 힌즈)를 격퇴하는 메인 플롯과 동시에 플래시, 사이보그, 아쿠아맨, 슈퍼맨 등 각각의 이야기가 서브플롯으로 함께 제시된다. 120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안에 다 욱여넣을 수없는 플롯들은 스쳐 지나가는 드라마의 한 에피소드처럼 완전히 분절된 각각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MCU가 페이즈 단위로 진행되는 거대한 드라마이면서 개별 작품의 속성을 유지한다면, <저스티스 리그>는 그냥 큰 드라마의 한 에피소드 수준에 머문다.



 이렇게 된 원인으로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는 잭 스나이더가 하차하고 조스 웨던이 빈자리를 채웠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절대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맨 오브 스틸>과 <배트맨 대 슈퍼맨>은 DCEU가 나아갈 (비주얼적인) 지향점을 확실히 잡아두었다. 때문에 DCEU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지향점을 살릴 각본과 허튼 방향으로 엇나가지 않도록 제작진을 붙잡아 줄 기획자이다. <저스티스 리그>를 보면 여전히 잭 스나이더의 장점들이 살아있다. 오프닝 크레딧과 함께 등장하는 저스티스 리그 멤버들의 몽타주라던가 원더우먼이 박물관에서 테러리스트들을 제압하는 장면 등은 시퀀스 단위로는 괜찮은 비주얼을 선보이는 잭 스나이더의 장기가 여전히 남아 있는 장면들이다. 그러나 조스 웨던이 투입되어 재촬영된 장면들은 영화를 보면서 잭 스나이더와 조스 웨던이 촬영한 장면들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톤이 일정하지 않다. 특히 슈퍼맨이 부활한 뒤 멤버들과 첫 대면하는 장면의 톤은 조스 웨던이 <배트맨 대 슈퍼맨>을 보긴 했을까 싶을 정도로 어색하다. 잭 스나이더가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예고편 속 많은 푸티지들이 본편에서 잘려나간 것 또한 이러한 어색함에 크게 한몫한다. 결국 <저스티스 리그>는 조스 웨던이 <어벤저스>에서 보여준 유기성은커녕, <어벤저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보여준 정리될 수 없는 플롯과 시퀀스들의 난장만을 이어간다.



 <저스티스 리그>는 한 편의 영화로 보면 형편없이 짝이 없지만, DCEU라는 거대한 드라마의 일부로 본다면 DC 팬들에게는 수많은 떡밥들을 남겨준다. 잠깐 등장하는 메라(엠버 허드)와 아틀란티스의 모습이라던가, 수감된 플래시의 아버지 헨리 앨런(빌리 크루덥), 전지전능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슈퍼맨의 모습, 잠시 등장하는 그린랜턴 군단 등은 팬들이 바라던 몇몇 모습이다. 쿠키영상 두 개의 내용 역시 그러한 부분에서 팬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준다. 동시에 현재 CW 채널에서 방영 중인 DC 드라마들과 DCEU의 작품들을 비교하게 되기도 한다. 가령 플래시의 능력 묘사는 분명 이번 영화보다 드라마 속의 묘사를 더욱 선호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혹은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속 퀵실버와 비교하며 아쉬움을 표하기도 할 것이다. 종종 등장하는 ‘백인 시스젠더 남성 너드’식 조크는 벤 애플렉이나 제이슨 모모아라는 영화 밖의 배우 개인이 야기한 논란과 맞물려 재미없고 짜증만 유발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저스티스 리그>는 각 캐릭터를 소개하고 슈퍼맨을 부활시키기 위한 하나의 에피소드 수준에 머문다. 조드 장군(마이클 섀넌)의 함선에서 플래시가 일으키는 전기와 마더박스를 통해 슈퍼맨을 부활시키는 장면은 뭐랄까,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는 3분 요리를 연상시킨다. 어쨌거나 잘 때려 부시는 액션들과 (배우의 매력인지 캐릭터의 매력인지 분간할 수는 없지만) 매력 있는 캐릭터들을 보는 것은 맛있지만, 썩잘 어울리지도 않는 편의점 음식들을 잔뜩 사다가 돌려 먹는 기분이다. 다른 잘 만들어진 블록버스터 상품들을 봤을 때의 포만감보다는 갑자기 튀어나오는 블랙핑크의 ‘마지막처럼’ 같은, 맛은 있지만 어색한 인스턴트로 배를 채웠다는 생각만 든다.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의 트리니티가 등장하는 영화가, 슈퍼맨과 플래시의 속도 대결이 등장하는 영화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같은 듣보잡 히어로들이 모인 영화보다 지루할 것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어벤저스 원년멤버라고 할 수 있는 캐릭터 중 유일하게 솔로영화가 아쉬웠던 토르의 세 번째 솔로영화이다. ‘라그나로크’라는 무게감 있는 제목을 가져오고 인디영화 씬에서 <뱀파이어에 관한 아주 특별한 다큐멘터리>와 같은 톡톡 튀는 작품들을 만들어온 타이카 와이티티를 영입한 마블의 선택은 적중했다. <토르: 라그나로크>를 잘 짜인 작품이냐, 혹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나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저>와 같은 MCU의 베스트 중 한편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실망스러웠던 <토르: 천둥의 신>이나 페이즈 2의 다른 작품들보다 아쉬웠던 <토르: 다크 월드>를 생각하면 이런 방식의 틀을 깨는 선택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비주얼에 경도되어 이야기의 부실함이 여지없이 드러났던 <닥터 스트레인지>나 백인 남성 중심의 코드를 과하게 집어넣어 불쾌해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 이전 스파이더맨들에 비해 빈약한 액션과 어딘가 미덥지 않은 악당을 다루는 태도를 보여준 <스파이더맨: 홈커밍>에 비하면, <토르: 라그나로크>는 제대로 깔아 둔 판 위에서 한바탕 노는, 어떤 불쾌함이나 쎄함 없이 즐길 수 있는 영화였다.



 영화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인피니티 스톤을 찾아 우주를 여행하던 토르(크리스 햄스워스)는 아스가르드로 돌아오지만, 로키(톰 히들스턴)의 계략으로 힘이 약해진 오딘(안소니 홉킨스)이 죽자 죽음의 신 헬라(케이트 블란쳇)가 아스가르드를 침공한다. 헬라에 의해 추방당한 토르는 그랜드마스터(제프 골드브럼)가 지배하는 사카이르 행성에 떨어지고, 그곳에서 재회한 로키와 헐크(마크 러팔로) 그리고 아스가르드의 전사였던 발키리(테사 톰슨)와 힘을 합쳐 헬라에게 복수한다. 단순한 이야기를 채우는 것은 유머이다. <토르: 라그나로크>의 유머는 MCU의 다른 영화들과는 살짝 결이 다르다. 타이카 와이티티가 전작들에서 보여주었던 유치하지만 적중률이 높은, 마치 어린 남자아이들이 떼를 써가며 싸우는 모습을 보는 것과 같은 유치함이 영화 속에 가득하다. 이러한 유치함은 명백히 단점이 아닌 장점으로 작용한다. 가령 <파워레인저>나 <벡터맨> 같은 전대물을 보면서 느꼈던 즐거움, <울트라맨> 같은 특촬물을 보면서 느낀 즐거움이 <토르: 라그나로크>에 가득하다.



 동시에 이 영화에는 토르 시리즈에 바라던 신화적인 비주얼이 가득 등장한다. 헬라와 발키리 군단의 전투를 담은 발키리의 회상 시퀀스, 헬라가 아스가르드의 전사들과 일당백의 전투를 벌이는 장면, 비프로스트에서 벌어지는 마지막 전투 시퀀스 등은 북유럽 신화를 차용한 이야기에 걸맞은 비주얼을 선사한다. 동시에 <스타트렉>이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같은 영화들에서 봐온 스페이스 오페라적인 함선과 도시의 비주얼, <반지의 제왕> 같은 중세 판타지 영화에서 따온 듯한 비주얼들이 한 편에 영화 속에 꾹꾹 눌러 담겨 있다. <해리포터>의 퀴디치 월드컵 장면을 연상시키는 사카이르의 검투사 대결 장면이나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묘하게 BBC 드라마 <셜록>을 연상시키는 주소를 집어넣는 등의 재치는 익숙한 즐거움을 불러온다. 영화의 액션은 다소 게임의 시네마틱 트레일러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만 각 캐릭터의 특징에 알맞은 (특히 발키리와 헬라의 액션들은 기대 이상이다) 액션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만족스럽다.



 결과적으로 <토르: 라그나로크>는 MCU의 세계관 속에 갇힌 영화이기는 하다. 한 편의 거대한 드라마처럼 줄줄이 개봉하고 있는 MCU의 영화들은 관객이 보고 싶어 하는 코믹스 속 어떤 장면, 가령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의 대격돌이나 이번 영화의 토르 vs 헐크 장면과 같은 장면들을 보여주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 사이를 어떻게 채우는지가 마블 크리에이터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가 되었다. 페이즈 3의 영화들이 대부분 진부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캐스팅 혹은 비주얼적인 측면이나 기존 코드를 답습할 뿐이라면, <토르: 라그나로크>는 인디 b급 영화적 스타일을 적절히 차용했다는 점에서 만족스럽다. MCU 세계관의 장면들을 직접적으로 패러디하는 장면들은 물론, 캐스팅에 걸맞은 캐릭터의 매력을 드러내면서 감독의 취향을 뒤섞은 유머와 각종 영화들에서 따온 장면들은 잡탕이 따로 없지만 어쨌거나 맛있다. 동시에 MCU의 다른 영화들에 비해 잘 쌓아 올려진 이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은 MCU의 다른 영화들과 차별화되는 <토르: 라그나로크>의 장점이기도 하다.

미지에 바이러스가 퍼지고, 이것에 걸린 사람들은 피를 토하고 피부에 발진이 일어나며 며칠 만에 사망한다. <잇 컴스 앳 나잇>은 바이러스가 퍼지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한다. 영화가 시작하면 폴(조엘 에저튼)과 아내인 사라(카르멘 에조고), 아들인 트래비스(캘빈 해리슨 주니어)가 할아버지에게 작별인사를 건네고 있다. 바이러스 증상이 드러난 그를 죽이고 불태운 뒤 땅에 묻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한다. 물과 식량을 아껴가며 지내던 어느 날, 누군가 갑자기 문을 두드린다. 가족을 위해 물과 식량을 찾던 윌(크리스토퍼 애봇)이 폴의 집을 빈 집으로 착각해 침입하려 한 것. 폴은 윌을 잡아 두고 대화를 통해 그가 자신의 가족에게 해를 끼치려는 의도는 없었다는 것을 확인한다. 윌에게 어느 정도의 식량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폴은 윌의 가족과 집을 공유하기로 하고, 그의 아내인 킴(라일리 코프)과 어린 아들이 폴의 집에 도착한다. 그들은 그렇게 함께 시간을 보내며 생존해간다. 그러던 중 숲 속으로 달려가 버렸던 트래비스의 개 스탠리가 야밤 중에 돌아오고, 그들은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잇 컴스 앳 나잇>은 표면적으로는 바이러스라는 재난의 상황과 그 안에 놓인 인간들 사이의 심리를 그린 재난 공포 영화로 보인다. 폴이 장인어른을 쏴 죽이는 오프닝 시퀀스와 밤중에 윌이 집으로 침입을 시도하는 장면 등은 전형적인 장르적 공포 효과를 선보인다. 트래비스의 꿈을 통해 끊임없이 긴장감을 불어넣고 불안감의 분위기를 깔아 두는 방식 또한 평범하지만 효과적이다. <잇 컴스 앳 나잇>이 자신만의 색을 드러내는 것은 윌의 가족이 폴의 집으로 오면서부터 시작된다. 두 가족이 한 집에서 일상을 만들어가고 교류하는 장면들은 굉장히 화목해 보인다. 윌과 킴은 오랜만에 목욕을 즐기고, 트래비스는 윌에게 장작 패는 법을 배우고, 사라는 킴에게 집을 정비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함께 밥을 먹고 사냥과 채집에 나서며, 이런저런 집안일을 함께 해나가며 작은 농담을 주고받는 몽타주는 아름답도록 행복해 보인다. 윌의 가족이 어떤 꿍꿍이가 있지 않을까 하며 그들의 방을 몰래 들여다보던 트래비스는 행복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웃는다. 호러 장르에서 만나기 힘든 아름다운 몽타주는 어렵사리 쌓아 올려진 화목함을 담아낸다.



 이러한 화목함, 행복은 폴의 가족과 윌의 가족이 서로 의심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아 두어야 가능하다. 그들은 서로를 의심하지 않는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서로를 의심하지 않는다. 폴은 끊임없이 트래비스에게, 사라에게 우리 가족 이외의 사람들을 완전히 믿으면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겉으로 보기엔 폴과 윌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것을 한 꺼풀 벗겨 보면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의심이 드러난다. 앞서 등장한 아름다운 몽타주는 가식으로 의심을 가릴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상황에서 가능한 화목함이다. 트래비스의 악몽으로 제시되는 불길함은 그들의 가식 밑에 지울 수 없는 의심이 깔려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드러낸다. 스탠리의 귀환과 함께 표면 위로 떠오르는 바이러스에 대한 불안감은 최소한의 가식마저 차릴 수 없게 인물들을 몰아간다. 그들에게 표면적인 선의를 베풀 여유가 사라진다. 영화 내내 뿌려진 사람들의 의심이라는 씨앗 표피를 뚫고 겉으로 드러나게 된다.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영화의 결말은 우리가 표면적인 가식으로 서로에 대한 의심을 감출 최소한의 여유도 없을 때의 사건이다.



 <잇 컴스 앳 나잇>이 담아내는 파국은 어딘가 현실을 닮았다. 최소한의 여유를 가졌을 때 드러나는 아름다운 화목함과 여유를 잃어버렸을 때의 파국은 현실에서 범람하는 혐오범죄의 양상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삶에서 여유가 제거될수록 상대방이 나의 안정을 박살내고야 말 것이라는 의심과 불안함은 커져만 간다. 인종적, 젠더적 요소가 갈등의 요소에서 완전히 배제된 채 폴의 가족과 윌의 가족 두 집단이 충돌하는 이야기는 도리어 현실의 혐오범죄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잇 컴스앳 나잇>이 담아내는 공포는 어떤 질병으로 세상이 멸망하는 아포칼립스적 상상력이 아니다. 비록 그 표면이 가식일지라도, 그 속에 심어진 의심을 가리는 가식을 가질 여유도 잃어버린 사람들의 충돌에서 오는 공포의 상상력을 장르적 상상력과 결합한 작품이다. 때문에 <잇 컴스 앳 나잇>이 담아내는 공포는 굉장히 깊게, 시의성 있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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