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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포함


 이번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처음으로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를 관람했다.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한 <희망의 건너편>은 핀란드 헬싱키에 도착한 시리아 출신의 난민 칼레드(세르완 하지)와 의류 도매업을 접고 식당을 인수한 핀란드인 비크스트롬(사카리 쿠오스마넨)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헬킹키의 한 항구에서 화물선에 실린 석탄더미를 비집고 칼레드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도시에 도착하고 곧바로 경찰서를 찾아가 망명 신청을 한다. 망명 심사가 진행되는 동안 보호소에 머무는 그는 시리아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여동생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수소문하고 다닌다. 이혼한 남성인 비크스트롬은 어딘가 지루해 보인다. 의류 도매업이 돈이 잘 안 되는 것 같아 보이자 남은 의류를 땡처리한 뒤 그 돈을 들고 카지노를 찾아간다. 가볍게 큰돈을 딴 그는 ‘황금 맥주잔’이라는 식당을 매입한다. 각기 진행되던 두 사람의 이야기는 칼레드의 망명 신청이 기각되고, 보호소를 떠난 그가 우연히 비크스트롬을 만나게 되면서 하나의 이야기로 통합된다. 비크스트롬은 핀란드어도 할 줄 모르고 영어로 간신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칼레드를 식당의 직원으로 고용하고, 지하 주차장의 창고이지만 그가 머물 수 있는 곳을 마련해주기도 하며, 현금이 없다는 그에게 월급을 미리 가불 해주기도 한다. 이러한 비크스트롬의 행동은 단순한 온정과 선의로 보이기도 하지만, 인수한 식당을 운영하기 위한 합리적인 선택이기도 하다. 한편 도시의 스킨헤드 네오나치들은 칼레드가 눈에 띄자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려 한다.



 <희망의 건너편>은 합리적인 따뜻함을 이야기한다. ‘합리적’과 ‘따뜻함’,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언뜻 넌센스 같아 보이는 두 단어의 연결을 기어코 선보인다. 칼레드는 자신의 가족을 죽인 폭격이 누구의 짓인지 모른다. 시리아군인지 반군인지, ISIS인지 미국인지러시아인지 그는 모른다. 단지 자신과 여동생을 제외한 가족들이 점심식사 중에 모두 폭사했고, 핀란드는 자신의 망명 신청을 기각했다. 그의 망명을 위한 인터뷰를 진행하던 공무원은 친절하게 그의 상황을 듣고, 상황의 절박함을 이해하는 듯했지만 그는 결국 핀란드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고 손목에는 수갑이 채워진다. 시리아, ISIS, 미국, 핀란드 등 국가단위(혹은 그에 맞는 사이즈)의 거대한 집단 사이에서 칼레드는 거처를 정하지 못하고 떠돌 수밖에 없다. 이러한 그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은 보호소에서 만난 다른 망명자 친구와 비크스트롬, ‘황금 맥주잔’의 종업원들뿐이다. 보호소에서 만난 친구와는 담배를 나눠 피며 서로의 처지에 공감하고, 여동생을 찾는 칼레드를 위해 모든지 도와주겠다고 약속하며 형제애를 다진다. 동병상련의 상황에 놓인 두 인물의 서로 의지하는 상황은 어찌 보면 평범한 전개처럼 보인다. 주목할만한 것은 비크스트롬과 식당의 종업원들이 칼레드를 대하는 모습들이다. 그들이 칼레드를 대하는 모습은 갈 곳 없는 난민에게 시혜적으로 손길을 내미는 모습이 아니다. 그렇다고 어떤 동료애가 넘치는 따뜻함으로 가득한 모습도 아니다. 비크스트롬이 칼레드를 고용하는 것은 식당에 직원이 필요하기 때문이고, 임금이 체불된 다른 사원들과 마찬가지로 임금을 가불해 주었으며, 칼레드의 노동력이 필요하기에 그를 도와준다. 일종의 ‘사원복지’ 차원으로 느껴진달까. 영화가 그려내는 비크스트롬의 모습은 이제 막 식당을 인수하여 직원들의 충성을 얻고 신뢰감을 쌓으려는 사장의 모습이다. 식당에서 일하는 동료들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칼레드의 여동생이 핀란드에 도착하는 장면을 제외하면 꽤나일상적인 모습들이다. 때문에 <희망의 건너편>이 그려내는 따뜻함은 아가페적인 온정이나 인간과 인간 사이의 뜨거운 연대와는 성격이 다르다. 비크스트롬과 칼레드는 각자 필요한 것을 서로에게 요구했고, 그들의 니즈는 서로가 충족시켜줄 수 있는 형태의 것이었다. 때문에 비크스트롬은 칼레드를 고용하고, 칼레드는 그를 위해 노동한다.



 <희망의 건너편>의 원제 ‘Toivon tuolla puolen’을 구글 번역기에서 ‘나는 그 이상으로 희망한다’로 번역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희망하는 그 이상은 무엇일까? 그가 지금의 상태에서 희망하는 것과 그 건너편에 존재하는 희망은 무엇일까? 최근 유럽에서 쏟아지고 있는 난민 소재의 극영화들과 중동 현지에서 제작되는 다큐멘터리들은 현재의 상황을 보도하듯 난민의 모습을 스크린으로 옮기고 있다. 국가단위의 폭력 사이에서 거처를 잃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도는 모습을 리얼하게, 영화의 장르가 판타지적일지라도 스크린에 그려지는 삶만큼은 리얼리즘에 가깝게 옮겨진다. <희망의 건너편>은 이러한 현실 사이에서 뜬구름 잡는 듯한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낙관적인 해피엔딩을 꿈꾸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코미디의 톤을 띈 (중반부에 등장하는 스시 시퀀스는 올해 최고의 코미디였다) 영화는 칼레드의 해피엔딩을 낙관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영화의 마지막은 그렇지 않다. 마침내 여동생과 재회한 칼레드는 망명 신청을 위해 경찰서로 들어가는 여동생과 인사를 한 뒤 네오나치의 칼에 찔린 배를 움켜쥐고 어느 호숫가의 나무에 기대어 거칠게 숨을 쉰다. 그럼에도 칼레드는 웃는다. 비크스트롬과 식당의 사람들을 만났고, 보호소에서 만난 사람과 형제가 되었고, 잃어버렸던 여동생은 핀란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말하는 희망은 모든 상황이 종료되는 낙관적인 희망을 꿈꾸지 않는다. 대신 지금 살아있는 사람이 그 자리에서 계속 살아가길 꿈꾼다. 지금까지의 영화들이 꿈꾸었던 희망이 상황의 종료였다면, 카우리스마키는 그 건너편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길 희망한다. 그렇기에 그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합리적인 따뜻함을, 합리적인 연대를 꿈꾼다.

 ‘Mayhem’ 대혼란, 아수라장을 의미하는 영어단어이다. 조 린치 감독의 B급 영화 <메이헴>은 제목 그대로의 아수라장을 담아낸다. 영화는 변호사인 데릭 조(스티븐 연)의 내레이션과 함께 시작한다. 사람들의 분노, 성욕, 우울 등의 본능을 극대화시키는 바이러스가 세상에 퍼지고,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한 회사원이 직장 상사를 펜으로 찔러 죽이는 사태가 발생한다. 데릭 조는 이 사건이 단순한 살인이 아닌 바이러스에 의해 벌어진 사건임으로 상사를 살해한 회사원은 무죄라는 판결을 이끌어내며 고속 승진하는 탄탄대로에 올라탄다. 가족과 통화할 시간도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며 더 높은 자리로 승진하기 위해 살아가던 데릭은 회사의 잘못으로 터진 사건을 막기 위해 갑작스레 해고당한다. 그리고 데릭이 해고당하던 날 회사 건물에 바이러스가 퍼지고, 바이러스가 정화되기 위해 필요한 8시간 동안 건물이 봉쇄된다. 이미 회사 건물에 퍼진 바이러스에 사람들이 감염되고, 건물은 아수라장이 된다.



 사실 공개된 포스터와 시놉시스를 보고선 좀비 영화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나를 포함한 많은 관객들이 <메이헴>이 좀비 영화인 줄 알고 상영관을 찾았을 것이다. 심지어 스티븐 연은 <워킹데드>의 글렌이니까! 때문에 해고당한 데렉이 좀비가 된 직장 상사들을 마음껏 썰고 패면서 건물을 빠져나오는 작품이 아닐까 지레짐작했었다. 직접 관람한 영화는 생각한 것과는 정 반대의 영화였다. <메이헴>은 좀비를 피해 건물을 탈출하는 이야기가 아닌, 바이러스에 걸렸다는 사실을 이용해 자신을 해고한 직장상사들을 죽이러 건물 지하에서부터 최상층까지 치고 올라가는 이야기를 그려낸다. 회사는 자신들의 잘못을 덮기 위해 데릭을 희생자로 내세우지만, 데릭은 자신이 승진할 수 있는 이유였던 (동시에 회사가 성장하는 계기였던) 바이러스 무죄 판결을 이용해 자신을 내친 회사를 자신의 두 손으로 박살 낸다. 좀비처럼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 단지 본능적인 분노가 극대화되는 바이러스라는 설정은 데릭이 마음껏 ‘스트레스를 부르는 그 이름 직장상사’들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한다. 건물의 지하에서 망치, 몽키스패너, 네일건 등을 잔뜩 챙겨서 마치 게임 속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듯 한 층 한 층 올라 기어코 자신의 보스를 죽이고 마는 <메이헴>의 이야기는 직장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모든 회사원이 통쾌해 할 만한 쾌감을 제공한다


 이러한 좋은 설정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역량 부족으로 인해 아쉬움이 남는 부분들 역시 존재한다. 데릭의 내레이션으로 바이러스에 대한 이야기 등을 전달하는 초반부는 조금 늘어지고, 86분의 러닝타임의 절반에 가까운 40분 정도를 그저 설정을 깔아 두는데 할애한다는 것은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몇몇 장면에서의 튀는 편집, 가령 데릭은 아직 어떤 정보를 접하지 못했을 타이밍인데 이미 상황을 다파악하고 있다던가 하는 장면들은 굉장히 거슬린다. 통쾌한 폭력의 향연이 이어지지만, 젠더적 스테레오 타입에서 벗어나지 못한 캐릭터들은 조금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부분을 농담으로 소비하는 장면이 있다는 점에서, 젠더적 스테레오 타입에 대한 고민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로 캐릭터를 만들어내고 농담을 집어넣었다는 점은 아쉽다. 물론 영화가 담는 미소지니가 이러한 장르영화에서 흔히 보이는 수준에 머물기는 한다. 전체적으로 조 린치 감독의 연출력 부족으로 인한 캐릭터의 깊이 부족, 인서트가 숏이 부족한 편집, 감각적인 영상과 음악에만 치중한 촬영과 편집 등은 <메이헴>의 설정과 이야기가 지닌 통쾌함을 반감시킨다.



 그럼에도 <메이헴>은 통쾌하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장르영화 작품 중 가장 관객 반응이 좋았던 작품을 꼽자면 <메이헴>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회사의 최상층에 도달하려는 데릭의 여정은 국적을 넘은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회사생활의 스트레스, 회사 속에서의 정치와 끝없이 쏟아지는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 모두를 뒤엎는 쾌감을 제공한다. <워킹데드>의 글렌이 스트레스의 시달리는 회사원이 된 것만 같은 모습의 스티븐 연은 이번 영화의 쾌감을 담아내는 좋은 그릇이 된다. 스티븐 연의 팬이라면 절대 놓쳐선 안 될 연기와 매력이 담겨있다. 그와 함께 팀을 이루는 멜라니를 연기한 사마라 위빙의 매력 또한 <메이헴>을 즐겁게 만들어준다.

*스포일러 포함


 70년대 말~90년대 초에 인기를 끌었던, 지금은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캐릭터들은 왜 자꾸 21세기의 스크린에 소환되는 것일까? <스타 트렉>의 레너드 니모이, <트론>의 제프 브리지스, <터미네이터>의 아놀드 슈워제네거. <익스펜더블>의 브루스 윌리스와 실버스타 스탤론을 비롯한 하드 보디 액션 배우들…… 그중 해리슨 포드는 그 흐름의 중심에 서있는 인물처럼 느껴진다. 그는 <레이더스>, <스타워즈>, <블레이드 러너>의 인디아나 존스, 한 솔로, 데커드 형사를 30~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연기하고 있다. 그는 과거의, 혹은 현재까지도 아이콘으로 존재하는 캐릭터들을 다시 스크린 위로 소환하고 있다. 나이 든 노년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그는 이제 아버지가 된 아이콘의 초상으로 그려진다. <인디아나 존스:크리스털 해골의 왕국>의 인디아나 존스는 자신의 모험을 아들인 머트에게 물려주려 하고(모두가 알고 있듯이 영화 자체가 실패해버려 인디아나 존스의 대물림은 성공하지 못했다),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의 한 솔로는 <스타워즈>라는 거대한 세계관의 이야기를 자식 세대에게 물려주며 캐릭터에 대한 결산을 선보인다. 그렇다면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어떠할까? 감정을 지닌 레플리컨트(인조인간), 인간의 감정은 무엇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그 구성 요소는 기억인가, 기억과 감정을 지닌 레플리컨트는 인간보다 더욱 인간적인 존재인 것일까, 여기서 상정되는 인간성의 기준은 무엇일까?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는 위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었으며, 데커드 형사는 레플리컨트와 인간이라는 정체성 사이에서 방황하며 영화의 여백을 온갖 질문으로 채우는 캐릭터였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이러한 정체성의 방황을 차단하고 시작한다. 영화가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극의 주인공인 블레이드 러너 K(라이언 고슬링)이 레플리컨트임이 밝혀진다. K는 전작의 레플리컨트와는 다르게 인간에게 복종하는 월레스(자레드 레토)의 기업이 만들어낸 신형 모델이다. 그는 구형 레플리컨트 중 한 명의 시신을 발견하고, 유골에 남은 흔적을 통해 그녀가 출산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163분의 기나긴 러닝타임 중 대부분의 시간은 이 흔적을 통해 레플리컨트가 출산한 아이는 어디에 있는지 추적하는데 할애된다. 꽤나 당연하게도 이 유골은 전작에서 타이렐(조 터켈)이 자신의 조카의 기억을 주입해 만들어낸 감정을 지닌 레플리컨트인 레이첼(숀 영)이며, 그녀가 출산한 아이는 데커드와의 관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이다. K는 이를 추적하던 중 자신에게 주입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기억을 떠올린다. 여정의 어느 순간 K는 자신에게 심어진 기억이 심어진 것이 아닌 실재했던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K는 자신이 레이첼과 데커드의 아들이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이렇게 전작이 질문을 던진 테마 중 기억에 집중하며 극을 전개한다. K는 목각인형을 소각로에 숨긴 기억이 주입된 것이라고 굳게 믿지만, 직접 소각로에 찾아가 그곳에 숨겨진 목각인형을 손으로 만지는 순간 그 기억의 자신의 것이라고 믿는다. 영화는 자신에게 실재했던 일로 기억하는 행위의 매개로 촉각을 이용한다. 레플리컨트에게 심어진 기억은 아나 스텔라인(카를라 주리)와 같은 사람에 의해 무균실에서 상상력을 동원에 만들어진 기억이다. 이러한 기억은 플래시백으로 제시되는 K의 기억처럼 그저 환영으로 존재한다. 이 환영을 촉각으로써 느끼는 순간 K는 기억이 실재한다고 믿는다.



 촉각을 통해 환영을 실제로 만들어내려는 욕망은 K의 홀로그램 A.I. 애인인 조이(아나 디 아르마스)를 통해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홀로그램이기에 K를 만질 수 없는 조이는 끝임 없이 K가 존재하는 세계와 자신을 동기화시키려고 한다. K가 조이를 휴대용 콘솔을 통해 집 밖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한 직후, 조이는 K를 따라 테라스로 나가 비를 맞는다. 물론 조이는 홀로그램이기에 비는 그녀의 몸을 뚫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손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촉감을 느끼려 한다. 그러기 위해 그녀는 자신을 구성하는 홀로그램의 영상을 육체를 지닌 존재 위에 빗방울이 떨어진 것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킨다. 빗방울은 조이의 손을 뚫고 지나가지만, 그녀는 자신의 손이라는 영상에 빗방울을 추가한다. 결국 조이와 K는 같은 욕망을 지니고 있다. 촉감을 통해 자신이 혹은 자신의 기억이 실재함을 증명하려 한다. K는 기억을 추적하는 여정을 통해 욕망을 내비쳤다면, 조이는 K의 세계에 끝임 없이 자신의 영상을 동기화시키며 욕망을 실현하려 한다. 영화 중반부에 등장하는 섹스신은 이러한 욕망을 가장 괴상한 방식으로 드러낸다. 조이는 길거리의 매춘부 레플리컨트인 마리에트(맥켄지 데이비스)를 데려와 그녀의 몸의 자신의 영상을 동기화한다. 마치 <그녀>의 사만다(스칼렛 요한슨)이 매춘부를 불러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와 육체적인 관계를 꾀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이야기가 나왔으니덧붙이자면, 세세한 설정에서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빅데이터에 연결된 A.I. 애인이라는 점에서 둘은 거의 유사하다. 때문에 성적으로, 여성이라는 틀 안으로 대상화되는 조이의 캐릭터는 인간을 상대할 필요성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게 된 초월적인차원으로 나아가는 사만다의 캐릭터에 비해 심각하게 퇴행적이다. 물론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주제가 그것은 아니었지만) 조이는 이러한 동기화를 통해 자신의 물성을 증명하려 시도하고, 이를 증명하는 것이 자신이 K와 같은 세계에 실재함을 증명하는 것이라 믿는다.



 조이와 K의 믿음은 산산이 박살 난다. 외부 콘솔과의 연결을 끊은 채 K의 휴대용 콘솔에만 남길 선택한 조이는 월레스의 수하인 레플리컨트 러브(실비아 획스)에 의해 파괴되고, K의 기억은 데커드의 딸 아나 스텔라인의 실재했던 기억이 복제되어 주입된 것이다. 동기화를 통한 실존에 대한 조이의 욕망은 짓밟혔고, K가 촉각을 통해 느꼈던 기억은 그에게 실재했던 것이 아니었다. 기어이 데커드를 발견하고 그와 주먹을 주고받으며 그의 존재를 자신의 기억 속 어느 부분으로 받아들이려던 K의 욕망은 헛수고가 되었다. 러브에 의해 조이가 파괴되고 데커드가 끌려간 시점에서 K는 레플리컨트 저항 운동의 지도자 프레이자(히암 압바스)에게 구조된다. 프레이자는 K에게 데커드가 어떠한 말도 월레스에게 발설할 수 없도록 그를 죽일 것을 요청한다. 다시 데커드를 찾아 길을 떠나던 K는 조이를 판매한다는 광고를 만난다. 누드 상태의 거대한 홀로그램인 조이는 길거리의 매춘부처럼 K를 불러 세운다. 광고의 조이는 당연히 K의 조이가 아니지만, K를 그녀를 통해 어떤 위안을 받고 결심을 지은 듯한 표정을 짓는다. K는 러브에 의해 이송되고 있던 데커드를 찾아내고, 러브를 죽인 뒤 데커드를 죽이지 않고 구출한다. 그리고 데커드와 함께 그의 딸인 아나 스텔라인이 있는 무균실을 찾아간다. K는 건물의 계단 앞에서 숨을 거두(는 것으로 추정되)고 데커드는 딸과 재회한다.



 여기서 <블레이드 러너 2049>에 대한 의문점이 생긴다. 촉각 하는 것을 통해 실재함과 기억에 접근하던 영화는 그것을 철저히 붕괴시킨 뒤, 딸에 대한 데커드의 부정(父情)을내세우며 K의 인간성을 드러낸다. 드니 빌뇌브는 이러한 K의 선택을 인간성이라 부르려 한다. 드니 빌뇌브는 <어라이벌> 속 플래시포워드의 활용처럼, 영화의 러닝타임 대부분을 할애하며 캐릭터가 쌓아온 논리를 붕괴시키면서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때문에 K의 캐릭터가 방황하는 것은 데커드의 방황과 차이가 느껴진다. 데커드가 <블레이드 러너>의 세계를 방황하며 남긴 여백들은 필립 K. 딕의 원작이 제시한 질문들로 채워졌다면, K가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방황하며 남긴 여백은 그저 비어 있다. 로저 디킨스의 놀라운 촬영과 한스 짐머의 공격적이면서 동시에 차분하기도 한 음악은 이러한 여백을 은폐한다. 결국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영화가 100여분의 러닝타임을 할애하며 그려낸 기억이라는 테마는 붕괴된 채, 전작에서도, 그리고 영화 안팎으로 절대 결론지어질 수 없는 인간성에 대한 질문만을 답습한다. <블레이드 러너 2049>의 결말에서 <그을린 사랑>부터 <어라이벌>까지 이어지는 드니 빌뇌브의 캐릭터에 대한 착취가 여실히 드러난다. 이러한 착취 끝에 얻은 결론이 딸에 대한 데커드의 부정이라는 점에서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블레이드 러너>에 비해 진보는커녕 퇴보한 결과물이다. 이는 어쩌면 과거의 아이콘을 현재의 스크린으로 다시 소환해 이야기를 이어가는 수많은 시퀄들의 운명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과거의 아이콘인 남자들은 나이 들어 아버지가 될 수밖에 없고(아버지에 머무는 상상력은 또 얼마나 진부한지), 이러한 아버지들은 자식 세대를 위해 퇴장하거나 부성을 강조하며 생명력을 이어가는 것 이상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그렇기에 <블레이드 러너 2049>(와 세계관을 이어가는 연출가/작가의 상상력)는 태생부터 전작에 비해 진보할 수없다. 그렇기에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드니 빌뇌브 특유의 착취적인 캐릭터 활용 방식과 과거의 아이콘을 끌어 쓰는 시퀄의 한계점이 맞물려 탄생한 괴작이다.

킹스맨이 돌아왔다. 돌아오지 말지 그랬어…… <킹스맨: 골든 서클>은 박수 칠 때 떠나지 못해 탄생한 실패작이다. 해리(콜린 퍼스)가 죽고, 에그시(테런 에저튼)이 발렌타인(사무엘 L. 잭슨)으로부터 세상을 구한 뒤 1년이 지난 시점에서 영화는 시작한다. 표면적으로는 킹스맨 양복점에서 일하는 에그시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킹스맨 시험에서 탈락한 찰리(에드워드 홀크로프트)의 공격을 받는다. 찰리의 공겨과 함께 킹스맨의 본부와 요원들의 거처가 미사일 공습을 당하고, 새로운 아서(마이클 갬본)와 록시(소피 쿡슨)을비롯한 킹스맨 멤버 전원이 사망한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멀린(마크 스트롱)과 에그시는 ‘최후의 날’ 프로토콜을 통해 미국의 사설 정보기관인 스테이트맨의 존재를 알게 된다. 켄터키로 넘어간 그들은 테킬라(채닝 테이텀), 진저에일(할 베리), 샴페인(제프 브리지스), 위스키(페드로 파스칼) 등의 코드네임을 가진 요원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포피(줄리언 무어)가 이끄는 거대 마약조직인 골든 서클이 사건의 배후에 있음을 알게 된다. 또한 스테이트맨의 도움을 받아 생존했지만 기억을 잃었던 해리는 에그시의 도움으로 기억을 회복한다. 에그시와 해리, 멀린은 포피의 골든 서클에 맞선 전투를 준비한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전작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가 쌓은 세계관의 논리는 붕괴된다. 전작은 전세계를 겨냥한 할리우드 상업영화가 지켜야 할 윤리와 그것을 넘었을 때의 카타르시스의 경계를 넘나들며 재미를 주었던 작품이다. 그러나 이번 속편은 전작에서 가장 강력하게 비판받았던 마지막 장면(성 안에 갇힌 공주를 구하는 서사에 공주를 성적 대상화하는 대사와 몰래카메라를 연상시키는 앵글을 넣은 것)을 영화의 테마로 삼으려는 것 같다. 관객들이 전작에서 열광했던 부분(가령 신체의 결손을 인상 깊은 무기로 보강한 가젤의 캐릭터나 깔끔하고 화려한 액션, 계층을 넘으며 드러나는 온갖 서브컬처를 동원한 유머 등)은 퇴보하고, 불쾌함을 유발하는 장면들만이 강화되었다. 가령 이미 SNS상에서 큰 논란이 되고 있는 장면-타깃 여성의 성기에 추적장치를 심는 장면의 설정과 묘사-은 끔찍하기 그지없다. CG를 동원해가며 여성의 몸을 훑고 성기 내부에 들어간 추적장치를 굳이 카메라가 따라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해당 장면 직전에 나오는 에그시와 틸디 공주(한나 알스트룀, 전편 마지막 장면에 나온 그 공주가 조신한 영국 가정주부가 되어버렸다)의 통화 장면은 ‘대의를 위해서 참아주는/희생하는 여성상이길 간절히 강구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전편의 주요 등장인물 중 하나였던 록시를 퇴장시키는 장면의 태도에서 시작해 메튜 본 감독의 머릿속에서만 주체적인 여성상들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영화 속 여성 캐릭터 묘사는 마이클 베이의 대상화된 여성들보다 끔찍하게 다루어진다. 동시에 인종차별적 코드 역시 영화 속에 만연하다. 포피가 동남아의 정글에서 숨어 지낸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음에도 아시아계 인간은 영화 속에서 단 한차례도 등장하지 않으며, 사진으로만 잠시 등장하는 포피의 수하 왕팅펑은 WTF(What The Fuck)을 동양인 이름으로 장난질한 작명이다. 그리고 그 역시 사진으로만 잠시 등장할 뿐 영화 속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메튜 본과 각본가의 머리속에선 여성은 대상화되고 아시아인은 실존하지 않는 놀림거리일 뿐이다.



 영화 속 세계관의 논리가 붕괴되는 지점들은 <킹스맨: 골든 서클>을 모든 의미에서 재미없고 비참한 장면으로 만든다. 가이아 이론까지 끌어오며 인종청소를 이야기하던 발렌타인에 비해 자본주의와 인정 욕구에 목매는 포피의 동기는 퇴행적이고 지루하며, 영국 신사의 일상적인 아이템들을 007스러운 무기들로 탈바꿈시킨 재기발랄함은 일상적으로 휴대하지 않는 아이템(야구 방방이나 야구공 등) 들을 미국적이라는 이유로 욱여넣는 (심지어 기능적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도 못한다) 설정들은 관객이 열광했던 포인트를 정확하게 짚어낸 뒤 배반한다. 에그시를 연기한 테런 에저튼의 어색한 양복 입은 모습은 워킹클래스의 불량청소년이 하이클래스의 신사로 거듭나는 전작에는 어울렸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첫 등장부터 풍겨오는 어색함이 영화와 전혀 어울리지 못한다. 미국 캔터키와 동남아의 정글에서도 바뀌지 않는 의상은 억지로 킹스맨의 정체성을 밀어붙이려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영화의 액션마저 퇴보했다. 교회에서의 롱테이크 난장 액션에 쾌감을 느꼈던 관객이라면 이번 영화의 액션에서 크나큰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등장하는 킹스맨 택시에서의 에그시와 찰리의 액션은 호들갑스러우면서도 지루하다. CG를 동원한 카메라 워킹은 불필요하게 과시적이고, 음악의 활용은 뻔하다 못해 지루하며(영화 전체의 음악 사용이 그렇다), 액션의 리듬감 자체가 파괴되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오프닝 시퀀스만의 문제가 아닌 영화 속 모든 액션이 공유하고 있는 문제점이다.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엘 마리아치> 등 레퍼런스가 확실한 액션 시퀀스들은 건조하게 다운그레이드 된 동작들을 반복한다. 특히 교회 난장 액션의 재미를 재현하려고 한 마지막 액션 시퀀스는 불필요하게 과시적이며 지루하다.



 결국 <킹스맨: 골든 서클>은 나오지 말았어야 할 속편을 억지로 쥐어짜 만들어낸 티가 역력한 작품이다. 이야기는 갈피를 잡지 못해 러닝타임만 길어지게 만들고, 새로운 배우의 발견 대신 기성배우들을 긁어 모아 껍데기만 키운 돈지랄은 아무런 장점으로 남지 못한다(엘튼 존으로 출연한 엘튼 존만이 그나마 돈 값을 한다). 여성혐오와 인종차별을 꾹꾹 눌러 담은 유머들은 당연하게도 전혀 기능하지 못할뿐더러 불편함만 유발하며 영화 관람의 기억을 짜증 나는 기억으로 만들어버린다. 전편의 성공 요소를 완벽하게 퇴보시키고, 전편의 불안 요소를 철저하게 강화시킨 <킹스맨: 골든 서클>은 불필요한 속편의 모든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야말로 무가치한, 철저히 무가치한 속편이다. 전편의 주요 장면들을 멍청하게 재현하는 몇몇 장면들은 덤이다.

아프리카 등의 사냥터에서 사냥한 동물들을 박제한 것. 트로피는 북미의 사냥꾼들에게 이런 의미로 인식된다. 그들은 사자, 기린 등의 동물들을 빅5라 부르며 가장 중요한 트로피로 여긴다. 라스베이거스에서는 매년 세계 최대의 사냥-사파리 박람회가 열린다. 이곳에선 북미의 최상위 소득자, 가령 치과의사나 변호사, 석유회사 중역 등의 사람들이 원활한 사냥 및 트로피 수집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업체들이 각자의 부스를 차리고 홍보한다. 그들은 사자, 기린 등의 동물들의 사냥을 돕는데 값을 매기고 상품화하여 부유층 사냥꾼들에게 판매한다. 희귀한 동물일수록 값은 올라가고 코뿔소가 빅5 중 가장 비싼 가격을 받는다. 사냥꾼과 이러한 사냥을 주선하는 사람들은 합법적인 사냥이 무분별한 밀렵과는 다르게 오히려 생물종의 개체수를 늘린다고 주장한다. 다름이 아니라 그들은 사냥감이 될 사자 등의 야생동물들을 직접 사육하기도 한다. 그들의 논리는 간단하다. ‘돈이 되는 동물은 멸종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냥꾼들과 대비되는 인물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코뿔소를 기르는 존 흄이다. 그는 2년마다 코뿔소의 뿔을 자름으로써 그들이 밀렵당하는 것을 방지한다. 이를 관리하는데 개인이 감당하기 힘든 막대한 비용이 수반되지만, 실제로 코뿔소의 개체수는 매년 증가하고 있다. 하나 그의 논리 역시 전세계의 코뿔소를 같은 방식으로 관리하거나, 결국 코뿔소의 뿔을 팔아야 유지할 수 있는 자본논리 속의 사업이라는 점에서 비판받는다. 사울 슈워츠와 크리스티나 클루지아우의 다큐멘터리 <트로피>는 거대한 산업이 되어버린 사냥이 자본 논리와 어떻게 얽혀있는지를 파헤친다.



 영화는 한 사냥꾼이 열 살도 채 되지 않아 보이는 아들을 데려가 사슴을 사냥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린아이의 손에 라이플을 쥐어주고 사슴을 쏜 뒤, 죽은 사슴의 머리통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게 하는 장면은 사뭇 충격적이다. 이어지는 장면은 존 흄의 직원들이 코뿔소의 뿔을 자르는 수술을 하는 장면이다. 그들은 고통 없이 수술이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전기톱으로 뿔을 베어 버리는 모습은 굉장히 섬뜩하다. 카메라는 남아공의 악어농장으로 향한다. 그곳을 관리하는 주인은 악어들이 돈이 되기에 멸종되지 않을 것이라 이야기한다. <트로피>가 그려내는 야생동물의 사육과 사냥 등이 작동원리는 꽤나 명확하다. 성경에 기반한 인간이 모든 동물을 통제한다는 믿음 하에, (백인) 인간의 쾌락과 자본논리라는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야생동물의 사육과 사냥이 진행된다. 그들은 사냥을 위해 동물들이 사육되고 결과적으로 개체수가 늘거나 멸종되지 않게 된다는 궤변을 늘어놓지만, 그들의 궤변 속에는 생태계 전반의 유지라던가 당장의 생계가 문제가 되는 아프리카 현지의 주민들에 대한 고려는 빠져있다. 그들의 입장은 완벽하게 성경적이고 백인 중심적이며 자본 중심적이다.



 <트로피>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당연하게도 어떤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그저 상황을 직시하고 기록하여 관객에게 보여준다. 107분의 길지 않은 러닝타임 동안 영화는 수많은 문제의식을 쏟아낸다. 사냥꾼과 아들의 모습에서부터 끝없이 이어지는 사냥 장면들에서 드러나는 생명을 스포츠로 다룬다는 것에 대한 윤리의 문제, 결과론적으로 야생동물의 개체수가 보전된다는 이유만으로 사냥을 위한 혹은 가죽 등을 위한 사육이 지속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문제, 이러한 사육과 밀렵 금지가 현지에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주민들에게 미치는 영향, 아프리카 현지에서 멀찍이 떨어져 채식만으로 생존할 수 있는 상황의 사람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현지의 관점에서 과연 타당하다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 사실 <트로피>에서 이러한 문제의식들 말끔히 정리하여 제시하진 못한다. 어떠한 입장을 선으로, 다른 입장을 악으로 지정한 채 영화를 전개시키지도 않는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트로피>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을 악으로 여길 수 없을 것이다(물론 그중에도 끔찍한 인간들은 존재한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속에 메스꺼웠다. 단순히 영화 내내 전시되는 사냥 장면들 때문만이 아니다. 어느 입장에서 있는 사람이든, 인간이 야생을 통제할 수 있다고,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믿음이 드러나기에, 그러한 생각들 때문에 메스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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