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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설노동자였던 리키(크리스 히친)는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여파로 일자리를 잃은 뒤 직장을 찾아 이곳저곳 돌아다니고 있다. 그러던 중 친구의 소개로 PDF라는 배송업체의 배달부로 취직하게 된다. 리키의 아내 애비(데비 허니우드)는 방문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으며, 아들 세브(리스 스톤)는 사춘기를 겪고 있는 청소년이고, 딸인 라이자 제인(케이티 프록터)은 바쁜 부모님의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이후 3년 만에 제작된 켄 로치의 신작 <미안해요, 리키> 또한 그가 계속해서 다뤄오던 노동과 인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번 작품에서 그가 집중해서 다루는 것은 더욱 세분화된 하청구조를 지닌 배달 노동과 그와 유사한 고용형태를 지닌 방문 요양보호사, 그리고 그러한 고용구조를 통해 붕괴되는 가정이다.

 

 영화는 리키가 PDF의 지부장과 면접을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암전 된 화면에서 들려오는 대사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고생하던 리키의 앞에 마치 구원자의 음성이 나타난 것처럼 느껴진다. PDF의 지부장은 리키가 회사에 고용되는 것이 아닌 자영업의 형태로 함께 일하는 파트너가 되는 것이며, 그렇기에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한다. 이러한 고용형태는 우버나 배달의 민족과 같은 서비스들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회사가 직접 고용하는 것이 아닌, 각 개인이 직접 사업자가 되어 근로계약이 아닌 다른 형태의 계약을 맺게 되는 고용. 리키는 애비의 차를 팔아 배달용 밴을 사고, PDF를 소개해준 친구의 조언을 받아가며 일을 시작한다. 회사가 그에게 지급하는 것은 PDF 유니폼과 분실 및 파손 시 위약금을 내야 하는 단말기, 그리고 배송해야 할 화물들뿐이다. 영화는 리키가 노동하는 과정들을 관찰하듯 보여준다. 주 6일 14시간 가까이 일하는 그는 회사와 근로계약이 된 것이 아니기에 유급휴가를 받지 못한다. 사고로 인해 화물을 분실하거나 파손한 경우를 대비해 들어 두는 보험금이나 차량 보험금도 그가 직접 부담한다. 다치거나 이런저런 가정사 등 때문에 일을 쉬어야 하는 경우 대체기사를 구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경우 100파운드와 벌점이라는 페널티가 부여된다. 자영업자 내지는 프리랜서로 존재하는 그는 회사에 소속된 상태가 아님에도 지부장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리키의 동선은 회사가 지급한 단말기에 모두 기록되며, 회사, 지부장, 고객에 의해 감시된다. 그럼에도 리키는 PDF의 고용인이 아니다.

 

 애비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애비는 요양보호사이지만, 특정 기관이나 시설에 소속되어 상주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렇다고 기관이나 시설에서 각 가정으로 파견하는 형태의 일을 하지도 않는다. 애비 역시 리키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서비스를 제공한 고객의 숫자만큼 돈을 번다. 그의 회사는 중개인이지, 요양보호사들을 관리하는 시설이 아니다. 때문에 애비 또한 리키처럼 하루의 대부분을 노동으로 보낸다. 리키의 밴을 구입하기 위해 차를 판 이후 버스를 갈아타고 다니며 일하는 애비는 오전 7시 반에 출근하여 오후 9시 반에야 집에 돌아온다. 아침에만 5명의 노인 또는 장애인에게 아침식사를 해주고 돌봄 노동을 수행해야 하는 그의 노동강도는 극악에 가깝다. 게다가 돌봄 이외에 작성해야 하는 서류라던가, 이동하는 시간 내내 핸드폰을 붙잡고 세브와 라이자 제인의 일과를 도와주며, 고객과 문제사항이 발생했을 때 회사에 전화하여 그것을 조율하는 것 또한 그의 업무이다. 하지만 그의 이동시간은 업무시간에 포함되지 않는다. 애비는 서비스를 제공한 ‘건수’에 따라 돈을 받는 것이지, 시급이나 월급의 개념으로 돈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리키>는 배달 노동부터 요양보호사의 돌봄 노동까지, 각종 어플을 통해 중계되고 제공되는 플랫폼 노동의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최근 인수를 통해 ‘스타트업 성공신화’를 써 내려가는 모 업체라던가, 오랜 시간 살인적인 노동강도와 그에 비에 턱없이 낮은 임금에 문제제기를 하며 투쟁해온 택배 노조 등을 생각하면 영화의 이야기가 머나먼 영국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플랫폼 노동은 노동의 판도를 바꾸었다. 사람들이 경제활동인구로 손쉽게 진입할 수 있는 창구가 되었으며, 몇 가지 조항만 지키면 일을 할 수 있고, 성실히 일한다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심어준다. 동시에 이는 노동의 분업화를 넘어선 세분화를 가능케 한다. 이른바 ‘하청의 하청’이라 불리는 구조의 맨 아래에, 이제는 소규모 기업이 아닌 자영업자 혹은 프리랜서라는 이름의 개인들이 놓이게 된다. 회사의 유리잔에서 넘쳐흘러 밑으로 내려오는 것은 돈뿐만이 아니다. 이들이 개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파트너십보단 리스크를 떠안을 것이다. 세분화, 파편화된 노동은 서비스를 제공받는 순간에만 노동자들을 만나게 되는 고객들로 하여금 노동현장을 상상할 수 없게 한다. 고객의 스마트폰과 회사의 단말기, 두 기기의 소유자 외의 그것을 중계하는 노동자들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영화 중후반부에 등장하는 리키와 세브 사이의 트러블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다. 세브가 학교에서 정학당하자 리키는 세브의 스마트폰을 압수하고, 세브는 집을 뛰쳐나간다. 그날 밤, 애비는 리키에게 스마트폰은 곧 세상이라는 말을 건넨다. 정말로 그렇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우리는 친구와 약속을 잡을 수도 없고, 대화도 할 수 없다. 스마트폰이 없다면 공부도 할 수 없고, 세브처럼 그래피티를 준비할 수도 없다. 심지어 리키는 앱을 통해 주문된 화물들을 배송하며, 리키의 노동은 스마트폰 단말기에 기록된다. 노동이 비가시적인 형태로 변화하는 동시에, 당장 눈 앞에 놓여 있는 것들을 볼 시간은 사라진다. 리키와 애비를 대면하는 일이 적어진 세브는 학교에 부적응하고, 라이자 제인은 리키와 세브 사이의 갈등 속에서 불안해한다. 어쩌면 세브는 리키와 애비가 왜 장시간 노동을 하면서도 제대로 돈을 벌지 못하는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리키와 애비가 믿어오던 노동의 전제들이 해체되고 있음을 세브는 체화했을 것이다. 세브의 반항은 단순히 사춘기의 문제로 치부할 것이 아니다. 아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리키와 애비의 대사처럼, 절대적인 양의 시간을 들이지 않고서 세대 간의 간극과 전혀 다른 전제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시간을 들인다 해도 좁혀지지 않는 격차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 세브는 그 격차를 드러낼 수 있는 행동력이 있는 반면, 라이자 제인은 이를 갖추지 못한 상황이기에 그저 불안해할 수밖에 없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관료제와 문서주의, 탁상공론의 제도 사이에서 탈락하는 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반면 <미안해요, 리키>가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 이들은 현장에서 뛰고 있는 노동자들이다. 배달하러 갔다가 프리미어 리그 이야기로 시비가 붙기도 하고, 서로 가족사진을 보여주면서 고객과 정을 쌓기도 하는 노동자들. 켄 로치는 이번 영화를 통해 노동현장에서 점점 더 인간성을 갖출 수 없게 되는 노동자들을 이야기한다.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에서 드러난 개인으로 흩어지는 노동자들의 군집은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처럼 허울 좋은 이름의 개인들로 해체된다. 물론 <미안해요, 리키>가 플랫폼 노동이나 IoT 서비스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와 비판을 보여준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아무래도 켄 로치의 영역은 아니다. 대신 켄 로치는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자신이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이들을 담으려 한다. 그 지점에서 <미안해요, 리키>의 목적은 달성됐다. 

 조(에드 옥슨볼드)는 아빠 제리(제이크 질렌할)와 엄마 재닛(캐리 멀리건)을 따라 몬타나 주로 이사 온다. 골프를 하는 제리는 이런저런 직장에 적응하지 못하고 계속 직장을 옮겨가고 있으며, 그의 직장을 따라온 가족이 여러 차례 이사를 했다. 그렇게 몬타나까지 왔지만 제리는 직장에서 해고되고, 재닛이 파트타임 수영강사로 일을 시작하게 된다. 자신감을 잃은 제리는 몬타나 북부에서 몇 개월간 지속되던 산불진화팀에 지원하고 훌쩍 떠나버린다. 그러자 조는 사진관에 취직해 일하고, 재닛은 동네 사람들을 만나며 일자리를 알아본다. 폴 다노의 연출 데뷔작이자, 폴 다노와 조 카잔 커플이 함께 각본을 쓴 <와일드 라이프>는 큰 산불이 났던 1960년의 몬타나를 배경으로 한 가족 멜로드라마이다. 조의 시점으로 제리의 도망(?)과 재닛의 일탈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얼핏 노아 바움백의 <결혼 이야기>를 아들의 14살짜리 아들의 시점으로 다시 그리는 것만 같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조의 시점이다. 영화 내내 조의 시점을 따라가며, 조가 없는 공간에 카메라가 가는 일이 드문 작품이지만, 영화 후반부에 가서야 조는 자신의 심정을 드러낸다. 그전까지 조의 시점은 마치 전지적 시점을 취하고 있는 것 마냥 제리와 재닛을 관찰한다. 때문에 이것은 제리와 재닛의 행동에 대한, 다소 불공평한 판정을 유도하게 된다. 조는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제리를 조금씩 그리워한다. 반면 재닛의 일탈, 하지만 자기 멋대로 사라져 버린 제리에 비하면 심리적으로 납득할만한 행동들은 조의 시점에서 추악한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와일드 라이프>는 제리와 재닛 중 누가 더 조에게 잘못을 저질렀는지, 두 사람의 분열에 누가 책임이 있는지를 판가름하려는 작품은 아니다. 조의 시선이 향하는 목적도 그것이 아니다. 조의 시점은 갈라설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의 분열 사이에 자녀가 놓여 있음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그러면서 조는 일정 부분 성장하고, 또한 일정 부분 내려놓는다. 조의 시점에서 두 부모는 철들지 않았다. 도리어 그것을 자양분 삼아 조는 성장한다. 그러한 가족의 모순을 이 영화는 담아낸다.


 폴 다노는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장편영화를 연출했다. 그것을 감안하면 꽤나 안정적인 실력을 선보이고 있다. 폴 다노와 함께 연기한 적이 있는 제이크 질렌할과 캐리 멀리건은 언제나처럼 좋은 연기를 선보이고, 어딘가 폴 다노를 닮은 에드 옥슨볼드 또한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다소 불공정한 (관객의) 판정을 유도하는 시점은 이 영화의 단점에 가깝다. 또한 배우 출신의 감독들의 초기작이 으레 그러하듯, <와일드 라이프> 또한 폴 다노가 출연해온 거장들의 영화 속 장면들을 폴 다노의 취향 것 잘라 붙인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봉준호, 파올로 소렌티노, 켈리 레이카트, 폴 토마스 앤더슨, 스파이크 존즈 등과 작업해온 그 답게, 앞서 언급한 감독들의 장면이 생각나는 장면들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좋게 말하자면 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받는 것이겠지만, 반대로 말하면 감독으로서의 개성이 부족하다고 볼 수도 있다. 영향받은 이들의 장면을 가져오는 것은 영화사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들이다. 하지만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선 가져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와일드 라이프>는 그러한 한계가 드러나는, 지극히 무난한 데뷔작이었다.

 유기묘 빅토리아(프란체스카 헤이워드)는 길거리에서 ‘젤리클 고양이’들을 만난다. 이들은 올드 듀터로노미(주디 덴치)의 선택을 받아 고양이 천국으로 가는 것이 목적이다. 럼 텀 터거(제이슨 데를로), 거스(이안 맥켈런), 버스토퍼 존스(제임스 코든), 제니애니닷(레벨 윌슨), 그리자벨라(제니퍼 허드슨) 등이 듀터로노미의 선택을 놓고 경쟁하고 있다. 한편 사악한 고양이인 맥캐버티(이드리스 엘바)는 봄발루리나(테일러 스위프트)와 함께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고양이 천국에 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레미제라블>, <킹스 스피치>, <대니쉬 걸> 등을 연출해온 톰 후퍼가 연출한 <캣츠>는 동명의 뮤지컬을 영화로 각색한 작품이다. 원작 뮤지컬을 기획 및 제작한 로이스 앤드류 웨버가 이번 작품에도 참여했으며, 스티븐 스필버그의 앰블린과 영국의 워킹타이틀이 제작으로 참여했다.

 

 북미에서의 프리미어 상영 이후 쏟아진 혹평은 대부분 엉망진창인데다가 언캐니 밸리를 자극하는 VFX 효과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사람 얼굴을 한 바퀴벌레나 소년의 얼굴을 한 쥐, CG 작업이 덜 된 것 같은 고양이의 모습들은 사실 <캣츠>의 가장 큰 단점은 아니다. 물론 프레임 구석에 있는 단역 고양이들의 발에 달려 있는 미쳐 지워지지 않은 신발끈이라던가, 공간에 따라 제멋대로 변하는 고양이들의 크기, 인간의 손과 발을 달고 있는 고양이 등은 분명 <캣츠>의 기술적 실패를 보여준다. 원작 뮤지컬을 관람하지 않은 입장에서 비교할 수는 없지만, 기차 고양이 스킴블샹스의 노래 외의 영화의 음악들이 크게 좋거나 흥미롭지도 않았다. 영화의 테마와도 같은 ‘Memory’는 영화의 각종 홍보로 인해 너무 많이 소비되어 정작 영화 내에선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런저런 기술적 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영화에 서사가 없다는 것이다. 고양이들이 듀터로노미의 선택을 받기 위해 춤과 노래를 제각각 선보이고, 맥캐버티가 이들을 방해한다는 설정만 있을 뿐이다. 영화는 105분 동안 여러 고양이들이 등장해 자기소개의 내용을 담은 노래를 부르는 것 외에 이야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없다. 이것은 원작 뮤지컬도 비판받는 지점이지만, 무대를 통해 그것을 보는 것과 극장에서 그것을 보는 것은 산만함의 정도가 다르다. 원작에 비해 중요하게 등장하는 고양이들의 숫자를 줄였음에도 여전히 산만하기만 하며, 영화를 이끄는 중심서사가 없다보니 다양한 노래와 (비록 실패했지만) VFX 효과들에도 지루하기만 할 뿐이다. 유기묘부터 마술사 고양이, 부자 고양이, 극장 고양이, 악당 고양이, 도둑 고양이, 반항아 고양이 등 개성을 지닌 캐릭터들이 차례로 등장함에도 별다른 개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고양이 별로 다양한 장르의 곡이 배정되긴 했으나, 전체적인 톤이 유사하게 유지된다는 점에서 음악이 고양이들의 개성을 살리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각 고양이들의 이야기를 제각각 풀어내기엔 105분의 러닝타임은 불충분하다. 과감하게 각색을 하지 못한 채 원작의 설정을 고스란히 따라간 각본이야말로 <캣츠>의 가장 큰 실패 요인이다.

 백두산이 폭발한다. 그 여파로 7.8의 지진이 발생해 북한은 물론 서울까지 초토화된다. 영화 <백두산>은 한반도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자연재해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것도 남한, 북한, 미국이 핵 무장해제에 대해 극적인 타협을 이룬 상황에서, 백두산의 추가 폭발을 막기 위해 핵폭탄이 필요한 상황을 설정하고 있다. 전역을 앞둔 군인이자 폭발물 제거 부대의 지휘관인 인창(하정우)은 청와대 민정수석인 유경(전혜진)을 통해 섭외된 화산 전문가 봉래(마동석)가 세운 백두산 추가폭발을 막을 계획의 지휘를 얼떨결에 맡게 된다. 만삭의 아내인 지영(배수지)을 서울에 두고 북한으로 향하는 작전을 실행하는 그는 북한이 숨겨둔 핵탄두의 위치를 알고 있는 국정원의 북측 정보원 리준평(이병헌)을 찾고, 그와 협력해서 백두산까지 핵탄두를 옮긴 뒤 터트려야 한다. 핵 무장해제 국면에서 미군이 이에 개입하고, 핵탄두를 노리는 중국 측의 움직임 또한 더해진다.

 

 이러한 설정 때문에 <백두산>은 재난영화라기 보단 하정우의 전작인 <PMC: 더 벙커>와 조금 더 유사하다. 핵을 중심으로 한 남한과 북한, 그리고 주변국들의 반응을 다루는 지점은 <강철비>를, 지진 등의 재난은 <판도라>나 <해운대> 같은 국산 재난영화들을 연상시킨다. 김용화 감독이 이끄는 스튜디오 덱스터가 제작한 만큼, 백두산 폭발 등의 비주얼은 <신과 함께> 시리즈 속 지옥의 풍경을 연상시킨다. 무엇 하나로 정의되기 어려운 <백두산>은 스스로의 혼란스러운 장르적 정체성 속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성취하지 못한다. 화산 폭발의 여파로 발생한 지진으로 초토화되는 서울 강남의 풍경은 롤랜드 에머리히가 <2012>에서 LA를 박살 내는 장면의 열화 버전에 불과하며, 팔당댐이 무너져 한강에 쏟아지는 거대한 담수 해일은 <해운대>의 쓰나미 장면만 못하다. 북한에서 핵탄두를 두고 벌어지는 인창의 부대와 북한 군인 또는 미군과의 총격전은 영화의 공동감독 중 한 명인 김병서가 촬영감독으로 참여했던 <PMC: 더 벙커>의 총격전만큼의 만족감도 주지 못한다. 철 지난 인터넷 유머 같은 대사들을 주고받는 인창과 리준평의 브로맨스는 수없이 이어져온 남-북 브로맨스의 연장선상이자, <강철비> 같은 영화들에 비해 어설프기만 하다. 다양한 장르와 상황이 뒤섞이다 보니 백두산 추가폭발이라는 시간제한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긴장감이 생기지도 않으며, 아무런 긴장감을 갖지 못한 인물들은 나열된 사건들 속에서 제대로 기능하지도 못하는 코미디와 신파 코드들만 쫓아가고 있다.

 

 사실 앞서 언급한 문제들은 수많은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에서 발견되는 문제들이다. 성공한 과거의 작품이나 유명한 (그리고 낡은) 할리우드 영화의 요소들을 뽑아다가 천만 관객을 노릴 멀티캐스팅과 함께 제시하는 것은 <해운대>나 <도득들> 등의 성공과 함께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전형으로 자리 잡았다. 때문에 <백두산>에 기대한 것은 딱 한 가지였다. 백두산 폭발이라는 재난상황을 얼마나 잘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백두산>은 최소한의 기대치마저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단순히 재난상황을 보여주는 기술력의 부족과 열악하고 천박한 각본 때문만이 아니다. 260억의 제작비가 투입된 영화라고 생각되지 않는 자잘한 기술적 문제들이 영화 전체에 뿌려져 있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이다. 영화 초반부의 여러 대사들은 당연하게도 후시녹음을 통해 영화에 담겼는데, 각 대사들과 배우들의 입모양조차 제대로 맞지 않는 장면들이 여럿 보인다. 몇몇 장면은 더빙된 외화를 보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거대 예산이 투입된 이 작품은 이러한 기본적인 문제들도 해결하지 않았다. 사실 가장 큰 문제는 편집이다. <백두산>에 제대로 숏들이 붙는 장면들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공간이나 시간의 연속성이 지켜지지 않는 것은 물론, 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인물을 상황에 몰아넣은 뒤 위기를 보여주기는커녕 그 이후로 점프해버리는 몇몇 장면들에선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이다. 이는 재난상황의 긴박함이나 긴장감을 주는 대신 편집을 통해 재난을 삭제해버리는 수준에 가깝다. 재난영화를 표방하지만, <백두산>의 진정한 재난은 연말 시즌을 노리고 엉성하게 대충 마무리만 지은 영화 자체이다. 

 <잠수종과 나비> 등으로 관객들에게 알려진 줄리안 슈나벨의 신작 <고흐, 영원의 문에서>는 제목 그대로 고흐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 영화는 고흐의 생애 중 정신이상과 흐려진 시각 때문에 고초를 겪던 말년을 담고 있다. 시간적으로는 고흐(윌렘 대포)가 우연히 만난 친구 폴 고갱(오스카 아이작)의 조언에 따라 프랑스 남부의 작은 시골 마을인 아를로 떠날 때부터, 정신이상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생 레미에서 보내던 마지막 나날까지의 시점이 영화에 담겼다. 영화의 줄거리는 크게 설명할 것이 없다. 반 고흐의 생애에 대한 책이나 글을 읽어봤거나, 학교에서 서양현대미술사와 관련된 수업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고흐의 불행한 말년이 그대로 스크린에 펼쳐진다. 아트딜러인 빈센트 반 고흐의 동생 테오 반 고흐(루퍼트 프렌드)가 고흐의 생활과 작품활동을 지원하지만 그의 생전에 그의 그림은 팔리지 않았다. 고갱 등의 동료들 대부분도 고흐의 강렬하고 붓자국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화풍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정신이상을 보이며 과음을 일삼는 반 고흐를 광인 취급하고, 아이들은 그에게 돌을 던지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반 고흐는 점점 더 자신만에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줄리안 슈나벨은 이 과정을 핸드헬드 카메라로 담아낸다. 세잔, 드가, 모네 등 기존 인상주의 화가들과는 다른 자신의 화풍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화가들과 평단, 신체적 이상과 폭음, 경제적 어려움 등의 악조건 속에서 찾아온 혼란, 그러한 와중에 아를에서 발견한 생생한 자연의 빛과 그것을 캔버스에 담고자 한 작가적 고집 모두가 끊임없이 흔들리는 카메라에 담긴다. 영화의 후반부, 반 고흐는 정신병원에서 만난 신부(매즈 미켈슨)과 대화를 나누며 당시엔 추하고 불쾌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자신의 그림과 그것을 그리는 자신을 예수에 빗대 설명한다. 화가가 되기 이전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신학공부를 했었던 만큼, 그의 그림을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줄리안 슈나벨은 반 고흐의 말년에서 예수의 고행과 유사한 과정을 발견하고 그것을 담아낸다. 반 고흐는 “예수가 죽었을 때는 아무도 그를 몰랐지만, 30~40년 정도 후엔 모두가 그를 알았다”고 이야기한다. 반 고흐는 1890년 사망한 이후에야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고,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된다. 20세기가 시작되고 야수파나 표현주의 등의 화풍에 영향을 주게 된 그의 그림은 현대 회화의 어떤 분기점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영화는 반 고흐가 죽은 뒤 그의 장례식에서야 그의 작품들을 알아보고 작품들을 사가는 사람들을 보여주면서 마무리된다. ‘영원의 문에서’라는 영화의 제목은 이 장면에 와서야 실현된다. 고흐는 왜곡된 색과 상을 보는 자신의 시야에 담긴 자연과 주변사람들을 그리려 했다. 인상주의자들이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빛과 색을 고스란히 포착해왔다면, 반 고흐는 자신의 주관적인 시각과 기억을 작품에 더한다. 영화 속에서 고갱이 “캔버스에 진흙을 바른 것 같다”고 비판하는 반 고흐의 화풍은 그가 자신의 눈으로 본 세상의 촉감까지 담아내며, 그것은 작품을 통해 어떤 영원의 것으로 남게 된다. 영화 속에서 반 고흐는 “내가 본 것을 남들도 보게 하고 싶다”는 말을 수차례 반복하며 자신의 동기를 설명한다. <고흐, 영원의 문에서>는 그러한 그림을 그리려 했던 그의 말년을 강렬하게 담아내고 있다. 다만 끊임없는 핸드헬드 촬영의 산만함, 잠깐 등장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흑백 화면으로의 전환, 고흐의 말년을 충실하게 옮기기만 하며 다소 산만하게 전개되는 서사 등은 다소 아쉽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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