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2019' 카테고리의 글 목록 (4 Page) :: 영화 보는 영알못

 무려 39년 만의 속편,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의 속편인 <닥터 슬립>이 공개되었다. 스티븐 킹의 동명 원작 소설 또한 전편이 출간된 지 36년 만인 2013년에 공개되었으니, 영화와 소설의 시차가 그렇게 크진 않은 편이다. 영화는 오버룩 호텔에서 벌어진 사건 이후를 다룬다. 호텔 요리사 딕(칼 럼블리)을 통해 자신이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이야기를 하거나 들여다볼 수 있음을 알게 된 대니(유안 맥그리거)는 오버룩 호텔에서 멀리 벗어났음에도 그를 쫓아오는 호텔 안의 존재들을 자신의 머릿속 박스 안에 가두어 버린다. 성인이 되서까지 그러한 존재들과 기억에 시달리던 그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고, 그러한 자신을 바꾸기 위해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훌쩍 떠난다. 그러던 중 대니는 우연히 자신처럼 강력한 샤이닝을 할 수 있는 소녀 아브라(카일리 커란)를 알게 된다. 한편, 샤이닝 능력을 먹이 삼아 이들을 사냥하는 의문의 조직 ‘더 낫’의 로즈(레베카 퍼거슨)가 아브라의 존재를 알게 된다. 대니와 아브라는 로즈와 대면하기 위한 준비를 하게 되고, 이들은 격돌하게 된다.


 <닥터 슬립>은 스티븐 킹의 원작 소설이 있음에도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의 속편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이는 <샤이닝>을 대표하는 장면 중 하나인, 어린 대니가 오버룩 호텔의 복도에서 세발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장면을 영화의 시작으로 삼은 것에서부터 드러난다. 하지만 마이크 플래너건은 큐브릭의 영화만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닥터 슬립>은 <샤이닝>을 놓고 격한 대립을 겪은 큐브릭과 킹에게 화해의 장을 열어주는 작품과도 같다. 큐브릭이 자신의 영화에서는 언급만 하는 수준으로 지나친 ‘샤이닝’이라는 소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만, 영화의 곳곳에는 큐브릭의 영화에 대한 오마주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이는 영화와 소설의 팬들 모두 만족시키려는 욕심을 부리는 것이지만, 마이크 플래너건은 이를 능숙하게 해낸다.


 어느새 장르 영화 팬들에게 믿고 보는 감독이 된 마이크 플래너건은 여러 편의 호러/스릴러 영화와 한 편의 드라마로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허쉬>를 통해서는 캐릭터의 특징을 살린 슬래셔 액션을, <제랄드의 게임>에서는 인물이 지닌 트라우마가 분출되는 과정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힐 하우스의 유령>에서는 한 가족을 다루며 이들의 과거와 트라우마적 공포를 건축적으로 쌓아 올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플래너건의 필모그래피의 연장선상에서, <닥터 슬립>은 그가 시도해왔고 성취해왔던 장르적 시도들의 집합이다. 이번 영화는 초능력자들이 ‘대결’하고, 대니가 과거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통제함과 동시에 ‘표출’하고, 결국엔 오버룩 호텔이라는 공간을 통해 이 요소들을 ‘쌓아’ 올린다. 특히 <힐 하우스의 유령>의 ‘힐 하우스’에서 초현실적인 존재들이 주는 압도감은 오버룩 호텔을 비롯한 <닥터 슬립>의 공간들에서도 이어진다. 한 화면에서 담기던 인물들을 다음 숏에서 지워버리며 능청스럽게 유령적 존재들을 등장시킨다거나, 아브라와 로즈가 서로의 머릿속에서 대결을 펼치는 이질적인 장면 등은 꽤나 자연스럽게 영화 속에서 연결된다. 대니의 방과 아브라의 방을 연결시키는 방식이라던가, 대니와 아브라의 행적을 자막으로 띄우는 방식은 <힐 하우스의 유령> 속 인물들을 기록하던 방식과 유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느슨하지만 밀도 있는 총격전 시퀀스는 이 영화와 마이크 플래너건이 지닌 스타일을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다.


 <닥터 슬립>은 30년 전 제작된, 그리고 걸작이라 불리는 작품의 속편을 이제 와서야 제작할 때의 모범사례와도 같다. 전작을 이미지적으로 계승하면서도 전작과 원작 소설 사이의 괴리를 메우고, 한 편의 재밌는 영화로 만들어낸다. 때문에 <닥터 슬립>을 보면서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 속 ‘샤이닝 장면’을 떠올린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스필버그는 <샤이닝>과 오버룩 호텔을 고스란히 가져와 일종의 테마파크처럼 활용한다. 영화 속으로 들어간 인물들은 재현되는 사건들을 마치 유령의 집에 들어온 것처럼 경험한다. <닥터 슬립>의 오버룩 호텔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버룩 호텔을 물론이거니와 <샤이닝>의 유명한 유령들은 영화 곳곳에서 재등장하고, 이는 <샤이닝>의 팬들을 위한 팬서비스이자 테마파크가 된다. 그럼에도 <닥터 슬립>은 단순히 <레디 플레이어 원> 속 ‘샤이닝 장면’의 확장이 아니다. 어찌 보면 <닥터 슬립>은 큐브릭의 <샤이닝>이 제작될 당시와 일종의 대결을 벌이고 있다. 플래너건은 세트와 CG 등을 통해 얼마든지 재현이 가능해진 30~40년 전의 영화를 단순히 쇼트 단위로 재현하는 것을 넘어, <샤이닝>의 이미지들을 2019년에 불러와 확장시키거나 비튼 뒤 붕괴시킨다. 영화에 잭과 웬디 토렌스는 잭 니콜슨과 설리 듀발의 얼굴을 딥 페이크로 재현하는 대신, 닮은 배우를 데려와 사용했다. 동시에 <샤이닝>에서의 잭과 웬디가 등장하는 장면들이 아주 짧게 등장한다. 때문에 플래너건의 목표는 <샤이닝>과 오버룩 호텔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대신 플래너건은 <샤이닝> 이후를 충실하게 그려낸다. 전작에서 간과되고 원작에선 부각된 소재를 전면에 내세우고, 주인공의 자리를 새로운 캐릭터인 아브라에게 내주면서 전작과 대니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점을 제시한다. 전작이 잭 토렌스만을 중심적으로 다루며 결국 미쳐버리는 인물을 다루었다면, <닥터 슬립>은 사건과 공간을 벗어난 트라우마를 기어코 극복하고, 단단한 사람이 되어가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오버룩 호텔은 관객에겐 테마파크이지만, 극 중 인물들에게는 어떤 극복의 계기이다. 죽음을 앞둔 호스피스의 환자들이 편히 잠들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대니에게 붙은 별명인 ‘닥터 슬립’은, 대니가 어떤 극복에 다가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마이크 플래너건은 계속해서 과거와 마주하고 극복해 나가는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닥터 슬립>은 결국 <제럴드의 게임>과 <힐 하우스의 유령>의 연장선상에서, 플래너건 자신이 애정하는 큐브릭과 킹 사이의 화해의 장을 자신의 스타일대로 펼쳐내는 작품이다.

*스포일러 포함

 

 윤희(김희애)에게 20년 전 첫사랑 쥰(나카무라 유코)으로부터 편지가 도착한다. 몰래 먼저 편지를 열어본 윤희의 딸 새봄(김소혜)은 쥰이 사는 오타루로의 여행을 계획한다. 임대형 감독의 신작 <윤희에게>는 과거를 묵살당하고 결혼한 중년 동성애자(혹은 양성애자)의 이야기이다.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의 영향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는 이 작품은 능청스럽고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에 돌진한다. 임대형의 전작인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의 주인공 모금산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모금산은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자 독립영화감독인 아들을 불러 영화를 찍고자 하는 인물이다. 임대형은 인물의 과거를 대사나 플래시백을 통해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사소하고 시시껄렁한 대사를 주고받는 인물들은 이미 서로의 과거를 알고 있다. 새로운 정보 대신 인물 자체를 실어 나르는 숏-리버스 숏들은 그 자체로 과거를 설명하고 있다.

 

 <윤희에게>의 모금산은 새봄이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능청스러운 태도는 새봄이라는 캐릭터에 담겨 있다. 새봄은 쥰이 윤희에게 쓴 편지를 미리 읽어보고, 윤희와 쥰의 과거사를 알게 된다. 수능을 갓 마친 새봄은 능청스러우면서도 단도직입적인 계획을 세운다. 윤희와 함께 오타루로 가 윤희와 쥰이 재회하는 상황을 만들어내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윤희에게 도착한 쥰의 편지를 부친 이가 쥰이 아니라는 점이다. 바다가 보이는 기차 차창을 비추던 오프닝 크레딧 쇼트에서 이어지는 장면에서, 쥰의 책상을 정리하던 쥰의 고모는 우연히 윤희에게 쓴 편지를 발견하고, 쥰 몰래 편지를 우체통에 넣는다. 윤희와 쥰의 재회는 그 둘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 알지 못하는 당사자의 가족들의 어떤 공모에 의해 기도된다. 

 

 윤희와 새봄, 쥰과 고모는 각각 예산과 오타루에서 살고 있다. 여성으로만 구성된 두 가족들은 무엇인가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윤희는 새봄이 말하지 않아도 그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알고 있고, 쥰은 책 제목을 보지 않아도 고모가 SF소설을 읽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들의 대화는 정보전달이 목적이 아닌 사소한 농담, 집에 돌아왔다는 인사, 수능을 마친 고등학생의 일탈, 장례 직후의 애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의 대화 시퀀스는 숏과 리버스 숏이 반복되다 풀숏을 보여주고 다른 시퀀스로 옮겨가는 단조로운 촬영으로 구성된다. 이것은 이들에 대한 어떤 정보를 제공하는 대신, 영화 초반에 등장한 쥰의 편지를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된 과거를 추측하게 한다. 영화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윤희와 쥰의 과거는 당사자 간의 대화가 아닌, 두 인물이 각자 가족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 드러난다. 사람 키에 가깝게 온 눈은 오타루의 많은 것들을 감추고, 그만큼 많은 것들을 보여준다. 새봄은 윤희 몰래 오타루에 함께 온 남자친구 경수(성유빈)에게 버려진 기찻길이 눈 밑에 파묻혀 있다고 이야기한다. 후경에 보이는 차단기가 그곳에 철로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어떤 것들은 이렇게 이야기됨으로써, 가려져 있는 것으로써 아름다움을 전달한다.

 

 윤희와 쥰은 결국 재회한다. 얼떨결에 둘의 재회를 계획하게 된 새봄과 고모의 공모는 성공한다. 하지만 영화는 ‘재회’라는 클라이맥스에 힘을 주지 않는다. 재회는 다소 갑작스럽게 이어지고, 짧게 지나간다. 윤희에게 쓰인 편지로 시작된 영화는 쥰에게 쓰인 편지로 마무리된다. 쥰이 윤희에게, 윤희가 쥰에게, 두 편지로 시작되고 끝나는 영화는 거대한 숏-리버스 숏의 구도를 취한다. 윤희와 쥰이 각각 새봄과 고모와 주고받는 숏-리버스 숏은 결국 이 둘이 주고받는 숏까지 연결된다. 과거를 말하는 대신, 현재를 이야기하며 과거를 추측하게 하는 이 숏들은 현재의 시공간에 과거를 쌓아 올린다. 마침내 과거를 설명해주는 윤희의 편지는 카메라가 이들의 얼굴을 오가며 쌓아온 과거를 선명하게 형상화한다. 새봄은 윤희의 카메라로 촬영한 필름을 사진사인 외삼촌에게 맡긴다. “왜 인물사진은 찍지 않느냐?”라고 묻는 외삼촌의 질문에 “저는 아름다운 것만 찍어요.”라고 대답하는 새봄은 윤희를 찍는다. 경수는 새봄을 찍고, 새봄은 윤희를 찍고, 마지막에서야 다시 카메라를 든 윤희는 새봄과 경수를 찍는다. 이들에게 아름다운 것들은 서로이다. 영화는 새로운 생활을 꾸려보려는 윤희를 촬영하는 새봄(이 들고 있는 카메라)의 시점숏으로 끝난다. 윤희와 쥰의 과거는 윤희가 그 시절에 촬영한 쥰의 사진처럼 간직되고, 계속 갱신되는 현재 위에 있을 것이다. <윤희에게>는 그렇게, 과거를 현재 위에 쌓아 올리는 영화이다.

 드디어 제임스 카메론에게 판권이 돌아오고, 그가 직접 제작과 각본을 맡아 ‘터미네이터’ 프랜차이즈의 6번째 영화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가 제작되었다. <터미네이터: 라이즈 오브 머신>,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 <터미네이터: 제네시스> 등 제임스 카메론이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못한 속편들을 무시한 채, 2편인 <터미네이터: 심판의 날>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속편이다. 영화는 2편에서 사라 코너(린다 해밀턴)에 의해 심판의 날이 저지된 이후, 또 다른 방식의 ‘심판의 날’이 벌어지고, 미래를 점령한 기계와 그에 맞서는 저항군이 미래의 위협이 될 대니(나탈리아 레이즈)를 제거하거나 구하기 위해 각각 터미네이터 Rev-9(가브리엘 루나)와 강화인간 그레이스(맥켄지 데이비스)를 보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때문에 영화는 2편 이후에도 결국 심판의 날이 온다는 3편의 아이디어에, 미래에 위협이 될 여성을 죽이기 위한 터미네이터가 온다는 1편의 줄거리, 그리고 제거대상이 된 이를 사라 코너와 위험하지 않은 T-800(아놀드 슈워제네거)가 돕는다는 2편의 설정이 <다크 페이트>라고 거칠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때문에 <다크 페이트>는 <터미네이터>와 <심판의 날>에 대한 오마주가 빼곡하게 담겨 있다. 미래에서 온 Rev-9과 그레이스가 현재에 도착했을 때 벌어지는 상황이나, T-1000처럼 액체화된 형태의 Rev-9, 사라 코너와 T-800이 주고받는 대사 등은 제임스 카메론이 연출한 두 편의 영화의 영향이 짙게 묻어난다. 다만 액션 시퀀스들은 두 편의 영화와는 차별화된 물량공세를 선보인다. <데드풀>을 통해 처음 장편영화를 연출했던 팀 밀러는 전작에서 예산의 한계로 미처 보여주지 못한 물량공세를 이번 영화를 통해 해결하려 한 것 마냥 공장, 고속도로, 수력발전소, 수용소 등에서 선보인다. 하지만 제임스 카메론의 두 영화와는 다르게 시그니처라고 할만한 액션 시퀀스도 없으며, 액션의 퀄리티도 여러 블록버스터 영화들에서 보아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다소 아쉬웠다.

 

 가장 큰 변화는 서사를 추동하는 조건의 변화이다. 전작들은 사라 코너라는 강인한 여성상을 내세웠음에도 카일 리스나 남성화된 로봇인 T-800을 구원자로 내세웠다. 반면 이번 작품은 미래에서 온 인물도, 현재에서의 조력자도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엇보다 앞선 두 편이 존 코너라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남성을 매개로 사라 코너의 이야기를 만들어갔다면, <다크 페이트>의 대니는 ‘자궁’이라는 이름의 매개자가 아닌 미래 자체로 나아가는 캐릭터이다. 이는 영화가 상정하는, 앞선 두 편에선 2023년이었지만 <다크 페이트>에서는 2043년인, 미래가 현재와 조금 더 가까워졌기에 가능한 변화일지도 모르겠다. 테크노 바라던가 아케이드 등이 등장하던 전작과는 다르게,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국경지대와 텍사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크 페이트>가 반영하는 ‘지금’이 더욱 두드러지기도 한다. 80~90년대의 히트작들이 무차별적으로 2010년대에 복귀하는 와중에, <다크 페이트>는 조금 더 지금과 미래를 반영하려 시도하고 있다

 <환절기>, <당신의 부탁> 등의 작품을 영화와 그래픽 노블로 동시에 선보여 온 이동은 감독의 신작 <니나 내나>가 개봉했다. 이번 작품 또한 두 가지 매체로 거의 동시에 공개되었으며,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가족을 다루고 있다.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던 아들과 어머니의 이야기였던 <환절기>, 뜻밖의 가족으로 뭉치게 된 엄마와 아들의 이야기였던 <당신의 부탁>에 이어, <니나 내나>에서는 아버지를 떠나 도망친 어머니의 편지를 받고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미정(장혜진), 경환(태인호), 재윤(이가섭) 삼 남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집을 떠난 어머니로 인해, 그리고 각자의 사정으로 인해 다소 분열된 상태에 놓인 삼 남매가 다시 가족이라는 범주로 묶이게 된다는 것이 이 영화의 큰 얼개이다.

 

 영화가 다루는 가족의 인원이 많아졌다는 점이 이동은 감독의 전작과 <니나 내나>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때문에 전작들에 비해, 비록 미정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세 사람의 이야기는 물론, 그들의 아버지(고인범), 미정의 딸 규림(김진영), 경환의 아내 상희(이상희) 등의 이야기까지 다뤄야 할 인물들이 대폭 늘어난다. 그러다 보니 영화 자체가 다소 산만해지기도 한다. 또한 두 전작의 경우 인물들이 가족에게 감추고 있던 비밀이 드러나거나, 굳이 캐내지 않은 과거를 캐내면서 어떤 분열이 일어나고, 그것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며 소위 ‘이상적인 정상가족’으로 불리는 범주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이룬다는 점에서 흥미로웠었다. 하지만 <니나 내나>의 가족들은 이동은 감독의 전작들에서 다뤄졌던 것과 유사한 비밀이나 분열을 지니고 있음에도, 이는 가족의 균열을 드러내기보단 봉합을 위한 소재로써 다뤄진다. 또한 <당신의 부탁>에 이어 이번 영화에도 다시 등장하는 무속적인 요소들은 다소 뜬금없게 느껴진다. 이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가족을 봉합시키기 위한, 존재하는 갈등들을 하나의 결말로 향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방향으로 등장한다. 미정의 꿈이나 환상 장면들이 이를 보여주는데, 이 장면들의 결론은 결국 다시 모인 가족들의 사진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니나 내나>의 가족들은 평생 동안 봉합된 적이 없다. 이들은 각자 숨기던 비밀과 함께 묻어둔 과거를 지니고 있다. 가족을 떠난 엄마의 편지는 이들이 꺼내지 못하던 비밀과 갈등을 꺼내는 계기가 된다. 비밀과 갈등의 근본 원인이 회귀하여 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때문에 <니나 내나>는 한 번도 봉합된 적 없는 가족을 마침내 봉합하는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드는 의문점은 “왜 이들은 봉합되어야 하는가?”이다. 왜 이들은 한 한 프레임 안의 가족사진으로 귀결되는 이야기를 지녀야 하는가? 세상을 떠난 가족을 토대로 삼아 봉합되는 가족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신체적, 정신적으로 무력화된 이후에나 가능해진 봉합은 정말로 가족이라는 이름의 봉합인가? 어머니를 만나러 떠나는 삼 남매의 여정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두를 묶어내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욕망의 여정과도 같다. 여정 이후 가족이 다시 모인 몇몇 장면들은 많은 가족의 집에 걸려 있는, 모두가 행복해 보이기는 한 가족사진과도 같다. 이들의 비밀과 갈등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손쉽게 정리된다. <당신의 부탁>을 즐겁게 보았던 이유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언뜻 아름답게 느껴지는 봉합 대신, 어딘가 어긋난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살아가길 결심하는 이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니나 내나>는 유사한 상황을 반대의 방향으로 이끌어나간다. 이는 크게 새롭지도, 재밌지도 않은 또 하나의 익숙한 가족 이야기일 뿐이다.

 지금의 관객들에겐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각색자로 알려져 있는 제임스 아이보리의 대표작 <모리스>가 30년 만의 국내 최초 개봉을 앞두고 있다. <모리스> 또한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44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은사자상과 남우주연상, 음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영화는 1909년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시작된다. 학생인 모리스 홀(제임스 윌비)은 우연히 클라이브 더럼(휴 그랜트)을 만나게 된다. 한두 학기를 같이 보내게 된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되고, 연인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영국에서 동성애는 범죄였다. 학교를 중퇴하고 모리스는 죽은 아버지를 이어 주식 중개인으로, 클라이브는 변호사가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각자의 길을 가면서도 여전히 사랑을 유지하던 둘은, 클라이브의 대학 동기가 동성애 행위로 징역을 선고받으며 급변하게 된다.

 

 <모리스>는 1909년에서 1차 대전이 벌어지기 직전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다. 여전히 많은 것들 것 금기였으며, 재산에 의한 사회적 지위의 격차 또한 강력하게 작용했다. 또한 케임브리지 대학 장면들을 통해 묘사되는 것처럼, 중산층 이상의 ‘신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가지는 정신적 가치는 기독교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제임스 아이보리는 모리스와 클라이브의 주변 묘사를 통해 이러한 영국의 모습을 스케치하고, 그 속에서의 금기된 사랑을 이야기한다. 영화의 프롤로그에서 어린 모리스는 초등학교 선생님에게 일종의 성교육을 받는다. 모리스는 이를 들을 때마저 ‘금기’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듣게 된다. 기독교에 바탕을 둔 이성애 중심주의 사회에서 그 밖의 사랑들은 금기로 치부된다. 모리스는 그것을 억압당해 왔고, 클라이브를 만남으로써 억압된 것들이 해방된다. 영화의 중반을 넘어서 벌어지는 모리스와 클라이브와의 갈등은, 결국 정상성을 택하고 기독교-이성애 중심주의의 감시체계로 순응하는 삶과 감시체계 밖으로 탈주하는 삶 사이를 선택하는 갈등이다. 

 

 때문에 영화의 전반부가 아름답고 과감하며 위태로운 둘의 사랑을 다룬다면, 후반부는 사랑이라는 상태 자체를 유지하기 위한 모리스의 (사실상의) 투쟁을 다루고 있다. 그 때문인지, 영화 초반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의 로맨스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같은 아름다운 봄과 여름날들을 그리고 있다면, 후반부는 더글라스 서크의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처럼 사랑을 유지하기 위한 사적인 투쟁이 이어지는 겨울날과 같다. 특히 클라이브와 모리스가 집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영화의 거의 마지막 즈음의 장면은 서크의 멜로드라마들에 대한 명백한 오마주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모리스>는 서크의 여러 영화들이 보여준, 사회적, 역사적으로 금기시되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계승하고 있다. 다소 어리바리한 모습의 모리스와 그저 매혹적인 클라이브, 그리고 둘과는 전혀 다른 위치에서 새로운 상황을 제시하는 알렉 스커더(루퍼트 그레이브스) 세 사람으로 써낸 한 편의 드라마는, 그 자체로 1910년대 초반 런던에 대한 보고서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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