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39년 만의 속편,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의 속편인 <닥터 슬립>이 공개되었다. 스티븐 킹의 동명 원작 소설 또한 전편이 출간된 지 36년 만인 2013년에 공개되었으니, 영화와 소설의 시차가 그렇게 크진 않은 편이다. 영화는 오버룩 호텔에서 벌어진 사건 이후를 다룬다. 호텔 요리사 딕(칼 럼블리)을 통해 자신이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이야기를 하거나 들여다볼 수 있음을 알게 된 대니(유안 맥그리거)는 오버룩 호텔에서 멀리 벗어났음에도 그를 쫓아오는 호텔 안의 존재들을 자신의 머릿속 박스 안에 가두어 버린다. 성인이 되서까지 그러한 존재들과 기억에 시달리던 그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고, 그러한 자신을 바꾸기 위해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훌쩍 떠난다. 그러던 중 대니는 우연히 자신처럼 강력한 샤이닝을 할 수 있는 소녀 아브라(카일리 커란)를 알게 된다. 한편, 샤이닝 능력을 먹이 삼아 이들을 사냥하는 의문의 조직 ‘더 낫’의 로즈(레베카 퍼거슨)가 아브라의 존재를 알게 된다. 대니와 아브라는 로즈와 대면하기 위한 준비를 하게 되고, 이들은 격돌하게 된다.
<닥터 슬립>은 스티븐 킹의 원작 소설이 있음에도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의 속편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이는 <샤이닝>을 대표하는 장면 중 하나인, 어린 대니가 오버룩 호텔의 복도에서 세발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장면을 영화의 시작으로 삼은 것에서부터 드러난다. 하지만 마이크 플래너건은 큐브릭의 영화만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닥터 슬립>은 <샤이닝>을 놓고 격한 대립을 겪은 큐브릭과 킹에게 화해의 장을 열어주는 작품과도 같다. 큐브릭이 자신의 영화에서는 언급만 하는 수준으로 지나친 ‘샤이닝’이라는 소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만, 영화의 곳곳에는 큐브릭의 영화에 대한 오마주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이는 영화와 소설의 팬들 모두 만족시키려는 욕심을 부리는 것이지만, 마이크 플래너건은 이를 능숙하게 해낸다.
어느새 장르 영화 팬들에게 믿고 보는 감독이 된 마이크 플래너건은 여러 편의 호러/스릴러 영화와 한 편의 드라마로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허쉬>를 통해서는 캐릭터의 특징을 살린 슬래셔 액션을, <제랄드의 게임>에서는 인물이 지닌 트라우마가 분출되는 과정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힐 하우스의 유령>에서는 한 가족을 다루며 이들의 과거와 트라우마적 공포를 건축적으로 쌓아 올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플래너건의 필모그래피의 연장선상에서, <닥터 슬립>은 그가 시도해왔고 성취해왔던 장르적 시도들의 집합이다. 이번 영화는 초능력자들이 ‘대결’하고, 대니가 과거의 트라우마를 어떻게 통제함과 동시에 ‘표출’하고, 결국엔 오버룩 호텔이라는 공간을 통해 이 요소들을 ‘쌓아’ 올린다. 특히 <힐 하우스의 유령>의 ‘힐 하우스’에서 초현실적인 존재들이 주는 압도감은 오버룩 호텔을 비롯한 <닥터 슬립>의 공간들에서도 이어진다. 한 화면에서 담기던 인물들을 다음 숏에서 지워버리며 능청스럽게 유령적 존재들을 등장시킨다거나, 아브라와 로즈가 서로의 머릿속에서 대결을 펼치는 이질적인 장면 등은 꽤나 자연스럽게 영화 속에서 연결된다. 대니의 방과 아브라의 방을 연결시키는 방식이라던가, 대니와 아브라의 행적을 자막으로 띄우는 방식은 <힐 하우스의 유령> 속 인물들을 기록하던 방식과 유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느슨하지만 밀도 있는 총격전 시퀀스는 이 영화와 마이크 플래너건이 지닌 스타일을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다.
<닥터 슬립>은 30년 전 제작된, 그리고 걸작이라 불리는 작품의 속편을 이제 와서야 제작할 때의 모범사례와도 같다. 전작을 이미지적으로 계승하면서도 전작과 원작 소설 사이의 괴리를 메우고, 한 편의 재밌는 영화로 만들어낸다. 때문에 <닥터 슬립>을 보면서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 속 ‘샤이닝 장면’을 떠올린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스필버그는 <샤이닝>과 오버룩 호텔을 고스란히 가져와 일종의 테마파크처럼 활용한다. 영화 속으로 들어간 인물들은 재현되는 사건들을 마치 유령의 집에 들어온 것처럼 경험한다. <닥터 슬립>의 오버룩 호텔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버룩 호텔을 물론이거니와 <샤이닝>의 유명한 유령들은 영화 곳곳에서 재등장하고, 이는 <샤이닝>의 팬들을 위한 팬서비스이자 테마파크가 된다. 그럼에도 <닥터 슬립>은 단순히 <레디 플레이어 원> 속 ‘샤이닝 장면’의 확장이 아니다. 어찌 보면 <닥터 슬립>은 큐브릭의 <샤이닝>이 제작될 당시와 일종의 대결을 벌이고 있다. 플래너건은 세트와 CG 등을 통해 얼마든지 재현이 가능해진 30~40년 전의 영화를 단순히 쇼트 단위로 재현하는 것을 넘어, <샤이닝>의 이미지들을 2019년에 불러와 확장시키거나 비튼 뒤 붕괴시킨다. 영화에 잭과 웬디 토렌스는 잭 니콜슨과 설리 듀발의 얼굴을 딥 페이크로 재현하는 대신, 닮은 배우를 데려와 사용했다. 동시에 <샤이닝>에서의 잭과 웬디가 등장하는 장면들이 아주 짧게 등장한다. 때문에 플래너건의 목표는 <샤이닝>과 오버룩 호텔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대신 플래너건은 <샤이닝> 이후를 충실하게 그려낸다. 전작에서 간과되고 원작에선 부각된 소재를 전면에 내세우고, 주인공의 자리를 새로운 캐릭터인 아브라에게 내주면서 전작과 대니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점을 제시한다. 전작이 잭 토렌스만을 중심적으로 다루며 결국 미쳐버리는 인물을 다루었다면, <닥터 슬립>은 사건과 공간을 벗어난 트라우마를 기어코 극복하고, 단단한 사람이 되어가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오버룩 호텔은 관객에겐 테마파크이지만, 극 중 인물들에게는 어떤 극복의 계기이다. 죽음을 앞둔 호스피스의 환자들이 편히 잠들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대니에게 붙은 별명인 ‘닥터 슬립’은, 대니가 어떤 극복에 다가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마이크 플래너건은 계속해서 과거와 마주하고 극복해 나가는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닥터 슬립>은 결국 <제럴드의 게임>과 <힐 하우스의 유령>의 연장선상에서, 플래너건 자신이 애정하는 큐브릭과 킹 사이의 화해의 장을 자신의 스타일대로 펼쳐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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