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김도영 2019 :: 영화 보는 영알못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건조한 문체에 각종 통계자료를 각주로 첨부한, 일종의 르포 기사와도 같은 소설이었다. 김지영의 유년시절부터 육아를 시작하는 30대 초반까지의 인생을 덤덤하게 기록하는 것이 소설의 내용이었다. 특히 김지영이라는 흔한 이름을 사용하여 어떤 성격과 개성을 지닌 픽션적 캐릭터가 아닌, (조남주 작가가 이야기한 것처럼) 여러 여성들의 실제 경험을 모아 김지영이라는 얼굴 없는 익명의 인물에게 부여한 것이 소설의 특징이다. 때문에 영화화 소식을 들었을 때 “이 작품이 영화라는 매체로 번역되기 과연 적절한 형식과 이야기를 지닌 작품인가?”라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소설은 김지영이 겪은 삶의 국면들을 단편적으로 기록해 놓는 것처럼 느껴지는 작품이며, 그것을 정신과 의사라는 외부의 시선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편 <자유연기>를 통해 [82년생 김지영]과 유사한 소재를 다뤘던 김도영 감독이 연출자로 정해졌을 때도, 정유미와 공유라는 스타 캐스팅이 더해졌을 때도 완성도 있는 영화가 나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했다. 소설을 다시 읽어봐도, 이 소설은 영화적 번역을 요구하지 않는 텍스트라고 느껴졌다.

 

 결론부터 말하지만,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영화화와는 어울리지 않는 소설을 훌륭하게 영화로 옮겨 놓았다. 소설에서는 도입부와 결말부에만 등장하는 ‘빙의’의 설정을 영화 전체로 확장하며 김지영(정유미)이 살아온 삶의 국면들로 접속한다. 이렇게 김지영이 삶 속에서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여성들로 빙의하는 것은 영화 속 한 대사처럼 “허깨비처럼 살게 된” 여성들을 김지영을 매개로 소환해낸다. 이는 조남주 작가를 비롯한 여러 여성들의 이야기를 하나로 엮은 소설의 과제를, 배우 정유미를 통해 얼굴이 부여된 ‘김지영’이라는 여성 캐릭터의 얼굴과 몸을 통해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김지영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한국 여성의 삶)에서 그가 겪었을 은폐된 여성혐오들을 차근차근 제시한다. 정신과 의사의 시선으로 기록된 소설과는 다르게, 영화는 김지영과 그의 남편 정대현(공유)의 시선으로 김지영의 삶을 복합적으로 묘사하고, 그 과정을 통해 소설보다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소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남편인 대현의 비중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지영과 대현이 각각 점유하는 러닝타임의 비중은 아마 생각보다 큰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공유라는 스타 캐스팅과 더불어 상업영화로써의 선택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현의 비중이 늘어난 것은 <82년생 김지영>이 김지영으로의 무조건적인 몰입을 저지해 영화가 최루성 신파로만 흘러가는 것을 방지한다. 또한 지영의 단일 시점을 영화가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원작에서 정신과 의사가 수행하던 관찰자의 역할을 대현에게로 넘긴다. 게다가 방관자에 가까웠던 원작의 묘사보다는 조금 더 조력자에 가까운 역할을 부여하는데, 지영의 삶과 상태를 다루는 것에 공들였던 원작을 생각하면 꽤나 파격적인 각색이다. 하지만 이 지점은 나름대로 노력하는 (물론 노력한다고는 하지만 그 노력이 정말로 지영을 위한 것인지, 혹은 지영의 상태에 대한 대현 자신의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뿐인지 의심되는 장면들이 영화 곳곳에 널려있다) 남편이 있음에도, 개인의 차원에서 지영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까지 가해지는, 은은하고 강력하며 은폐되어 드러나지 않는 여성혐오적 차별들을 떨쳐낼 수는 없다. 영화 속 대현의 존재는 개인이 노력을 한다고 해도 구조적으로 조직된 차별을 떨쳐내기는 어려우며, 우리는 그러한 사회 속에 내던져져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82년생 김지영>은 영화의 도입부부터 김도영 감독의 단편 <자유연기>를 연상시킨다. <자유연기>는 육아로 인해 배우 일을 그만두게 된 여성이 오디션에 지원해 자유연기를 펼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82년생 김지영>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식탁에서의 식사 장면이라던가, 지영과 대현의 집안 거실을 촬영하는 구도, 자신의 주변 여성들에 빙의된 지영의 모습 등은 김도영 감독이 <자유연기>에서 보여줬던 숏들과 연기 디렉팅의 반복과 변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감독의 첫 장편영화이기에 불안정한 지점들도 존재한다. 애초에 김지영의 삶을 연도로 구분된 챕터로 담아냈던 소설을 옮겼기 때문인지, 혹은 장편을 처음 연출하는 감독의 적응과정인지는 알 수 없으나. 30대인 지영과 그의 과거 플래시백을 오가는 연출은 종종 <자유연기>와 같은 단편들을 여럿 모아 놓은 것만 같다. 특히 대현의 비중을 높임으로써 지영에게 무조건적인 몰입을 하게 만드는 대신, 지영의 삶과 일상 하나하나를 관찰하게 하는 연출이나 지영의 주변 여성들을 통해 드러나는 불법 촬영 에피소드 등은 영화 전체를 단편들의 묶음인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그럼에도 영화의 모든 사건들은 김지영으로 귀결된다. 소설과는 다르게 얼굴을 얻고 익명성을 벗은 김지영은 스크린 속에서 살아 있고, 스크린 앞에 앉은 여성들은 자신과 유사한 이가 스크린 속에서 살아있음을 보게 된다. 김지영뿐만 아니라 지영의 엄마 미숙(김미경), 지영의 언니 은영(공민정), 지영의 직장상사 김팀장(박성연), 지영의 직장동료 혜수(이봉련), 지영의 외할머니(예수정) 등 또한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내고 여성의 공간을 집 안으로 한정 짓는 구조 속에서 각자의 투쟁을 벌이고 있음이 러닝타임 내내 드러난다. 김지영이 이들의 모습으로 빙의되는 것은 스크린 안팎에 존재하는 익명의 보편 여성들에게 얼굴을 부여하는 것이다. 영화 자체는 형식적으로 관객들이 지영에게 깊게 몰입하는 대신 소설과 같이 그를 관찰하게 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지만, 몰입이 강요되지 않음에도 관객들은 지영에게 공감하고 몰입한다. 물론 빙의된 지영과 지영의 엄마가 대면하는 장면은 명백히 신파적인 장면이며 연출과 배우들의 연기 테크닉을 통해 관객의 몰입을 요구하지만, 그것은 영화 안팎으로 쌓인 맥락들 사이에서 지워지던 여성의 얼굴이 익명성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다.

 

 때문에 <82년생 김지영>의 결말은 원작 소설과 다르다. 원작은 지영을 관찰하고 기록하던 남성 정신과 의사의 독백으로 마무리된다. 그는 지영의 상황에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공감하지만, 자신의 병원에서 일하던 여성 상담사가 육아휴직을 내자 “후임은 꼭 미혼으로 뽑아야겠다”라고 다짐한다. 반면 영화는 소설가의 꿈을 꾸며 국문과에 입학했던 지영을 다시 불러온다. 지영은 10대 시절 자신에게 돌아왔어야 했지만 남동생에게 가버린 만년필을 손에 쥐고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 간다.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일상의 영역으로 파고들기 시작한 2016년의 소설은 변화하지 않는 폐쇄적인 구조를 작품의 형식으로 만들어내며 그에 대한 지적을 강화한다. 하지만 영화는 지영을 소설의 출발점으로 써 내려간다. “김지영 씨는 우리 나이로 서른네 살이다”로 시작되는 관찰의 기록은, “김지영은 1982년 4월 1일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자전적인 서술로 변화한다. 영화 내내 대현과 카메라의 시점으로 관찰되던 김지영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다. 관찰자에서 서술자로의 변화, 익명의 다수에서 얼굴이 부여된 개인으로. <82년생 김지영>은 ‘여자’라는 익명으로 은폐되던 여성들이 마침내 얼굴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는 과정을 담은 영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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