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2019' 카테고리의 글 목록 (3 Page) :: 영화 보는 영알못

 2007년, 데스티니(콘스탄스 우)는 뉴욕의 한 스트립 클럽에 일을 나가기 시작한다. 그는 그곳의 인기 스트리퍼인 라모스(제니퍼 로페즈)와 만나 친밀해지고, 함께 일을 하기 시작한다. 월스트리스트의 남자들을 상대하던 이들은 많은 돈을 벌게 된다. 하지만 2008년 금융 위기가 터지자 손님들이 끊기고, 일거리는 줄어들며, 스트리퍼들은 일자리를 잃게 된다. 그러자 라모스는 돈을 벌 수 있는 다른 방법을 떠올린다. 월스트리트의 남자들을 클럽 밖에서 헌팅하여 클럽으로 데려오는 것. 데스티니가 딸을 낳고 일을 그만둔 사이 라모스는 다른 동료들인 메르세데스(케케 파머)와 에나벨(릴리 라인하트)과 함께 그 일을 시작하고, 클럽에 돌아온 데스티니 또한 합류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의 ‘사업’이 점점 커지면서 여러 문제들도 따라오기 시작한다.

 

 영화 <허슬러>는 뉴욕 스트리퍼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동안 월스트리트의 남자들을 통해서만 이야기되어온 2008년 금융위기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의 제작자로도 참여한 아담 맥케이의 <빅 쇼트>나 라민 바흐러니의 <라스트 홈> 등 비슷한 시기를 다룬 다른 영화들과 전혀 다른 결을 취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지점은, 한국에서는 소위 ‘강간 약물’로 다뤄지는 약물을 통해 여성들이 월스트리트 남성들의 돈을 빼앗는다는 점이다. 캐릭터들이 소개되는 초반부를 제외하면, 클럽 안에서의 카메라가 대부분 남성인 관객들을 향해 있다는 점 또한 흥미롭다. 이 영화는 결국, 월스트리트라는 거대한 금융 착취 집단에 균열이 일어나자 이들에 대한 일종의 반격을 가하는 여성들의 이야기인 셈이다. 영화의 배경인 2007년부터 2015년까지를 수놓은 클럽 뱅어 히트곡들의 향연과 함께, 영화의 주인공들은 착취자들을 착취한다. 영화 후반 등장하는 경찰들이 이들의 범죄를 “황당한 일”이라 이야기하며, 이들에게 당한 남성들을 “등신 같다”라고 묘사한다. 이들의 치안력이 지키는 것은 기존의 착취 구조이고, 착취자의 위치에 놓인 이들이 역으로 착취당하는 순간은 어리석은 이들의 실수라 불린다. 데스티니와 라모스는 각자의 딸과 자매가 된 서로를 위해 ‘사업’을 이어간다. 그것은 아마 월스트리트의 남성들도 지닌 유사한 동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겐 욕망을 해소할 공간이 주어진다. 데스티니나 라모스와 같은 이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공간을 그들은 소유하고 있다. 그 공간에서의 역습은 그들이 쌓아 올린 자본주의적 착취의 역습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영화는 엘리자베스(줄리아 스타일스)라는 저널리스트가 데스티니를 인터뷰하고, 그 인터뷰를 통한 회상장면으로 영화가 전개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인터뷰는 데스티니와 라모스의 행적을 시간 순서대로 쫓는다. 2007년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2008년 금융위기를 거쳐 인터뷰가 진행되는 현재로 수렴한다. 국가적인 (그리고 세계적인) 경제 위기는 위기 직전의 호황과 위기 이후의 기나긴 후유증을 남긴다. <허슬러>는 그 후유증을 다루는 작품이다. 데스티니와 라모스 사이의 애증의 로맨스적 관계, 착취 구조의 균열과 착취에 대한 역습,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어떤 피해자들은 모두 그 후유증과 연관된다. 인터뷰라는 형식은 데스티니의 이야기에서 한 걸음 떨어져 나와 그 후유증을 볼 수 있게 한다. 금융위기의 전말을 탐구하고, 일이 벌어진 이후를 다루기보다 이후의 일을 통해 사건의 전말에 다가가는 다소 추리극적인 택하던 다른 작품과 <허슬러>의 차이점이 여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허슬러>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와 <빅 쇼트>의 대척점에 서 있는 작품이다.

 부산에 홀로 사는 말순(나문희)에게, 오래전 집을 나간 딸의 딸인 공주(김수안)가 갓난아이인 동생을 등에 업고 나타난다. 말순의 딸이 세상을 떠나자 갈 곳이 없어진 공주가 말순의 집에 살게 된다. 말순과 공주는 생활비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티격태격하면서 생황을 이어가고 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가족이 된다. 그러던 중 말순에게 치매가 찾아오고, 이들의 생활은 이제 앞을 알 수 없게 된다. 허인무 감독의 장편 연출 데뷔작인 <감쪽같은 그녀>는 나문희와 김수안, 두 배우를 내세운 코미디이자 눈물을 짜내려는 신파극이다. 그런 만큼, 이 영화는 같은 장르의 영화들이 해온 길을 고스란히 걸어간다.

 

 영화의 초중반은 웃음을 유발하려는 장면들로 가득 차 있다. 학교에 간 공주의 옆자리 남자아이의 대사나 그 남자아이를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행동, 공주를 말순에게 데려다준 사회복지사 동강(고규필)이 공주의 담임선생님 박 선생(천우희)을 짝사랑하며 벌어지는 일들, 공주와 말순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사건들이 이를 채우고 있다. 이러한 코미디 장면들은 굉장히 익숙하고 지루하다. 동강과 박 선생 사이의 서브플롯은 그저 웃음을 주기 위해 등장했다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리는데, 웃음을 유도한 장면들이 웃음보다는 남성의 일방적인 짝사랑이라는 상황이 자아내는 불쾌함을 더욱 유발한다는 점에서 실패적이다. 공주의 동급생들이 등장하는 장면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런저런 사건을 겪으며 ‘애어른’으로 성장한 공주의 주변에 정말로 ‘아이 같은’ 아이들이 가득하다는 설정부터 진부하며, 연애감정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모든 행동들은 동강과 박 선생 사이의 코미디 장면들과 마찬가지로 웃음보다 불쾌함이 먼저 다가온다. 영화 중반 학부모로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의 경우 웃음을 유도했다 한들 용납되기 어려운 수준으로 유치하고 여성혐오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게다가 말순이 그 학부모 캐릭터에게 ‘화냥년’이라 하는 장면을 보면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건강한 코미디를 가치로 내세우는 작품임에도, 이 영화가 코미디를 표방하며 내세우는 것들은 2019년의 것들이라 보기 어렵다.

 

 영화의 전체적인 전개 또한 아쉽기만 하다. 치매, 난치병, 입양, 요양병원과 같은 소재들은 영화 제작 단계에서 그것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는지 의심하게 된다. 이 소재들은 비현실적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오로지 스토리 전개의 편의를 위해 등장했다 퇴장하고, 표면적으로 드러났다 다시 감춰지며, 별다른 인과성도 지니지 못한다. 이러한 소재들을 통해 영화는 신파로 향한다. 이를 위해 갓난아기인 진주는 ‘아기’라기보단 사물처럼 다뤄지고, 치매 노인 또한 어떤 대상으로만 다뤄진다. 영화의 후반부는 그 절정이다. 만약 할머니를 모시고 극장을 찾는 손자 손녀가 있다면, 영화의 후반부에서 불효자 불효녀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감쪽같은 그녀>는 그만큼 영화 속 인물들을 착취하여 웃음과 눈물을 얻어내려 한다. 영화는 마치, 감독이 상상한 그림에 나문희와 김수안이 있기를 감독이 바랬던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이 영화에는 배우가 개입할 여지보단 감독이 클리셰와 소재뿐인 소재들에 나문희, 김수안이라는 좋은 배우들이 놓여 있는 것만 같다. 두 배우의 연기를 즐기기에도, 이 영화는 두 배우의 연기를 즐길 순간을 좀처럼 주지 못한다. 너무나도 감쪽같이 두 배우의 순간들을 숨겨 놓았다.

*스포일러 포함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제작된 마틴 스콜세지의 신작 <아이리시맨>이 극장에서 제한적으로 개봉했다. 러닝타임 209분의 대작인 이 영화는 마틴 스콜세지가 <디파티드> 이후 오랜만에 선보이는 갱스터/마피아 영화이다. 찰스 브랜드의 논픽션 [I Heard You Paint Houses]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2차 대전 이후 트럭 운전수로 일하던 프랭크(로버트 드 니로)가 러셀(조 페시)을 만나 살인청부업자가 되고, 트럭 노동조합의 위원장이자 마피아와 결탁하고 있던 지미(알 파치노)와 함께하게 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209분의 러닝타임은 프랭크의 기나긴 일생을 빼곡하게 담아내고 있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노년의 프랭크가 이야기를 꺼내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하며, 어느 정도 나이 든 프랭크와 러셀이 어딘가로 향하는 타임라인과 트럭 운전수인 프랭크가 범죄에 발을 들이기 시작하는 타임라인, 총 세 개의 타임라인이 무수한 플래시백을 동반하며 영화가 진행된다. 


 <아이리시맨>은 마틴 스콜세지의 다른 갱스터/마피아 영화, 가령 <좋은 친구들>이나 <카지노>처럼 냉혈한들의 세계를 강렬하게 그려내는 영화는 아니다. 세 개의 타임라인을 주축으로 진행되는 영화에는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잠시 스쳐갈 뿐인 인물들에게는 잠깐의 정지 프레임과 함께, 이들의 이름, 사망연도, 사인이 적힌 자막이 등장한다. 사실 영화 속 비중에 상관없이, 범죄에 가담한 거의 모든 인물은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단지 이들이 언제, 어떻게 죽는지가 자막을 통해 고지되느냐 되지 않느냐의 차이밖에 없다. 마틴 스콜세지는 프랭크, 러셀, 지미를 비롯한 범죄자들의 삶을 치열하고 강렬하며 열정적인 것으로 그리지 않는다. 각 인물이 그러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와는 상관없이, 카메라는 이들을 응시하기만 한다. 놀랍게도 이번이 스콜세지와의 첫 협업인 알 파치노를 제외하면, 스콜세지의 여러 영화들에서 넘치는 활력을 보여주었던 배우들은 그 활력의 흔적만을 가진 채 움직이고 있다. 


 물론 긴 시간대를 다루는 작품인 데다가 디에이징 기술을 통해 주연들의 젊은 모습을 표현한 만큼, 일흔을 훌쩍 넘긴 배우들의 연기가 예전만큼 활력 넘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스콜세지는 이 지점을 영화에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기술을 통해 젊어진 이들의 얼굴에는 어색함이 없지만, 종종 이들의 얼굴에는 활력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 얼굴에는 죽음의 징후만이 담겨 있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며, 죽고 싶지 않아 연합과 배신, 협상과 협박을 일삼는 이들의 얼굴에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열정조차 보이지 않는다. 대신 이들의 얼굴에서 보이는 것은, 영화가 친절하게 자막으로 고지해주는 인물들의 죽음과 같은 것이 언제든지 엄습할 것이라는 불안감이다. 그렇다고 그것에 절망한다거나, 맞서 싸우거나,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아이리시맨>이 보여주는 것은 아주 깊은 허망함이다. 영화는 이미 지나간 이들의 시간을 현재에서 가장 가까운 타임라인에서 과거부터 설명해내는 방식을 택한다. 요양병원에 있는 말년의 프랭크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영화의 형식은 허망함 속에 빠져 있는 말년의 남성에게 남은 것은 과거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가장 오래된 타임라인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1975년, 즉 프랭크가 지미를 죽이는 타임라인에 가까워지다 흡수된다. 프랭크가 지미를 죽이는 타임라인은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했던 요양병원의 타임라인으로 흡수된다. 합쳐지는 타임라인들은 영화와 프랭크가 이미 제시된 결말을 향해 고요히 다가갈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가장 먼 과거에서 시작되는 타임라인과 1975년의 타임라인이 만나는 지점, 즉 프랭크가 러셀의 사주를 받아 지미를 살해하고 돌아오는 장면은 지독하게 느리게, 그리고 프랭크가 지나가는 모든 길을 놓치지 않고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사람이 또 다른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사람을 죽이라고 사주한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프랭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후회도 절망도 참회도 아닌, 정해진 트랙을 따라가는 기차처럼 그곳으로 향할 뿐이다.


 영화는 이 과정에서 프랭크가 배제한 어떤 것들, 그의 허망함을 구성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가령, 이 영화에서 프랭크와 지미의 자녀들의 대사는 거의 후반부에 가까워져서야 등장한다. 프랭크의 딸 중 페기의 아주 짧은 대답들을 제외하면, 프랭크와 지미의 자녀들은 러닝타임의 2/3 가량 대사가 없다. 이들은 아버지의 ‘일’에 따라 생활하고, “지켜준다”는 말을 통해 배제된다. 209분의 러닝타임은 남자들의 일대기임과 동시에 이들이 배제하고 감춘 이들이 목소리를 얻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마틴 스콜세지는 영화의 마지막 한 시간 가량을 드디어 말하는 자녀들과 말을 잃어가는 프랭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집중한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는 바뀌었으며, 야만의 시대는 지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휠체어에 앉아 카메라를 바라보는 프랭크를 요양병원 병실의 약간 열린 문을 통해 보여준다. 프랭크가 지미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지미는 침실의 문을 살짝 열어두었다. 프랭크는 그 문틈을 통해 어떤 미래를 꿈꾸었을 것이다. 프랭크는 다시 한번 살짝 열린 문을 바라본다. 관객은 프랭크가 보았던 권력자 지미 대신, 모든 이가 죽은 와중에도 과거라는 허망함을 붙잡고 죽어가는 프랭크를 본다. 마틴 스콜세지가 보여주는 것은 결국 그 죽음이다.

 엘사(이디나 멘젤)가 에렌델의 왕이 되고 안나(크리스틴 벨), 크리스토프(조나단 그로프), 올라프(조시 게드) 등이 행복하게 지내던 어느 날, 엘사는 의문의 노랫소리를 듣게 된다. 잠이 오지 않던 엘사는 노랫소리를 따라 바닷가로 나가 노래에 응답하는데, 그러자 에렌델에서 불과 물이 사라지고 바람이 강해지며 땅이 흔들리는 이상현상이 일어난다. 이에 엘사는 노랫소리를 찾아 떠나야 한다며 저주받은 북쪽 숲으로 떠나고, 안나와 올라프, 크리스토프 또한 그와 함께 한다. <겨울왕국 2>는 이렇게 전편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전편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클리셰를 따라가다가, 몇 차례 그것을 비트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이야기를 선보일 수 있음을 증명한 작품이었다. 이번 속편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속편이라기 보단, <메리 포핀스 리턴즈>나 <말레피센트 2>와 같은 디즈니의 실사 영화, 혹은 MCU의 영화와 유사한 느낌을 준다.


 속편은 기본적으로 전편의 부정이다. 수많은 속편들은 전편에서 마무리된 사건이나 관계들이 확장되어 벌어지는 방식을 택한다. 당장 올해의 예시만 꼽아봐도,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는 심판의 날이 없어진 <터미네이터 2>의 미래를 부정하고 반복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좀비랜드: 더블 탭>은 유사가족으로 유대감을 다진 네 명의 주인공이 갈라섰다 다시 가족으로 뭉치는 이야기의 반복이며, <말레피센트 2>에서는 아예 인간 캐릭터들이 전편에서 달라진 말레피센트의 모습을 망각했다는 언급이 나오며 전편과 유사한 상황을 반복하고 만다. <겨울왕국 2>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겨울왕국 2>가 부정하는 것은 더 이상 혼자 고독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엘사의 다짐과 안나와의 관계이다. <겨울왕국 2>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통해 전편에서 성립된 다짐을 부정한다. 그리고 전편에선 한여름의 겨울이었던 에렌델의 재난이, 물, 불, 바람, 흙의 재난으로 바뀌어 반복된다.


 다만 이야기의 전개는 전편과 다른 방식으로 흘러간다. 전편은 ‘진정한 사랑’과 관련한 디즈니 프린세스 이야기의 전형을 사용했다. 반면 이번 영화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들려준 노래에 기반하여 어떤 기원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이다. 때문에 디즈니 프린세스 클리셰 대신 최근의 (MCU와 <스타워즈>를 포괄하는) 디즈니 영화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확장된 공간으로의 여행, 적당한 액션, 단선적이고 익숙한 이야기를 포장하는 비주얼 등이 그러하다. 때문에 영화의 단점도 명확하다. 노래 ‘Show Yourself’와 함께 등장하는 엘사의 (또 한 번의) 각성은 ‘Let It Go’만큼의 해방감을 주지 못한다. 전작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해주는 올라프의 모습은 웃음을 만드는 것에는 성공하지만 어딘가 <앤트맨>을 연상시키는 기시감이 든다. 숲의 정령들과 대결하는 엘사의 액션은 <닥터 스트레인지>나 <인크레더블> 시리즈를 통해 본 것 같은 기분이다. 영화는 전작을 완전히 반복하는 대신, 디즈니의 최근 공식들을 쫓아간다. 차라리 웨스트라이프나 아하 같은 팝 밴드들의 뮤직비디오를 연상시키는 크리스토프의 ‘Lost in the Woods’ 장면이 더욱 신선하게 다가온다.


 물론 이것이 <겨울왕국 2>가 완전히 실패작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엘사와 안나의 자매애는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이며,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왕위와 전통이 계승되는 클리셰(가령 말을 길들인다는 상징)가 어머니에게서 딸로 계승되는 것으로 변화한 지점, 가을이라는 계절이 주는 시각적 쾌감, 전작만큼 캐치하진 않지만 적어도 영화를 보는 동안은 즐거운 음악은 <겨울왕국 2>의 강점이다. 특히 모종의 작전을 이끌게 되는 안나의 모습이나 러닝타임 내내 디즈니 클리셰를 놀리려는 듯한 크리스토프의 존재감이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부분이다. 그럼에도 많은 부분에서 디즈니의 진부함을 끌어안고 있다는 점에서, 실패작이라곤 할 수 없지만 성공적이라고 하긴 애매한 영화가 되었다.

 10년 만에 돌아온 <좀비랜드>의 속편이다. 전작을 통해 장편영화 연출자로 데뷔한 루벤 플레이셔는 물론, 10년 사이에 모두가 한 번씩은 오스카에 노미네이션 된 네 명의 주연배우도 모두 복귀했다. 영화는 좀비 아포칼립스가 찾아온 지 10년 뒤를 배경으로 한다. 전작에서 위기를 함께 넘기며 끈끈한 유대감을 형성한 콜럼버스(제시 아이젠버그), 위치타(엠마 스톤), 리틀록(아비게일 브레스린), 텔러해시(우디 해럴슨)는 텅 빈 백악관을 자신들의 집처럼 사용하며 생활하고 있다. 이들은 즐거우면서도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결국 리틀록과 위치타는 ‘집’으로 규정되는 공간의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짧은 메모만을 남긴 뒤 사라진다. 위치타와의 결혼을 꿈꾸던 콜럼버스는 우연히 만난 생존자 매디슨(조이 도이치)과 애매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그러던 중 위치타가 돌아와 리틀록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이들은 리틀록을 찾아 여정을 떠나게 된다.


 <좀비랜드>라는 제목을 내세우며 일종의 좀비 테마파크를 지향했던 전작의 방향성은 속편에서도 유지된다. 콜럼버스의 규칙들을 보여주는 자막과 잡다한 대중문화 인용, 다혈질의 텔러해시와 어리벙벙한 콜럼버스, 까칠한 위치타 등의 캐릭터들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하지만 전작의 장점들이 이번 영화에서도 이어지지는 않는다. 트윙키 대신(이번 영화에서는 단 한 번의 언급도 없다) 앨비스 프레슬리에 집착하는 텔러해시의 캐릭터는 익숙하고 지겨운 카우보이의 모습만이 남았고, 위치타는 콜럼버스와의 연애관계를 통해서만 캐릭터가 전개되며, 리틀록 또한 텔러해시와의 유사부녀관계 속에서만 캐릭터가 그려진다. 그리고 콜럼버스는 새롭게 등장한 캐릭터인 매디슨과의 재미없는 로맨스 가운데 캐릭터성이 흐려졌다. 이들이 좀비들과 대결하는 장면들은 영화의 제작비가 늘어남에 따라 더욱 화려해졌지만, 정정훈 촬영감독이 합류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기대감을 충족시켜줄 만한 장면은 존재하지 않았다. 영화 초반 등장하는 좀비들의 분류나 T-800이라 불리는 돌연변이 좀비의 출연은 짧은 에피소드만을 만들어낼 뿐, 이야기 자체에 별다른 영향이 없다. 심지어 영화 후반부 몰려오는 T-800 좀비들은 대체 기존 좀비들에 비해 어디가 더 강해졌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수준이다. <좀비랜드: 더블 탭>은 게으른 각본과 함께 전작의 단점들만을 두드러지게 보여줄 뿐이다. 


 <좀비랜드: 더블 탭>의 가장 큰 패착은 ‘바빌론’이라는 공간의 등장이다. 좀비 아포칼립스 세계관에 비폭력을 지향하는 히피 공동체를 설정하는 것은 도대체 누구의 한심한 아이디어일까? 좀비 아포칼립스에서 10년을 생존한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총을 녹여 펜던트로 만들고, 좀비들이 우글거리는 가운데 불꽃놀이를 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좀비랜드> 시리즈는 코미디 영화이고, 다소 억지스러운 설정들은 이미 다수 존재해왔다. 하지만 바빌론은 세계관이 성립될 수 있는 최소한의 논리도 고려하지 않은 어처구니없는 설정이다. 때문에 <좀비랜드: 더블 탭>에서 즐거운 장면들은 대부분 전작과의 연관성을 강하게 드러내기에 즐거울 뿐이며, 바빌론과 같은 새로운 설정들은 즐거움은커녕 어처구니없는 당황스러움만을 제공한다. 전편의 한 인물이 재등장하는 쿠키영상이 이번 영화에서 가장 즐거운 장면이라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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