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2019' 카테고리의 글 목록 (2 Page) :: 영화 보는 영알못

 배우인 니콜(스칼렛 요한슨)과 연극 연출가인 찰리(아담 드라이버)는 부부이다. 이들 사이에는 8살이 된 아들 헨리(아지 로버트슨)가 있으며, 이들은 찰리의 극단이 있는 뉴욕에서 살고 있다. <결혼 이야기>의 오프닝 시퀀스는 니콜과 찰리가 각각 결혼생활에서의 서로의 장점을 담은 내레이션과 그것을 보여주는 몽타주로 구성된다. 이 장면은 둘의 결혼생활을 압축적으로 제시함과 동시에, 내레이션의 설명과는 조금씩 다른 설명들을 보여주며 서서히 붕괴해가는 부부를 보여준다. <결혼 이야기>는 ‘이혼 이야기’이다. 니콜과 찰리는 이혼 과정을 통해 서로의, 그리고 각자의 결혼생활을 복기한다. 영화가 결혼생활이 아닌 이혼과정을 다룸에도 제목이 <결혼 이야기>인 것은 이 때문이다.

 

 니콜과 찰리는 각자가 생각하던 결혼생활이 매우 상반되었다는 것을 서서히 느끼게 된다. 이들은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며, 각자의 사정도 인지하고 있다. 가령, 찰리는 알코올 중독이었던 아버지를 비롯한 고향 인디애나의 가족들을 싫어하며, 대신 극단 사람들을 자신의 가족처럼 대한다. 반면 니콜은 자신처럼 배우인 엄마와 언니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들이 살고 있는 곳이자 자신의 고향인 LA에서 찰리, 그리고 헨리와 함께 짧은 기간이라도 살고 싶어한다. 하지만 찰리는 이를 듣지 않는다. 찰리는 LA에서 단기간이라도 함께 살자는 니콜의 제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것을 ‘의논’이라 여기며 ‘약속’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찰리는 자신이 제안한 것들에 대해 ‘약속’이라 생각하며 그것을 지키려 한다. 이러한 둘 사람의 다름은 각자 변호사 앞에서 자신의 결혼 이야기를 풀어놓는 장면을 통해 드러난다. 니콜이 변호사 노라(로라 던) 앞에서 자신의 결혼 이야기를 말하는 장면은 꽤 긴 롱테이크로 제시된다. 니콜은 말하면서 과자와 차를 먹기도 하고, 휴지로 눈물을 닦기도 하며, 화장실에 가 코를 풀고 오기도 한다. 롱숏과 클로즈업, 바스트 숏을 오가는 구도가 한번의 롱테이크 안에 담긴다. 반면 찰리가 첫번째 변호사인 제이(레이 리오타)나 두번째 변호사인 버트(알란 알다)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는 수차례 컷이 반복된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니콜과 찰리가 각자 변호사를 구하는 장면까지의 초반부에서 이미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던 두 사람의 결혼생활이 다른 이야기가 되었음이 드러난다.

 

 그 이후부터의 영화는 여러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보아온 익숙한 ‘이혼 이야기’로 흘러간다. 대부분의 관객은 각자 변호사를 구하고 이혼소송을 준비중인 이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이혼에 이르게 될지 실제로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때문에 노아 바움백은 니콜과 찰리 사이의 ‘해피엔딩’ 같은 것을 그리려 애쓰지 않는다. 대신 모두가 예측하고 있는 그 과정들을 따라가며, 두 사람의 갈등을 드러내는 것에 집중한다. 갈등이 없었다면 둘의 결혼상활은 붕괴의 징후들로 가득한 채 이어졌을 것이다. 영화의 엔딩이 보여주는 온기는 어떤 아름다움과 따뜻함이라기 보단 이미 존재하는 과거를 처연하게 끌어안는 것에 가깝다. 결혼 이야기를 롱테이크로 기억하는 사람과 잘게 쪼개진 숏들로 기억하는 사람에겐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있다. 언젠가 벌어질 그 간극을 보여주는 것이 <결혼 이야기>가 하고자 한 것이다.  

 

*스포일러 포함

 

 가수 지망생인 케이트(에밀리아 클라크)는 산타(양자경)가 운영하는 크리스마스 용품 샵에서 일하고 있다. 엄마 페트라(엠마 톰슨)와 언니 마르타(리디아 레오나드)와의 트러블 때문에 집에 들어가지도 않는 그는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며 밤을 보낸다. 그러던 중, 그의 앞에 의문의 남자 톰(헨리 골딩)이 나타난다. 우연한 만남이 계속되는 와중에 둘은 점점 가까워진다. 하지만 톰이 갑자기 떠나면서 둘의 관계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된다. <히트>, <스파이>, <고스트버스터즈>, <부탁 하나만 들어줘> 등 여성 캐릭터를 내세워 코미디에 기반한 장르영화를 만들어오던 폴 페이그의 신작 <라스트 크리스마스>는 로맨틱 코미디이다. 또한 영화에 페트라 역으로 출연한 엠마 톤슨이 각본 작업에 참여했다. 이들은 조지 마이클의 노래 ‘Last Christmas’에 영감을 받아 영화를 제작했다고 한다. 

 

 <라스트 크리스마스>가 재밌는 지점은 폴 페이그와 엠마 톰슨이 조지 마이클의 노래에서 문자 그대로의 영감을 받았다는 점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그 노래의 첫 소절은 이렇다. “Last Christmas, I gave you my heart.”, 직역하자면 “지난 크리스마스, 나는 당신에게 내 심장을 줬어요.” 그렇다. 로맨틱 코미디로 홍보된 이 영화에는 로맨스가 없다. 톰은 지난 크리스마스에 심장병을 앓던 케이트에게 이식된 심장의 원래 주인이다. 케이트가 보는 톰은 일종의 환영 또는 귀신 같은 것이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신파 코미디 영화나 드라마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설정은 영화의 방향을 뒤바꾼다. <라스트 크리스마스>는 톰의 정체를 밝힌 이후 심장이식 수술 이후 우울증을 앓던 케이트의 성장영화로 장르를 새롭게 규정하고, 유고슬라비아 난민 출신인 케이트와 그의 가족들을 영화의 주된 메시지로 사용한다. 영화가 2019년이 아닌 2017년을 배경으로 삼은 것 또한 ‘브렉시트’ 정국을 영화에 담기 위함이며, 이민자, 노숙자, 장애인, 비백인, 퀴어 등이 영화의 주변 인물들로 등장하기도 한다. 결국 <라스트 크리스마스>는 로맨틱 코미디의 외피를 쓴, 만인에게 평등하고 따뜻한 크리스마스에 걸맞은 성장영화인 셈이다.

 

 폴 페이그의 코미디 연출은 여전히 관객들을 웃기는 데 성공하며, 그간 여성들 간의 우정과 연대를 다뤄왔던 그의 필모그래피를 관통하는 특징은 이번 작품에서도 이어진다. 다만 톰이라는 남성 캐릭터의 존재감이 부각되는 방식을 택했을 뿐이다. 톰을 실재하지 않는 인물로 설정하고 케이트와 페트라, 케이트와 마르타의 관계를 강조하는 방식은, 물론 주요 캐릭터가 유령이라는 반전을 사용하는 지점에서 혹평을 던질 이들도 많겠지만, 성장과 연대, 이해와 화해라는 영화의 주제와 크리스마스라는 소재를 적절하게 강조하고 있다. 다만 영화 중후반부에 등장하는 아웃팅 장면은, 설령 그것이 매끈하게 마무리되긴 해도, 그 장면 자체가 다소 폭력적으로 느껴지기에 아쉽게 느껴진다.

 

 유명 추리소설 작가 할란 트롬비(크리스토퍼 플러머)가 자살한다. 소설의 성공으로 돈방석에 앉은 그가 죽자, 그의 자녀들인 첫째 린다(제이미 리 커디)와 그의 남편 리처드(돈 존슨), 일찍 세상을 떠난 둘째 닐의 며느리 조니(토니 콜렛), 셋째 월트(마이클 섀넌)와 그의 아내 도나(리키 린드홈), 그리고 각각 세 자녀의 자식이자 할런의 손자인 랜섬(크리스 에반스), 메그(캐서린 랭포드), 제이콥(제이든 마텔)이 할런의 저택의 모인다. 사건을 정리하기 위해 저택을 찾은 경찰 엘리엇(키스 스탠필드)은 익명의 인물에게 사건 조사를 의뢰받은 저명한 사립 탕정 브누아 블랑(다니엘 크레이그)을 대동한다. 할런의 간병인인 마르타(아나 디 아르마스)는 얼떨결에 블랑과 함께 사건을 조사하게 된다.

 

 <블룸형제 사기단>, <루퍼> 등 저예산 장르영화로 재능을 보여주었고,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를 통해 블록버스터 연출을 맡기도 했던 라이언 존슨이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하는 추리 영화로 돌아왔다. <나이브스 아웃>은 역시 추리극인 <브릭>으로 데뷔했던 라이언 존슨이 다시 자신의 초심으로 돌아온 것과 같은 작품이다. 또한 화려한 캐스팅과 브누아 블랑이라는 탐정을 내세우는 설정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오리엔트 특급 살인>이나 <나일 강의 죽음>을 연상시킨다. 사실 영화 전체가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과 같은 고전적 추리소설의 플롯을 따르고 있다. 사건이 벌어지고, 누가 범인인지를 찾는 후더닛(Who Done It?)의 클리셰를 따라가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히 ‘후더닛’의 단선적인 플롯 구조만을 취하지는 않는다. ‘누가’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어떻게’를 지나 ‘왜’라는 질문으로, 마지막으로 다시 ‘누구’라는 질문으로 돌아온다. 라이언 존슨은 그 과정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과 인셀 등으로 대변되는 동시대 미국에 대한 비판을 가한다.

 

 할런 트롬비의 집은 미국의 축소판과 같다. 부를 개척한 인물의 자녀들은 ‘자수성가’라는 아메리칸드림의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 이들은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이 자기 스스로 이룬 것이라고 여긴다. 심지어 이들은 각자 운영하는 회사나 번듯한 고소득 직업이 있지만, 할런에게 지원을 요청한다. 한편 할런의 간병인으로 일하는 마르타는 완벽한 외부인이며, 집 안의 인물들 중 유일하게 비백인이며, 어머니는 불법체류자이다. 어머니와는 다르게 ‘합법’ 체류 중인 리처드 등에 의해 자수성가를 향해 노력하는 인물처럼 다뤄진다. 정작 이들은 마르타의 출신국이 어디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할런이 쌓아 올린 저택 곳곳은 할런의 소설 속 장치와 소품들로 가득 차 있다. 스스로 ‘자수성가’ 했다고 믿는 할런의 자녀들은 할런이 죽자 그곳을 차지하려고 노력한다. ‘자수성가’의 신화를 신봉하는 이들은 그것을 절대적 가치인 양 말하고 있지만, 이들은 전혀 스스로 무엇인가를 일궈내지 못했다. 이들은 윗세대의 떡고물 중 가장 크고 많은 양을 얻을 수 있었던 세대일 뿐이다. 이들의 자녀는 비옥한 토양 안에서 부모들이 했던 것을 반복하고 있다. 필요에 따라 애정과 우정, 가족애를 주고받는 이들의 자녀는 ‘화이트 트레쉬’이거나 ‘네오나치’로 자라나고 있다. 마르타와 자신을 조금이라도 동일시할 수 있는 트롬비 일가의 사람은 스스로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는 메그뿐이며, 다른 이들은 스스로 리버럴이라 자칭하는 인종차별주의자이거나 네오나치로 성장한다.

 

 완벽한 타자인 마르타가 브누아 블랑과 함께 행동하는 것은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다. 브누아 블랑은 그야말로 정체불명의 캐릭터이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포와로나 <형사 콜롬보>의 콜롬보를 뒤섞어 놓은 듯한 이 캐릭터는 프랑스식 이름을 쓰면서 미국 남부와 영국 악센트가 뒤섞인 괴상한 말투를 사용한다. 국적 불명, 정체불명의 이 캐릭터는 마르타처럼 (비록 가식적일지라도) 가족의 일원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인물도 아니다. 익명의 누군가가 고용한 사립탐정이며, 트롬비 일가의 완벽한 외부인이다. 그는 트롬비 일가의 사람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외부 시점으로 기능한다. 그의 존재는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의 위치로 시작하여, 마르타를 희생양 삼아 사건을 특정 방향으로 이끌어가려는 트롬비 일가의 대척점에서 마르타를 돕는 인물로 변모한다. 거짓말을 하면 구토하는 요상한 생리적 현상을 지닌 마르타는 자수성가의 거짓된 신화 속에서 살고 있는 미국 백인들을 상대하게 된다. 고전적 추리소설의 플롯은 영화가 전개될수록 불공평한 출발점을 지닌 게임으로 변모한다. 라이언 존슨은 <라스트 제다이>가 개봉한 이후 영화와 출연자, 그리고 자신에게 쏟아진 욕설과 비난을 보며 <나이브스 아웃>의 각본을 썼다. <나이브스 아웃>은 불공평하게 기울어진 미국 땅의 높은 지대에서 어떤 노력들을 내려다보며 관찰하고 비평하는 어떤 이들의 얼굴에 구토하는 작품과도 같다. 천부인권을 말하지만 그것을 국경으로 나누고, 자신들이 속하는 높은 지대의 기준선을 만들어내고, 스스로를 자수성가의 신화에 (그것의 수혜자이든, 탈락자이든 간에) 목매는 이들에게 말이다. 

카레이서인 캐롤 셸비(맷 데이먼)는 59년 프랑스 르망 24시간 레이스 경기 이후 심장병으로 인해 은퇴한다. 은퇴하고 스포트카 세일즈맨 겸 레이싱 팀 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그의 팀에는 정비소를 운영하면서 선수로 뛰는 켄 마일스(크리스찬 베일)가 있다. 어느 날, 매출이 늘지 않는 포드사는 레이싱을 통한 마케팅 전략을 세우고, 마케팅 담당 임원인 리(존 번탈)가 캐롤에게 협력을 요청한다. 포드의 막대한 자본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제안에 캐롤은 켄을 비롯한 자신의 팀과 함께 포드와의 협력을 시작한다. 캐롤은 르망 레이스에 나갈 선수로 켄을 제안하지만, 포드의 부회장 리오(조쉬 루카스) 개성 강한 성격을 지닌 켄은 마케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거부한다. <나잇&데이>, <로건> 등의 감독으로 알려진 제임스 맨골드의 신작 <포드V페라리>는 1966년 르망 24시간 레이스에 관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전작들을 통해 드라마와 액션 모두에 재능이 있음을 보여준 제임스 맨골드의 장기가 어김없이 발휘되는 작품이었다.

 

영화의 제목은 포드와 페라리, 두 회사와 각 회사의 CEO가 대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포드는 르망 레이스에서 페라리를 꺾기 위해 캐롤을 섭외했다. 당시 두 회사의 CEO였던 헨리 포드 2세와 엔초 페라리가 모두 영화에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는 두 회사의 단순한 대결구도로 흘러가지 않는다. 이 영화가 카레이싱 스포츠를 다룬 다른 작품들과 구별되는 것도 아마 이 지점일 것이다. 영화는 <러시: 더 라이벌>처럼 특정인의 흥망성쇠를 다루는 작품도, <니드 포 스피드>처럼 레이싱의 쾌감만을 다루는 작품도 아니다. 캐롤과 켄, 특히 켄이 대결하는 것은 ‘포드주의’다. 영화는 헨리 포드 2세(트레이시 레츠)의 첫 등장부터 말 한마디로 공장을 멈추고, 자신이 원하는 만큼 차를 생산하지 못하는 노동자들과 임원들을 ‘식충이’라고 부른다. 그의 아버지이자 포드사의 설립자인 헨리 포드는 컨베이어 벨트를 활용한 기계적인 공정으로 노동생산성을 극대화한 인물이다. 하지만 획일화된 노동과정은 노동자를 더더욱 공장의 부품처럼 다루게 하였으며 자본가의 통제권을 확고히 하였다. 또한 관료주의 및 문서주의와 결합된 포드주의는 위계적이고 경직된 회사를 만들어낸다. 헨리 포드 2세가 이끄는 포드사가 그 전형 속에 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다소 다혈질적이며 누군가의 명령을 따르는 것보다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하길 원하는 켄과 포드사 임원인 리오가 갈등을 겪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영화의 많은 부분은 캐롤을 매개로 하여 벌어지는 둘의 갈등을 그려내고 있다. 켄과 캐롤은 물론 포드사의 자본과 헨리 포드 2세의 제안을 통해 르망 레이스를 준비하고 있다. 이들은 포드의 자본에 자신들의 기술력을 더해 페라리를 꺾으려 한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단순히 권위주의에 반발하는 열정적인 개인으로써의 켄이다. 그러나 헨리 포드 2세나 리오가 켄을 대하는 모습은 단순히 자본이나 지위에 따른 권위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켄, 그리고 캐롤을 공장 컨베이어 벨트 앞의 노동자처럼 일종의 부속품으로 사용하려 한다. 카레이서이자 스포츠카 디자이너인 이들의 경력과 능력, 개성은 포드주의적 획일화에 의해 무시되고 배제된다. 켄의 가족과 캐롤의 팀이 획일화될 수 없는 이들의 무언가를 드러낸다면, 헨리 포드 2세와 리오는 비슷한 양복 차림의 임원 무리들이 보여주듯 저들의 무언가를 지우려는 이들이다. 20분가량 진행되는 영화 후반부 르망 24시간 레이스는 직접 제작한 (그리고 포드사의 로고가 박힌) 스포츠카를 타고 트랙을 달리는 켄을 보여주지만, 그가 싸우는 대상은 페라리가 아닌 포드사임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헨리 포드 2세가 캐롤에게 공장을 보여주며 2차 대전에 투입된 비행기를 생산했던 곳이라고 자랑하는 장면이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은 대부분 2차 대전에 참전했던 이들이다. 전쟁은 포드주의를 가속하고 정착시켰다. <포드V페라리>는 결국, 그러한 논리가 적용되던 1960년대의 미국을 비추고 있는 작품인 셈이다.

 수영선수인 헤일리(카야 스코델라리오)는 연습경기를 끝내고 아빠 데이브(베리 페파)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연락을 받는다. 마침 이들이 사는 플로리다에 대형 허리케인이 다가오고 있고, 대피령이 내려진 상황. 헤일리는 연락이 되지 않는 데이브를 찾아 예전에 살던 집으로 간다. 집 앞에 데이브의 차는 있지만 데이브는 없고, 자하실에서는 라디오 소리가 들려온다. 지하실로 향한 헤일리는 무엇인가의 공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기절한 데이브를 발견하고 지하실 밖으로 나오려 하지만, 그 순간 데이브를 공격했던 악어가 나타난다. 허리케인으로 인해 물이 범람하자 인근에 있던 악어농장의 악어들이 탈출한 것. 헤일리와 데이브는 생존을 위해 악어와의 사투를 벌이게 된다. <힐즈 아이즈>, <피라냐> 등의 잔혹한 슬래셔와 <혼스>처럼 괴이한 영화를 만들어온 알렉상드르 아야의 신작 <크롤>은 상어나 뱀과 같은 거대한 식인 동물이 등장하는 호러들의 전형을 따라가지만, 전형 속에서 개운한 재미를 선사하는 작품이다.

 

 87분의 짧은 러닝타임 동안 물속에서 헤일리를 바라보는 시점숏이 수차례 등장한다. 이 시점숏들은 정말로 물속에 숨어 있는 악어들의 것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에 누구의 시점인지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악어는 물 밖에서 나는 소리는 잘 듣지 못하지만 물속에서의 소리에는 민감하고, 어두운 공간이나 물속에서는 인간보다 시야가 밝다. 헤일리와 데이브를 노려보는 수많은 ‘가짜’ 시점숏들은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악어들의 습격을 영화 내내 기다리게 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죠스>부터 아야의 전작인 <피라냐>까지 수중생물의 시점숏을 통해 긴장과 공포감을 조성하는 방법은 흔히 사용되었다. <크롤>은 그 수법을 따라 하면서도, 수많은 ‘가짜’ 시점숏들을 뿌려 악어가 사람을 덮치는 순간의 파괴적인 쾌감보다 협소하고 폐쇄된 공간의 공포감을 표현하는 데 주력한다. 지하실 위에 있는 데이브의 반려견 슈가가 짓는 소리를 통해 지하실 위의 공간을 예측하게 한다. 또한 구조를 위해 집에 찾아온 이들을 안내하는 방식으로 슈가의 짓는 소리가 사용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반려견을 활용하는 것 또한 <크롤>의 긴장감을 더해주는 요소이다. 영화 후반부 제방이 무너져 쓰나미처럼 다가오는 물의 표현이나, 스마트폰, 비상용 손전등, 쥐덫, 건설업자인 데이브의 연장 등이 활용되는 등의 디테일도 적절히 활용되고 있다.

 

  어린 시절 헤일리의 재능을 알아보고 코치를 맡았던 데이브와 헤일리 사이의 과거가 이야기되는 장면들은 다소 급작스럽게 느껴지지만, 생사가 걸린 위기의 상황에서 주고받지 못할 이야기들은 아니다. 또한 이들의 부녀관계는 가부장적인 틀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지만, 둘 사이의 유대관계와 어떤 믿음이 이들의 생존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둘의 관계를 적당히 흥미롭게 전개하고 있다. 영화의 오프닝 쇼트는 연습경기를 하는 헤일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피라냐>에서 비키니를 입은 여성들의 몸을 스펙터클로 활용했던 알렉상드르 아야이지만, <크롤>의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하는 여성 수영선수들의 몸은 성적인 스펙터클이 아닌 신체적 강인함의 스펙터클로써 카메라에 담긴다. 수영선수인 헤일리와 그의 코치였던 데이브가 악어에 대적하는 모습, 그리고 능수능란하게 생존에 필요한 도구들을 발견하고 응급처치를 스스로 해내는 모습들은 이러한 과거의 언급들과 연관되어 제시된다. <크롤>의 마지막 장면이 지나가고 개운함만이 남는 것은 이러한 과정을 쌓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크롤>은 <죠스>로 시작되어 <피라냐>와 <아나콘다> 등 거대 식인 동물을 재난으로 삼는 일련의 호러 영화들의 전형에서 크게 벗어나는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정해진 틀 안에서 유효한 요소들을 얼마나 잘 추려내느냐는 소위 ‘팝콘 무비’로 불리는 장르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다. <크롤>은 그 미덕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 아주 개운한 장르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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