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2019' 카테고리의 글 목록 (22 Page) :: 영화 보는 영알못

 베이루트에 사는 자인(자인 알 라피아)이라는 소년이 부모를 고소한다. 출생신고도 하지 못하여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자인이 부모를 고소한 이유는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 검사로도 출연하는 나단 라바키 감독은 자인의 행적을 쫓으며 난민인 라힐(요르다노스 시프로우)과 요나스(보루와티프 트레저 반콜) 모자의 이야기까지 영화 안으로 끌어들인다. <가버나움>은 살아있는 인간이지만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처지의 빈민 아동청소년과 난민의 삶을 통해 현실에 존재하는 디스토피아를 그려낸다. 



 영화에 출연하는 주요 배역들은 영화 속의 삶과 실제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다. 자인을 연기한 자인 알 라피아는 베이루트의 시장에서 배달 일을 했었고, 라힐을 연기한 요르다노스 시프로우는 실제 난민 여성이며, 한 살 배기 아기인 보루와티프 트레저 반콜은 난민 가족의 아이이다. <가버나움> 속 이야기가 실화는 아니지만, 배우들의 실제 삶이 이야기와 연기 속에 녹아들어있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일 것이다. 때문에 종종 영화 속 인물의 삶과 배우가 겪었을 삶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장면이 등장한다. 영화는 자인과 라힐을 비롯한 영화 속 인물들을 매개로 ‘태어났기 때문에 존재하지도 않는 삶을 이어가야 하는’ 상황을 전달한다. ‘부모님을 고소한 소년’이라는 설정만 제외하면 현실과 다를 바 없는 <가버나움>의 이야기는 픽션임과 동시에 현실에 발을 딛고 있다.



 때문에 영화 속 상황은 단순한 불행 포르노로 인물들을 착취하지 않는다. 나단 라바키 감독은 영화 속에서 검사로 출연하여 자신의 스탠스를 확실히 한다. 그가 <가버나움>을 통해 하고 싶었던 것은, 법적으로는 존재하지도 않던 이들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되찾아주는 것이다. 그것이 ‘부모를 고소한다’는 극단적 방법으로 발화되었지만, 거기에 도달하는 과정 속에서 이러한 설정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다. <가버나움>은 2018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지만, 자인을 비롯한 배우들은 영화제 일주일 전까지 법적으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단 라바키 감독을 비롯한 <가버나움>의 제작진은 출연진의 삶을 지원하기 위해 ‘가버나움 재단’을 설립했다고 한다. 영화의 성공으로 가능할, 일종의 ‘픽션으로 현실을 구제하기’가 가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고려인 출신의 러시아 뮤지션 빅토르 최를 다룬 영화가 제작되었다. 국내엔 전주국제영화제를 통해 소개된 <스튜던트>를 통해 이름을 알린 키릴 세레브렌니코프가 연출하고, 한국인 배우 유태오가 빅토르 최를 연기한 <레토>가 그 작품이다. 2018년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하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영화는 빅토르 최가 밴드 키노를 결성하기 이전, 멘토이자 동료인 마이크(로만 발릭)를 만나게 되며 벌어지는 일을 그리고 있다. 많은 관객들이 알고 있는 밴드 키노의 전성기 시절은 영화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데이빗 보위, 이기 팝, 루 리드, 토킹헤즈 등 당시 소련에서 금지된 서구권 음악들의 등장을 통해 빅토르 최와 키노의 음악세계를 엿볼 수 있다.


 영화는 빅토르 최의 삶을 고스란히 따라가지는 않는다. 빅토르 최와 마이크가 유사한 비중으로 그려지며, 이를 통해 로큰롤 공연장에서도 좌석에 앉아서 관람해야 했던 당시 소련의 강압적인 문화정책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영화 속 인물들이 보위나 벨벳 골드마인 등 서구권 로큰롤 뮤지션들의 음악을 해적판으로 구하고, 직접 가사를 번역하며 연구하는 모습이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다. 때문에 토킹헤즈의 ‘Psycho Killer’, 루 리드의 ‘Perfect Day’, 이기 팝의 ‘Passenger’ 등이 흘러나오는 장면에서 2.76:1 화면비 밖의 레터박스(때문에 영화는 2.39:1 화면비로 상영된다) 밖으로 튀어나오는 애니메이션과 함께 등장하는 뮤지컬 시퀀스는 서구권 음악을 경유하여 자유를 이야기하는 장면이 된다. 빅토르 최나 나타샤(이리나 스타르셴바움) 등 주요 등장인물 외의 행인들까지 뮤지컬 시퀀스 안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이 장면들은 문화적 탄압 상태에 있는 소련의 당시 상황 속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레토>의 주제는 ‘자유’라기 보단 ‘낭만’에 가깝다. 종종 등장하는 1:1 화면비의 컬러 영상 등은 당시의 레닌그라드 인디 로큰롤 씬을 적극적으로 낭만화한다. 때문에 <레토>는 빅토르 최나 마이크의 삶을 따라가는 전기영화라기 보단, 이들을 전면에 내세운 시대극으로 읽힌다. 카메라는 빅토르 최, 마이크, 나타샤 세 인물을 분주하게 오가며 영화 속 시간을 어떤 기억으로 만들어내려 한다. 종종 등장하는 뮤지컬 시퀀스마저 이러한 낭만화에 가담한다. 또한 제4의 벽을 깨며 “이것은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님”을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어떤 인물은 과도한 산만함만을 더할 뿐이다. <레토>가 긴 호흡의 TV 드라마였다면 각 인물들에 충분히 집중하며 지금과 같은 연출법으로 성과를 낼 수 있었겠지만, 2시간이 조금 넘는 러닝타임 안에서 이들 모두를 시도하는 것은 산만한 기교에 불과하다. 영화를 보고 기억에 남는 것이 빅토르 최나 마이크 등의 레닌그라드 뮤지션들의 음악이 아닌, 토킹헤즈, 이기 팝, 루 리드 등의 음악이라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덤 앤 더머> 등의 코미디 영화를 만들어 오던 피터 패럴리 감독의 첫 드라마 장르 영화인 <그린 북>은 천재적인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와 그의 운전수였던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는 인종차별이 만연하던 60년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상류층 흑인과 하류층 이탈리아계 백인의 이야기를 통해 휴머니즘적인 봉합을 선보인다. 문제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이 돈 셜리의 유족들의 허락을 받지 않고 제작되었으며, 돈 셜리에 대한 대부분의 묘사가 실제와 다르다는 주장이 있었다는 것이다. 영화와 실제는 별개라지만, 실존인물에 대한 실화를 그림에 있어서 이 영화가 가진 한계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더욱이, <그린 북>의 완성도는 준수한 편이지만 어쩔 수 없는 백인 감독, 백인 각본가의 시선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기도 한다.



 <그린 북>은 전적으로 마허샬라 알리와 비고 모텐슨, 두 배우의 연기에 기대는 작품이다. 사실 패럴리의 작품 대부분이 그러했다. <덤 앤 더머>는 짐 캐리에게,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는 기네스 펠트로와 잭 블랙에게 기댄 작품이었다. <그린 북> 또한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작품이다. 대신 보편적으로 공감하고 감동할만한 드라마라는 장르를 선택했을 뿐이다. 문제는 이 보편성이 백인의 시선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영화 속 셜리와 토니는 인종과 계급을 넘어서는 우정을 나누지만, 그 밖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지극히 백인적이다. 가령 영화 속에서 배경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등장하는 여러 흑인 엑스트라들에 대한 시선은 높은 계급-그것이 실제 계급이든 인종적 계급이든-의 사람에 의한 시혜적 시선으로 그려진다.



 차라리 익숙한 클리셰 안에 있는 흑들의 대한 묘사는 인종차별에 대한 클리셰적인 묘사로 넘어갈 수도 있다. 아주 잠시 스쳐 지나가는 동양계 인물에게 인종차별적인 말을 내뱉고, 이후 장면에서 동양계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토니의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서 동양계 인물이 소비되기만 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인도계로 추정되는 셜리의 집사 캐릭터 또한 가볍게 지나가고 만다. 결국 <그린 북>은 영화 속 토니, 피터 패럴리 감독, 셜리의 유족과 협의 없이 영화화를 진행한 실제 토니의 아들인 닉 발레롱가 등 백인 시점의 회고담일 뿐이다. 마허샬라 알리와 비고 모텐슨 두 배우의 열연이 가까스로 영화를 무난한 수준에 머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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