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2017' 카테고리의 글 목록 (7 Page) :: 영화 보는 영알못

 시리아의 난민들은 레바논 베이루트의 건설현장의 노동자이다. 그들은 타워 크레인의 불안한 사다리와 흔들리는 엘리베이터, 난간 없는 계단과 흔들리는 발 받침대 위에서 일한다. 바다에 비친 노을이 해변을 거쳐 마천루를 뒤덮는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지만, 한창 시멘트를 붓고 철근을 고정시키는 고공의 노동자들의 생활은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그들은 공사장 밑의 지하에서 적당히 담요들을 깔아 몸을 뉘이며 생활한다. <시멘트의 맛>은 작은 브라운관 TV와 핸드폰이 유일한 낙인 시리아 난민 노동자들의 삶을 담아낸다. 넷플릭스를 통해 소개된 <화이트 헬멧: 시리아 민방위대>나 EBS국제다큐영화제를 통해 소개된 <라스트맨 인 알레포>등의 다큐멘터리 작품들이 시리아를 비롯한 중동의 상황을 보도하듯 전달하고 있는 와중에 도착한 작품이다. <시멘트의 맛>은 앞선 작품들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도 영화의 형식에 있어서 전혀 다른 방법론을 취한다. <시멘트의 맛>은 단순 기록과 전달이 아닌, 영화의 속성을 동원한 필름 에세이로 제작된 작품이다.



 <시멘트의 맛>이 담아내는 것은 영화 속 상승과 하강의 운동, 그리고 클로즈업 등에 담긴 시멘트의 물성이다. 영화는 사다리, 엘리베이터, 계단 등을 통해 건설현장으로 올라가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아낸다. 그들은 완공되지 않은 마천루에 끊임없이 오른다. 흔들리는 발판과 노을빛에 붉게 물든 회색의 시멘트 덩어리는 내전을 피해 레바논으로 건너와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불안정한 삶의 터전이다. 영화의 초반부 이어지던 상승의 이미지들은 건설현장을 수평으로 오가며 철근을 심고 액화된 시멘트를 붓는 이미지들로 이어진다. 아직 유동적인 액체와 유사한 상태인 시멘트는 중동의 마천루를 쌓아 올리는 어떤 가능성을 내포한 물체로 존재한다. 노동자들은 시멘트를 프레임에 가득하게 펴 바른다. 철근 사이사이에 가득 채워지는 시멘트는 단단한 기반이 되어줄 것만 같다. 해가 저물고 노동자들은 마천루의 공사현장에서 퇴근한다. 지하에, 바닥에 위치한 그들의 거처를 향해 불안정한 고공에서 하강한다. 이후 영화는 탱크에서 발사되는 포탄과 시멘트가 굳어가고 철근이 새로 박히는 공사현장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준다. 탱크 포탑의 시선으로 담긴 단단한 시멘트 건물들을 파괴하는 장면과 굳은 시멘트에 철근을 박고 볼트를 조이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포탄으로 인해 붕괴된 건물들은 뿌연 먼지를 일으킨다. 시멘트가 굳어세워진 건물들은 시멘트 맛 먼지를 내뿜으며 크고 무거운 조각들로 붕괴된다. 바닥에, 지하에 살던 난민 노동자들은 그 잔해에 깔리고, 공기에선 시멘트 맛이 난다. 하늘에선 비가 내리고 시멘트 맛 먼지들은 물웅덩이가 되어 바닥에 고인다.



 아비규환이 지나간 후, 노동자들은 다시 건설현장으로 올라간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일터로 향하는 후반부의 장면들은 단순한 상승의 이미지들이 아니다. 지아드 칼소움의 카메라는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를 향한다. 웅덩이에 고인 물에 건설현장으로 향하는 노동자의 모습이 반사된다. 고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상승이면서 하강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상승과 하강, 건설과 붕괴/추락만이 오가는 현실 속에 갇혀버린 시리아 난민 노동자들의 현실은 시멘트 맛 물웅덩이에 갇힌 이미지로 남는다. 영화의 마지막 즈음 시멘트를 운반하는 레미콘에 카메라를 부착해 빙글빙글 돌면서 도로와 도심의 마천루, 터널 등을 담는 롱테이크가 등장한다. 미래적인 분위기로 발전된 중동의 이미지를 담아냄과 동시에 레미콘의 목적지가 전쟁으로 파괴된 지역을 재건하는 현장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발전과 파괴, 재건이 양립하는 중동이라는 공간은 시멘트를 운반하는 레미콘 속에서 뒤섞인다. 영화는 바다를 바라보는 노동자와 베이루트의 야경을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그들은 끊임없이 반죽되는 레미콘 속의 시멘트처럼 정착하지 못하고 내전과 IS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삶을 이어가야만 하는 것일까. 노을 진 아름다운 해변과 화려한 야경은 그들이 손을 뻗을 수 있지만 도달할 수 없는 장소이다. 전쟁은 그들을 시멘트 맛이 깃든 물웅덩이 속에 가둬 놓는다.

*스포일러 포함


 영화는 환영의 매체다. 초당 24 프레임씩 흐르는 이미지들은 스크린위에 영사되며 카메라는 도달했지만 관객들은 도착할 수 없는 시공간을 전달한다. 영화가 끝나면, 영사기가 멈추면 환영은 사라지고 암전 된 화면이나 새하얀 은막이 관객의 눈에 들어온다. 동시에 영화는 믿음과 확신의 매체다. 관객은 카메라가 복제해 전달하는 이미지들을 진실이라고 믿는다. 정지된 시공간을 정지된 이미지에 담아내는 사진이 초당 24장씩 흐르기에 영화를 활동사진이라 부르며 카메라가 담은 것을 진실이라고 믿는다(물론 CG의 등장으로 이 개념이 뒤바뀌고 있지만 아마존에 가서 필름으로 촬영한 <잃어버린 도시 Z>를 이야기할 때는 불필요한 담론일 것이다). 때문의 영화의 관람은 카메라가 담고 영사기가 스크린에 비추는 환영을 믿는 행위가 된다. 제임스 그레이의 신작 <잃어버린 도시 Z>는 환영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이야기한다. 이를 위해 아마존의 숨겨진 원시문명도시 Z를 찾기 위해 정글을 탐험하는 퍼시 포셋(찰리 허냄)의 이야기를 끌어온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암전 된 화면에서 시작된다. 암전 된 화면에서 횃불이 등장하며 관객이 미지의 공간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영화는 (이 이야기에서는 백인으로 한정된) 인간이 인식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짧은 환영으로 보여준 뒤 1906년의 영국으로 점프한다. 군인들과 함께 사슴을 사냥하는 퍼시 포셋은 스크린의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아래서 위로, 또는 스크린 깊은 곳에서 얕은 곳으로 산만하게 움직인다. 이러한 산만한 운동은 영화 전반에 걸쳐 이어진다. 영국과 아마존, 심지어 세계1차대전의 전장을 오가는 포셋의 여정은 스크린의 상하좌우와 안팎을 넘나든다. 규정되지 않은 산만한 운동들은 포셋에 여정이 목적지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러닝타임 대부분에 걸쳐 주입한다. 러닝타임이 끝나면 스크린 위에서 사라질 영화라는 환영처럼, 미지의 목적지는 그 자체로 미지인 환영으로 영화 속에 존재한다. 동시에 포셋은 미지의 도시인 Z가 존재한다는 확신과 믿음의 현신이다. 찰리 허냄의 강단 있는 연기를 통해 그려지는 포셋은 영국왕립지리학회의 모임에서 단단한 확신의 목소리로 Z의 존재를 주장한다. 그가 Z의 존재를 주장하기 위해 본 것은 정글 바닥에 널브러진 토기 조각 몇 점이지만, 포셋은 그 이미지를 통해 Z라는 미지의 환영이 존재하는 시공간이 아마존에 있음을 확신한다.



 그가 Z를 찾아 떠난 첫 여정에서 아마존은 Z의 존재 가능성을 조금씩 보여준다. 수학적인 농경을 이어가고, 외지인인 백인의 입장에선 야만적이며 두려운 의식이지만 그들만의 체계를 갖추고 있는 의식과 의사소통을 보여주는 원주인이 등장한다. 포셋은 원주민과의 대화(스페인어의 도움을 받긴 하지만)를 통해 각자의 의사소통 체계와 각자의 사회 체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한다. 그의 동료 코스틴(로버트 패틴슨) 역시 이에 동조한다. 여정을 이어가던 포셋은 Z의 흔적으로 보이는 조각들을 발견한다. 아마존은 마치 그가 환영을 봤다는 것 마냥 스콜을 그의 몸통에 쏟아버린다. 이에 불구하고 포셋은 자신이 본 것이 환영이 아닌 진실임을 점점 확신한다. 마치 영화를 보는 관객처럼, 카메라가 실제로 담아온 이미지를 몽타주해 조작한 영화를 진실이라고 믿는 관객처럼 포셋은 확신에 차있다. 아마존이 보여준 몇몇 이미지를 통해 Z의 환영을 본 포셋은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으며 확신한다. 첫 여정에 따라나선 머레이(앵거스 맥페이드)는 포셋을 지지했다. 영국왕립지리학회에서 머레이는 포셋이 가져온 토기를 보고 그 이미지에 믿음을 가진다. 그러나 정글에 당도한 머레이는 믿음을 잃는다. Z가 존재한다는 확신을 잃은 머레이는 홀로 폭주하고 죽음을 원하는 상태에 다다른다. 포셋은 말과 식량이라는 대가를 치르며 머레이라는 불신을 떠나보낸다. 코스틴을 비롯한 그의 다른 동료들은 믿음을 잃지는 않지만 떨어진 식량에 진실을 포기하고 만다.



 Z를 찾는 첫 여정을 마친 포셋은 영국으로 돌아오고, 때마침 발발한 세계1차대전에 참전한다. 그곳에서 만난 러시아 점쟁이는 포셋의 손을 잡고 그가 보고 있는 Z의 환영을 읽어낸다. 눈을 감은 포셋이 보게 되는 것은 암전 된 화면과도 같은 암흑이 아닌 정글과 Z라는 시공간이다. 포셋은 전투를 치르기 전 정글의 이미지가 그려진 그림에 입을 맞춘다. 그리고 전투에서 염소가스에 노출돼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는다. 가족의 얼굴을 촉각을 통해 볼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그는 아내 니나(시에나 밀러)의 손을 잡고 Z에 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가 전장에 가져간 정글 그림은 철조망에 걸린 채 전장에 남겨졌지만, Z에 대한 환영은 시력을 잃은 포셋의 암전 속에서 더욱 뚜렷한 확신으로 다가온다. 시력을 잃은 포셋이 보고자 했던 것은 자신의 욕망이 투영된 환영이다. 시각의 배제라는 거대한 암전은 포셋의 환영이 상영되길 기다린다. 상영관을 찾은 관객이 영화가 시작하기 전의 짧은 암전 속에서 영화라는 환영이 스크린 위에 영사되길 기다리는 것처럼, 포셋의 암전은 그의 욕망이 상영되길 기다리고 그것을 Z라는 미지의 환영을 통해 바라본다.



 포셋은 영화가 끝나길 30분을 앞두고 아들 잭(톰 홀랜드)과 함께 Z를 찾는 마지막 여정을 떠난다. 포셋의 욕망과 환영은 잭에게 전염되고, 잭 또한 Z라는 미지에 대한 확신을 가진다. 영화 초반부의 사냥 장면처럼 스크린의 상하좌우와 안팎을 넘나드는 산만한 운동이 이어지며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는 미지를 탐험하는 포셋의 불안한 여정을 보여준다. 여정 끝에 포셋은 원주민의 거주지에 도착한다. 미지의 의식이 거행되는가운데 포셋은 잭의 확신이 불신으로 기울자 그에게 다시금 확신을 심어준다. 물론 잭이 이를 통해 믿음을 회복했는지는 알 수 없다. 원주민들에 의해 들려 이동되는 포셋의 주위에 영화의 오프닝에서 등장했던 짧은 이미지와 유사한 횃불들이 줄지어 등장한다. 포셋은 자신이 줄기차게 보아온 환영을 드디어 마주했음을 느낀다. 카메라는 환영의 한가운데에 놓여 포셋을 스크린의 아래에서 위로 이동시킨다. 카메라를 향해 손을 뻗은 포셋이 보게 되는 것은 니나를 비롯한 가족과 만찬, 그 만찬이 벌어진 공간을 쓸쓸하게 바라보는 자신의 환영(플래시백)이다. Z라는 미지에 대한 확신을 품은 포셋은 자신이 미지에 당도했다고 느끼는 순간 가족의 환영을 본다. 환영이 지나간 후 카메라는 스크린의 위에서 아래의 방향으로 하강/추락하는 포셋을 담는다. 스크린 구석에 언뜻 보이는 황금빛의 조형물은 그곳이 진실된 Z임을 은연중에 드러내려 하지만, 자신이 환영에 당도했다고 여기는 포셋의 시선에 그 조형물은 들어오지 않는다. Z라는 미지의 욕망을 일정 부분 달성한 포셋은 가족이라는 또 다른 욕망을 (뒤늦게나마) 품는다. 뒤늦은 욕망이 투사된 환영의 플래시백 이후 포셋이 하강/추락하게 되는 것은 새로운 욕망에 당도할 수 없는 포셋의 현재를 드러낸다. 결국 욕망의 연쇄는 환영과 그에 이어지는 또 다른 환영을 보여주고, 그 사이에 놓인 포셋은 모든 환영에 당도할 수 없음을 깨달으며 추락하고, 그의 확신은 붕괴된다. 영화의 첫 쇼트에서 포셋이 본 환영(횃불)은 끝없이 이어지는 여정처럼 이어지며 무한히 연쇄되는 환영들의 이미지 한가운데에 포셋이 자리하게 된다. 결국 영화는 미지, Z는 보여주지 않은 채 그것에 대한 포셋의 확신만을 붕괴시킨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 니나는 영국왕립지리학회의 수장을 만난다. 니 나는 포셋과 잭이 살아있음을 본 사람이 있다며, 포셋이 Z에 당도했을 때 학회 수장에게 보내겠다는 나침반을 그 증거로 내세운다. 니나는 아마 작동하지 않는 그 나침반(포셋은 나침반을 20년간 ‘간직했다’고 말했지 ‘사용했다’고 말하지 않았다)을 보고 포셋과 잭이 살아있다는 환영을 만들어낸다. 포셋이 보낸 멈춰버린 나침반은 미지의 환영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자신이지만, 니나는 이를 통해 또 다른 욕망과 환영을 품는다. 니나가 흘리는 눈물은 그 환영을 확신하게 되었음을, 환영에 대한 포셋의 믿음과 확신이 니나에게 전염되었음을 증명한다. 결국 제임스 그레이는 <잃어버린 도시 Z>를 통해 관객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이 보고 있는 영화, 즉 욕망이 투사된 환영은 당신이 당도하지 않은/당도하지 못할 시공간을 그려내고 있다. 당신은 포셋의 멈춰버린 나침반처럼 환영 사이 어딘가에 추락하고, 당신이 실존한다고 믿었던 미지에 대한 확신이 붕괴될 수 있다. 그럼에도 당신은 환영을 믿겠는가?” 영화라는 미지의 환영은 <잃어버린 도시 Z> 마지막에 등장하는 자막처럼 잠시 등장하여 진실을 남겨둔 채 사라진다. 때문에 관객은 영화라는 미지의 시공간을, 그 환영을 믿고, 곧 사라질 진실을 보기 위해 스크린을 응시하며 탐험한다.

“문소리 감독 각본 주연” 어떤 영화의 홍보 카피로 이것만큼 흥미를 느끼게 만드는 문구가 있을까? <여배우는 오늘도>는 문소리가 그간 연출했던 단편 <여배우>, <여배우는 오늘도>, 그리고 <최고의 감독>세 편을 1, 2, 3막으로 삼아 장편으로 만들어낸 작품이다. 영화제에서만 접할 수 있었던 그의 세 영화를 이번 개봉을 통해 한번에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영화 속에서 문소리는 문소리로 등장한다. 문소리로 등장한 문소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또 다른 여성 배우의 이야기를, 더 나아가 대한민국에서 일하는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다시 자신의 이야기로 영화를 수렴시켜 영화인 문소리에 대한 이야기를 71분의 러닝타임 동안 풀어간다.



 1막 <여배우>는 제목대로 여배우라는 이름에 대한 이야기이다. 문소리는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나 북한산에 등산을 간다. 그는 등산로에서 우연히 제작사 대표와 그 일행을 만난다. 하산하여 들른 막걸리 집에서 다시 마주친 제작사 대표 일행과 술자리에 합석하게 된다. 제작사 대표의 남자 후배들이 쏟아내는 온갖 헛소리와 응원하려 했던 말이지만 결국 상처로 돌아오는 친구들의 말에 문소리는 화가 난다. 영화는 여배우라는 스테레오 타입을 반복하고 그 안에 사람을 가두어 버리는 언행을 진득하게 그려낸다. “실물이 더 예쁘시네”, “여배우와 술을 다 먹다니~”, “그 영화 뭐였지? 아 맞다 그 병신으로 나오는 그 영화!”와 같은 발언을 쏟아내는중년 남성의 모습과 그 말을 들으며 똥 씹은 것 같은 표정을 보여주는 문소리의 친구들, 그 사이에서 제작사 대표의 지인들이기에 눈 밖에 날 수 없어 분위기를 맞춰주는 문소리, 영화의 카메라는 바쁘게 이들 사이를 오가면서 여배우라는 타이틀에 질식해가는 문소리의 모습을 그려낸다. “너도 메릴 스트립처럼 <맘마미아>도 찍고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같은 영화도 찍어봐. 너 연기 잘하잖아.”라는 친구의 말은 작품이 들어오지 않아 웬 요상한 시나리오 하나 받는데도 기뻐하는 문소리의 사정과 너무나도멀리 떨어져 있다. 잔뜩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온 문소리가 자신이 원하던 감독이 보낸 시나리오(앞서 제작사 대표가 이야기한 황당한 설정의 시나리오)를 매니저를 통해 전달받고 기뻐하는 문소리의 모습은, 한국 영화판에서 제대로 된 작품도 거의 들어오지 않으면서 동시에‘여배우’이기에 당연히 들어야 할 말로 취급되는 온갖 언행들을 받아내야 하는 현실을 가감 없이 통렬하게 그려낸다.



 2막 <여배우는 오늘도>는 문소리의 하루를 보여준다.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우는 딸, 자신이 다니는 치과 원장의 부탁이라며 가서 사진 한 번 찍어달라고 부탁하는 어머니, 유명 배우이지만 돈이 없어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러 은행에 가게 되는 현실, 요양병원에 머물면서 문소리를 괴롭히기만 하는 시어머니,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는 특별출연 문제 등이 문소리의 24시간 하루를 빼곡하게 채운다. 다음 날 아침 유치원에 가기 싫다는 딸을 달래고 매니저와 함께 출근하는 문소리는 갑자기 차를 세우더니 차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간다. 소리 지르며 달려 나가는 문소리의 모습은 2막의 처음과 마지막 두 번에 걸쳐 제시된다. <여배우는 오늘도>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GV에서 문소리와 전도연이 이야기했듯) 상황만 조금씩 바꿔 ‘워킹맘은 오늘도’, ‘간호사는 오늘도’, ‘아나운서는 오늘도’라는 제목을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일과 육아, 가족의 일, 가정의 일 등으로 빼곡히 채워진 문소리의 하루는 직업을 가지고 일하는 한국 여성들의 삶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것과 같다. 배우라는 직업은 문소리의 직업이 배우이기에 선택된 껍데기일 뿐, 2막이 담고 있는 이야기에 어떤 직업을 집어넣어도 영화가 그려내는 여성의 삶은 수많은 일로 빼곡하여 빈틈이 없다. 업무 미팅을 핑계로 잔뜩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오는 문소리의 모습은 애잔하다. 그렇기에 2막은 딸의 대사처럼 “그만두고 쉬고 싶으면 그만둬야지”라고 말하고 쉬고 싶은 모든 여성들에게 문소리가 보내는 공감과 연대의 메시지다.



 3막 <최고의 감독>은 배우이자 감독인 문소리가 영화인으로서의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문소리는 자신과 십여 년 전에 영화 한 편을 함께했던 감독의 부고를 빈소를 찾는다. 그 영화 이후 십 년이 넘게 새 작품을 내놓지 못한 감독의 빈소엔 그의 가족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조문을 마치고 나오던 문소리는 그 영화에서 함께 작업했던 남자 배우를 만난다. 빈소 옆에서 육개장에 소주를 마시며 둘은 이야기를 나눈다. 근황, 죽은 감독에 대한 이야기, 예술, 연기 등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간다. 그러던 중 또 한 사람이 빈소를 찾는다. 감독과 새로운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신인배우이다. 그는 감독이 예술적으로 굉장히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는다. 문소리는 그 감독의 작품은 예술이 아니었다고 쏘아붙인다. 죽은 감독의 아내는 그 신인 배우가 남편과 바람피우던 상대였음을 알고 그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 나간다. 문소리는 감독의 아들이 있는 방으로 찾아가고, 감독이 생전에 찍었던 홈비디오 영상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아침이 되자 문소리와 남자 배우, 신인 배우는 해장국을 먹으러 간다. <최고의 감독>은 애증의 관계인 감독과 배우, 예술이면서 동시에 예술이 아니기도 한 영화에 대한 태도, 그럼에도 영화와 연기는 문소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또 연기라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낸다.



 앞선 1, 2막에서 문소리는 문소리 개인에 국한되지 않은 공감과 연대의 서사를 펼쳐 보였다면, 3막에서 다시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꺼내며 영화 전체를 문소리라는 이름으로 수렴시킨다. 이러한 구성은 <여배우는 오늘도>가 단순히 세 편의 단편영화를 묶어 상영하는 영화가 아닌, 한편의 장편영화로써 기능하고 있음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때문에 영화는 문소리의 영화이면서, 여배우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한국에서 직업을 가지고 일하며 살아가는 모든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1막 <여배우>로 시작해 2막에서 여성의 이야기로 서사를 확장시키고, 3막을 통해 다시 자신의 이야기로 영화의 서사를 묶어내는 연출 솜씨는 감독 문소리의 차기작을 기대하게 만든다. GV를 통해 아직은 다음 연출작에 대한 생각이 없다고는 하지만, <여배우는 오늘도>에서 보여준 발군의 코미디 감각을 비롯한 그의 연출력을 보고 있자면 감독 문소리가 만들어낼 다른 연출작들이 어떤 즐거움으로 다가올지 궁금하다.

*스포일러 포함


 원칙주의자인 9급 공무원 박민재(이제훈)가 명진구청으로 발령 오면서 영화가 시작한다. 범령과 조례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그는 금세 구청의 에이스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런 그의 앞에 나옥분 할머니(나문희)가 나타난다. 그는 도깨비 할머니라고 불리며 수많은 민원을 들고 오는 구청의 유명인사다. 민재는 막무가내로 민원을 들이대는 옥분에게 원리원칙에 따라 처리하겠다고 말한다. 어느 날 옥분은 자신이 다니던 영어학원에서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민재를 보게 된다. 자신이 한 평생 품고 살며 꼭 말해야 될 것이 있던 옥분은 민재에게 영어를 가르쳐달라고 한다. 사실 언론시사회를 통해 영화의 소재가 기사로 알려지기 전까지 크게 관심 있던 작품은 아니었다. <스카우트>, <시라노: 연애조작단> 등의 재미있는 영화도 연출했지만 <쎄시봉>, <열한시> 등의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김현석 감독의 근작들을 보면서 <아이캔 스피크>라는 작품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자를 소재로 삼았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이를 나문희가 연기하며, 이미 <스카우트>를 통해 우회적으로 5.18이라는 사건을 윤리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깊은 감정선을 잃지 않는 연출로 담아냈던 김현석 감독이라는 것에 영화에 대한 기대가 올라가게 되었다.



 사실 <아이 캔 스피크>는 기대에 비해 아쉬운 부분이 많은 작품이다. 영화 속에 수많은 단점들이 있으며 이를 가릴 생각도 크게 없어 보인다. 족발집 혜정(이상희) 등의 에피소드로 드러나는 시장이 들어선 상가 골목의 재개발 문제, 고등학교 3학년이면서 부모도 없이 민재와 둘이 사는 동생 영재(성유빈)의 이야기,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민재의 모습 등 많은 이야기가 영화의 서브플롯으로 제시되지만 대부분 제대로 정리되지 못하거나 급하게 마무리된다. 또는 영화에서 그냥 증발해버리기도 한다. 우연에만 기대는 몇몇 장면, 가령 구청에서 민재가 옥분에게 소리 지르는 장면을 고등학생인 영재가 (분명 수업시간이라던가 할 텐데) 뜬금없이 나타나이를 목격한다던가 하는 장면들은 약간 당황스럽다. 이문세의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으로 이어가는 아재 개그 역시 통한다면 통한다고 할 수 있지만 유치하고 촌스러운 한국 코미디 영화의 전형을 이어간다. 구청 양 팀장을 연기한 박철민의 주절거림으로 대표되는 김현식 감독의 코미디 양식이 <아이 캔 스피크>의 코미디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자라는 소재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아이 캔 스피크>는대단한 성취를 보여준다. 우리는 이 영화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성격이 있고, 생활이 있고, 인간관계가 있으며, 강인한 개인으로 존재하는 극영화 속 '위안부' 피해자 캐릭터를 만나게 되었다. 때문에 <아이 캔 스피크>를 보는 것은 성격과 개성을 지닌 한 인물로서의 '위안부' 피해자를 극영화에서 만나는 최초의 경험이다. 조금은 지루하거나 유치하게 느껴질 수 있는 전반부는 옥분이 한 구, 한 시장 동네라는 공동체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인물이라는 것을 차근차근 드러낸다. 그동안 <귀향>, <눈길>, <소리굽쇠> 등의 극영화에서 일본군에 의한 피해자들을 그저 피해자로만 납작하게 담아냈고, <어폴로지>, <그리고 싶은 것> 등의 다큐멘터리 역시 (극영화들 보단 낫지만) 어떤 역할 안에 갇혀있는 인물로 '위안부' 피해자를 담아낸다는 느낌을 없앨 수 없었다. 다시 말해 그동안 '위안부'를 그려낸 대부분의 영화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그저 역사의 피해자로, 시대에 묶여버린 사람으로만 존재한다. 이에 비하면 <아이 캔 스피크>의 옥분은 입체적인 성격과 삶을 지닌 개인으로써 존재한다. 자신만의 생각과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며, 공동체의 일원으로써 생활한다는 자각도 있고, 시장의 다른 여성들과 시스터 후드를 쌓아가며 느슨하지만 끊기지 않는 연대를 이어가기도 한다. 무엇보다 과거의 사건을 대하는 것에 있어 타인의 설득과 자극을 통해 각성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의지를 먼저 표출하여 행동한다는 점에서 앞선 영화들보다 압도적으로 앞선 캐릭터이다. 그간의 남성 주인공 실화 바탕 영화들이 남성 간의 연대를 통해 영화의 주제를 이야기했다면, <아이 캔 스피크>는 시스터후드가 도드라지는 작품이라는 점도 영화의 유의미한 성취가 아닐까 싶다. 아주 짧은 플래시백으로 등장하는 위안소 장면을 <귀향>과 <눈길>처럼 전시적인 태도가 아닌 맥락을 더하는 잠깐의 회상으로만 등장시킨다는 점 또한 눈여겨봐야 할 지점이다.



 이를 연기하는 나문희 배우의 연기는 지금까지 실화 속 중요한 인물들을 연기해온 남성 배우들, 가령 <택시운전사>와 <변호인>의 송강호나 <명량>의 최민식과 같은 위치에 서있다. 어쩌면 여성 배우에게는 거의 허락되지 않았던, 역사의 중요한 사건을 다루는 실화 속 주인공의 위치를 다른 배우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연기해낸 첫 영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접해온 나문희의 이미지는 익숙하면서도 가슴 깊이 다가온다. '위안부'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영화를 보러 갔음에도 그 소재가 드러나는 영화의 2/3 지점에선 눈물을 쏟아낼 수밖에 없다. 분노, 인내, 절망, 따스함, 생존의 감정 등이 뒤섞여 진한 페이소스를 만들어내는 나문희의 표정과 대사는 관객을 쥐고 흔들며 감상을 압도적으로 지배한다. 민재와 산보하기 위해 남산에 올라와서 파워워킹을 하는 영화 마지막 즈음의 옥분은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을 강인한 한 인물의 이미지이다. 오롯이 서포터의 역할에만 머물며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매력을 유지하는 이제훈의 연기 또한 좋다. <파수꾼>, <고지전>, <건축학개론>으로 시작해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박열>, <아이 캔 스피크>로 이어지고 있는 그의 필모그래피 또한 또래 남성 배우들에 흥미진진하다.



 <아이 캔 스피크>는 역사적 사건의 피해자를 다루는 영화의 모범과도 같은 작품이다. 물론 한 편의 영화로써 두드러지는 단점들이 보이고, 영화의 장점이 이를 모두 가리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영화가 취하고 있는 태도와 인물들 그려내는 방식에 있는 성취는 놀랍고 뛰어나다. 피해자에 대한 비윤리적 전시와 착취가 만연하고 있는 지금의 한국영화들에 비해 <아이 캔 스피크>가 보여주는 태도는 얼마나 앞서 있는 것일까? 역사의 피해자를 한 개인으로 살아 숨 쉬는 캐릭터로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위안부' 피해자를 행동하는 인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아이 캔 스피크>는 관객이 느낄 부채의식을 온전히 담아낸 첫 영화가 아닐까?

 <그것>은 일곱 아이들의 이야기다. 말을 더듬는 빌(제이든 리버허), 천식을 앓으며 약을 달고 사는 에디(잭 딜런 그레이저), 눈이 커 보일 정도로 도수 높은 안경을 쓰고 다니는 리치(핀 울프하드), 랍비의 아들이기에 유대교 공부를 하게 된 스탠리(와이어트 올레프), 전학 온 지 얼마 안 되어뉴 키드로 불리는 벤(제레미 레이 테일러), 도살장을 운영하는 집안에서 하는 마을의 몇 안 되는 흑인 마이크(초슨 제이콥스), 그리고 이들이 속한 ‘루저스 클럽’의 홍일점 베벌리(소피아 릴리스). 이들이 살고 있는 80년대의 마을 데리는 유난히 실종사건이 잦은 지역이다. 어느 날, 빌의 동생인 조지(잭슨 로버트 스콧)가 종이배를 띄우러 나갔다 실종된다. 그로부터 1년 가까이 흐른 뒤, 여름방학을 맞은 빌은 조지가 살아있다고 믿고 루저스 클럽의 친구들과 함께 그를 찾아 나선다. 조지의 실종을 추적하는 그들 앞에 끔찍한 광대 페니와이즈(빌 스카스가드)가 각자가 느끼는 공포의 형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며 공포가 시작된다. 스티븐 킹의 원작 3부작 소설 중 1부를 영화로 옮긴 작품으로 성장드라마 장르에 호러 장르의 장치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만들어낸 영화이다. 원작의 시간대가 50년대인 것을 80년대로 변경한 것은 <슈퍼 에이트>,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 등의 흥행으로 현재의 관객층이 80년대를 추억하는 작품들을 선호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일곱 아이들에게 각각이 느끼는 공포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빌은 조지를 잃어버렸다는 상실감, 에디에겐 시간마다 챙겨 먹어야 하는 약을 강요하는 어머니, 스탠리에겐랍비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율법 공부를 강요하는 아버지, 벤에겐 타지에서 새롭게 정착해야 한다는 외로움과 다른 학생들의 괴롭힘, 마이크에겐 끔찍한 도축장 일을 배워야 한다는 것과 인종차별, 베벌리에겐 행실을 통제하려 하고 폭행/성폭행을 일삼는 아버지가 공포의 대상이다. 이들이 공포를 느끼는 대상에서 공통점을 찾자면 집이라는 공간이 매개로써 작용한다. 빌은 “집에 가면 아직도 있는 조지의 방을 보는 것이 힘들다”라고 이야기하고, 에디는 어머니가 준 약 먹을 시간을 알려주는 손목시계과약통이 담긴 힙색을 항상 착용하고 다니며, 스탠리는 유대교인 임을 상징하는 키파를 쓰고, 마이크는 여러 차례 종이에 쌓인 고기를 자전거에 싣고 운반하며, 베벌리는 목에 항상 집 열쇠를 걸고 다닌다. 영화는 이러한 소품과 상황 설정을 통해 아이들이 안전할 수 있는 공간은 없음을 드러낸다. 그들의 부모는 루저스 클럽의 멤버들이 몰려다니기에 사고가 일어난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에겐 이미 상급생들이 괴롭히는 학교와 이런저런 트라우마와 억압이 존재하는 집은 안전한 장소가 아니다. 돌멩이 전쟁과 마지막 하수구 시퀀스를 통해 크게 두 차례 제시되듯, 루저스 클럽의 일곱 아이가 가장 안전한 공간은 어디든 모두가 함께 모여있는 곳이다.



 일곱 명의 아이들 중 리치는 유일하게 위악적인 허세로써 공포를 감추는 인물이다. 이러한 허세는 여성혐오를 포함한 상대방의 정체성을 건드리는 방식으로 발화된다. 이러한 방식은 루저스 클럽이 집에서 느끼는 공포, 그리고 페니와이즈의 존재로 인해 발현된 공포를 극복하는 방식이 된다. 가령 베벌리는 자신에게 폭력적으로 다가오는 아버지의 머리를 변기 뚜껑으로 가격하고, 에디는 “이 약들은 다 가짜(bullshit)이잖아!”라고 소리치며 약통을 집어던진다. 그들을 괴롭히던 상급생에게 돌을 던지며 반격하기도 한다. 상급생 중 한 명인 헨리(니콜라스 헤밀턴)는 자신이 느끼는 공포의 대상인 아버지를 칼로 찔러 살해하기도 한다. 결국 아이들이 겪는 폭력은 그 대상과 주체가 변경된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진다. 때문에 아이들이 페니와이즈를 다구리 놓는(?) 후반부는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적인 상황을 똑같은 방식으로 되돌려주는 행위이다. 영화는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직접적으로 그려 내는 방식은 최대한 지양하면서도 뉘앙스는 충분히 전달하고, 페니와이즈에 의해 행해지는 공포의 이미지는 굉장히 잔혹하고 적나라하게 그려낸 뒤, 이를 되갚아주는 아이들의 행위를 가감 없이 묘사한다.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페니와이즈의 하수구는 최후의 안전망이 되어야 할 집이 안전한 공간으로 기능하지 못했을 때 아이들은 어떠한 시공간에 놓이게 되는지를 압도적인 미장센을 통해 전달한다.



 영화가 명확하게 제시하는 공포의 근원과 그것이 페니와이즈라는 적나라한 형상으로 제시되는 방식은 <그것>이 성장드라마 서사의 틀을 지니고 있음에도 호러 장르로써 충분히 기능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원작 소설과 1990년작 <피의 삐에로>에서도 유명한 장면이었던 초반부 노란 종이배 장면에서부터 관객을 몰입시키는 능력이 뛰어났다. 박찬욱 감독의 거의 모든 작품을 함께해온 정정훈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잔혹동화와도 같은 <그것>의 이야기를 영화에 가장 어울리는 룩으로 담아낸다. 페니와이즈를 연기한 빌 스카스가드의 연기는 (물론 <피의 삐에로>에서 페니와이즈를 연기한 팀 커리와 비교되겠지만) 올해 가장 인상적인 공포 캐릭터로 기억될 것 같다. 중간중간 늘어지는 순간들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호러와 성장드라마라는 두 개의 장르를 성공적으로 배합해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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