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2017' 카테고리의 글 목록 (3 Page) :: 영화 보는 영알못

장준환 감독은 계속해서 386세대의 감성, 부채의식, 폭력성 등을 영화에 담아왔다. 데뷔작인 <지구를 지켜라!>와 10년 만에 내놓은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는 폐쇄된 공간을 통해 그의 중요한 테마들을 담아낸 작품이었다. 장준환 감독은 이제 직접적으로 80년대의 한국을 담아낸다. <1987>은 영화의 제목 그대로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부터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이한열의 죽음까지를 다룬 작품이다. 대공수사처장 박처원(김윤석), 그의 밑에서 일하던 조한경 반장(박희순), 박종철의 부검을 지시한 최환 검사(하정우), 이를 보도한 동아일보 윤상삼 기자(이희준)와 수감되어 있던 이부영(김의성), 영등포 교도소의 간수인 한병용 교도관(유해진)과 안유(최광일), 장세동 안기부장(문성근), 강민창 치안본부장(우현), 김정남(설경구), 김승훈 신부(정인기) 등의 실존인물들이 본명으로 등장한다. (한병용 만이 실존했던 두 인물의 이야기를 하나로 합쳐 만들어낸 캐릭터이다) 그만큼 <1987>은 6월 항쟁이 벌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세세하고 꼼꼼한 고증을 통해 그려낸다. 동시에 연희(김태리)라는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외부에 있던 개인이 어떻게 6월 항쟁에 동참하게 되는지를 다룬다. 여진구와 강동원이 각각 박종철과 이한열로 특별출연했다. 그간 한국의 상업영화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주조연급 배우들이 모인 작품이기도 하다.



 <1987>은 한 개인에게 집중하여 사건을 보여주는 대신, 사건을 중심에 놓고 이를 따라가는 각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장훈 감독의 <택시운전사>가 개인의 시선을 중심에 놓고 사건을 관찰하듯이 따라가는 작품이었다면, <1987>은 드라마 <제5 공화국>처럼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며 마치 옴니버스처럼 각 인물들의 면면을 관찰하는 식이다. 비슷한 영화를 찾아보자면용산참사 이후의 재판 과정을 다룬 영화 <소수의견>이 떠오른다. 인물 대신 사건을 중심에 놓고, 악인과 정의로운 누군가, 그 경계 혹은 외부의 인물이 사건을 통해 각성하는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 <1987>이 선택한 방식이다. 이러한 선택이 <1987> 안에서 원활하게 작동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영화는 분명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중심 사건으로 채택하고 있다.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은 촘촘하게 129분의 짧지 않은 러닝타임을 채운다. 문제는 각 인물들에게 관객이 감정적으로 이입할 여지를 불필요할 정도로 많이 남겨둔다는 것이다. 가령 한병용이 등장할 땐 한병용의 상황에, 연희가 등장할 땐 연희에게, 윤상삼 기자의 이야기에선 그에게 각각 몰입하게 된다. 박처원이나 조한경 반장이 등장할 때면 그들을 향한 분노에 파묻힌다. 때문에 핸드헬드 촬영과 익스트림 클로즈업 샷들로 당시의 상황과 감정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은 도리어 영화를 산만하게 한다. <1987>이 <택시운전사>처럼 한 인물의 이야기에 집요하게 집중했다면 모를까, <도둑들>이나 <암살>과 같은 앙상블 연기가 아닌 이상 이러한 연출은 패착에 가깝다. 영화는 어떤 냉정함을 유지하면서 인물들을 관찰하고, <레미제라블>과 같은 뮤지컬 시퀀스처럼 연출되는 마지막 집회 장면의 클라이맥스에서 관객을 끓어오르게 해야 했다.



 아무래도 같은 해에 나온 영화이기에 <택시운전사>와 <1987>의 비교는 어쩔 수 없는 부분처럼 느껴진다. 80년 5월의 광주와 87년의 서울, 그리고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이어지는 촛불혁명을 지켜보고 기억하고 배운 사람들에게 두 편의 영화는 같은 사건과 시기를 다룬 다른 영화들과 다른 감정을 가지게 한다. 어찌 보면 두 영화와 관객들은 서로 다른 광장을 유사한 감정으로 기억하고 있다. 다른 부분이 있다면 앞서 말한 시선의 차이일 것이다. 관객들은 이미 촛불의 광장을 경험했다. 두 영화에 담긴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양상의 광장 일지는 몰라도, 시민들이 시청 앞 혹은 광화문을 가득 매운 사진을 봤을 때의 감정은 질적으로 동일하다. <택시운전사>는 체험보단 관찰의 시선으로 광장을 담는다. 외지인과 외국인이라는 설정은 이러한 관찰의 태도를 견지할 수 있는 설정이다. 아쉽게도 영화의 후반부에서 이러한 태도가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1987> 역시 관찰의 태도를 보인다. 동시에 연희라는 캐릭터를 통해 관찰을 넘어 참여를 유도한다. 아쉬운 점은 앞서 언급한 산만함이다. 정리되지 못한 감정선은 인물들에 대한 관객의 감정적 동의를 성급하게 이끌어낸다. 분명 클라이맥스가 존재하는 영화이지만, 각 캐릭터의 클라이맥스가 러닝타임 중간중간 등장하기도 하고, 너무나도 다양한 인물과 각 배우의 존재감에 캐릭터 간 비중이 무너지기도 한다. 한 인물의 이야기가 전개될 때 다른 인물은 영화 속에서 아예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결국 <1987>은 관찰이라는 태도를 유지하는데 실패한다. 대신 영화는 연희로 대표되는 해당 시대정신에 무지한 관객들을 감정적으로 계몽시키려 한다. 이러한 태도는 단순히 6월 항쟁과 촛불혁명을 상기시키는데 그친다. 더군다나 각성하게 되는 인물이 영화 내에서 유일하게 캐릭터라고 부를 수 있는 여성인 연희에 한정된다는 점에서 계몽적인 태도가 더욱 도드라지게 느껴진다. 영화가 연희를 다루는 태도는 촛불정국에서 광장으로 나선 여성과 청소년들이 들었던 언어들을 상기시킨다. “여자/청소년이 이런 곳까지 나오다니 기특하다, 장하다” “너희들까지 이런 곳으로 나오게 만들어 미안하다” “이러한 시국에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냐” 러닝타임이 흘러갈수록 변해가는 영화의 태도는 영화 속에 분명히 존재했던 여성과 학생들을 주체의 위치에서 배제시킨다. 어쩌면 누군가는 연희가 어느 남성의 도움을 받아 버스 위에 올라서서 주먹을 치켜드는 장면을 보고, 386세대가 없었다면 연희와 같은 사람들이 각성할 수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386세대가 다음 세대들에게 손을 뻗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각자의 감상이야 조금씩 다르겠지만, 그 감상들은 결국 386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지닌 계몽적, 혹은 시혜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결말로 귀결된다. 그렇기에 결국 장준환 감독 또한 그 세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작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앞선 두 작품이 386세대의 폐쇄성과 폭력성을 날이 선 태도로 드러내고 일정 부분 비판하는 영화였다면, <1987>의 언어는 위와 앞서 언급한 광장 속에서 여성/청소년들이 들었던 것과 크게 결이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스포일러 포함


 2년의 기다림 끝에 포스가 돌아왔다. <루퍼> 등을 연출한 라이언 존슨이 메가폰을 잡은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는 전작 <깨어난 포스>가 열어젖힌 새로운 트릴로지를 성공적으로 이어간다. <깨어난 포스>가 오리지널 트릴로지의 <새로운 희망>을 새로운 세대의 인물들로 써내려 간 사실상의 리메이크였다면, <라스트 제다이>는 <제국의 역습>과 <제다이의 귀환>을 뒤섞은 뒤 이를 배반하고 새로운 세대의 도래를 본격적으로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루크 스카이워커(마크 해밀)와 레아 오가나(캐리 피셔) 등 이전 세대의 이야기는 마무리되고, 레이(데이지 리들리), 벤 솔로(아담 드라이버, 전작에서는 카일로 렌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정체가 밝혀진 이후에는 계속 벤으로 불린다), 핀(존 보예가), 포 다메론(오스카 아이작) 등의 캐릭터가 더욱 단단해지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쩌면 이는 라이트사이드와 다크사이드의 간단한 흑백논리로 양분되던 기존 6편의 설정을 갈아엎고, 빛과 어둠 그 사이의 희미한 영역으로 트릴로지를 이끌어 가겠다는 의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제국의 역습>과 유사하게 진행된다. 루크가 요다의 밑에서 수련을 받았던 것처럼 레이는 루크의 밑에서 수련을 받고, 레아가 이끄는 저항군은 스노크(앤디 서키스)가 이끄는 퍼스트 오더에게 기지가 발각되어 사활을 건 전투를 벌인다. 영화는 이렇게 <깨어난 포스>가 <새로운 희망>을 따라갔던 것처럼 <제국의 역습>의 이야기를 변형하여 따라가는 것처럼 전개된다. 이러한 이야기는 영화가 진행되면서 조금씩 군열이 일어난다. 레이와 벤이 포스를 통해 연결되어 대화를 나누게 되면서 레이는 다크사이드의 유혹을 경험하고, 아직 마음을 다잡기 못한 벤은 어느 쪽에 서야 할지 갈등한다. 벤이 카일로 렌으로 변모한 계기가 되었던 루크의 제자 시절 이야기가 드러나면서 갈등은 더욱 커진다. 이러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라스트 제다이>는 오리지널 트릴로지의 서사구조를 답습하는 것을 거부한다. 나이 든 루크는 스스로가 전설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음과 동시에 벤의 스승으로써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레아는 더 이상 공주가 아닌 저항군을 이끄는 장군으로써 지혜롭고 결단력 있게 모두를 이끄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둘 모두 스스로의 상징성과 늙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영화의 후반부, 깜짝 등장한 요다(포스의 령으로 등장하는 요다는 오리지널 트릴로지의 인형과 같은 질감으로 등장한다!)의 조언을 통해 구시대의 제다이를 청산한 루크가 자신의 죽음으로 벤을 저지하고 저항군이 지닌 불씨를 살려내는 마지막은 시리즈에 대한, 전설에 대한 최고의 예우이자 헌사이다. 또한 새로운 세대가 자신들의 유산을 남기고 스스로 전설이 될 수 있도록 자리를 남겨주는 모습이기도 하다. ‘박수 칠 때 떠났다’라고 하기에는 40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갔지만, <라스트 제다이>를보고 있자면 40년 동안 박수를 쳐도 모자랄 판에 그 박수를 다음 세대에게까지 돌려주는 모습까지 등장하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벤 솔로 또한 다스베이더를 쫓은 가면을 부셔버리고 스노크를 직접 죽이면서 과거의 다크사이드와 결별하고 스스로가 새로운 악역으로 거듭난다. 다스 베이더의 “I am your father”에서부터 이어지던 스타워즈의 오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훌륭하게 계승하는 악역이랄까? <깨어난 포스>에서는 한 솔로(해리슨 포드)를직접 죽이면서 극단적인 콤플렉스를 표출했다면, <라스트 제다이>에서는 유사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였던 루크와의 대결을 통해, 그리고 또 하나의 아버지/스승 격의 인물인 스노크를 죽임으로써 더욱 단단해진 악역으로 거듭난다. <깨어난 포스>의 유약한 카일로 렌은 갈등 끝에 기존의 다크사이드와 라이트사이드 모두를 저버리고 새로운 존재로서 될 것을 선언한다. 벤 솔로가 좀 더 구체적으로 확실한 캐릭터로 발전했다면 레이의 캐릭터는 더욱 단단하고 굳건해진다. 루크와의 수련과정에서 벤과 스노크에 의해 다크사이드의 유혹을 받기도 했지만, 레이 또한 스스로의 과거를 받아들이고 벤이 새로운 길을 가려는 것처럼 자신의 길로 향한다. 이것은 시리즈의 전통을 따르는 것임과 동시에 부수는 설정이다. <깨어난 포스>의 개봉 이후 2년간 레이의 정체에 대해 많은 논쟁들이 오갔다. <라스트 제다이>가 제시한 정답은 레이가 아무것도 아닌 천한 출신이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각 트릴로지의 시작을 알린 <새로운 희망>이나 <보이지 않는 위협>의 아나킨(헤이든 크리스텐슨)과 루크는 사막으로 가득한 행성에서 살아가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제국의 역습>에서 루크의 아버지가 다스 베이더였음이 밝혀지고, 프리퀄 트릴로지를 통해 아나킨이 다스 베이더가 되는 과정이 완성되면서 스카이워커 가문의 신화가 완성되었을 뿐이다. 때문에 레이가 스카이워커 가문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존재라는 반전 아닌 반전은 스타워즈의 전통을 계승함과 동시에 배반한다.



 <라스트 제다이>를 통해 스타워즈는 드디어 스카이워커 가문과 결별을 선언한다. 시리즈 전체(심지어 스핀오프인 <로그원>까지 포함하여)를 관통하던 아버지라는 존재는 이번 영화를 통해 완전히 삭제되었다. 물론 그들이 남긴 유산과 잔재는 포스와 퍼스트 오더, 저항군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남겠지만, <라스트 제다이>의 선택은 더욱 공격적이고 파격적으로 세계관을 확장시킬 기회를 만들어 낸다. 요다의 등장이라던가 드디어 포스를 사용하는 레아의 모습, BB-8 의 적극적인 활용(그의 활약은 거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 수준이다. 그리고 너무 귀엽다) 등의 팬서비스에도 충실하다. 열혈 파이터에서 리더로 거듭나는 포 다메론과 저항군 전사로 거듭나는 핀의 성장을 보는 것 또한 즐겁다. 감초 같은 역할을 하는 새로운 생물 포그와 저항군의 새로운 캐릭터인 로즈(켈리 마리 트란)는 앞으로의 모습이 더욱 기대된다. 저항군 장교 홀도(로라 던)은 스타워즈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충격적이고 강력한 한 방을 선사한다. 물론 홀도와 레아가 나누는 마지막 대화 또한 너무 아름다워(일단 캐리 피셔와 로라 던의 투샷을 스타워즈에서 볼 수 있다는 것부터) 눈물이 나려 한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저항군과 퍼스트 오더의 전면전은 역시나 압도적인 비주얼을 자랑하며, 영화 중간에 등장하는 라이트 세이버 액션은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몇 손가락 안에 들 액션을 선사한다. <라스트 제다이>는 오래전 머나먼 은하계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드디어 미래를 향하고 있음을 선포한다.



 <깨어난 포스>로 준비운동을 마치고, <로그원>으로 방향성을 제시한 새로운 세대의 스타워즈는 과거와는 다른 신화를 써내려 가고 있다. 영웅도, 제다이도 아닌 그저 저항군의 일원일 뿐인 로즈의 등장과, 선악의 경계는 없다고 선언하는 듯한 코드브레이커(베니시오 델 토로)의 행동은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기존의 스타워즈가 그리스 비극 스타일로 풀어낸 스카이워커 가문의 역사였다면, 새로운 스타워즈는 저항군과 퍼스트 오더, 그 사이에서 살아가는 각 개인의 이야기가 엮여 만들어지는 역사로 새로운 출발을 예고한다. 단 한 명의 영웅이 세상을 구하고 공주를 구해내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더 이상 없다. <라스트 제다이>는 고리타분한 과거의 전통을 박살내고 더 넓은 세계관으로 전진한다. 예우를 갖추고 헌사를 보내면서 과거를 박살내고 새로운 이야기를 준비한다. 과거를 존중하고 보존하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언뜻 난센스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라이언 존슨의 <라스트 제다이>는 과거의 시리즈와 정면으로 부딪히면서 불가능해 보이는 시도를 성공시킨다. 그 시도는 성공적으로 스타워즈 세계관을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어낸다. 어떻게 보면 백지상태에 가까워진 결말 속에서, 트릴로지의 최종장의 펼쳐낼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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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핵전쟁이 벌어진다면?’ ‘북한에서 쿠데타가 일어난다면?’ 한반도와 그 인근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이 생각해봤을 법한 상상이다. <변호인>으로 천만의 맛을 봤던 양우석 감독의 신작 <강철비>는 이러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다. 2011년 양우석 감독은 북한의 쿠데타와 핵전쟁 위기를 담은 웹툰 『스틸레인』의 스토리를 쓴 경험이 있다. <강철비>와 『스틸레인』의 주인공과 이야기는 조금 다르지만, 『스틸레인』을쓸 때 쌓은 정보와 경험을 바탕으로 <강철비>가 완성될 수 있었다. 영화의 배경은 지금의 한국, 이제 막 남한의 대선이 끝난 시점이다. 북한의 은퇴한 군인 엄철우(정우성)는 군부의 리태한(김갑수)에게서곧 쿠데타가 벌어질 것이라며 그의 원인이 되는 인물들을 암살할 것을 명령받는다. 엄철우는 명령을 받고 개성으로 향하지만, 개성에 도착한 것은 북한의 1호. 거기에 쿠데타가 발생하여 개성은 미사일 공격을 받게 되고, 엄철우는 얼떨결에 북한 1호를 데리고 남한으로 피신한다. 엄철우가북한 1호를 치료하기 위해 찾은 병원이 우연히도 청와대 외교수석인 곽철우(곽도원)의 전 부인이 운영하던 곳이었고, 남한 측에서 북한 1호를 보호하게 된다. 그러던 와중 쿠데타가 벌어진 북한은 남한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이참에 핵으로 전쟁위협을 제거해야 한다는 대통령 이의성(김의성)과 통일을 생각하면 핵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의견인 당선인 김경영(이경영)이 대립한다.



 <강철비>는 딱 현재의 한반도 정세를 담아낸 영화이다. 기존의 영화들이 남한과 북한에 인물, 여기에 미국 혹은 중국의 인물들을 짧게 끼워 넣었다면, <강철비>는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다양한 국가의 입장까지 담아낸다. 청와대 외교수석인 곽철우가 CIA나 중국 외교부 등과 정보를 교환하며 정세를 파악하고, 한반도 위에서 핵이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과정 또한 꼼꼼하고 납득 가능하게 묘사된다. 북한에서 쿠데타가 벌어지고, 북한 1호가 의식불명 상태로 남한에 내려오게 된다는 과감한 상황을 기대보다 설득력 있게 묘사한다는 것이 <강철비>와『스틸레인』, 양우석 감독이 직접 쓴 각본의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때문에 <강철비>를 보는 것은 언뜻 어떤 작가의 소설을 읽는 것과 유사한 느낌을 준다. 영화는 한반도 정세와 역사를 바탕으로 다양한 음모론을 실제 역사와도 같은 꼼꼼함으로 풀어낸 김진명 작가의 소설과 같다. 북핵 문제를 직접적인 소재로 삼은『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나 『나비야 청산가자』, 제목 그대로 사드 문제를 둘러싼 이야기를 그린 『THAD』와 같은 소설과 영화 <강철비>는 상당히 유사한 결을 지니고 있다. 영화는 김진명의 소설처럼 한국, 북한, 미국, 중국 등이 북한 1호의 상태와 쿠데타, 북핵 등의 정보를 두고 벌이는 논쟁들과 대선이라는 이벤트와 맞물리는 남한의 핵무장에 관한 의견 차이, 분단과 핵전쟁위기 사이에서 살아가는 일반 시민들의 모습까지 나름 생생하게 묘사한다. 여기에 <변호인>에서 드러났던 양우석 감독 특유의 휴머니즘, 블록버스터 다운 액션(엄철우와 북한 암살요원 최명록(조우진)의 몇몇 액션은 <존 윅> 같은 근접 총기 액션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퀄리티에 대한 의문은 남지만)으로 양념을 한 작품이 바로 <강철비>이다.



 때문에 <강철비>는 현재 시점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낡고 익숙한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강철비>는 분명 한국전쟁부터 현재 시점의 이르는 남북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낸 영화 중에서도 가장 세세하고 현실적인 묘사를 보여준다. 동시에 그렇기에, 전쟁 불감증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의 관객들에겐 또 하나의 익숙하고 오래된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 제작의 시기상 어쩔 수 없는 한계점이기도 하지만, 탄핵정국(영화가 겨울의 대선에서 시작하는 것은 분명 올해 12월 이었었어야 할 대선을 노린 것이다)과 트럼프의 미국이 반영되지 못했다는 것 또한 아쉬운 점이다. 박정희 정권 때부터 현재의 사드 문제까지 이어지는, 북핵을 놓고 오랜 기간 이어지는 대립의 역사는 다소 지겹게 느껴진다. 여기에 휴머니즘을 녹여내기 위해 집어넣은 몇몇 장면들, 가령 함께 수갑을 차고 국수를 먹는 두 철우라던가아재개그를 치는 장면, 지드래곤의 노래를 기어이 두 번이나 삽입하는 것 등의 장면들은 140분의 긴 러닝타임을 더욱 늘어지게 만든다. 또한 전반부 북한의 쿠데타 과정에서 등장하는 교차편집이 큰 긴장감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도 아쉽다. <변호인>의 법정 장면이 송강호라는 괴력의 배우의 능력에 힘입어 긴장감과 감동을 자아냈다면, <강철비>의 장면들은 그 정도의 괴력을 지닌 배우가 없고 편집만으로 이를 만들어내기엔 아직 감독의 역량이 조금 부족해 보인다. 쿠데타와 핵전쟁, 남한으로 피신한 북한 1호 등의 상상은 모두의 상상임과 동시에 지겨워진 상상이다.



 <강철비>는 남한의 핵무장이라는 이슈에 대해 놀랍도록 중립을 유지한다. 대통령과 당선인 두 캐릭터는 각각 핵무장 찬성과 반대로, 전시상황에서의 핵공격 찬성과 반대로 갈라서서 대립한다. “분단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보다 분단을 이용하는 것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는다.”는 곽철우의 대사처럼, <강철비>는 전쟁과 핵을 정치와 이익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벌어지는 사건이다. 영화는 140분 러닝타임 내내 그 중립을 유지하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가선 결국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어쩌면 한국 상업영화의 고질병과도 같은 ‘굳이 없어도 될 것 같지만 들어가는 에필로그’를 넣기 위한 선택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결과적으로 두 개의 입장중 어느 한쪽으로 수렴하는 결말을 맞게 된 엔딩을 통해 영화와 양우석 감독은 한쪽에 입장에 가까이 서게 된다. 때문에 <강철비> 또한 분단의 상황 사이에서 태어난, 155억 원의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만들어낸 상품으로만 느껴진다. 상업영화라는 틀을 벗어날 수 없는 정도의, 딱 그 정도의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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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라이즈> 등을 연출했던 벤 휘틀리가 액션 영화를 연출했다. 총기 거래를 진행하는 두 갱단이 총격전을 벌이게 된다는 단순한 플롯을 가진 영화 <프리파이어>는 낡은 창고라는 단 하나의 공간과 13명의 등장인물(목소리까지 14명)만이 등장한 간결한 작품이다. 크리스(킬리언 머피), 프랭크(마이클 스마일리), 버니(엔조 실렌티), 스티브(샘 라일리)는 총을 사러 왔고, 버논(샬토 코플리)과 마틴(바부 치세가), 해리(잭 레이너), 고든(노아 테일러)은 총을 팔려하며, 오드(아미 해머)와 저스틴(브리 라슨)은 두 집단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중개인이다. 이들이 낡은 창고에 모여 총기 거래를 진행하던 와중에, 거래 전날 술과 약에 취한 스티브가 해리의 사촌을 공격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총격전이 벌어진다. 두 집단 사이에 총알이 오가던 중 어디선가 나타난 호위(패트릭 버긴)와 지미(마크 모네로)가 라이플로 그들을 저격하려 한다.



 <프리파이어>의 기본 세팅은 단순하다. 편 가르기는 단순하고, 총격전의 시발점이 되는 스티브와 해리의 갈등도 깔끔하게 등장하고, 총격전이 시작되자마자 모든 인물의 팔다리에 총알이 한두 방씩 박혀 모두가 땅을 기어 다니게 된다. 크리스, 프랭크, 스티브, 저스틴, 오드, 버논, 해리 등주요 캐릭터들의 성격 역시 총격전 이전의 장면들에서 확실하게 제시된다. 총격전이 시작하기 전까지 10~15분의 준비시간이 지나면, 남은 러닝타임 동안 질질 끄는 시간 없이 총알과 욕설과 대사가 난무하는 난장판이 펼쳐진다. <하이라이즈>의 과시적인, 혹은 늘어지는 디졸브 몽타주 플래시백 같은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상 리얼타임에 가깝게 진행되는 영화는 그저 난장판을 즐길 수 있도록 낡은 창고로 관객을 안내한다. <프리파이어>는 ‘재미’라는 키워드에 아주 충실한 장르영화다. 또한 영화는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요소들, 가령 전화라던가 총격전 이후에 창고를 찾은 리어리(톰 데이비스) 등의 요소들을 하나씩 제거해가면서 끊임없이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때문에 각자의 이유로 악인이며 서로에게 욕설을 담은 입과 총구를 겨누고 있는 등장인물들의 싸움과 그 결과에 오롯이 집중하게 된다.



 아쉬운 점이라면 여성 캐릭터인 저스틴과 흑인 캐릭터인 마틴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모두가 백인 남성인 <프리파이어>에서 두 인물만이 일종의 소수자성을 띠고 있다. 창고 속 인물들은 끊임없이 카메라의 프레임 속에 등장한다. 끊임없이 욕설을 포함한 대사를 뱉어대는 목소리들은 프레임 밖에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계속해서 드러낸다. 영화 속 백인 남성들은 잊을만하면 프레임 속으로 들어와 아직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린다. 그러나 저스틴과 마틴은 어느샌가 영화에서 사라진다. 저스틴과의 데이트를 약속한 크리스는 저스틴에게 계속해서 창고 밖으로 도망칠 것을 요구하고, 그녀가 어느 정도 현장에서 벗어난 순간 카메라는 자신의 프레임 속에 그녀를 담지 않는다. 마틴은 총격전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머리에 총격을 당한다. 그는 계속 그렇게 쓰러져 있다. 사실 아직 죽지 않았다며 일어나 상황을 반전시키는 듯했으나 다시 영화에서 퇴장당하고 만다. 저스틴은 영화의 후반부가 되어서야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다. 다른 인물들은 끊임없이 영화 속에 존재했다면, 저스틴과 마틴은 영화가 그들을 필요로 할 때만 프레임 속에 소환된다. 저스틴을 데이트 대상 그 이상도 이하로도 대하지 않는 크리스와 버논의 태도와 더불어, 여성과 흑인 캐릭터를 사용하는 벤 휘틀리의 방식에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어쨌든 <프리파이어>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90분의 짧은 러닝타임은 그것보다 훨씬 짧게 느껴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흘러간다. 두 차례 흘러나오는 존 덴버의 ‘Annie’s Song’은 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의 시대를 알려줌과 동시에 쓸데없는 센티멘탈함을 집어넣어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여성과 흑인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에서는 아쉬움이 남지만, 그것을 만회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는 작품이다. 상영관을 가득 메우고 있는 최근의 상업영화들이 이렇다 할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 와중에 극악의 상영 환경에 놓인 <프리파이어>는상영관이 적은 게 아쉬운 즐거움을 제공한다.

뉴저지, 패터슨 시에 패터슨(아담 드라이버)이 산다. 영화의 첫 장면, 패터슨은 아내 로라(골쉬프테 파라하니)와 함께 침대에서 아침을 맡는다. 그는 잠에서 깨어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시계를 차고, 옷을 입고, 시리얼을 먹은 뒤 아내와 강아지 마빈에게 인사하고 출근한다. 버스 드라이버로 일하는 그는 운행을 시작하기 전 잠시, 점심 도시락을 먹으러 폭포수 앞에 앉아 있는 잠시 동안 비밀노트에 시를 쓴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패터슨은 로라와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을 먹고, 마빈과 산책을 하고, 항상 가던 바에 들려 맥주를 마신다. 짐 자무쉬의 신작 <패터슨>은 패터슨의 단조롭고 반복되는 일상을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담아낸다. 패터슨은 그러한 일상 속에서 시를 쓴다.



 짐 자무쉬가 주목하는 것은 일상이다. 때문에 분위기와 스타일에 치중했던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나 경쾌하고 요란스럽게 스투지스의 이야기를 담아낸 다큐멘터리 <김미 데인저>와는 다른 느낌을 준다. 오히려 그의 최근작들 보다는 <영원한 휴가>나 <천국보다 낯선>과 같은 초기작들을 떠올리게 된다. 반복되는 하루는 쇼트의 순서까지 유사할 정도로 그 반복성을 강조한다. 하루는 언제나 패터슨과 로라가 함께 누워 있는 침대에서 시작하고, 패터슨의‘마법 알람시계’는 스마트폰도 알람시계도 없는 패터슨을 매일 6시 10~30분 사이에 깨운다. 패터슨은 착실하게 자신의 비밀노트에 시를 쓰고, 버스 승객들이 나누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항상 같은 자리에 마빈을 묶어둔 채 바로 들어가 똑같은 자리에 앉아 똑같은 맥주를 마신다. 영화는 중간중간 반복되는 일상들을 중첩시킨 디졸브 이미지를 보여준다. 운전하는 패터슨, 그의 손목에 있는 시계, 그가 항상 점심을 먹는 곳의 폭포, 언제나 시의 주인공이 되는 로라 등의 이미지가 뒤섞인다.



 반복되는 일상은 연못이나 호수에 고인 물과도 같다. 잔잔하고, 아침마다 보는 거울처럼 언제나 같은 곳을 비추고 있다. 패터슨이 점심을 먹는 곳은 그러한 물 위로 폭포수가 떨어지는 곳이다. 떨어지는 폭포는 항상 일정하게 같은 것을 비추고 있어야 할 물에 파장을 일으키고, 물거품을 만들어낸다. 패터슨이 버스를 운행하면서 영감을 얻는 것도 비슷하다. 언뜻 보기에 패터슨의 일상은 몇몇 쇼트들이 재활용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단조롭게 반복된다. 하지만 버스에서 들려오는 승객들의 대화가 다르고, 바에서 벌어지는 사랑에 대한 에버렛의 집착도 다르고, 로라가 하고 싶어 하는 일들도 다르고, 하물며 매일 아침 인사하는 동료 도니(리즈원 맨지)의 불평도 다르다. 패터슨의 시(극 중 패터슨이 쓰는 시는 론 파젯 시인의 시이다)는 작은 다름들에서 출발한다. 패터슨의 비밀노트는 그가 반복 속에서 발견한 사소한 다름들의 기록이다. 그가 쓰고, 그의 목소리로 읊어지는 단어들은 폭포수가 만들어낸 물거품과도 같다.



 영화 내내 패터슨에서 태어났거나, 살았거나, 그곳을 거쳐간 예술가들의 이름이 언급된다. 이름을 딴 공원이 있기도 한 루 코스텔로, 패터슨에서 공연을 한 것으로 언급되는 이기 팝, 뮤지션인 지미 비비노와 플로이드 비비노, 패터슨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프랭크 오하라,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등의 시인들…… 또한 패터슨에 살고 있는 사람들 역시 한 명의 예술가로서 등장한다. 패터슨은 시인이고, 그가 산책하면서 만나는 사람은 래퍼(우탱클랜의 메소드 맨이 아마추어 래퍼로 출연한다)이며, 바에서 소동을 피우는 에버렛(윌리엄 잭슨 하퍼)은 배우이고, 우연히 만나게 되는 일본인(나가세 마사토시) 또한 패터슨처럼 시인이다. 이러한 언급들은 짐 자무쉬는 118분의 러닝타임 동안 패터슨 시를 예술가의 도시처럼 그려내려 하는 것 같다. 아니, 패터슨 의사는 모두가 예술가이며 단조로운 풍경 속에서 발생하는 물거품들을 포착해내는 모두를 예술가라고, 시인이라고 부르려는 것 같다.



 영화의 마지막, 일요일에 패터슨은 산책을 나간다. 항상 마빈과 함께 집의 오른쪽으로 향하던 그는 영화에서 처음으로 왼쪽 방향으로 향한다. 카메라는 처음으로 화면의 왼쪽으로 향하는 트래킹 쇼트를 보여준다. 패터슨은 점심을 먹는 폭포수 앞 벤치에 앉는다. 그에게 다가온 일본인은 패터슨에 살았던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와 프랭크 오하라를 아냐고 묻는다. 일본인은 버스를 운행한다는 패터슨의 말에 그것이 시적이라고 답해준다. 잠시 동안 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둘은 인사를 하고 헤어진다. 일본인은 패터슨에게 빈 공책을 꺼낸다. 토요일의 한 사건으로 시 쓰는 것을 잠시 멈췄던 그는 익숙하게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뭔가를 써내려 가려한다. “아하!” 일본인은 패터슨과 대화를 나누다가 종종 감탄사를 내뱉는다. 그가 “아하!”라고 말하는 순간이 패터슨의 디졸브와 같은 순간으로 느껴진다. 다시 월요일로 돌아온 영화의 마지막 쇼트, 패터슨은 일어나 시계를 확인하고 손목에 시계를 찬다. 그러나 영화는 이전처럼 시계 속의 시간을 보여주지 않는다. 단순한 반복 속에서 드러나는 작은 변주의 순간들을 짐 자무쉬는 놓치지 않는다. <패터슨>은 그런 작은 순간들을 끄집어내고 조립한 작품이다. 패터슨의 시가 그러한 단어들의 배열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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