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2017' 카테고리의 글 목록 (2 Page) :: 영화 보는 영알못

<쥬만지>가 22년 만에 속편으로 돌아왔다. 제이크 캐스단이 연출을 맡은 <쥬만지: 새로운 세계>는 전작에서 주디(커스틴 던스트)와 피터(브래들리 피어스) 가 버렸던 쥬만지 보드게임을 누군가가 주웠던 1996년의 장면으로 시작한다. 쥬만지를 주운 사람은 알렉스(닉 조나스), 보드게임 대신 비디오 게임을 즐기는 그에 맞춰 쥬만지는 비디오 게임으로 변하고, 게임을 플레이 한 알렉스는 게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20여 년이 지나 방과 후 훈육 교육을 받던 스펜서(알렉스 울프), 배서니(매디슨 아이스먼), 프리지(서더라이스 블레인), 마사(모건 터너)가 학교의 창고에서 쥬만지 게임을 발견한다. 우연히 게임을 켠 그들은 게임 속 쥬만지 정글로 빨려 들어가고, 각자가 선택한 캐릭터인 브레이브스톤(드웨인 존슨), 셸리 오베론(잭 블랙), 무스 핀바(케빈 하트), 루비 라운드하우스(카렌 길런)가 되어 게임을 완료해야 한다.



 보드게임에서 비디오 게임으로 배경을 옮긴 <쥬만지: 새로운 세계>는 전작이 그랬듯 게임이라는 설정을 적극적으로 가져오려 한다. 가령 네 주인공이 선택한 아바타들은 각각의 강점과 약점이 있고, 손목에 있는 세 개의 줄은 게임을 시작할 때 주어지는 세 개의 목숨이며, 정글 속 사람들은 NPC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고, 네 명의 주인공은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듯 정글을 해쳐 나가야 한다. 영화가 지닌 기본적인 세팅은 좋다. 전작이 주사위를 활용한 보드게임이라는 설정을 영화의 전개 방식으로 확장하여 재미를 주었던 방식과 유사하다. 게임 속에서 남은 목숨을 활용하는 방법, 각자의 강점과 약점이 드러나고 활용되는 장면, 각 캐릭터는 현실의 인물이 선택한 아바타라는 개념 등은 영화 속에서 꾸준히 드러나면서 쥬만지라는 세계관이 게임임을 끝없이 납득시키려 한다.



 아쉬운 점은 비디오 게임이라는 형식과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모습 사이의 괴리감이다. 영화가 소재로 삼는 비디오 게임은 90년대에 상용화되었던 겜보이나 슈퍼패미콤 같은 게임기의 게임과 유사하다. 비디오 게임으로 변한 쥬만지는 CD가 아닌 팩으로 변하고, 알렉스는 그 팩을 게임기에 장착해 게임을 시작한다. 때문에 쥬만지 속에서 묘사되는 게임스러운 설정들은 죄다 그 시절의 느낌을 준다. 세 개뿐인 목숨, 투박한 폰트로 나타나는 각 캐릭터의 특성 등은 당시 유행하던 게임들을 연상시킨다. 동시에 게임 속으로 빨려 들어간 인물들이 겪는 상황들은 당시의 비디오 게임보다는 자유도가 높은 현재의 콘솔게임을 연상시킨다. 때문에 당시의 게임이 가지고 있던 제한성(세 개의 목숨, 강점과 약점 등)과 영화 속 인물들이 가지는 자유도 사이의 어딘가 괴리감이 느껴진다. 그간 비디오 게임 혹은 아케이드 게임을 영화의 형식으로 활용했던 영화들, 가령 <트론>이나 <스콧 필그림 vs. 더 월드>와 같은 작품들에 비해 <쥬만지: 새로운 세계>는 아쉽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어드벤처 액션 영화로써의 <쥬만지: 새로운 세계>는 무난하다. 드웨인 존슨, 케빈 하트 등의 배우들이 기존에 지닌 특성을 뒤집는 몇몇 장면들과 이를 활용한 유머들, 블록버스터 영화다운스케일 등이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오락영화적인 특성을 만족시켜준다. 이제는 고인이 된 로빈 윌리암스가 전작에서 맡았던 역할인 알란 패리쉬를 기념하기 위한 장면도 등장하면서 전작에 대한 헌사도 놓치지 않는다. 전작의 악역이었던 사냥꾼 반 펠트의 캐릭터가 이번엔 쥬만지 정글을 정복하려는 침략자 반 펠트(바비 카나베일)로 등장하기도 한다. 도리어 전작과 전혀 연관성이 없는 작품이라 생각했을 관객이라면, 영화의 첫 장면부터 등장하는 보드게임의 모습을 한 쥬만지의 등장에 반가움을 느낄지도 모른다.

항상 우주인 헬멧을 쓰고 다니는 아이가 있다. 유전적 요인으로 인해 태어나자마자 27번의 수술을 받아야 했고, 수술 끝에 삶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얼굴은 마치 화상을 입은 것처럼 변해버렸다. 소년의 이름은 어거스트 풀먼(제이콥 트램블레이), 그의 가족인 이자벨(오웬 윌슨), 이자벨(줄리아 로버츠), 비아(이자벨라 비도빅)는 그를 어기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집에서 홈스쿨을 하던 어기는 5학년을 맞아 학교에 가게 된다. 영화 <원더>는학교에 간 어기의 모습을 담아낸다. <월플라워>를연출했던 스티브 크보스키가 다시 한번 소설 원작의 성장영화를 연출했다. <월플라워>가 배우들의 매력에 영화의 완성도를 기댄 작품이었다면, <원더>는 좀 더 매끄럽게 연출된 작품이다. 북미에서 1억 불이 넘는 깜짝 흥행을 기록한 이유는 별 다른 것이 아니다. <원더>는 연말에 가족 혹은 가족 같은 지인들과 함께 극장을 찾기 좋은 예쁜 영화이다.



 스티븐 크보스키는 전작 <월플라워>에서 데이빗 보위나 뉴 오더 등의 음악 등을 적절히 사용하여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 <원더>에서는 음악을 넘어 다양한 서브컬처를 영화 속으로 끌어온다. 가령 미란다(다니엘 로즈 러셀)는 우주인 헬멧을 쓰고 다니는 어기를 데이빗 보위의 ‘Sapce Oddity’ 속 인물인 메이저 톰이라 부르고, 주인공인 어기는 아빠 네이트와 광선검 싸움을 즐기며 할로윈에 보바 펫 코스튬을 입고 싶어 하는 <스타워즈>의 광팬이며(실제로 어기를 연기한 제이콥 트램블레이가 <스타워즈>의 광팬으로 유명하다), 영화 속에 츄바카가 등장하기도 한다. 특히 주목할만한 장면은 어기와 잭(노아 주프)이 게임 [마인크래프트]를 통해 대화하는 장면이다. 게임 속 채팅을 통해 친구와 대화하고, 싸우고, 화해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릎을 탁 칠 수 있는 장면이 아닐까?



 영화는 의외로 어기 한 명에게만 집중된 구조가 아니다. 물론 영화를 시작하고 닫는 인물은 어기이며, 영화의 인물들은 어기를 중심으로 엮여있는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어기와 그의 누나인 비아, 그가 학교에서 처음으로 만난 친구 잭, 그리고 비아의 절친한 친구이자 어기에게도 친누나와 같았던 미란다가 각각 챕터를 배당받고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어기가 자신의 얼굴 때문에 겪는 감정을 풀어낸다면 비아는 어기를 보살피느라 가족 안에서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잭은 아이들만의 약육강식이 작용하는 학교 속에서 어기를 향해 생기는 우정을 털어놓고, 미란다는 자신이 비아에게 차갑게 대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풀어낸다. 결국 어기의 이야기로 촉발된 감정선은 그 주변의 인물들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따로 챕터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어기가 태어나고 석사 논문 과정을 멈췄던 이자벨이 다시 논문을 마무리 짓는 모습이나, 학교에서 어기를 괴롭히던 줄리안(브라이스 게이사르) 등의 뒷이야기가 부족하지 않게 등장하는 것도 <원더>가 더욱 만족스러운 영화였던 이야기이다. 결국 <원더>는 극 중 비아의 대사처럼 “어기는 태양이고 가족은 그 주변을 도는 행성과 같다”라는 표현으로 설명될 수 있다. 어기는 헬멧을 쓴 태양이고, 그의 주변을 도는 행성들은 가족을 넘어 친구들까지 확장된다. 마침내 어기는 헬멧을 쓸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그는 단지 헬멧을 벗은 것뿐이지만 밝게 빛나며 주변의 행성들과 함께한다. 사실 <해리포터>와 같은 많은 성장영화에서 보아온 이야기지만, <원더>는 행성들에게까지 빛을 비추며 그 빛을 카메라에 담는다. 때문에 영화 속에서 어기와 잭이 교내 과학 경진대회에 제출한 카메라와 유사한 과제물은 영화의 주제를 단박에 보여준다.



 예상보다 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쏟아내기에 미란다의 이야기는 하다 만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고, 아빠 네이트의 이야기는 따로 등장할 순간조차 없다. 이러한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모두에게 카메라를 돌리고자 한 <원더>의 선택은 수많은 감격스러운 순간들을 선사한다. 태양이 없으면 행성에 깃드는 햇빛도 없듯이, 한 사람의 밝은 빛은 주위의 모두를 환하게 비춘다. 단순히 어기의 이야기에만 집중한 통상적인 신파극이 될 수도 있었던 이야기지만, 모두에게 이야기가 있음을 드러내는 스티븐 크보스키의 선택은 <원더>를 조금 더 특별한 영화로 만들어준다. 분명히 <원더>는 <월플라워>처럼 강렬한 순간이 존재하거나 머릿속에 새겨질 매력이 있는 작품은 아니다. 대신 매끄럽게 만들어진 영화의 따듯하고 아름다운 순간들이 존재하는 영화이다. 만약 극장에서 따뜻한 눈물을 흘리고 싶은 연말이라면, 기왕 극장을 찾은 김에 <원더>를 관람하기를 추천한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관람하고 정리가 안 되어 이번 사사로운 영화리스트 상영을 통해 재관람했다. 영화의 설정은 단순하다. <신체강탈자의 침입>처럼 외계인들이 어느 인간들의 몸을 빼앗아 지구를 침략할 준비를 한다. 그 준비는 침략 대상인 인간들을 파악하기 위해 그들의 개념을 모으는 것이다. 침략자들은 사람들에게 이미지화된 개념을 빼앗는다. <산책하는 침략자>는 소유, 가족, 일, 자신, 타인 등의 개념이 사라지고 언어화되어 흩어졌기에 모두 백지화하고 개념에 대해 재고해야 한다고 말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침략자인 신지나 아마노는 개념을 빼앗긴 인간들을 보고 행복해 보이지 않느냐고 말한다. 인간들이 지니고 사는 개념들은 온갖 언어에 의해 해체되었고 변질되었다. 언어로써 설명될 수 없는 개념을 이미지로 떠올렸을 때 침략자들은 개념을 약탈해간다. 개념을 빼앗긴 인간은 그제야 비로소 언어로서 설명될 수 없는 개념의 굴레에서 해방된다. 영화 말미에 이르러 결국 침략이 시작된다. 나루미는 신지에게 사랑이라는 개념을 가져가 달라고 이야기한다. 신지는 사랑이라는 개념을 빼앗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침략은 멈춘다. 영화는 그로부터 두 달 뒤, 침략 이후 재건되는 어느 마을에서 마무리된다. 신지는 나루미가 입원한 병실을 찾는다. 앉아있는 둘은 서로 시선이 엇갈리게 앉아있다. 침략자들은 인간은 가질 수 없던 개념, 특히 사랑이라는 개념을 꽤나 즉각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한다(혹은 그런 것으로 보인다). 언어를 통해 어그러질 대로 어그러진 개념을 인간들은 조금씩 회복하고 있지만, 유독 사랑을 빼앗긴 나루미는 그렇지 못하다. 신지와 나루미의 엇갈린 시선은 다시 마주할 수 있을 것인가? 의사는 어떻게든 치료법을 찾을 것이라 말하지만 엇갈린 시선은 그 가능성마저 무시하는 것 같다. 어쩌면 <산책하는 침략자>의 결말은 사랑을 이야기하는 <우주전쟁>의 따뜻한 가족주의처럼 느껴질 여지도 있다. 그러나 나루미와 신지의 시선은 냉소적으로 그 가능성을 비웃는 기요시의 시선처럼 느껴진다. 

 처음으로 관람한 왕빙의 작품이다. 영화는 중국의 어느 마을에서 살아온 팡슈잉의 임종 직전 며칠간을 카메라에 담는다. 카메라는 클로즈업으로 죽어가는 팡슈잉의 멈춰있는 눈과 입을 담고 풀샷으로 방에 있는 가족들의 모습을 담는다. 카메라와 팡슈잉의 눈은 서로를 응시하다가도 가족에게로 방 밖으로 (팡슈잉은 TV를 응시하기도 한다) 눈을 돌린다. 여기서 가시화되는 것은 사람의 죽음 자체라기보다 죽은 사람을 둘러싼 사소하면서 거대한 관계들이다. 번갈아 가며 병간호를 하고 거의 모든 가족이 모여 임종을 지키며 종종 낚시를 하러 나가는 가족이라는 집합과 관계들. 팡슈잉의 죽음이라는 이슈는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관계로 확장되고, 그가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자식 된 도리라던가 장례절차 등을 이야기하는 가족들의 관계망 자체만이 점점 가시화된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결국 남게 되는 것은 생 속에 있는 것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연 카메라와 같은 매체는 죽음을 제대로 가시화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방식으로도 카메라가 도달할 수 없는 미지의 것이기에 정녕 불가능한 것인지 혹은 죽음 근처에 널려있는 관계 등을 조망하는 것으로 충분히 가시화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 중인 요양원에서 종종 보게 되는 죽음과 치매라는 질병, 침대나 휠체어에 몸을 맡기고 있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노인과 그들을 보러 집과 요양원을 오가는 가족들의 대비가 <미세스 팡> 안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활력과 비활력적 상태 사이에 존재하는 생과 사의 경계는 결국 살아남은 사람들에 의해 기록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죽음이라는 것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가지는 관계를 통해 기록되는 것이 아닐까? 결과적으로 <미세스 팡>이 가시화한 것은 더 이상 관계할 수 없는 망자와 그를 둘러싼 살아남은 자들 사이에서 활력을 가진 관계망의 강렬한 대비이다.

‘파괴왕’ 주호민의 업적이 추가됐다. 물론 이 리뷰를 쓰는 날이 개봉일(12월 20일)이기 때문에 아직 흥행까지 파괴되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건 분명하다. 주호민의 작품 중 처음으로 영화화된 <신과 함께: 죄와 벌>은 김용화 감독의 히트작인 <미녀는 괴로워>나 <국가대표>가 아닌 <미스터 고>에 가까운 작품이다. 김용화 감독은 한국영화 최초로 CG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던 전작에이어 저승이라는 가상의 세계를 영화의 배경으로 내세운다. 영화는 살인, 나태, 거짓, 불의, 배신, 폭력, 천륜이라는 일곱 가지 지옥에서의 재판을 통과해야 환생할 수 있는 소방관 자홍(차태현)과 이를 돕는 저승차사 강림(하정우), 해원맥(주지훈), 덕춘(김향기)의 이야기가 담긴, 3부로 구성된 원작의 ‘저승편’ 파트를 줄거리로 가져온다. 영화는 원작에서 ‘업무상의 과도한 음주로 인한 암’으로 사망해 저승으로 오게 된 자홍의 직업이 소방관으로 바뀌었고, 그의 가족과 연관된 이야기를 영화의 주요 소재로 끌어온다. 때문에 <신과 함께: 죄와 벌>은 원작이 지닌 시크함과 같은 미덕이 거세되고, 천만 관객을 목표로 일일이 각 시퀀스에 별점을 매겨가며 만든 것과 같은 각본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관객의 멱살을 잡고 왜 울지 않냐며 강요하는 작품이다. 영화를 보는 139분의 시간 동안 내 눈에서 눈물이 나올 때까지 뺨을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주호민 작가의 출중한 원작을 싸구려 신파로 각색하는 동안 작업실에 저승귀가 나타나지는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런저런 문제점이 있는 작품이지만, 무엇보다 각본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다. <신과 함께: 죄와 벌>의 각본은 싸구려 신파다. <국제시장>, <해운대>로 대표되는 JK필름의 영화들이나 <7번 방의 선물>과 같은, 어떻게든 관객을 웃기고 울려보겠다고 온갖 스펙터클과 다양한 캐스팅을 동원하면서, 서브플롯은 엉망이고 내러티브의 구심점은 어떻게든 눈물을 뽑아보겠다는 후반부의 몰려있는 각본이다. 차태현, 하정우, 주지훈, 김향기를 비롯해 도경수, 김동욱, 오달수, 임원희, 이정재, 김수안, 이준혁, 장광 등 수많은 배우들이 출연하지만, 이러한 각본 밑에서는 모두가 발연기를 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대사가 어색하고 납작한 캐릭터들의 집합이기에 멀티캐스팅에서 흔히 기대할 수 있는 앙상블 연기 같은 미덕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어색하게 어머니만을 부르짖는 차태현과, 조금 이상한 대사처리를 보여주는 하정우, 섬세하게 캐릭터를 다루는 데 실패해 울기만 하는 도경수, 역시 적당히 만들어낸 모습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김동욱, ‘판관이 뭐 저따구야’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재미없는 오달수와 임원희의 캐릭터 등 어색하고 지루한 캐릭터만이 영화 속에 가득하다. 여기에 눈물을 짜내기 위한 설정들, 가령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으로 대상화된 어머니, ‘이등병의 편지’를이상하게 개사해서 부르는 모든 장면(과연 관심병사가 이 따위 가사를 듣고 좋아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등은 끔찍하기 짝이 없다.



 촬영 역시 각본만큼이나 암담하다. 비가 내리는 하늘에서 아이를 구조하다 건물에서 추락하는 자홍까지 내려오는 영화의 첫 장면은 경박하다 못해 촌스럽다. CG를 대거 사용한 대부분의 영화가 유사한 비판을 받지만, 이렇게 역동적으로 카메라가 움직이는 장면에서 추락하는 자홍의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더더욱 촌스럽게만 느껴진다. <신과 함께” 죄와 벌>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액션 시퀀스들이 이와 유사하다. 사실상 액션이라고 부를만한 합이 많지 않기도 하지만, 이를 담는 카메라는 너무나도 가볍다. 가령 최근 MCU의 영화나 J.J. 에이브람스의 영화 등에서 종종 등장하는 풀샷에서 줌인하여 어떤 대상에게 집중하는 방식의 촬영(<스타트렉>,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의 탈출 장면이나 <옥자>의 절벽 장면과 같은)이 <신과 함께: 죄와 벌>에서도 등장한다. 문제는 이 장면들이 어떤 세련됨을 지향하고 있지만, 줌인 이후 대상을 화면의 중심에 놓고 따라간다기 보단 이상하게 다른 방향으로 카메라가 움직이면서 마치 더블 줌인과 같은 괴상한 기법이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상한 촬영들로 가득한 지옥귀와의 싸움을 포함해 모바일 게임 CF와 같은 강림과 원귀의 추격전, 자연재해처럼 표현되는 지옥의 몇몇 장면 등은 소위 ‘블록버스터 판타지 액션 대작’ 같은 타이틀이 붙기엔 어색하다.



 여러모로 단점투성이인 영화이지만, 김용화 감독의 앞선 영화(특히 <미스터 고>)들과 차별화되는 장점은 존재한다. 이제 그린 스크린 앞에서 연기한 한국의 배우들이 CG로 그려진 배경에 어색하지 않게 자리한다. 물론 괴상하게 움직이는 카메라 앞에서 모든 게 이상해지기도 하지만, 좀 더 철저한 각본과 앞으로 쌓일 노하우가 더해진다면 괜찮은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극 중에서 묘사되는 일곱 지옥의 모습이나 원귀의 얼굴과 같은 부분의 CG는 흔히 말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는다. 앞으로 충무로가 해결해야 될 것은 이를 담아내는 노하우를 쌓는 것이다. 어쨌거나 CG를 비롯한 디지털 특수효과는 영화를 위한 수많은 기법 중 한 가지이다. 누군가는 이를 이용해 실험을 하기도 하고, 고전적인 대서사시를 새롭게 재해석하기도 한다. 결국 영화에 대한 이해가 높은 사람이,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이 좋은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1부와 2부를 합쳐 400억에 가까운 제작비가 투입된 <신과 함께>는 영화를 잘 다루는 사람의 작품이 아니다. 여러모로 천만 관객에게 팔리기를 기대하며 만든, 지루하고 재미없으며 이상한 영화 한 편일 뿐이다. 좀 더 좋은 이야기꾼에게 이러한 대작을 만들 기회가 돌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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