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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너 루스벨트의 이야기를 뮤지컬로 만들어 성공하길 바랬으나 평단의 혹평만을 듣고 좌절한 브로드웨이 스타 디디 앨런(메릴 스트립)과 베리 글릭먼(제임스 코든)은 스스로를 홍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사회적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들을 돕기로 한다. 뮤지컬 [시카고]에서 매번 코러스만 하는 배우 앤지(니콜 키드먼)가 트위터에서 인디애나 주의 시골 마을에 사는 레즈비언 소녀 에마(조 엘런 펠먼)의 사연을 발견하고, 왕년의 시트콤 스타 트렌트(앤드류 라넬스)까지 합세해 인디애나로 향한다. 에마는 자신의 여자친구 알리사(아리나아 데보스)와 함께 프롬에 가는 것이 꿈이었으나, 교장 톰(키건 마이클 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는 프롬에 올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프롬 자체를 취소해버린 그린 부인(케리 워싱턴)의 학부모회에 의해 가로막힌다. 학부모회, 학생회, 에마와 교장 톰이 참석한 회의장에 난입한 디디의 일행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뉴욕 셀럽인 자신들이 이를 바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글리>부터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포즈>, <래치드>, <더 폴리티션> 등 수많은 TV쇼의 쇼러너로 활약한 라이언 머피의 연출작 <더 프롬>은 매끈하고 안전한 상업적 감각 속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설파하는 뮤지컬 영화다. 커밍아웃한 게이인 라이언 머피의 고향인 인디애나를 배경으로 삼은 이 영화는 라이언 머피 자신의 고향과 유년시절에 메시지를 보내는 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도 자신을 투영한 듯한 게이 캐릭터 베리와 게이 아이콘 메릴 스트립, 그리고 니콜 키드먼과 키건 마이클 키, 케리 워싱턴과 같은 스타들을 대동한 채 뉴욕과 할리우드에서 한없이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 올린 뒤 금의환향하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 초반 네 명의 브로드웨이 배우들은 뉴욕의 셀럽인 자신들의 긍정적인 영향력을 노래하며 인디애나 촌놈들에게 정치적 올바름을 알려주고 촌놈들 사이에 둘러 쌓인 소녀를 위험에서 구해내겠다고 말한다. 나는 지극히 시혜적인 시각에서 시작한 이 영화가 후반부에 다가갈수록 그러한 입장을 내려놓을 것이라 기대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이루어진다. 베리는 고향을 마주하고 디디는 스타로서의 자신을 일정 부분 내려놓으며, 트렌트는 새로운 길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는 나르시시스트라 비판받았던 이들의 시혜적인 태도를 뒤바꾸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더욱 견고한 나르시시스트가 된다. 이들의 난입은 어쨌든 성공으로 향했으며, 자신의 방식을 찾고자 했던 에마의 길은 이들의 자기 계발을 돕는 밑거름이 될 뿐이다. 이들의 활약은 화려해 보이지만 무색무취의 영화 속 뮤지컬 시퀀스들과 다른 바 없다.

 

 이러한 방향은 메릴 스트립과 같은 대형 스타이자 아이콘을 활용하기 위한 것에 그칠 뿐이다. 브로드웨이 스타와 인디애나 소도시에 레즈비언 소녀 사이의 유대는 뻔하고 도식적이며, 이들의 난입은 에마가 톰과 같은 지지자들의 도움과 노력을 통해 스스로 얻어낼 수 있었던 성취를 약탈한다. 차라리 브로드웨이 스타들이 등장하는 파트가 모조리 빠진, 온전히 에마의 이야기로 진행되는 뮤지컬 영화였다면 더욱 깔끔하고 집중력 있는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131분의 러닝타임 내내 에마는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디디와 베리는 주인공의 위치에서 내려올 것이라 선언하지만, 영화의 마지막까지 주인공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그들이다. 때문에 <더 프롬>은 아이콘으로서 배우들이 지닌 이미지를 안전하게 끌어와 설교하고 훈계하는, 공익적인 이야기를 가장 비-공익적인 방식으로 전달하는 재수 없는 영화가 되었다.

 

 영화의 시작은 이렇다. ‘내언니전지현’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는 박윤진 감독은 넥슨의 클래식 RPG 게임 [일랜시아]를 10여 년 동안 하고 있다. 1999년 서비스를 시작한 [일랜시아]는 이제 운영진마저 떠나버린 망겜이 되었다. 박윤진 감독은 자신처럼 오랜 시간 [일랜시아]를 플레이하는 길드원과 유저들에게, 운영진도 없고 각종 매크로와 버그가 판치는, 영화 한 편의 파일보다 용량이 작은 이 게임을 왜 하는지 묻기 시작한다. 이는 감독이 자신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인디다큐페스티발을 시작으로 여러 영화제들에서 공개된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이러한 영화의 출발점을 확실하게 담고 있었다. 우리는 왜 아직도 [일랜시아]를 붙잡고 있는가? 현실이 너무 힘들어서? 가상공간에서 모종의 유토피아를 발견했기 때문에? 게임 안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어서? 박윤진 감독이 인터뷰한 유저들의 대답은 이를 반쯤 반박하고 반쯤 긍정한다. [일랜시아]가 만들어낸 공간은 현실의 도피처임과 동시에 또 다른 현실이고, 아름다운 유토피아의 단면을 만난 것만 같지만 되려 그런 것은 없음을 어느 순간 드러내고, 누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선 유저들이 만들어낸 비공식적 루트를 철저하게 따라가야 하는, 그런 모순의 공간이다.

 

 러닝타임 71분의 영화제 버전보다 15분가량의 분량이 추가된 개봉 버전은 약간 다른 길을 간다. 전자가 위의 질문을 충실하게 따라간다면, [일랜시아]를 ‘망겜’이라 못 박는 게임 유튜버들의 영상으로 시작한 개봉 버전은 영화의 홍보 카피처럼 “16년 차 고인물, 망겜을 구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다”라는 내러티브에 조금 더 무게가 실려 있다. 그렇다고 영화 자체가 망가졌고 실망스럽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영화의 강조점이 조금 바뀌었다. 영화제 버전의 경우 [일랜시아]라는 게임 속에서 사람들이 새롭게 만들어낸 규칙, 즉 매크로를 통해 [일랜시아]의 규칙을 어기는 것을 새로운 규칙으로 삼는 상황에 집중한다. 영화제 버전 후반부에 등장하는 ‘팅버그’ 사건은 게임의 규칙을 과하게 어긴 누군가의 등장 때문에 벌어진 것이며, 넥슨의 개입으로 일단락된 사건은 [일랜시아]에 남은 이들의 규칙이 모두가 공평하게 적당히 [일랜시아]의 규칙을 어긴다는 것임을 확실히 알려준다. 그리고 이러한 규칙을 공유하는 이들, 더 이상 매크로 없이는 플레이할 수 없는 게임을 붙잡고 그 시간을 함께 견뎌내는 이들은 그 안에서 독특한 자생적 커뮤니티를 구성하고 있다. 이들은 힘을 합쳐 규칙을 세우고 무엇인가를 해내기 위해 모인, 전통적인 의미의 공동체가 아니다. 이들의 유대감은 매크로가 돌아가는 시간에 대한 감각을 공유하고, 정작 매크로를 돌리지 않는 시간에는 어딘가 무의미한 시간(가령 채팅으로 노래를 부른다던가, 게임 내 절벽에서 자살한다던가)을 함께 보냄으로써 발생한다. 이는 온라인 게임, 특히 MMORPG라는 장르가 제공할 것이라 기대되는 유토피아적 공동체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즉, 이들은 소위 ‘현실’이라는 곳과 [일랜시아]라는 가상공간 사이를 오가며 일종의 ‘죽은 시간’을 공유하고, 그럼으로써 발생된 유대감을 유지하기 위해 [일랜시아]에 접속한다. 내언니전지현의 길드원들이 엠티를 떠나 촬영한 사진과 게임 내에서 모여 찍은 사진이 오버랩되는 장면은, 이들이 어느 한쪽의 세계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두 세계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개봉 버전에는 이러한 공동체에 대한 언급보단 ‘디지털 노스탤지어’라 부를 수 있는 것에 더욱 집중한다. 새로 추가된 것은 영화제에서의 상영과정 및 넥슨에서 주최한 유저간담회, 그리고 [일랜시아]의 개발자 ‘아레수’와의 만남이다. 한국 게임산업의 초기부터 활동하던 개발자인 그는 [바람의 나라]를 플레이하며 만난 이들과 짧은 유대감을 나눈 일화를 공개한다. 그러고 보니 <내언니전지현과 나>를 관람한 이들의 감상평은 대부분 추억과 연결되어 있다. 소위 ‘밀레니얼 세대’라 불리는 90년대 생들에게 [일랜시아]나 [바람의 나라]를 비롯한 여러 온라인 게임은 추억의 공간이다. 길드원들이 엠티를 위해 찾은 펜션의 직원이 “[일랜시아]가 아직도 있어요?”라고 말하며 반갑고 신기하다는 듯이 게임 내 몇몇 요소를 길드원들과 공유하는 모습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메이플스토리]와 같은 게임이 여전히 인기를 유지하고 있지만, 게임의 과거 모습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지점에서 [일랜시아]는 게임을 플레이했었던 이들에게 존재를 잊고 있었던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오랜만에 방문한 것만 같은 느낌을 제공한다. 

 

 이런 노스탤지어는 최근 몇 년간 공개된 여러 영화들에서도 드러난다. 자신의 이야기를 기술하기 위해 홈비디오 등을 꺼내오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버블 패밀리>, <94’ 비디오앨범>, <ㅅㄹ, ㅅㄹ, ㅅㅇ>, 혹은 어떤 기록물을 발견함으로써 자신의 과거를 톺아보는 <8mm>와 같은 작품들. 다만 이러한 영화들은 비디오 테이프와 같은 특정한 기록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반면 <내언니전지현과 나>와 같은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일랜시아]라는 특정한 기표가 가져오는 노스탤지어의 연상작용이다. 이 영화와 관련된 인터뷰 영상이나 예고편 등을 유튜브에서 찾아보면, 대부분의 댓글은 각자의 추억을 늘어놓고 있다. <내언니전지현과 나>의 개봉 버전은 이 부분에 보다 집중한다. 동세대 관객들에겐 자신의 추억을 꺼내어 보길 요청하고, 위 세대 관객들에겐 우리에게 이러한 추억이 존재하며 그것을 간직하고 싶다고 말한다. 때문에 새로 추가된 영화의 후반부는 우리의 노스탤지어를 앗아가지 말아 달라는 부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이를 부정적으로 보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게임 내에서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모종의 유토피아로 여길 수 있는 여지를 많이 주고 있다는 점에서 아쉽게 느껴진다. 영화제 버전에서 내언니전지현의 동료 유저 ‘하루히로’가 아이템 사기를 당하고 게임을 떠나기 전 작별인사를 하는 장면이나, 공무원 시험 준비를 위해 로그아웃하는 레렐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이곳이 유토피아일 수 없음을 두 장면은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 두 장면은 개봉 버전에서도 그대로 등장하지만, [일랜시아]라는 망겜에 사람들이 왜 남아 있는지에 집중하기보단, 그러한 망겜이 지닌 추억과 그것을 보존하기 위한 여정으로 영화가 기능하기에 두 사람의 사라짐은 그저 게임을 떠난 누군가의 등장 정도로만 일축된다. 개봉 버전이 지닌 나름의 장점, 가령 [일랜시아]를 비롯한 온라인 MMORPG 게임에 무지한 사람이 보기에도 부담이 없고 친절해졌으며 확실한 내러티브를 지녔다는 점이 있지만, 영화 이후의 수많은 고민을 던져준다는 매력이 다소 사라졌다는 점에서 아쉽다. 

 

 그럼에도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올해 공개된 여러 한국영화 중에서 중요한 위치에 놓일 것이다. 이는 단순히 국내 최초로 게이머가 연출 및 제작한 다큐멘터리가 극장에 개봉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레디 플레이어 원>과 같은 세계는 다른 방식으로 도래했고,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그것을 흥미롭게 짚어보는 영화 중 하나다. [일랜시아]는 도피처가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사회실험이 진행되는 공간이며, 인터넷이 민주주의적 유토피아가 될 것이라 예언했던 이들이 말이 틀렸음을 다시 한번 증명하는 것이며, 그럼에도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가 등장하는 곳이며, 현실과 가상공간을 평생 오가며 살아야 할 첫 세대의 경험담이다. 그것만으로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존재감 없는 왕따 고등학생 밀리(캐서린 뉴튼)의 동네에 전설처럼 전해 내려 오던 연쇄살인마 블리스필드 도살자(빈스 본)가 나타난다. 동네에 하나뿐인 고등학교의 홈커밍 파티가 예정된 13일의 금요일, 도살자가 몇몇 고등학생을 살해하며 동네엔 위기감이 맴돈다. 그러던 중 도살자가 집으로 돌아가던 밀리를 공격하고, 도살자가 들고 있던 고대의 단검의 힘으로 둘의 몸이 바뀐다. 도살자의 몸을 한 밀리는 자신의 유일한 두 친구 조슈아(미샤 오쉐로비치), 나일라(셀레스트 오코너)를 설득해 자신의 몸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는 도살자를 찾아 몸을 되찾고자 한다.

 <해피 데스데이> 연작으로 나름의 상업적 성공을 거뒀던 크리스토퍼 랭던이 블룸하우스와 함께 내놓은 신작 <프리키 데스데이>는 그의 전작들에서 볼 수 있었던 재기 발랄함이 살아 있는 작품이다. 도살자의 가면을 포함해 도살자와 밀리가 처음 대면하던 장면은 존 카펜터의 <할로윈>을, 13일의 금요일을 향하 카운트되는 자막은 대놓고 <13일의 금요일>의 제목 폰트를 차용한다. 더 나아가 <스크림>, <죽여줘! 제니퍼>, 2018년 버전의 <할로윈> 등의 영향이 영화 곳곳에서 드러난다. 다시 말해 <프리키 데스데이>는 <할로윈>의 마이클 마이어스와 <13일의 금요일>의 제이슨 부하스를 적당히 뒤섞어 놓은 살인마와 몸이 뒤바뀌는, 그러면서 여러 슬래셔 장르의 대표적인 장면들을 차용하는 작품이다. 여기서 주인공의 두 친구를 백인 게이 남성과 흑인 여성으로 설정해, 기존 슬레셔 영화에서 초반에 사망할 법한 인물들로 설정하고 그것을 대사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슬래셔 장르의 패러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쉽게도 영화의 미덕은 이 정도에서 그친다. 블룸하우스의 2018년 <할로윈>이 슬래셔 장르의 고전을 지금에 걸맞게 여성중심적 이야기로 리부트 하려다 결국 장르의 관습 안에서 죽어가는 인물들을 착취하는 영화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프리키 데스데이> 또한 표면적으로는 슬래셔라는 오래된 하위장르의 성격을 패러디함으로써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할로윈>이 시도했던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팝콘무비로서의 매력은 있지만, <할로윈>과 마찬가지로 현재에 걸맞은 방식의 슬래셔를 선보이려다 결국 장르의 전통으로 회귀하거나 새롭게 주인공으로 내세운 캐릭터(성소수자, 여성, 유색인종)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그것들 대부분은 각 캐릭터가 대표하는 것들의 긍정적인 스테레오 타입에 불과할 뿐이며, 코미디의 소재로 활용되기만 한다. 물론 일탈하며 가족을 등한시하던 여성 주인공을 징벌하듯 살해당함을 반복하게 한 <해피 데스데이>나 이도 저도 되지 못한 <해피 데스데이 2>보다는 한발 나아간다. 육체적 강함이 아닌 다른 방식의 강함을 이야기하고, 그것이 장르적 쾌감으로 발현되는 엔딩은 크리스토퍼 랭던의 두 전작이나 <할로윈>보다는 조금이라도 괜찮은 지점이다. 다만 그곳까지 나아감에 있어 이야기에 군더더기가 많고, 결국 백인 중산층 여성이 아닌 다른 정체성의 소수자들은 주변적 존재로서 기능할 뿐이라는 점에서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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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가족’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가족은 무엇일까? 결혼, 출산, 입양 등으로 묶인 혈연 및 주민등록 상의 집단일까, 같은 집에 살아가는 동거인들을 통칭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특정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의 집단일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가족은 엄마, 아빠 자녀, 여기에 조부모 정도가 추가된 형태일 것이다. 혹은 막연하게 명절에 모이는 사람들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어쨌든 그것은 주로 혈연을 통해 엮인, 소위 ‘정상가족’이라는 틀에서 누군가가 추가된 형태의 가족일 뿐이다. 이러한 가족은 상당히 우연적으로 구성된다. 우연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은 결혼을 통해 가족으로 결합한 두 사람일 뿐, 배우자의 가족이 내 가족이 된다던가 태어난 아이의 부모님이 자신들이라던가 하는 것은 당사자의 의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정상가족이라는 틀은 생각보다 많은 우연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과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한부모 가정일 수도, 자녀가 아주 많은 가정일 수도, 조부모와 부모의 형제자매까지 포괄하는 대가족일 수도, 혼자 혹은 결혼을 통해 결합한 것이 아닌 이들의 집합일 수도 있다.

 <애비규환>은 토일(정수정)의 여정을 따라 가족이라는 단위가 굉장히 불균질 한 것임을 상기시키는 영화다. 대학생 토일은 자신이 과외를 하는 고등학생 호훈(신재휘)과 연애 중이다. 그러던 중 그는 임신하게 되고, 임신 5개월 차가 됐을 때 엄마 선명(장혜진)과 새아빠 태효(최덕문) 앞에서 그 사실을 이야기하고, 호훈과 결혼하기 전 자신의 친아빠 환규(이해영)를 찾아 대구로 떠난다. 그러던 중 호훈이 잠적한다. 토일은 부모님과 친아빠, 그리고 호훈의 부모님(강말금, 남문철)과 함께 호훈을 찾아 나선다. 영화 초반의 토일은 자신이 자신의 결혼과 출산을 계획대로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것은 토일의 통제 밖에 있는 것이다. 선명이 어린 토일의 동의 없이 환규와 이혼하고 태효와 재혼한 것이, 토일에게는 마치 갑자기 아빠가 사라지고 아저씨가 나타난 것으로 느껴졌던 것처럼 말이다. 가족(토일의 경우엔 예비 가족과 전(前) 가족을 포함하는)은 어쨌든 타인이고, 각자의 관계성도 다르다. <애비규환>은 이들을 한 곳에 의도적으로 모아 두고 그 난장판을 스케치하는 작품에 가깝다.

 인물이 4명 이상 모이는 장면들은 그 난장판을 구현한다. 토일과 호훈이 선명과 태효에게 임신 사실을 밝히는 영화의 초반부부터, 토일의 집에 찾아온 환규가 선명과 태효와 대면하는 장면, 토일과 그의 세 부모님, 호훈과 그의 부모님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이는 영화의 클라이맥스까지, 모든 것은 난장판이다. 이 난장판에서 관습적인 대화 장면을 찍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화의 대상은 산발적이고, 카메라는 인물들 곳곳으로 향하는 대화의 방향을 쫓을 뿐이다. 때문에 종종 대화 장면이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대체로 자신의 계획이 흔들리는 토일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기에 납득할 수 있는 방식이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토일과 세 부모님이 호훈의 배드민턴 클럽 사람들과 대면하는 장면이다. 꽤 긴 트래킹 롱테이크 숏으로 이 장면이 촬영되었는데, 네 캐릭터의 성격은 물론 그들 사이의 관계성이 카메라의 움직임을 따라 드러나는 깔끔한 장면이었다. 

 어쨌든 토일의 여정은 결국 가족을 계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으로 향한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가족은 계획할 수 없는 것이고, 우연적인 것이고,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토일의 엄마 선명이 그랬고, 두 아빠가 그랬고, 토일과 호훈도 그렇게 될 것이다. 가족을 이룬다는 것은 불확실한 관계 속으로 자신을 투신하는 것이다. 결혼에 필요한 확신은 그것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느냐에 대한 것이지, 그 상대와의 백년해로에 대한 확신이 아님을 이 영화는 주장한다. 대신 준비해야 하는 것은 새로운 상황에서 나의 선택권을 유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며, <애비규환>은 토일이 그것을 선택해 나아가는 여정이다. 

 태풍이 몰아치던 날 세진(노정의)이라는 소녀가 실종된다. 경찰은 증인보호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외딴섬에 머무르고 있던 그가 유서를 남겼다는 점을 들어 사건을 자살로 결론 내리려 한다. 출동 중 교통사고와 이혼 소송 등의 문제로 인해 휴직 중이던 경찰 현수(김혜수)는 복직을 위한 준비로 이 사건의 최종 보고서를 맡는다. 사건 조사를 위해 세진이 머무르던 섬에 내려간 현수는 세진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순천댁(이정은)을 통해 그의 행적을 쫓는다. 그 과정에서 현수는 세진의 마지막 행적들이 자신의 삶과 닮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박지완 감독의 장편 데뷔작 <내가 죽던 날>은 한 소녀의 죽음에 얽힌 음모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는 경찰이라는 추리 장르의 익숙한 전개를 따라가는 듯하다. 세진은 아빠가 저지른 범죄의 거의 유일한 증인이면서, 다른 사람들과 격리되어 생활하고 있는 사람이다. 때문에 현수가 세진의 마지막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은 마치 세진이 엮인 아버지의 범죄에 대해 파고드는 것처럼 전개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장르적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현수가 세진의 행적을 쫓으며 순천댁 등의 인물들을 만나고 탐문수사를 벌이는 과정은 영화 밖의 매체를 포괄하는 추리 장르의 익숙한 방식을 따른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사건의 전말이나 범죄의 방식이 아니다. 영화는 그것 대신 현수가 CCTV 영상에 담긴 세진의 얼굴 위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는 모습을 담는다. 즉 현수가 쫓는 것은 세진임과 동시에 세진 위에 덧씌운 자신이다. 물론 두 사람의 처지는 다르다. 이혼 소송 중인 현수는 남편이 불륜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자신을 바람피운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벌어진 교통사고로 한쪽 팔이 일시적으로 마비되기도 했다. 직장과 직장이 아닌 곳, 동료와 동료가 아닌 이들 모두가 현수를 어떤 식으로든 재단한다. 그것은 조언과 비난 둘 모두에 해당한다. 세진도 마찬가지다. 아빠의 범죄 사실이 담긴 장부를 경찰에게 직접 전달했음에도 누군가는 그와 거리를 두고, 누군가는 과도하게 가까이 접근한다. 현수가 CCTV 영상 속 세진을 보고 자신의 얼굴을 투영한 것은,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해 있지만 둘이 공유하는 고통의 종류가 유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현수는 그 누구도 쉬이 눈치채지 못한 세진의 아픔을 알아차린다.

 여기서 순천댁은 둘 사이를 매개하는 존재다. 남동생이 죽고 혼수상태의 조카를 돌보고 있는 그 또한 어떤 아픔을 간직한 존재다. 그가 농약을 마시고 식도가 타버려 말을 못 하게 된 사람이라는 설정은 그 고통을 이정은이라는 배우의 연기로 육화하려는 설정이다. 순천댁은 세진의 아픔을 이해한다. 수사를 위해 섬을 찾은 현수를 경계하지만 이내 현수가 어떤 것을 하려는 지 알아차린다. 순천댁과 세진의 연대, 현수가 느끼는 세진과의 동질감은 언어로 닿을 수 없는 어떤 감정들의 교환으로 표현된다. 세 배우의 호연은 <내가 죽던 날>이라는 영화의 제목이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세 사람의 고통과 연대를 통한 극복이라는 주제를 훌륭하게 전달한다.

 아쉬운 것은 영화의 만듦새이다. 이야기의 전개가 느린 영화는 아니지만, 현수가 탐문수사에 나서며 세진뿐 아니라 현수의 과거까지 등장하는 구조를 취하기에 캐릭터의 감정선은 다소 느리게 전개된다. 하지만 편집은 종종 감정에 앞서는 듯 조급하다. 몇몇 대화 장면에서 사방으로 움직이는 카메라와 그것을 열심히 따라잡는 컷들은 그저 산만하기만 하다. 또한 캐릭터의 감정을 설명하는 내레이션은 배우들의 연기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되는 것을 도리어 망쳐버린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등의 다른 한국영화들처럼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촬영된 영상에 강황가루를 뿌려 놓은 듯이 누런 톤으로 색보정을 하는 것 또한 영화 전체의 톤을 영화의 마지막에서 망쳐버린다. 배우들의 호연과 감정에 초점을 맞춘 추리극이라는 서사는 좋았지만, 이를 뒷받침해줄 연출과 여러 기술적인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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