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2020' 카테고리의 글 목록 (4 Page) :: 영화 보는 영알못

 최연소로 맥아더상을 수상했으며, 남초인 건축업계의 몇 안 되는 여성으로 이름을 알리던 천재 건축가 버나뎃(케이트 블란쳇)은 북미지역 건축의 메카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시애틀에서 살고 있다. 20년 간 새로운 작업을 하지 못한 채 딸 비(엠마 넬슨),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일하는 남편 엘지(빌리 크루덥)와 함께 살고 있는 그는 항상 신경을 긁는 옆집의 오드리(크리스틴 위그)와 대립하고 있기도 하다. 버나뎃은 자신을 돌보는 일보다 딸을 먼저 생각하고, 오랜 기간 작업을 하지 못하게 된 사건의 트라우마 덕에 대인기피증과 편집증에 가까운 상태에 놓였으며, 집에 필요한 도구들도 델리에 위치한 온라인 가사도우미 서비스를 통해 해결한다. 그러던 중 딸의 소원인 남극 여행을 함께 가기로 하고, 여행에 대한 불안으로 시작된 스트레스와 여러 사건 때문에 점점 일이 꼬인다. 버나뎃은 결국 가출을 택한다. 마리아 샘플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어디갔어, 버나뎃>은 <보이후드>, <스쿨 오브 락>의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연출했다.

 

 링클레이터의 전작 중 굳이 두 편을 언급한 것은, 그가 지금까지 연출해온 영화들을 크게 두 계열로 나눌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슬래커>부터 <멍하고 혼돈스러운>, <비포> 3부작, <보이후드>, <에브리바디 원츠 썸!!>까지 일정한 기간 안의 시간을 두고 변화하는 육체와 감정을 쫓는 작품들, 그리고 <스쿨 오브 락>, <배드 뉴스 베어즈>, <버니>, <라스트 플래그 플라잉>처럼 코미디를 겸비한 박스오피스를 겨냥한 듯한 ‘할리우드’ 영화들. 물론 서른 편이 넘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양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며, 대부분의 연출작을 직접 제작하고 각본을 썼다는 점에서 이 구분은 거의 무용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굳이 구분해보는 것은, <어디갔어, 버나뎃>이 전형적이며 딱히 모난 데 없는 영화라는 점 때문이다. 

 

 <어디갔어, 버나뎃>은 매끄럽다. 감정적, 정신적 고저를 온몸으로 소화하는 케이트 블란쳇의 원맨쇼는 물론, 빌리 크루덥이나 크리스틴 위그 같은 중견 배우들, 이번이 첫 장편영화인 엠마 넬슨이나 짧지만 중후한 연기를 선보이는 로렌스 피시번 등 배우들의 앙상블도 훌륭하다. 남극은 아니지만 그린란드의 극지방에서 촬영한 남극 장면, 딱히 흠잡을 데 없는 각본과 리듬감도 적당한 즐거움도 준다. 어떤 의미에선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정서를 반대의 방식으로 풀어낸 느낌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거기서 멈춘다. 버나뎃이 겪는 사건들의 규모를 키우기 위해 FBI까지 동원되지만 극을 즐겁게 전개하기 위한 수단에 그치고, 배우들의 연기가 흥미롭게 맞붙는 장면들도 있지만 다소 관성적으로 느껴지는 장면들도 곳곳에서 눈에 띈다. 때문에 이 영화는 결국 특별한 야심이 느껴지지 않는, 익숙하고 평범하지만 2시간이 아깝진 않은, ‘힐링’이나 ‘자기 계발’ 같은 키워드에 열광할 이들이 좋아할 만한, 적당한 작품이 되었다.

 어렸을 적 수족관에 갔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있는 중학생 루카(아시다 미나)는 핸드볼 여름방학 훈련에서 제외된다. 따로 떨어져 사는 아빠는 물론 함께 사는 엄마도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찾은 수족관에서 듀공과 함께 자랐다는 바다소년 우미(이시바시 히이로)와 소라(우라가미 세이슈)를 만난다. 이들은 해양학자들과 함께 고래의 노래가 암시하는 바다 생태계의 ‘탄생제’를 쫓고 있다. 루카는 우미와 소라 형제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이들과 함께 어울리게 된다. [리틀 포레스트]의 작가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해수의 아이>는 <마인드 게임>, <철콘 근크리트> 등을 제작한 스튜디오 4℃가 제작했고, <도라에몽>의 몇몇 극장판과 <우주형제>의 TVA를 이끈 와타나베 아유무가 연출을 맡았다.

 

 <해수의 아이>는 상당히 도전적인 프로젝트다. 루카와 바다소년들의 만남은 어딘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벼랑 위의 포뇨>나 유아사 마사아키의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와 같은 앞선 애니메이션들을 연상시키고, 환경과 자연이라는 표면적인 주제나 바다와 항구마을이라는 배경에서도 유사하다. 하지만 <해수의 아이>는 차라리 조너선 글레이저의 실험적인 작품들이나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테렌스 멜릭의 <트리 오브 라이프>, 혹은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과 같은 작품들과 비교하는 게 더욱 타당할지도 모른다. 영화 후반부를 통째로 할애한 ‘탄생제’ 시퀀스는 방금 언급한 영화들의 추상적이고 코스믹한 장면들과 닮아 있다. 좋아하는 것을 할 때는 활달하지만 누군가의 앞에서는 소심한 루카는 세상에 자신의 말을 잘 내뱉지 못하는 인물이다. 영화는 얼핏 그런 그가 두 바다소년과 만나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 과정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와 같은 우주론적인 질문들과 결합되어 거대하고 추상적인 세계로 돌입한다. 일본어로 각각 바다와 하늘이라는 뜻의 우미와 소라의 이름은 바다와 하늘(우주)이 뒤섞일 후반부에 대한 복선이다.

 

 루카와 바다소년들의 여정은 우미가 루카에게 도깨비불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도깨비불은 어떤 운석이었고, 그 운석은 생명의 씨앗으로써 바다의 탄생제가 시작된다는 의미이다. 영화 중반부 이에 대한 설명이 짤막하게 나온다. 바다가 자궁이고 운석이 하늘의 정자라는 식의 설명은, 대지를 모성에 비유하는 관념의 변형이다. 다시 말해, 우주는 우리가 절대 알 수 없는 공간이며 그것의 대응물과 같은 바다 또한 인간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생명의 모태라는 것이 <해수의 아이>의 기반이다. 때문에 영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나 철학 자체는, 앞서 언급한 영화들에서 이미 다뤄진 것이기도 하며, 딱히 새로운 구석은 없다. 그럼에도 <해수의 아이>는 히사이시 조의 음악과 애니메이션이기에 조금 더 용이한 추상적 화면을 화려하게 구현해낸다. 굳이 후반부의 ‘탄생제’ 시퀀스를 언급하지 않아도, 바다를 그리는 방식이나 정지된 육지 및 다른 캐릭터들과 역동하는 바다 및 세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는 방식에서 이미 화려하고 주제에 걸맞은 작화를 선보인다. 

 

 여담이지만, <해수의 아이>를 비롯해 신카이 마코토의 최근 두 작품,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 등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 눈에 띄는 작품들이 액체적 속성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 새삼 신기하게 다가왔다. 물론 그 선봉장에는 <모노노케 히메>에서 보여준 사슴신의 피부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가오나시, <벼랑 위의 포뇨>의 바다까지 이어지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 있지만, 이 영향을 짙게 받은 이들의 작품이 곳곳에서 바다, 비, 호수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키라>와 <공각기동대>부터 <에반게리온>까지가 유기체적인 기계들의 향연과 함께 철학적 테마를 선보였다면, 언급한 최근의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생태주의, 세카이계로 포섭되는 포스트-재난 서사, 주체-객체 사이 모종의 동기화 등을 건드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포일러 포함

 

 “Dick Johnson Is Dead”라는 문장과 함께 죽은 노인의 시체가 화면에 등장한다. 그런데 시체가 일어난다. 이 순간은 죽음을 앞둔 노년 남성 딕 존슨이 자신의 죽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리허설해보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을 담은 영화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는 20여 년 동안 여러 다큐멘터리의 촬영감독으로 일해왔고, 2016년 <카메라를 든 사람>을 통해 연출자로서도 성공한 커스틴 존슨의 신작이다. 이 영화에서 딕 존슨은 다양한 방식으로 죽는다. 심장마비, 누군가가 떨어트린 모니터에 맞기, 공사장 인부가 휘두른 자재에 맞아 피 흘리기,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기, 자전거에서 떨어지기… 어느 것 하나 편한 죽음이 없다. 스턴트맨이 대리하는 딕 존슨의 다양한 죽음을 딕 존슨은 지켜본다. 그리고 스턴트맨이 쓰러진 자리에 딕 존슨은 눕는다. 부녀는 딕 존슨의 가짜 장례식을 열고 딕의 친구에게 추도사를 읊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한다. 부녀는 장례식이 열린 교회 강당의 문 밖에서 그 상황을 보고 웃고 있다.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의 장르적 분류는 논픽션 다큐멘터리지만, ‘딕 존슨의 죽음’이라는 상황은 픽션이다. 물론 누구나 죽는다는 당연한 명제 앞에서 ‘딕 존슨의 죽음’이라는 상황은 언젠가 실현될 상황이다. 하지만 적어도 영화 안에서 딕 존슨은 죽지 않는다. 선댄스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부터 넷플릭스에 영화가 업데이트된 10월 2일까지 딕 존슨은 죽지 않았다. 이 영화는 여전히 벌어지지 않은 상황에 대한 픽션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은 영화의 주인공인 딕 존슨이 영화의 마지막 즈음엔 정말로 죽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숏은 커스틴 존슨 감독이 어느 벽장에서 “딕 존슨은 죽었습니다”라는 문장을 연습하듯 읽는 장면이다. 감독은 벽장문이 열리고 환한 빛과 함께 나타난 아버지를 끌어안고, 영화가 끝난다. 이 영화는 소리 내어 말하기도 어려운 그 문장을 다양한 영화적 트릭을 통해 미리 예습하는, 죽음을 연습하는 작품이다.

 

 죽음은 누구나 단 한 번 겪는다. 누구든 자신의 죽음이 어떤 형태일지, 죽은 후의 모습이 어떨지 알 수 없다. 그것은 연출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그렇기에 수많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죽음들은 수많은 거짓들이다. 아무리 연습해도 그 상황 자체를 연습할 수는 없다. 죽음의 리허설이 반복될수록 딕 존슨은 그것을 실제처럼 받아들인다. 목의 대동맥이 베여 죽는 상황을 연출할 때, 그는 몸을 뒤덮은 가짜 피가 축축하고 싫다고 말한다. 죽은 사람은 자신의 신체가 느꼈어야 할 감각을 느끼지 못하지만, 죽음을 연기하는 사람은 그 연출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죽음이라는 상황과 감각에 다가갈 수는 없지만, 수 차례 반복되는 리허설은 눈앞에 보이지 않는 죽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도록 돕는다.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에서 기억에 남는 시퀀스는 딕 존슨이 천국에 갔을 때의 풍경을 연출한 시퀀스이다. 몇 차례 등장하는 천국 시퀀스에서 딕 존슨은 등장하기도 하지만, 사진으로만 등장하기도 한다. 사진으로 등장한 딕 존슨은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의 사진과 춤을 춘다. 천국에 도착한 죽은 딕 존슨은 아내의 사진은 물론, 버스터 키튼이나 이소룡 등 세상을 떠난 영화인들과 함께 자리한다. 물론 딕 존슨은 영화인이 아니다. 그의 직업은 심리 상담사이고, 알츠하이머의 발병으로 그는 은퇴했다. 죽음은 이미 죽은 이들과의 만남인가? 커스틴 존슨의 내레이션에서, 딕 존슨은 술, 춤, 영화를 금지하는 안식교의 규율을 거부하고 자녀와 <영 프랑켄슈타인>을 보러 갔었다며, 그에게 천국은 아이들과 함께 이 땅에 있는 것이라 언급된다. 연출된 천국은 아마도 딕 존슨의 천국은 아닐 것이다. 영화가 묘사하는 천국의 모습에서 딕 존슨의 의견이 얼마나 들어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천국의 모습이 등장한 직후, 그리고 천국뿐 아니라 수많은 연출된 죽음과 가짜 장례식이 등장한 직후 그것이 모두 연출된 상황임을 알려주는 세트, 카메라, 스턴트맨, 분장사 등이다. 

 

 영화의 제목처럼 이 영화의 모든 순간에는 죽음의 징후가 감지된다. 죽음의 상황을 연출하고 있지만, 영화가 촬영되는 기간 중 어느 때라도 딕 존슨은 죽을 수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이것은 이제 눈앞으로 다가온 죽음에 저항하는 일종의 놀이로 변화된다. 그것은 종종 실제적인 감각을 동반하며 섬찟한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차마 입 밖으로 내놓기 어려운 말의 반복일 수도 있다. 딕 존슨의 가짜 죽음에 진심으로 추도사를 읊으며 눈물을 흘리는 친구의 모습일 수도 있다. 그것은 항상 포옹과 웃음을 동반한다. 사랑이 죽음을 이길 수 있다는 불가능한 말을 영화가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결과론적으로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는 그것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이라는 가장 거대한 충격 앞에서 감독 자신과 관객에게 일종의 예방접종과 같은 충격효과를 노리는 것일 수는 있다. 죽음 앞에서 무엇도 할 수 없다는 말 앞에서, 존슨 부녀는 놀고 있다. 죽음이라고 명명된 죽음이 아닌 상황들로 이들은 유희를 벌인다. 딕 존슨은 항상 같은 의자에 앉아 웃고 있다. 그는 연출된 자신의 죽음을 보며, 자신의 천국이 그려진 세트를 보며 웃는다. 이 웃음이야말로 딕 존슨이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라는 무거운 문장에 저항하는 방식이다.

 신혼 생활을 즐기고 있는 소희(이정현)는 야근이 잦은 남편 만길(김성오)이 의심스럽다. 그가 하루 24시간 중 21시간을 활동하기 때문이다. 그는 미스터리 연구소 소장 닥터 장(양동근)에게 도움을 청한다. 닥터 장은 만길이 소희를 죽이려 하는 외계인 ‘언브레이커블’임을 확신한다. 이들은 소희의 고교 동창인 세라(서영희), 우연히 합류하게 된 양선(이미도)과 함께 만길을 미리 죽일 계획을 세운다. <시실리 2km>, <차우> 등 개성 넘치는 코미디 영화를 연출해온 신정원 감독의 신작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은 우주에서 한 외계인이 지구에 떨어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간 스릴러와 괴수영화, 오컬트 등의 장르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해석해 온 감독답게, 이번 영화 또한 SF에 기반을 두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사실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이 끌어오는 레퍼런스들은 너무나도 명확해서 종종 유치해 보이기도 한다. 조지 로메로의 영화에서 따온 제목(영어제목은 ‘Night of The Undead’)부터, M. 나이트 샤말란의 <언브레이커블>에서 따온 ‘언브레이커블’이라는 설정, <맨 오브 스틸> 중반부의 액션 시퀀스를 거의 고스란히 따온 듯한 후반부의 액션, 히치콕 영화 속 운전 장면을 연상시키는 장면 등등. 신정원 감독의 전작들은 항상 큰 줄기는 영화가 지향하는 장르 컨벤션에 맞춰져 있되, 그것을 2000년대 초반의 한국적 정서로 조금씩 비틀었다.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침드라마와 같은 소희와 만길의 일상이라던가, 한국 드라마의 과도한 PPL를 패러디하듯 각종 PPL 상품(으로 보이는 것들)으로 도배된 이들의 집, 서울 곳곳을 묘사하지만 정작 그 동네의 외형은 20여 년 전의 모습처럼 보이는 공간감(마장동 주유소의 묘사) 등등. “가위를 내면 지는 가위바위보”에서 굳이 약지와 새끼손가락으로 가위를 만들어 내게 하는 당황스러움이 이 영화의 코미디이다. 이쯤 되면 줄거리나 SF적 설정은 맥거핀이고, 황당함을 주는 순간들이 이 영화의 중심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이 주는 황당함이 불쾌하거나 지루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신정원 감독은 영화의 주된 서사와 유리된 황당함을 장치로 사용하는 데 능숙하다. 감독의 전작인 <차우>를 떠올려보자. 영화의 코미디적 장치들은 <죠스>를 베껴온 영화의 큰 줄거리와 전혀 상관이 없다. 오히려 몇몇 코미디는 서사를 지연시키고 러닝타임을 불필요하게 늘린다. 그럼에도 이들은 영화 속에 담겨 있고, 관객들을 웃긴다. 교훈을 주는 대신 관객들을 반응하게 영화를 의도한 것이라면, 신정원 감독의 영화들은 대체로 그것에 성공한다.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관객들이 즉각적으로 반응할만한 장면들을 잔뜩 집어넣었다. 이정현, 양동근, 이미도, 서영희의 과장된 연기와, 이제는 한국 장르영화에서 빼놓기 어려운 얼굴처럼 느껴지는 김성오의 모습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일 뿐이다. 후반부 경찰서 시퀀스를 떠올려보자. 이 시퀀스가 10분 넘게 지속될 이유는 없다. 유일한 이유라면 소희, 양선, 세라를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 두고 만길 및 닥터 장과 다시 마주치도록 하는 것이다. 영화는 그렇게 해야 되니까 그렇게 한다. 사건은 이야기에 복무하는 대신 황당한 순간, 코미디의 순간에 복무한다. 물론 그것이 완전한 성공은 아니다. 작중 인물 중 이야기에 복무하는 캐릭터들인 비밀요원 집단은 그 흐름을 끊는다. 터미네이터 마냥 달려오는 ‘언브레이커블’이 산속의 식인 멧돼지나 조폭들을 따라오는 소녀 귀신만큼은 인상적이지 못했던 이유다.

 

 영화 내에서 챕터를 나누지는 않지만, <도망친 여자>는 명확한 3부 구성을 취하고 있다. 감희가 남편이 출장을 떠난 사이 영순(서영화), 수영(송선미), 우진(김새벽)을 각기 만나러 가는 것이 각 부분의 이야기를 채운다. 만희와 그들의 대화도 어느 정도 반복된다. 결혼한지 5년 정도 되었지만 남편과 떨어져 있는 것이 처음이라는 감희의 말에 놀라는 상대방의 반응, 북한산과 인왕산의 이미지를 통해 연결되는 각 부분, 얼굴 대신 뒷모습만을 보여주는 세 남성 – 고양이 남자(신석호), 젊은 시인(하성국), 정선생(권해효) – 의 어딘가 불편한 목소리, 다양한 스크린을 응시하는 감희의 눈. 이 세 이야기는 서로의 순서를 바꿔도 내용 상의 문제는 없다. 감희가 이들 중에 누군가를 먼저 찾아갔다기보단, 이들을 동시에 찾아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수도 있다. 때문에 외적으로는 반복되는 시간들을 다루는 홍상수의 근작들과 유사해 보이지만, 그의 영화에서 남성의 출현이 가장 배제된 영화라는 점에서 독특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도망친 여자>를 보고 홍상수의 영화는 점점 더 간결해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대사들에서 이런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과거 홍상수 영화들 속 여성들의 대사가 “좋아요”, “아름다워요” 등의 반복이 잦았다면, <강변호텔> 즈음부터 여성과 여성의 대화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묻는 것에 대한 대답의 연쇄로 이루어진다. 반면 남성과 남성이 나누는 대사, 혹은 여성과 남성이 나누는 대사들을 생각해보자. <강변호텔>에서 시인 영환의 말을 두 아들은 단박에 알아채지도 못하고, 서로가 있는 위치를 찾는 것부터 시간이 오래 걸린다. 영환을 부르는 두 아들의 말은 영환에게 쉬이 전달되지 못한다. <도망친 여자>에서 남성들의 뒷모습은 불편함을 내비친다.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영순이 불편하고, 자신을 좋아해주지 않는 수영이 불편하고, 감희와 자신 사이에 있었던 과거의 일이 불편하다. 감희와 여성 친구들 사이의 대화는 자신이 이미 목격한 것을 부정하면서라도 대화의 맥을 이어간다. 반면 여성과 남성의 대화는 대답이 되지 못할 것, 네댓 문장의 텀을 둔 애매한 대답, 약간의 쌍욕으로 구성된다. 여성들은 서로에게 관대하고, 남성에게는 그렇지 않다. 홍상수는 영순과 그의 동거인 영지(이은미)가 밥을 주는 길고양이를 ‘도둑고양이’라 부르며 밥을 주지 말 것을 요구하는 이웃집 남성의 몸이 프레임 밖으로 잘려나가더라도, 그 자리에 있는 고양이를 화면에 안정적으로 배치하려 한다. <도망친 여자>의 프레임 속에서 안정적으로 자리잡은 이들은 여성, 고양이, 닭, 까마귀, 산이다. 

 

 그렇다고 홍상수가 여성연대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다거나, 생태주의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감희와 영순이 소고기를 먹으며 채식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등장하긴 한다) 주목해볼 것은 스크린을 보는 감희다. 그는 영순이 이웃집의 젊은 여성과 담배를 피우며 위로해주는 장면을 CCTV 화면을 통해 본다. 그는 수영이 스토커 같은 젊은 시인과 싸우는 모습을 현관 초인종 화면으로 본다. 그리고 극장 스크린에서 흑백의 바다를 본 그는 우진 및 정선생과의 대화 이후 다시 극장으로 가 컬러 화면의 바다를 본다. 앞선 두 번에서 감희는 갈등과 불화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스크린을 통해 간접적인 위치에서 위로와 불화를 목격하고 응시한다. 그는 영순과 옆집 여성의 모습에서 위로를 배운 것처럼, 싸우고 돌아온 수영에게 힘내라며 위로를 건내기도 한다. 반면 정선생과 대화를 나눈 뒤 극장 밖으로 나온 감희는 다시 극장으로 들어가 스크린 위에 영사되는 바다를 본다. 여기서의 바다는 홍상수의 영화들(<생활의 발견>부터 <강변호텔>에 이르는)에 등장했던 바다 혹은 물가와는 다르다. 감희는 그곳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것을 직접 보지도 못한다. <도망친 여자> 그의 시점숏을 채우는 것은 바다나 강가가 아니라 산이다. 산은 움직이지 않지만, 바다는 움직인다. 산이 감희나 다른 여성, 자연물처럼 자신의 위치를 점거하고 있는 존재라면, 바다는 물러났다 들이치길 반복한다. 스크린에 영사되는 바다에 대해 감희는 “평화롭다”고 말한다. 바다는 역동하지만 산은 멈춰 있다. 감희는 바다와 조응하는 대신 스크린 속 바다를 바라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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