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 메이크 필름:영화사가 잊은 영화들> 마크 커즌스 :: 영화 보는 영알못

 이 영화는 러닝타임이 840분, 14시간이나 되는 다큐멘터리이다. <우먼 메이크 필름>이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영화는 여성감독이 연출한 작품들에 대한 다큐멘터리이다. 다만 영화의 부제는 원래 ‘영화사가 잊은 영화들’이 아니라 ‘A New Road Movie Through Cinema’로, 번역하자면 ‘영화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로드무비’ 정도의 의미가 된다. 영화는 오프닝, 분위기, 대화, 프레이밍, 스테이징, 발견, 시점, 클로즈업, 꿈, 죽음, 사랑, 종교, 노동, 정치, 긴장감, 기억, 시간, 신체, 섹스, 엔딩 등 40개의 키워드를 183명의 여성감독이 연출한 400여 편의 영화를 통해 설명한다. 탠디 뉴튼, 데브라 윙거, 제인 폰다, 케리 폭스, 아드조 안도, 샤밀라 타고르 등의 여성 배우들이 내레이션을 맡았고, 틸다 스윈튼은 내레이션과 함께 영화의 제작도 맡았다.

 영화는 틸다 스윈튼의 내레이션이 설명하듯 여성감독들의 영화들로 영화사를 다시 쓰거나 기존의 영화사를 해체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성감독이 연출한 영화의 리스트를 제공하려는 것도 아니다. (물론 상당히 유용하고 충실한 리스트이긴 하다) 이 영화는 “모든 선생님이 여성인 영화학교”에 가깝다. 생각해보면 마크 커즌스가 뽑은 40여개의 키워드는 루이스 자네티의 [영화의 이해]나 데이비드 보드웰, 크리스틴 톰슨의 [영화예술]과 같은 ‘교과서’들의 목차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사랑, 꿈, 기억 등 추상적인 키워드들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영화는 수많은 영화들에서 각 키워드에 알맞은 장면들을 뽑아, 그들이 해당 키워들을 영화 속에서 어떻게 수행했는지, 어떻게 보여주었는지를 설명한다. 가령 신체에 대해 이야기할 때 아녜스 바르다의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 셀린 시아마의 <톰보이>, 레니 리펜슈탈의 <올림피아>, 마야 데렌의 <변형된 시간의 의식> 등이 차례로 언급되는 방식이다. 바르다와 시아마, 그리고 야스민 아메드와 안드레아 아놀드가 신체를 젠더권력이 교차되고 드러나는 장소로서 사용했다면, 리펜슈탈이나 데렌은 신체 자체의 조형성을 영화에 담으려 했다는 식의 설명이 붙는 방식이다.

 때문에 <우먼 메이크 필름>은 흔히 말하는 ‘오디오-비주얼 크리틱’의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비평’보다는 기술적인 ‘분석’ 작업에 가깝다. 마크 커즌스는 자신이 인용하는 모든 영화에 대해 ‘위대한 영화들’이라는 상찬만을 건넬 뿐, 별다른 평가를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영화는 어떤 영화에 대한 가치평가와 미적 우위를 가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우먼 메이크 필름>의 목적은 여성이 연출한 영화만으로 모종의 영화 교육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에 가깝다. 그간 여성감독의 영화는 영화사의 어떤 국면, 가령 프랑스 누벨바그의 아녜스 바르다, 할리우드 황금기의 아이다 루피노, 90년대 액션영화엔 캐서린 비글로우를 언급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언급되었을 뿐이다. 위의 문단에서 언급한 책을 펼쳐보면 대부분의 키워드는 찰리 채플린, 알프레드 히치콕, 오손 웰즈, 장 뤽 고다르,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들을 예시로 꼽고 있다. <우먼 메이크 필름>은 그 예시들을 아녜스 바르다, 도로시 아즈너, 아이다 루피노, 클레르 드니, 캐서린 비글로우, 알리스 기 블라쉐로 대체하는 작업이다. 그 지점에서 <우먼 메이크 필름>은 얼핏 유사한 기획인 고다르의 <영화의 역사(들)>과 갈라선다.

  <우먼 메이크 필름>은 픽션과 다큐멘터리, 실험영화, 무성영화와 유성영화, 단편과 장편 등을 가리지 않고 인용한다. 이 리스트는 <웨스트월드>나 <시녀 이야기> 등의 TV 시리즈를 포괄하고, 마지막 키워드인 ‘노래와 춤’에서는 비욘세의 ‘레모네이드’ 뮤직비디오를 인용한다. 이 영화 안에선 연출된 영상이라면 그 안에 이렇다할 위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다. 콘텐츠의, 매체의 위계가 없는 영화학교를 꿈꾸는 것일까? 영화가 인용하는 다양한 시대의, 국적의, 언어의 영화들은 마크 커즌스의 인용을 통해 하나의 덩어리로 묶인다. 바르다, 아이다 루피노, 키라 무라토바 등 이미 ‘정전’에 오른 이들의 이름뿐 아니라, 켈리 라이카트나 에바 듀버네이, 림 렌지, 패티 젠킨스 같은 최근의 이름들, 더 나아가 율리야 솔른세바, 트린 T. 민하, 몰리 수리아, 다나카 카누요, 알리체 로르바커, 마티 디옵, 데니즈 겜즈 에르구벤 등 동유럽, 동남아시아, 동아시아, 아프리카, 중동의 감독들 또한 언급된다. 한국의 감독으로는 남한의 첫 여성감독 박남옥의 <미망인>과 김소영의 <나무 없는 산>이 인용되었다. 

 여기서 <우먼 메이크 필름>의 비평적 기능이 드러난다. 마크 커즌스는 자신이 인용하는 개별작품에 대한 비평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비평대상은 개별영화나 영화사가 아닌 영화에 대한 교육이 무엇을 통해 이루어졌는지, 즉 영화교육에 대한 비평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우먼 메이크 필름>은 한 작가를 파고드는 <오손 웰즈의 눈으로>나 도시에 대한 에세이필름인 <아이 엠 벨파스트> 등의 전작과 구분된다. <우먼 메이크 필름>은 그간 자연스럽게 남성감독의 영화, 남성주연의 영화, 남성중심 서사의 영화로 구성된 영화교육을 뒤바꿔 놓는다. 14시간에 달하는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데브라 윙거의 내레이션은 이렇게 말한다. “여성 감독들의 영화엔 더 많은 여성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의 말과 함께 세상을 떠난 여성감독들의 사진이 등장하고, 알리스 기 블라쉐의 사진과 함께 마크 커즌스가 직접 찾아간 알리스 기 블라쉐의 묘지가 등장한다. 이 영화는 영화사에서 잊힌 영화들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영화교육에서 자연스레 잊히게 된 여성 영화인들에 대한 영화이자, 그들이 해낸 것들에 대한 영화다. 

 다만 그 과정에서 인용된 모든 영화와 장면을 동일선상에 두고 이야기할 필요성을 인정한다 해도, 모든 방식의 연출을 긍정하는 듯한 병렬적 인용과 내레이션은 다소 아쉽게 느껴진다. 가령 ‘신뢰성’ 챕터에서 디나라 아사노바의 <당신이 선택한 것>을 언급하며, 한 여자아이가 위태롭게 지붕 위를 걷는 장면에 대해 단순히 ‘영화에 신뢰성을 부여하기 위한 방법’ 정도로 묘사하는 것은 다소 위험하게 느껴진다. 혹은 ‘SF’ 챕터에서 발리 엑스포트의 <인비저블 애드버서리>에서 살아있는 물고기와 곤충을 칼로 죽이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 또한 단순히 하나의 방법으로써 제시될 뿐이다. 이는 <우먼 메이크 필름>을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새로운 질문을 던져주지만, 스스로 ‘영화학교’를 표방하고 있는 만큼 다양한 방법론과 함께 그것의 윤리에 대한 언급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고 보니 키워드에 ‘윤리’가 없다는 사실이 살짝 의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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