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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여러 영화처럼, <시티홀>은 시청을 찍는다. 정확히 말하면 트럼프 정권 집권기인 2018년의 보스턴 시청과 당시 시장이었던 마티 월시(현 미국 노동부 장관), 그리고 보스턴 곳곳에서 활동하는 시청 공무원들의 모습을 담는다. 때문에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나 <내셔널 갤러리>처럼 특정한 공공공간 하나에 집중한다기보단, <인디애나 몬로비아>나 <버클리에서>처럼 한 지역 전체를 다루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다. 와이즈먼의 카메라는 언제나 그랬듯 카메라 앞의 인물들을 인터뷰하지 않는다. 대신 보스턴이라는 공간을 기반으로 벌어지는 개인 간의 역동을, ‘도시’라는 유기체가 작동하는 모습을 관찰할 뿐이다.    

 당연히 관찰에는 관찰자의 관점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특히 편집을 통해 관찰된 화면에 연출자가 개입하게 되기에, 와이즈먼의 영화는 언제나 존재하는 공동체/공공기관/지역 자체를 고스란히 보여준다기보다 그의 관점이 투영된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이 조금 더 옳은 설명일 것이다. <시티홀> 속 몇몇 장면을 떠올려보자. 30년간 보스턴의 건설업 중소기업을 운영해온 라틴계 미국인 시민은 관계자의 정책 설명을 듣고 “백인들로 가득한 대기업은 몇천만 달러짜리 사업을 시에서 받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한다. 성장하지 못한다.”라고 반문한다. 관계자는 그러한 의심이 들 수도 있지만~이라며 설명을 이어나간다. 그의 설명이 채 끝나기 전에, 그보다 상위의 시청 관계자가 “의심은 없습니다”라며 새로운 설명을 이어간다. 혹은 미국 재향군인의 날에 참전용사 회관 같은 공간에서, 카메라는 이라크나 베트남에 다녀온 참전용사들의 발언에 앞서, 보스턴의 역사가 담긴 그림들을 담는다. 역사의 순서를 고스란히 따르는 그림들의 몽타주는, 17세기 영국 청교도 개척자들의 도착부터 보스턴 차 사건까지의 사건들을 보여준다. 참전용사들의 발언 사이사이엔 공간에 전시된 양차대전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당시의 무기들을 비롯한 전시품들이 놓여 있다. 이 장면은 1차대전에 참전한 삼촌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면서, 참전용사들의 PTSD를 자신의 알코올 중독 경험과 등치시키는 시장의 연설로 끝난다.      

 물론 <시티홀>이 보스턴 시청 공무원들이 보여주는 관료제의 폐해를 보여주려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이들이 열정적으로 보스턴 행정을 끌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젊은 청년이 시청 관계자 및 예술가와 도시의 노숙인들이 머무를 수 있는 쉼터를 계획하는 장면이라던가, 장애인 위원회가 도시 곳곳의 접근성에 대해 논의하는 장면처럼, 보스턴의 여러 여성, 노인, 장애인, 성소수자, 인종 커뮤니티 등으로 구성된 여러 위원회, 단체 등에서 진행하는 다양하고 열정적인 논의가 계속 등장한다. 와이즈먼이 <뉴욕 라이브러리>와 같은 영화에서 보여준 것처럼, 이 영화는 공적인 영역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트럼프의 미국 아래에서도 인종, 성별, 성적지향, 계급, 나이에 따른 차별을 줄이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 과정의 역동이 <시티홀>의 가장 큰 축을 이루며,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합법 대마초 상점의 개장에 앞서 사업가들과 지역 주민들의 모임을 담은 장면에서 그러한 역동의 절정이 드러난다.      

 하지만 <시티홀>에서 흥미로운 것은, 앞서 언급했던 관료제의 함정 혹은 구멍을 드러내는 듯한 장면들이다. 2017년의 인디애나주 몬로비아를 담은 <인디애나 몬로비아>와 대비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인디애나 몬로비아>는 트럼프 정권 당시의 미국 남부를 보여준다. 이들의 공동체는 지극히 민주적이고, 지극히 보수적이다. 영화는 백인 기독교도들이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낙농업이 주 수입인, 20, 30대는 도시로 떠났으며 지역에서 평생을 살거나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돌아온 이들만이 남은 몬로비아의 공동체를 보여준다. 동시에 이들이 등장하는 사이사이에 하수처리장의 오물, 우리에서 이송되어 나오는 돼지 떼 등을 보여준다. 그리고 “Make America Great Again”이라는 외침이 들릴 것 같은 미국 중서부의 농촌 정경, 독수리가 날개를 펴듯 가로로 길게 펴지는 농약 뿌리는 농기계의 모습이 등장한다. 결국 와이즈먼은 중서부 미국의 소도시라는 공간을 대하면서,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대신 회유적으로, 그리고 분산적으로 이를 드러낸다. <인디애나 몬로비아>의 마지막 장면에서 누군가의 장례식이 등장한다. 하지만 영화에는 누군가의 출생, 탄생은 담기지 않는다. 와이즈먼은 <인디애나 몬로비아>에서 공동체의 생명이 끝나가는 시기를 포착하려는 것만 같다. 즉 미국이 자랑스레 내세우는 민주주의의 방법으로 극적인 보수화 과정을 겪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티홀>은 그 대척점에 서 있는 보스턴의 모습을 보여주며, 반대로 민주적인 절차와 사상에 따라 모든 이를 배제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이들의 열정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앞서 언급한 노숙인 쉼터에 대한 이야기나, 대마초 사업에 대한 질의응답 모임에서 지역 공동체를 이루는 이들과 사업가 사이의 격렬한 토론을 보고 있자면, <뉴욕 라이브러리> 등 와이즈먼의 전작에서 드러난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 엿보인다. 하지만 두 번째 문단에서 언급했던 관료제의 함정이라 부를 수 있는 것, 혹은 아일랜드계 천주교인 시장이 보여주는 어떤 태도들에서 무엇도 배제하지 않으려는 민주주의적 열망의 실천 속 모순이 드러난다. <인디애나 몬로비아>는 지극히 민주적인 방식으로 보수화되는 곳을, <시티홀>은 보수화의 흐름 속에서 노력하지만 그 안에 내포하고 있는 모순을 조심스레 꺼내 보인다. 와이즈먼은 <시티홀>의 마지막에서야, 보스턴하면 떠오르는 항구와 바다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식민지 개척자들이 처음 들어온 곳, 그들이 유럽으로부터 독립한 사건이 벌어진 곳, 재향군인회 건물에 걸려 있던 그림 속 사건들이 벌어진 역사적 장소를 돌아보며, 이 영화는 끝난다.     

  전작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에서 3년의 시간이 흐른 시점, 서식지를 잃은 콩은 모나크 소속의 아일린(레베카 홀)의 보호 아래, 스컬 아일랜드 부족의 소녀 지아(카일리 하틀)와 살아가고 있다. 한편, 월터 시몬스(데미안 비치르)와 세리자와 렌(오구리 슌)의 회사 에이펙스가 고질라에게 공격받는다. 이에 월터는 할로우어스(지구공동설)을 주장하던 학자 네이선(알렉산더 스카스가드)에게 고질라에 대항할 에너지원을 찾기 위한 탐사를 제안하고, 네이선은 옛 동료 아일린에게 부탁해 콩을 데리고 할로우어스로 향한다. 동시에 모나크 국장의 딸 매디슨(밀리 바비 브라운)은 에이펙스에 근무하는 음모론자 버니(브라이언 타이리 헨리)와 함께 에이펙스의 비밀을 파헤친다. <블레어위치>부터 넷플릭스의 <데스노트>까지, 주로 저예산 호러영화를 만들어온 애덤 윈가드의 첫 블록버스터 연출작이다. 워너와 레전더리의 ‘몬스터버스’를 연출해온 이들이 호러를 기반으로 삼은 장르영화 감독들이었다는 점에서 애덤 윈가드의 기용은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지만, 그의 능력에 항상 의문을 가지고 있었기에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채로 극장을 찾았다.    

 많은 이들의 평과 같이, <고질라 vs 콩>은 전작 <킹 오브 몬스터>의 장점과 단점이 고스란히 유지되고 있다. 장점이라면 거대괴수들의 싸움을 대단한 스케일로 보여준다는 것일 테고, 그것들을 잇는 인간 중심의 서사가 부실함이 단점이다. 영화 후반부 등장하는 메카고질라로 수렴되는 인간들의 서사는 이른바 ‘알파 타이탄’의 자리를 놓고 고질라와 콩이 경쟁한다는 설정을 어느새 잊어버린 듯 흘러가고, 그간의 <킹콩> 영화들의 이야기를 따라 등장한 콩과 교감하는 인간 지아의 이야기는 콩을 <혹성탈출> 속 유인원들처럼 보이게 만든다. 할로우어스라는 매력적인 설정은 어떻게든 콩을 ‘인간적인’ 존재로 만들어내는 것에 복무할 뿐이다. ‘쇼와 고지라’ 시리즈에서 외계인의 것이었던 메카고질라는 인간 욕망의 산물로 등장하는데, 등장하는 과정과 쓰임 모두 안타깝기만 하다. 메카고질라는 오로지 고질라와 콩 사이의 싸움을 멈추기 위해 등장할 뿐이며, 퇴장하는 방식 또한 어처구니없다.     

 장점이라면 거대괴수 영화다운 스케일이다. 에이펙스를 습격하는 고질라, 항공모함 위에서 벌어지는 고질라와 콩의 대결, 할로우어스의 거대한 경관, 홍콩에서 벌어지는 결투까지, <고질라 vs 콩>은 계속 장소를 바꿔가며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한다. 문제는 그것을 ‘몬스터버스’의 이전 영화들과 전혀 다른 톤으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우선 이 영화엔 인간의 시점에서 괴수들의 싸움을 바라보는 숏이 거의 없다. 인간 시점에서 괴수를 보는 숏 대부분은 지아와 콩 사이의 교감을 보여주는 데 낭비된다. <고질라>에서 고질라의 거대함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한 시야의 제한이라던가, 경건함에 가까운 분위기를 연출했던 <킹 오브 몬스터>의 웅장함은 이번 영화에 없다. 세 편의 전작 중 가장 아쉬운 완성도를 보여줬던 <콩: 스컬 아일랜드>조차 콩을 비롯한 괴수들의 스케일을 보여주는 것에 있어서는 만족스러운 이미지를 선사했었다. 하지만 <고질라 vs 콩>은 그저 고질라와 콩이 앞에 놓인 거의 모든 것을 파괴하며 싸우는 모습을, 마치 슈퍼히어로 영화의 카메라처럼 찍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같은 홍콩을 배경으로 삼은 기예르모 델 토로의 <퍼시픽 림>이나 후속편 <퍼시픽 림: 업라이징>처럼 일본 거대괴수 영화에 대한 애정을 듬뿍 드러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괴수 슈트를 입은 사람들이 레슬링을 벌이던 것과 같았던 일본 고지라 시리즈의 전통에 따라 고질라와 콩이 이종격투기처럼 격투를 벌이는 모습 등이 그러한 역할을 맡는 듯하지만, 콩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고질라의 묘사는 <고질라>와 <킹 오브 몬스터>를 통해 쌓인 캐릭터의 서사를 온 데 간데 없이 날려버린다.     

 가렛 에드워즈의 <고질라>가 탁월한 점은, 혼다 이시로의 첫 <고지라>가 보여준 자연재해에 가까운 연출과, <고지라> 이후 이어진 시리즈에서 점차 수호신의 역할을 맡게 된 고지라의 모습을 거대한 CG 크리처 고질라에게 적절히 배분하였고, 양자 사이의 결합을 매끄러운 서사로 보여주었다는 것에 있다. 즉, 가렛 에드워즈는 혼다 이시로의 <고지라>와 안노 히데아키의 <신 고지라>에서 묘사된 것과 같은, 핵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자연재해로서의 거대괴수로 고질라를 등장시킨 뒤(이는 지진과 쓰나미 등의 장치로 표현된다), ‘재해’의 측면을 오리지널 크리처인 무토에게 넘긴 채 고질라를 수호신의 이미지로 퇴장시켜 일본 고지라 시리즈에서의 맥락을 이어갔다. 이는 마이클 도허티의 <킹 오브 몬스터>에서도 이어진다. 여기선 ‘몬스터버스’라는 이름에 걸맞게 킹 기도라, 로단, 모스라 등은 물론, 일본 고지라 시리즈에 없었던 여러 지역의 신화나 전설, 혹은 음모론 속의 괴수들을 짧게나마 등장시키고 있다. 이들의 등장은 화산폭발이나 태풍 등의 자연재해처럼 묘사되고, 고질라는 ‘알파 타이탄’으로서 이들을 굴복시켜 수호신의 면모를 보여준다.      

 <고질라 vs 콩>엔 그런 것이 없다. 고질라는 난데없이 인간을 공격하는 재앙신이 되었고, 콩은 인간과 교감할 수 있는, 파충류나 곤충이 주류를 이루는 타이탄 가운데 유일한 영장류로서, 수어와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고등생물로서 서사에 기입된다. 고질라는 인간적인 타이탄 콩과 타협하고야 마는 존재로 격하되었고, 콩은 ‘몬스터버스’라는 세계관에 걸맞지 않은, 다시 말해 전혀 타이탄스럽지 못한 존재로 다뤄지게 되었다. 메카고질라는 엉성한 디자인 속에서 어정쩡하게 등장했다 어처구니없이 퇴장한다. 영화의 거대한 스케일이 이야기와 상관없이 전달하는 쾌감과는 별개로, 이 영화는 거대괴수 장르를 대표하는 두 캐릭터의 조우는 만족감보단 어딘가 거슬리는 느낌을 잔뜩 제공하고 있다. 그래도 재밌긴 했지만....

 로이(프랭크 그릴로)는 계속해서 죽는다. 그리고 다시 깨어난다. 그는 매일 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타임루프에 빠졌다. 눈을 뜨자마자 정체불명의 킬러들이 그를 죽이려 하고, 그는 그들이 왜 자신을 노리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그가 145번째 같은 하루를 반복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리스타트>는 익숙한 타임루프 영화와 같은 플롯을 반복한다. 로이는 <소스코드>나 <엣지 오브 투모로우>의 제이크 질렌할과 톰 크루즈처럼 같은 하루를 계속 반복하며, 많이 같은 레벨의 게임을 학습하여 다음 레벨로 넘어가는 게이머처럼 하루하루를 이어간다. 사실 <리스타트>의 원제는 <Boss Level>이며, 영화 시작 전에 등장하는 제작사와 배급사 로고들은 8비트 게임의 도트 그래픽처럼 바뀌어 있다. 타이틀 시퀀스는 고전 횡스크롤 격투 게임의 캐릭터 선택 창처럼 등장한다. 앞서 언급한 다른 타임루프 영화들이 아니더라도, <사랑의 블랙홀>이나 <어바웃 타임>과 같은 타임루프의 형식을 빌린 로맨스 영화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타임루프를 소재로 삼은 영화들은 대체로 같은 상황을 반복하며 주인공에게 닥친 사건을 해쳐 나간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리스타트>도 이를 따른다. 전처인 젬마(나오미 왓츠)가 로이에게 어떤 사건이 닥쳐올 것을 경고하고, 젬마의 상사인 벤터 대령(멜 깁슨)이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이 로이가 루프를 반복할수록 드러나며, 그 과정은 로이의 반복으로 가능해진다. 이 영화가 다른 타임루프 소재의 영화들과 다른 지점이라면, 로이가 이미 루프를 140여 차례 반복한 뒤가 영화의 시작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로이가 젬마를 만나는 타임루프 이전의 상황은 로이의 플래시백으로 제시된다. 돤 영화 내내 흘러나오는 로이의 내레이션은 모든 것이 종료된 이후, 혹은 영화 속 로이의 시간과 동시적 시점에서 마치 유체이탈을 한 것 같은 상황에서 펼쳐진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은 플롯을 다른 타임루프 영화들과 약간 다르게 제시한다는 측면에서만 유효할 뿐, 영화 전체에 대해 새로움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오히려 로이가 자신을 주인공 삼은 게임을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방송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내레이션을 통해 발생한 초반부의 즐거움과 속도감이, 로이와 젬마의 전사를 대사로 설명하는 것에 발목 잡히게 된다.     

 더 나아가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이 보여준 게임과의 연계성은 타임루프라는 단순한 설정 외에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은 로이가 다양한 모습의 킬러들을 처치하는 방식과 결부되는 것도 아니고, 젬마가 보내준 생일선물을 통해 퀘스트를 받는 것처럼 시작되는 이야기와 결부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게임의 측면을 영화의 처음과 중반부 게임센터 장면에서 적극적으로 드러낸 덕에, 그러한 측면을 내재적 형식으로 끌고 나가며 충분한 흥미를 제공했던 <엣지 오브 투모로우>와 같은 작품에 비해 지루한 영화가 되어버렸다. 로이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누워만 있던 장면이 가장 독특했다고 해야 할까? 게다가 특별출연이라지만 별다른 역할을 부여받지도 못한 채 사소한 NPC처럼 존재했던 양자경이라던가, 로이의 캐릭터가 별다른 매력 없이 프랭크 그릴로가 여러 영화에서 연기해온 익명의 마초적인 군인 캐릭터를 반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즐거움보단 지루함이 앞서 찾아왔다. 조 카나한의 출세작 <A-특공대>를 생각하고 극장을 찾았다면, 그만큼은 될 수 없는 영화였다.     

 영화는 스마트폰의 세로 화면으로 촬영된 영상에서 시작된다. 예술학교에 합격했지만, 가족의 반대로 가지 못하게 된 마르지예가 자살을 택하는 과정이 담겨 있다. 영상 속 마르지예는 유명 배우인 베흐나즈 자파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제 카메라는 자파르 파나히의 자동차 조수석에 탄 채로 영상을 보는 자파리의 모습을 비춘다. 영화 촬영 중 영상을 접한 그는 자파르 파나히의 도움으로 마르지예가 사는 시골 마을로 향한다. 자파르 파나히의 카메라는 이번에도 자동차를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다. 종종 자동차 자체가 삼각대나 카메라 리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는 2009년 이란 당국으로부터 반국가적 영화를 만들었다는 혐의로 출국금지와 장기간의 가택연금을 당한 자파르 파나히가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부터 전작 <택시>까지 시도해온, 저항 자체로서의 영화 만들기의 연장선상에서 도출된 것이다. 극 중 자파르 파나히가 잠드는 상황이 아니라면, 카메라는 자동차 인근을 맴돌거나 자파르 파나히 곁에 머물러 있다.     

 카메라가 자파르 파나히 혹은 <택시>에 이어 그와 동질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자동차를 벗어나는 장면은 단 한 번 등장한다. 자파리가 촬영 중이던 영화 제작진에게 전화하기 위해 잠시 마을에 왔다가, 어느 노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다. 노인은 아들의 할례식을 이야기하며, 할례를 통해 발생한(?) 아들의 피부 조각의 신성함을 예찬하고 그것을 마초적인 이미지의 이란 남성 배우에게 전달해달라 부탁한다. 흥미롭게도 그 배우는 이란 정부로부터 입국을 금지당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는 상태다. 노인은 자파르 파나히 감독을 통해 그것을 전달해달라 부탁하지만, 그는 출국이 불가능하다. 유사한 에피소드들은 영화 내내 이어진다. 테헤란으로 돌아가려던 자파르 파나히 일행 앞에 절벽에서 떨어진 소가 나타난다. 소의 주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스마트폰의 신호는 잡히지 않고, 만약 수의사를 부른다 해도 때는 이미 늦었을 것이고, 동시에 죽어가는 소의 고통을 빠르게 끝내주기엔 자신의 손으로 살생하길 원하지 않는다. 죽어가는 소 앞에서 소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그는 파나히에게 소의 정력에 대한 상찬을 늘어놓는다. 고환이 좋은 소라 하룻밤에 10마리의 암소와 교미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암소를 태운 트럭들이 다음 날 올 예정이라는 이야기, 그것의 괴상한 연장선상에서 정력을 위해 죽은 소의 고기로 케밥을 해서 보내주겠다는 이야기.      

 마르지예의 가족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그의 예술학교 진학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것이 생존에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TV에서 방영되는 드라마와 영화를 즐겨보고, 마을을 찾은 스타 배우인 자파리를 알아보지만, 마르지예가 마을의 생존에 대한 쓸모에서 이탈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바라지 않을 뿐 아니라 이탈의 가능성 자체를 봉쇄하고, 더 나아가 마르지예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마을에 보탬이 될만한 그의 아이디어나 행동도 쓸데없는 짓으로 여겨진다. 마을 사람들은 이란 혁명 이전 시기에 배우로 활동하던 셰라드를 배척하고, 마을 외곽의 외딴집에서 살게 한다. 이들은 자파리의 앞에서 “배우는 광대”라는 발언을 하기도 한다. “생존을 위해서”라는 말은 상당히 논리적인 요건처럼 보인다. 하지만 생존을 위해 공부도, 예술가의 꿈을 꾸는 것도, 여성이 무엇인가를 시도하는 것을 가로막으면서, 동시에 남성성과 정력에 대한 선호와 찬양은 끝없이 이어진다. 이는 신앙과도 같은 어떤 것으로 발전하여 삶 자체를 지배한다.     

 자동차와 자파르 파나히를 벗어나지 않던 카메라는, 영화의 세 배우가 등장하는 장면을 차의 시점으로 잡는다. 셰라드의 집에 함께 머무는 마르지예와 자파리의 모습은 창문에 비친 그림자로만 등장한다. 혁명 이전과, 혁명 이후의 현재와, 현재 이후를 꿈꾸는 세 배우의 모습은 하나의 그림자로 뭉쳐진다. 자파르 파나히의 자동차-카메라의 시점은 생존이라는 논리로 인해 배제된 이들의 그림자가 영사되는 창문을 바라본다. 영화의 마지막 숏, 카메라는 자동차 정면에 고정된 채 자동차가 움직이는 방향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한편엔 마르지예의 남동생이 돌을 내리쳐 만들어낸 금이 보인다. 좁은 길 반대편에서는 이미 죽어버린 소와 교미시키려는 암소들을 가득 태운 트럭들이 오고 있다. 트럭들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동안 자파리는 그 길을 걸어가고, 마르지예가 자파리의 뒤를 따른다. 자파르 파나히-자동차-카메라는 그것을 길게 바라본다. 그와 그의 카메라는 자동차 밖으로 유유히 걸어 나가지 못한다. 대신 앞으로 나아가는 이들을 바라본다. 그는 그저 이란의 과거-현재-미래를 매개자로서, 국가로부터 어떤 가능성을 제한당한 사람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가능성을 바라보고 전달할 뿐이다. 이동을 제한된 카메라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을, 자파르 파나히는 꾸준히 수행하고 있다.

 23세기, 지구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인간들은 외계 개척지를 찾아 나서고, ‘뉴 월드’라 불리는 행성에 1차 정착민들을 보낸다. 하지만 뉴 월드에는 이들이 알지 못했던 ‘노이즈’라는 바이러스가 있다. 이것에 감염되면 생각하는 모든 것이 남들에게 들리고 보이게 된다. 이곳에서 태어난 토드(톰 홀랜드)는 프렌티스 시장(매즈 미켈슨)이 이끄는 마을에서 살아간다. 그곳은 여성이 없이 남성들만으로 이루어진 마을인데, 프렌티스의 설명에 따르면 뉴 월드의 토착민 스패클의 공격을 받아 여성들이 모두 죽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2차 정착민 정찰대의 우주선이 토드의 마을 인근에 추락하고, 우주선의 유일한 생존자 바이올라(데이지 리들리)는 마을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던 프렌티스의 표적이 된다. 이에 토드는 바이올라와 함께 프렌티스에게서 도망치고, 추격전이 벌어진다. <카오스 워킹>은 <엣지 오브 투모로우>나 <아메리칸 메이드> 등의 영화로 알려진 더그 라이만의 신작으로, 페트릭 네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영화의 설정은 나름 흥미롭다. 생각이 남에게 들릴 뿐 아니라 가시적인 모습으로 보인다는 것은 영화적으로 활용할 방법이 무궁무진하다고 해도 무방하다. 영화의 몇몇 장면에서는 그것을 나름대로 유의미하게 활용하기도 한다. 가령 토드가 프렌티스의 아들 데이비(닉 조나스)를 놀려주기 위해 뱀을 생각해 뱀의 형상을 나타낸다거나, 프렌티스가 자신의 생각을 환영처럼 부리는 것, 토드가 생에 처음 본 여성 바이올라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등의 장면은 나름의 유머와 흥미로움을 끌어내는 장면이다. 문제는 말로 이루어진 생각들이 표현되는 방식이다. 그것들은 모두 배우의 음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때문에 영화엔 끝없이 배우들의 음성이 흘러나온다. 더군다나 영어권 국가가 아니기에, 말로 구성된 이들의 생각은 모두 자막으로 등장한다. 끔찍하게 산만한 화면이 영화 내내 이어지고, 몇몇 장면은 인물의 입으로 발화된 대사와 생각한 것 사이의 분간이 어려운 수준이다.      

 이러한 ‘노이즈’의 설정엔 한 가지가 더 있다. 여성은 노이즈에 감염되지 않지만, 남성은 감염된다는 점이다. 토드를 주인공 삼아 전개되는 이야기에서, 여성은 속을 알 수 없는 존재로, 남성은 자기 생각을 감추기 위해 끝없이 강해져야 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토드는 끝없이 자신의 이름을 생각하며 생각을 노출하지 않으려 노력하는데, 빈번히 실패로 돌아가는 그의 노력은 이 영화의 주요 테마인 ‘유해한 남성성 비판’의 중심축을 이룬다. 다만 영화가 묘사하려는 설정 자체의 산만함 속에서 영화의 주제는 제대로 구체화되기도 전에 자잘한 유머로 흩어진다. 구현하기 쉽지 않은 방식이었겠지만, 인물들의 생각을 말로 듣게 하는 대신 보이는 이미지들로만 표현하는 방향으로 ‘노이즈’라는 설정을 활용했다면 조금 더 깔끔한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데이비, 목사(데이빗 오예로워), 뉴 월드의 다른 마을인 파브랜치의 시장 힐디(신시아 에리보) 등의 캐릭터는 그야말로 배경처럼 쓰이고 퇴장하거나 어느 순간 극에서 사라지는 것의 문제점도 있다. 이들 캐릭터는 영화 내에서 아무런 쓸모도 얻지 못한 채 러닝타임만 낭비하고 있다. 지금의 결과물은 <카오스 워킹>이라는 독자적인 작품이라기보단, 도리어 톰 홀랜드가 차기작 <언차티드>를 위해 이런저런 예행연습을 해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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