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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포함 


 드디어 받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다섯 번의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진출 끝에 황금종려상을 손에 넣었다. <만비키 가족>(좀도둑 가족이라는 뜻, 국내 개봉제목은 <어느 가족>)이라는 제목과 극의 내용 때문에 일본 본토에서는 환대받지 못했지만 말이다. 국내에서도 <아무도 모른다>, <걸어도 걸어도>, <바닷마을 다이어리> 등의 작품으로 현재 가장 지명도가 높은 일본 감독이다. 아무래도 가족이라는 테마와, 국내 관객들이 일본 영화 하면 쉽게 떠올리는 싱그러운 영화의 룩 때문에라도 고레에다의 작품들이 잘 알려져 있지 않나 싶다. 그의 열두 번째 작품인 <어느 가족>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작품 세계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불안정한 상황에 놓인 인물들이 연대하며 가족을 이루다가도 어느샌가 그들의 관계가 붕괴되기도 하고, 이러한 가족의 해체를 나름대로 냉철하게 짚어내면서도 가족이라는 이름의 아름다움을 끌어낸다는 것이 고레에다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그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어느 가족>은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한 집에서 살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일용직 노동자 오사무(릴리 프랭키), 세탁업체 노동자 노부요(안도 사쿠라), 남편의 연금을 받아 살아가는 하츠에(키키 키린), 퇴폐업소에서 일하는 아키(마츠오카 마유),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이곳저곳에서 좀도둑질을 하며 살아가는 쇼타(조 카이리)가 그 주인공이다. 영화는 이들의 공동체에 우연하게 유리(사사키 미유)라는 어린 소녀가 들어오게 되면서 시작된다. 어렵사리 생계를 이어가고, 가까운 바닷가로 여행을 가거나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 불꽃놀이의 소리를 들으며 조금씩 유대감을 키워가는 그들의 생활은 언뜻 행복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하츠에가 노환으로 사망하고, 쇼타가 도둑질을 하던 중 붙잡히면서 그들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다. 결국 가족은 해체되고, 누군가는 감옥으로, 누군가는 보호시설로, 누군가는 집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어느 가족>은 고레에다의 여러 전작들을 연상시킨다. 아이를 학대하고 방치하는 어머니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아무도 모른다>를, 할머니-손녀-어느 소녀-어머니뻘의 여성으로 이어지는 여성연대는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아버지됨이라는 욕망을 품은 오사무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경찰이 노부요를 취조하는 장면에선 바로 전작인 <세 번째 살인>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가족>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모습들은 꽤나 기계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가령 도둑질 직전에 오사무, 쇼타, 유리 등이 주고받는 손가락을 빙빙 돌리는 수신호는 어떤 연대의 상징처럼 등장하지만, 결국 가족의 해체라는 서늘한 풍경을 그려내기 위한 기계적인 장치로서 등장할 뿐이다. 각 캐릭터들이 맡은 역할도 유사하다. 고레에다의 영화들이 항상 그렇듯, 아버지는 아버지됨을 욕망하는 반면 어머니는 어머니됨을 거부하고 종종 아이들에게 폭력적인 상황을 만들어낸다. 어머니와 아이가 지워지고 아버지만 남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나 사망한 아버지의 유언을 통해서야 봉합되는 배다른 자매들의 이야기였던 <바닷마을 이야기> 속 아버지상은 <어느 가족>에서도 이어진다. 자신의 본명을 쇼타에게 부여한 오사무의 행동이나,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은 소거되고 오사무와 쇼타의 유사부자관계만 남은 후반부가 이러한 아버지상의 연장선상이다. 



 동시에 유리를 학대하고 방치하는 친어머니의 모습은 <아무도 모른다>의 어머니와 유사하게 그려진다. 노부요는 엄마라고 불리길 거부하고, 성녀/창녀 이분법적인 캐릭터로 그려지는 아키나 애초에 어머니와는 거리가 먼 하츠에 캐릭터는 극 중 아버지로 그려지는 캐릭터에 비해 어딘가 이기적으로 보인다. 물론 노부요가 감옥에 수감됨으로써 어떤 면죄부를 부여받는 듯 하지만, 결국 오사무에게 아버지라는 지위를 부여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할 뿐이다. 특히 아키의 캐릭터는 가족의 해체 이후 극에서 실종되어 버린다. 후반부에서 사망 처리된 하츠에와 더불어 어머니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창녀, 노인, 특히 오사무와 노부요가 죽은 하츠에를 두고 남편의 연금을 받는 것도 모자라서 다른 가족에게 돈을 받는 것을 두고 욕하는 부분 또한 성녀/창녀 이분법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두 여성이 삭제되고, 오사무와 쇼타의 유사부자관계를 부각한다. 유사한 결점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은 아버지됨이라는 욕망을 현실화하는데 일정 부분 성공하고(때문에 쇼타의 “아빠”라는 입모양이 등장하는 영화 끝자락의 쇼트는 불편하게만 느껴진다), 여성은 어머니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기에 극에서 삭제되거나 감옥에 갇힌 노부요처럼 배제된다. 더욱이 남자아이인 쇼타에겐 가족 재구성의 기회가 주어지는 반면, 학대하는 어머니의 죄를 이어받듯 새로운 가족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여자아이 유리의 모습 또한 대조적이다. 



 결국 고레에다의 영화 속 붕괴되는 가족에서 가장 철저하게 파괴되는 것은 여성과 아이들이다. 성인 남성들의 고뇌 사이에서 여성과 아이들은 그것의 소재로 존재한다. <어느 가족>의 가족이 붕괴되기 전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그들이 함께 바닷가로 여행을 떠났을 때이다. 그 아름다운 순간 사이 쇼타의 시점 쇼트로 비키니를 입은 아키의 가슴이 클로즈업되고, 오사무는 쇼타에게 “가슴이 좋지?” 같은 대사를 내뱉는다. 고레에다의 가족에서 여성의 위치는 무엇인가, 아이의 시점은 누구의 시점을 대리하는가, 영화 속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대상화되는 것은 누구의 신체인가를 고려해보면 그의 영화는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어진다. 이것이 고레에다만의 가족관인지, 아니면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사회와 그의 영화에 지지를 보내는 서양 평론가들)의 가족관인지 정확하게 구분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영화 속 다양한 형태의 가족 구성원 중에서 배제되는 사람이 누구인지, 재기의 기회가 누구에게 주어지는지 고려해보면 그가 다루는 인간성이 어디에 국한된 것인지 추측할 수 있다. <어느 가족>이 고레에다의 집대성이라면, 이러한 부분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난 작품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점점 지지하기 어려워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포일러 포함


 <용서받지 못한 자>로 잊지 못할 데뷔를 한 윤종빈 감독이 <군도: 민란의 시대> 이후 오랜만에 신작을 내놓았다. 90년대 북한 핵개발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사업가로 위장한 안기부 공작원, 흑금성이라는 암호명으로 불린 박석영(황정민)의 실화를 담아낸 작품이다. 영화는 그가 안기부 공작원으로 스카우트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박석영은 안기부 실장 최학성(조진웅)의 명령에 따라 북한의 외화벌이를 책임지는 당의 간부 리명운(이성민)과 접촉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떠난다. 몇 개월 간의 노력 끝에 리명운과 접촉한 박석영은 광고 사업을 빌미로 북한 곳곳을 돌아다니려 한다. 그가 리명운, 그리고 인민군 장교인 정무택(주지훈)과 함께 사업을 벌이는 동안 1997년 대선이 다가온다. 박성영은 최학성과 여당 정치인들이 대선을 앞두고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안기부의 새로운 명령의 따를지, 기존의 공작을 완수할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최근 남북관계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방학 시즌 텐트폴 영화로 떠오르고 있다. <공조>부터 <브이아이피>, <강철비>, 얼마 전 개봉한 <인랑>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떠오른다. 게다가 5월에 있었던 남북정상회담이 열려 남북한을 소재로 담은 영화들에 대한 관심 또한 더욱 높아지고 있다. 그러한 와중에 개봉한 <공작>은 90년대라는 멀지 않은 과거를 이야기하고 있다. 흑금성이라는 인물은 지금과 같은 상황에 적절한 소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업가로 위장하여 북한에서 남한 기업의 광고 촬영과 금강산 관광을 빌미로 북한에 들어가려다가 결국 대북 사업가가 되어버린 인물이라는 점은 흑금성의 이야기가 통일을 이야기하는 지금과 썩 어울리는 이야기가 아닐까? 게다가 당시 여당의 정권을 유지하려는 안기부와 자신이 수행하는 공작 사이에서 고민하는 박석영의 모습은 무엇을 청산하고 무엇을 취해야 할지 고민해야 할 현재 시점의 상황과도 썩 어울린다.



 이러한 과정에서 악수와 건배라는 제스처는 썩 적절하게 활용된다. 악수는 본래 서로가 무기를 들고 있지 않음을 알려주기 위한 행동이다. 이제는 의례적인 절차이지만 종종 상징적으로 느껴진다. 최근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에서의 악수가 그렇다. <공작>의 인물들은 쉽게 악수를 건네지 않는다. 그들의 악수는 대부분 의미심장한 표정과 함께한다. 서로를 시험해 보는 순간, 드디어 신뢰를 쌓았을 때, 각자의 신념을 인정하고야 말 때 그들은 악수한다. 이러한 과정은 의심 없이 악수할 수 있을 때가 되어야 공존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하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의 건배 또한 그렇다. 박석영은 공작원이 되기 위해 날마다 술을 마셨지만, 흑금성이라는 이름을 얻은 이후에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때문에 그는 건배를 하지 않는다. 대신 리명운에게, 심지어 김정일(기주봉)에게 술을 따라주기만 한다. 후반부에 이르러, 그는 리명운과 건배를 한다. 부모님까지 들먹여가며 술을 피하던 그가 건배를 하는 순간은, 각자의 신념에 대한 이해와 신뢰가 들어있는 건배다. 남북정상회담을 연상시키는 마지막 장면의 악수 (직전의 순간) 또한 그렇다.



 다만 <공작>은 영화의 제작사인 사나이픽쳐스의 다른 영화들과 유사한 지점에서 좋아하기엔 어려운 작품이다. 듀나 작가는 <공작>을 보고 최근 한국영화 속 북한은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남성성이 남아있는 오아시스” 같다고 이야기했다. 극도로 남성적인 한국영화가 남성성을 마음껏 발현할 새로운 공간인 북한을 찾아낸 것이다. 이것을 액션으로 드러낸 <공조>나 <강철비>, 여성혐오적 범죄로 드러낸 <브이아이피> 등은 이러한 공통점을 가진다. <공작>은 누군가 죽거나 부상당하는 액션이나 범죄 대신 대화라는 전략을 택했다는 점에서 신선하긴 하다. 허나 경상도 사투리를 쓰며 사업가를 연기하는 박석영이나, 공산주의 체제에 있지만 여러모로 (남성화된) 자본주의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리명운과 정무택의 모습에서 어떤 지겨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박석영과 리명운의 브로맨스로 흐르는 후반부는 한국영화의 어떤 고질병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유사한 영화에 겹치기 캐스팅으로 자신들을 소비해버린 배우들의 비주얼에서 느껴지는 기시감도 이러한 지겨움에 한몫한다. 때문에 <공작>은 오랜만에 등장한 웰메이드 한국 상업영화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국영화에 대해 어떠한 갈증을 가질 수밖에 없는지 재확인하는 작품이기도 했다.

<맘마미아!>가 딱 10년 만에 돌아왔다. 동명의 뮤지컬을 원작으로 한 전편은 최근 10년 사이 개봉한 뮤지컬 영화 중 가장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한 흥행작이었다. 메릴 스트립을 필두로 한 화려한 캐스팅과 아바(ABBA)의 노래들로 채워진 뮤지컬 넘버들만으로도 황홀한 작품으로 기억한다. <맘마이아! 2>는 프리퀄이면서 동시에 시퀄인 형식을 취한다. 전작에서 5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시점, 도나(메릴 스트립)의 죽음 이후 소피(아만다 사이프리드)는 그녀의 소원이었던 호텔을 오픈하려 하고, 세 아빠에게 초대장을 보낸다. 오랜 준비 끝에 드디어 오프닝 파티 전 날, 여러모로 심란해진 소피는 도나의 젊은 시절은 어땠을지 생각해본다. 영화는 이렇게 젊은 도나(릴리 제임스)가 등장하는 과거와 소피를 비롯한 전작의 주역들이 등장하는 현재를 오가며 진행된다. 도나가 어떻게 샘(피어스 브로스넌/제레미 어바인), 해리(콜린 퍼스/휴 스키너), 빌(스텔란 스카스가드/조쉬 딜란)을 만났고 어떻게 그리스의 한 섬에 자리 잡게 되었을까, 소피는 무사히 도나의 꿈을 이뤄줄 수 있을까, 이번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맘마미아! 2>의 이야기는 확실히 무리수가 많다. 마치 메릴 스트립의 도나가 등장하는 딱 하나의 장면을 미리 정해두고, 이것에 맞춰서 이야기를 쓴 것만 같다. 이야기 자체만 놓고 보면 (물론 전작도 그랬지만)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다. 하지만 이번 작품 역시 전작과 마찬가지로 뮤지컬 영화만이 가능한 장점들로 이야기의 부실함을 채운다. 전작이 메릴 스트립과 아바의 노래라는 막강한 두 축으로 영화를 지탱했다면, 이번 작품은 메릴 스트립의 부재를 도나의 젊은 시절을 연기하는 릴리 제임스와 현재 시점의 아만다 사이프리드로 채운다. 특히 릴리 제임스의 활약이 돋보이는데, 묘하게 젊은 시절의 메릴 스트립을 연상시키는 외모부터 영화 전체를 자신의 것으로 이끌어가는 노래 실력과 연기를 선보인다. ‘When I Kissed the Teacher’를 부르며 등장하는 젊은 도나를 보고 있으면, 릴리 제임스만큼 이 배역에 어울리는 배우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와 함께 출연한 다이나모스, 전작에서 각각 크리스틴 바란스키와 줄리 월터스가 연기했던 타냐와 로지의 젊은 모습 또한 더 이상 좋은 캐스팅은 없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제시카 키나 윈과 알렉사 데이비스가 연기한 젊은 타냐와 로지는 전편의 배우들과 놀라운 싱크로율을 보이는 것은 물론, 릴리 제임스에 뒤지지 않는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비록 젊은 세 아빠를 연기한 배우들의 캐스팅(특히 해리를 연기한 휴 스키너는 완벽한 미스캐스팅이다)이 아쉽지만, 젊은 시절의 도나 앤 다이나모스를 만나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러닝타임 내내 즐겁기만 하다. 



‘Dancing Queen’, ‘I Have a Dream’, ‘Super Trooper’ 등 전작에도 등장했던 곡들을 다른 배우들, 혹은 더 많은 배우들이 함께 부르는 광경은 전작을 사랑하는 관객이라면 즐길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과거와 현재 시점을 오가는 편집이 다소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두 개의 타임라인은 아바의 노래를 통해 꽤나 효과적으로 봉합된다. 연출자가 바뀌었지만 생각보다 매끄럽게 짜인 뮤지컬 시퀀스들은 객석에 조용히 앉아 있어야만 하는 극장 에티켓을 무시하고 뛰어놀고 싶어 질 정도이다. 특히 메릴 스트립이 등장하는 딱 하나의 장면은 산만하게 흩어진 두 개의 타임라인을 완벽하게 봉인한다. 이 정도의 존재감을 지닌 배우만이 가능한 장면이고, 메릴 스트립이 있기에 각본으로 쓰일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싶다. 단 한 장면 만으로 영화의 퀄리티를 바꿔버리는 메릴 스트립의 노래와 연기는 이를 동시대에 개봉관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뿐이다. 과거와 현재의 배우들이 한데 모여 ‘Super Trooper’를 부르는 영화의 마지막 무대는 영화가 지닌 단점들을 완전히 지워버린다. 이 이상으로 즐거운 속편을 만드는 게 가능할까 싶기도 하다. 엔드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흐르는 메릴 스트립이 부른 ‘The Day Before You Came’을 듣고 있으면, 허술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눈물이 맺히는 경험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평적으로 큰 성과를 올린 애니메이션 <페르세폴리스>의 공동연출자이자 원작 그래픽노블을 쓴 마르얀 사트라피의 2014년 연출작 <더 보이스>가 뒤늦게 한국에 개봉했다.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제리(라이언 레이놀즈)를 둘러싼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공장 노동자인 제리에겐 동료들은 모르는 어린 시절의 비밀이 있다. 게다가 그는 종종 자신이 기르는 개 그리고 고양이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어느 날 공장 경리부의 피오나(젬마 아터튼)를 보고 첫눈에 반하지만, 사고로 인해 그를 죽이게 된다. 이후 제리는 이를 모르는 다른 경리부 직원 리사(안나 켄드릭)와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어느 날 리사가 제리의 비밀을 알게 된다. 싸이코 연쇄살인마의 속내를 다룬다는 점에서 TV시리즈 <한니발> 등의 작품들이 연상되기도 한다. 하지만 라이언 레이놀즈나 안나 켄드릭 등의 캐스팅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 코미디의 톤을 띈 초반부와 밝은 톤의 이미지들이 영화를 채우고 있다. 




 <더 보이스>는 상당히 애매한 작품이다.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싸이코 살인마의 심리상태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들, 가령 학대당하던 어린 시절이나 어머니(발레리 코흐)의 죽음에 대한 기억, 정신분열증적인 상태를 강조하기 위한 집의 두 모습 등은 기대보다 잘 연출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살해하는 대상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 그리고 그것이 다소 유아적으로 그려지는 제리의 성격을 묘사하는데 할애되어 있다는 점은 아쉽기만 하다. 극 중 등장하는 여성들은 모두 제리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한 재료로 소비되고 만다. 이러한 장치는 종종 효과적이기도 하지만 대게 남성 주인공을 관객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여성 캐릭터를 착취한다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 리사와 피오나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정신과 상담사인 워렌(재키 위버) 캐릭터 또한 제리를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기능한다. 게다가 엔딩크레딧과 함께 등장하는 <더 보이스>의 다소 어처구니없는 해결은 여성 캐릭터들을 그저 소비했다는 비판을 더욱 강화시킨다. 라이언 레이놀즈와 안나 켄드릭 등 출연진의 호연과 시퀀스 단위로는 꽤나 만족스러운 연출에 비해 손쉬운 방식으로 제리라는 캐릭터를 이해시키려 한 각본이 아쉽기만 하다.



 <데드풀>이나 <킬러의 보디가드> 등으로 만들어진 라이언 레이놀즈의 이미지 덕분에 <더 보이스>는 슬레셔 코미디로 홍보되고 있다. 포털 사이트의 영화 정보란에도 코미디 장르로 분류되어 있다. 하지만 <더 보이스>는 코미디 보단 싸이코 드라마에 가깝다. 제리의 분열된 심리상태를 드러내는 몇몇 장면들은 꽤 탁월하다. 제리의 반려동물들이 건네는 말들은 코미디의 톤을 지니긴 했지만 도리어 그의 심리상태를 다각도로 드러내게 된다. 동시에 제리에 의해 살해된 여성들이 유사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영화의 한계가 명확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각본이 조금 더 섬세했다면, 조금 더 철저했다면 수작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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