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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포함 


 액트업(Act Up)은 에이즈에 대한 무관심과 편견에 맞서는 행동주의 단체이다. 1987년 뉴욕에서 창립된 액트업은 1989년 액트업파리의 창단으로 유럽에서의 활동 역시 시작한다. 2017년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120 BPM>은 이 시기 액트업파리의 활동가들을 그려낸 작품이다. 액트업파리에 막 가입한 나톤(아르노 발로아), 창립멤버인 션(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 대표격인 회원인 티부(앙투안 라이나르츠), 액트업파리의 실질적인 행동을 이끄는 소피(아델 에넬) 등의 이야기가 영화 속에서 펼쳐진다. 영화의 전반부는 액트업파리의 활동이 무엇이고, 그들의 목표가 무엇이며, 어떻게 활동을 전개했는지를 다루고 있다. 후반부에서는 에이즈 양성 판정을 받은 션이 죽음에 가까워지고, 그의 죽음이 액트업파리의 운동과 션 본인의 활동에 어떻게 얽히는지를 그려낸다.  



 영화의 마지막 즈음, 션의 죽음 이후 액트업파리의 활동자이자 친구들은 그의 집에 하나둘씩 모인다. 그중 한 명이 미완의 추도사를 읽는다. 추도사 중엔 “션의 몸이 정치였다”라는 구절이 있다. <120 BPM>의 핵심은 바로 그 구절이다. 영화가 시작하고 나톤을 비롯한 신입 멤버들은 한 활동가에게 액트업파리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그중 “외부의 사람들은 네가 에이즈 양성이든 음성이든 상관없이 액트업의 활동가 모두를 에이즈 양성이라고 생각하고 대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나톤은 에이즈 음성이지만 액트업에 가입하고 활동을 이어간다. 결국 액트업의 활동의 핵심은 이것이다. 에이즈 양성인 사람의 몸, 더 나아가 그들과 연대하고 행동하면서 에이즈 양성이라 다뤄지는 몸은 어떻게 정치적으로 등장하는가? 기피의 대상이며, 어둠 속에 있는 성소수자/직업여성/약물중독자라 손가락 받는 사회적 소수자인 그들의 육체에 어떻게 밝은 빛을 비출 것인가?  



 영화의 처음 절반 가량 이어지는 액트업파리의 행동들은 이러한 생각에 기반하여 실행된다. 에이즈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지만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에이즈 환자들을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바라보는 제약회사를 급습하여 사무실에 가짜 피를 뿌린다던가, 에이즈 환자들을 위한 정부기관이라 홍보되지만 실질적으로는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기관의 포럼에 난입하여 발언하고, 한 활동가가 에이즈로 인해 사망하자 검은 옷을 입고 거리로 나서 행진하는 등의 행동이 이어진다. 그중엔 수업 중인 고등학교 교실에 들어가 청소년들에게 콘돔과 에이즈 예방에 관련된 홍보물을 나눠주며 에이즈와 예방수칙에 관한 설명을 하는 행동도 있다. 동시에 학교의 교장에게 청소년들의 피임과 에이즈 예방을 포함한 안전한 성생활 보장을 위한 콘돔 자판기 설치 권고를 지키라는 요구를 하고, TV 카메라를 대동해 이를 뉴스에 내보내기도 한다. 나톤과 션의 섹스 장면에서 콘돔 착용이 강조되는 것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작용한다. 이러한 행동들은 비록 과격해 보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 직접적인 폭력을 행하지는 않는 운동들이며, 이를 통해 호모포비아를 비롯한 여러 혐오자들로 인해 비가시화된 에이즈 환자의 몸과 현재를 드러낸다. 액트업파리의 활동가들은 자신들의 몸을 드러냄으로써 사회구성원으로서 질병을 치료받을 수 있는 권리를 외치며, 그로 인한 차별을 금지하고, 에이즈 확산을 방지할 예방책을 요구한다. 결국 그들이 몸을 드러내는 것은 곧 정치적 행동이며, 그것 자체가 하나의 운동이자 요구가 된다. 한 국가의 사회구성원으로서 최우선적으로 지켜져야 할 생존권을 보장받기 위해 자신들의 몸을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영화의 제목인 <120 BPM>은 1980~90년대 유럽에서 유행하던 음악의 리듬이다. 액트업파리의 활동가들은 시위나 회의 등의 활동을 마치고 클럽을 찾아 춤을 추곤 한다. 이러한 장면들에서 반복되는 연출이 있다. 조명 아래서 춤추는 사람들을 잡던 카메라는 포커스를 조명에 비친 먼지로 옮겨간다. 먼지들은 마치 SF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바이러스 같기도 하고, 우주의 별처럼 빛나기도 한다. 포커스 아웃된 사람들이 일렁이는 흐릿한 형상은 우주의 성운처럼 느껴지고 떠다니는 먼지들이 반짝이며 자그마한 소우주를 이룬다. 그들의 소우주에는 연대의 물결이 있고, 행동하는 육체가 있고, 위로가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이러한 장면 뒤에 반짝이는 조명 아래 액트업파리 활동가들의 얼굴이 잠깐씩 비친다. 그 빛이 잠시 스쳐가는 빛이 아닌, 박동하는 그들의 육체 위에 계속 비치는 빛이기를, 120 BPM의 음악이 끝나고 찾아오는 묵념의 엔드크레딧에서 기도했다.

 석면 문제가 내게 가시화된 것은 중고등학교 때였다. 아파트 길 건너 구역의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철거되는 건물에 사용된 자제에서 나온 석면가루가 어린이집과 학교를 비롯한 인근 지역에 흩날리고 있다는 보도를 통해서였다. 때문에 재개발구역 인근 거주자들과 재개발을 주관하는 건설사 사이에 법정공방이 이어졌고, 본래 내가 졸업하기 전 입주가 시작됐어야 할 뉴타운 지역에는 대학교 새내기가 되고 난 이후에야 입주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을 때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이라는 직관적인 제목을 접하고 나서 저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중학교를 들어가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약 6년의 기간 중 대부분의 시간 동안, 재개발 공사는 석면과 관련된 소송으로 멈춰있었고 어린 시절 친구들이 살던 골목길은 전시의 폐허처럼 변해 멈춰있었다. 하라 카즈오 감독의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의 피해자들이 8년 반 간의 투쟁을 진행하는 것을 보고 위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 



 8년 반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기록한 215분의 기나긴 영화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영화에 등장하는 이들의 얼굴이다. 피해자의 얼굴. 그들의 가족과 유가족의 얼굴. 변호인단의 얼굴. 연대자의 얼굴. 영화를 찍는 감독의 얼굴. 영화를 보면서도, 영화를 보고 나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들의 얼굴이다. 그들의 얼굴은 그림으로 박제되어 스크린에 등장하기도 하고, 프리즈 프레임과 함께 사망했다는 정보가 제시되기도 하고, 장례식장의 영정과 창백한 시신으로 변한 얼굴로 등장하기도 한다. 원고 측 사망자들의 얼굴과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며 마무리되는 영화는 그들의 얼굴을 관객의 뇌리 속에 각인시킨다. 석면으로 인한 각종 질병을 앓으며 점점 야위어가고, 코에 산소호흡기 튜브를 끼지 않으면 일상을 이어갈 수 없는 그 얼굴들은 국가가 은폐하려 했던 열악하고 위험한 노동현장의 얼굴이다. 기나긴 소송의 과정을 담는 하라 카즈오의 카메라는 그들의 얼굴에서 분노, 체념, 인생, 위로, 연대, 승리, 기쁨, 진보를 읽어낸다. 그 얼굴 중에는 일제강점기에 개발된 한반도의 석면 광산에서 일했던 사람의 얼굴도 담겨있다. 이러한 역사적 관계성과 얼마 전까지 한국의 재개발 구역을 비롯한 곳곳에서 벌어지던 석면 문제는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이 단지 물 건너 다른 나라의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점을 (적어도 한국 관객들에게는) 확실하게 어필한다. 



 이러한 측면만 바라본다면 어쩌면 단순한 투쟁에 대한 기록과 사법체계를 통한 승리의 서사만으로 영화가 구성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하라 카즈오의 카메라는 멈추지 않는다. 멈추지 않는다는 말이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의 카메라와 가장 어울리는 수식어인 것 같다. 영화는 단순히 투쟁을 기록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이번 인다다큐페스티발에서의 상영에서는 제공되지 않았지만, 영화 속에 삽입된 휴식시간 이후의 분량은 이러한 투쟁과 운동이 지닌 방향성에 대한 확장과 그다음의 전진을 논한다. 대법원의 판결로 원고는 배상을 받았고 후생노동청 장관이 직접 센난을 방문해 사과하기도 했지만, 판결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1972년 이후에 노동을 시작한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은 인정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1958년과 1971년 사이의 노동자만 배상 대상에 포함시키는 판결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석면 산업의 피해자들을 포괄하지 못한다. 더 나아가 석면 공업지대 인근 지역의 거주자들, 수치에 포함되지 못한 피해자들 등의 문제도 남아있다. 게다가 과거 군국주의 일본이 남긴 한반도의 석면광산과 산업, 이탈리아와 캐나다 등 해외 여러 국가의 석면문제 등은 (영화 속에서 언급되는 시점에서는) 미해결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이를 이야기하는 아오키 씨의 말대로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의 결과는 그 자체로 시작이다. 하라 카즈오의 카메라는 그 시발점을 마련하기 위한 투쟁의 방식과 이후 이어질 운동의 방향까지 다가간다. 215분의 기나긴 러닝타임을 지나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이 당도한 지점은 또 다른 시발점이자 이를 지속하겠다는 다짐이다.

*스포일러 주의 


 홍상수의 21번째 장편영화인 <그 후> 보다 늦게 20번째 장편영화가 국내에 도착했다. 오늘(4월 18)일 언론시사회 및 영화비평독립잡지 필로(FILO)의 창간 기념 상영회를 통해 국내에 첫 상영된 <클레어의 카메라>는 2011년 <다른나라에서> 이후 이자벨 위페르가 다시 한번 홍상수와 함께 작업하는 것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들의 재회가 가능했던 것은 영화가 2016년 칸 국제영화제 기간에 칸을 배경으로 촬영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홍상수와 22번째 작품인 <풀잎들>까지 내리 5작품을 함께하는 중인 김민희는 <아가씨>로, 이자벨 위페르는 폴 버호벤의 <엘르>로 각각 칸을 찾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직접 칸 국제영화제를 언급하지는 않지만, 영화 내내 영화제가 언급되고 칸을 찾은 여러 영화계 종사자들이 등장하기에 관객들은 어렵지 않게 영화가 칸 영화제 기간의 칸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영화의 내용은 익숙한 홍상수의 작품들과 유사하다. 영화제 기간 동안의 업무를 위해 칸을 찾은 영화사 직원 만희(김민희)는 갑작스레 상사인 양혜(장미희)에게 해고당한다. 양혜는 만희가 부정직하다는 이유 외에는 다른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얼떨결에 일도 없이 칸에 남게 된 만희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그러던 중 만희가 만나게 된 클레어(이자벨 위페르)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들고 풍경과 사람들을 찍고 다닌다. 한편 양혜는 영화제에 초청된 완수(정진영)와 함께 영화제 일정을 준비한다. 둘의 대화를 통해 양혜와 완수는 애정관계에 있으며, 완수가 술에 취해 만희와 보낸 하룻밤에 의해 해고된 것임이 밝혀진다. 술과 술자리, 애정문제, 외도 등 익숙한 소재들이 69분의 짧은 러닝타임 동안 이어진다.



 칸에서 <클레어의 카메라>가 촬영되는 동안 국내에서는 홍상수와 김민희의 외도 루머가 등장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 김민희와의 협업 이후 그의 외모를 한 여성 캐릭터가 홍상수의 페르소나와도 같은 찌질한 남성 캐릭터들을 찍어 누르는 분열적인 작품이었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선 애정에서 비롯된 존중을 그려내기도 했다. <그 후>는 의외로 장르적인 문법을 (약간) 차용하여 삶과 사랑을 예찬하는 영화였다. <클레어의 카메라>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과한 홍상수의 가장 반박적인 영화인 것으로 느껴진다. 만희와 완수, 기시감이 느껴지는 두 캐릭터의 이름과 영화의 첫 쇼트에서 목격되는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의 포스터는 <클레어의 카메라>가 홍상수의 그 어떤 영화들보다도 강하게 본인의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지는 요소들이다.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든 클레어는 칸을 찾은 세 한국인(만희, 양혜, 완수)의 곁을 맴돌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카메라에 담아낸다.



 만희는 클레어에게 “당신은 왜 사진을 찍나요?”라고 묻는다. 클레어는 “왜냐하면 세상 일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만사를 다시 매우 천천히 보는 것이기 때문이지요.”라고 답한다. 관객은 클레어를 따라 세 명의 인물을 바라본다. 클레어는 또한 “사진을 찍힌 사람은 그 전과 다른 사람이 돼요.”라고 말한다. 촬영과 동시에 사진을 인화해내는 클레어의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재빠르게 카메라에 담긴 이와 카메라 밖의 존재를 분리한다. 사진에 담긴 이와 이를 바라보는 카메라의 찍힌 이는 이미 다른 사람이다. 클레어는 이에 의문을 가진 완수와 양혜에게 천천히 자신의 눈을 응시할 것을 요구한다. “느낌이 이상하다.”라고 말하는 완수는 이를 통해 카메라에 찍히기 이전의 자신과 이후의 자신을 분리해낸다. <클레어의 카메라>의 서사 속 시간은 뒤죽박죽이다. 관객은 클레어의 눈을 응시하는 완수처럼 스크린을 응시하며 뒤틀린 시간을 맞춰보려 한다. 만희가 해고당한 당일, 그로부터 3일이 지난 시점, 그리고 그다음 날.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는 극 중 시간에서 클레어의 카메라에 담긴 옥상 위 만희의 시간은 그 위치가 불분명하다. 위선으로 가득한 완수와 양혜가 짜 맞추려는 만희의 시간은 영화 속에서 돌출되어 분리된다. 이러한 분리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라는 기계장치를 통해 즉각적으로 분리되는 개인이라는 감각과 연결된다. 영화는 이러한 개인을 천천히 응시하기를 바란다.



 홍상수는 반복적인 이야기를 끊임없이 변주한다. 홍상수라는 개인이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클레어의 카메라>역시 이러한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도리어 스캔들 이후 음모론을 세우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물어뜯기 가장 좋은 대상이 된다. 그가 한국이라는 공간을 벗어나 촬영한 세번째 영화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홍상수라는 개인이 가장 적극적으로 드러난 작품이다. 칸 국제영화제 기간에 촬영된 <클레어의 카메라>는 그의 최근 필모그래피 (특히 김민희를 만난 이후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애매한 작품이라 느껴지지만, 동시에 여전한 그의 훌륭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의 제목인 <클레어의 카메라>는 에릭 로메르의 도덕 이야기 6부작의 <클레어의 무릎>을 연상시킨다. 무척이나 성애적인 관점에서 그려진 <클레어의 무릎>이 지닌 육감적인 감상과 <클레어의 카메라> 속 ‘카메라’라는 기계장치의 이성은 사뭇 대조적이다. 홍상수가 카메라라는 장치를 꺼내 든 것은 영화가 그려내는 개인과 영화를 촬영하는 카메라라는 기계장치가 담아낸 위선을 응시하길 바라는 것에서 시작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스포일러 포함 


 상파울루의 빈민가에 사는 클라라(이자벨 주아)는 집세를 내기 위해 일을 구하는 중이다. <굿 매너스>는 보모를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면접을 보러 가는 클라라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보모를 구하는 사람은 아나(마르조이 이스치아누)다. 임신한 이후 가족들과 떨어져 도시에서 홀로 살고 있는 아나에겐 충분한 돈은 있지만 그를 돌봐줄 사람은 없다. 아나에게 고용된 클라라는 아나의 집에서 함께 살면서 가정부 역할과 그를 돌보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이내 가까워진 그들의 감정은 사랑에 가까워진다. 보름달이 뜬 어느 날, 클라라는 아나가 몽유병 환자처럼 냉장고 앞을 서성이고, 집 밖으로 나가 주변을 배회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나의 아기가 태어나려 하고, 클라라는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아나의 아이인 조엘(미구엘 로보)은 늑대인간이다. 아나는 늑대인간이 아니었지만, 뱃속에 있는 조엘의 영향 때문인지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고기를 찾아 배회하고, 길고양이를 잡아먹기도 한다. 아나에게 진통이 시작되자 뱃속에 있던 조엘은 아나의 배를 손으로 찢고 나온다. 그 바람에 아나는 죽고, 클라라는 신생아인 조엘을 죽이려 하지만, 이내 동정심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죽일 수 없다는 생각에 그를 거두어 기르기로 한다. 출산 장면 이후에 이어지는 후반부는 클라라가 빈민가에서 조엘이 늑대인간이라는 사실을 숨겨가며 양육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굿 매너스>는 독특한 장르영화다. 136분의 짧지 않은 러닝타임은 마치 1부, 2부 구성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처럼 다른 장르를 채택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아나와 클라라가 함께하는 전반부는 통속적인 로맨스 서사처럼 느껴진다. 충격적인 출산 장면 이후 이어지는 후반부는 비밀을 감추고 생활하는 인물이 등장하는 호러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이 장르의 주인공은 보름달 하면 떠오르는 괴물, 늑대인간이다. 조엘의 늑대인간이라는 정체성은 계속해서 감춰진다. 클라라는 육중한 무쇠로 된 숨겨진 문을 만들고, 매달 보름달이 뜨는 날마다 문 뒤에 있는 작은 방에 조엘을 사슬로 묶어둔다. 클라라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 조엘을 그의 아들로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 의문을 품지는 않는다. 그러나 클라라는 스스로 아들의 정체성 중 보여줄 수 있는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을 구분하여 은폐한다. 때문에 클라라와 조엘은 여느 싱글맘의 모습처럼 그려진다. 여기서 정말로 은폐되는 것은 조엘이 아나라는 미혼모의 아이라는 것과 아나-클라라라는 여성 퀴어 커플의 아이(물론 둘 사이에서 발생한 아이는 아닐지라도)라는 사살이다. 늑대인간이라는 소재만으로 <굿 매너스>를 선택한 관객들에게 전반부 한 시간 가량은 조금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영화가 쌓아가는 두 여성의 감정과 그로 인해 촉발된 클라라와 조엘의 관계, 그리고 늑대인간이라는 소재를 통해 은폐되는 미혼모와 동성 퀴어 커플의 출산과 육아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지는 후반부는 꽤나 흥미롭게 다가온다. 



 여러 장르를 한 영화 안에서 소화하려는 선택은 성공하기 어렵다. 특히나 상반된 장르를 챕터 구분하듯이 집어넣는 경우에는 앞뒤가 따로 노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하지만 <굿 매너스>는 이러한 도전을 꽤나 성공적으로 해낸다. 출산 장면의 특수효과가 주는 충격이나 디스토피아 세계관인 것처럼 묘사되는 상파울루의 전경 등의 장면을 보고 있으면 마르코 더트라와 줄리아나 로자스라는 두 사람이 장르영화에 대한 감각을 갖춘 연출자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굿 매너스>에 앞서 두 편의 단편영화를 함께 작업한 둘은 성공적으로 장르영화 한 편을 연출해냈고, 미혼모와 퀴어 커플의 양육이라는 소재를 장르적 상상력 안에 성공적으로 이식한다. <굿 매너스>가 대단한 수작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짧지 않은 러닝타임을 지루하지 않게 끌고 가면서 독특한 장르적 상상력을 발휘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품이다.

 MCU의 수장 케빈 파이기를 비롯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홍보문구들은 영화사의 클라이맥스가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도 그럴게, 수억 달러의 예산, 10년 동안 18편의 영화를 통해 쌓아온 거대한 세계관, 수십 명에 달하는 주연급 배우들의 출연 등은 분명 전례 없던 거대한 이벤트가 맞긴 하다. 그러나 ‘영화사의 클라이맥스’ 같은 사건은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수십 명의 슈퍼히어로 캐릭터를 한 영화 안에 불러 모으고, 모두에게 역할을 부여하며 분량을 분배하는 일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니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 조 루소와 안소니 루소는 그것을 다시 한번 해낸다. 이것은 분명히 영화 역사상 가장 거대한 팬서비스임은 틀림없다.  



 아이언맨, 스파이더맨,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닥터 스트레인지, 블랙팬서…… 열거하기에도 숨이 가쁜 등장인물들의 목록이나 영화 속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앞으로 개봉할 <앤트맨 앤 와스프>, <캡틴 마블>, <어벤저스 4>을 예측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그보다도 왜 <인피니티 워>가 팬서비스에 머물고 말았는지, 혹은 결국 이것이 이 영화의 태생적인 한계인지를 생각해보는 게 더욱 흥미로울 것 같다. MCU는 원작 코믹스를 그대로 따르는 것과 달리 (물론 이러한 방식은 마블 원작 코믹스 세계관을 생각해봤을 때 절대 불가능하다) 여러 코믹스 속에 담긴 사건들을 조립하여 하나의 영화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추구했다. <인피니티 워>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원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인피니티 건틀렛] 이벤트를 분해하고, 앞서 개봉한 영화들의 사건과 인물로 그 사이를 메운다.  



 이러한 과정에서 MCU가 항상 지적당하는 것은 강력한 빌런의 부재였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울트론이나 <아이언맨 3>의 만다린은 원작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무리수를 둬 탄생한 실패작들이었다. 다만 최근 <스파이더맨: 홈커밍>의 벌처나 <토르: 라그나로크>의 헬라 등 매력적인 빌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블랙팬서>에 이르러서는 빌런의 존재감이 히어로를 압도하려는 위치에 서기 이르렀다. <인피니티 워>는 세계관 전체를 관통하는 배후인 타노스가 드디어 전면에 나서는 작품이다. 루소 형제는 그동안 빌런이 약했다는 평을 의식한 듯, 타노스에 다양한 서사를 부여하며 다채로운 캐릭터로 탄생시키려 한다. 그러다 보니 <인피니티 워>의 전체 캐릭터 중 타노스가 절반에 가까운 분량을 가져간다. 어떻게 보면 이는 당연한 처사다. 타노스를 상대하는 캐릭터는 수십 명인데, 당연히 빌런에게 많은 러닝타임을 활용해서 서사를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서사는 한국 신파영화를 보는 것만 같다. 영화 속 특정 장면에서는 조쉬 브롤린이 아닌 황정민이 타노스를 연기하는 줄 알았다. 그렇다고 타노스라는 캐릭터의 매력을 보여주는데 아주 실패한 것은 아니긴 하지만, 우리가 기대하던 것은 적어도 신파 서사를 지닌 타노스는 아니었다. ‘어벤져스는 돌아온다’(Avengers Will Return)이라는 익숙한 문구 대신 등장하는 ‘타노스는 돌아온다’(Thanos Will Return)라는 문구는 <인피니티 워>의 주인공이 타노스라고 선언하는 것 같다. 



 어찌 됐든 <인피니티 워>는 MCU에 기대하던 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기는 한다. 아이언맨, 토르, 캡틴 아메리카라는 세 인물을 주축으로 세 갈래로 나뉜 히어로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타노스에 대항하고, 종국에는 하나로 뭉쳐 이에 맞선다는 이야기는 교통정리가 잘 되어 있다. 와칸다에서의 백병전, 수많은 히어로들이 주고받는 액션의 합, MCU 특유의 유머 스타일,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던 몇몇 캐릭터의 사망 등 관객이 기대하던 거의 모든 것이 149분의 러닝타임 속에 채워져 있다. 몇몇 캐릭터의 깜짝 등장은 어색하기도, 반갑기도 하다. 어서 <어벤져스 4> 혹은 <앤트맨 앤 와스프>나 <캡틴 마블>이 개봉하길 바라게 되는 충격적인 엔딩은 MCU가 사활을 걸고 둔 수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던 MCU의 영화들은 <인피니티 워>에 이르러 스페이스 오페라와 <반지의 제왕> 스타일의 판타지로 귀결되려는 것 같다. 결국 <인피니티 워>는 MCU가 항상 하던 것을 가장 거대한 사이즈로 만들어낸 작품이다. 때문에 <인피니티 워>는 팬의 입장에서 즐거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작품임과 동시에, 역사상 가장 거대한 팬서비스라는 의의 이외의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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