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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더 더 스킨>이나 <더 랍스터>부터 <플로리다 프로젝트>, <굿 타임> 등의 최근작까지 다양한 장르와 감독의 놀라운 작품들을 제작 및 배급하고 있는 A24의 신작 <유전>이 공개되었다. 지난 선댄스영화제에서 공개되어 호평받은 호러인 <유전>은 몇 편의 단편영화를 통해 온라인 상에서 논란이 되기도 한 아리 에스터 감독의 신작이다. 여기에 <식스 센스>의 어머니 역할로 알려진 토니 콜렛을 비롯해, <유주얼 서스펙트>의 가브리엘 번, <쥬만지: 새로운 세계>로 얼굴을 알린 신예 알렉스 울프 등이 주연을 맡았다. 영화는 애니(토니 콜렛)의 어머니의 장례식으로 시작한다. 애니를 비롯해 남편 스티브(가브리엘 번), 아들 피터(알렉스 울프), 딸 찰리(밀리 샤피로)는 장례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어느 날 애니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의 모임’에서 만난 조안(앤 도드)을 통해 엄마의 비밀을 발견하고, 엄마와 애니를 거쳐 두 자녀에게 까지 뻗어나간 저주의 실체가 드러난다. 포스터나 시놉시스가 언뜻 <컨저링>이나 <애나벨> 등의 제임스 완 호러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유전>은 보다 70년대 오컬트 및 지알로 호러영화들과 닮아있다. 



 <유전>에는 점프 스케어가 없다. 점프 스케어란 갑자기 프레임 속에 유령 따위가 튀어나와 관객을 놀라게 만드는 영화 장치를 일컫는다. <컨저링> 등의 제임스 완 호러영화들과 최근 개봉한 <제인 도> 등의 영화들을 떠올리면 이러한 장치가 얼마나 쉽게 관객들을 놀래 킬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효과는 사실 무섭다기 보단 불쾌함에 가까운데, 많은 호러영화들이 관객들을 놀라게 하는 데만 집중하고 이야기, 연기, 사운드 등으로 만들어 내는 무서움 자체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전>은 이런 얄팍한 꼼수를 쓰지 않는다. 물론 점프 스케어를 잘 활용한다면야 좋은 작품이 되겠지만, 아리 에스터 감독은 익숙한 경향에 휩쓸려가는 것에 정면으로 맞선다. <유전>이 이용하는 것은 불안감이다. 사실 전체적인 이야기는 과거 오컬트 영화들의 전형을 따라가는 것만 같지만, 이미 <컨저링> 류의 영화에 익숙해진 관객들은 <유전>의 이야기를 쉽게 예측하지 못한다. 때문에 영화 내부에 세세하게 설치된 복선들에 의해 발생한 불안감이 다음 상황을 쉽게 예측할 수 없는 관객은 손에 땀을 쥐고 영화를 보게 된다. 토니 콜렛을 필두로 한 배우들의 호연은 불신 속에서 어떻게든 붕괴되지 않으려는 가족이 지닌 불안감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러한 불안감이 무섭게 폭발하는 영화 후반부 30여분 동안의 클라이맥스는 호러영화의 가장 순수한 체험이 되기도 한다. 



 애니는 디오라마(실물 축소 모형)를 만드는 작가다. 그는 종종 자신의 집과 가족을 담은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이는 영화 속에서 본격적으로 사건이 전개되면서 더욱 심해진다. 애니는 엄마의 장례식이 진행된 공간이나, 사고가 벌어진 장소를 재현한 디오라마를 제작하기도 한다. 자신의 몽유병 때문에 피터 그리고 찰리와의 관계가 소원해진 애니는 이를 통해 가족을 다시 봉합하려고 시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기대를 산산이 부셔버린다. 아리 에스터 감독은 스스로 사악한 신이 된 것처럼 캐릭터들에게 고난을 가한다. 때문에 영화의 결말은, 피해갈 수 없는 유전적인 저주의 두려움을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 아마 올해 가장 무서운 장르 영화가 아닐까?

*스포일러 포함 


 작년 <V.I.P.>가 개봉한 이후 영화 속 여성 묘사에 대해 많은 비판들이 쏟아졌다. 결국 영화는 실패했고, 연출자인 박훈정 감독은 신인 여성배우를 기용해 여성 원톱 액션영화를 제작하겠다고 밝혔다. 그로부터 채 1년이 지나기도 전에 박훈정 감독이 언급한 <마녀>가 개봉했다. 꽤나 빠른 시간 안에 영화가 개봉한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여성 중심 액션/느와르를 표방하며 공개됐지만 흥행과 평 양측에서 모두 실패한 <악녀>나 <미옥>과는 어떤 차별점을 보여줄지 궁금하여 극장을 찾았다. <마녀>의 등장은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부터 최근 <오션스8>까지 이어지는 여성 중심 블록버스터의 흐름과 박훈정 본인이 경험한 비판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에 <악녀>나 <미옥>이 비판받았던 지점들, 가령 불필요하게 등장하는 로맨스, 여성 주인공의 동력으로 모성애만을 강조하는 것 등을 최대한 피해가려 하기도 했다. 영화의 이야기만 놓고 본다면 <마녀>는 <악녀>나 <미옥>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는다. 



 영화는 피칠갑이 된 어느 연구소에서 시작한다. 닥터 백(조민수)의 지시로 미스터 최(박희순)와 부하들은 연구소에 있던 실험체 아이들을 제거하고 있다. 그중 한 아이가 도망치는 데 성공하고, 어느 시골 농가의 노부부에게 발견되어 입양된다. 10년 후, 탈출에 성공했지만 기억을 잃은 자윤(김다미)은 고등학생이 되어 생활하고 있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몸이 불편해진 아버지를 도와 농장일과 집안일을 함께 하던 자윤은 단짝친구 명희(고민시)의 제안으로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게 된다. 그러자 10년 전에 그를 미처 제거하지 못한 닥터 백의 부하 귀공자(최우식)와 미스터 최가 각각 자윤에게 접근하고, 그들의 공격에 자윤은 잊고 있던 자신의 능력을 알게 된다. 결국 자윤은 닥터 백을 다시 만나게 된다. 닥터 백은 유전자 조작 때문에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자윤에게 한 달 정도 시간을 벌어주는 약을 투약한다. 그러자 모든 것은 조직이 자신을 찾게 만들기 위한 자윤의 계획이었음이 드러나며, 그는 기억도 능력도 잃은 적이 없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자윤은 자신이 찾던 것을 얻었다는 듯이 닥터 백과 미스터 최, 귀공자를 비롯해 건물에 있던 조직을 쓸어버린다. 



 <마녀>의 이야기는 모성과 이성애 관계에 캐릭터가 파묻혀버린 <악녀>나 <미옥>과는 확연히 다르다. 애초에 자윤과 그러한 관계에 놓일 만한 인물이 영화 속에 배치되지 않는다. 명백히 반대의 위치에 선 미스터 최나 귀공자가 자윤과 연애관계로 얽힐 리 만무하고, 괜히 모성애적인 서사로 빠질만한 요소도 없다. 도리어 자윤을 입양한 노부부와 자윤의 관계는 여타 한국영화에 비해 신파적이지도 않고, 절친인 명희와의 관계는 드라마 <제시카 존스>의 제시카와 팻시 같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이 엿보이기도 한다. 다만 악역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굉장히 전형적이다. 닥터 백이나 미스터 최는 그야말로 ‘설명충’ 악역의 전형을 따라가고, 귀공자의 캐릭터 또한 어딘가에서 이미 본 것처럼 단조롭기만 하다. 하지만 <악녀>의 신하균이나 <미옥>의 최무성만큼 불쾌하고 끔찍한 악역까지 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이야기보단 영화적 만듦새에 있다. 우선 액션영화를 표방했음에도 제대로 된 액션이 126분의 러닝타임 대부분이 흘러갔을 때야 등장한다는 것은 <마녀>의 가장 큰 약점이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화려한 액션을 선보였던 <악녀>에 비하면 <마녀>의 액션 분량은 처참할 정도로 적다. 물론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캐릭터들의 액션을 부족한 예산(60억 원)으로 다양하게 담아내는 것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감안하더라도, 러닝타임의 2/3 지점에서야 제대로 된 액션이 처음 등장한다는 것은 명백한 실책이다. 다만 예고편을 보고 예상했던 <엑스맨> 풍의 액션보다는 <맨 오브 스틸>에 가까운 초인 액션을 그럭저럭 선보인다는 점은 약간의 만족을 채워준다.  



 <마녀>의 가장 큰 문제는 나쁘지 않은 캐릭터와 이야기를 만들었음에도 이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모든 게 자윤이 꾸민 일이라는 반전을 위해 최대한 정보를 드러내지 않는 전략이었다 해도, 영화의 절반이 지나도록 상황만 제시하는 방식의 전개는 지루하기만 하다. 게다가 관객이 자윤과 함께 혼란스러워 하기에는 너무나도 전형적인 이야기이다. 영화가 절정에 치닫기 전에, 자윤의 반전이 드러나기 전에 이미 그것을 알아차릴 관객이 적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미뤄왔던 이야기들을 후반부 플래시백으로 적당히 땜질하고 넘어가는 방식은 이제 지겹기만 하다. 영화 중간중간 적절히 정보를 뿌리면서 이야기의 긴장감을 유지했더라면 조금이라도 덜 지루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자윤의 플래시백으로 제시되는 과거는 바로 직후 이어지는 반전으로 인해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그야말로 관객에게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플래시백이 되어버린다. 결국 관객은 126분의 짧지 않은 러닝타임 동안 배우들의 입에서 나올 설명만을 기다리며 이렇다 할 정보 값이 없는 상황들만을 지켜보고 있어야만 한다. 설령 <마녀>의 이야기가 대단히 새로운 것이었다 해도, 이러한 방식으로는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 



 무엇보다 박훈정 감독 본인의 색 때문에 <마녀>의 톤이 그의 전작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아쉽다. 배우들(특히 남성 캐릭터들)이 쉴 새 없이 쏟아내는 욕설, 전체적으로 암청색에 맞춰져 있는 미장센, 15세 관람가라기엔 너무나도 많은 피의 향연 등은 <마녀>의 톤이 <신세계>나 <V.I.P.>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박훈정이 여성 원톱의 액션영화를 정말 제대로 만들고 싶었다면, 자신의 영화 스타일에 변화를 주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마녀>는 그렇지 못하다. 쎄보이려고 하는 전형적인 한국 영화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3부작으로 구성된 <마녀>의 속편이 더 나은 완성도를 갖추려면, 박훈정은 제작자의 위치로 물러나고 새로운 연출자를 찾아보는 이 더욱 흥미롭지 않을까 싶다.

 2004년 픽사가 처음으로 인간을 주인공을 내세웠던 작품 <인크레더블>의 속편이 14년 만에 제작되었다. 전작의 감독이었던 브래드 버드 감독 또한 두 편의 실사영화(<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 <투모로우 랜드>)를 연출 한 뒤 다시 애니메이션으로 복귀했다. 오랜만에 애니메이션으로 복귀를 한 만큼, 브래드 버드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자신의 장기를 한껏 발휘한다. 영화는 전작의 엔딩에서 곧바로 이어진다. 14년이 흐른 뒤 제작되었지만 극 중 시간은 전작의 사건 바로 직후의 이야기다. 언더마이너라는 악당이 도시를 공격하자, 미스터 인크레더블(크레이그 T. 넬슨), 일라스티 걸(홀리 헌터), 바이올렛(사라 보웰), 대쉬(헉 밀너) 등의 인크레더블 가족과 프로존(사무엘 L. 잭슨)이 그를 무찌른다. 허나 전투 중 많은 피해가 발생하자, 이미 불법이 된 슈퍼히어로들에 대한 반감이 더욱 커진다. 그러던 중 거대기업의 경영자 윈스턴(밥 오덴커크)과 에블린(캐서린 키너)은 그들에게 슈퍼히어로를 다시 합법화시키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이를 받아들인 일라스티 걸은 그들의 후원을 받아 새로운 적인 스크린슬레이버에 맞서 싸우고, 미스터 인크레더블은 두 아이와 아직 초능력을 통제하지 못하는 아기인 잭잭(엘리 푸실)을 돌보는 육아에 전념하게 된다. 



 브래드 버드 감독은 <인크레더블>의 속편이 언제 제작될 것이냐는 질문에 항상 “최고의 이야기가 나올 때”라고 답해왔다. 그래서일까, 전작의 팬들이 <인크레더블 2>에 거는 기대는 굉장했다. 완성된 결과물은 전작을 지금에 맞게 만들어진, 그리고 14년 전과는 다른 기술력으로 더욱 업그레이드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큰 변화는 가정 내 성역할의 반전이다. 일라스티 걸이 도시로 나가 악당과 맞서 싸우는 동안 미스터 인크레더블은 집에서 아이들을 돌본다. 디즈니의 작품인 만큼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결말로 향할 수밖에 없지만, <코코> 등 전작들과 다르게 그 방향을 달리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아버지를 통해 봉합되는 것이 아닌 어머니와 아이들의 활약을 통해 봉합되는 가족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다른 작품들에 비해 신선하게 다가온다. 잭잭의 종잡을 수 없는 초능력을 통해 육아의 고단함이 드러나는 부분도 좋았고, 굳이 아이들이 지닌 초능력이 아니더라도 이들을 다루는 것이 어렵다는 점을 충분히 드러내는 것 또한 좋았던 부분이다. 



 <인크레더블 2>의 최고 장점이라면 아무래도 액션이다. 올해에도 여러 슈퍼히어로 장르의 영화들이 개봉했는데, 그중 가장 발군의 액션 시퀀스가 이 작품에서 등장한다.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의 비교가 부적절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미 CG를 동원한 각종 액션이 ‘그려지고’ 있는 데다가 각종 영화들의 세계관이 갈수록 판타지의 영역으로 가고 있기에 <인크레더블 2>의 액션 시퀀스들이 더욱 영리하고 잘 짜여 있다고 느껴진다. 가장 즐거웠던 부분은 일라스티 걸의 액션들이다. 전작을 비롯해 <스파이더맨 2>나 <슈퍼맨> 등 초인들이 달리는 열차를 멈추는 장면들은 일종의 클리셰가 되었다. <인크레더블 2>에도 어김없이 열차를 정지시키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오토바이를 통한 추격부터 일라스티 걸의 능력을 다양하게 활용한 액션까지의 아이디어와 능수능란한 흐름이 돋보인다. 이야기 흐름 상 일라스티 걸의 액션이 영화 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스파이더맨>이나 <다크 나이트> 등의 도심 속 액션을 연상시키면서도 캐릭터의 개성을 통해 더욱 발전시킨 모습이 놀랍기만 하다. 여기에 다양한 초능력을 보유한 잭잭이 보여주는 액션 또한 즐겁다. 영화 중반부 뜻밖의 상대와 싸우며 다양한 초능력을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브래드 버드가 <엑스맨>을 연출한다면 어떨지 궁금해질 정도로 즐겁고 흥미로운 장면이다. 



 빌런의 활용도 흥미롭다. 그간 픽사의 작품들은 빌런의 정체와 그의 악행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스크린과 창문 등의 프레임을 활용했다. 이는 픽사의 첫 작품인 <토이 스토리>의 망원경에서 <코코>의 생중계 카메라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인크레더블 2>의 스크린은 다른 방식으로 활용된다. 빌런의 이름이 스크린슬레이버인 만큼, 스크린은 빌런의 소유이며 그의 정체를 감추고 악행이 알려지는 것을 교란시키는 것에 스크린이 동원된다. 전작에서 바로 이어지는 시간대이기에 극 중 시간대는 스마트폰 등이 발명되지 않은 시점이다. 그럼에도 스크린은 다양한 형태로 곳곳에 보급되어 있다. 이를 통해 교란되는 빌런의 정체와 언론을 통해 대중의 인식을 뒤엎겠다는 큰 스토리라인은 <인크레더블 2>를 이루는 두 개의 축이다. 과포화 상태의 SNS와 가짜 뉴스가 지상파 뉴스의 위치까지 진출한 지금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된다. 인크레더블 가족의 입장에서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지만, 엔딩 이후에 남는 묘한 찝찝함은 이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기에 <인크레더블 2>는 <인사이드 아웃> 이후로 아쉬운 작품들만 내놓는 픽사의 최근작 중 가장 즐겁고 흥미로운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전작들도 그랬지만, 그의 신작인 <킬링 디어> 또한 굉장히 불쾌한 작품이다. <더 랍스터>에 녹아들어 있는 블랙코미디적인 요소 덕분에 나름 즐기면서 볼 수 있었지만, <킬링 디어>는 <송곳니>만큼이나 관객들의 숨통을 조여 오는 불쾌함으로 가득하다. 아니 사람에 따라 더욱 불쾌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영화는 그리스 신화 속 비극 이야기 중 하나인 이피게네이아의 이야기를 영화의 줄거리로 가져온다. 신화는 트로이의 장수 아가멤논이 아르테미스 여신의 신성한 사슴을 죽여 그의 분노를 사고, 자신의 딸인 이피게네이아를 산제물로 바쳐 그 분노를 달래려 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킬링 디어>에서는 의사인 스티븐(콜린 파렐)이 수술 중 마틴(배리 케오간)의 아버지를 사망하게 만들고, 마틴이 그에 대한 복수로 스티븐과 안나(니콜 키드먼) 사이의 두 자식인 킴(래피 캐시디)과 밥(서니 설직)을 죽이려고 한다는 줄거리를 담고 있다. 그리고 마틴이 사용하는 방법은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종류의 범죄수단이 아닌, 초현실적인 저주의 형태로 드러난다. 영화는 저주의 이유와 원인을 천천히 드러내며 관객을 모호함 속으로 이끌어간다. 



 여러모로 나홍진의 <곡성>을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끼를 물어버리고, 그들은 영화 밖에서 신적인 위치에 군림하고 있는 감독에 통제 하에 있는 모호함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영화의 인물들은 혼돈 속에서 애처롭게 방황하다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이러한 방식의 영화는 혼돈을 감독이 관객과 벌이는 야바위처럼 다룬다. 결국 감독의 속임수에 관객은 낚일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영화 속 인물들(특히 여성과 아이들)은 착취당한다. <킬링 디어>의 인물들은 굉장히 건조한 톤으로 대사를 내뱉는데, 그들의 말은 극단을 오가는 음악과 상반되어 관객에게 불안감을 주입한다.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트래킹, 줌인/아웃 등을 반복하는 카메라는 대사의 톤과 음악이 주는 상반되는 분위기에 적당히 편승한다. 결과적으로 <킬링 디어>는 <곡성>과 마찬가지로 감독이 통제하는 주입된 불안감 속에서 처절하게 망가져가는 인물들을 지켜보는 작품이다. 때문에 영화가 취하고 있는 신화의 형식 안에서 감독의 위치는 신에 해당한다. 



 <더 랍스터>의 인물들에겐 최소한의 선택지가 있었고, 결국 탈이분법적인 선택지를 택함으로써 두 주인공은 어느 정도의 성과를 만들어냈다. <송곳니>는 한 가정을 통제하려는 그릇된 가부장의 독재 하에서 착취당하는 인물들을 그려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킬링 디어>에서 <더 랍스터>의 탈주를 택하는 대신, 스스로 <송곳니>의 가부장이 되기를 선택한다. 그리스 신화 속 비극이나 인간 사이의 불신 같은 소재와 주제들은 란티모스가 스스로 신의 위치에 서기 위한 주춧돌로서 기능한다. 다리가 마비되어 병원에서 쓰러지는 밥의 모습을 부감으로 촬영한 장면 등은 란티모스의 욕구를 드러낸다. 이피게네이아 등의 신화를 현대의 독자들이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이유는 이야기의 서술자가 신이 아닌 관찰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어떤 상황에 놓인 인물을 관찰하고, 그것을 서술한다. 그러나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킬링 디어>라는 신화적 이야기에서 신의 위치에 서길 욕망한다. 그러한 욕망을 지켜보는 일은 꽤나 지루하고 따분한 일이다.

 에단 헌트(톰 크루즈)가 돌아왔다. 벌써 22년째 시리즈가 이어지고 있다. 오우삼이 연출했던 2편을 제외하면, 평과 흥행 양측에서 모두 성공적인 몇 안 되는 프랜차이즈이다. 브라이언 드 팔마가 연출한 1편은 <미션 임파서블>의 TV 시리즈를 종결하고 톰 크루즈를 통해 세계관에 재시동을 거는 작품이었다. 22년이 흐른 뒤 제작된 6편은 영화로 재탄생한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결산과도 같은 작품이다. 물론 이번 작품이 마지막 작품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22년 전에 시작된 에단 헌트의 여정이 한 번 마무리되는 순간이 <미션 임파서블: 폴아웃>이다. 



 영화는 다른 시리즈 작품들과는 다르게 전편의 여성 주인공과 악당이 다시 등장한다. IMF는 에단 헌트에게 솔로몬 레인(숀 해리스)의 추종자 테러 집단에게 핵무기가 넘어가는 것을 막으라는 미션을 주었지만, 그는 동료인 루터(빙 라메스)와 벤지(사이먼 페그)를 구하는 도중 핵무기를 빼앗기고 만다. IMF의 국장인 헌리(알렉 볼드윈)는 이를 다시 가져오라는 임무를 주지만, CIA의 국장 에리카 슬론(안젤라 버셋)은 에단을 믿지 못해 워커 요원(헨리 카빌)을 그에게 붙인다. 미션을 수행하던 중 전편에서 만난 일사(레베카 퍼거슨)가 사건 속에 등장하고, 미션은 점점 더 불가능해져만 간다. 



 <폴아웃>은 에단의 정신적 상태를 극한으로 몰고 간다. 숙적과도 같은 악당이 다시 등장하고, 아직 관계가 정리되지 않은 일사가 갑자기 등장하고, 적과 동료는 점점 분간이 어려워지며, 동료이자 친구들을 지켜야 하며, 미션 도중 뜻밖의 인물을 만나기도 한다. 그만큼 액션의 강도도 강력해졌다. 전작들에서 선보인 액션을 다시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만 같다. 헬기에 매달리고, 오토바이를 타고 추격전을 벌이고, 암벽등반도 한다.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액션 분량과 종류가 가장 많은 작품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액션들은 에단의 심리상태를 반영이라도 하는 것만 같다. 특히 후반부에 등장하는 헬기 액션 시퀀스가 그렇다. 아이맥스로 촬영된 카슈미르의 풍광을 배경으로, 헬기에 달린 줄 하나에 의지해 매달려 있는 에단의 모습은 마치 지구를 짊어지고 있는 아틀라스를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한 무게를 짊어지고 불가능해 보이는 미션 속으로 무작정 뛰어드는 그의 모습은 <폴아웃>에 멜로드라마적인 면모를 부여해주기도 한다. 



 동시에 <폴아웃>은 지난 3편부터 이어지는 한 편의 긴 영화라는 인상도 준다. 이는 후반부에 깜짝 등장하는 어느 인물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션 임파서블>이라는 시리즈가 냉장고 속의 여자(여성 캐릭터를 사망/납치 등으로 처리하여 남성 주인공의 동력으로 삼는 클리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모양새가 된다. 3편부터 이번 영화까지 에단 헌트가 활약할 수 있었던 동력은 극 중에선 거의 등장하지 않는 여성 캐릭터의 존재 때문이다. 영화는 친절하게도 루터의 대사를 통해 이를 상기시켜주며, 이는 에단이 벌이는 액션과 교차편집된다. 이는 에단 헌트가 움직이는, 더 나아가 3편부터의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가 작동하는 동력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답이 된다. 에단 헌트가 다시 한번 세상을 구했어도 어딘가 찝찝함이 남는 이유가 이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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