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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유작인 <24 프레임>은 그가 무빙 이미지를 다루는 작가로서의 열망을 담은 4분 30초짜리 단편 24편을 연작 형식으로 묶은 작품이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회화 작가는 단일 프레임 안에 이야기를 담지만, 영화 작가는 24 프레임의 무빙 이미지를 열망한다”라는 자막이 뜬다. 영화의 첫 파트는 어느 겨울 산골 마을을 담은 그림으로 시작한다. 멈춰있는 그림 속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순간 관객은 영화 프레임 속 움직임에 주목하게 된다. 뒤이어 강아지, 까마귀 등이 움직이고 눈이 내리고 소리가 난다. 여기서 관객은 카메라도 움직이지 않는 아주 단순한 무빙 이미지 속에서 이야기를 찾아내고 내러티브를 구성해낸다. 이어지는 영화의 다른 프레임들도 마찬가지다. 관객은 고정된 카메라가 담아내는 무빙 이미지들 속 운동성을 관찰하면서 그 안에서 내러티브를 도출해낸다.  



 1880년대 코닥 회사가 설립되면서 사진은 조금 더 쉽게 접할 수 있는 매체가 되었다. 이후 여러 작가들은 사진 속에 움직임을 담아내려는 시도를 했다. 영화 관련 교양 수업을 듣게 되면 첫 수업에 꼭 등장하는 머이브릿지의 1878년작 ‘말의 움직임’은 달리는 말의 모습을 연속 촬영하여 이 사진을 연이어 전시했다. 관객은 움직이지 않는 단일 프레임의 사진들에서 말의 움직임을 느끼게 된다. 재작년쯤 들었던 사진과 영화를 다루는 강의에서는 영화가 ‘연속된 사진을 통해 운동성을 담아내려는 욕망’에서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설명을 했다. 세상을 쇼트로 보느냐, 시퀀스로 보느냐에 따라 사진과 무빙 이미지에 대한 열망이 갈린다고 볼 수도 있겠다. 우리는 물이 담긴 컵의 사진과 컵이 쓰러져 물이 엎어진 사진 두 장을 붙여 놓으면 ‘무언가에 의해 컵이 쓰러져 물이 쏟아졌다’는 내러티브를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것과 같다. <24 프레임>은 이러한 욕망을 연상시킨다. 움직임이 없는 화면인 피터 브뤼헬의 그림 ‘눈 속의 사냥꾼’에서 시작되는 첫 프레임은 이내 그림 속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며 움직임이 시작된다. 눈이 내리고, 프레임 곳곳에서 동물들이 움직이는 4분 30초 동안 관객들은 프레임 속에 담긴 운동 속에서 각각의 내러티브를 떠올린다. 



 때문에 <24 프레임>은 세상을 시퀀스로 바라보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시선과 단순한 무빙 이미지 자체를 담고 그것을 바라보려는 열망이 함께하는 작품이다. 또한 24개의 연작 속에 담긴 동물들이 모두 그래픽을 통해 만들어진 존재라는 점에서, <24 프레임>은 그의 또 다른 유작인 <집으로 데려다 주오>와 함께 디지털 시네마를 긍정하는 키아로스타미 만의 방식으로 느껴진다. 그는 무빙 이미지의 가장 순수한 방식, 정지된 카메라가 담아내는 프레임 속에서의 움직임을 담아내는데 집중한다. 이것은 뤼미에르 형제가 만들어낸 최초의 영화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24 프레임>의 제목이 <뤼미에르 이전과 이후의 24 프레임>(24 Frames Before and After Lumiere)일 수도 있었다는 트리비아는 키아로스타미의 지향점을 분명히 한다. 그렇기에 더욱,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마지막 작품은 무빙 이미지 그 자체에 대한 그의 열망으로 가득하다.

<춘천, 춘천>에 이어 장우진 감독이 자신의 고향인 춘천을 배경으로 삼은 작품이다. 겉으로 보이는 틀은 전작과 유사하다. 영화는 춘천을 배경으로 중년의 부부 흥주(양흥주)와 은주(서영화), 20대 청년 커플인 군인(우지현)과 여자(이상희)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흥주와 은주는 20여 년 만에 청평사를 찾는다. 돌아오는 택시에서, 은주는 핸드폰을 두고 왔음을 기억해낸다. 핸드폰을 찾으러 들어간 둘은 청평호를 건너는 배가 끊기는 바람에 그 안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같은 시간, 젊은 군인과 여자는 청평사를 돌아다니다 배 시간이 끊겼음을 알게 된다. 청평사에서의 하룻밤 동안 벌어지는 기묘한 만남과 대화가 <겨울밤에>의 이야기다. 



중년과 20대 청년의 이야기가 같은 공간 안에서 순환한다는 구조는 같지만, 그들이 직접 대면하지 않았던 <춘천, 춘천>과는 달리 <겨울밤에>의 인물들은 어느 순간 서로 만나게 된다. 두 커플의 시간선, 거기에 흥주와 은주의 시간선이 분열되며 영화 속에 여러 개의 시간이 존재하게 되는데, 이러한 방식은 언뜻 홍상수의 영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시간들은 중년 부부와 젊은 커플이 공유하는 유사한 상황을 통해 순환성을 지닌다. 그리고 이러한 순환은 흥주가 보게 되는 첫사랑이라는 유령이나, 폭포 밑 얼음에서의 위험천만한 상황 등을 통해 분열되려는 조짐을 보인다. 은주는 얼음에서의 위험한 상황 속에서 군인과 여자를 만나며 위험을 모면하고 그들과 대화한다. 흥주와 함께하는 시간선에서 분열되어 나온 은주는 이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연상시키는 커플을 응시하고,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고 다시 봉합되려는 제스처를 취한다. 반면 흥주는 첫사랑이라는 유령을 쫓아간다. 그는 핸드폰을 두고 온 은주를 탓하면서 자신도 장갑을 땅바닥에 두고 온다. 첫사랑 또한 유령처럼 등장하여 유령처럼 사라진다. 흥주의 분열은 봉합으로 향하지 못하고, 잃어버림으로 마무리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오프닝과 유사하다. 오프닝에서 등장했던 택시기사와 같은 사람이 등장하여 흥주와 은주를 청평사 밖으로 실어 나른다. 갑자기 내려달라는 은주의 말에 흥주도 따라 내리고, 잠시 멈춘 택시 앞에서 둘은 서로를 마주 본다. 누군가는 무언가를 잃어버렸고, 누군가는 새로운 상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각자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다른 상황에서, 마지막의 마주 보기는 불완전한 봉합으로 마무리된다. 산장의 방에서 흥주와 은주가 함께 앉아있던 방에 비치는 열풍기의 붉은빛은 절대 두 사람 모두를 한 번에 비추지 못한다. 그들을 한 번에 비추지 못하는 경고등 같은 온풍기의 빛이나 겨울의 달빛은 진작의 둘의 봉합 불가능성을 드러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1917년 7월 12일, 멕시코 국경에서 고작 11km 남짓 떨어진 마을 비스비에서 대규모 추방이 일어난다. 비스비 추방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1차 세계대전 당시 구리를 텅해 큰 수익을 올리던 광산회사가 인금인상, 안전 노동 등을 주장하며 파업한 노동자들을 국경지대의 사막으로 추방시켜 버린 사건이다. 노동자뿐만 아니라 파업 지지자 등 2천여 명의 남성이 추방되었고, 지방정부가 관여하고 보안관 대행이 주도했으며, 이들 대부분은 이민자였기에 비스비 추방은 일종의 인종청소이기도 했다. 로버트 그린은 비스비 추방 100년을 맞아 이를 기억하고자 하는 비스비 마을 주민들의 활동을 따라간다. 주민들은 사건을 2017년의 비스비에서 재연함으로써 사건을 기억하고, 연대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한다. 



 사건 당시 마을에 남았던 이민자의 후손과 사건 이후 이주해 온 이민자들이 재연에 동참하고, 자세히 알지 못했던 역사를 기억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감동적이다. 더욱이 재연에 참여하는 주민 중에는 어린이와 청소년도 눈에 띄어, 이들의 경험이 앞으로 어떤 미래의 비스비를 만들게 될지 궁금해진다. 재연은 노동자와 회사가 각각 파업과 추방을 준비하는 것에서 시작되어, 마을 곳곳에서 벌어진 체포와 추방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총 6개의 챕터로 나누어진 영화는 이것의 준비과정과 재연된 사건, 비스비 추방에 대한 기존의 기억과 재연 이후 달라진 주민들의 생각을 담아낸다. 여기서 재연을 담는 방식이 흥미롭다. 주민들이 재연하는 비스비 추방은 마치 극영화 같은 모습인데, 주민들은 마을 전체를 무대로 고용된 배우들처럼 연기하며 여러 대의 카메라가 이들을 쫓으며 촬영한다. 카메라에는 연기하는 주민들과 다른 방향에서 촬영하고 있는 카메라, 1917년과는 다른 2017년의 마을 풍경(자동차나 상점의 물건 등)이 프레임 속에 모두 담기게 된다. 때문에 이러한 재연이 극영화 속 장면이 아니라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기획한 사건이라는 것이 계속해서 상기된다. 이를 통해 <비스비 1917>은 잊히도록 의도된 역사를 다시 기억하고, 공유하고, 교육하는 방식을 이야기한다. 



 몇몇 걸리는 지점은 비스비 추방의 가해자인 회사 측 사람들의 후손이다. 당시 광산회사를 운영했던 사장의 후손이나, 당시 말단 노동자였지만 사건 이후에도 계속 회사에 남아 사장의 지위에 오른 인물들 또한 <비스비 1917>에 등장한다. 이들 또한 재연의 참가자로서 영화 속에 등장하고, 재연 과정에서 어느 정도 성찰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이 길게 등장하지는 않지만, (직접적인 가해자는 아니지만 이후 비스비 추방의 역사를 지우는데 일조한) 가해자들로 하여금 당시를 재연하게 하는 부분은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액트 오브 킬링>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로버트 그린은 이들을 짧게만 등장시키고 당시 사건이 객관적으로 옳지 않은 일이었음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이들을 사용한다. 하지만 극과 실제의 경계가 희미한 (실제로 이 영화엔 연출된 부분이 더 많다고 여겨진다) 이 영화에서 가해자의 후손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어디까지가 실제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남는다.

 파리로 망명 온 독일인들은 점점 다가오는 나치를 피해 마르세유로 도피한다. 게오르그(프란츠 로고스키) 역시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들은 마르세유에서 곧 떠날 것임을 통행증과 비자로 증명해야 그곳에 머무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곳에도 나치가 도착하기에도 얼마 남지 않자, 그들은 해외로 떠나려 한다. 그러던 중 게오르그는 이동 중 죽은 친구의 아내와 아이를 만나게 되고, 탈출을 위해 죽은 작가 행세를 하던 중 작가의 아내 마리(폴라 비어)를 만나게 된다.  



 나치라는 언급 때문에 <통행증>이 2차 대전 당시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놀랍게도 영화는 현대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삼는다. 나치들은 현대의 전투경찰 제복을 입고 등장하고, CCTV 화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통행증>이 나치가 패망하지 않은 대체역사를 배경으로 삼은 것도 아니다. 그저 나치의 얘기를 현대의 배경에서 할 뿐이다. 이러한 대범함을 우아함으로 승화시키는 크리스티안 팻졸트의 연출이 놀랍기만 하다. 동시에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희망의 건너편>과 같은 과도한 휴머니즘 등으로 빠지지 않고(물론 나는 <희망의 건너편>도 좋아한다), 오롯이 필요한 이야기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통행증>이 더더욱 흥미롭다.



 이러한 방식 때문에 현재의 난민 문제가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공명하며 <통행증>만의 독특한 감동을 만들어낸다. 특히 나치를 전투경찰로 표현한 부분은 명백하게 <통행증>이 난민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느껴지게 하는 장치다. 여기에 죽은 친구를 대신하여 친구의 아들을 보살피려 하고, 죽은 작가 행세를 하면서 그의 아내 마리와도 사랑에 빠지는 게오르기의 정체성 문제가 더해진다. 떠날 것을 증명해야 마르세유에 머물 수 있다는 이야기는 게오르기로 대표되는 난민들이 정착할 곳은 유럽에 없다는 것이며, 정착하지 못하고 떠나간 (죽은) 사람을 대체하며 성기게 살아갈 수 없는 그들의 상황을 묘사하는 것만 같다. <통행증>은 현대를 배경으로만 삼은 나치 영화라는 시도를 통해 뜻밖의 성취를 일궈낸다. 아마도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신작 중 가장 기대 이상의 작품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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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구시가지에 위치한 후통 거리에서 살아가는 모녀가 있다 싱글맘인 엄마와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인 딸은 사사건건 다투기만 한다. 종종 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대부분 돈과 남자에 관련된 이야기일 뿐이다. 각본과 연출은 물론, 직접 딸 역할로 출연까지 한 양밍밍 감독의 데뷔작 <행복하길 바라>는 모녀관계를 다룬 신선한 작품이며, 동시에 베이징의 골목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잡아낸다. 영화는 유럽이나 북미의 영화들이 가진 익숙하고 전형적인 프레임의 구도를 사용하지도 않고, 중화권이나 한국을 비롯한 많은 동아시아 국가들의 신파 서사로도 빠지지도 않는다. 



 영화 내내 두 인물은 좀처럼 한 프레임 속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이 연결되어 있는 쇼트는 그저 같은 공간 안에 존재함을 보여주는 몇몇 장면들, 그들이 동거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들(가령 식탁에서 설거지 거리를 건네주는 손의 클로즈업) 등에서만 그들은 한 프레임 안에 존재한다. 그 밖의 쇼트에서 그들은 한 사람의 프레임을 침범하는 방식으로 프레임 속에 들어온다. 이러한 경우 한 사람은 포커스아웃 된다. 함께 먹는 음식의 이름으로 구성된 영화의 각 챕터의 마지막에서야 둘이 식탁에 함께 있는 장면이 제시될 뿐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영화의 결말부에 가서야, 둘은 한 프레임 속에 유연하게 자리 잡는다. 그리고 이는 둘이 셀피를 찍는 것으로도 드러난다. 



 많은 관계들이 그렇겠지만, <행복하길 바라>의 모녀관계는 다양한 층위를 품고 있고 그것을 2시간 남짓한 러닝타임 속에서 속속들이 보여준다. 둘은 일종의 계약관계, 동거인, 가족, 조언을 건네는 친구, 경쟁자, 동업자 등으로 그려진다. 서로의 삶에서 떨어질 수 없으면서도 분리를 꿈꾸는, 그렇기에 각자의 프레임 속으로 서로 돌출될 수밖에 없는 두 여성의 삶이 영화에 펼쳐진다. 이는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온 서구권 영화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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