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카테고리의 글 목록 (7 Page) :: 영화 보는 영알못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가족’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가족은 무엇일까? 결혼, 출산, 입양 등으로 묶인 혈연 및 주민등록 상의 집단일까, 같은 집에 살아가는 동거인들을 통칭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특정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의 집단일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가족은 엄마, 아빠 자녀, 여기에 조부모 정도가 추가된 형태일 것이다. 혹은 막연하게 명절에 모이는 사람들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어쨌든 그것은 주로 혈연을 통해 엮인, 소위 ‘정상가족’이라는 틀에서 누군가가 추가된 형태의 가족일 뿐이다. 이러한 가족은 상당히 우연적으로 구성된다. 우연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은 결혼을 통해 가족으로 결합한 두 사람일 뿐, 배우자의 가족이 내 가족이 된다던가 태어난 아이의 부모님이 자신들이라던가 하는 것은 당사자의 의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정상가족이라는 틀은 생각보다 많은 우연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과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한부모 가정일 수도, 자녀가 아주 많은 가정일 수도, 조부모와 부모의 형제자매까지 포괄하는 대가족일 수도, 혼자 혹은 결혼을 통해 결합한 것이 아닌 이들의 집합일 수도 있다.

 <애비규환>은 토일(정수정)의 여정을 따라 가족이라는 단위가 굉장히 불균질 한 것임을 상기시키는 영화다. 대학생 토일은 자신이 과외를 하는 고등학생 호훈(신재휘)과 연애 중이다. 그러던 중 그는 임신하게 되고, 임신 5개월 차가 됐을 때 엄마 선명(장혜진)과 새아빠 태효(최덕문) 앞에서 그 사실을 이야기하고, 호훈과 결혼하기 전 자신의 친아빠 환규(이해영)를 찾아 대구로 떠난다. 그러던 중 호훈이 잠적한다. 토일은 부모님과 친아빠, 그리고 호훈의 부모님(강말금, 남문철)과 함께 호훈을 찾아 나선다. 영화 초반의 토일은 자신이 자신의 결혼과 출산을 계획대로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것은 토일의 통제 밖에 있는 것이다. 선명이 어린 토일의 동의 없이 환규와 이혼하고 태효와 재혼한 것이, 토일에게는 마치 갑자기 아빠가 사라지고 아저씨가 나타난 것으로 느껴졌던 것처럼 말이다. 가족(토일의 경우엔 예비 가족과 전(前) 가족을 포함하는)은 어쨌든 타인이고, 각자의 관계성도 다르다. <애비규환>은 이들을 한 곳에 의도적으로 모아 두고 그 난장판을 스케치하는 작품에 가깝다.

 인물이 4명 이상 모이는 장면들은 그 난장판을 구현한다. 토일과 호훈이 선명과 태효에게 임신 사실을 밝히는 영화의 초반부부터, 토일의 집에 찾아온 환규가 선명과 태효와 대면하는 장면, 토일과 그의 세 부모님, 호훈과 그의 부모님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이는 영화의 클라이맥스까지, 모든 것은 난장판이다. 이 난장판에서 관습적인 대화 장면을 찍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화의 대상은 산발적이고, 카메라는 인물들 곳곳으로 향하는 대화의 방향을 쫓을 뿐이다. 때문에 종종 대화 장면이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대체로 자신의 계획이 흔들리는 토일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기에 납득할 수 있는 방식이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토일과 세 부모님이 호훈의 배드민턴 클럽 사람들과 대면하는 장면이다. 꽤 긴 트래킹 롱테이크 숏으로 이 장면이 촬영되었는데, 네 캐릭터의 성격은 물론 그들 사이의 관계성이 카메라의 움직임을 따라 드러나는 깔끔한 장면이었다. 

 어쨌든 토일의 여정은 결국 가족을 계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으로 향한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가족은 계획할 수 없는 것이고, 우연적인 것이고,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토일의 엄마 선명이 그랬고, 두 아빠가 그랬고, 토일과 호훈도 그렇게 될 것이다. 가족을 이룬다는 것은 불확실한 관계 속으로 자신을 투신하는 것이다. 결혼에 필요한 확신은 그것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느냐에 대한 것이지, 그 상대와의 백년해로에 대한 확신이 아님을 이 영화는 주장한다. 대신 준비해야 하는 것은 새로운 상황에서 나의 선택권을 유지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며, <애비규환>은 토일이 그것을 선택해 나아가는 여정이다. 

 태풍이 몰아치던 날 세진(노정의)이라는 소녀가 실종된다. 경찰은 증인보호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외딴섬에 머무르고 있던 그가 유서를 남겼다는 점을 들어 사건을 자살로 결론 내리려 한다. 출동 중 교통사고와 이혼 소송 등의 문제로 인해 휴직 중이던 경찰 현수(김혜수)는 복직을 위한 준비로 이 사건의 최종 보고서를 맡는다. 사건 조사를 위해 세진이 머무르던 섬에 내려간 현수는 세진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순천댁(이정은)을 통해 그의 행적을 쫓는다. 그 과정에서 현수는 세진의 마지막 행적들이 자신의 삶과 닮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박지완 감독의 장편 데뷔작 <내가 죽던 날>은 한 소녀의 죽음에 얽힌 음모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는 경찰이라는 추리 장르의 익숙한 전개를 따라가는 듯하다. 세진은 아빠가 저지른 범죄의 거의 유일한 증인이면서, 다른 사람들과 격리되어 생활하고 있는 사람이다. 때문에 현수가 세진의 마지막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은 마치 세진이 엮인 아버지의 범죄에 대해 파고드는 것처럼 전개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장르적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현수가 세진의 행적을 쫓으며 순천댁 등의 인물들을 만나고 탐문수사를 벌이는 과정은 영화 밖의 매체를 포괄하는 추리 장르의 익숙한 방식을 따른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사건의 전말이나 범죄의 방식이 아니다. 영화는 그것 대신 현수가 CCTV 영상에 담긴 세진의 얼굴 위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는 모습을 담는다. 즉 현수가 쫓는 것은 세진임과 동시에 세진 위에 덧씌운 자신이다. 물론 두 사람의 처지는 다르다. 이혼 소송 중인 현수는 남편이 불륜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자신을 바람피운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벌어진 교통사고로 한쪽 팔이 일시적으로 마비되기도 했다. 직장과 직장이 아닌 곳, 동료와 동료가 아닌 이들 모두가 현수를 어떤 식으로든 재단한다. 그것은 조언과 비난 둘 모두에 해당한다. 세진도 마찬가지다. 아빠의 범죄 사실이 담긴 장부를 경찰에게 직접 전달했음에도 누군가는 그와 거리를 두고, 누군가는 과도하게 가까이 접근한다. 현수가 CCTV 영상 속 세진을 보고 자신의 얼굴을 투영한 것은,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해 있지만 둘이 공유하는 고통의 종류가 유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현수는 그 누구도 쉬이 눈치채지 못한 세진의 아픔을 알아차린다.

 여기서 순천댁은 둘 사이를 매개하는 존재다. 남동생이 죽고 혼수상태의 조카를 돌보고 있는 그 또한 어떤 아픔을 간직한 존재다. 그가 농약을 마시고 식도가 타버려 말을 못 하게 된 사람이라는 설정은 그 고통을 이정은이라는 배우의 연기로 육화하려는 설정이다. 순천댁은 세진의 아픔을 이해한다. 수사를 위해 섬을 찾은 현수를 경계하지만 이내 현수가 어떤 것을 하려는 지 알아차린다. 순천댁과 세진의 연대, 현수가 느끼는 세진과의 동질감은 언어로 닿을 수 없는 어떤 감정들의 교환으로 표현된다. 세 배우의 호연은 <내가 죽던 날>이라는 영화의 제목이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세 사람의 고통과 연대를 통한 극복이라는 주제를 훌륭하게 전달한다.

 아쉬운 것은 영화의 만듦새이다. 이야기의 전개가 느린 영화는 아니지만, 현수가 탐문수사에 나서며 세진뿐 아니라 현수의 과거까지 등장하는 구조를 취하기에 캐릭터의 감정선은 다소 느리게 전개된다. 하지만 편집은 종종 감정에 앞서는 듯 조급하다. 몇몇 대화 장면에서 사방으로 움직이는 카메라와 그것을 열심히 따라잡는 컷들은 그저 산만하기만 하다. 또한 캐릭터의 감정을 설명하는 내레이션은 배우들의 연기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되는 것을 도리어 망쳐버린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등의 다른 한국영화들처럼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촬영된 영상에 강황가루를 뿌려 놓은 듯이 누런 톤으로 색보정을 하는 것 또한 영화 전체의 톤을 영화의 마지막에서 망쳐버린다. 배우들의 호연과 감정에 초점을 맞춘 추리극이라는 서사는 좋았지만, 이를 뒷받침해줄 연출과 여러 기술적인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영화는 한태의 감독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다. 감독의 집에는 세 명이 산다. 감독, 엄마, 할아버지. 여기서 할아버지는 감독의 친할아버지, 즉 엄마의 시아버지다. 엄마는 아빠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지 1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시아버지의 변덕스러운 성격 때문에 엄마는 고생해왔다. 동시에 따로 사는 시어머니와는 각별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대학교 영상과에 들어간 감독은 엄마와 함께 공모전에 낼 영상을 촬영하며 친구처럼 지낸다. 엄마도 영상을 촬영하고 거기에 출연하는 것에 거부감이 크지 않다. <웰컴 투 X-월드>는 그렇게 촬영된 무수한 일상의 영상 속에서 시작된다.

 제목의 X는 미지수 X다. 영화의 중반 이후 할아버지는 엄마에게 분가할 것을 요청하고, 엄마는 망설이다 집을 알아보기 시작한다. 한태의 감독의 카메라는 그 과정을 따라간다. 감독은 엄마가 지난 20여 년 동안 고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그 때문에 결혼을 싫어한다. 먼 친척의 결혼식장을 돌아다니는 엄마를 종종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누가 결혼하는 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구로에서 익산까지 내려가 참석한 결혼식장의 풍경을 보며, 감독은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지닌 모종의 소속감을 깨닫는다. 그 미묘한 소속감은 결혼생활을 ‘견뎌온’ 여성들이 공유하는 모종의 유대감일 수도, 가부장제가 제시한 속박된 생활에 적응한 결과일 수도, 그 밖에 다른 어떤 감정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가족이라는 제도 자체가 그러한 틀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틀은 그것이 제공하는 감정적인 것 외에도 제사와 명절 노동, 부양과 돌봄 노동, (남편이 부재한 상황에서의) 생계유지 등을 떠맡는다.

 여기서 엄마와 엄마를 지켜보던 감독이 미묘한 소속감을 느낀 장소가 결혼식장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곳에서 엄마는 자신을 만날 것이라 생각지도 못했던 친척들을 오랜만에 만나고, 재회한 이들은 온종일 덕담을 나눈다. 결혼하는 이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던 엄마는 결혼식 사진 속에 속함으로써 미묘한 소속감을 굳건한 감정으로 변환하고 딸의 카메라를 향해 V자 제스처를 보낸다. 하지만 결혼식이라는 이벤트는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결혼식장에서 친척과 재회하는 것은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명절보다 더욱 큰 거리감을 동반한다. 큰 틀에서 가족이라는 범주화는 모종의 소속감을 제공하지만 그것은 상시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에 가깝다. 엄마가 돌아오는 곳은 어쨌든 시아버지를 모셔야 하는 집이다. 

 물론 시아버지와 엄마의 사이의 격한 갈등이 영화에 등장하진 않는다. (영화에 실리지 않은 영상 중에 그런 장면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엄마가 결혼식장에서 느낀 소속감엔 익산까지 친척들을 만나러 갔다는 능동성에 투영되지만, 단 세명이 매일 얼굴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집이라는 공간에서의 소속감은 의무나 굴레, 속박에 가까운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을 소속감으로 내면화하여 며느리의 의무를 지키는 것과, 거기서 벗어나 독립하는 것 중에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것은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다. 때문에 분가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시아버지의 제안에 엄마는 갈등하고, 집을 알아볼 때도 무의식적으로 시아버지가 남을 구로동 인근의 집을 알아본다. 딸이 원래 집에서 조금이라도 멀리 떨어진 집들을 제안하지만, 결국 결정된 것은 원래 집에서 5분 거리의 집을 매매하는 것이다.

 그리고 ‘5분의 거리감’이 주는 해방감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달랑 5분가량 걸으면 시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되돌아올 수 있지만, 엄마는 몇 분, 몇 시간, 며칠 뒤가 아닌 몇 개월 뒤에나 시아버지를 볼 것이라 말한다. 겨우 5분 정도의 거리감이지만, 그것은 드디어 ‘시월드’의 밖으로 나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사하는 날, 원래 집에서 쓰던 냉장고는 버려진다. 어딘가 이상한 성격의 시아버지가 라면을 보관하고, 엄마가 시아버지의 요구에 따라 라면을 끓이기 위해 매일 같이 열던 그 냉장고는 누구의 집에도 머물지 않는다. 혈연관계도, 엄마가 원한다면 더 이상 인척 관계도 아닐 시아버지와의 관계는 냉장고라는 상징을 통해 정리된다. ‘시월드’를 빠져나올 미지수 X-월드가 어떤 것일지는 엄마도 감독도 관객도 알 수 없다. 다만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일궈내고, 그 이후를 꿈꿀 수 있는 것에 필요한 것은 단지 ‘5분의 거리감’이었음을 엄마와 감독은 깨닫는다. 다음 명절에 엄마와 시아버지의 재회는 먼 친척과의 재회처럼 반가울까? 그것 또한 미지수이지만, 그 가능성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는 점에서 영화 속 모녀는 개척자가 된다. 그 세계에 발을 들인 모녀가 그곳에 관객들을 초대하는 것이 <웰컴 투 X-월드>의 목표였다면, 그 지점에 대해 이 영화는 성공을 거둔다.

 

*영화 후반부 눈에 띄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모녀가 자전거 타기를 연습하는 장면에서 모녀는 물론 주변 행인들도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작년 영화제 상영 때도 이 장면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장면이 영화제 공개 이후 추가 촬영된 장면이라면 올해 한국에 개봉한 작품에서 처음으로 코로나 19 팬데믹의 흔적을 본 것이 되어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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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동훈이 <범죄의 재구성>, <타짜>, <도둑들> 등을 연이어 성공시키며 한국 상업영화에는 일종의 범죄영화 붐이 일었다. 물론 이는 류승완의 <부당거래>와 박훈정의 <신세계> 등이 만들어낸 조폭-검사-경찰 범죄영화는 궤를 달리한다. 사기든 도박이든 도둑질이든, 한 분야의 ‘꾼’들이 모여 서로를 속고 속이는 도돌이표 같은 서사. 이는 최동훈이 <전우치>나 <암살> 같은 시대극을 연출하고 SF인 <외계인>을 준비하는 동안, <타짜>의 속편들과 더불어 수많은 한국 상업영화들이 반복한 이야기다. 어딘가 껄렁껄렁하고 허세 가득한 남자 주인공, 미모와 지식 혹은 기술을 겸비한 여자 주인공, 각기 다른 기술을 하나씩 지닌 조연들, 갑자기 등장한 남자 주인공의 과거 플래시백과 함께 시동이 걸리는 복수의 서사, 결국 도박이든 도둑질이든 무엇 하나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채 끝나는 영화. <도굴>은 이 전형을 정확히 따라간다. 단지 소재가 ‘도굴’일뿐이다.

 영화는 도굴꾼 강동구(이제훈)가 어느 절의 불상을 훔치는 것으로 시작된다. 문화재들을 몰래 사들이던 호텔 재벌 상길(송영창)은 그것을 탐내고, 자신의 오른팔 격인 윤세희(신혜선)를 통해 동구에게 일을 맡긴다. 동구는 벽화 전문 도굴꾼 존스 박사(조우진), 전설의 삽질 달인 삽다리(임원희) 등을 섭외해 큰 건수를 하나 시작한다. 그러던 중 동구와 세희는 각기 다른 꿍꿍이를 숨기고 있다. 영화는 초반에 동구가 무엇인가 복수할 것이 있음을 암시한다. 영화는 초반에 상길이 보유한 거대한 수장고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결말은? 아마 영화를 보는 모두가 같은 결말을 생각했을 것 같다.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선릉을 도굴한다는 컨셉에서 뽑아낼 수 있는 상상력이라곤 그저 조폭을 동원해 선릉 인근의 룸살롱을 매입하고 거기서부터 굴을 판다는 정도다. 허세 넘치는 남자 주인공, 예쁘지만 어딘가 재수 없게 묘사되는 여자 주인공, 되지도 않는 코미디를 시도하는 조연들, 거기에 조선족 출신 조폭과 성소수자 혐오적인 농담까지, <도굴>이 예상을 벗어나는 지점은 러닝타임을 채우고 긴장감을 불어넣기 위해 이 정도로까지 쓸모없는 장면들을 욱여넣었구나 싶은 장면의 향연뿐이다. 거기엔 스펙터클도, 서스펜스도, 놀라운 반전이나 리듬감 넘치는 편집도, 복수의 쾌감이나 하이스트의 스릴도, 하다못해 ‘도굴’이라는 소재가 지닌 ‘민족주의’도 없다. 단지 최동훈 같은 영화를 찍고 싶었던 누군가의 욕망만 있을 뿐이다. 

 

 <밀그램 프로젝트>,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등으로 알려진 마이클 알메레이다 감독의 신작 <테슬라>는 제목 그대로 오스트리아 출신의 발명가 니콜라 테슬라의 삶을 다룬 전기영화다. 영화는 테슬라(에단 호크)가 에디슨(카일 맥라클란)의 밑에서 잠시 일했던 19세기 말엽의 시간부터, 그가 당대 최고의 자본가 J. P. 모건(도니 케샤워츠)에게 투자를 받기 위해 노력했던 때, 그리고 J. P. 모건의 딸 앤 모건(이브 휴슨)과 함께 한 시간들, 그리고 그의 죽음까지를 다루고 있다. 다만 영화는 익숙한 전기영화의 형태를 띠고 있지는 않다. 당시의 사진이나 테슬라가 설계한 기계의 도면 등이 등장하는 것은 발명가의 전기영화라는 측면에서 익숙한 연출이지만, 마이클 알메레이다는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세트장 배경 부분에 거대한 배경 사진을 프린팅하거나 영사한 채 테슬라와 그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풀어가기도 하고, 어느 순간 시작된 앤의 내레이션은 테슬라의 삶을 설명해주는 듯하더니 직접 화면에 등장해 4의 벽을 깨고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걸어오기도 한다. 더군다나 앤이 테슬라의 삶을 설명해주는 장면에서, 그가 20세기 초반을 살았던 인물임을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앤은 맥북을 열고 프로젝터에 연결해 테슬라와 에디슨의 이름을 구글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쯤 되니 테슬라와 에디슨이 각각 교류와 직류에 대해 논쟁하며 맥도날드 소프트아이스크림을 할짝거리는 장면은 그다지 새롭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아무런 정보 없이 영화를 보러 갔기에 (심지어 카일 맥라클란이 나오는 줄도 몰랐다) 이러한 연출이 다소 당혹스러웠다. 특히 테슬라가 Tears For Fears의 “Everybody Wants To Rule The World”를 부르는 영화 후반부는 난감하기 그지없다. 이러한 연출은 테슬라가 당시에 머물며 더 많은 돈과 특허를 갈구한 사람이 아니라, 에너지, 빛, 전기를 통해 세계 전체를 연결하려는 야망을 지닌 인물이었다는 영화 속 설명에 의해 어느 정도 정당화된다. 우리는 내레이터로 등장한 앤처럼 니콜라 테슬라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구글링하고, 그렇게 찾을 수 있는 4,400만 개의 정보 중에서 테슬라에 대한 어떤 이미지를 뽑아낸다. 알메레이다가 이 영화의 각본을 쓰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테슬라에 대해 조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테슬라>가 테슬라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방법은 거기서 출발한다. 그가 발명한 형광등과 네온등, 테슬라코일 등은 테슬라의 업적이나 발명품보단 미래를 내다보고자 했던 그의 삶에 대한 오브제와 같다. 그가 자력으로 도달할 수 없었던 세계, 그가 죽은 지 80여 년이 지난 지금 얼추 구현된 그가 바라던 이상적 세계는 영화 내에서 그의 주변부에 놓이지만 그가 닿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그가 발명한 것들은 당장 내 머리 위에 놓여 있는 형광등처럼 당연한 것이 되었지만, 이상주의자인 테슬라는 당연하게도 그가 꿈꾸던 이상에 닿지 못한다. “이상주의는 자본주의에 가로막힌다”는 앤의 말처럼, 빚더미에 앉은 테슬라는 이상을 향해 다가가지 못한 채 이룰 수 없는 이상에 파묻혀 버린다.

 

 다만 이러한 방식이 테슬라의 삶을 그려내는 것에 과연 효과적인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그간 독특한 형식을 취한 전기영화들은 많았다. 밥 딜런의 생애를 여러 자아로 분열시켜 6명의 다른 배우가 각기 다른 자아를 연기한 <아임 낫 데어>, 관객에게 말을 걸고 실재 푸티지를 뒤섞는 방식의 <바이스>,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세 배우가 인물의 각기 다른 시간대를 연기하고 이를 하나의 굿판으로 엮어낸 김금화 만신에 대한 영화 <만신> 등등. 이러한 영화들은 각 인물에 생애나 그들의 직업적, 예술적 활동 및 성취에 알맞은 영화적 형식을 선보인다. 다만 <테슬라>는 영화의 형식적 욕심이 그것을 앞서 나간다는 인상이 강하다. 앞서 언급한 테슬라가 갑자기 80년대의 팝송을 노래하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테슬라의 불안정한 뒷모습으로 시작한 영화는 자신의 미완성의 삶을 노래하는 테슬라의 모습으로 끝난다. 영화의 시작과 끝 사이의 간극은, 알메레이다 감독이 취한 방식으로 채워지지 못한 채 겉돌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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