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 루카스 돈트 2018 :: 영화 보는 영알못

 라라(빅터 폴스터)는 발레리나를 꿈꾸고 있다. 아버지, 남동생과 함께 사는 그는 벨기에 최고의 무용학교에 진학하게 되고, 진학을 위해 가족 모두가 학교 인근으로 이사하게 된다. 남들보다 뒤늦게 발레를 시작했기에 부족한 면이 많지만, 라라에게서 인내와 가능성을 발견한 학교의 선생들은 그를 적극적으로 돕는다. 방과 후 홀로 라라의 연습을 도와주기도 한다. 라라의 아빠는 라라가 트랜지션을 받는 것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라라는 호르몬 치료를 시작했지만 빠르게 변화하지 않는 몸을 답답해하고, 매일같이 거울로 가득한 연습실에서 자신의 몸을 보며 혹독한 훈련을 거쳐야 하는 라라의 내면은 점점 혼란스러워진다. 루카스 돈트의 데뷔작 <걸>은 칸 영화제에서 그해 출품된 퀴어영화를 대상으로 삼는 퀴어종려상을 수상했던 작품이다. 영화에 크레딧에 올라가진 않았지만, 루카스 돈트는 실제로 트랜스여성 발레리나인 노라 몽세쿠흐의 이야기를 접한 뒤 그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각본을 썼다고 한다.

 <걸>이 북미에서 공개되었을 때 꽤나 많은 비판이 쏟아졌다. 평론가 올리버 휘트니는 영화의 카메라가 라라의 몸, 특히 성기 부분에 집중하고 있으며, 영화 후반부의 특정 장면을 “트랜스 트라우마 포르노”라 부르며 강하게 비판한다. 게다가 루카스 돈트는 물론 라라를 연기한 빅터 폴스터가 시스젠더 남성이라는 점 또한 하나의 비판 요소가 되었다. 노라 몽세쿠흐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걸>의 이야기는 시스젠더 남성의 환상이 아니며, 자신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라 말했다. 물론 몽세쿠흐의 말이 휘트니의 비판을 완전히 무력화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몽세쿠흐의 말과 존재는 <걸>이 정당화되는 것에 도움을 준다. 루카스 돈트는 빅터 폴스터를 캐스팅한 이유에 대해 다양한 성별의 배우 수십 명이 오디션에 참가했지만 연기와 춤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대신 기존에 캐스팅 물망에 있던 댄서들 중 폴스커를 발견해 캐스팅했다고 밝혔다. 그와 더불어 몽세쿠흐가 다녔던 병원 젠더 센터의 자문을 받아 트랜지션 과정 중에 있을 트랜스 청소년들이 영화에 참여하는 것은 그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조언을 구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걸>은 몸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영화다. 라라는 발레리나를 꿈꾼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발레이기에 그는 더욱 혹독한 훈련을 거쳐 그들을 쫓아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라라는 매일같이 자신의 몸을 본다. 영화의 오프닝은 잠을 자던 라라를 남동생이 깨우는 장면이다. 라라는 침대에서 스트레칭을 하면서 일어난다. 학교에 간 라라는 항상 자신의 몸을 본다. 몸을 극한의 상태로 훈련해야 하는 발레의 특성은 그의 신체적 디스포리아를 자극한다. 탈의실에서, 연습실의 거울에서, 샤워실에서, 딱 붙는 발레복에서, 라라는 자신과 타인의 몸을 본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발레를 연습하는 라라를 담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거칠어진다. 카메라는 춤을 촬영한다기보단 고행에 가까운 발레 훈련과 트랜지션이 진행 중인 라라의 신체를 찍고 있다. 학교 동급생의 생일파티 장면을 제외하면 라라가 타인으로부터 직접적인 혐오 발화를 듣는 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영화에 묘사되는 라라의 상황은 그렇게 나쁘지 않다. 아버지는 트랜지션을 적극 지지하고, 학교의 선생들은 그가 다른 학생들을 따라잡는 것을 돕고, 학교엔 성중립 화장실이 있으며, 돈이 부족해 학비나 트랜지션 비용을 지불하지 못하는 상황도 아니다. 하지만 그의 신체를 향한 모종의 혐오들은 배려의 말속에 숨겨진 함의로, 배제의 말속에 암시된 것으로 다가온다. 

 <걸>이 주목하는 것은 그 속에서 고뇌하는 라라의 모습이다. 사실 자신의 현재에 대해 고민하는 라라의 모습은 여느 사춘기 성장영화 속 주인공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의 플롯 또한 그러한 영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주인공은 자신이 꿈꾸는 것을 위해 움직이고, 행동에 옮기고, 무언가 잘 안 풀리고, 정신적 임계점이 찾아오고,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발산한다. 때문에 <걸>은 익숙한 성장영화의 플롯 안에서 라라만이 지닌 내면의 혼란과 고민을 풀어내는 작품이다. 나도 휘트니가 지적한 영화 후반부의 장면이 꼭 필요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바깥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맞서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트랜스 캐릭터들의 영화들이 있다면, 그 반대에서 내면의 태풍에 대한 영화의 존재 또한 소중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걸>은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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