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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포함

 

 드디어 끝났다. 2008년 <아이언맨>으로 시작해 11년 동안 22편의 영화를 통해 이어지던 MCU의 첫 마무리, ‘인피니티 사가’가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드디어 공개되었다. 개봉일 영화를 보고 나오니 속이 시원하다는 느낌과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느낌이 공존한다. 국내에서만 해도 사전예매량이 200만이 넘고, 개봉일 오전에 100만 관객을 돌파하는 등 그야말로 ‘엔드게임 광풍’이 불고 있지만, 막상 본 영화는 조금은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영화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핑거스냅’ 직후에서 시작한다. 캡탄 마블(브리 라슨)의 도움으로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네뷸라(카렌 길런)가 지구에 도착하고, 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 토르(크리스 햄스워스), 블랙위도우(스칼렛 요한슨), 헐크(마크 러팔로) 등 살아남은 히어로들은 타노스(조쉬 브롤린)를 추적한다. 이들은 인피니티 스톤의 사용으로 쇠약해진 타노스를 처치하는데 성공하지만, 타노스는 이미 스톤의 힘으로 스톤들을 제거해버렸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시간, 어벤져스는 패배감과 죄책감을 간직한 채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중 양자영역에서 돌아온 앤트맨(폴 러드)이 양자영역을 통한 시간여행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마지막 희망을 받아들인 어벤져스는 시간여행을 통해 스톤들을 모아 죽은 이들을 살려내려 하고, 타노스와 최후의 전쟁을 치르게 된다.

 

 <엔드게임>은 시종일관 마지막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어벤져스> 때부터 이어진 최종빌런 타노스와의 이야기, 첫 <어벤져스>부터 출연해온 원년멤버들의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때문에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나 캡틴 마블 등을 비롯한 뒤늦게 ‘인피니티 사가’에 참여한 캐릭터들의 분량은 매우 적다(이들 대부분이 <인피니티 워>에서 먼지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엔드게임>은 과연 적절한 마무리인가?”라는 질문이 <엔드게임>에 대한 만족도를 결정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재밌게는 봤지만 아쉬웠다. 181분의 러닝타임 동안 아쉬운 지점들이 여럿 드러났다. 

 

 재밌는 부분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시간여행 설정을 통해 과거의 MCU 영화들에 등장했던 여러 사건과 장소들이 다시 등장하는 부분이다. 살아남은 어벤져스 멤버들은 스톤을 찾기 위해 세 팀으로 나누어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헐크, 앤트맨은 <어벤져스> 뉴욕 침공으로, 토르와 로켓(브래들리 쿠퍼)은 <토르: 다크 월드> 시기의 아스가르드로, 네뷸라와 워머신(돈 치들)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모라그 행성으로, 블랙위도우와 호크아이(제레미 레너)는 <인피니티 워>에 등장한 보르미르로 떠난다. 이들의 여정에서 그간 등장했던 수많은 캐릭터와 사건들이 다시 등장한다. 더욱이 이 장면들의 많은 부분이 코믹스에서 따온 장면들이기에, 팬들에게 더욱 인상 깊을 장면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간여행을 떠나기 전, ‘핑거스냅’으로부터 5년이 지난 시점의 묘사도 만족스럽다. 마치 <나는 전설이다>와 같은 포스트-아포칼립스 영화의 황량한 도시의 풍경을 보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의 아쉬운 지점 또한 좋았던 부분들과 거의 동일하다. 어벤져스 멤버들은 시간여행을 통해 과거의 사건, 그리고 인물들과 마주하게 된다. 과거를 직접 찾아가 MCU의 11년을 되돌아보는 컨셉은 도리어 <백 투 더 퓨처> 보다는 <나의 마지막 액션 히어로>와 같은 영화 속으로 주인공이 들어가는 영화를 연상시킨다. 문제는 캐릭터들이 과거에서 만나는 인물들이 자신 혹은 자신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가령, 아이언맨은 1970년의 쉴드 기지에서 아버지인 하워드 스타크(존 슬래터리)를 만나고, 토르는 어머니 브리가(르네 루소)를 만난다. 이들은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 패배감, 죄책감을 풀어놓는다. 러닝타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이 과정은 ‘팬서비스’ 그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한다. 아버지에게 조언해주는 토니나 어머니에게 조언을 받은 토르의 이야기는 현재로 돌아온 이후 어떠한 변화의 지점도 만들어주지 못한다. 아주 짧게 치고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를 ‘팬서비스’라는 명목으로 길게 늘여 놓은 것 밖에 되지 못한 장면들이다. 

 

가장 아쉬운 지점은 시간여행 설정이 전개되는 방식이다. <엔드게임>은 헐크나 네뷸라 등의 대사를 통해 영화 속 시간여행이 <백 투 더 퓨처>나 <터미네이트> 등의 시간여행 영화라는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영화는 어느 정도 그 설정을 맞춰 따라가는 듯하다. 에이션트 원(틸다 스윈튼)은 ‘타임 스톤’을 얻기 위해 자신을 찾은 헐크에게 시간여행에 따른 평행우주들이 생겨날 것이라 설명하지만, 헐크는 스톤들을 다시 과거로 돌려놓을 것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 설정은 얼추 들어맞는 것 같다. 영화의 엔딩 직전까지 이 설정은 큰 결함이 없다. 하지만 엔딩 부분에서 스톤을 반납하기 위해 다시 한번 시간여행을 떠난 캡틴 아메리카가 그대로 과거에 머무르고, 노인이 되어 팔콘(안소니 마키)과 재회하는 장면은 영화가 내세운 시간여행의 논리를 붕괴시킨다. 그 장면의 감동보다 영화 스스로 무너트린 설정에 대한 불만족스러움이 더 컸다. 

 

 어벤져스 ‘원년 멤버’의 은퇴식에 가까운 이 영화가 특정 캐릭터를 대우하는 방식 또한 불만족스럽다. 토니 스타크는 죽었고, 캡틴 아메리카는 시간여행을 통해 새 인생을 살았으며, 호크아이는 가족과 함께 하고 있고, 토르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새로운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블랙위도우와 헐크의 이야기는 없다.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심지어 호크아이에게도 주어진 에필로그가 헐크에겐 없다. 특히 블랙위도우에 대한 대우는 최악에 가깝다. 호크아이와 함께 소울스톤을 구하러 과거의 보르미르 행성으로 간 둘은, 서로가 각자를 희생해서 소울 스톤을 얻고자 한다. 결국 블랙위도우가 죽게 되고, 호크아이가 소울 스톤을 얻어 귀환한다. 이 과정에서 카메라는 절벽에서 추락해 죽은 블랙위도우의 모습을 <인피니티 워> 속 가모라의 최후와 같은 구도로 촬영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블랙위도우는 ‘어벤져스’라는 가족을 돌보는 어머니, 그리고 모두를 위해 희생하는 성녀로 간단하게 치환되어 버린다. 심지어 생존한 거의 모든 캐릭터들이 모이는 토니 스타크의 성대한 장례식 장면과는 달리, 블랙위도우의 장례식은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사실 <캡틴 마블>이나 <블랙팬서>, <앤트맨과 와스프> 정도를 제외하면 MCU 영화들 속 여성캐릭터의 대우는 언제나 좋지 않았다. <엔드게임>은 그 전통을 고스란히 따라간다. 그 과정에서 원년멤버인 블랙위도우의 퇴장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안 좋은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은 분명 비판받을 지점이다. 아마도 많은 팬들이 이 부분에서 분노하지 않았을까? 심지어 당장 내년 블랙위도우의 첫 솔로영화가 예정되어 있는 와중에 이러한 방식으로 퇴장시키는 것에서, 제작진이나 팬보이들이 그토록 부르짖던 ‘캐릭터에 대한 예우’는 찾아볼 수 없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캡틴마블을 비롯한 여성캐릭터들이 팁업하는 장면은 (그 장면 자체로는 괜찮지만) <엔드게임>, 더 나아가 MCU의 많은 영화들이 여성캐릭터를 다뤄온 방식에 대한 인식개선조차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알라바이이다. 네뷸라가 조금 더 입체적인 캐릭터성과 서사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미약한 위로가 뿐이다.

 

 <엔드게임>이 가진 최고의 장점은 ‘원년멤버의 은퇴’에 있다. 중년 백인 남성 셋과 젊은 백인 남성 둘, 백인 여성 하나로 구성된 이 팀의 인종적, 젠더적 구성은 계속해서 비판받아온 지점이다. <엔드게임>은 3시간의 긴 러닝타임을 할애해 이들의 마지막을 보여준다. 어쩌면 <엔드게임>은 이것만으로 충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추억팔이로만 가득한 영화이지만, 어쨌든 타노스를 대적하는 기나긴 ‘인피니티 사가’는 끝났다. 백인 중년 남성 위주의 이야기는 저물었고, 블랙팬서, 캡틴 마블, 발키리, 와스프, 스파이더맨 등의 비백인, 여성, 청소년 캐릭터들이 앞으로의 MCU를 이끌어 갈 것이다. <블랙팬서2>나 <캡틴마블2> 이외에도 <상치>, <미즈마블> 등 동양인 남성, 무슬림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들이 제작 중이라는 루머들이 흘러나오는 것은 이러한 변화를 보여준다. 당장 캡틴 아메리카가 버키가 아닌 팔콘에게 방패를 물려준 것만 봐도, 이러한 변화의 조짐이 드러난다. 아직 MCU에 데뷔하지 않은 코믹스의 캐릭터들을 생각하면, 마블은 지금까지의 단점을 (물론 느린 변화겠지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엔드게임> 자체는 지난 10년 동안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극대화한 아쉬운 결과물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언급된 영화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빌런이 좋은 영화는 무엇일까

 슈퍼히어로장르의 빌런을 생각하면 어떤 캐릭터들이 떠오르는가? <다크 나이트>(2008)의 조커(히스 레저)?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2018)의 타노스(조쉬 브롤린)? 혹은 시대를 더 앞질러서, <배트맨>(1989)의 조커(잭 니콜슨), <슈퍼맨>(1978)의 렉스 루터(진 헤크먼)을 떠올릴 수도 있다. 이들 영화 속 빌런이라는 존재들은 히어로의 안티테제로 존재해왔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스타크 씨(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아이언맨이 된 이후 특별한 능력을 지닌 존재들이 늘어났고, 세상을 위협하는 사건도 비례해서 늘어났죠라는 비전(폴 베타니)의 대사는 이를 증명하듯 등장한다.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는 배트맨(크리스찬 베일)에게 네가 나를 완성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언브레이커블>(2000)에서 <글래스>(2019)까지 이어진 M. 나이트 샤말란의 3부작은 슈퍼히어로 코믹스에서부터 이어진 슈퍼히어로-빌런의 상관관계를 괴상하게 재구성한 작품이기도 했다. 결국 슈퍼히어로 장르에서 슈퍼히어로의 존재는 빌런의 존재를 보장한다. ‘빌런 없는 슈퍼히어로 영화는 불가능한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빌런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진부함을 가져온다. 이미 상상 가능한 빌런의 종류는 모두 쏟아져 나온 것만 같다. ‘절대 악혹은 순수 광기에 가까운 조커부터 전쟁이나 정치를 형상화한 <원더우먼>(2016)의 아레스(데이빗 튤리스)<퍼스트 어벤저>(2009)의 레드 스컬(휴고 위빙), 프롤레타리아 빌런이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스파이더맨: 홈커밍>(2017)의 벌처(마이클 키튼), 인종이나 젠더 등의 영역 속 소수자를 대변 혹은 은유하는 <블랙 팬서>(2018)의 킬몽거(마이클 B. 조던)<엑스맨>(2000)의 매그니토(이언 맥켈런), 심지어는 우주적 존재인 <닥터 스트레인지>(2016)의 도르마무(베네딕트 컴버배치-목소리)까지 수많은 종류의 빌런들이 쏟아졌다. 실사영화의 영역을 넘어, MCU TV드라마나 <인크레더블>(2004)와 같은 애니메이션,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2015)와 같은 유사-슈퍼히어로 영화까지 영역을 넓히면, ‘슈퍼히어로 장르 속 빌런의 종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많은 영화들은 빌런을 통해 영화의 정체성이 규정된다. 팀 버튼의 배트맨 영화 두 편이 그랬고,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또한 그러하며,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는 오롯이 빌런 타노스를 위한 영화였다.

 

 그렇기에 남초 커뮤니티와 팬보이들로 인해 과잉대표된 강력한 빌런혹은 좋은 빌런이 좋은 슈퍼히어로 영화의 기반이라는 의견은 종종 오해를 낳게 된다. MCUDCFU의 몇몇 영화들, 혹은 <엑스맨: 아포칼립스>(2016)와 같은 영화들이 마주한 비판이 그러하다. “빌런이 약하다는 평은 어느새 슈퍼히어로 영화의 만듦새를 결정짓는 문장이 되어버렸다.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3>(2007)부터 <아이언맨2>(2009), <토르: 다크 월드>(2013),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2016) 등의 영화들이 이러한 비판에 직면했다. 물론 이 영화들이 잘 만든 영화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빌런이 약하다라는 평이 슈퍼히어로 영화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자리잡은 상황에서 느껴지는 지겨움이 있다. ‘빌런이 약하다라는 평은 영화의 만듦새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원더우먼>이나 <데드풀>(2016),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2018)와 같은 작품들도 빌런이 강한영화는 아니지 않나? <아쿠아맨>(2018)에서 옴(패트릭 윌슨)이나 블랙 만타(야히아 압둘 마틴 2)의 존재감이 부족하다고 이 영화를 혹평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빌런의 존재감에 영화의 완성도를 떠맡기는 일은 지금까지 나온, 그리고 앞으로도 쏟아져 나올 슈퍼히어로 영화들을 설명하거나, 그들의 완성도를 끌어올리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리어 강력한 빌런에만 집착하는 경향은 히스 레저의 조커와 같은 사례에 과몰입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수어사이드 스쿼드>(2016)의 조커(자레드 레토)가 이러한 집착적 경향의 가장 나쁜 예시를 보여준다. 영화 속 조커의 모습과 영화 밖 자레드 레토의 모습은 그저 광인처럼 느껴질 뿐이다. 게다가 강력한 빌런에 집착하게 된 몇몇 팬보이들은 이제 빌런을 추앙하고 있다. 이제 조커와 타노스는 팬보이들의 형님으로 자리잡았다. 강력한 빌런 담론을 통해 빌런에 대한 과몰입과 추종이 한국의 알탕영화들 속 악역(가령 <신세계>(2013)이나 <베테랑>(2015), <범죄도시>(2017)과 같은 영화 속 악역들)에 대한 추종과 유사하다고 슬쩍 주장해보고 싶기도 하다.

 


 빌런 없는 슈퍼히어로 영화의 등장

 개인적으로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의 개봉 이후 슈퍼히어로 영화 속 빌런과 강력한 빌런이 좋은 영화의 기본전제라는 담론이 지겨워지고 있었다. 전쟁, 욕망, 정치, 환경오염, 광기, 빈곤, 절대 악이 개별자로 형상화된 빌런을 그만 보고 싶어졌다. <캡틴 마블>은 이러한 욕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주는 작품이었다.

 

 나는 <캡틴 마블>빌런 없는 슈퍼히어로의 등장이라고 평하고 싶다. 물론 형식적인 빌런은 존재한다. 영화의 초반부에서는 스크럴 족의 탈로스(벤 맨델슨)이 빌런으로 제시되고, 캐럴 댄버스(브리 라슨)의 과거가 밝혀진 이후부터 욘-로그(주드 로)와 크리 스타포스팀이 빌런에 위치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캡틴 마블>의 빌런이 아니다. 슈퍼히어로 장르의 컨벤션으로써 형식적으로 삽입된 캐릭터일 뿐, 빌런이라 불리던 다른 영화 속 캐릭터들과는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 영화가 전개되며 두 캐릭터가 갖게 되는 변화, -로그는 조력자에서 빌런으로, 탈로스는 빌런에서 조력자로의 변화는 특정한 캐릭터로 형상화되지 않은 <캡틴 마블>의 진짜 빌런을 자연스럽게 폭로한다.

 


 그렇다. <캡틴 마블>의 빌런은 시스템이다. 시스템은 조력자를 빌런으로, 빌런을 조력자로 변화시킨다. 아니, 조력자의 위치에 선 캐릭터가 빌런이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빌런으로 등장하는 캐릭터가 조력자, 친구, 동료라는 사실을 은폐한다. 이러한 시스템의 은폐 과정은 슈프림 인텔리전스(아네트 베닝)에 의해 지워진 기억을 되찾는 캐럴 댄버스의 여정을 통해 영화 전반에 걸쳐 폭로된다. 슈프림 인텔리전스의 명령에 의해 지워진 기억은 욘-로그의 가스라이팅으로 인해 지속된다. “감정을 배제해라”, “과거에 연연하지 말라는 욘-로그의 말은 가장된 조력자가 건네는 은폐의 속삭임이다. -로그의 가스라이팅은 되찾은 기억의 파편 속에서 등장하는 캐럴의 아버지나 공군 남성 조종사의 대사와 공명한다. “위험하니까 타지 말랬지”, “여자는 조종석에 앉을 수 없어라는 말들은 욘-로그의 대사들이 작동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로그, 아버지, 남성 조종사의 연쇄적 가스라이팅은 은폐를 통해 작동되는 시스템을 유지하는 원동력이다. 현실의 가부장제, 제국주의, 자본주의 등으로 읽어낼 수 있는 이 시스템은 젠더, 인종, 경제적 계급을 만들어내고, 하위 계급에 속한 사람들을 착취함으로써 지속된다. 흩어진 퍼즐처럼 제시되는 캐럴의 기억은 이러한 시스템()의 존재를 드러내는 단서이자 징후이고, 이들이 하나의 기억으로 통합되었을 때 캐럴은 각성하게 된다.

 

 캐럴의 각성을 만들어내는 존재는 그의 절친이자 싱글맘이며 전투기 조종사인 마리아 램보(라샤냐 린치)이다. 그는 등장부터 영화가 끝날 때까지 위치가 변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언제나 캐럴의 조력자, 동료, 친구, 가족이다. 불변하는 그의 위치는 캐럴의 기억을 짜맞추는 마지막 퍼즐이다. 동시에, 조력자의 위치로 옮겨간 탈로스 또한 캐럴의 각성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가 크리족의 침략으로 인해 우주난민 신세가 된 스크럴 종족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이다. 그 역시 시스템의 피해자인 셈이기 때문이다. 유사한 작동원리를 지닌, 그리고 거의 모든 경유에서 함께 작동하는 가부장제와 제국주의는 캐럴 댄버스가 조종사가 되는데 방해물을 만들었고(이것은 마리아 램보 또한 마찬가지이다), 탈로스를 난민으로 만들었다. 이들에게 직접적인 장애물이 되는 욘-로그와 크리 스타포스는 진짜 빌런인 시스템의 하수인이다. 그 시스템은 <닥터 스트레인지>의 도르마무처럼 하수인을 내세운 개별적인 존재이거나,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의 제모(다니엘 브륄)처럼 악의를 품은 배후의 인물이 아니다.

 


모습을 바꾸는 빌런-시스템

 여기서 의문점이 생긴다. <캡틴 마블>에서 시스템은 슈프림 인텔리전스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가? 심지어 어떤 형태를 띄고 의인화된 존재로 영화에 등장한다. 하지만 이 질문은 굉장히 쉽게 해소될 수밖에 없다. 영화 상에서 슈프림 인텔리전스는 크리 종족의 운명을 관장하는 인공지능이다. (크리족의 컴퓨터 체계가 인간과 비슷하다면) 무수히 많은 선택지를 지닌 알고리즘의 한 종류인, 가상적인 존재이다. 그는 오프라인에서는 존재를 드러낼 수 없다. 그는 헬라 행성의 특정 접속 장소 내지는 크리족 함선의 기계장치를 통해서만 접속 가능하다. 분명 존재하고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만 어디까지나 가상적으로 가정된 존재이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은 시스템에 접속한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떠올리는 모습을 모방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것은 신성하고, 남에게 발설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슈프림 인텔리전스는 비어스, 캐럴 댄버스에게는 마-(아네트 베닝)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비어스는 캐럴 댄버스가 마-벨을 존경했음을 기억하지 못한다. 슈프림 인텔리전스는 마-벨의 모습으로 캐럴 댄버스에게 가스라이팅을 가해, 그를 고귀한 크리족 전사 비어스인 상태에 머물게 한다. 결과적으로 이 과정에서 시스템은 더더욱 배후에 머물게 된다. 시스템은 특정 인물로 지목되지도, 지목될 수도 없다. 그것은 그냥 가정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구조를 직조하고, -로그, 캐럴의 아버지, 캐럴을 비웃는 남성 조종사 같은 인물들을 생산해 구조를 유지한다. 다소 결정론적인 이야기일 수는 있지만, 결국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서 로난(리 페이스)의 모습 또한 가부장제-제국주의 구조를 등에 업고 나타난 것 아닌가? 동시에 마-벨의 형상으로 나타남으로써 적이 아닌 적을 상정하도록 한다. 마치 난민인 탈로스가 전쟁의 원흉인 것으로 가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모습을 바꾼다라는 것은 <캡틴 마블>에서 꽤나 중요한 소재이기도 하다. 캐럴 댄버스를 고귀한 크리족 전사 비어스의 정체성으로 고정시키려고 한 것처럼, 시스템은 언제나 개인들을 특정한 정체성으로 규정하고, 고정하려 한다. 하지만 개인은 절대 고정적인 하나의 정체성만을 가지지 않는다. 슈프림 인텔리전스가 침략자로 고정시키려 했던 스크럴이 형태변환자라는 것은 이를 가장 강력하게 드러내는 소재다. 시스템은 모든 사람을 특정한 정체성으로 고정시키려 하고,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려 한다. 하지만 <캡틴 마블> 속 인물들은 어떠한가? 당장 마리아는 캐럴이 자신을 절친으로써, 엄마로써, 조종사로써 지지해주었다고 말하지 않는가? 캐럴 또한 여성이기에 받은 차별적 경험, 미 공군 소속 전투기 조종사라는 직업, 크리족 전사라는 정체성, 슈퍼히어로로 각성한 정체성이 뒤섞인 총체로서 존재하는 인물이다. 결국 모든 개인은 라는 정체성을 중심에 두고, 수많은 정체성의 스펙트럼을 오가는 트랜스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시스템은 개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여성이기에 OO를 할 수 없어”, “너는 침략자/빌런일 뿐이야라는 낙인을 찍고, 그 낙인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고정시킨다.

 


교차성으로 빌런의 부재-시스템의 존재를 드러내기

 배후의 배후의 배후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공작은 부재로써 존재하는 시스템에 의해 행해진다. 깊숙이 숨은 시스템을 드러내려면 그에 맞는 도구가 필요하다. <캡틴 마블>은 페미니즘을 그 도구로 꺼내 든다. ‘캡틴 마블로 각성하는 순간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쓰려 졌다 다시 일어나는 캐럴의 모습을 담은 몽타주로 대표되는 <캡틴 마블>의 임파워링은 가부장제-제국주의 시스템에 그대로 돌진하여 균열을 낸다. 큰 상황을 보자면 당장 지구에 닥친 위기를 구했을 뿐이지만, 우주 난민이 된 스크럴족의 새 고향을 찾아주러 함께 떠나는 모습과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노바 콥스가 큰 희생을 치르며 격퇴한 로난의 함선을 맨주먹으로 물리치는 힘은 영화가 끝난 이후 펼쳐질 이야기의 거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성차별이라는 낙인에 기반한 가스라이팅, ‘증명할 것을 요구받는 일상에서 해방된 여성은 무한한 가능성을 얻게 된다. <캡틴 마블>은 이것을 캐럴과  마리아, 모니카(아키라 아크바), -벨 등 여성 간의 여성연대, 소수자의 위치에 놓인 탈로스와의 연대, 동료의식에 기반한 닉 퓨리(사무엘 L. 잭슨)과의 연대를 통해 가능케한다. 슈퍼히어로 장르의 컨벤션 하에서 사이드킥의 지위를 가진 마리아 또한 딸 모니카의 지지를 통해 우주에 진출하고 (캐럴과 웬디 로슨으로서의 마-벨은 실패했던) 처음 보는 외계 우주선의 격퇴에 성공했으니까 말이다.


 이러한 연대의 기반에는 교차성이 있다. <캡틴 마블>에서 가장 부각되는 것은 당연히 여성연대지만, 이것은 인종과 젠더를 포괄하는 연대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들의 연대는 심지어 고양이(인 줄 알았던 외계생물 플러큰)마저도 포괄하지 않는가.

 

 이러한 교차적 연대는 시스템이 규정하는 정체성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캐럴은 마리아와 탈로스를 통해 기억을 되찾은 뒤 캡틴 마블로 각성하고, 마리아는 다시 조종석에 올라가며 탈로스는 침략자라는 누명을 벗게 된다. 탈로스가 자신의 녹색 피부를 본모습이라고 칭하지만, 다른 외형으로 형태를 변환했을 때도 탈로스이듯, 개인은 언제나 를 중심으로 늘어선 다양한 스펙트럼 사이를 오간다. ‘라는 구심점은 내가 타인이 아닌 존재임을 증명할 뿐, 나의 정체성은 시시각각 변화한다. 캐럴과 연대관계에 속하는 캐릭터 중, 후에 쉴드라는 조직의 국장이 되는 닉 퓨리만이 별다른 정체성 변화를 겪지 않는 것은 조직/구조/시스템 안에 완전히 편입되고 고정된 정체성을 지니게 된 존재임을 드러난다. 생각해보면 닉 퓨리는 <캡틴 마블>의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신분증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지 않는가?

 


 결론적으로, 시스템을 벗어난, 혹은 벗어날 수 있는 연대는 부재한 것처럼 은폐된 시스템을 드러내고, 그것을 타파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캡틴 마블>은 그것의 주요한 도구로 교차성 페미니즘을 선택한 것이다. 이는 가부장제-제국주의 시스템의 성차별적 구조를 드러내고, 이들이 여성과 난민 등의 소수자를 착취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역할을 수행한다. 빌런 없는 슈퍼히어로 영화는 이를 통해 가능해진다. 아니, <캡틴 마블>은 기존의 슈퍼히어로 장르가 빌런이라 지칭하는 특정한 캐릭터군 대신 시스템을 빌런으로 한 작품이다. 조커나 타노스와 같은 강력한 빌런은 가시적인 존재이다. 물론 그런 악은 여전히 남아있다. 슈프림 인텔리전스가 그러하듯,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가장된 모습으로 여기저기서 등장할 뿐이다. 그것이 조커이고, 타노스이고, -로그였던 것뿐이다. 결국 슈퍼히어로 장르에 페미니즘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캡틴 마블>의 가장 큰 성과는 바로 이것이다.

 

빌런 없는 슈퍼히어로 영화로 진짜 빌런을 드러내기. 그리고 교차성 페미니즘으로 이를 가능케 하기



 


*스포일러 포함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이 충격적인 결말 이후 <어벤저스: 엔드게임> 이전에 개봉하는 MCU 영화들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져 있다. <앤트맨과 와스프>는 MCU 내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재확인하면서, 두 편의 <어벤저스> 사이에 중간다리를 놓는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다. 반면 <인피니티 워>의 쿠키영상에서 그 로고만이 공개되었을 뿐인 <캡틴 마블>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사실 MCU의 첫 여성 슈퍼히어로 단독 영화라는 점에서 기대가 더 컸다. 물론 캡틴 마블/캐롤 댄버스를 연기한 브리 라슨이 “<캡틴 마블>은 페미니즘 영화”라고 발언한 뒤부터 ‘자칭’ 팬보이들의 불매 선언이 이어지고 있기는 하다. 역대 MCU 솔로 영화 중 최대 예매량을 기록 중이라 흥행에 큰 문제는 없어 보이지만 말이다. 더욱이 MCU 최초로 여성 감독이 연출(애너 보든이 라이언 플렉과 공동연출)을 맡았다는 점에서 많은 기대가 되었다.



<캡틴 마블>은 작년 말 세상을 떠난 스탠 리를 추모하는 오프닝 타이틀로 시작한다. 지구에서의 기억을 잃은 캐롤 댄버스는 비어스라는 이름으로 크리족의 전사로 생활하고 있다. 캐롤은 크리족 멘토인 욘-로그(주드 로)와 미네르바(젬마 첸), 코라스(디몬 하운수) 등으로 이루어진 팀과 함께 활동 중이다. 어느 날 슈프림 인텔리전트에게 외진 행성을 침략한 스크럴족과 그들의 리더 탈로스(벤 맨델슨)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캐롤은 작전 중 스크럴족에게 납치당하고, 이들이 끄집어 놓은 지구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심하게 된다. 탈출 과정에서 지구로 추락한 캐롤은 쉴드 요원 닉 퓨리(사무엘 L. 잭슨)와 전투기 조종사 시절 친구인 마리아(라샤나 린치)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지워진 과거를 찾아내고, 캡틴 마블로 각성하게 된다.



 <캡틴 마블>은 페미니즘 영화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 문장에 딴지를 걸기는 어려울 것이다. <캡틴 마블>은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고스트 버스터즈>, <원더우먼> 등 앞서 개봉한 여성 히어로 중심의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만들어 둔 길을 따라 질주한다. “여자라서 위험한 운동/군인 훈련/전투기 조종사는 안 돼”라는 말을 듣고 살았던 과거, MCU 세계관 내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얻었음에도 기억이 지워지고 크리족에 의해 힘을 제한당하는 현재는 캐롤 댄버스가 캡틴 마블로 각성하면서 부서진다. 영화 내내 여성에게 가해지는 직설적인 차별, 보호를 명목으로 한 통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난 이후의 캐롤 댄버스에 의해 산산이 박살 나고 만다. “나에게 너 자신을 증명해보라”는 욘-로그의 말에 “내가 그걸 증명할 필요는 없지”라고 말하는 캡틴 마블의 대사는 여성의 삶에 놓인 끝없는 증명의 장벽을 진부한 장르 클리셰와 함께 박살 내 버린다.



 캐롤 댄버스가 캡틴 마블로 거듭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캐릭터들이 여성들이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캐롤 댄버스의 절친이자 가족 같은 인물인 마리아는 정체성을 일깨워주고, 그의 멘토와 같은 마-벨(아네트 베닝)은 캡틴 마블로 각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었으며, 마-벨의 겉모습을 한 슈프림 인텔리전트는 영화의 빌런으로써 각성의 기회를 제공한다. 캐롤 댄버스의 여정에서 남성 캐릭터들은 과도한 비중을 차지하지도 않고, 도리어 캐롤의 각성을 방해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가령 닉 퓨리는 적당한 동행의 수준으로 등장하고, 우주 난민(이것을 현실세계의 전쟁 난민 문제와 일대일로 연결하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을 것이다)인 스크럴족의 탈로스는 각성에 대한 부차적인 기회를 제공하며, 욘-로그는 센트럴 인텔리전스의 하수인 역할에 불과하다. 결국 <캡틴 마블>은 여성 주인공이 여성 조력자와 함께 여성(의 모습을 한 인공지능) 빌런에 대항하는 이야기이다. MCU의 영화 중 이렇게 여성으로 가득한 영화가 나온 적이 있었나?



 서사적으로도 꽤나 흥미롭다. 캐롤 댄버스의 여정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피터 퀼(크리스 프랫)을 연상시키지만, 후자의 여정이 지루해지게 된 함정을 피해 간다. 두 캐릭터 모두 지구인으로 태어났지만, 외계인에게 납치되었고, 그들의 피/DNA가 섞인 채 외계의 방식으로 살아온 인물이다. 피터에게 납치는 유사부자관계와 백인 남성 너드로 이어지는 과정이었지만, 캐롤에겐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과정이었다. 다시 말해, 캐롤 댄버스는 납치를 통해 잃어버린 기억과 시간을 오롯이 ‘자신’을 통해 다시 채우며 성장한다. 그러나 피터 퀼은 자신의 뿌리에 집착하고, 이는 속편의 진부한 이야기로 이어지고 말았다. 단순히 두 유사한 플롯의 우열을 가리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캡틴 마블>의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후반부의 해방감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비롯해 다른 MCU의 영화에서 만나보지 못한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플롯은 <엔드 게임> 이후 제작될 속편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펼쳐나갈 자유도를 제공한다. 같은 세계관의 다른 영화들에서 보지 못한 해방감과 자유, 그리고 이를 만끽하며 질주하는 여성 슈퍼히어로의 모습이 담긴 <캡틴 마블>의 후반부는 그야말로 페미니즘적이다. 이제는 짧지 않은 역사를 지니게 된 슈퍼히어로 장르이지만, <캡틴 마블>에 와서야 드디어 ‘페미니스트 슈퍼히어로’를 만나게 되었다.


 샘 레이미의 첫 <스파이더맨> 실사영화가 개봉한 이후 16년 만에 스파이더맨이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됐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라는 제목으로 소니가 야심 차게 준비한 이번 영화는, 한 명의 스파이더맨이 등장하는 것이 아닌, 여러 차원에 존재하던 스파이더맨들이 한 차원에 모이게 되어 발생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동시에 이번 영화는 2011년 코믹스에 데뷔한 흑인 스파이더맨, 마일즈 모랄레스(샤메익 무어)의 오리진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는 킹핀(리브 슈라이버)이 차원 이동기를 만들어 내자, 사고로 다른 차원의 스파이더맨인 피터 B. 파커(제이크 존슨), 스파이더 그웬(헤일리 스타인필드), 스파이더맨 누아르(니콜라스 케이지), 페니 파커(키미코 글렌), 스파이더 햄(존 멀레이니) 등이 마일즈가 있는 차원으로 오게 된다. 방사능 거미에 물려 이제 막 능력을 갖게 된 마일즈는 이들과 힘을 합쳐 킹핀의 음모를 막고자 한다.



 간단한 감상부터 말하자면,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는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트릴로지와 마크 웹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존 왓츠가 MCU에서 제작한 <스파이더맨: 홈커밍>까지 모든 극장용 스파이더맨 영화를 통틀어 가장 놀라운 성취를 보여준다. 아니, 최근 경쟁적으로 각자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는 각종 시네마틱 유니버스들과 여러 슈퍼히어로 오리진 영화를 통틀어서도 손꼽을 만하다. 마일즈와 삼촌 애런(마허샬라 알리)의 관계를 통해 스파이더맨과 삼촌의 관계를 새롭게 그려낸 것, 인종과 젠더의 묘사를 자연스럽게 풀어낸 것, 멀티버스라는 설정을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을 통해 다른 영화들에 비해 훌륭하게 풀어낸 것 등 기존의 영화들이 쉽게 풀어내지 못한 것들을 이번 영화는 훌륭하게 해낸다. 특히 117분의 러닝타임 동안 펼쳐지는 코믹스 스타일의 작화와 애니메이션의 시각적 자유도를 통해 풀어낸 액션들은 황홀할 지경이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는 앞서 언급한 과제들을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을 통해 풀어낸다. 이미 많은 관객들이 알고 있을 스파이더맨’들’의 반복되는 오리진 스토리를 쌓여가는 코믹스들의 이미지로 보여준다던가, 이전 실사영화들의 주요 장면들을 코믹스 스타일의 몽타주로 보여주는 방식, MCU가 선택한 실사화의 방식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멀티버스의 묘사 등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특히 마지막 20여분 동안 펼쳐지는 액션 시퀀스는 애니메이션이 주는 시각적 자유도를 극한으로 밀어붙인 장면이 아닐까 싶다. 여러 차원이 겹쳐지고, 그 속에서 마일즈를 비롯한 여러 스파이더맨들과 킹핀 일행이 벌이는 액션은 최근 몇 년간 개봉한 여러 편의 슈퍼히어로 영화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액션 시퀀스가 아닐까 싶다. 더군다나 스파이더맨의 소소한 행동들, 가령 벽을 타고 움직이는 장면 등 또한 가장 스파이더맨스럽게 연출된 장면이 아닐까? 경쾌한 발걸음으로 벽을 걷는다거나, 가볍게 주고받는 대화들 사이에서 어떤 실사영화에도 보지 못한 순간들이 존재한다.



 스파이더맨의 주변 인물들 묘사도 뛰어나다. 마일스가 자연스럽게 흑인-히스패닉 혼혈임을 드러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사들, 스파이더맨(들)의 조력자로서 활약하는 메이 숙모의 존재, 자연스럽게 속편에 대한 떡밥을 깔아 두는 여러 캐릭터들의 등장, 각자의 사연을 통해 움직이는 피터 B. 파커와 스파이더 그웬을 비롯한 다른 차원의 스파이더맨들은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가 지닌 가치를 더욱 올려준다. 이 놀라운 스파이더맨 영화는 현재 마일즈와 그웬의 이야기를 다룬 속편과 그웬을 비롯한 다른 스파이더우먼들이 등장하는 스핀오프가 기획 중이라고 한다. 스파이더맨의 마블로의 귀환을 반기던 팬들에게 소니가 멋진 반격을 한 것이 아닐까? 마블은 마블대로, 소니는 소니대로 각자의 스파이더맨을 계속해서 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스파이더맨이 MCU에 합류한 이후 소니에서 나온 첫 스파이더맨 캐릭터의 영화 <베놈>이 개봉했다. R등급에서 PG-13으로 등급이 조정됐다느니, 30분가량의 삭제 장면이 존재한다느니 여러 논란이 있었기에 기대와 걱정이 공존했던 작품이다. 영화는 <베놈>이라는 캐릭터의 기원을 다룬다.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는 에디 브룩(톰 하디)은 변호사인 애인 애니(미셸 윌리엄스)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러던 중 거대 제약회사 라이프 파운데이션의 창립자인 칼튼 드레이크(리즈 아메드)의 비인간적인 행보를 폭로하려다 일자리를 잃게 되고, 덩달아 애니 또한 해고당해 둘은 결별하게 된다. 6개월 뒤 다시 칼튼의 비밀을 폭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에디는 라이프 파운데이션의 실험실에 잠입했다 외계에서 온 물질 심비오트에 숙주가 된다. ‘베놈’이라는 이름을 가진 심비오트는 그에게 공생을 제안하고, 둘은 함께 베놈이 되어 심비오트를 되찾으려는 칼튼의 계획에 맞서게 된다.



 <베놈>은 아쉽게도 기대에 못 미치는 작품이다. R등급의 화끈한 액션과 잔인한 면모를 기대했을 관객에겐 너무 아쉬울 것이고, MCU의 세련됨을 생각한 관객에겐 너무 투박한 작품일 것이다. 그도 그럴게, 이번 작품은 의외로 코미디적인 요소가 많다. 연출자인 루벤 플레셔의 영화 데뷔작이 R등급 좀비 코미디인 <좀비랜드>인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것으로 느껴진다. 이러한 톤은 기대와는 다르지만 의외의 재미를 준다. 에디 브룩이 베놈과 결합하기 전까지의 40여분이 조금 지루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둘이 한 몸에서 공생하기 시작한 이후에 펼쳐지는 다양한 액션과 적절한 코미디는 정말 의외의 즐거움이다. 에디와 베놈의 관계는 로맨틱 코미디적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인데, 관객이 기대하던 톤은 아닐지라도 (최근 코믹스 속 묘사는 이것에 가깝다고 한다) 당장의 즐거움을 주긴 한다. 에디 브룩-베놈-칼튼 드레이크의 <디스 민즈 워>라고 해도 크게 어색하지 않은 느낌이랄까? 놀리는 것 같지만, 영화를 본 사람들은 충분히 동의할만한 내용이며 꽤나 재미있기까지 하다. <스파이더맨: 홈커밍>이나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이 아닌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같은 분위기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액션 시퀀스들은 기대를 충분히 충족시켜준다. 에디 브룩과 베놈이 공생을 시작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벌어지는 액션들은 근접 격투부터 카체이싱, 촉수를 이용한 활공 등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샌프란시스코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10여분 간의 카체이싱 액션에 주목할만하다. 이미 예고편을 통해 공개된 모습 만으로도 이번 영화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장면이었다. 공중에 뜬 베놈이 촉수를 사용해 다시 오토바이에 탑승하는 장면, 오토바이로 달리는 중에 촉수로 적의 차를 충돌시키는 장면 등은 꽤나 완성도 높은 액션을 보여준다. 특히 카체이싱 장면은 샌프란시스코라는 배경 때문에 <앤트맨과 와스프>의 카체이싱과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도 있고, 80~90년대 액션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투박함이 베놈이라는 캐릭터 혹은 톰 하디라는 배우와 썩 잘 어울린다. 후반부에 펼쳐지는 CG 액션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슈퍼히어로 영화 대부분에서 느낄 수 있는 종류의 것이기에 큰 단점이라 생각되진 않는다.



 <베놈>의 촬영 현장에서 스파이더맨인 톰 홀랜드가 목격됐다는 소식 때문에 MCU와 이번 영화가 연계된다는 루머도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럴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스파이더맨’ 속 인물이나 회사의 이름 등이 등장하지만, 전체적인 세계관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MCU보단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때의 세계관을 계승하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그래서인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이 2편으로 마무리된 게 아쉽기만 할 뿐이다. 로튼토마토 등에서의 끔찍한 평가와는 다르게, <베놈>이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정도의 재미는 보장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어느 쪽도 실현될 수 어렵게 되었지만, 어쨌거나 쿠키 영상에서의 의외의 등장인물(그리고 의외의 배우)은 충분히 속편을 기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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