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2018' 카테고리의 글 목록 (5 Page) :: 영화 보는 영알못

 <호스텔>로 연출 데뷔하여 <케빈 피버>, <그린 인페르노>, <노크 노크> 등 호러 및 스릴러 장르를 연출해온 일라이 로스가 이번엔 전체관람가 판타지 호러 영화를 연출했다. 그의 전작 모두가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이며, 고어한 장면들로 가득한 영화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이러한 그의 선택은 의아하기만 하다. 배우이자 감독인 일라이 로스의 필모그래피를 어느 정도 챙겨본 입장에서도 <벽 속에 숨은 마법시계>는 어떤 작품일지 예측할 수 없었다. 게다가 잭 블랙, 케이트 블란쳇, 카일 맥라클란이라는 배우들의 조합 또한 일라이 로스의 선택만큼이나 독특하다. 심지어 영화의 제작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엠블린 엔터테인먼트가 맡았다. 이쯤 되니 이 영화가 어떻게 기획되었고 일라이 로스는 어디서부터 참여한 것인지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존 벨리어스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는 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루이스(오웬 바카로)가 삼촌 조나단(잭 블랙)과 그의 친구인 플로렌스(케이트 블란쳇)가 사는 집을 찾게 되고, 우연히 악의 길로 빠진 마법사 아이작(카일 맥라클란)이 집 안에 숨긴 마법시계를 통해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막게 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익숙한 아동용 판타지 영화의 클리셰를 <벽 속에 숨은 마법시계> 또한 착실하게 따라간다. 가족을 잃은 10대, 살면서 본 적도 없는 친척의 존재, 그 친척이 숨기고 있는 비현실적인 사건과 세계 등은 <나니아 연대기>부터 시작된 익숙한 이야기이다. 일라이 로스는 이러한 익숙한 틀을 깨고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싶다거나 하는 등의 의욕은 없었던 것 같다. 대신 클리셰를 충실히 쫓아가며 전체관람가라는 제한 안에서 자신의 색을 조금씩 보여주려 한다. 고어 장면들을 대체하려는 듯이 살아 움직이는 집과 정원의 물건들이 박살 나고, 전체관람가 치고는 상당히 징그러운 장면들 또한 등장한다. 이러한 장면들 대다수가 일라이 로스만의 색이라기 보단, 잭 블랙의 다른 작품인 <구스범스> 같은 영화들, 또는 <그렘린> 같은 작품에서 이미 봐온 것이라고 느껴지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게다가 아이작을 둘러싼 이야기는 데이빗 린치의 <트윈픽스: 더 리턴>에서 카일 맥라클란이 연기했던 데일 쿠퍼 캐릭터의 이야기를 전체관람가 판타지 호러에 맞춰 차용한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물론 이러한 설정은 아동용 판타지 영화의 클리셰에 상쇄되면서 유치해지고, 이 과정에서 영화는 힘을 잃고 만다. 사실 일라이 로스의 영화들은 초기작을 제외하면 대부분 영화가 내세우는 설정을 끝까지 밀고 가지 못한 채 갈피를 못 잡고 엔딩을 맞이하는 작품들이었다.



 <벽 속에 숨은 마법시계>를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일등공신은 역시 잭 블랙과 케이트 블란쳇이다. 둘의 필모그래피를 비교해보면 함께 영화에 출연하는 것이 이보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둘의 캐스팅은 놀랍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둘의 합은 의외로 만족스러웠다. 언제나 즐거운 코미디를 선보이는 잭 블랙과 그에 맞춰 자신의 연기를 변화시키는 케이트 블란쳇의 조합은 145분의 러닝타임을 적어도 지루하지 않게 끌고 나간다. 둘이 각각 맡은 조나단과 플로렌스라는 캐릭터는 역시 익숙한 클리셰로 가득한 인물들이지만, 두 배우의 색이 더해져 심심하지 않은 캐릭터로 영화 속에 존재한다. 결국 <벽 속에 숨은 마법시계>를 지탱하는 것은 배우들의 힘뿐이었다. 일라이 로스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진 지는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배우들 덕에 지루하지만은 않은 관람이었다.

 퀸의 리드싱어 프레디 머큐리의 일생을 담은 전기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개봉했다. 영화는 이민자 가정의 자식으로 태어나 비행기 수화물을 나르는 일을 하던 프레디가 퀸을 결성하고 록스타가 된 뒤 다양한 일을 겪고, 1985년 ‘라이브 에이드’라는 전설적인 공연에 서기까지의 과정을 그려낸다. ‘라이브 에이드’에서의 20분간의 공연을 재현하기 위해 <보헤미안 랩소디>가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이 영화는 퀸과 프레디 머큐리의 음악에 기대고 있다. 프레디 머큐리(라미 말렉)를 비롯한 브라이언 메이(궐림 리), 로저 테일러(벤 하디), 존 디콘(조셉 마젤로) 등의 퀸 멤버, 그리고 프레디의 평생의 동료인 메리(루시 보인턴)가 <보헤미안 랩소디>의 124분을 이끌어 간다.



 사실 영화의 완성도는 최근 개봉한 음악영화인 <스타 이즈 본> 등에 비해서도 아쉽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제목이기도 한 ‘Bohemian Rhapsody’를 비롯해 ‘We Will Rack You’, ‘Another One Bites the Dust’, ‘Love of My Life’ 등의 명곡들이 탄생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때문에 프레디 머큐리와 퀸의 멤버들이라는 인물들에 집중하는 것보다, 퀸이라는 그룹이 겪어온 시간들을 마치 TV 재현 영화처럼 재현해 둔 정도에 그치고 만다. 그래서인지 영화의 각 장면들은 중심을 잃고 각각의 에피소드로만 남게 된다. 라미 말렉을 비롯한 훌륭한, 그리고 퀸의 멤버들과 외모적 싱크로율도 높은 배우들의 호연이 가까스로 영화의 중심을 잡아줄 뿐이다. 브라이언 싱어가 중도하차한 것의 영향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후반부 ‘라이브 에이드’의 20여분을 통째로 재현한 것을 보면 애초에 영화의 목적은 ‘라이브 에이드’ 공연의 재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프레디의 바이섹슈얼 정체성이 등장하기는 하나, 피상적인 부분으로만 그려졌을 뿐이라는 비판은 피해 가기 어려울 것 같다. 결국 프레디 머큐리라는 인물에도, 퀸의 성공과 연관된 음악적, 사회적 맥락에도 집중하지 못한 영화이기에, 결국 <보헤미안 랩소디>에 남은 것은 퀸의 음악뿐이다.



 문제는 퀸의 음악이 너무나도 매력적이며 영화적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퀸의 음악은 수많은 영화와 뮤직비디오에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언제 들어도 놀라울 정도로 스펙터클한 퀸의 음악은 영화로 재현하기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이미 질리도록 들었던 퀸의 음악을 스크린에서 만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발생되어 버리는 것이다. 마치 호러나 액션 장르 영화가 공포와 긴장감, 액션 시퀀스를 통해 발생하는 쾌감을 목적으로 삼는 것처럼, <보헤미안 랩소디>의 목적은 퀸의 공연을 재현하여 관객에게 쾌감을 전달하는 것이다. 비록 초중반부에 등장하는 몇몇 공연 장면에선 아쉬움이 느껴지지만, 퀸 버전으로 울려 퍼지는 20세기 폭스의 로고 음악과 ‘라이브 에이드’ 공연 장면을 보고 있자면 퀸의 음악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오늘 관람 때 엔드크레딧이 모두 올라갈 때까지 모든 관객이 퀸의 음악을 들으며 앉아있었다는 것이 퀸의 음악이 지닌 힘을 증명하는 것만 같다. 퀸의 주옥같은 명곡들과 그들의 공연이 지닌 힘을 느끼고 싶다면, 극장을 찾아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고 유튜브를 통해 퀸의 실제 라이브를 감상하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 될 것 같다.

 마이클 마이어스가 40년 만에 스크린에 돌아왔다. 존 카펜터가 1978년에 내놓은 <할로윈>은 <텍사스 전기톱 학살>, <나이트메어>, <13일의 금요일> 등과 함께 수많은 속편과 리메이크 작품을 양산하며 80년대 슬레셔 영화 붐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40년 만에 블룸하우스가 제작을 맡고, 코미디 장르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대니 맥브라이드와 데이빗 고든 그린이 참여하여 제작된 2018년 <할로윈>은 존 카펜터의 오리지널 이후 쏟아진 8편의 속편과 2편의 리메이크 작품을 무시하고 첫 영화의 이야기에서 바로 이어진다. 싸이코 살인마 마이클 마이어스(닉 캐슬)가 5명의 사람을 죽인 사건에서 40년이 흐른 시점, 마이클은 감옥에 수감되어 있고 당시 사건의 생존자 로리(제이미 리 커티스)는 딸 캐런(주디 그리어)과 손녀 앨리슨(앤디 마티첵) 등의 가족을 둔 할머니가 되었다. 로리는 마이클의 학살 사건 이후 마이클이 다시 돌아올 것을 대비하여 집을 개조하고 캐런을 훈련시키는 등의 삶을 살아왔다. 그런 과정에서 로리는 가족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상태이다. 그러던 중 마이클이 다른 감옥으로 이감되던 중 탈출하게 되고, 로리는 마이클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기 위해 그에 맞선다.



 2018년의 <할로윈>은 존 카펜터의 오리지널을 연상시키는 오프닝 크레딧과 함께 시작한다. 존 카펜터의 아이코닉한 음악과 함께 등장하는 타이틀부터, 관객이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도록 유도하는 사운드 편집과 마이클이 벌이는 대학살, 교차편집을 통해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과 마이클에 대한 트라우마에 맞서는 로리의 모습 등은 존 카펜터의 연출 스타일을 계승함과 동시에 2018년에 어울리는 업데이트된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70~80년대 할리우드 장르영화를 이끌었던 존 카펜터의 위대함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오리지널 <할로윈>의 분위기만은 제대로 이어간다. 특히 느릿한 걸음에도 프레임 가장자리에서 슬쩍 모습을 비추며 공간을 장악해가는 마이클 마이어스의 존재감을 성공적으로 스크린에 복각시켰다는 점에서 데이빗 고든 그린의 <할로윈>은 의외의 완성도를 보여준다. 그도 그럴 것이, <파인애플 익스프레스>를 비롯한 데이빗 고든 그린의 전작들을 생각하면 그가 호러 장르에서 괜찮은 연출력을 보여줄 것이란 기대를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80년대 슬레셔 영화의 클리셰들을 적절히 활용해가며 영화를 이끌어가는 연출은, 비록 중반부가 조금 늘어지긴 하지만, 예상보다 즐거운 장르적 쾌감을 제공한다. 오리지널에 비하면 그야말로 대학살을 벌이는 마이클 마이어스의 모습은 오랜 슬레셔 장르의 팬들이 바라던 그 모습이 아닐까 싶다.



 더욱이 후반부 펼쳐지는 로리-캐런-앨리슨의 3대가 모여 마이클 마이어스에 대적하는 장면의 쾌감은 상당하다. 이 장면에서 등장하는 전환은 단순히 피해자-가해자의 구도를 뒤집는 것뿐만 아니라 여성혐오적 장면들로 점철되었던 오리지널 <할로윈>을 비롯한 80년대 슬레셔 영화들에 대한 현재의 대답으로 느껴진다. 특히 마이클 마이어스에게만 허락되었던 공간과 시점이 로리에게 주어지는 모습과,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캐런의 역할을 떠올려 보면 기대 이상의 통쾌함을 만날 수 있다. 다만 <할로윈>을 단순하게 잘 만든 여성서사로 포장하는 것에는 약간의 의문이 생긴다. <할로윈>이 분명 로리와 캐런, 앨리슨을 중심으로 한 서사인 것은 맞지만, 동시에 슬레셔 영화의 클리셰를 답습하는 여러 장면에서는 여전히 여성혐오적인 시선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후반부의 한 방을 위해 서사를 쌓아 올리는 과정이 종종 너무 노골적이기에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로리가 겪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몇몇 캐릭터, 가령 기자인 마틴(제퍼슨 홀)과 다나(리안 리즈)나 사탠 박사(할룩 빌기너) 등의 캐릭터를 사용하는 방식은 너무 노골적이기에 지루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2018년의 <할로윈>이 주는 장르적 쾌감은 올해 개봉한 장르영화 중에서도 손꼽을 만하다. 압도적인 살인마의 존재감과 이를 온전히 관객에게 전달하는 연출, 특히 사운드 측면에서 뛰어난 연출과 조금 늘어지긴 해도 차곡차곡 쌓아온 서사가 도달하는 결말의 통쾌함은 존 카펜터의 전성기 시절 장르영화들을 볼 때의 느낌을 연상시킨다. 특히 제한되어가는 공간을 영화적으로, 장르적으로 드러내고 활용하는 후반부의 연출은 슬레셔 영화의 짧지 않은 계보 속에서도 인상적인 장면이다. 할로윈은 이미 지나가버렸지만, 아직도 할로윈의 분위기를 즐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할로윈>은 그에 딱 맞는 선택일 것이다.

 <서치>와 함께 여름 북미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차지했던 ‘아시안 어거스트’의 주역,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 드디어 국내 개봉했다. 사실 <스텝업>이나 <지. 아이. 조 2>, <나우 유 씨 미 2> 등을 연출한 존 추 감독의 작품이기에 대단히 좋은 작품이 나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단지 어떤 작품이기에 아시아계 배우들 중심의 작품이 북미에서 놀라운 흥행을 거두었는지 궁금했다. 이야기는 익숙하고 단조롭다. 경제학 교수인 레이첼(콘스탄스 우)은 남자 친구 닉(헨리 골딩)의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싱가포르에 온다. 그곳에서 레이첼은 닉의 어머니인 엘리노어(양자경)를 비롯한 가족들을 처음 만나게 되는데, 닉의 가족은 싱가포르를 주름잡는 미친 부자들이었다. 이 사실을 모르던 레이첼은 자신이 닉과 함께 나타나자 자신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는 가족들과 그들의 친구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레이첼은 닉과의 사랑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를 다루는 게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이야기이다. 



 제목대로 미친 부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기에, 시각적으로 매우 화려한 장소와 파티들이 영화 내내 펼쳐진다. 화려한 저택과 옷, 값비싼 술과 음식들이 두 시간 내내 등장하며 눈을 즐겁게 한다. 싱가포르의 관광 홍보영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곳곳을 화려하게 담아낸다. 더욱이 엔드크레딧 전까지 흘러나오는 음악들이 단 한 곡을 제외하고는 중국어로 된 음악이라는 점도 놀라웠다. 하지만 이것보다 놀라운 것은 등장하는 배우가 모두 아시아계 배우들로 꾸려져 있다는 것이다. 영화 내내 대사가 있는 백인은 극 초반부 레이첼의 강의 조교뿐이다. 중국계, 한국계, 일본계 배우들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가운데, 특히 콘스탄스 우, 양자경, 아콰피나, 젬마 찬, 소노야 미즈노 등의 여성 배우들이 극을 주도한다는 것 또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만의 특징이다. 비록 익숙한 막장드라마의 이야기를 따라가지만, 다양한 여성 배우들을 만날 수 있으며 한국의 막장 드라마들보다 더욱 잘 짜인 캐릭터로 등장한다는 점은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장점이다. 특히 닉의 할머니 역으로 나오는 루옌은 25년 전 아시안 배우들이 출연진의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던 첫 영화인 웨인 왕의 <조이 럭 클럽>에 출연했었던 만큼, 25년 만에 찾아온 흥행이 더욱 뜻깊었을 것 같다.



 다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영화의 완성도가 뛰어나진 않다. 도리어 더 밀어붙였다면 재미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면서, 불쾌하게 느껴지는 몇몇 지점 또한 존재했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자신들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싱가포르의 사람들과 외부인인 레이첼의 충돌을 그려낸 작품이다. 영화 초반부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견고한 네트워크는 직간접적인 다양한 방법으로 레이첼이 그들의 내부로 들어오는 것을 방해한다. 하지만 이러한 충돌은 어떻게 해서든 안온한 결말을 맞기 위해 조정된다. 어찌 됐든 가부장제를 바탕으로 한 싱가포르의 미친 부자들의 세계는 닉이라는 이탈자를 제외하면 큰 변화를 갖지 않는 것이다. 다만 가부장제 기반의 세계관을 그려냄에도 닉의 아버지는 등장하지 않고, 할머니와 어머니로 내려오는 여성들이 가족의 구심점이 된다는 점은 흥미로웠다. 다른 캐릭터들의 서브플롯들을 적당히 뭉개고 가볍게 해결해버리는 부분도 아쉽다. 차라리 서브플롯들을 쳐냈다면 더욱 깔끔하지 않았을까 싶다. 가장 큰 문제는 레이첼을 비롯한 몇몇 캐릭터들을 제외하면, 캐릭터들이 상황을 빚어낸다기 보단 상황이 먼저 존재하며 그 안에서 캐릭터들이 움직인다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거대한 전통이 작동하는 공간이기에 이러한 선택이 어느 정도 납득 가능하긴 하나, 결과적으로 레이첼을 제외한 캐릭터들이 상당히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서 아쉽게 느껴진다. 결국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좋은 배우들이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고, 그것이 흥행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즐거우나 영화 자체의 즐거움은 조금 아쉽기만 한 작품이 되었다. 다만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 25년 만에 다시 연 문이 앞으로 나올 아시아계 배우 주연 할리우드 영화들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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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잎들>에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형식들이 즐비하다. 마야 데렌의 실험들을 연상시키는 계단 오르내리기, 오버 숄더 쇼트, 그림자와 주고받는 숏-리버스 숏 등은 홍상수의 전작들에서 찾아볼 수 없던 형식들이다. 동시에 그가 가장 잘하는 것들, 패닝을 통해 탁구처럼 감정을 주고받는 장면들 또한 존재한다. 어쩌면 <풀잎들>은 홍상수가 김민희와 협업한 이후 시작된 변화의 완전판일지도 모른다. 흑백으로 불필요한 정보들을 정제한 화면과 서사를 뭉개버림으로써 패닝에 실려 인물들 사이를 오가는 감정들만으로 66분을 채운 홍상수의 22번째 장편 <풀잎들>은 그의 영화에서 만날 수 있는 강렬함과 놀라움의 밀도가 빽빽한 작품이었다.



 <풀잎들>은 대화로 가득하다. 영화 내내 김민희(극 중 인물들의 이름은 엔드크레딧을 통해서야 확인할 수 있다)를 제외한 인물들은 짝을 이뤄 대화를 이뤄나간다. 공민정과 안재홍, 기주봉과 서영화, 이유영과 김명수. 카메라는 풀숏으로 이들의 서로에 대한 탐색을 보여주기 시작해서 서서히 줌인을 하다가 결국 두 인물의 얼굴을 오가는 패닝을 통해 대화를 담아낸다. 스매싱 없이 기계적인 랠리만 계속하는 테니스 경기처럼 카메라는 두 인물의 얼굴 사이를 거의 일정한 간격으로 오가기만 한다. 이러한 패닝은 두 인물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균열, 부탁, 거부, 질문을 실어 나른다. 그리고 절대 긍정 혹은 동의의 언어를 담지 않는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의 소재는 죽음이다. 공민정은 친구 승희의 죽음이 안재홍의 책임이라 쏘아붙이고, 기주봉은 자살을 시도했었다 고백하며, 김명수는 친구였던 교수의 자살이 이유영의 책임이라며 술주정을 부린다. 이들의 대화는 죽은 사람을 불러오거나, 죽음은 사람을 살아 돌아오게 한다.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을 밑거름 삼아 새로운 대화,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사랑, 새로운 감정을 말하는 풀잎들이다. 그들이 카페 앞에 높인 고무대야에 성의 없이 심어진 풀잎들에 담배연기를 내뿜는 동안, 그들의 대화 사이에서는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죽은 사람들이 소환되고, 사람들은 “어차피 다 죽을 거면서” 죽음과 자신을 분리해낸다.



 그중에서도 이유영-김명수 짝을 촬영하는 카메라는 독특하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오버 숄더 숏이 등장하고, 둘의 얼굴을 오가는 대신 고정된 화면에서 이유영의 얼굴과 김명수의 뒤통수 사이로 카메라 포커스의 움직임이 등장하고, 카메라는 각 개인의 얼굴을 오가는 대신 둘의 모습과 둘의 그림자 사이에서 패닝 한다. 결국 두 사람이 대화에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발현된 둘의 감정이 아닌, 그림자-유령의 형상으로 등장한 죽음이 존재한다. 둘이 대화하는 장소가 대부분의 인물이 지박령처럼 붙잡혀 있는 카페가 아닌 인근의 어느 식당이라는 점에서 둘은 죽음과 더욱 가까워 보인다. 동시의 김민희의 동생 커플(이 둘은 극 중 유일하게 명확한 이름이 등장한다)은 한 번도 카페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 다른 짝들보다 죽음과 거리를 둔 둘은 동네를 부유하듯 떠돈다. 둘은 옷차림마저 홍상수 영화의 인물 같지 않으며, 마지막 장면에서 여느 20대 커플처럼 한복을 입은 채 기념사진을 찍는 이색적인 순간을 그려낸다. 다른 인물들이 죽음을 새로운 감정으로, 벗어나기 위한 걷기로, 죽음을 거름 삼아 대화하는 “별것도 아닌 것들 사이에 끼기 위한 예행연습(김새벽의 계단 걷기 장면)으로 죽음을 상대할 때, 두 커플은 죽음을 인식하지도 못 하는 것만 같다. 냉소적인 관음증으로 카페 안의 대화들을 관찰하던 김민희가 어떤 질문에도 대답해내던 동생 커플에게 소리를 지르고야 마는 것은, 당연한 일이자 그가 다시 카페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관성 작용이다. 어떤 식으로든 죽음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짝(이유영-김명수)과 죽음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는 동생 커플 이외의 인물들은 결국 카페라는 공간 안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김새벽은 어느 계단에서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 카페로 다시 돌아가야 할 것을 알기에, 그곳에서의 대화를 상대하기 전의 예행연습을 하려는 것처럼 반복해서 몸을 움직인다. 카메라는 잠시 문 밖으로 나간 김새벽을 클로즈업한 뒤, 다시 뒤로 빠져 계단을 오르내리는 김새벽을 따라 위아래로 틸팅 한다. 좌우로의 패닝 대신 위아래로 움직이는 카메라는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측정하듯이, 김새벽은 그러한 공간을 만들어내려는 듯이 움직인다. 그는 엄청나게 많이 움직였으나, 결국 같은 위치를 오르내릴 수밖에 없는 계단처럼 폐쇄된 궤적을 그리며 카페로 복귀한다. 영화의 마지막, 카페의 사람들은 돌아가며 담배를 피우러 나온다. 카페 앞에 놓인 고무대야의 풀잎들을 내려다 보기도, 카페 밖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한복 입은 사진을 찍는 동생 커플을 보기도 한다. 바통터치하듯 돌아가며 카페의 유리문을 넘나드는 그들은 다시 한번 작은 폐곡선을 그리며 짝과 함께 대화를 이어간다. 죽음이라는 다가올 혹은 지나간 사실을 회피하며 혹은 밑거름 삼아 감정과 관계와 사랑과 질문을 이어가던 그들은, 결국 고무대야에 뿌리내린 풀잎들처럼 카페에 뿌리내린 채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엔드크레딧 이전에 등장하는 텅 빈 카페의 스틸 사진들은, 아무도 없지만 도리어 가득 찬 어느 대화를 마지막으로 한 번 잡아낸다. 결국 우리는 자리를 벗어날 수 없으면서 고무대야의 닫힌 둘레만을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는 풀잎들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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