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2018' 카테고리의 글 목록 (3 Page) :: 영화 보는 영알못

 <모털 엔진>은 필립 리브의 ‘견인도시 연대기’의 첫 작품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피터 잭슨이 제작을 맡았고, 피터 잭슨의 VFX 회사 웨타의 비주얼 아티스트였던 크리스찬 리버스가 처음 장편 연출을 맡은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는 포식자 견인도시 런던이 다른 정착민 견인도시를 사냥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리저리 떠돌던 헤스터 쇼(헤라 힐마)는 정착민 도시와 함께 런던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헤스터가 런던으로 온 이유는 런던에서 비밀리에 에너지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발렌타인(휴고 위빙)에게 어머니를 죽인 복수를 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헤스터는 발렌타인을 죽이는 데 실패하고 도시 밖 아웃랜드로 떨어진다. 그와 함께 헤스터와 발렌타인 사이의 비밀을 알게 된 런던의 고고학자 톰(로버트 시한) 또한 발렌타인에 의해 도시 밖으로 떨어진다. 각자의 목적과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함께 런던으로 향하게 된 둘의 여정은, 반견인도시주의자 안나(지혜)와 부활군 슈라이크(스티븐 랭)를 만나게 되며 변화한다. 한편 발렌타인은 에너지 프로젝트를 통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 한다.



 웨타 출신의 감독답게, <모털 엔진>의 비주얼은 훌륭하다. 이미 예고편을 통해 공개된 포식자 도시 런던의 위용과 사냥 장면에 이어, 다양한 소규모 정착지와 탈것, 공중도시 엔젤헤이븐 등의 등장은 포스트아포칼립스의 견인도시라는 설정을 훌륭하게 그려낸다. <퍼시픽 림>이나 2014년 <고질라> 등이 크기와 육중함을 다루는 방식에 비해서는 아쉽긴 하지만, 견인도시라는 설정을 들었을 때 떠올릴 수 있는 비주얼, 스팀펑크적 이미지를 적절하게 차용한 설정 등이 효과적인 비주얼로 전달된다. 여기에 포식자 도시의 사냥과 거대도시와 주인공들의 공중전 등의 스케일이 큰 액션 장면들 또한 비교적 잘 묘사되었다. 



 아쉬운 것은 역시나 각본이다. 원작을 읽어 보질 못해 원작의 이야기도 유사한지는 모르겠지만, 출생의 비밀,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플래시백, 헤스터와 슈라이크의 관계를 그려내는 방식 등에서 허점이 많은 각본이었다. 게다가 전체적인 이야기에서 크게 존재감이 없는 캐릭터인 톰은 비중을 줄이는 편이 깔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헤스터, 안나 등의 좋은 여성 캐릭터와 세계관에 가장 잘 어울리는 악역인 발렌타인 등 좋은 캐릭터들이 많았음에도, 영화의 헐거운 각본은 캐릭터들의 활약을 제대로 지탱해주지 못한다.



 더군다나 영화를 보고 있자면 포스타아포칼립스의 견인도시라는 세계관의 디테일에서 어딘가 이상한 지점들이 느껴진다. 지각변동이 일어날 정도의 양자폭탄 전쟁이 있었음에도 런던의 주요 랜드마크들은 왜 그대로 견인도시 런던 위에 얹어져 있는 것일까? 제국주의 영국과 아시아를 주축으로 삼은 다인종 식민 국가의 대립을 주요 모티프로 삼았다고 하지만, 22세기에 한번 멸망한 세계관에서 티벳 승려복이나 몽골의 전통적 군복과 같은 의상, 석상에 기도를 올리는 인도계 여성 캐릭터 등 오리엔탈리즘으로 지적받을 수 있는 요소들이 영화 곳곳에 산재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원작에도 이러한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원작이 그렇지 않는데 영상화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요소들이 비주얼적으로 배치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또한 영화 중간중간 스쳐 지나가는 지도로는 파악할 수 없는, ‘60분 전쟁’의 여파로 일어난 지각변동 이후의 지리적 모습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채 남쪽, 동쪽 같은 추상적인 말로만 세계관의 지형을 설명하는 부분도 아쉽게만 느껴진다. 



 원작소설인 ‘견인도시 연대기’가 총 4권인 만큼 <모털 엔진>도 여러 편의 시리즈로 기획된 작품일 것이다. 첫 편의 아쉬움이 다음 편을 통해 뒤바뀔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견인도시의 비주얼과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등장은 속편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을 갖게 한다. 어찌 됐든 포스트아포칼립스 배경의 견인도시라는 매력적인 설정을 한 편으로 마무리짓기엔 아쉬움이 든다. 속편의 제작이 확정되길 기다리며, 원작 소설을 천천히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용접 불꽃과 거대한 쇳덩어리로 가득한 어느 작업장을 비추며 시작한다. 한 남성의 인터뷰 음성이 보이스오버로 등장한다. 프레임 속의 누군가의 것으로 생각되는 목소리는 자신의 직업과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느 순간 카메라를 든 장윤미 감독의 목소리가 “아빠”라며 누군가를 부른다. 장윤미의 첫 장편영화 <공사의 희로애락>의 주인공은 그의 아버지다. 70년대부터 40년 넘게 건설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그는 거제, 구미, 광주 등을 오가며 수많은 건축물에 흔적을 남겼다. 아버지를 인터뷰하며 삶의 흔적을 쫓아가는 영화는 사적인, 그렇기에 보편적인 이야기를 꺼내 든다.



 건설노동자는 건축가가 아니다. 그들은 도면에 그려진 내용을 바탕으로 평면 속의 형상을 건축물로 제작하는 역할을 맡는다. 때문에 완성된 건축물엔 그들의 생각이 들어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자재들을 직접 만지면서 건물을 쌓아 올린 노동자들의 기억은 건축물 안에 남겨져 있다. 기억이라는 비물질적인 것이 물질적인 건축물을 통해 기록되는 것이다. 영화 속 아버지는 40여 년이 지난 일들을 굉장히 세세하게 기억하기도 한다. 그가 노동자로 참여한 건축물은 그의 기억을 다시 꺼내게 되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장윤미는 아버지와 함께, 또는 홀로 아버지가 지은 건축물과 노동을 위해 오간 길로 향한다. 예천 시장의 아케이드, 거제 조선소의 기숙사와 같은 건물들, 광주에 있는 어느 기업의 건물 등은 건축 당시와 똑같기도, 그렇지 않기도 하지만, 장윤미의 아버지는 거기서 자신의 기억과 흔적을 읽어낸다. 보편적이고 공적인 외면을 지닌 건축물은 아버지의 기억과 상호작용하며 사적인 모뉴먼트가 된다. 이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장소가 죽은 할머니, 아버지의 어머니의 묘와 생가인 이유 또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묘지는 인간이 마지막으로 머무르게 되는 건축물이자, 산 어딘가에 숨어 가끔씩 기억을 상기시켜주는 모뉴먼트이다. 건축물을 통해 되살아나는 기억은 삶을 경유해 종착지로 보이는 공간으로 향한다. 딸과 함께 자신의 기억을 다시 쫓아가던 아버지가 “자식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계속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라고 내뱉는 순간은 영화 후반부에 등장한 묘지라는 공간과 관객의 머릿속에서 결합한다. 결국 건축물 안에 자신의 기억을 봉인하게 될 어느 건설노동자의 삶은 이 순간 사적인 삶의 궤적에서 뛰쳐나와 보편의 공간으로 향한다.



 장윤미는 서울과 구미, 광주, 거제 등을 오가는 길을 끈질기게 기록한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맨 앞자리에서 찍은 것으로 보이는 영상들은 아버지가 노동을 위해 오갔던, 아니 오가는 길조차 노동이었던 순간의 기록이다. 건설노동자의 삶은 건축물에도 남지만, 같은 길을 반복해서 오가는 다른 영역의 노동자들처럼 자신이 오간 길에도 존재한다. 도로 위에서도 트럭, 레미콘, 포크레인 같은 건설용 차량에 시선이 머무는 장윤미의 카메라는 도로 위의 경험을 사적인 것으로 맥락화 한다. 핸들을 조작하는 버스 운전사의 손을 클로즈업한 쇼트와 운전하는 아버지의 손을 클로즈업한 쇼트는 길 위에서의 반복적인 이동 또한 노동의 과정임을 밝힌다. 이러한 맥락 하에서 길 위에서 국가경제발전이라는 이름 하에 자행된 노동착취와 기업들의 노동자 착취 등을 읽어낼 수 있다. <공사의 희로애락> 속 도로의 재맥락화는 아버지의 목소리와 함께 가장 사적이기에 보편을 향한다.



 최근 많은 한국 독립다큐들의 감독 자신 혹은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사적영역의 이야기를 공적영역, 보편영역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마민지의 <버블 패밀리>, 이원우의 <옵티그래프>, 성향은 조금 다르지만 라야의 <집의 시간들>이나 김보람의 <개의 역사>도 이러한 틀 안에서 해석할 수 있는 작품이다. 장윤미 감독은 <콘크리트의 불안> 등 자신의 전작을 통해 드러낸 건축에 대한 관심을 통해 사적이기에 보편이 되는 경험을 한국 현대사 안에서 재맥락화 한다. 장윤미는 영화 중간 카메라에 찍힌 자신의 모습이 늙어 보인다는 아버지를 자신의 스마트폰 카메라로 촬영하고, 아버지 또한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카메라 뒤에 선 딸의 모습을 찍는다. 이 모습은 영화의 마지막 쇼트, 카메라를 정리하는 딸의 모습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다.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것을 물질화된 기억으로 (정확히 말하면 비물질적 디지털 메모리지만, 사진을 찍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진을 물질적 기억으로 간주하기에) 담을 수 있는 시대이다. 이러한 아버지의 모습은 그의 삶을 영화로 기록하려는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 딸의 모습과 공명한다. 비물질적인 기억을 건축물이라는 물질 속에서 되새기려는 <공사의 희로애락>의 시도는 서로의 사진을 찍는 부녀의 모습을 통해 영화 전체의 태도로 확장된다. 이러한 태도를 통해 장윤미 감독은 쏟아지는 유사한 테마의 작품들 속에서 자신만의 성취가 무엇인지를 공고히 한다.

 IMF를 정면으로 다룬 한국 상업영화는 아마 <국가부도의 날>이 처음일 것이다. 장편 데뷔작 <스플릿>으로 볼링이라는 소재에 도전했던 최국희 감독은 다시 한번 쉽지 않은 소재를 택한다. <국가부도의 날>은 벌써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상흔이 남아있는 IMF사태 직전의 일주일을 다룬다.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의 한시현(김혜수), 금융투자회사에서 일하다 위기를 자신의 기회로 삼으려는 윤정학(유아인), 국가부도사태를 통해 권력을 탐하는 재정부 차관(조우진), 공장을 운영하는 소시민 갑수(허준호) 네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영화가 전개된다. 경제위기를 예측한 사람과 이를 기회로 여기는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다룬 <빅쇼트>가 연상되기도 하지만, <국가부도의 날>은 블랙코미디 대신 진지한 드라마를 선택한다.



 <국가부도의 날>은 기본기에 충실하다. 한시현과 재정부 차관 등이 자리한 회의 장면과 어음으로 계약하는 갑수, 자신의 고객들에게 위기가 기회라는 프레젠테이션을 선보이는 윤정학의 모습이 교차편집으로 제시되며 97년 당시의 상황을 관객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게 전달한다. 물론 계속 쏟아지는 경제용어들이 지닌 진입장벽은 있지만, 여전히 IMF사태를 기억하는 관객들이나 현재의 경제 불황에 관심이 있는 관객들이라면 크게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장면에서의 교차편집은 영화 전체로 확대된다. 한시현, 차관, 윤정학, 갑수의 상황이 번갈아 가며 제시되고, 국가 전체의 침몰로 이들의 상황은 어쩔 수 없이 감정적으로 다가온다. 특히 갑수의 상황에 많은 관객들이 가장 몰입할텐데, 그가 대표하고 있는 소시민의 상황은 대다수의 관객들이 경험했던, 혹은 간접적으로 보고 들어온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랜만에 비중 있는 역할을 맡은 허준호의 연기는 온몸으로 당시의 상황을 받아내고 있다는 말로 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특히 빚을 갚지 못해 수감된 동료를 면회하고 온 갑수가 거리를 걷는 장면은 (아마 90년대 느낌이 남아있는 어느 거리에서 촬영된 것이겠지만) 현재의 거리에 97년의 갑수가 당도한 것처럼 느껴진다. CG 등으로 배경 전체를 덮어 씌우는 대신 현재의 거리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공간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IMF사태의 여파는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준다.



 <국가부도의 날>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인물은 역시 김혜수가 연기한 한시현이다. 한시현의 행보는 종종 <더 포스트>에서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캐서린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남초 사회인 재계, 정치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시현의 상황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가 여성 영웅으로써의 한시현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국 IMF의 금융구제를 받게 되는 현실 때문에 한시현이 금융위기를 막는 서사로 나아가진 못하지만, 그와 같은 인물이 여전히 존재하며 다가올 위기에 맞설 미약하지만 필요한 용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한시현을 한국영화 속 여성 영웅으로 부르는 것은 정당성을 지닐 것이다. 특히 에필로그에서의 특별한 인물과의 만남이라던가, “계집애는 어쩔 수 없다”라는 재정부 차관의 성차별적 발언에 아랑곳하지 않고 발언을 이어가는 장면은 한시현 캐릭터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준다. 그가 자신의 팀원들과의 연대적 관계에도 주목해 볼만하며, “여자들은 감정적이어서 안 된다”는 남성 캐릭터의 발언과 대비되는, 툭하면 소리를 지르고 물건들을 집어던지는, 감정적인 남성들과 이성적 협상을 우선시하는 한시현의 대비도 적절하다.



 아쉬운 점이라면 역시 유아인의 연기다. 그가 연기한 윤정학은 분석력과 실행력을 두루 갖춘 캐릭터인데, 그의 캐릭터는 최대한 이성을 붙잡으려는 한시현 캐릭터와 정반대 지점에 서있다. 굉장히 감정적인 이 캐릭터는 종종 과잉의 순간을 보여준다. 문제는 유아인이 연기하는 과잉에서 기시감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우리는 <베테랑>의 조태오 이후 유아인이 연기한 캐릭터들에서 조태오스러움을 반복적으로 발견하고 있다. 과잉된 연기가 그의 주된, 그리고 유일한 캐릭터로 남은 것 같은 인상이다. 때문에 차분하게 쇼트를 쌓아가며 감정을 끌어올리는 <국가부도의 날>에서 홀로 감정과잉의 연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선보이는 유아인의 연기는 완벽한 에러다. 김혜수와 허준호를 비롯해 조우진, 류덕환, 권해효, 박진주, 그리고 뱅상 카셀 등의 배우들이 자신의 역할에서 영화의 톤을 뒷받침해주는 것과 다르게 유아인은 홀로 다른 영역에 있는 것처럼만 느껴진다. 이러한 괴리감이 에필로그에서의 이야기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그의 연기가 어울리지 못한다는 인상을 지우긴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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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포함


 <주노>의 제이슨 라이트먼과 디아블로 코디 콤비가 <툴리>를 통해 다시 한번 만났다. 특히 <주노>를 비롯해 <어바웃 리키>, <죽여줘 제니퍼>, <영 어덜트> 등 여성 중심적 서사를 선보여왔던 디아블로 코디의 실력이 <툴리>에서도 발휘된다. <툴리>는 이미 두 아이와 함께 살고 있고, 이제 막 셋째 아이가 태어난 마를로(샤를리즈 테론)가 야간 보모 툴리(맥켄지 데이비스)를 고용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아낸다. 제이슨 라이트먼과 디아블로 코디는 둘의 이야기를 통해 임신과 출산 이후 겪는 여성의 경험, 독박육아와 돌봄노동과 가사노동과 가족관계 등의 경험을 숨 가쁘면서도 유기적으로 경유한다. 이를 통해 제시되는 것은 단순히 독박육아로 인한 극단적 피로감과 우울함을 폭로하는 것뿐만이 아닌, 연애, 결혼, 임신과 출산, 육아 등을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여성의 삶이다.



 영화의 초반부는 숨이 턱 막힌다. 만삭의 마를로는 주의력결핍 과다활동 장애를 겪고 있는 것 같은 아들과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딸을 기르는 육아를 전담하고 있다. 9개월 간의 임신으로 마를로의 몸과 정신은 피폐해졌고, 피곤함은 얼굴을 녹여버릴 기세로 그의 피부에 들러붙어 있다. 남편이 직장에 가 있는 동안 만삭의 몸으로 두 아이를 유치원과 학교에 보내는 것은 굉장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러던 중 셋째 아이를 낳게 되고, 아들이 다니던 유치원은 더 이상 그를 돌보기 어려울 것 같다는 통보를 한다. 악재가 겹친 마를로는 오빠가 제안했던 야간 보모를 들이기로 결정하고, 툴리가 그의 집에 도착한다. 마치 수차례 일을 해본 것처럼 능숙하게 일하는 툴리는 “나는 아기가 아니라 당신을 돌보러 왔어요”라고 마를로에게 말한다. 그리고 정말로, 툴리는 육아뿐만 아니라 그동안 밀려 있던 청소와 요리까지 해결해주고, 마를로는 정말로 오랜만에 푹 잠잘 수 있게 되고, 아이들, 남편과 함께하는 문자 그대로의 생활을 되찾게 된다. <툴리>를 여기까지만 본다면 독박육아의 고됨만을 폭로하는 영화로 읽힌다.



 하지만 영화는 반전을 심어 놓는다. 마를로와 툴리는 어느 날 교외를 벗어나 브루클린에서 술을 마시게 된다. 툴리는 일을 그만둬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마를로는 그러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돌아오는 길, 마를로는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고를 낸다. 그런데 사고가 난 차량의 조수석엔 툴리가 없다. 이어지는 병원 장면에서 마를로의 결혼 전 성이 툴리였음이 밝혀진다. 툴리는 마를로가 부른 보모가 아니라 마를로의 26살 시절이 투영된 환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반전은 몸의 약화와 독박육아 등으로 인해 찾아오는 산후우울증을 보여줌과 동시에, 결혼 이후 아이를 임신하고 낳고 기르는 역할을 맡게 되어버린 여성의 삶을 드러낸다. 누군가는 그것을 생명과 사랑의 기적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그것을 건강과 삶에 피폐함을 가져오는 저주라고 말한다.



 영화는 이 두 가지 선택지 중 무엇 하나를 선택하지 않는다. 대신 가장 여성적인 경험, 그러한 삶을 보여주며 이것은 저주이자 기적임을 보여준다. 툴리의 환영이 보이고 난 후 마를로가 보여주는 표정을 단순히 산후우울증으로 인한 정신병적 영향으로만 볼 순 없을 것이다. 동시에 그가 출산과 육아를 겪으며 신체와 정신이 모두 피폐해졌음 또한 명확하게 드러난다. 결국 <툴리>가 마를로로 대표되는 임신-출산-육아에 걸친 여성의 삶을 경유하여 드러내는 것은, 선택지가 저주이든 기적이든 간에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지금의 구조이다. 마를로가 스스로를 갉아먹으며 홀로 아이들을 키우던, 툴리를 소환하여 이를 기적으로 보이게 하던, 남편은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며 출장도 다녀오고, 밤엔 침대에 누워 게임기를 쥐고 좀비들을 쏴 죽이고 있을 뿐이다. 마를로의 오빠 또한 보모라는 일종의 아웃소싱을 제안할 뿐, 그가 실제로 아이들을 돌보는데 얼마나 동참하고 있는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남편은 마를로가 사고를 당한 이후 병원에서 “우리를 사랑해”라는 대사를 내뱉는다. 여기서 ‘우리’는 마를로와 자신만을 칭하는 것일까, 세 아이를 포함한 가족 전체를 말하는 것일까?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너와 나라는 일대일적인 애정을 벗어나 우리라는 틀로 부부 혹은 가족을 지칭하고, 이러한 말이 실천으로 옮겨갔을 때 성평등한 가족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육아와 가사노동에 있어서 남편의 참여를 요구하는 것을 넘어선 관계적, 감정적 실천을 상상하게 하는 것이 <툴리>의 가장 큰 성취이다. 때문에 ‘우리’라는 단어는, 마를로와 같은 여성의 삶을 면밀하게 살펴보고 공감했을 때 가능한 말일 것이다. 그 '우리' 안에 툴리가 포함되어 있어야 함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로빈 후드의 이야기가 다시 한번 영화화되었다. 이번 작품은 십자군 원정을 다녀온 로빈(테론 에저튼)이 죽은 줄 알고 그의 재산을 갈취한 노팅엄 주 장관(벤 멘델슨)에게 맞서, 전쟁에서 알게 된 존(제이미 폭스)과 함께 싸운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흑인 조력자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리들리 스콧의 <로빈 후드>보다는 케빈 코스트너와 모건 프리먼이 출연했던 1991년 작품 <로빈 훗>을 연상시킨다. 게다가 이번 작품은 영화의 프랜차이즈화를 염두에 두고 제작된 작품이기에, 대형 블록버스터 영화의 걸맞은 스케일을 곁들인다. 문제는 이러한 영화의 방식이 제대로 먹혔느냐에 있다.


 영화의 초반부 등장하는 아라비아 반도에서의 십자군 전투 장면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블랙 호크 다운>과 같은 현대전을 그린 작품들을 연상시킨다. 소총이 활이 되고 기관총이 자동 석궁으로 대체되었을 뿐, 전투의 방식과 이를 보여주는 카메라의 구도는 명백히 현대전을 그린 작품들의 방식을 따른다. 이런 방식으로, 중반부 등장하는 마차 추격전 시퀀스는 <벤허>의 전차 장면과 <원티드>의 카체이싱을 적절히 뒤섞은 방식이며, 돈이 든 마차를 탈취하는 장면은 <이탈리안 잡>을, 후반부의 클라이맥스 전투는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월가에서 벌어진 경찰과 시위대의 액션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액션들은 화려하긴 하지만 이미 보았던 것들의 활을 내세운 액션들은 그럭저럭 잘 짜여 있지만, 드라마 <애로우> 등에서 이미 익숙해진 액션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영화의 이야기는 더욱 진부하다. 로빈 후드의 이야기 자체가 일종의 전 세계적 클리셰가 된 상태이기에 그렇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후드>가 하려는 이야기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주 장관이 알고 보니 적을 지원하고 있었다는 설정은 자연스럽게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연상시킬 수밖에 없다. 트럼프 시대에 이러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것은 딱히 의미가 없어 보일 뿐만 아니라,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하비 덴트와 유사한 (심지어 투페이스가 되는) 캐릭터를 등장시키는 장면은 차용이라고 보기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당황스럽다. 후속편에 대한 예고를 분명히 하며 끝나는 영화지만, 지금과 같은 안일한 기획에 머물게 된다면 크게 기대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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