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2018' 카테고리의 글 목록 (2 Page) :: 영화 보는 영알못

 70대 노인은 은행강도다. 리볼버 한 자루를 들고 신사적으로 은행을 턴다. 몇 차례 수감되었던 그는 수차례 탈옥에 성공했고, 그것보다 더 많은 수의 은행을 털었다. 그는 동년배의 두 동료와 함께 계속 은행을 털고 있다. 데이빗 로워리의 신작 <미스터 스마일>은 이 놀라운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연기 은퇴를 선언한 노배우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인공 포레스트 터커를 연기한다. 영화는 행복한 듯 웃으며 정중하게 은행을 터는 은행강도 포레스트의 행적을, 그를 비롯한 세 명의 ‘퇴물 은행 강도단’을 잡기 위해 노력하는 존 헌트(케이시 애플렉)와 함께 쫓아간다.



 은행강도가 등장하는 범죄영화이자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지만, <미스터 스마일>은 은행강도들의 철두철미한 계획이나 좋은 감을 지닌 형사의 활약 따위에 주목하지 않는다. 대신 포레스트와 존, 범죄자와 경찰이라는 양극단에 위치했지만 느릿한 삶의 리듬감을 공유하는 두 사람을 천천히 쫓아간다. 포레스트가 우연히 만난 주얼(씨씨 스페이식)과 함께 있는 장면들은 노배우들이 등장하는 스크루볼 코미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범죄와 유머가 난무하는 작품이지만, <미스터 스마일>은 결코 포레스트와 존이 지닌 삶의 리듬감을 벗어나지 않는다. 나이 든 포레스트의 느릿한 걸음걸이와 경찰생활에 회의감을 느껴 진부한 생활을 이어가는 존의 느릿한 말, 영화는 재즈풍의 선곡을 통해 리듬을 잡고 편집을 통해 교묘하게 이 리듬감을 지속시킨다.



 이 영화에 ‘리듬을 통해 삶을 통찰한다’ 같은 평을 하는 것은 굉장히 뻔하고 진부한 말일 수밖에 없다. 데이빗 로워리가 93분의 러닝타임 내내 관객에게 삶의 리듬을 주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방식만으로 <미스터 스마일>을 보는 것은 로버트 레드포드의 길고 진득한 커리어에 찬사를 보내는 이 영화의 후반부만으로도 충분하다. 대신 데이빗 로워리의 전작인 <고스트 스토리>의 연장선상에서, <미스터 스마일>의 장소를 통해 인물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포레스트의 집은 공동묘지 앞에 있고, 주얼의 집은 드넓은 들판 한가운데 놓여 있다. 포레스트가 수많은 은행들 사이를 떠도는 (심지어 수 차례 탈옥하며 떠돌기를 이어가는) 점잖은 유령인 한편, 주얼은 자신의 공간에서 자신의 리듬을 지니고 있다. 존 또한 경찰이라는 역할과 활동반경 안에서 자신의 리듬을 지닌 인물이다. 포레스트는 존이 그가 다녀간 은행들을 표시한 지도 위의 핀처럼 여러 장소들을 떠돌다가 존, 그리고 주얼과 충돌한다. 다만 그들이 유사한 리듬을 지녔기에, 그들의 충돌은 불협화음이 아닌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장소, 리듬의 변주와 유지가 <미스터 스마일>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과속 스캔들>과 <써니>의 강형철이 뮤지컬 영화들 들고 돌아왔다. 엄밀히 말해 <스윙키즈>가 노래를 부르는 뮤지컬 영화는 아니지만, 탭댄스가 등장하는 뮤지컬 장면이 수차례 등장하기에 뮤지컬 영화로 충분히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배경은 6.25 전쟁 중의 거제도 포로수용소. 주인공은 전쟁포로로 붙잡힌 북한국 로기수(도경수), 공산주의 북한국 병사들을 자유주의의 춤을 추는 광대로 만들라는 지시를 받은 전직 브로드웨이 댄서 잭슨(자레드 그라임스), 돈을 벌러 군부대 인근으로 왔다가 잭슨의 팀에 합류하게 된 앙판례(박혜수), 남한의 민간인이지만 북한국으로 오인 받아 포로수용소로 온 강병삼(오정세), 그리고 포로로 붙잡힌 중공군 샤오팡(김민호)이다. 다소 오합지졸로 보이고, 단지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뿐만 아니라 어느 곳에 있든 아웃사이더의 위치에 놓이게 될 사람들이 모여 춤에 대한 열정을 보여준다는 것이 <스윙키즈>의 줄거리이다.



 애초에 뮤지컬 장르는 전쟁과 연관이 깊다. 2차대전 이후 40년대 중반부터 50년대까지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뮤지컬 영화는 전쟁으로 인한 우울감을 해소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사업이었으며, 프랑스에서 제작된 뮤지컬 영화들은 전쟁으로 인해 만나고 헤어지는 인물들이 주된 등장인물로 등장하곤 했다. 어쨌거나 2차대전 종전을 전후로 해서 제작된, 또는 전쟁 중인 상황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은 뮤지컬 영화들은 전쟁으로 인한 대중의 우울감을 해소시키고 위로하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스윙키즈>는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러한 영화들과 다른 노선을 택한다. 이데올로기 체제를 굳건히 하기 위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 이데올로기가 개인의 삶을 옥죄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렇기 때문인지, <스윙키즈>는 내내 밝고 희망적이기만 하진 않다. 전장의 모습을 직접 보여주지는 않는다. 대신 거제 포로수용소는 이미 전장의 모습을 대리하고 있다. 남한에 머물기를 원하는 포로와 북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포로, 그 사이에서 포로들을 이용하려는 미군이 얽힌 포로수용소라는 공간은 이미 그 자체로 전장이다. 전쟁영웅의 동생인 로기수는 포로수용소 안에서도 북한으로의 귀환을 원하는 이들의 리더격인 인물로 다뤄지고, 수용소에서의 반란을 꿈꾸는 북한군들과 탭댄스를 함께 하려는 팀 ‘스윙키즈’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여기에 흑인으로써 5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잭슨, 돈을 벌기 위해 양공주가 되려 했던 판례의 이야기 등이 얽히면서 이야기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의 대결뿐만 아니라 인종과 젠더의 이데올로기까지 이야기를 확장하려 한다.



 이것들을 훌륭히 해냈다면 <스윙키즈>는 오랫동안 기억될 한국영화로 남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러진 못한다. 다만 이러한 지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고, 그것을 종종 황당하기까지 한 강형철 감독의 스타일로 그려냈다는 점이 이 영화의 강점이다. 다소 격하게, 그리고 여러 차례 뒤바뀌는 영화의 톤이 조금 어지럽기도 하지만, 이렇게 오가는 톤이 영화가 그려내고자 하는 1951년의 거제 포로수용소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스윙키즈>는 올해 개봉한 대부분의 한국 상업영화들과는 다르게, 영화 속 쇼트의 대부분이 자신의 목표를 확실하게 잡은 채 촬영된 것들이었다. 스스로 어떤 영화가 되려는 지, 그 목표를 확실히 한다는 점에서, <스윙키즈>는 올해 한국 상업영화중에 그나마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필모그래피를 쌓아갈수록 또래 남성 배우 중 독보적인 영역을 점유해가는 도경수의 매력은 덤이다.


<히트>, <스파이>, <고스트버스터즈> 등을 통해 버디 액션, 첩보, SF 판타지 등의 장르를 여성중심적 영화로 재해석해온 폴 페이그가 이번엔 필름 누아르 스타일의 스릴러를 연출했다. 그의 신작 <부탁 하나만 들어줘>는 싱글맘인 스테파니(안나 켄드릭)가 아들의 친구의 엄마인 에밀리(블레이크 라이블리)와 우연히 친해지며 시작한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스테파니는 자신의 브이로그 방송 중 에밀리가 실종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스테파니는 자신과 에밀리의 아들들을 데리고, 에밀리의 남편인 숀(헨리 골딩)과 함께 에밀리의 행방을 알아보기 시작한다.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던 스테파니는 그 에너지를 사용해 에밀리와 그의 실종에 얽힌 비밀을 파헤치고, 브이로그를 시청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부탁 하나만 들어줘>는 에밀리(블레이크 라이블리)와 스테파니(안나 켄드릭)라는 두 여성 캐릭터가 필름 누아르의 클리셰를 비틀며 충돌하는 작품이다. 많은 필름 누아르 영화에서 팜므파탈 캐릭터를 설정하고, 그 캐릭터가 사망, 실종, 납치, 잠적 등 비밀을 품은 상태로 사라진 채 탐정 내지는 형사 역할의 남성 캐릭터가 비밀을 파헤치는 구도를 취한다. 반면 <부탁 하나만 들어줘>에는 탐정 역할의 남성 캐릭터가 없다. 에밀리의 남편인 숀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의 캐릭터는 단순히 체스판 위의 말 하나에 그친다. 폴 페이그는 남성 탐정 캐릭터 대신 에밀리와 스테파니 두 캐릭터를 모두 팜므파탈 캐릭터로 위치시킨 뒤, 스테파니의 캐릭터를 탐정 캐릭터로 변신시킨다. 이러한 역할 변화는 <스파이>나 <고스트버스터즈>에서 직업이나 영화 속 역할에 얽힌 젠더 역할을 가지고 놀며 작품을 이끌어가던 모양새를 연상시킨다. 거기에 브이로그, 의상의 변화, 조연과 단역의 캐스팅에서도 젠더와 인종적 측면을 충분히 고려한 것 등이 이 영화의 세련됨을 알려준다.



 다만 아쉬운 지점은 있다. 영화 중반부에 등장하는 에밀리와 스테파니의 키스는 그냥 그 장면 하나로만 흘러 지나간다. 두 여성 간의 성애적 관계는 영화 말미까지 도통 그려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팜므파탈과 팜므파탈의 충돌을 영화의 기본 설정으로 삼았다면, 그러한 설정을 디나이얼 레즈비언들의 로맨스 서사로 결말을 맺는 것이 더욱 흥미로운 설정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두 캐릭터의 키스 장면이 등장함에도 이러한 맥락을 영화가 거부하고 있다는 점은 <부탁 하나만 들어줘>의 한계점으로 보인다. 다만 이런 한계점은 <스파이>나 <히트> 등 폴 페이그의 가장 좋은 영화들에 비해 아쉽다는 인상을 줄 뿐, 여전히 폴 페이그의 영화는 시종일관 관객을 즐겁게 하는 지점을 놓치지 않는다. 폴 페이그의 차기작 리스트에는 이번 영화에도 출연한 헨리 골딩을 비롯해 에밀리아 클라크, 엠마 톤슨, 양자경 등이 출연하는 로맨틱 코미디와 <히트>의 속편이 예정되어 있다. 일정이 밀리지만 않는다면 앞으로 2년 동안 매년 폴 페이그의 영화를 만나볼 수 있으니, 매년 최소 한 편의 끝내주는 킬링타임용 영화를 보게 되는 것이라 여기고 그의 차기작을 기다리면 될 것 같다.

 샘 레이미의 첫 <스파이더맨> 실사영화가 개봉한 이후 16년 만에 스파이더맨이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됐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라는 제목으로 소니가 야심 차게 준비한 이번 영화는, 한 명의 스파이더맨이 등장하는 것이 아닌, 여러 차원에 존재하던 스파이더맨들이 한 차원에 모이게 되어 발생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동시에 이번 영화는 2011년 코믹스에 데뷔한 흑인 스파이더맨, 마일즈 모랄레스(샤메익 무어)의 오리진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는 킹핀(리브 슈라이버)이 차원 이동기를 만들어 내자, 사고로 다른 차원의 스파이더맨인 피터 B. 파커(제이크 존슨), 스파이더 그웬(헤일리 스타인필드), 스파이더맨 누아르(니콜라스 케이지), 페니 파커(키미코 글렌), 스파이더 햄(존 멀레이니) 등이 마일즈가 있는 차원으로 오게 된다. 방사능 거미에 물려 이제 막 능력을 갖게 된 마일즈는 이들과 힘을 합쳐 킹핀의 음모를 막고자 한다.



 간단한 감상부터 말하자면,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는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트릴로지와 마크 웹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존 왓츠가 MCU에서 제작한 <스파이더맨: 홈커밍>까지 모든 극장용 스파이더맨 영화를 통틀어 가장 놀라운 성취를 보여준다. 아니, 최근 경쟁적으로 각자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는 각종 시네마틱 유니버스들과 여러 슈퍼히어로 오리진 영화를 통틀어서도 손꼽을 만하다. 마일즈와 삼촌 애런(마허샬라 알리)의 관계를 통해 스파이더맨과 삼촌의 관계를 새롭게 그려낸 것, 인종과 젠더의 묘사를 자연스럽게 풀어낸 것, 멀티버스라는 설정을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을 통해 다른 영화들에 비해 훌륭하게 풀어낸 것 등 기존의 영화들이 쉽게 풀어내지 못한 것들을 이번 영화는 훌륭하게 해낸다. 특히 117분의 러닝타임 동안 펼쳐지는 코믹스 스타일의 작화와 애니메이션의 시각적 자유도를 통해 풀어낸 액션들은 황홀할 지경이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는 앞서 언급한 과제들을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을 통해 풀어낸다. 이미 많은 관객들이 알고 있을 스파이더맨’들’의 반복되는 오리진 스토리를 쌓여가는 코믹스들의 이미지로 보여준다던가, 이전 실사영화들의 주요 장면들을 코믹스 스타일의 몽타주로 보여주는 방식, MCU가 선택한 실사화의 방식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멀티버스의 묘사 등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특히 마지막 20여분 동안 펼쳐지는 액션 시퀀스는 애니메이션이 주는 시각적 자유도를 극한으로 밀어붙인 장면이 아닐까 싶다. 여러 차원이 겹쳐지고, 그 속에서 마일즈를 비롯한 여러 스파이더맨들과 킹핀 일행이 벌이는 액션은 최근 몇 년간 개봉한 여러 편의 슈퍼히어로 영화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액션 시퀀스가 아닐까 싶다. 더군다나 스파이더맨의 소소한 행동들, 가령 벽을 타고 움직이는 장면 등 또한 가장 스파이더맨스럽게 연출된 장면이 아닐까? 경쾌한 발걸음으로 벽을 걷는다거나, 가볍게 주고받는 대화들 사이에서 어떤 실사영화에도 보지 못한 순간들이 존재한다.



 스파이더맨의 주변 인물들 묘사도 뛰어나다. 마일스가 자연스럽게 흑인-히스패닉 혼혈임을 드러내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사들, 스파이더맨(들)의 조력자로서 활약하는 메이 숙모의 존재, 자연스럽게 속편에 대한 떡밥을 깔아 두는 여러 캐릭터들의 등장, 각자의 사연을 통해 움직이는 피터 B. 파커와 스파이더 그웬을 비롯한 다른 차원의 스파이더맨들은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가 지닌 가치를 더욱 올려준다. 이 놀라운 스파이더맨 영화는 현재 마일즈와 그웬의 이야기를 다룬 속편과 그웬을 비롯한 다른 스파이더우먼들이 등장하는 스핀오프가 기획 중이라고 한다. 스파이더맨의 마블로의 귀환을 반기던 팬들에게 소니가 멋진 반격을 한 것이 아닐까? 마블은 마블대로, 소니는 소니대로 각자의 스파이더맨을 계속해서 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향한 알폰소 쿠아론의 신작 <로마>가 소규모 극장 개봉과 함께 넷플릭스에 공개됐다. 이번 영화는 알폰소 쿠아론 본인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한 중산층 가정집의 가정부인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쿠아론은 영화에 등장하는 어린아이들 중 하나에 자신을 투영하고, 자신을 키운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로마>를 통해 펼쳐 보이려 한다. 영화의 배경은 1970년 멕시코의 한 도시, 카메라는 물청소 중인 어느 바닥을 비추고 있다. 물에 의해 비친 천장의 창문을 통해 종종 비행기가 지나가고, 물결을 따라 창문의 이미지는 흔들린다. 카메라가 틸팅 하며 청소하는 클레오를 비추며 영화가 시작한다. 



 쿠아론이 직접 촬영을 맡은 카메라는 클레오가 보낸 1년여간의 시간을 따라간다. 그 시간엔 같은 시기 한국을 연상시키는 멕시코의 정치적 혼란, 클레오 고용주 가족의 이혼, 클레오의 임신 등 다양한 사건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카메라는 종종 클레오의 시선에서, 종종 그를 관찰하는 시선에서 움직인다. 청소하는 클레오의 모습을 땅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모습으로 시작한 영화는, 빨랫감을 가지고 옥상으로 올라가는 클레오의 모습을 올려다보는 틸팅으로 끝난다. 영화 내내 수평의 트래킹이나 패닝, 고정된 쇼트로만 담기던 클레오의 모습은 처음과 마지막에서만 상승의 순간 안에 놓이게 된다. <로마>의 이러한 촬영은 어딘가 기시감이 든다. 그간 알폰소 쿠아론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촬영감독을 맡은 임마누엘 루베츠키의 카메라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특히 쿠아론의 작품은 아니지만,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레버넌트>를 연상시키는 촬영이 종종 등장한다. 이러한 촬영은 클레오를 적극적으로 영화 속 풍경으로 위치시킨다. 



 안정적으로 1970~71년의 멕시코를 풍경화시키는 <로마>이 촬영은 몇 차례 그러한 안정성이 흔들리는 촬영을 보여준다. 클레오 고용주 가족의 아빠가 차를 몰고 집에 들어오는 순간, 클레오의 애인인 페로민(조지 안토니오 구레로)이 성기를 들어낸 채로 배운 무술을 자랑하는 장면. 두 순간은 인물들을 풍경화시키는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굉장히 남성적인 순간으로 다가온다. 돌출된 이 두 장면은 클레오의 인생에 큰 변곡점을 만들어낼 인물들이 등장하는 순간이다. 영화에서 두 남성이 돌출되는 모양새로 등장하는 반면, 클레오와 나머지 고용주 가족 등은 영화의 마지막까지 풍경으로 존재한다. 영화의 마지막, 포스터에 등장하는 해변 장면이 되어서야 클레오는 풍경에서, 풍경을 뚫고 헤쳐 나오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전까지 카메라가 클레오나 고용주 가족을 그리는 방식은 매우 평면적이다.



 특히 ‘성체축일 대학살’ 사건과 클레오의 출산이 겹치는 장면에서 무덤덤하게 인물을 따라가기만 하는 카메라는 그야말로 인물들을 평면적으로 압축하여 그 시대에 박제한다. 영화 중반부 잠시 등장하는 개의 머리 박제들과 클레오를 비롯한 인물들이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로마>가 알폰소 쿠아론의 자전적인 이야기임을 생각해볼 때, <로마>의 이러한 촬영은 쿠아론이 지닌 당시 기억을 통해 그 시대를 복원하려는 시도로 생각된다. 많은 평자들이 <로마>를 두고 ‘시대의 공기를 담은 작품’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문제는 ‘시대의 공기’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의 문제이다. 작품의 태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겠지만, <로마>가 그려내는 ‘시대의 공기’는 1970년이라는 시간에 인물을 박제시킴으로써 발생한다. 인물을 시대에 묶어 두고 그것을 관찰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 영화 속 ‘시대의 공기’라면, <로마>는 인물들을 풍경화하여 박제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로마>의 마지막에서 파도를 뚫고 나가는 클레오의 모습은 풍경화된 평면을 뚫고 나온다. 오프닝과 이어지는 엔딩의 틸팅을 통해 상승하는 클레오의 위치를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오프닝에서 예고된 엔딩일 뿐, 영화는 내내 오프닝에서 제시된 관점을 따라간다. 오프닝에서 물에 비친 창문 속 하늘은 물이 흔들림에 따라 계속해서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한다. 클레오가 바닥 타일에 낀 때를 쓸 때마다 물은 조금씩 탁해지기도 한다. 여기서 클레오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 카메라를 들어 클레오를 바라보는 것, <로마>에서 쿠아론이 한 것은 그것밖에 없다. 그것을 어떤 아름다움으로 바라볼 것인지, 쿠아론이 자신을 성장시킨 여성들에게 보내는 편지로 읽어야 할지, 시대에 박제된 사람들을 관찰하는 이야기로 볼 것인지는 <로마>를 보는 사람에게 달린 일이다. 다만 루베츠키의 방식을 따라가는 쿠아론의 촬영은 인물을 그리는 것에 있어서 쿠아론의 한계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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