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2018' 카테고리의 글 목록 (4 Page) :: 영화 보는 영알못

 마담 B는 생계를 위해 두만강을 건넜다. 남편과 두 아들을 두고 떠난 그는 탈북 이후 산동의 어느 남성의 집에 팔려간다. 적당히 돈을 벌다 돌아가려던 생각은 했으나 이미 10년이 지나가 버렸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탈북 브로커로 일했고, 북한에 남은 세 명의 가족을 모두 남한으로 이주시키는 데 성공한다. 다만 지난 세월 동안 중국의 남편에게 정이 들었고, 그는 마담 B의 처지에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의 공감을 보여주었다. 마담 B는 탈북이민자를 대하는 한국의 태도에 넌더리가 나고, 한국 국적과 여권을 취득해 중국의 남편과 정식으로 결혼신고를 하고 싶어 한다. 윤재호 감독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뷰티풀 데이즈>에 대한 리서치를 하다가 우연히 마담 B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고, 그의 이야기를 개별적인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했다. 그는 마담 B의 탈북 루트에 동행하면서 <마담 B>를 촬영했다.



 <마담 B>의 이야기는 굉장히 신파적일 수 있다. 하지만 영화엔 신파적으로 감정을 건드리는 부분은 많지 않다. 대신 탈북 이후 마담 B의 삶, 그가 선택한 삶의 방향, 가족과 사랑에 대한 선택 등이 분명하게 그려진다. 탈북 브로커에 의해 매매혼으로 팔려왔지만 본인도 탈북 브로커가 될 수밖에 없었던 아이러니, 팔려왔지만 북한의 남편보다 중국의 남편과 살기를 소망하게 되는 아이러니, 중국의 남편과 정식으로 결혼하기 위해서는 한국에 와서 한국 국적을 취득해야만 하는 아이러니가 마담 B가 겪은 10여 년의 세월 안에 들어있다. 결국 마담 B의 디아스포라적 삶 속에 분단 이후 발생한 역사적 아이러니가 총체적으로 녹아들어 있는 셈이다. 동시에 <마담 B>의 이야기는 한 여성의 경험을 온전히 주목한 작품이기도 하다.



 마담 B의 삶에선 탈북이민자라는 정체성과 함께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또 하나의 중요한 축으로 작동한다. 그가 여성이 아니었다면 매매혼의 방식으로 팔려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경험은 생존의 여성화, 돌봄노동의 전 지구적 연쇄의 한 사례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마담 B의 삶은 탈북이민자의 디아스포라임과 동시에 여성화된 생존의 디아스포라로 읽어낼 수도 있다. 그가 북한에 남은 가족들에게 생계비를 지속적으로 보내주고, 그들을 탈북시켜 남한으로 데려온 것은 이러한 해석을 가능케 한다. 때문에 마담 B의 삶을 신파적으로 그려 내기보단, 그가 살아온 삶을 그냥 보여주기만 하려 노력한 이 다큐는 더욱 가치 있게 느껴진다.

 마이클 무어는 2004년 <화씨 9/11>을 통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그로부터 14년 뒤 제목의 숫자를 뒤집은 <화씨 11/9>를 내놓는다.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은 ‘Fahrenheit 9/11’(화씨 9/11)의 숫자가 11/9로 바뀌는 것으로 시작한다. 9/11 테러와 존재하지 않는 대량학살무기 때문에 계속 전쟁을 벌인 부시 정권이 21세기 미국의 첫 분기점이었다면, 2016년 11월 9일 트럼프의 당선은 그 두 번째 분기점이라는 것이다. 영화는 당연히 힐러리 클린턴이 당선될 것이라 믿는 힐러리의 지지자들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2016년 11월 8일 미국 대선 투표 당일,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등장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모습은 개표가 진행될수록 어두워진다. 마이클 무어는 11월 9일 새벽 당선되어 당선 연설을 하는 트럼프와 그의 측근들을 보며 “가장 우울한 당선인의 얼굴”이라 표현한다. 트럼프의 시대는 그의 우울한 얼굴과 함께 시작한다.



 <화씨 11/9>는 트럼프의 2018년 현재를 논하는 대신, 대선 앞뒤의 기간에서 현재진행형의 폭풍으로 존재하는 트럼프가 어떻게 당선되게 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이미 수많은 이야기가 오간 미국의 선거인단 제도는 마이클 무어의 관심거리가 아니며, 영화 속에서도 짧게 스쳐 지나간다. 그가 집중하는 것은 6,600만 표를 받은 힐러리가 6,300만 표를 받은 트럼프 대신 낙선했다는 이야기가 아닌, 투표를 하지 않는 1억 명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이를 보여주며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영화의 절반 가량 트럼프의 얼굴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모든 것이 그의 당선으로 이어지는 징후였음을 보여주는 우회적인 방식을 취한다. 영화가 처음 주목하는 곳은 미시간 주의 플린트 시이다. 미시간 주지사인 공화당의 리처드 스나이더는 플린트의 수도사업을 민영화하고, 수원지를 휴런 호에서 플린트 강으로 바꾼다. 공업지대인 플린트 시의 폐수로 인해 오염된 플린트 강물은 파이프를 부식시켰고, 여기서 납이 물에 녹아들며 주민들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스나이더를 비롯한 미시건 주 당국은 물이 정상기준에 부합한다며 수원지를 변경하지 않았고, 2016년 오바마 대통령이 나서기 전까지 수도 오염이 지속되며 플린트 시의 거의 모든 아이들에 납에 중독되고 만다. 마이클 무어는 플린트 시의 인구 중 2%만이 백인임을 지적하며 이러한 상황을 ‘느린 속도의 인종청소’라고 부른다. 자본과 권력의 결탁에 의한 도시 전체의 게토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더욱이 이를 해결하겠다고 플린트 시를 찾은 오바마가 그곳에 물을 마시는 시늉을 하는 쇼를 하는 장면이 등장하며, 플린트 시의 흑인들은 오바마와 민주당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투표를 거부하고야 만다.



 이와 유사한 양상은 미국 곳곳에서 드러난다. 인종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공립학교 교사의 처우와 봉급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하는 교육제도로 인해 촉발된 웨스트버지니아의 교사 파업, 스톤월 고등학교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으로 촉발된 청소년들의 총기제도 반대 운동, 여성, 이슬람계, 비백인 인종을 중심으로 한 하원의원 선거 출마와 대도시 이외 지역의 풀뿌리 민주주의 운동 등이 촉발된 과정들은 미국의 선거인단 제도와 보수화된 민주당 기득권층에 대한 반발로 해석된다. 온건한 사람을 선거 당선인으로 내세워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더욱 공고히 하려 한다. 결국 민주당이 국민들의 의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며 공화당의 인물들이 그 빈틈을 공략한 것이고, 이는 1억 명의 무투표자와 트럼프의 당선이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트럼프는 보수화된 민주당 기득권이 자초한 상황 속에 등장한,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명확하게 잡아챈 사람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는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기반으로 자신과 지지자 사이의 심리적 거리감을 좁혀갔고, 결국 당선된 것이다.



 앞서 언급한 교사 파업, 청소년들의 총기제도 반대 운동, 소수자 계층의 하원의원 출마, 풀뿌리 민주주의 회복 운동 등은 일말의 희망을 보여주려는 것 같다. 교사 파업은 교사뿐만 아니라 스쿨버스 운전수와 급식 조리사 등 학교 내 전 직원의 임금과 처우를 개선하는 데 성공했고, 청소년들의 행진은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여 정치인들에게 압력을 가하며, 소수자 계층 인물들의 하원의원 출마는 (영화에 결과가 나오진 않았지만) 영화에 출연한 몇몇 후보들이 이번 간선거에서 당선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트럼프 시대에 대한 반발은 민주당이 아닌, 정치 밖의 사람들(교사), 선거권 밖의 사람들(청소년), 기득권 밖의 사람들(여성, 비백인)에 의해 가시화되고 진행된다. 마이클 무어가 바라는 미국은 아직 존재한 적 없는 미국, 즉 유토피아에 가까운 것이며, <화씨 11/9>는 이들이 주축이 되어 희망을 제공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희망은 일시적으로 위안을 주는 것일 뿐이라는 비관을 내비치기도 한다.



 영화는 이 과정을 (마이클 무어가 언제나 그랬듯) 다양한 뉴스 화면과 공격적인 인터뷰, 적절히 사용된 다른 영화의 클립들을 사용해 보여주며, 더 나아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 라이브 영상까지 활용한다. 이러한 방식의 정점은 히틀러와 나치의 집권 과정과 트럼프의 집권 과정을 비교하는 대목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마이클 무어는 나치 정권의 프로파간다 영화 <의지의 승리> 속 히틀러의 연설 장면에 트럼프가 했던 말을 얹는다. 패턴화 된 역사 속에서 트럼프와 히틀러의 집권과정이 갖는 유사성을 설명하는 이 장면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자극적이면서도 직접적인 방식으로 담아낸다. 이 장면이야말로 마이클 무어의 한계(자극성)와 강점(정보를 전달하기 가장 좋은 방식으로 수집하고 편집하는 것)이 한 번에 드러나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전작 <다음 침공은 어디?>가 소소한 성격이 강한 소품의 느낌이었다면, <화씨 11/9>는 9/11만큼의 위기를 겪고 있는 21세기의 미국을 트럼프의 당선이라는 사건을 통해 총체적으로 그려내려는 야심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동시에 이번 영화는 미국이 다시 한번 위기를 넘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그 어느 때보다도 비관적으로 내뱉는다. <화씨 11/9>는 총기제도 반대 운동을 주도한 청소년 활동가이자 총기난사 사건의 생존자 에마 곤잘레스의 연설 장면이 마지막에 등장한다. 에마는 희생된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며 그들은 다시는 OO를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다시는(never)이라는 말을 반복하다 말을 멈추고 눈물을 머금는 에마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영화가 끝난다. 에마의 말은 총기난사가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임을 드러냄과 동시에, 트럼프 시대를 통해 망해가는 미국을 절대 막을 수 없다는 비관으로 느껴진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위저드 월드’라는 세계관으로 명명된 뒤의 두 번째 작품,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를 관람했다. <신비한 동물사전>에 이은 이번 작품은 마법부 교도소를 탈출한 그린델왈드(조니 뎁)가 순혈 마법사들을 모아 머글들을 학살하려 하자, 덤블도어(주드 로)는 뉴트 스캐멘더(에디 레드메인)에게 이를 저지해 달라 부탁한다. 뉴트는 티나(캐서린 워터스톤), 티나(엘리슨 수돌), 제이콥(댄 포글러) 등의 친구들과 그린델왈드를 저지하려 하지만, 레타 레스트렝(조이 크라비츠), 테세우스 스캐멘더(칼럼 터너) 등과 이해관계가 엮이며 상황은 복잡해진다. 그 와중에 그린델왈드는 덤블도어를 죽이기 위해 내기니(수현)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크레덴스(에즈라 밀러)를 포섭하려 한다.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는 ‘위저드 월드’ 최악의 작품이다. 가정폭력범 조니 뎁의 출연과 그를 옹호하는 J. K. 롤링, 데이빗 예이츠의 감독이 촉발한 논란이나 내기니 캐릭터에 얽힌 인종차별 논란을 차치하고 영화만으로 평가한다 해도, 이번 영화의 완성도는 처참하다. 수많은 인물들이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동안 이들을 묶어주는 큰 줄기의 이야기는 제대로 굴러가지 않으며, 그린델왈드의 범죄라는 제목이 무색하게 그린델왈드는 그저 얼굴만 많이 비출 뿐 이렇다 할 범죄행각을 저지르지도 않는다. 이렇다 보니 <신비한 동물사전>의 134분짜리 쿠키영상을 액션과 여러 동물들의 등장을 끼워 만든 것을 보고 있나 싶은 생각도 들 지경이다. 게다가 <트랜스포머> 4, 5편 이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중 가장 어색한 편집을 보여주기도 한다. 장면 뒤에 붙는 장면의 톤이 제대로 맞지도 않고, 갑작스레 등장하는 유머는 이걸 웃으라고 배치한 것인 지, 비웃으라고 배치한 것인지 헷갈리는 수준이다. 심지어 프레임 안에서 사라졌던 인물이 편집에 의해 갑자기 재등장하기도 한다. 더욱이 여러 캐릭터들(대부분 여성 캐릭터)은 저 인물을 이렇게 쉽게 버려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냥 소비되거나 얼굴만 비추고 있고, ‘신비한 동물들’이라는 제목을 붙인 만큼 다양한 동물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니플러 정도를 제외한 신비한 동물들의 쓰임 마저 배경 수준에 머무르고 만다.



 이러한 완성도는 J. K. 롤링의 부족한 각본 실력과 데이빗 예이츠의 수준 미달의 연출력이 맞물린 결과처럼 보인다. 롤링은 ‘신비한 동물들’ 시리즈를 통해 처음 각본을 썼는데, 그는 각본을 마치 <해리 포터> 소설처럼 쓴다. 소설에선 챕터 구분이 명확하고 이를 통해 다른 장면에서 다른 떡밥을 배치할 수 있었겠지만, 각본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쓴다면 마구잡이로 이야기를 건너뛰며 떡밥만 남길뿐이다. 시리즈의 팬들이 쓴 무수한 팬픽보다 아쉬운 수준이다. 그로 인해 영화에 인서트 숏의 부족이 발생하고, 그저 각본을 영상화하는 것 이외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데이빗 예이츠는 이러한 부족함을 보충하지 못한다. 그저 신비한 동물들을 보여주고, 시리즈의 오랜 팬들이나 알법한 여러 떡밥들만 뿌린다고 재미있는 영화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완결된 플롯, 아니 떡밥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플롯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소멸해버린 이 영화가, 액션 장면들의 물량공세를 통해 플롯의 빈자리를 채워보려 했던 <트랜스포머>와 무엇이 다른 것인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는 영화에 쏟아지는 수많은 논란들을 무시하고, 그냥 마음대로 시리즈를 이어가겠다는 롤링과 예이츠의 답처럼 느껴진다.

 재중동포 출신으로 <두만강> 등의 작품에 자신의 정체성을 담아내면서, <경주>, <춘몽> 등에 작품을 통해 한국의 지역색을 영화에 담아온 장률 감독이 신작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내놓았다. 이번 작품은 제목처럼 군산에서 촬영된 작품이다. 송현(문소리)이 남편과 이혼하자 윤영(박해일)은 그에게 갑작스러운 군산 여행을 제안하고, 둘은 군산에 도착한다. 둘은 어느 민박집에 묵게 되고 송현은 그곳의 사장(정진영)에 대해, 윤영은 사장의 딸인 주은(박소담)에게 묘한 호기심을 품게 된다.



 영화는 크게 군산을 담은 1부와 윤영이 사는 연희동과 신촌을 담은 2부로 크게 나뉜다. 영화의 제목이 뜨는 시점을 기준으로 나뉘는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우로보로스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반복되는 시간선을 그린다. 후반부가 전반부보다 앞선 시간대에서 발생한 것임을 알려주는 장치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 예전에 어디선가 만나지 않았나요?”라며 묻는 윤영의 대사는 뒤섞인 시간을 그대로 뒤섞이게 방치한다. 마치 우리가 존재하는 순간은 결국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동시에 존재하는 교차점이기에 굳이 시간선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윤영과 송현이 군산에 갔을 때 묵는 민박 사장은 재일교포이다. 자폐증이 있는 그의 딸 주은은 일본어로 이런저런 말들을 중얼거린다. 군산에는 여전히 일본식 주택들이 남아있고, 그들이 묵은 민박도 그러한 주택이다. 그곳은 사각형으로 순환하는 듯한 닫힌 구조를 지닌 공간이다. 인물들은 그 사이를 계속해서 돌아다닌다. 백현진이 연기한 조선족 인권운동가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울부짖지만, 그는 조선족의 말투를 모방하는 조선족이 아닌 사람이다. 그는 역사를 아는 것일까, 아니면 역사를 이용하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그가 역사가 교차하는 어느 지점에 존재하기에 저러한 언행이 가능한 것일 것이다. 장률은 군산과 신촌을 배경으로 한중일의 역사가 교차하는 공간과 인물들 배열한다.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가 지닌 시간 구조는 교차와 순환을 만들어내며 인물들의 행동과 역사를 살포시 겹쳐 놓는다.



 결국 장률의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가 도달하는 지점은 그의 전작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간의 순환, 교차성, 역사, 재중동포라는 정체성 등이 어지럽게 겹치고, 그 위에 인물들이 다시 한번 겹치면서 장률의 작품이 탄생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윤영은 자신의 서울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아주머니(김희정)의 큰할아버지가 자신이 흠모하는 시인 윤동주의 사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장률은 흐트러진 시간의 순환선 안에 우연들을 툭 하니 던져 놓는다. 역사, 지역, 민족 정체성은 결국 우연의 총체일 뿐임을, 그는 이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할 뿐이다.

*스포일러 포함


 <글로리아>, <판타스틱 우먼> 등의 영화를 발표하며 칠레, 그리고 퀴어 영화계의 스타로 떠오른 세바스티안 렐리오 감독의 첫 영어영화 <불복종>을 드디어 관람했다. 아쉽게도 국내 개봉이 무산되고 바로 블루레이와 VOD 등의 2차 시장으로 직행했지만, 프라이드 영화제를 통해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었다. 항상 퀴어를 주인공으로 삼아온 작가답게, <불복종> 또한 레즈비언 커플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는 런던의 유대인 공동체를 떠나 뉴욕으로 간 로닛(레이첼 바이스)이 공동체의 랍비였던 아버지의 사망 이후 장례식을 위해 돌아오게 되고, 절친이었던 두 친구 에스티(레이첼 맥아담스)와 도비드(알렉산드로 니볼라)가 결혼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로닛의 등장에 공동체의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하고, 도비드에게 아내 간수를 잘 하라는 말을 건넨다. 그러나 로닛과 에스티는 예전에 나누었던 사랑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불복종>의 시놉시스나 포스터만 보면 토드 헤인즈의 <캐롤>이나 압둘라티프 케시시의 <가장 따뜻한 색 블루> 등의 영화들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불복종>은 세상에서부터 탈주하거나, 연애의 시작과 끝을 다루는 익숙한 레즈비언 로맨스 드라마로 흘러가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유대인 공동체와 가족에 집중한다. 유대인 공동체는 당연하게도 동성애를 탄압하고, 로닛과 에스티가 키스하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은 그들을 고발하기도 한다. 로닛은 공동체에서 탈주한 인물이지만, 에스티는 차기 랍비 후보인 도비드와 결혼하여 생활하고 있다. 때문에 그에게 이러한 문제는 유대인 공동체에서 앞으로의 생활이 걸린, 교사라는 직장과 도비드와의 결혼생활이 달린 문제이다. 영화에선 에스티의 레즈비언 성적지향을 결혼을 통해 바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도비드와 공동체의 사람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이 에스티 본인에게도 주입되었다는 것이 등장한다. 유대인 공동체는 종교를 구실로 삼고 공동체라는 이름과 공간을 내세워 한 개인의 삶을 규정하려 한다. 에스티와 로닛의 사랑이 받아들여지기는커녕, 교화 내지는 치료의 가능성이 있다고 공동체는 믿는다. 결국 이. 공동체는 자신들이 쌓아온 전통을 견고히 하기 위해 자유의지를 박탈하고 개인을 지워낸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로닛의 아버지인 랍비는 마지막으로 설교를 하다 폐렴으로 쓰러져 사망한다. 랍비의 마지막 설교는 신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고 율법을 만들어냈지만, 그들에게 불복종할 수 있는 자유의지도 주었다는 것이다. 자유의지는 유대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종교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소재이다. 자유의지와 종교의 충돌은 퀴어 영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측면에서 영화를 비롯한 매체들에 등장한다. 신에게 복종하도록 창조된 인간에게 신이 자유의지를 주었다는 종교적 모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불복종>은 이러한 모순의 충돌을 정면으로 그려내는 작품이다. 때문에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로닛이나 에스티가 아닌 도비드가 가져간다. 랍비가 죽기 전에 설파한 자유의지를 곱씹어보던 차기 랍비 후보는, 결국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자리를 내려 놓는다. <불복종>이 레즈비언 로맨스임과 동시에 종교와 이에 기반한 가족을 통해 자유의지에 대한 이야기를 설파하는 작품이 된다. 이는 세바스티언 렐리오 감독의 전작 <판타스틱 우먼>에서 애인의 장례식에도 참여하지 못하는 트랜스젠더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담아낸 자유와 그것을 얻을 권리를 이야기했던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결국 세바스티안 렐리오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주제는 권리로써 존재하는 자유라고 생각된다.



 다만 <불복종>의 클라이맥스를 로닛이나 에스티가 아닌 도비드가 가져갔어야만 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영화가 주인공을 내세우는 두 캐릭터 대신 공동체에 깊숙이 들어가 남성이 클라이맥스를 차지하고 그가 “당신은 자유야”라는 대사를 뱉는다는 것은, 에스티의 자유의지가 도비드의 승인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만 같은 오독을 낳게 된다. 물론 도비드가 상징하는 공동체의 성격이 존재하고, 그의 발언을 통해 이를 무너트리며, 결국 공동체에 속한 집에 남는 에스티의 선택을 통해 영화의 엔딩 이후에도 이어질 에스티의 투쟁을 가시화하는 것으로 <불복종>은 자신의 클라이맥스를 합리화한다. 에스티의 불복종이 나비효과를 일으켜 도비드를 변화시켰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클라이맥스가 도비드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에스티가 벌이는 투쟁을 간접적으로 지지하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때문에 <불복종>은 로닛과 에스티의 이야기가 도비드로 대표되는 공동체로 확장된 것임과 동시에, 로닛과 에스티의 이야기 자체는 축소되며 로닛과 아버지의 관계마저 어정쩡한 결말을 맞이하는 한계를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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