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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전설적인 게임이자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가 드디어 할리우드에서 실사화되었다. ‘포켓몬 고’의 성공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제작이 시작된 <명탐정 피카츄>는 동명의 게임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본래 인간과 포켓몬은 대화할 수 없는 설정이지만, 원작 게임은 인간과 대화할 수 있는 피카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추리게임이다. 영화는 원작 게임의 이야기와 등장인물들을 대부분 가져왔다. 주인공인 팀 굿맨(저스티스 스미스)은 탐정인 아버지와 떨어져 외할머니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어렸을 적 포켓몬 트레이너의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아버지와 떨어져 살게 되면서 그 꿈을 버린지 오래다. 어느 날 아버지가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인간과 포켓몬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라임시티로 향한다.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인간과 말을 할 수 있는 피카츄(라이언 레이놀즈)를 만나게 된다. 기억을 잃어버린 피카츄는 팀의 아버지를 알고 있는 존재. 둘은 우연히 알게 된 GNM의 인턴 기자 루시(캐서린 뉴튼)과 함께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 나가기 시작한다. 

 

 솔직히 말해 썩 잘 만든 영화는 아니다. 각본은 어딘가 덜컹거리고, 굳이 들어가는 러브라인은 거추장스럽다. 게다가 내루미를 비롯한 몇몇 포켓몬의 실사 비주얼은 언캐니 밸리를 자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탐정 피카츄>는 게임이나 애니메이션으로 <포켓몬스터>를 즐겨온 관객들의 노스텔지어를 자극하는 부분들이 있다. 인간과 포켓몬이 함께 살아가는 도시 라임시티는 생각보다 안정적으로 구현되어 있다. 마치 게임을 처음 시작했을 때 등장하는 태초마을을 연상시키는 오프닝 시퀀스의 평화로운 모습은 단숨에 관객들을 영화 속 포켓몬 세상으로 끌어들인다. 팀은 라임시티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라임시티의 홍보영상을 보게 된다. 비행기나 기차를 타고 여행해본 사람이라면 봤을 법한 영상 속에 포켓몬들이 자연스럽게 존재한다. <주토피아>에서 주디가 주토피아에 도착하는 순간을 연상시키는, 다양한 포켓몬들이 등장하는 라임시티의 비주얼은 분명 일정 수준 이상의 성취를 보여준다. 잠만보, 괴력몬, 두두, 꼬렛, 푸린, 에이팜, 리자몽, 거북왕, 팬텀, 가디, 비버니 등 수많은 포켓몬들이 마치 <레디 플레이어 원> 속 대중문화 캐릭터처럼 등장하는데, 어떤 포켓몬이 등장하는지 주의 깊게 지켜보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다. 더군다나 이 영화엔 무려 <포켓몬스터>의 첫 극장판 애니메이션에 등장했던 뮤츠가 등장한다. 그것 만으로도 포켓몬 팬들의 향수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아쉬운 점이라면 라이언 레이놀즈가 과연 피카츄에 어울리는 캐스팅이었냐는 점이다. 물론 <데드풀>로 드러난 배우 본연의 캐릭터가 수다스러운 캐릭터에 어느 정도 어울리긴 한다. 하지만 (스포일러라 밝힐 수 없는) 후반부의 설정에서는 아무래도 실소가 터져 나온다. 여러모로 성긴 각본, 가령 제대로 설명되지 못하는 악당 캐릭터의 동기 또한 아쉬운 지점이다. 가볍게 즐기기엔 무리 없는 영화이지만, 종종 안일한 순간들이 드러나 아쉬움을 준다. 어쩌면 더 이상 오리지널 각본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한계가 다시 한번 드러나는 지점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명탐정 피카츄>는 충분히 즐길만한 작품이다. 영화 중반과 엔드크레딧에 등장하는 애니메이션 테마송과 게임 BGM은 관객의 향수를 자극한다는 점에서 반칙이나 다름없으니까 말이다. 무엇보다, 실사로 제작된 파이리, 이상해씨, 꼬부기, 그리고 피카츄는 여전히 귀엽기만 하다.

 노동절 129주년을 맞은 2019년 5월 1일, 한국 노동영화의 전설과도 같은 작품인 <파업전야>가 제작 30년 만에 극장에 정식 개봉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직후를 배경으로 한 <파업전야>는 당시 대학 영화동아리 등이 뭉친 영화제작소 ‘장산곶매’에서 제작한 작품이다. 한국 최초의 노동운동 영화라고 불리는 이 작품은, 1988년 초를 배경으로,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에도 여전히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노동에 시달리는 동성 금속 노동자들이 다시 한번 투쟁에 나선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파업전야>는 인천 한독금속에서 파업 중이던 노동자들의 협조로 실제 파업투쟁 중인 장소에서 촬영되었다. 또한 1990년 당시 “영화가 파업을 선동한다”라고 판단한 노태우 정권은 <파업전야>의 상영을 저지하려고 했고, 결국 영화는 대학가를 돌며 불법 상영회를 연이어 진행하는 방식으로 상영되었다. 비공식적인 집계이지만, 당시에 약 30만 명이 이 영화를 관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올해로 제작 30주년을 맞이한 <파업전야>는 한국영상자료원의 복원을 거쳐 4K로 리마스터링 되었고, 5월 1일 노동절에 극장에 개봉하였으며, 이후 iptv 서비스, 블루레이 출시 등이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16mm 필름으로 촬영된 <파업전야>는 매우 거친 영화이다. 한국 독립영화의 효시 중 하나로 불리는 작품인 만큼, 아마추어리즘이 돋보이기도 한다. 편집, 촬영, 후시녹음, 연기 등 기술적인 측면 대부분에서 완성도가 고르지 못하다. 하지만 그러한 거친 완성도가 도리어 영화의 절박함을 드러낸다. 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거쳤지만 여전히 노동자는 착취당하며, 가난한 삶과 고된 노동을 이어가야 하는 상황을 벗어나고자 투쟁에 나선 이들의 절박함. 이것이 고스란히 담긴 <파업전야>는 그야말로 화염병처럼 불타오르는 영화이며, 여전히 불타오르는 영화이다. 상영 전 무대인사에서 최경희 배우는 “30년 전과 지금의 상황은 별로 다르지 않지만, 30년 동안 배우들의 얼굴은 많이 달라졌다”라고 이야기를 꺼냈다. 여전히 현실 속 노동운동, 노동자에 대한 대우, 노사관계, 노동정책 등은 정체되어 있고, 투쟁하던 사람들의 시간은 흘러갔다.

 

 다만 <파업전야>는 한국 노동운동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고스란히 담아낸다는 점에서 아쉽다. 30년 전에 제작되었다는 것을 고려할 수야 있겠지만, 여전히 노동운동은 (물론 민주노총 등에서 인식개선에 힘쓰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지만) 남성 중심적이며 마초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 <파업전야> 속 다양한 인간군상들은 다양한 노동자들의 존재를 그려낸다. 그러나 극소수의 캐릭터로만 등장하는 여성노동자들은 대부분 남성 캐릭터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거나 뒷받침해주는 ‘성녀’로 그려진다. 더군다나 여성혐오적, 성차별적인 대사들을 끊임없이 뱉어대는 남성 캐릭터들은 2018년을 살아가는 관객들에게 꽤나 불편한 요소로 다가온다. 물론 <파업전야>는 여성노동자들의 삶 또한 그려낸다. 특히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시작과 그 전후로 끊임없이 투쟁을 이어온 여성노동자들의 존재를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 내에서 이들의 존재감은 미미하며, 남성 노동자들의 실없고 여성혐오적인 농담을 적당히 받아주는 역할 이상을 해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운동의 주축이 중공업에 종사하는 남성 노동자들로 옮겨온 이후 현재까지 이어지는 노동운동의 남성적 성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파업전야>는 제작과 상영 과정의 측면은 물론, 영화 내부적으로도 다양한 성취를 남긴다. 무엇보다 영화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투쟁이 되는 작품이기에 한국영화사와 노동운동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기도 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현재에도 불타오르는 화염병과 같은 작품이자,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2019년과 1990년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노동자에 대한 착취는 당시보다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은폐되고 조장되며, 이에 대한 투쟁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왜곡되기도 한다. 유령노조를 건설하고 ‘쁘락치’를 심는 노조파괴 방식 또한 그때와 지금이 별반 다르지 않다. 어쩌면 <파업전야>는 정말로 ‘노동자 해방’이 오지 않는 한 어디에선가 계속해서 상영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30년 사이 변화하고 발전된 가치관들에 대한 비판과 수용 또한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비판과 수용이 <파업전야>의 생명력을 진정으로 지속시킬 수 있는 동력이 되길 바란다.

 1952년 한국전쟁 당시, 8명의 북한 청춘이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로 영화 유학을 떠난다. 민족의 꿈을 품고 간 그들은 새로운 정치적 상황과 맞닥뜨린다. 스탈린의 독재와 개인숭배를 비판하는 후르시초프의 연설을 보기도 하고, 고려인을 비롯한 소련 내 소수민족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이주시키는 것을 목격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그곳에서 목숨을 걸고 김일성의 1인 독재를 비판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중앙아시아를 떠돌게 되기도 한다. 평론가이자 영화감독인 김소영의 <굿바이 마이 러브 NK: 붉은 청춘>은 <눈의 마음: 슬픔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과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를 잇는 ‘망명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영화는 영화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모스크바로 떠난 최국인, 한대용, 한진, 허웅배, 김종훈 등의 ‘모스크바 8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한국계’라는 범위가 포괄하는 이들은 아시아 곳곳에 퍼져있다. ‘조선족’으로 불리는 중국 동포나, ‘고려인’으로 불리는 중앙아시아의 사람들이 대표적일 것이다. 김소영의 ‘망명 3부작’은 그중에서도 ‘고려인’이 지닌 디아스포라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들의 디아스포라를 살펴보는 작업은 한반도의 남한과 북한을 중심으로 쓰인 ‘한국인’의 역사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한다. 특히 이 영화에서 다루는 ‘모스크바 8진’의 삶은 한국 현대사와 한국계 디아스포라의 역사이다. 이들은 한국전쟁에서 공을 세워 유학을 떠나게 되었지만, 결국 북한의 1인 독재 체제 공산주의의 모순점을 깨닫게 되고, 조국을 위해 조국을 비판하며 망명길에 오른 이들이다. 김소영은 이들이 남긴 영화를 비롯해, 희곡, 사진, 일기, 서신 등을 통해 이들의 삶을 재구성한다. 최근 복원된 최국인 감독의 <용의 해>는 조국을 떠나 중앙아시아 전역을 유랑하며 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굿바이 마이 러브 NK: 붉은 청춘>은 미학적으로도 훌륭한 완성도를 보여준다. 이들이 남긴 서신과 사진 등을 바탕으로 이들의 삶의 궤적을 재구성하고, 이들의 활동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특히 고려인 출신의 러시아 가수인 빅토르 최의 음악과, 거울을 사용한 조형물 앞에 선 생존한 ‘모스크바 8진’의 인물을 촬영한 영상이 함께 담기는 순간은 이들이 마주해야 했던 역사를 고스란히 관객에게 되돌려준다. 개인적으로 중앙아시아로 떠나게 된 한국계 사람들의 디아스포라나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때문에 배경지식이 부족한 상황에서 <굿바이 마이 러브 NK: 붉은 청춘>의 이야기를 온전히 다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영화는 많은 이들이 잊고 있었던, 혹은 알 기회조차 없었던 역사를 보여준다. 때문에 이 영화와 마주하는 것은, 단선적인 역사 쓰기에서 벗어난 새로운 방식의 역사 쓰기, 혹은 잊히거나 은폐된 역사를 발견하는 순간과 유사하다.

 중화권 SF 소설의 거장 류츠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유랑지구>가 개봉했다. 원래 중화권 외의 배급권을 넷플릭스가 챙겨가 아쉬웠는데, 결국 국내엔 개봉하게 되었다(넷플릭스에는 4월 30일 공개된다). <유랑지구>는 <아마겟돈>을 비롯해 수도 없어 쏟아져 나온 ‘전지구적 위기에서 미국이 지구를 구하는 영화’에서 미국을 중국으로 변경한 느낌의 작품이다.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가까운 미래, 태양의 팽창으로 지구가 사라질 위기해 처한다. 지구인들은 연합정부를 구성해 대응책을 내놓는다. 그것은 지구 곳곳에 ‘지구엔진’을 건설하여 지구를 통째로 다른 태양계로 옮기는 것이다. 무려 2500년이 걸리는 이 계획의 첫 관문은 태양계 행성 중 중력이 가장 강력한 목성을 지나치는 것이다. 하지만 목성의 중력이 예상에 비해 커지자, 지구는 목성과 충돌할 위기에 처한다. 우주정거장에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류배강(오경), 지구에 있는 그의 아들 류치(굴초소)와 송이(조금맥) 등은 여러 사람들과 힘을 합쳐 지구를 구하려 한다.

 

 익숙한 할리우드 영화들에 비해 다소 스케일이 거대하긴 하지만, 이야기 자체는 익숙한 할리우드 서사 그 자체이다. 가족을 부각하는 신파,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거대한 스케일의 비주얼, 적당히 배치되어 있는 소소한 반전 등 진부하다면 진부하고, 무난하다면 무난한 이야기가 <유랑지구>의 플롯이다. <유랑지구>가 할리우드 영화와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당연하게도 제작국가가 중국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지구의 중심은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다. 이는 사소한 포인트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영화에서 주로 사용되는 언어와 주요 캐릭터들의 인종, 심지어는 음악까지도 달라진다. 또한 할리우드 영화였다면 CNN이나 BBC 위주로 등장했을 뉴스 장면에서 NHK와 KBS, 그리고 러시아와 동남아의 방송이 나오는 장면이 꽤나 흥미롭게 다가왔다. 공전궤도를 벗어난 지구가 꽁꽁 얼어붙었기에 우리가 익히 아는 중국 대도시들의 모습이 제대로 등장하진 않지만, 베이징, 상하이 등 중국의 지명과 술라웨시, 싱가포르 등 동남아 국가의 지명이 영화의 주된 무대로 등장한다는 점 또한 약간의 새로움으로 다가온다. 또한 이를 구현하는 CG기술력은 이미 할리우드에 근접하고 있다. 이는 매끈한 스펙터클을 보기 위해 더 이상 할리우드 영화를 찾지 않아도 된다는 증거 중 하나이다. 더군다나 영화에서 분량이 있다고 할만한 백인은 류배강의 동료인 러시아 우주비행사 한 명뿐이다. 게다가 ‘미국뽕’ 대신 들어간 ‘중국뽕’을 ‘인류애’로 적당히 포장하는 솜씨 또한 할리우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아쉬운 지점은 분명 존재한다. 우선 할리우드 영화와 같은 전세계적인 스타 배우의 부재이다. 주연을 맡은 오경은 중화권에선 대형스타이지만, 전세계적으로는 아직 인지도가 부족하다. 거대한 블록버스터를 이끌어 갈 스타 배우의 부재는 조금 아쉽게만 느껴지는 지점이다. 그리고 각본에서의 구멍이나, CG 기술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널뛰는 편집 등은 계속해서 몰입을 방해한다. 이는 <신과 함께>시리즈에서 느꼈던 것과 유사하다. 기술력은 준비되었지만, 이를 적절히 사용할 수 있는 연출가를 비롯한 헤드스텝들이 없는 것이다. 종종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난잡한 편집은 확실히 영화에 몰입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 그럼에도 <유랑지구>는 중국의 블록버스터가 보여줄 수 있는 새로움, ‘굳이 할리우드가 아니어도 된다’는 것을 어느 정도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자연스럽게 지구의 중심을 동아시아로 재편해버리는 영화를 중국이 아니면 또 어디가 만들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유랑지구>를 보는 2시간가량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스포일러 포함

 대원(김윤석)과 미희(김소진)는 불륜관계이다. 대원의 딸 주리(김혜준)와 미희의 딸 윤아(박세진)는 이를 알고 있다. 남편이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미희는 대원의 아이를 임신했다. 어느 날 윤아가 주리의 엄마 영주(염정아)에게 그 사실을 알려버린다. 불륜사실을 모두가 알게 되면서 주리와 윤아의 생활은 복잡해진다. <미성년>은 김윤석이 2014년 우연히 본 창작연극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원작자 이보람 작가와 함께 공동으로 각본을 각색하고, 처음으로 연출을 맡은 영화 <미성년>의 시놉시스는 어딘가 익숙한 막장드라마의 느낌이 난다. 하지만 영화는 자극적인 요소에 몰두하지 않는다. 대신 기괴하게 다섯 사람의 삶을 따라간다.

 <미성년>은 아이러니의 영화이다. 불륜관계에 있는 각자의 아빠와 엄마의 딸인 주리와 윤아는 서로 관계 맺을 수 없는 관계이지만 단짝과 유사한 관계가 된다. 아빠인 대원은 주리를 피해 도망가지만, 주리와 윤아는 원을 그리며 다시 마주한다. “우리 또 보지 말자”라는 대사가 반복되지만 주리와 윤아는 계속 보게 된다. 영화 속에서 성인인 영주와 미희는 눈물을 보이지만 미성년인 주리와 윤아는 울지 않는다. 나이와 몸은 성인이지만 누가 정말 ‘어른’인지, ‘성년’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성년’들은 사건을 벌이고, ‘미성년’들은 사건을 수습하려 한다. <미성년>의 아이러니들을 만들어내는 인물은 대원이다. 대원은 모든 일의 발단이지만 극 밖으로 도망쳐버린다. 주요 인물 중 유일하게 남성인 대원은 아이러니를 생산한다. 나머지 네 명의 여성들은 그 아이러니 속에서 살아간다. <미성년>은 아이러니로 추동될 수밖에 없는 삶의 조건들, 특히나 여성들의 이야기이기에 주어진 삶의 ‘설정’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낸다. 아이러니는 사후적으로 주어진 조건이 아니다. 영화는 외부적 힘에 의해서 삶에 설정된 아이러니를 살아가는 여성들을 보여준다.

 감독 김윤석은 자신이 출연했던 수많은 영화들, 가령 <추격자>, <거북이 달린다>, <남쪽으로 튀어>, <완득이>, <극비수사> 등의 작품들 속 좋은 쇼트들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연출 데뷔작에 활용한다. 때문에 종종 연출이 튀는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잘 짜인 장면들로 영화가 이어진다. 사실 촬영과 미장센의 측면보다 각본과 연기의 측면이 더욱 강력하게 작용하는 작품이다. 김혜준, 박세진, 염정아, 김소진의 연기는 아이러니를 상대하며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반대로 (아무도 역할을 선택하지 않아 직접 대원 역을 맡게 되었다는) 김윤석의 연기는 자신을 완벽하게 내려놓았다. 연출자이자 배우인 김윤석은 스스로를 극 밖으로 몰고 간다. <미성년>의 이야기 속에서 가장 ‘미성년’인 중년 남성은 아이러니를 마주 대하고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도 모르게 삶의 아이러니를 생성하고 있을 뿐이다.

아이러니를 통해 작동하는 세상에서, ‘성년’은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추상적인 목적지이다. 나이라던가 삶의 궤적 따위는 ‘성년’의 증거가 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미성년’의 삶을 산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미성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야기의 가장 큰 피해자라고 볼 수 있는 대원과 미희 사이의 아이는 미숙아인 상태로 태어나서 그 상태로 죽는다. 미숙아인 아이는 존재 자체가 아이러니이다. 대원과 미희 사이의 아이이지만, 영주가 미희를 밀침으로써 태어났고, 주리와 윤아라는 두 누나를 가진 존재, 그 자체로 아이러니의 복잡성을 드러내는 존재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주리와 윤아는 죽은 동생의 뼛가루를 들고 대원과 미희가 사진을 찍은 놀이동산에 찾아간다. 이들은 폐장된 놀이동산에 3명 분의 입장료를 내고 움직이지 않는 놀이기구에서 신나게 논다. 주리와 윤아는 그곳에서 죽은 동생의 뼛가루를 우유에 타서 나눠 마신다. 많은 관객들이 언급하는 이 충격의 엔딩은 아이러니로 가득한 삶, 그 순간들을 거친 두 사람이 지닌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또 보지 말자”라고 반복해서 말해도 계속해서 마주해야만 하는 삶에서 주리와 윤아는 극복될 수 없는 아이러니 자체를 받아들여야 함을 체화한다. 뼛가루를 나눠 마시는 둘의 선택은 이를 직접적으로 은유한다. 이 세계에서 성년은 절대 당도할 수 없는 추상적인 목적지이고, 거기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은 죽어서도 미성년일 수밖에 없다. <미성년>은 그렇게 ‘미성년’으로서의 삶을 직시한다. 영화 속 성년들은 눈물을 흘렸지만 미성년들은 순간과 상대방을 끝까지 응시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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