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석' 태그의 글 목록 :: 영화 보는 영알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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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원(김윤석)과 미희(김소진)는 불륜관계이다. 대원의 딸 주리(김혜준)와 미희의 딸 윤아(박세진)는 이를 알고 있다. 남편이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미희는 대원의 아이를 임신했다. 어느 날 윤아가 주리의 엄마 영주(염정아)에게 그 사실을 알려버린다. 불륜사실을 모두가 알게 되면서 주리와 윤아의 생활은 복잡해진다. <미성년>은 김윤석이 2014년 우연히 본 창작연극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원작자 이보람 작가와 함께 공동으로 각본을 각색하고, 처음으로 연출을 맡은 영화 <미성년>의 시놉시스는 어딘가 익숙한 막장드라마의 느낌이 난다. 하지만 영화는 자극적인 요소에 몰두하지 않는다. 대신 기괴하게 다섯 사람의 삶을 따라간다.

 <미성년>은 아이러니의 영화이다. 불륜관계에 있는 각자의 아빠와 엄마의 딸인 주리와 윤아는 서로 관계 맺을 수 없는 관계이지만 단짝과 유사한 관계가 된다. 아빠인 대원은 주리를 피해 도망가지만, 주리와 윤아는 원을 그리며 다시 마주한다. “우리 또 보지 말자”라는 대사가 반복되지만 주리와 윤아는 계속 보게 된다. 영화 속에서 성인인 영주와 미희는 눈물을 보이지만 미성년인 주리와 윤아는 울지 않는다. 나이와 몸은 성인이지만 누가 정말 ‘어른’인지, ‘성년’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성년’들은 사건을 벌이고, ‘미성년’들은 사건을 수습하려 한다. <미성년>의 아이러니들을 만들어내는 인물은 대원이다. 대원은 모든 일의 발단이지만 극 밖으로 도망쳐버린다. 주요 인물 중 유일하게 남성인 대원은 아이러니를 생산한다. 나머지 네 명의 여성들은 그 아이러니 속에서 살아간다. <미성년>은 아이러니로 추동될 수밖에 없는 삶의 조건들, 특히나 여성들의 이야기이기에 주어진 삶의 ‘설정’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낸다. 아이러니는 사후적으로 주어진 조건이 아니다. 영화는 외부적 힘에 의해서 삶에 설정된 아이러니를 살아가는 여성들을 보여준다.

 감독 김윤석은 자신이 출연했던 수많은 영화들, 가령 <추격자>, <거북이 달린다>, <남쪽으로 튀어>, <완득이>, <극비수사> 등의 작품들 속 좋은 쇼트들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연출 데뷔작에 활용한다. 때문에 종종 연출이 튀는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잘 짜인 장면들로 영화가 이어진다. 사실 촬영과 미장센의 측면보다 각본과 연기의 측면이 더욱 강력하게 작용하는 작품이다. 김혜준, 박세진, 염정아, 김소진의 연기는 아이러니를 상대하며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반대로 (아무도 역할을 선택하지 않아 직접 대원 역을 맡게 되었다는) 김윤석의 연기는 자신을 완벽하게 내려놓았다. 연출자이자 배우인 김윤석은 스스로를 극 밖으로 몰고 간다. <미성년>의 이야기 속에서 가장 ‘미성년’인 중년 남성은 아이러니를 마주 대하고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도 모르게 삶의 아이러니를 생성하고 있을 뿐이다.

아이러니를 통해 작동하는 세상에서, ‘성년’은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추상적인 목적지이다. 나이라던가 삶의 궤적 따위는 ‘성년’의 증거가 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미성년’의 삶을 산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미성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야기의 가장 큰 피해자라고 볼 수 있는 대원과 미희 사이의 아이는 미숙아인 상태로 태어나서 그 상태로 죽는다. 미숙아인 아이는 존재 자체가 아이러니이다. 대원과 미희 사이의 아이이지만, 영주가 미희를 밀침으로써 태어났고, 주리와 윤아라는 두 누나를 가진 존재, 그 자체로 아이러니의 복잡성을 드러내는 존재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주리와 윤아는 죽은 동생의 뼛가루를 들고 대원과 미희가 사진을 찍은 놀이동산에 찾아간다. 이들은 폐장된 놀이동산에 3명 분의 입장료를 내고 움직이지 않는 놀이기구에서 신나게 논다. 주리와 윤아는 그곳에서 죽은 동생의 뼛가루를 우유에 타서 나눠 마신다. 많은 관객들이 언급하는 이 충격의 엔딩은 아이러니로 가득한 삶, 그 순간들을 거친 두 사람이 지닌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또 보지 말자”라고 반복해서 말해도 계속해서 마주해야만 하는 삶에서 주리와 윤아는 극복될 수 없는 아이러니 자체를 받아들여야 함을 체화한다. 뼛가루를 나눠 마시는 둘의 선택은 이를 직접적으로 은유한다. 이 세계에서 성년은 절대 당도할 수 없는 추상적인 목적지이고, 거기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은 죽어서도 미성년일 수밖에 없다. <미성년>은 그렇게 ‘미성년’으로서의 삶을 직시한다. 영화 속 성년들은 눈물을 흘렸지만 미성년들은 순간과 상대방을 끝까지 응시한 것처럼 말이다.

장준환 감독은 계속해서 386세대의 감성, 부채의식, 폭력성 등을 영화에 담아왔다. 데뷔작인 <지구를 지켜라!>와 10년 만에 내놓은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는 폐쇄된 공간을 통해 그의 중요한 테마들을 담아낸 작품이었다. 장준환 감독은 이제 직접적으로 80년대의 한국을 담아낸다. <1987>은 영화의 제목 그대로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부터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이한열의 죽음까지를 다룬 작품이다. 대공수사처장 박처원(김윤석), 그의 밑에서 일하던 조한경 반장(박희순), 박종철의 부검을 지시한 최환 검사(하정우), 이를 보도한 동아일보 윤상삼 기자(이희준)와 수감되어 있던 이부영(김의성), 영등포 교도소의 간수인 한병용 교도관(유해진)과 안유(최광일), 장세동 안기부장(문성근), 강민창 치안본부장(우현), 김정남(설경구), 김승훈 신부(정인기) 등의 실존인물들이 본명으로 등장한다. (한병용 만이 실존했던 두 인물의 이야기를 하나로 합쳐 만들어낸 캐릭터이다) 그만큼 <1987>은 6월 항쟁이 벌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세세하고 꼼꼼한 고증을 통해 그려낸다. 동시에 연희(김태리)라는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외부에 있던 개인이 어떻게 6월 항쟁에 동참하게 되는지를 다룬다. 여진구와 강동원이 각각 박종철과 이한열로 특별출연했다. 그간 한국의 상업영화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주조연급 배우들이 모인 작품이기도 하다.



 <1987>은 한 개인에게 집중하여 사건을 보여주는 대신, 사건을 중심에 놓고 이를 따라가는 각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장훈 감독의 <택시운전사>가 개인의 시선을 중심에 놓고 사건을 관찰하듯이 따라가는 작품이었다면, <1987>은 드라마 <제5 공화국>처럼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며 마치 옴니버스처럼 각 인물들의 면면을 관찰하는 식이다. 비슷한 영화를 찾아보자면용산참사 이후의 재판 과정을 다룬 영화 <소수의견>이 떠오른다. 인물 대신 사건을 중심에 놓고, 악인과 정의로운 누군가, 그 경계 혹은 외부의 인물이 사건을 통해 각성하는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 <1987>이 선택한 방식이다. 이러한 선택이 <1987> 안에서 원활하게 작동했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영화는 분명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중심 사건으로 채택하고 있다.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은 촘촘하게 129분의 짧지 않은 러닝타임을 채운다. 문제는 각 인물들에게 관객이 감정적으로 이입할 여지를 불필요할 정도로 많이 남겨둔다는 것이다. 가령 한병용이 등장할 땐 한병용의 상황에, 연희가 등장할 땐 연희에게, 윤상삼 기자의 이야기에선 그에게 각각 몰입하게 된다. 박처원이나 조한경 반장이 등장할 때면 그들을 향한 분노에 파묻힌다. 때문에 핸드헬드 촬영과 익스트림 클로즈업 샷들로 당시의 상황과 감정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은 도리어 영화를 산만하게 한다. <1987>이 <택시운전사>처럼 한 인물의 이야기에 집요하게 집중했다면 모를까, <도둑들>이나 <암살>과 같은 앙상블 연기가 아닌 이상 이러한 연출은 패착에 가깝다. 영화는 어떤 냉정함을 유지하면서 인물들을 관찰하고, <레미제라블>과 같은 뮤지컬 시퀀스처럼 연출되는 마지막 집회 장면의 클라이맥스에서 관객을 끓어오르게 해야 했다.



 아무래도 같은 해에 나온 영화이기에 <택시운전사>와 <1987>의 비교는 어쩔 수 없는 부분처럼 느껴진다. 80년 5월의 광주와 87년의 서울, 그리고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이어지는 촛불혁명을 지켜보고 기억하고 배운 사람들에게 두 편의 영화는 같은 사건과 시기를 다룬 다른 영화들과 다른 감정을 가지게 한다. 어찌 보면 두 영화와 관객들은 서로 다른 광장을 유사한 감정으로 기억하고 있다. 다른 부분이 있다면 앞서 말한 시선의 차이일 것이다. 관객들은 이미 촛불의 광장을 경험했다. 두 영화에 담긴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양상의 광장 일지는 몰라도, 시민들이 시청 앞 혹은 광화문을 가득 매운 사진을 봤을 때의 감정은 질적으로 동일하다. <택시운전사>는 체험보단 관찰의 시선으로 광장을 담는다. 외지인과 외국인이라는 설정은 이러한 관찰의 태도를 견지할 수 있는 설정이다. 아쉽게도 영화의 후반부에서 이러한 태도가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1987> 역시 관찰의 태도를 보인다. 동시에 연희라는 캐릭터를 통해 관찰을 넘어 참여를 유도한다. 아쉬운 점은 앞서 언급한 산만함이다. 정리되지 못한 감정선은 인물들에 대한 관객의 감정적 동의를 성급하게 이끌어낸다. 분명 클라이맥스가 존재하는 영화이지만, 각 캐릭터의 클라이맥스가 러닝타임 중간중간 등장하기도 하고, 너무나도 다양한 인물과 각 배우의 존재감에 캐릭터 간 비중이 무너지기도 한다. 한 인물의 이야기가 전개될 때 다른 인물은 영화 속에서 아예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결국 <1987>은 관찰이라는 태도를 유지하는데 실패한다. 대신 영화는 연희로 대표되는 해당 시대정신에 무지한 관객들을 감정적으로 계몽시키려 한다. 이러한 태도는 단순히 6월 항쟁과 촛불혁명을 상기시키는데 그친다. 더군다나 각성하게 되는 인물이 영화 내에서 유일하게 캐릭터라고 부를 수 있는 여성인 연희에 한정된다는 점에서 계몽적인 태도가 더욱 도드라지게 느껴진다. 영화가 연희를 다루는 태도는 촛불정국에서 광장으로 나선 여성과 청소년들이 들었던 언어들을 상기시킨다. “여자/청소년이 이런 곳까지 나오다니 기특하다, 장하다” “너희들까지 이런 곳으로 나오게 만들어 미안하다” “이러한 시국에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냐” 러닝타임이 흘러갈수록 변해가는 영화의 태도는 영화 속에 분명히 존재했던 여성과 학생들을 주체의 위치에서 배제시킨다. 어쩌면 누군가는 연희가 어느 남성의 도움을 받아 버스 위에 올라서서 주먹을 치켜드는 장면을 보고, 386세대가 없었다면 연희와 같은 사람들이 각성할 수 없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386세대가 다음 세대들에게 손을 뻗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각자의 감상이야 조금씩 다르겠지만, 그 감상들은 결국 386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지닌 계몽적, 혹은 시혜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결말로 귀결된다. 그렇기에 결국 장준환 감독 또한 그 세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작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앞선 두 작품이 386세대의 폐쇄성과 폭력성을 날이 선 태도로 드러내고 일정 부분 비판하는 영화였다면, <1987>의 언어는 위와 앞서 언급한 광장 속에서 여성/청소년들이 들었던 것과 크게 결이 다르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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