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2021' 카테고리의 글 목록 (5 Page) :: 영화 보는 영알못

 라라(빅터 폴스터)는 발레리나를 꿈꾸고 있다. 아버지, 남동생과 함께 사는 그는 벨기에 최고의 무용학교에 진학하게 되고, 진학을 위해 가족 모두가 학교 인근으로 이사하게 된다. 남들보다 뒤늦게 발레를 시작했기에 부족한 면이 많지만, 라라에게서 인내와 가능성을 발견한 학교의 선생들은 그를 적극적으로 돕는다. 방과 후 홀로 라라의 연습을 도와주기도 한다. 라라의 아빠는 라라가 트랜지션을 받는 것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라라는 호르몬 치료를 시작했지만 빠르게 변화하지 않는 몸을 답답해하고, 매일같이 거울로 가득한 연습실에서 자신의 몸을 보며 혹독한 훈련을 거쳐야 하는 라라의 내면은 점점 혼란스러워진다. 루카스 돈트의 데뷔작 <걸>은 칸 영화제에서 그해 출품된 퀴어영화를 대상으로 삼는 퀴어종려상을 수상했던 작품이다. 영화에 크레딧에 올라가진 않았지만, 루카스 돈트는 실제로 트랜스여성 발레리나인 노라 몽세쿠흐의 이야기를 접한 뒤 그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각본을 썼다고 한다.

 <걸>이 북미에서 공개되었을 때 꽤나 많은 비판이 쏟아졌다. 평론가 올리버 휘트니는 영화의 카메라가 라라의 몸, 특히 성기 부분에 집중하고 있으며, 영화 후반부의 특정 장면을 “트랜스 트라우마 포르노”라 부르며 강하게 비판한다. 게다가 루카스 돈트는 물론 라라를 연기한 빅터 폴스터가 시스젠더 남성이라는 점 또한 하나의 비판 요소가 되었다. 노라 몽세쿠흐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걸>의 이야기는 시스젠더 남성의 환상이 아니며, 자신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라 말했다. 물론 몽세쿠흐의 말이 휘트니의 비판을 완전히 무력화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몽세쿠흐의 말과 존재는 <걸>이 정당화되는 것에 도움을 준다. 루카스 돈트는 빅터 폴스터를 캐스팅한 이유에 대해 다양한 성별의 배우 수십 명이 오디션에 참가했지만 연기와 춤 모두를 만족시키지 못했고, 대신 기존에 캐스팅 물망에 있던 댄서들 중 폴스커를 발견해 캐스팅했다고 밝혔다. 그와 더불어 몽세쿠흐가 다녔던 병원 젠더 센터의 자문을 받아 트랜지션 과정 중에 있을 트랜스 청소년들이 영화에 참여하는 것은 그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조언을 구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걸>은 몸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영화다. 라라는 발레리나를 꿈꾼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발레이기에 그는 더욱 혹독한 훈련을 거쳐 그들을 쫓아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라라는 매일같이 자신의 몸을 본다. 영화의 오프닝은 잠을 자던 라라를 남동생이 깨우는 장면이다. 라라는 침대에서 스트레칭을 하면서 일어난다. 학교에 간 라라는 항상 자신의 몸을 본다. 몸을 극한의 상태로 훈련해야 하는 발레의 특성은 그의 신체적 디스포리아를 자극한다. 탈의실에서, 연습실의 거울에서, 샤워실에서, 딱 붙는 발레복에서, 라라는 자신과 타인의 몸을 본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발레를 연습하는 라라를 담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거칠어진다. 카메라는 춤을 촬영한다기보단 고행에 가까운 발레 훈련과 트랜지션이 진행 중인 라라의 신체를 찍고 있다. 학교 동급생의 생일파티 장면을 제외하면 라라가 타인으로부터 직접적인 혐오 발화를 듣는 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영화에 묘사되는 라라의 상황은 그렇게 나쁘지 않다. 아버지는 트랜지션을 적극 지지하고, 학교의 선생들은 그가 다른 학생들을 따라잡는 것을 돕고, 학교엔 성중립 화장실이 있으며, 돈이 부족해 학비나 트랜지션 비용을 지불하지 못하는 상황도 아니다. 하지만 그의 신체를 향한 모종의 혐오들은 배려의 말속에 숨겨진 함의로, 배제의 말속에 암시된 것으로 다가온다. 

 <걸>이 주목하는 것은 그 속에서 고뇌하는 라라의 모습이다. 사실 자신의 현재에 대해 고민하는 라라의 모습은 여느 사춘기 성장영화 속 주인공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의 플롯 또한 그러한 영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주인공은 자신이 꿈꾸는 것을 위해 움직이고, 행동에 옮기고, 무언가 잘 안 풀리고, 정신적 임계점이 찾아오고,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발산한다. 때문에 <걸>은 익숙한 성장영화의 플롯 안에서 라라만이 지닌 내면의 혼란과 고민을 풀어내는 작품이다. 나도 휘트니가 지적한 영화 후반부의 장면이 꼭 필요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바깥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맞서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트랜스 캐릭터들의 영화들이 있다면, 그 반대에서 내면의 태풍에 대한 영화의 존재 또한 소중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걸>은 의미를 지닌다.

 최초로 히틀러와 괴벨스를 인터뷰한 외신기자 가레스 존스(제임스 노턴)는 소련의 자금출처에 의문을 갖고 취재를 시작한다. 이를 위해 모스크바로 향해 퓰리처상을 받은 뉴욕타임스의 모스크바 지국장 월터 듀란티(피터 사스가드)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그는 이를 거절한다. 하지만 존스는 듀란티의 밑에서 일하는 기자 에이다 브룩스(바네사 커비)를 통해 취재의 실마리를 발견하고, 소련 당국의 눈을 피해 우크라이나의 공동농장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그가 목격한 것은 혁명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기근과 혹한에 죽어가는 사람들이었고, 그는 이를 폭로하려 한다. 존스의 폭로기사는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의 바탕이 된다. 연출을 맡은 아그네츠카 홀란드는 국내에서 <토탈 이클립스>나 <카핑 베토벤> 등 할리우드에서 작업한 작품들로 알려져 있지만, 안제이 바이다의 <단톤>의 각본을 썼고 나치 독일부터 팔레스타인까지 유럽을 둘러싼 이슈들을 폭넓게 다루는 <유로파 유로파>부터 ‘에코 페미니즘 블랙코미디 블록버스터’라 자칭하는 최근작 <스푸어>까지 다양한 영화를 연출해온 폴란드의 거장이다. 동구권 출신 감독으로서 그가 스탈린과 결부된 이야기를 다루는 것은 어찌 보면 다소 뒤늦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미스터 존스>가 다루는 ‘언론’에 대한 이야기는 현재의 러시아, 더 나아가 우경화되는 서구권 전체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해 볼 수 있으며, 이는 최근 할리우드나 유럽에서 쏟아져 나오는 여러 영화들의 경향과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다.

 <미스터 존스>에서 흥미로운 것은 세 번 등장하는 기차 시퀀스다. 존스가 처음 모스크바로 향하는 길에 등장한 기차 시퀀스는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숏의 지속시간도 짧고, 지가 베르토프의 영화처럼 달리는 기차의 모습을 인간의 눈이 닿을 수 없는 구도로 촬영하고, 그것을 유리창에 비쳐 분열된 존스의 얼굴과 디졸브시키기도 한다. 더 나아가 존스 및 기차의 모습과 함께 공장에서 노동하는 소련 노동자들의 모습이 담긴 아카이브 푸티지가 삽입된다. 존스가 우크라이나의 스탈리노로 향하는 기차 시퀀스에서 그는 자신을 감시하는 이와 함께한다. 이 장면에서도 앞선 기차 시퀀스의 편집과 유사한 리듬과 디졸브 등의 기법이 등장하지만 아카이브 푸티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말한 뒤 옆에 있던 우크라이나 주민들이 이용하는 기차로 숨어든 존스가 목격하는 것은 혁명을 위해 힘차게 노동하는 노동자들이 아닌, 먹고 버린 오렌지 껍질에 달려들어 그것을 주워 먹는 빈민들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기차 시퀀스는 소련 경찰에게 붙잡혀 모스크바로 돌아온 존스가 자신이 본 것을 발설하지 않겠다 약속하고 런던으로 돌아가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단순하게 화면에서 멀어지는 기차를 고정된 카메라로 찍은 하나의 숏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스터 존스>의 세 기차 시퀀스는 존스의 심리적 변화를 드러낸다. 존스의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에서 교사로 일했으며, 종종 그곳의 곡창지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고 언급된다. 때문에 그가 처음 소련을 찾을 때 기대했던 것은 아카이브 푸티지로 등장했던 것과 같은 노동자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목격한 것은 동료가 소련당국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정황 증거, 소련에게 협력하며 마약과 섹스로 가득한 파티를 벌이는 듀란티, 그리고 죽어가는 인민들이다. 그가 우크라이나 인민들이 이용하는 기차를 타자마자 영화의 편집 리듬은 느려진다. 똑같이 핸드헬드로 촬영되고 있음에도 숏의 길이가 늘어난다. 이는 추위와 굶주림을 직접 경험하며 도착한 스탈리노 역에서 내리자마자 동사한 시체를 목격한 존스의 심리를 반영한다. 존스의 시점숏은 등장하지 않지만, 관객은 충격받은 존스의 시점에서 당시의 우크라이나를 체험하게 된다. 때문에 고생 끝에 런던으로 돌아가는 그의 모습이 멀리 사라지는 기차를 담은 숏 하나로 마무리되는 것은, 그것을 전달해야 한다는 일념 이외엔 그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자신이 본 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에는 상당한 위험부담이 뒤따른다. 그의 폭로에 반대하는 것은 소련과 소련의 협력자 듀란티뿐만이 아니다. 1차 대전과 대공황 이후 극심한 경제적 위기엔 놓인 영국의 정치인들은 소련을 적으로 돌리지 않기 위해 존스의 폭로를 막고자 한다. 영화에서는 존스가 고향 웨일스로 돌아가 지역신문사에서 일하다 그곳의 별장을 찾은 언론재벌 윌리엄 허스트를 만나 대대적인 폭로기사를 쓰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 과정에서 존스는 동네 아이들에게 “미친 사람”이라며 놀림받기도 한다. 권력이 자신이 포섭하지 못한 누군가를 광인으로 몰아가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벌어지는 일이다. 그럼에도 존스는 자신이 본 것을 분석해 기사로 작성한다. <미스터 존스>는 그 치열한 과정을 착실히 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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