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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완이 총괄하는 ‘컨저링 유니버스’의 신작 <요로나의 저주>를 보고 왔다. <컨저링> 시리즈에 등장한 ‘우는 유령’ 요로나(마리솔 라미레즈)를 주연으로 삼은 프리퀄 겸 스핀오프인 작품이다. 영화는 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자 아동복지국에서 일하는 애나(린다 카델리니)가 자신의 두 아이 크리스(로만 크리스토우)와 샘(제이니-린 킨첸)을 요로나로부터 구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시놉시스만 본다면 역시 싱글맘을 주인공으로 삼은 <바바둑>이나 독박육아/가사노동을 담은 <어둠의 여인> 등의 여성주의적 함의가 들어간 호러영화가 연상된다. 하지만 <요로나의 저주>는 그렇게 흘러갈 수 있는 소재를 ‘컨저링 유니버스’의 스타일 안에 포섭하려다 절반의 성공만을 거두는 작품이다.

 우선 <더 넌>을 통해 낮아질 대로 낮아진 기대치보단 즐겁게 볼 수 있는 장르영화였다.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서운 영화’라는 카피가 무색하게 요로나의 등장은 언제나 점프스케어를 동반하고, 오컬트 영화에 관심 있는 관객이라면 흥미로워할 장치들이 여럿 등장한다. <애나벨>에 등장했던 페레즈 신부(토니 아멘돌라)와 애나벨의 카메오 출연 또한 반갑다. 대부분의 장면이 어둡지만, 단지 어둡기만 한 영화들처럼 어둠이 단점으로만 적용하지 않는다. 어둠에서 나타나는 요로나의 특성을 어느 정도 살린 연출이 돋보인다. 또한 싱글맘/워킹맘으로서 애나가 겪는 삶을 보여주는 초반부의 몇몇 묘사와, 아동복지국에서 일한다는 설정을 통해 드러나는 개연성과 캐릭터가 어느 정도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전직 신부인 퇴마사 라파엘(레이몬드 크루즈)이 등장하면서 많은 장점들이 상쇄된다. 헛웃음을 유발하는 유머들은 웃어넘길 수 있지만, ‘컨저링 유니버스’의 전통이 된 악령과 물리적으로 사투를 벌이는 장면에선 어김없이 실소가 터진다. 왜 ‘컨저링 유니버스’의 영화들은 언제나 악령들과 물리적으로 격투를 벌이고, 물리적인 방법으로 퇴마 하는 것일까? 다행히도 <더 넌>에서 총으로 수녀귀신을 쏴 죽이는 수준의 어처구니없음이나 <애나벨: 인형의 주인>의 레슬링에 버금가는 몸싸움 수준의 장면은 없지만, 적당히 잘 쌓아오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이상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특히 요로나를 막기 위해 라파엘이 동원한 여러 주술적인 방법이 결국 물리적인 퇴마로 이어지는 것은 아쉽기만 하다. 그럼에도 <더 넌>이나 <애나벨>보단 즐길 수 있는 작품이지만 말이다.

제임스 완의 <컨저링>으로 시작한 ‘컨저링 유니버스’의 4번째 작품이다. 극 중 시간 순서로는 가장 앞선 시대에 위치한 작품이며, 전작 <애나벨>의 프리퀄인 형식을 취한다. 인형에 애나벨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 인형에 악마가 깃들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작품이다. 여러 단편 작품과 그중 한 편을 장편화한 <라이트 아웃>을 통해 호러 장르의 연출력을 인정받은 데이비드 F. 샌드버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시끄러운 호러 영화를 보면서도 잠들 수 있다’라는 명제를 참으로 만들어준 <애나벨>은 거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실망스러운 작품이었지만, 연출자의 재능이 한껏 발휘된 이번 작품은 컨저링 유니버스의 작품 중 (<인시디어스> 시리즈까지 포함해도) 가장 공포에 충실한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서프라이즈 시퀀스를 잔뜩 집어넣어 공포감을 조성하는 대신 관객을 놀라게 함으로써 공포를 느낀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여타 호러 영화들과는 다르게, <애나벨: 인형의 주인>은 관객을 놀라게 할 타이밍을 철저하게 계산해서 공포감을 조성한다. 81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으로 밀도 있게 소재를 이끌어가던 <라이트 아웃>에 비해 109분의 <애나벨: 인형의 주인>은 조금 늘어지는 느낌이 있긴 하지만, 이만하면 여름 한 시즌을 족히 보낼 수 있는 웰메이드 오락영화가 아닐까?



 영화는 전작보다 24년 전의 시점에서 시작한다. 인형을 만들어 파는 사무엘(앤서니 라파글리아)과 에스더 멀린스(미란다 오토) 부부는 딸 비(사마라 리)를 교통사고로 잃고 만다. 그로부터 12년 뒤, 멀린스 부부는 과거를 잊기 위해 소녀원의 고아 소녀들을 집으로 들인다. 소아마비로 인해 한쪽 다리가 마비된 재니스(탈리타 베이트먼)를 비롯해 그의 단짝인 린다(룰루 윌슨) 등 6명의 소녀와 그들을 지도하는 수녀 샬롯(스테파니 시그만)이 멀린스 부부의 집에서 살게 된다. 건강이 악화된 에스더는 방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사무엘은 비가 쓰던 방문을 잠근 채 들어가지도 못하게 막는다. 어느 날, 재니스는 비의 방에서 어떤 소리를 듣고 방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방 안에서 우연히 흰 드레스를 입은 인형을 찾게 되고, 인형과 연관된 것 같은 초자연적이고 사악한 사건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애나벨: 인형의 저주>가 공포를 만들어내는 장면에서 주목할 점은 인형이 움직이는 장면을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형을 공포의 대상으로 삼는 영화들에서 으레 등장하는, 목이 돌아가거나 인물을 향해 공포스럽게 걸어오거나 표정을 바꾼다거나 하는 장면들이 없다. <토이 스토리>에서 우디가 목을 돌리며 말을 하자 소스라치게 놀라던 시드의 모습을 생각해보자. 인형 혹은 장난감이 공포의 소재가 되는 이유는 움직여선 안 될 것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애나벨: 인형의 저주>는 이를 영리하게 활용한다. 인형이 움직이는 장면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인형과 그것으로부터 숨은/그것을 지켜보는 인물을 숏-리버스 숏으로 담아내며 인형이 움직였음을 관객에게 통보한다. 인형이 움직이는 순간은 관객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한다. 영화는 인형이 등장한 순간부터 영화의 마지막까지 애나벨의 움직임을 상상하도록 유도한다. 인형을 움직이는 악마의 존재는 어둠 속에 남겨둔 채 정지해 있지만 움직이는 인형을 집요하게 보여줌으로써 공포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진득하면서도 날카롭게 조성된 사운드와, 탈리타 베이트먼(이번 영화 최고의 발견이다)을 비롯한 아역 배우들의 연기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감독의 의도를 말끔하게 수행한다.



 다만 호러 영화 치고는 조금 길게 느껴지는 109분의 러닝타임은 어딘가 늘어진다는 인상을 준다. 아마 컨저링 유니버스에 속한 작품으로써 전작들의 설정과 이야기의 통일성을 맞추기 위해 늘어난 부분들이 아닐까 싶다. 가령 <애나벨>과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영화의 엔딩은 시리즈를 본 관객이라면 알아챌 수 있는 포인트이지만 그렇지 않은 관객에게는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장면이다. 쿠키영상을 통해 이 장면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악마의 얼굴이 드러나는 찰나의 한 두 쇼트이다. 철저히 어둠 속의 존재로써 인형을 움직이던 악마의 얼굴이 분장한 배우의 얼굴임이 드러나는 순간은 0.1초 단위의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드러나서는 안 될 영화의 치부를 발견한 듯한 기분은 순간적으로 공포로의 몰입을 깨트린다.



 몇몇 단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우스 호러와 오컬트라는 하위 장르는 한국의 관객이 쉽게 감정이입할 수 있는 장르도 배경도 아니다. 심지어 이름이 알려진 배우가 단 한 명이라도 출연하는 것조차 아니다. 그럼에도 <애나벨: 인형의 주인>은 자신의 목표를 알고, 목표를 수행하며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더군다나 <맨 인 더 다크>와 같은 소수자를 손쉽게 괴물화/악마화함과 동시에 소수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작품이 큰 호평을 받는 (나도 처음엔 호평을 보냈지만 곰곰이 생각해볼수록 불쾌한 작품이다) 지금의 메이저 호러 영화판에서, 이러한 성향을 가장 적게 드러내면서도 효과적으로 공포를 자아내는 데이비드 F. 샌드버그와 같은 감독의 존재는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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