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태그의 글 목록 :: 영화 보는 영알못

 1952년 한국전쟁 당시, 8명의 북한 청춘이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로 영화 유학을 떠난다. 민족의 꿈을 품고 간 그들은 새로운 정치적 상황과 맞닥뜨린다. 스탈린의 독재와 개인숭배를 비판하는 후르시초프의 연설을 보기도 하고, 고려인을 비롯한 소련 내 소수민족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이주시키는 것을 목격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그곳에서 목숨을 걸고 김일성의 1인 독재를 비판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중앙아시아를 떠돌게 되기도 한다. 평론가이자 영화감독인 김소영의 <굿바이 마이 러브 NK: 붉은 청춘>은 <눈의 마음: 슬픔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과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를 잇는 ‘망명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영화는 영화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모스크바로 떠난 최국인, 한대용, 한진, 허웅배, 김종훈 등의 ‘모스크바 8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한국계’라는 범위가 포괄하는 이들은 아시아 곳곳에 퍼져있다. ‘조선족’으로 불리는 중국 동포나, ‘고려인’으로 불리는 중앙아시아의 사람들이 대표적일 것이다. 김소영의 ‘망명 3부작’은 그중에서도 ‘고려인’이 지닌 디아스포라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들의 디아스포라를 살펴보는 작업은 한반도의 남한과 북한을 중심으로 쓰인 ‘한국인’의 역사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한다. 특히 이 영화에서 다루는 ‘모스크바 8진’의 삶은 한국 현대사와 한국계 디아스포라의 역사이다. 이들은 한국전쟁에서 공을 세워 유학을 떠나게 되었지만, 결국 북한의 1인 독재 체제 공산주의의 모순점을 깨닫게 되고, 조국을 위해 조국을 비판하며 망명길에 오른 이들이다. 김소영은 이들이 남긴 영화를 비롯해, 희곡, 사진, 일기, 서신 등을 통해 이들의 삶을 재구성한다. 최근 복원된 최국인 감독의 <용의 해>는 조국을 떠나 중앙아시아 전역을 유랑하며 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굿바이 마이 러브 NK: 붉은 청춘>은 미학적으로도 훌륭한 완성도를 보여준다. 이들이 남긴 서신과 사진 등을 바탕으로 이들의 삶의 궤적을 재구성하고, 이들의 활동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특히 고려인 출신의 러시아 가수인 빅토르 최의 음악과, 거울을 사용한 조형물 앞에 선 생존한 ‘모스크바 8진’의 인물을 촬영한 영상이 함께 담기는 순간은 이들이 마주해야 했던 역사를 고스란히 관객에게 되돌려준다. 개인적으로 중앙아시아로 떠나게 된 한국계 사람들의 디아스포라나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때문에 배경지식이 부족한 상황에서 <굿바이 마이 러브 NK: 붉은 청춘>의 이야기를 온전히 다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영화는 많은 이들이 잊고 있었던, 혹은 알 기회조차 없었던 역사를 보여준다. 때문에 이 영화와 마주하는 것은, 단선적인 역사 쓰기에서 벗어난 새로운 방식의 역사 쓰기, 혹은 잊히거나 은폐된 역사를 발견하는 순간과 유사하다.

 영화는 용접 불꽃과 거대한 쇳덩어리로 가득한 어느 작업장을 비추며 시작한다. 한 남성의 인터뷰 음성이 보이스오버로 등장한다. 프레임 속의 누군가의 것으로 생각되는 목소리는 자신의 직업과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느 순간 카메라를 든 장윤미 감독의 목소리가 “아빠”라며 누군가를 부른다. 장윤미의 첫 장편영화 <공사의 희로애락>의 주인공은 그의 아버지다. 70년대부터 40년 넘게 건설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그는 거제, 구미, 광주 등을 오가며 수많은 건축물에 흔적을 남겼다. 아버지를 인터뷰하며 삶의 흔적을 쫓아가는 영화는 사적인, 그렇기에 보편적인 이야기를 꺼내 든다.



 건설노동자는 건축가가 아니다. 그들은 도면에 그려진 내용을 바탕으로 평면 속의 형상을 건축물로 제작하는 역할을 맡는다. 때문에 완성된 건축물엔 그들의 생각이 들어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자재들을 직접 만지면서 건물을 쌓아 올린 노동자들의 기억은 건축물 안에 남겨져 있다. 기억이라는 비물질적인 것이 물질적인 건축물을 통해 기록되는 것이다. 영화 속 아버지는 40여 년이 지난 일들을 굉장히 세세하게 기억하기도 한다. 그가 노동자로 참여한 건축물은 그의 기억을 다시 꺼내게 되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장윤미는 아버지와 함께, 또는 홀로 아버지가 지은 건축물과 노동을 위해 오간 길로 향한다. 예천 시장의 아케이드, 거제 조선소의 기숙사와 같은 건물들, 광주에 있는 어느 기업의 건물 등은 건축 당시와 똑같기도, 그렇지 않기도 하지만, 장윤미의 아버지는 거기서 자신의 기억과 흔적을 읽어낸다. 보편적이고 공적인 외면을 지닌 건축물은 아버지의 기억과 상호작용하며 사적인 모뉴먼트가 된다. 이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장소가 죽은 할머니, 아버지의 어머니의 묘와 생가인 이유 또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묘지는 인간이 마지막으로 머무르게 되는 건축물이자, 산 어딘가에 숨어 가끔씩 기억을 상기시켜주는 모뉴먼트이다. 건축물을 통해 되살아나는 기억은 삶을 경유해 종착지로 보이는 공간으로 향한다. 딸과 함께 자신의 기억을 다시 쫓아가던 아버지가 “자식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계속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라고 내뱉는 순간은 영화 후반부에 등장한 묘지라는 공간과 관객의 머릿속에서 결합한다. 결국 건축물 안에 자신의 기억을 봉인하게 될 어느 건설노동자의 삶은 이 순간 사적인 삶의 궤적에서 뛰쳐나와 보편의 공간으로 향한다.



 장윤미는 서울과 구미, 광주, 거제 등을 오가는 길을 끈질기게 기록한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맨 앞자리에서 찍은 것으로 보이는 영상들은 아버지가 노동을 위해 오갔던, 아니 오가는 길조차 노동이었던 순간의 기록이다. 건설노동자의 삶은 건축물에도 남지만, 같은 길을 반복해서 오가는 다른 영역의 노동자들처럼 자신이 오간 길에도 존재한다. 도로 위에서도 트럭, 레미콘, 포크레인 같은 건설용 차량에 시선이 머무는 장윤미의 카메라는 도로 위의 경험을 사적인 것으로 맥락화 한다. 핸들을 조작하는 버스 운전사의 손을 클로즈업한 쇼트와 운전하는 아버지의 손을 클로즈업한 쇼트는 길 위에서의 반복적인 이동 또한 노동의 과정임을 밝힌다. 이러한 맥락 하에서 길 위에서 국가경제발전이라는 이름 하에 자행된 노동착취와 기업들의 노동자 착취 등을 읽어낼 수 있다. <공사의 희로애락> 속 도로의 재맥락화는 아버지의 목소리와 함께 가장 사적이기에 보편을 향한다.



 최근 많은 한국 독립다큐들의 감독 자신 혹은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사적영역의 이야기를 공적영역, 보편영역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마민지의 <버블 패밀리>, 이원우의 <옵티그래프>, 성향은 조금 다르지만 라야의 <집의 시간들>이나 김보람의 <개의 역사>도 이러한 틀 안에서 해석할 수 있는 작품이다. 장윤미 감독은 <콘크리트의 불안> 등 자신의 전작을 통해 드러낸 건축에 대한 관심을 통해 사적이기에 보편이 되는 경험을 한국 현대사 안에서 재맥락화 한다. 장윤미는 영화 중간 카메라에 찍힌 자신의 모습이 늙어 보인다는 아버지를 자신의 스마트폰 카메라로 촬영하고, 아버지 또한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카메라 뒤에 선 딸의 모습을 찍는다. 이 모습은 영화의 마지막 쇼트, 카메라를 정리하는 딸의 모습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다.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것을 물질화된 기억으로 (정확히 말하면 비물질적 디지털 메모리지만, 사진을 찍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진을 물질적 기억으로 간주하기에) 담을 수 있는 시대이다. 이러한 아버지의 모습은 그의 삶을 영화로 기록하려는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 딸의 모습과 공명한다. 비물질적인 기억을 건축물이라는 물질 속에서 되새기려는 <공사의 희로애락>의 시도는 서로의 사진을 찍는 부녀의 모습을 통해 영화 전체의 태도로 확장된다. 이러한 태도를 통해 장윤미 감독은 쏟아지는 유사한 테마의 작품들 속에서 자신만의 성취가 무엇인지를 공고히 한다.

 마담 B는 생계를 위해 두만강을 건넜다. 남편과 두 아들을 두고 떠난 그는 탈북 이후 산동의 어느 남성의 집에 팔려간다. 적당히 돈을 벌다 돌아가려던 생각은 했으나 이미 10년이 지나가 버렸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탈북 브로커로 일했고, 북한에 남은 세 명의 가족을 모두 남한으로 이주시키는 데 성공한다. 다만 지난 세월 동안 중국의 남편에게 정이 들었고, 그는 마담 B의 처지에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의 공감을 보여주었다. 마담 B는 탈북이민자를 대하는 한국의 태도에 넌더리가 나고, 한국 국적과 여권을 취득해 중국의 남편과 정식으로 결혼신고를 하고 싶어 한다. 윤재호 감독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뷰티풀 데이즈>에 대한 리서치를 하다가 우연히 마담 B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고, 그의 이야기를 개별적인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했다. 그는 마담 B의 탈북 루트에 동행하면서 <마담 B>를 촬영했다.



 <마담 B>의 이야기는 굉장히 신파적일 수 있다. 하지만 영화엔 신파적으로 감정을 건드리는 부분은 많지 않다. 대신 탈북 이후 마담 B의 삶, 그가 선택한 삶의 방향, 가족과 사랑에 대한 선택 등이 분명하게 그려진다. 탈북 브로커에 의해 매매혼으로 팔려왔지만 본인도 탈북 브로커가 될 수밖에 없었던 아이러니, 팔려왔지만 북한의 남편보다 중국의 남편과 살기를 소망하게 되는 아이러니, 중국의 남편과 정식으로 결혼하기 위해서는 한국에 와서 한국 국적을 취득해야만 하는 아이러니가 마담 B가 겪은 10여 년의 세월 안에 들어있다. 결국 마담 B의 디아스포라적 삶 속에 분단 이후 발생한 역사적 아이러니가 총체적으로 녹아들어 있는 셈이다. 동시에 <마담 B>의 이야기는 한 여성의 경험을 온전히 주목한 작품이기도 하다.



 마담 B의 삶에선 탈북이민자라는 정체성과 함께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또 하나의 중요한 축으로 작동한다. 그가 여성이 아니었다면 매매혼의 방식으로 팔려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경험은 생존의 여성화, 돌봄노동의 전 지구적 연쇄의 한 사례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마담 B의 삶은 탈북이민자의 디아스포라임과 동시에 여성화된 생존의 디아스포라로 읽어낼 수도 있다. 그가 북한에 남은 가족들에게 생계비를 지속적으로 보내주고, 그들을 탈북시켜 남한으로 데려온 것은 이러한 해석을 가능케 한다. 때문에 마담 B의 삶을 신파적으로 그려 내기보단, 그가 살아온 삶을 그냥 보여주기만 하려 노력한 이 다큐는 더욱 가치 있게 느껴진다.

 마이클 무어는 2004년 <화씨 9/11>을 통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그로부터 14년 뒤 제목의 숫자를 뒤집은 <화씨 11/9>를 내놓는다.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은 ‘Fahrenheit 9/11’(화씨 9/11)의 숫자가 11/9로 바뀌는 것으로 시작한다. 9/11 테러와 존재하지 않는 대량학살무기 때문에 계속 전쟁을 벌인 부시 정권이 21세기 미국의 첫 분기점이었다면, 2016년 11월 9일 트럼프의 당선은 그 두 번째 분기점이라는 것이다. 영화는 당연히 힐러리 클린턴이 당선될 것이라 믿는 힐러리의 지지자들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2016년 11월 8일 미국 대선 투표 당일,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등장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모습은 개표가 진행될수록 어두워진다. 마이클 무어는 11월 9일 새벽 당선되어 당선 연설을 하는 트럼프와 그의 측근들을 보며 “가장 우울한 당선인의 얼굴”이라 표현한다. 트럼프의 시대는 그의 우울한 얼굴과 함께 시작한다.



 <화씨 11/9>는 트럼프의 2018년 현재를 논하는 대신, 대선 앞뒤의 기간에서 현재진행형의 폭풍으로 존재하는 트럼프가 어떻게 당선되게 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이미 수많은 이야기가 오간 미국의 선거인단 제도는 마이클 무어의 관심거리가 아니며, 영화 속에서도 짧게 스쳐 지나간다. 그가 집중하는 것은 6,600만 표를 받은 힐러리가 6,300만 표를 받은 트럼프 대신 낙선했다는 이야기가 아닌, 투표를 하지 않는 1억 명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이를 보여주며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영화의 절반 가량 트럼프의 얼굴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모든 것이 그의 당선으로 이어지는 징후였음을 보여주는 우회적인 방식을 취한다. 영화가 처음 주목하는 곳은 미시간 주의 플린트 시이다. 미시간 주지사인 공화당의 리처드 스나이더는 플린트의 수도사업을 민영화하고, 수원지를 휴런 호에서 플린트 강으로 바꾼다. 공업지대인 플린트 시의 폐수로 인해 오염된 플린트 강물은 파이프를 부식시켰고, 여기서 납이 물에 녹아들며 주민들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스나이더를 비롯한 미시건 주 당국은 물이 정상기준에 부합한다며 수원지를 변경하지 않았고, 2016년 오바마 대통령이 나서기 전까지 수도 오염이 지속되며 플린트 시의 거의 모든 아이들에 납에 중독되고 만다. 마이클 무어는 플린트 시의 인구 중 2%만이 백인임을 지적하며 이러한 상황을 ‘느린 속도의 인종청소’라고 부른다. 자본과 권력의 결탁에 의한 도시 전체의 게토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더욱이 이를 해결하겠다고 플린트 시를 찾은 오바마가 그곳에 물을 마시는 시늉을 하는 쇼를 하는 장면이 등장하며, 플린트 시의 흑인들은 오바마와 민주당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투표를 거부하고야 만다.



 이와 유사한 양상은 미국 곳곳에서 드러난다. 인종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공립학교 교사의 처우와 봉급을 제대로 보장하지 못하는 교육제도로 인해 촉발된 웨스트버지니아의 교사 파업, 스톤월 고등학교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으로 촉발된 청소년들의 총기제도 반대 운동, 여성, 이슬람계, 비백인 인종을 중심으로 한 하원의원 선거 출마와 대도시 이외 지역의 풀뿌리 민주주의 운동 등이 촉발된 과정들은 미국의 선거인단 제도와 보수화된 민주당 기득권층에 대한 반발로 해석된다. 온건한 사람을 선거 당선인으로 내세워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더욱 공고히 하려 한다. 결국 민주당이 국민들의 의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며 공화당의 인물들이 그 빈틈을 공략한 것이고, 이는 1억 명의 무투표자와 트럼프의 당선이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트럼프는 보수화된 민주당 기득권이 자초한 상황 속에 등장한,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명확하게 잡아챈 사람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는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기반으로 자신과 지지자 사이의 심리적 거리감을 좁혀갔고, 결국 당선된 것이다.



 앞서 언급한 교사 파업, 청소년들의 총기제도 반대 운동, 소수자 계층의 하원의원 출마, 풀뿌리 민주주의 회복 운동 등은 일말의 희망을 보여주려는 것 같다. 교사 파업은 교사뿐만 아니라 스쿨버스 운전수와 급식 조리사 등 학교 내 전 직원의 임금과 처우를 개선하는 데 성공했고, 청소년들의 행진은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여 정치인들에게 압력을 가하며, 소수자 계층 인물들의 하원의원 출마는 (영화에 결과가 나오진 않았지만) 영화에 출연한 몇몇 후보들이 이번 간선거에서 당선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트럼프 시대에 대한 반발은 민주당이 아닌, 정치 밖의 사람들(교사), 선거권 밖의 사람들(청소년), 기득권 밖의 사람들(여성, 비백인)에 의해 가시화되고 진행된다. 마이클 무어가 바라는 미국은 아직 존재한 적 없는 미국, 즉 유토피아에 가까운 것이며, <화씨 11/9>는 이들이 주축이 되어 희망을 제공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희망은 일시적으로 위안을 주는 것일 뿐이라는 비관을 내비치기도 한다.



 영화는 이 과정을 (마이클 무어가 언제나 그랬듯) 다양한 뉴스 화면과 공격적인 인터뷰, 적절히 사용된 다른 영화의 클립들을 사용해 보여주며, 더 나아가 페이스북이나 인스타 라이브 영상까지 활용한다. 이러한 방식의 정점은 히틀러와 나치의 집권 과정과 트럼프의 집권 과정을 비교하는 대목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마이클 무어는 나치 정권의 프로파간다 영화 <의지의 승리> 속 히틀러의 연설 장면에 트럼프가 했던 말을 얹는다. 패턴화 된 역사 속에서 트럼프와 히틀러의 집권과정이 갖는 유사성을 설명하는 이 장면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가장 자극적이면서도 직접적인 방식으로 담아낸다. 이 장면이야말로 마이클 무어의 한계(자극성)와 강점(정보를 전달하기 가장 좋은 방식으로 수집하고 편집하는 것)이 한 번에 드러나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전작 <다음 침공은 어디?>가 소소한 성격이 강한 소품의 느낌이었다면, <화씨 11/9>는 9/11만큼의 위기를 겪고 있는 21세기의 미국을 트럼프의 당선이라는 사건을 통해 총체적으로 그려내려는 야심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동시에 이번 영화는 미국이 다시 한번 위기를 넘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그 어느 때보다도 비관적으로 내뱉는다. <화씨 11/9>는 총기제도 반대 운동을 주도한 청소년 활동가이자 총기난사 사건의 생존자 에마 곤잘레스의 연설 장면이 마지막에 등장한다. 에마는 희생된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며 그들은 다시는 OO를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다시는(never)이라는 말을 반복하다 말을 멈추고 눈물을 머금는 에마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영화가 끝난다. 에마의 말은 총기난사가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임을 드러냄과 동시에, 트럼프 시대를 통해 망해가는 미국을 절대 막을 수 없다는 비관으로 느껴진다.

 박찬경 감독은 김금화 만신의 자서전 『만신 김금화』와 『복은 나누고 한은 푸시게』, 『김금화의 무가집』 등을 읽고 영화 <만신>을 제작하기로 결심했다. “한 사람의 자서전이지만 한국 현대사가 기술되어 있다는 점이 끌렸다.”라고 제작 동기를 밝힌 박찬경의 말처럼, <만신>이 담아내고 그려낸 김금화 만신의 일생에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독재정권을 아우르는 한국 현대사가 녹아있다. 현실의 삶은 물론, 영화나 TV 드라마, 소설 등의 대중매체에서도 발견할 수 있듯 가장 힘든 시기에 한국인들은 무당을 찾아가고 무속신앙에 의지했다. 만신의 굿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일종의 쇼로써 한국 현대사에 존재해왔다.



 박찬경 감독이 <만신>을 통해 무당과 무속신앙의 쇼 비즈니스적인 성격을 부각하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영화 속 김금화 만신이 굿을 준비하기 위해 가사를 외우고, 소품을 준비하고, 굿의 동선을 맞춰보는 장면들은 콘서트를 앞둔 엔터테이너의 모습과 흡사하게 느껴진다. 시대에 따라 빨갱이로, 불온한 것으로 여겨지며 탄압당하던 모습도 시대를 거쳐온 대중예술인의 모습과 겹쳐진다. 지금껏 무당이 굿을 준비하며 노래 가사를 외우는 모습을 보여준 매체가 있었을까? 그 모습을 <만신>을통해 처음 목격한 관객은 만신이라는 존재가 단순히 무속 신앙에 묶여있는 존재가 아닌, 예술과 노동의 관점에서 만신이라는 존재와 굿이라는 퍼포먼스를 생각하게 된다.



 <만신>이 김새론, 류현경, 문소리 세 배우를 캐스팅해 김금화 만신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풀어낸 것은 위와 같은 맥락에서 흥미롭다. 자료화면과 인터뷰 등으로 채워 넣을 수 있었던 이야기를 세 배우의 몸을 통해 재연하고, 종종 실제 김금화 만신이 본인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와 같은 공간에 존재하기도 한다. 김금화 만신의 삶은 신내림 받는 장면을 연기하는 류현경과 굿판을 재연하는 문소리, 쇠걸립을 하며 마을을 돌아다니는 김새론의 모습으로 스크린에 재현된다. 이를 통해 김금화 만신의 삶과 퍼포먼스는 다시 한번 쇼로써 재현된다. 김금화의 퍼포먼스를 배우들이 다시 공연하고, 이것을 다시 바라보는 김금화의 시선은 무당과 굿이라는 존재 위에 덮인 겹을 관통한다.



 70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버텨 온 김금화 만신은 계속해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동시에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간 사람이었다. 그는 깊은 산속부터 DMZ와 같은 지역, 연평해전이 벌어진 서해바다까지 자신의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만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굿이라는 퍼포먼스는 위로와 치유의 쇼가 된다. 현대사를 관통하는 김금화 만신의 쇼는 역사로 인해 상처 입은 사람을 보듬어준다. 때문에 쇠걸립하러 다니는 어린 김금화, 김새론을 따라가던 카메라가 하늘로 날아올라 마을과 산을 굽어 살피는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김금화 만신의 일생을 고스란히 담은, 한국인의 기저에 깔린 정서를 보듬어 주는 시선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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