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2017' 카테고리의 글 목록 (14 Page) :: 영화 보는 영알못

 2016년 오스카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올랐던 <무스탕: 랄리의 여름>을 기억한다면 <인 비트윈>은 익숙한 이야기일 것이다. 이슬람 문화권 속 여성에게 억압적인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영화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세 여성이 겪는 이야기를 다룬다. 언뜻 <무스탕: 랄리의 여름>의 성인 버전과도 같은 이 영화는 그와 비슷한 궤적을 그리며 시작하여 조금 다르게 흘러가나 싶더니 유사한 결말로 마무리된다. 영화는 DJ와 파트타임 일을 번갈아가며 하는 레즈비언 셀마(사나자멜리에), 그의 룸메이트이면서 자유로운 연애를 즐기는 병원 레지던트 라일라(마우나 하와), 새로운 룸메이트이자 여성에게 억압적인 아랍의 전통을 따라 살고 있는 누(샤덴 칸보우라)의 이야기를 그린다.



 세 여성의 이야기가 번갈아 가며 진행되는 영화는 익숙한 이야기들을 따라간다. 셀마는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선을 보기도 하지만 결국 레즈비언임을 알게 된 부모님이 그를 집에서 쫓아낸다. 자유연애를 지향하던 라일라의 남자 친구는 그에게 담배 피우지 말 것을 강요하는 것부터 조금씩 간섭하기 시작한다. 집안에서 정해준 사람과 약혼한 누는 자신의 학업을 위해 결혼식을 앞당길 수는 없다고 약혼자에게 말한 뒤 그에게 강간당한다. 그밖에 자잘한 에피소드들과 그들을 바라보는 메일 게이즈(Male Gaze)를 영화는 담아낸다. 돌려 말하지 않는 영화의 직설적인 화법은 현재 팔레스타인 지역에 여성들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도록 만들어준다.


 <인 비트윈>은 <무스탕: 랄리의 여름>처럼 간직하고 싶은 영화는 아니다. 직설적이고 단순한 영화의 화법은 너무나도 익숙하고, 캐릭터들의 매력이 관객을 휘어잡는 스타일의 영화도 아니다. 그럼에도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이 영화 속에 등장한다. 셀마와 라일라가 강간당한 누를 씻겨주는 장면에서 진하게 느껴지는 연대의 감정, 파혼을 알리기 위해 찾아온 누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아버지의 모습 등은 관객의 마음을 울리는 장면이다. 팔레스타인의 로컬 일렉트로닉 음악과 네온 형광색의 오프닝/엔딩 크레딧은 셀마와 라일라의 캐릭터를 그대로 설명함과 동시에 <인비트윈> 전체의 분위기가 무겁지만은 않도록 잡아준다. 때문에 <인 비트윈>은 익숙하지만 익숙하기에 더욱 기억에 남을 영화가 되었다.

브루클린에 살고 있는 닉(아담 호로비츠)은 아내 알리사(클로에 세비니)의 동생 그웬(메리 루이스 파커)이 의뢰한 아버지가 남긴 각종 자료를 아카이빙 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호주에서 온 인턴 나오미(에밀리 브라우닝)를 고용한다. 나오미는 아내 제스(에널리 팁튼)와 함께 살고 있는 부모님 친구의 아들 그렉(크레이그 부타)이 마침 가까이 살고 있는 것을 알고 그를 만난다. 제스의 언니 샘(릴리 라베)은 그웬의 비서로써 일하고 있다. 알렉스 로스 페리의 신작 <골든 엑시트>는 부부, 자매, 친척, 고용자-피고용자 등 다양한 관계로 얽혀있는 브루클린의 사람들 사이에 외지인인 나오미를 침입시키고, 그로 인한 파장을 16mm 카메라로 담아낸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연상시키는 날짜 카운트 자막과 대화 장면, 동시에 로메르나 홍상수의 영화와는 구별되는 클로즈업의 활용이 돋보인다.


 가족이라는 집단은 선택한 사람과 선택하지 않은 사람의 모임으로 구성된다. 결혼을 선택한 부부는 자신의 선택으로 같은 집단에 소속되지만 형제, 자매, 자식에게 있어서 부모는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형부, 매형, 처제 같은 용어로 불리는 관계 또한 그렇다. 20여 년 만에 브루클린에서 재회한 나오미와 그렉의 관계 역시 비슷하다. 부모님 친구의 자녀이기에 지인이 되는 관계는 형부-처제 관계의 결속력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런 선택/비선택의 경계에 서있는 관계들은 굉장히 유약하면서도 끊어내기 힘들다. 관계가 좋건 나쁘건 간에 어떠한 명칭, 그것이 가족이라는 이름 하에 묶일 수 있는 것이라면 더더욱 길고 가느다란 관계로 이어진다. 가족의 성격과 취향이 나와 맞는지 잠시 체험해보고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알렉스 로스 페리 감독은 이런 유약하고 가느다란 관계에 나오미를 끼워 놓고, 나비효과처럼 관계에 변화가 생기길 기다리며 관찰한다. 계속해서 카운트되는 날짜는 일종의 관찰일지로 그려지고, 인턴 계약이 끝난 나오미가 떠나는 것으로 실험은 마무리된다.


 자잘한 그레인이 가득한 16mm 필름의 질감은 이런 미세한 관계를 담아내기 최적의 매체이다. 토드 헤인즈의 <캐롤>이 캐롤과 테레즈를 둘러싼 감정과 사회적 시선이 주는 미세하면서 거대한 파장을 16mm로 남아낸 것처럼, 알렉스 로스 페리의 <골든 엑시트>의 16mm도 유사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촬영은 단박에 인물관계도를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나오미의 등장만으로도 흔들리는 관계들을 담아내는데, 나오미가 떠남으로써 진정을 찾는 사람들을 담아내는데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마가렛 대처의 정책 때문에 광부 파업이 일어난 지 1년이 가까워진 1984년 영국. 아직 커밍아웃하지 않은 게이인 조(조지 맥케이)는 런던에서 열린 동성애자 행진에 참여한다. 그곳에서 만난 게이 마크(벤 슈내처)는 신문에서 파업 광부들이 경찰에게 폭력적으로 진압당하는 사진을 보고 분노한다. 게이와 레즈비언이 모이는 아지트 격인 게빈(앤드류 스캇)의 서점에서 마크는 LGSM(Lesbian& Gay Support The Miners)를 창설하고 본격적으로 모금활동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모금액을 받아주는 광부 단체가 없었다. 그러던 와중 웨일스의 한 지역에서 그들의 후원을 수락하고, 마을에서 그들을 초대하러 온 다이(패디 콘시딘)의 안내를 받아 마을로 향한다. 위원장인 헤피나(이멜다 스턴튼)과 총무인 클리프(빌 나이) 등은 그들을 환대하지만, 동성애자를 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냉랭하다. 그러나 서로가 손을 맞잡을수록 강해진다는 믿음을 얻고 나서 그들은 연대하기 시작한다.



 <런던프라이드>는 1984년 영국에서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연대란 무엇인가, 연대는 왜 필요한 것인가라는 질문의 답이 영화 속에서 제시된다. 무겁지 않고 오히려 꽤나 흥겨운 톤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연대는 즐겁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한 영화로도 보이게 한다. 로큰롤과 디스코로 가득한 OST는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다. 춤과 음악, 무대와 클럽을 오가며 친분을 다지는 LGSM과 광부들의 모습은 그 즐거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 즐거움은 고스란히 연대의 연료가 되고 추진력이 된다. 즐거움이 모두의 공통분모이듯 연대를 위한 용기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폭력에 맞서는 저항 역시 그들의 공통점이다. 마크가 폭력적으로 진압당하는 광산 노동자들의 사진을 보고 분노한 이유는 수많은 성소수자들이 그렇게 탄압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러한 폭력에 대한 용기와 연대는 음악과 춤이 주는 즐거움만큼이나 모두에게 당연한 일이어야 한다. 사회적 탄압/폭력의 세세한 이유는 다를지라도 그것이 작용하는 방식은 동일하다. LGSM과 광부들을 그것을 나누며 어깨를 맞대고, 손을 맞잡고, 거리로 나가 행진한다.



 지난 JTBC 대선 토론에서 홍준표 대선후보는 공개적으로 “동성애에 반대한다”라고 발언했고, 문재인 후보는 (그것이 실수였든 아니든) 그것에 동조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후에 정정하기는 했지만, 생중계되던 토론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반응은 경악에 가까웠고, 반대로 홍준표처럼 혐오발언을 쏟아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성소수자, 노동, 장애인, 노인, 청소년, 여성 등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에 순서를 정해놓고 이미 존재하는 사람을 두고 지지와 찬반을 이야기한다. <런던프라이드>는 그런 이들에게 우리는 왜 연대해야 하는지를 일갈한다. 런던 프라이드 행진에서 파업 광부와 LGSM이 선두에 서서 행진하는 모습은 손을 맞잡은 상징이 그려진 현수막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정석적인 연출은 영화를 다소 평이하게 만들지만,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존재함을 이야기하는 영화의 힘은 광장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촛불의 광장에 모였던 모두가 평등했음을, 그래야만 해야 함을 대선 TV토론을 지켜본 주말 <런던 프라이드>를 보며 다시 되새긴다.

 “산파가 아이의 유연성 검사를 하려고 다리를 찢는데, 다리가 너무 많이 벌어져서 놀랐어요” 발레계의 악동이자 두 번 다시없을 천재 세르게이 폴루닌의 어머니는 폴루닌을 출산했을 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신화 속 탄생설화를 연상시키는 비범한 천재의 시작이다. 5살인 폴루닌이 체조로 운동을 시작한 것부터 키예프의 발레학교로 진학해 발레를 익히는 모습, 런던의 로열 발레학교로 넘어가 3년이라 월반을 하는 모습이 시간 순서대로 전개되는 초반부는 폴루닌의 ‘탄생설화’가 어떤 전설의 시작이었음을 증명한다. 폴루닌의 몸짓이 보여주는 어떤 예술성이 드러나는 어린 폴루닌의 모습, 같은 연습실의 다른 학생과 눈에 띄게 압도적인 실력 차이를 보이는 모습 등은 발레를 전혀 모르는 관객까지 그가 왜 천재인지 납득하게 만든다.



 세르게이 폴루닌은 <댄서>를 보는 우리와 다른 중력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가 공중으로 도약하는 순간을 모은 몽타주는 폴루닌이 그를 보는 관객과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묘사한다. 무대에서 도약한 폴루닌은 홀로 슬로모션이 걸린 것처럼 공중에 체류한다. 발레에 대한 천재적인 재능만큼이나 완벽한 그의 육체가 그려내는 몸짓을 스크린으로 본다는 것만으로도 기록영화로서 <댄서>의 가치가 증명된다. <댄서>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가장 큰 동력은 세르게이 폴루닌이라는 사람 그 자체에 있다. 어린 시절부터 단련된 육체, 천부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재능, 발레라는 예술에 문외한인 사람마저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아름다움. <댄서>는 영화를 연출한 스티븐 캔터와 ‘Take Me To Church’ 프로젝트를 함께한 사진작가 데이비드 라샤펠 등이 폴루닌에 매료되었기에 만들어진 작품이 아닐까 싶다. 


 다만 다큐멘터리가 담은 폴루닌의 서사는 굉장히 익숙하기에 아쉬운 점이 남는다. 폴루닌의 학비를 벌기 위해 흩어진 가족, 타국에서 홀로 생활하게 된 폴루닌의 이야기, 힘든 시절을 함께 견디어낸 친구들, 부모님의 이혼 등 극영화였다면 과한 클리셰로 느껴졌을 지점이 영화 속 폴루닌의 서사를 이룬다. 물론 이것은 실화이기에 다큐멘터리에 기록된 이야기이다. 폴루닌은 물론, 그의 가족과 친구와 동료들의 입으로 그 이야기를 다시 듣는 것 역시 흥미롭다. 다만 폴루닌이 자신의 재능에 대해 가졌을 법한 좀 더 사적인 고민이나 내면을 담아내지 못한 것은 <댄서>의 이야기를 평이하게 만든다. 그의 나이가 한자릿수였을 때부터 20대 후반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가졌을 고민이 가족에 얽힌 것만 있지 않을 거라고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했다. 85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에 폴루닌의 인생을 압축하려 했지만, 몇몇 지점은 위키피디아의 세르게이 폴루닌 문서를 영상으로 대체한 것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폴루닌이라는 사람이 가진 힘은 강력하다. 영화를 보고 난 뒤 폴루닌의 이름을 구글이나 유튜브에 검색해보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Take Me To Church’나 그가 은퇴 후 눈밭을 달리며 도약하던 장면의 해방감은 그가 관객과 다른 중력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도약의 순간 그에게 작용하는 중력은 누구보다 약하지만, 2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에게 지어진 중압감은 대부분의 사람이 경험하지 못했을 강한 중력이다. 그 중력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킨 모습이 은퇴 선언을 한 그를 다시 춤추게 만드는 동력이 아닐까 싶다. 천재적인 재능은 그를 속박함과 동시에 해방시킨다. 감독이 보여줬어야 하는 것은 그 재능 자체에 대한 고민이었어야 하지 않나 싶다.

한적한 어느 마을에 살던 다섯 악동이 강제 징집당한다. 서로가 누군지 얼굴과 이름 정도만 알던 다섯은 적이 침략한다는 소식을 듣고 적에 맞서기 위해 훈련을 받아야 한다.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정체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적에 대항하기 위해 다섯 악동은 강도 높은 훈련을 시작한다. 그들을 훈련시키는 사람은 다섯 명이 함께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장비를 갖추고 나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주입받은 애향심과 전우애는 그들을 하나의 팀으로 완성시킨다. 마침내 적이 마을을 공격하기 시작하고, 다섯 명의 악동은 전투에 참여한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로 재탄생한이 이야기는 어느 전쟁영화의 줄거리가 아니다. 일본 최고의 전대물로 꼽히는 <파워레인저>의 할리우드 리메이크인 <파워레인저스: 더 비기닝>의 이야기이다.



 마치 하이틴 성장영화처럼 전개되는 다섯 악동, 다섯 루저의 이야기는 어렸을 적에 보던 파워레인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과거의 레드 레인저인 조던(브라이언 크랜스톤)이 숨겨둔 파워 코인을 우연히 발견한 제이슨(데이커 몽고메리), 빌리(RJ 사일러), 킴벌리(나오미 스콧), 트리니(베키 지), 잭(루디 린)은 각각 레드/블루/핑크/옐로/블랙 레인저로 선택받는다. 본래 그린 레인저였지만 파워레인저를 배신하고 순수한 악이 되어버린 리타(엘리자베스 뱅크스)를 막는 것이 그들의 임무. 안드로이드 알파 5(빌 헤이더)와 조던의 훈련과, 각자의 상처를 서로에게 고백하고 보듬어주며 쌓인 우정과 전우애를 통해 슈트를 입고 전투에 나서게 되는 과정까지 영화가 그려낸다. 때문에 영화의 전반부는 시골을 배경으로 한 하이틴 인디영화처럼 전개된다. 고교의 스타 쿼터백이었지만 그것에 자신을 가두고 싶지 않은 제이슨, 너드 그 자체인 빌리, 자신의 실수로 인해 친구들과의 관계가 무너져 내린 킴벌리, 레즈비언인 자신의 정체성을 가족에게 말하지 못하는 트리니, 아픈 어머니와 단 둘이 살아가는 잭. 각 캐릭터의 상황과 이야기가 영화 내내 드러나고, 이러한 캐릭터 설정은 꽤 만족스러우며 설득력 있다. 124분의 러닝타임 중 90분이 지나서야 멤버들이 슈트를 입게 되지만, 그 전까지의 과정이 지루하지만은 않다. 능력을 얻은 뒤 슈퍼히어로가 되었다고 즐거워함과 동시에 서로의 치부를 드러내고 감싸는 전개는 <크로니클>의 조금 더 밝고 경쾌한 버전으로 보인다.



 하지만 다섯 명의 이야기를 전부 풀어내는 데는 압박이 컸던 것일까, 빠른 전개 속도는 인상적이지만 물 흐르듯 자연스럽지는 않다. 마치 13부작 드라마의 하이라이트 부분만 10분씩 잘라와 붙인 것 같은 전개는 각 캐릭터를 묘사하기엔 충분하다. 하지만 그들이 파워레인저라는 이름 밑에, 혹은 친구와 동료로서의 신뢰와 정이 생기기까지의 묘사는 헐겁다. 영화는 마치 이들이 한 팀이 되고야 말 것이라고 관객 모두가 인식하고 있다고 전제하고이야기를 풀어간다. ‘어차피 이들은 한 팀인데,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있나?’라는 태도로 만든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쉽고 편하게 우정과 전우애를 쌓아간다. 슈퍼파워를 선보이는 장면과 각 캐릭터의 묘사, 훈련 장면, 우정을 쌓는 장면 등이 뒤섞여 등장하고, 러닝타임에 비해 체감상 전개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커버가 되는 부분이지만, 너무나도 쉽게 넘어가는 관계 묘사는 아쉬움을 준다.


 영화 후반부 드디어 슈트를 입고 조드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는 파워레인저의 모습 뒤로 익숙한 파워레인저의 테마 음악이 흘러나오는 장면은 대단한 쾌감을 준다. CG와 슬로모션이 가미된 액션은 기존의 전대물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지만 마루운동 체조 동작을 보는 듯한 액션과 공룡의 모습을 본뜬 조드의 모습은 꽤나 만족스럽다. 전대물 특유의 느낌과 CG의 질감이 어색하지 않게 섞였달까. 다만 합체 조드의 합체 과정을 생략한 것은 영화의 가장 큰 패착이다. 합체 장면 하나만을 바라고 극장을 찾은 관객도 많았을 텐데, <파워레인저스: 더 비기닝>은 전대물의 상징과도 같은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이디어 부족, 예산 부족 등등의 핑계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혹은 7부작으로 기획한 시리즈이기에 전부 공개하지 않으려는 전략인지는 모르겠지만, 관객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장면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번 영화는 절반의 성공밖에 거두지 못한다.



 확실히 <파워레인저스: 더 비기닝>은 잘 만든 영화는 아니다. 툭툭 끊기는 인물 관계 묘사, 포인트가 될 합체 장면의 부재 등은 확실한 약점이다. 그럼에도 속편이 기대되는 이유는 영화에서 어떤 패기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파워’레인저이기에 칸예 웨스트의 ‘Power’가 흘러나오는 장면이나 엔드 크레딧에서 Snap!의 ‘The Power’를 빈스 스테이플스 등이 리메이크한 곡 ‘GiveIt All’이 흘러나오는 등 Power라는 가사가 중요 포인트에 들어간 음악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점에서 그런 패기가 느껴졌다. 망할 것은 알지만 그래도 해보겠다는 의지의 결과물인 걸까? 결과적으로 <파워레인저스: 더 비기닝>은 조쉬 트랭크의 1억 불짜리 쓰레기였던 <판타스틱 4>와 같은 처참한 결과물을 기대한 관객에게 나름 한 방 날리는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 그렇다고 좋은 영화인 것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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