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2017' 카테고리의 글 목록 (12 Page) :: 영화 보는 영알못

배급사와 제작사 로고가 지나가고, 휘파람 소리와 숨소리가 함께 들리며 영화가 시작한다. 문이 열리고, 1인칭의 화면 속으로 권총을 쥔 팔이 나타나 적들을 몰살한다. 권총부터 쌍칼, 도끼 등 다양한 무기들의 향연이 이어지고, 수많은 무기만큼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1인칭 시점으로 5분 가까이 이어지던 액션은 거울을 통해 1인칭 시점의 주인공 숙희(김옥빈)를 맞이하고 3인칭으로 바뀌어 액션을 이어간다. 100명에 가까운 적들을 죽인 숙희는 경찰에 체포된다. 국정원의 권숙(김서형)은 숙희와 같은 여성 암살자들을 스카우트해 10년간 헌신하면 자유를 주겠다고 이야기한다. 숙희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지시를 따르지만, 죽은 줄 알았던 전 남편이자 이전 조직의 보스 중상(신하균)이 나타나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여성 원톱 주연의 강렬한 액션 영화라는 점에서 뤽 배송의 <니키타> 나 조지 밀러의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가 떠오른다. 1인칭 시점을 활용한 액션 시퀀스는 영화 전체가 1인칭이었던 <하드코어 헨리>를연상시키며, 오프닝에서 등장하는 복도에서의 혈전은 가렛 에반스의 <레이드: 첫 번째 습격>이나 박찬욱의 <올드보이> 속 장도리 액션 시퀀스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밖에 없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숙희가 스나이퍼 라이플을 집어 든 장면에서는 <암살>의 안옥윤(전지현)이나 이두용의 <흑설>의 이미지가 겹쳐 보인다. 검은 옷을 입고 총기를 다루는 숙희의 모습은 <존 윅> 속 키아누 리브스의 모습을 연상시키시도 한다. 현수(성준) 캐릭터는 <차이나타운>의 석현(박보검) 캐릭터와 닮았다. <악녀>라는 제목은 김기영 감독이 다 완성하지 못하고 떠난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다. <우린 액션배우다>와 <내가 살인범이다>를연출했던 정병길 감독의 신작 <악녀>는 123분의 러닝타임 동안 수많은 영화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정말 아쉽게도, <악녀>는 앞서 언급한 영화들의 장점을 가져오는데 실패했다. 동시에 앞선 영화들의 단점이 <악녀>에서도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서울 액션스쿨 출신인 정병길 감독답게 액션에 대한 의욕이 넘친다. 예고편을 포함한 홍보 과정에서도 액션에 중점을 둔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악녀>는 다른 영화에서 이미 경험했던 것들을 답습하고 있을 뿐이며, 단점을 개선하지 못하고 재생산하고 있다. 가령 후반부 숙희와 중상의 칼싸움에서 자동차 추격전으로, 마을버스에서의 혈전으로 이어지는 액션 시퀀스는 1인칭과 3인칭을 넘나드는 10분가량의 롱테이크로 구성되어 있다. 숙희의 시점뿐만 아니라 중상의 시점까지 오가는 카메라는 현란하게 움직이고, ‘이렇게까지 카메라를 집어넣을 수 있어?’라는 놀라움을 가지게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런 현란함에 파묻혀 타격의 순간을 놓치고, 멀미 나도록 흔들리는 카메라는 배우의 액션 자체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 <악녀>를보고 나면 숙희가 영화 내내 펼친 액션의 동작보다 카메라의 현란함이 먼저 떠오른다. 이는 계속해서 움직이던 카메라가 정작 액션 자체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점을 오가느라 카메라가 움직여야 하기에 액션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이렇게 늘어지는 액션은 잘 짜인 액션 안무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게다가 1인칭임에도 관객이 액션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사방에서 적이 몰려들고 있고, 그들이 숙희를 공격할 시간은 벌어진 액션의 틈 사이에 충분히 존재하지만, 롱테이크와 1인칭 액션을 고수하기 위해 이를 무시하고 시퀀스가 진행된다. 액션을 이끌어가는 배우의 에너지는 스크린 밖으로 넘쳐흐를 정도이지만 그저 현란하기만 한 카메라는 이를 다 담지 못한다.



 그럼에도 번뜩이는 액션 시퀀스들은 존재한다. 가령 초반 5분 정도의 1인칭 시점이 끝나고 거울을 이용해 3인칭으로 넘어가는 순간의 아이디어는 신선하며 창의적이다. <하드코어 헨리>처럼 1인칭으로만 이끌어 나갈 영화가 아니기에 3인칭 시점으로 빠져나올 시점이 필요했는데, 그 타이밍에 대한 고민과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동시에 보여주는 장면이다. 숙희가 물병으로 자동차 엑셀을 고정시키고 도끼를 쥔 채 한 손으로 핸들을 운전하는 후반부 추격전의 아이디어 역시 훌륭하다. 굉장히 잔혹해진 <폴리스 스토리> 속 성룡의 2층 버스 액션을 보는 것 같다. 자동차의 앞뒤 양옆으로 바쁘게 오가는 와중에도 뚜렷하게 보이는 김옥빈의 표정은 액션 장면을 배우가 진심으로 즐기며 촬영했다는 것을 관객에게까지 전달한다. 그것에 대한 결과물 자체는 아쉽지만, 쌍칼을 휘두르는 김옥빈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김옥빈의 팬에겐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웨딩드레스를 입고 환풍기 구멍을 통해 라이플을 겨누고 있는 숙희의 이미지는 <악녀>의 가장 강렬한 이미지로 남는다.



 사실 <악녀>의 가장 아쉬운 점은 (물론 아쉽긴 하지만) 액션이 아니다. 123분의 러닝타임이 액션 시퀀스들로 타이트하게 채워진 영화였다면 지금보다 만족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숙희와 중상의 관계, 숙희의 아버지를 죽인 사람에 대한 이야기, 숙희의 모성애, 숙희의 국정원 훈련과정, 숙희와 현수의 멜로드라마 등을 모두 한 영화에 집어넣으려다 보니 이야기는 물론 인물의 감정선까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다. 주인공읜 숙희의 감정선마저 들쭉날쭉한 상황인데, 영화는 현수와 중상의 감정선까지 담아내려 하니 이야기가 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나 성준이 연기한 현수 캐릭터는 그 존재 이유를 찾기 힘들다. 결혼식 장면을 넣기 위함이었던 것인지, 언더커버 남성 캐릭터를 넣고 싶다는 감독의 과욕이었는지, 숙희의 모성애를 강조해보려는 시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시선으로 현수 캐릭터를 바라보아도 실패한 캐릭터이다. <차이나타운>의 석현처럼 아이캔디 캐릭터의 미러링 정도로 존재했다면 오히려 더 깔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특히 현수와 숙희 사이에 애정이 생기는 과정을 그리는 장면은 마치 TV 드라마처럼 연출되어 지루하게만 느껴진다. 숙희와 중상의 관계를 담아내는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플래시백으로 둘의 과거를 그려내는 방식은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될 이야기까지 보여줌으로써 러닝타임을 연장시키기만 한다. 플래시백이 아닌 대사로 간단하게 넘어갈 수 있는 그들의 과거 이야기나,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는 정도의 이야기를 끝없는 플래시백으로 보여주는 방식은 <악녀>를 지루하게 만든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이다.



 이와 더불어 <악녀>의 이야기를 지루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는 악역의 부재이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를 생각해보면 악역의 부재가 영화를 얼마나 늘어지게 만드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두 영화는 거대한 액션 시퀀스로 영화의 포문을 연 뒤, 악역이 부재한 상태로 러닝타임의 3분의 2 정도를 흘려보낸다. 주인공 캐릭터의 목적이 명확하지 못한 채 러닝타임만 흘러가고 있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숙희의 복수의 대상이 누구인지, 국정원의 훈련부터 현수와 중상과 얽힌 이야기까지 진행되지만, 명확한 목적 없이 흘러가는 스토리는 따분하기만 하다. 불필요하게 많이 들어가 있는 현수의 이야기와 불필요한 플래시백으로 러닝타임만 잡아먹은 중상의 이야기를 덜어내고, 영화의 악역을 조금 더 빨리 드러내어 확실한 목적을 가진 숙희가 돌진하는 영화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의 아쉬운 점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악녀>는 제목에서부터 영화의 홍보에 이르기까지 여성 원톱 주연의 액션 영화로 홍보되었다. 여기에 김옥빈과 김서형이라는 캐스팅은 연기적으로나 비주얼적으로나 관객을 기대하게 만든다. 그리고 영화는 김옥빈과 김서형을 멋있게, 그것도 존나게 멋있게 그려내는 데 성공한다. 감독 스스로도 인정한 구린 대사들을 읊는 김서형을 보는 것은 아쉽긴 하지만, 이런 여성 캐릭터를 만나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대감이 치솟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악녀>는 여성이 없는 영화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는 몇 되지 않는다. 숙희, 권숙, 숙희의 딸인 은혜, 국정원에서 훈련받는 여성들, 은혜를 돌봐주는 아주머니들. 그들을 제외한 국정원 간부와 현수의 동료들, 숙희가 오프닝에서 몰살시키는 100여 명의 사람들과 중상의 조직원들, 단역으로만 등장하는 경찰마저도 모두가 남성이다. 다시 말해서 <악녀>는여성 원톱 영화이지만, 주인공과 관습적으로 등장하는 단역들을 제외하면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 작품처럼 느껴진다. 국정원에서 훈련을 받는 여성 킬러들의 수만 얼추 100여 명은 되어 보이는데, 어째서 밖의 악당들은 모조리 남성인 것일까? 국정원의 높으신 분들부터 여성혐오적 농담을 일삼는 말단 직원들까지 모두가 남성인 와중에 숙희와 권숙이 멋지다는 이유로 <악녀>를 여성을 내세운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현수와 중상의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 숙희의 감정선을 포기한 선택은 무엇을 위한 선택이었을까? 정병길 감독은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속 퓨리오사를 보고 숙희 캐릭터를 연상시켰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다. 그가 꽂힌 이야기는 그러한 멋진 여성의 이미지이지 여성 캐릭터의 서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악녀>라는 제목에 맞지 않게, 숙희는 영화 속에서 가장 선한 캐릭터처럼 느껴진다. 각자의 목적에 맞춰 숙희의 감정을 이용한 중상과 권숙에 비교하면 숙희는 전혀 악한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혼자서 조직 하나를 궤멸시키는 숙희의 모습은 안티 히어로처럼 느껴진다. 이름이 붙여진 영화 속 캐릭터에서 숙희보다 선한 캐릭터는 그의 딸인 은혜뿐이다. 사람을 죽이고 피를 뒤집어쓴 이미지만으로 악녀라는 제목을 붙여 놓고서, 모성애를 캐릭터 서사의 중심으로 정하는 것은 여성 캐릭터를 대하는 남성 창작자의 지루하고 게으른 발상으로만 느껴진다. 가부장제 중심 사회 속에서 자라난 모성애와 눈 앞에서 죽은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로만 쌓아 올려진, 수동적이기까지 한 캐릭터를 ‘악녀’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악녀>는 제목이 품게 하는 기대감을 전혀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영화 리뷰 > 2017'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얼> 이사랑 2016  (0) 2018.09.01
<엘르> 폴 버호벤 2016  (0) 2018.08.30
<더 파티> 샐리 포터 2017  (0) 2018.08.30
<사랑의 마녀> 애나 빌러 2016  (0) 2018.08.30
<어떤 여자들> 켈리 레이차트 2016  (0) 2018.08.30

영화의 시작은 이렇다. 자넷(크리스틴 스콧 토마스)이 문을 열고 분노에 찬 표정으로 문 앞에 서있는 상대를 바라본다. 무언가 소리를 지르더니 문 뒤에 가려진 손에 들고 있던 권총을 겨눈다. 영화는 여기서 몇 시간 전으로 되돌아간다. 영국 보건복지부 예비장관으로 임명된 자넷은 이를 축하하기 위해 자넷은 친구들을 불러 홈파티를 열 계획이다. 그의 헌신적인 남편 빌(티모시 스폴), 자넷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독설가인 에이프릴(패트리샤 클락슨)과 뉴에이지에 빠져있는 그의 독일인 남편 고트프리드(브루노 간츠), 빌의 오랜 친구이자 교수인 레즈비언 마사(체리 존스)와 세 쌍둥이를 임신한 그의 파트너 지니(에밀리 모티머), 그리고 자넷 부부의 친구인 마리온의 남편이자 은행가인 톰(킬리언 머피)이 차례로 도착한다. 파티를 시작하려는 순간 빌이 발표할 것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폭로를 시작으로 자리에 모인 사람들 각각의 폭로가 이어지며 파티는 아수라장이 된다.



 로만 폴란스키의 <대학살의 신>을 연상시키는 <더 파티>는 영국의 여성 감독 샐리 포터의 신작이다. 브렉시트를 통과한 영국의 현재 상황과 그곳의 정치, 페미니즘과 뉴에이지 사상 등 온갖 재료를 뒤섞어 만들어낸 질펀한 블랙코미디인 <더 파티>는 71분의 짧은 러닝타임으로 밀도 있게 신랄한 이야기를 전달한다. 상류층 리버럴들의 겉만 번지르르한 껍데기를 벗겨내고 이를 스크린에 전시하는 블랙코미디 영화는 많지만, <더 파티>만큼 짧고 굵은 영화는 흔치 않다. 거미줄처럼 복잡한 인물 사이의 관계가 코믹하면서도 폐부를 찌르는 비판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위선적인 모습만을 드러냈던 인물들의 모습이 까발려지는 장면에서 묘한 쾌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7명의 캐릭터가 끊임없이 대사를 뱉어대고 카메라는 계속해서 그들의 뒤를 쫓아간다. 대사를 탁구공처럼 숨 가쁘게 주고받는 와중에 톰이 들고 온 권총은 총알의 행방이 어디로 향하게 될지를 궁금하게 만들며 서스펜스를 자아낸다. 71분의 짧은 러닝타임임에도 순식간에 7명의 캐릭터를 구축하는 솜씨가 놀라운데, 여러 캐릭터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캐릭터는 단연 에이프릴이다. 독설가 캐릭터로 등장하는 에이프릴이 던지는 한 마디 한 마디가 통렬한 유머로 다가온다. 몇몇 장면에서는 이렇게 말하는 캐릭터와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놀라울 지경이랄까? 동시에 그의 독설이 밉지만은 않게 되는 지점까지 만들어낸다. 위선으로 넘치는 인물들의 관계에서, 유일하게 (에이프릴의 표현을 직접 인용하자만)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에이프릴과 고트프리드뿐이기도 하다. 가장 냉소적인 인물이 가장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니, 감독의 냉소가 스크린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기분마저 든다.

'영화 리뷰 > 2017'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엘르> 폴 버호벤 2016  (0) 2018.08.30
<악녀> 정병길 2017  (0) 2018.08.30
<사랑의 마녀> 애나 빌러 2016  (0) 2018.08.30
<어떤 여자들> 켈리 레이차트 2016  (0) 2018.08.30
<원더우먼> 패티 젠킨스 2017  (0) 2018.08.30

*스포일러 포함


 일레인(사만다 로빈슨)이 한적한 소도시로 이사 온다. 남편 제리(스티븐 워즈니악)이 사망한 뒤 새로운 삶을 찾아 이사 온 것. 젊고 아름다운 마녀인 그는 마을의 남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사랑 마법과 사랑의 물약을 만들어 사용한다. 그러나 그가 만나는 남자들은 모두 마법과 물약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나간다. 일레인은 그렇게 죽은 남자들을 조사하던 형사 그리프(지안 키스)를 보고 그가 운명의 상대라고 여기게 된다.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동화적 판타지에서 살고 있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그리는 <사랑의 마녀>는 그동안 할리우드 고전 영화들을 뒤집고 꼬집는 작업을 해온 애나 빌러의 신작 장편영화이다. 35mm 필름으로 촬영된 화면부터 테크니컬러를 재연한듯한 색감, 알프레드 히치콕을 비롯해 수많은 고전 스릴러 영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화면 구도와 음악, 의상부터 세트까지 직접 수작업으로 제작한 애나 빌러의 취향이 뒤섞여 <사랑의 마녀>만의 독특한 비주얼을 만들어낸다. 제작연도가 2016년이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놀라운 비주얼에 적응하던 초반 1시간 이후 영화가 늘어지는 감이 있지만, 애나 빌러의 개성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120분의 러닝타임이 크게 지루하지 않게 흘러간다.



 사실이 영화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단박에 파악하기는 힘들다. 주인공인 일레인은 모든 남성들이 바랄법한 젊고 아름답고 섹시한 여성이며, 그 스스로도 가부장제에 맞춰진 남성의 사랑을 바라는 캐릭터로 그려진다. 동시에 그는 마법과 물약으로 남성들을 파괴하고 다닌다. 이사 온 후 일레인과 처음 관계를 가진 남성인 웨인(제프리 빈센트 파리지)은 일레인과의 관계 후 복상사로 사망한 것처럼 그려지며, 두 번째로 만난 유부남 리처드(로버트 실리)는 일레인과 헤어진 후 그를 다시 보지 못한다는 생각에 자살하고 만다. 주인공인 일레인은 남성이 여성에게 바라는 육체적 판타지를 완벽에 가깝게 충족시켜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했고, 그렇게 되었다. 그리프와 함께하는 일레인의 모습은 백마, 아니 유니콘을 탄 왕자를 만난 동화 속 여성의 이야기로 그려진다. 그러한 여성이 남성들을 파괴한다는 설정과, 파괴된 남성들이 자신들의 성욕, 욕망으로 인해 이를 자초했다는 지점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동시에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켜주어야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일레인의 모습이 내레이션과 대사, 행동을 통해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앞서 언급한 지점이 희석되기도 한다. 일레인, 그리고 바에서 야한 춤을 추는 여성들을 비롯해 여성의 신체를 담아내는 촬영들이 남성 판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한 구도로 그려지고 있기도 하다. 애나 빌러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영화 중반 즈음, 일레인은 자신이 마녀가 되는 의식을 치러준 다른 마녀들(영화 속에서 마법사’Wizard’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고, 남성도 스스로를 마녀라고 지칭한다)을 만난다. 그곳에서 마녀는 마녀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중세시대 마녀사냥을 당하고 마녀들이 화형 당한 것은 그들이 자신의 성욕과 성애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긴 했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하며 강단에서나 그들에 대한 긍정적인 관심과 흥미가 존재한다.” 6색 무지개로 가득했던 일레인의 옷 안감을 생각해보면 영화가 말하는 마녀는 여성과 퀴어를 포괄적으로 이야기하는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본래 그들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단어인 퀴어를 자신들의 이름으로 습득해버린 것처럼, 오랜 역사가 그들을 마녀라고 불러왔다면 그들 스스로 마녀의 의식을 거행하고 마녀가 돼버린 사람들. <사랑의 마녀>에 등장하는 마녀들은 그런 존재가 아닐까? 일레인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그려지는 두 남성의 직접적인 사인은 마약으로 인한 심장마비와 자살이었고, 그것은 일레인의 저주나 마법이 아닌 그들의 자의적인 선택으로 볼 수 있다. 자신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줄 여성이 떠나가는, 떠나간 것을 견디지 못한, 일레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Poor baby”인 남성들의 모습은 찌질하기만 하다. 애나 빌러는 여성을 성적 판타지로만 대하면서 그것이 아니게 됐을 때의 남성들의 반응을 담아낸다. 그리고 죽은 남성들의 시체를 잡는 카메라는 죽은 시체의 특정 부분을 클로즈업해 촬영한 몽타주로 이루어진다. 마치 히치콕의 영화에서 죽은 여성의 시체를 잡아내는 장면을 고스란히 따온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 부분에서 드러나는 전복성이 흥미로웠다.



 일레인이 마지막으로 만난 남성인 그리프와 연극처럼 가짜 결혼식을 진행하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 이후 그리프와 일레인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난다. 그리프는 “사랑은 없으며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녀와 계속 함께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고, 일레인은 “내가 원하던 사랑을 찾았어”라는 내용을 늘어놓는다. 흔히 페이스북 같은 곳에서 ‘연애하는 남녀의 생각 차이.jpg’ 같은 제목을 달고 돌아다닐 것 같은 내용이다. <사랑의 마녀>는 이러한 내용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그 원인을 생각하게 만든다. 남성들이 가부장제를 통해 주입한 생각대로 살아가는 주인공 일레인과, 역시 ‘남성은 이래야 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그리프의 모습이 대비되는 순간이 가지는 묘함은 가부장제에 기반한 기존 할리우드 고전 영화(특히 스릴러 장르)를 뒤집는 장치로 작용한다.



 결론적으로 <사랑의 마녀>는 여성(그리고 퀴어)이 마녀사냥을 당하던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성욕과 성애를 드러내면 탄압받고 눈총을 받고 심지어 화형까지 당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마녀라는 소재를 굉장히 직접적으로,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독특한 세계관은 기존 장르의 클리셰를 따라가는 듯하지만 디테일한 부분에서 이를 뒤집는다. 사실 영화가 의도한 바가 명확히 드러난다기엔 의뭉스러운 부분들로 넘쳐난다. 페미니스트처럼 등장했던 트리시(로라 와델)의 캐릭터는 어떤 이유에서 등장한 것이고 행동한 것인지 알 수 없으며, 일레인을 마녀로 만들어준 남성 마녀는 흔히 말하는 ‘개저씨’ 같은 행동을 일삼는다. 그럼에도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여성의 욕구가 드러났을 때 이를 다시 억누르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사랑의 마녀>는 아주 단순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각자의 욕망이 있으며, 그 욕망을 드러내는 것에 젠더가 문제가 되어선 안 된다. 영화를 너무 좋게만 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애나 빌러가 손수 만들어낸 세계관에 매력이 강렬하게 다가온 것만은 사실이다.

'영화 리뷰 > 2017'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악녀> 정병길 2017  (0) 2018.08.30
<더 파티> 샐리 포터 2017  (0) 2018.08.30
<어떤 여자들> 켈리 레이차트 2016  (0) 2018.08.30
<원더우먼> 패티 젠킨스 2017  (0) 2018.08.30
<버블 패밀리> 마민지 2017  (0) 2018.08.30

변호사인 로라(로라 던)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의뢰인 풀러(자레드 해리스)와 8개월째 씨름 중이다. 그는 다른 남성 변호사의 말을 듣고 바로 납득하는 풀러를 보며 자조한다. 가족과 함께 살 집을 새로 지을 예정인 지나(미셸 윌리엄스)는 재료로 쓸 벽돌을 얻기 위해 홀로 사는 노인 앨버트(린 어벌조노이스)를 찾아간다. 지나는 앨버트를 설득하지만 함께 간 남편은 자꾸만 벽돌을 굳이 주지 않으셔도 된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벽돌을 얻은 지나의 뒷모습에 앨버트는 “아내가 내조를 잘 하네요”라고 지나의 남편에게 이야기한다. 목장에서 말을 돌보며 단조롭고 지루한 일상을 보내던 여인(릴리 글래드스톤, 극에 이름이 나오지 않음)은 우연히 사람들을 따라 학교법 강의에 오게 된다. 수업의 강사인 변호사 초년생 엘리자베스(크리스틴 스튜어트)는 4시간이 걸리는 리빙스톤에서 학교를 오가며 수업을 진행한다. 여인은 엘리자베스에게 식당을 안내해주며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세 에피소드가 107분 동안 이어지며, 각 에피소드가 비슷한 시간대에 벌어진 일임을 암시하는 느슨한 연결고리만을 남기는 <어떤 여자들>은 이야기가 아닌 뉘앙스를 통해 에피소드들을 잇는다. 노골적이지 않지만 집중하고 주의 깊게 감상하면 드러나는 여성의 삶과 일상, 어떤 네 여인이 세상과 맞서가며 살아야 하는 모습, 거기서 비롯되는 외로움과 피곤한 감정이 굵은 입자의 16mm 필름 화면에 담긴다. 몬타나 주의 겨울이 주는 황량한 길은 여인들의 감정을 대변하는 이미지로 작용한다. 앞선 두 에피소드의 로라와 지나가 여성이기에 받는 시선과 차별들은 몬타나의 이미지와 겹쳐져 하나의 뉘앙스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노골적인 고발이나 폭로가 아닌, 그렇게 살아가게 된 두 여인의 모습을 그저 담아낸다. 16mm 필름의 굵은 입자는 그 삶이 겉보기엔 단조로운 일상이지만, 그 내면은 거칠고 불안정한 감정을 동반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장치로 작용한다.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목장을 관리하는 여인과 엘리자베스의 묘한 감정선과 소박한 연대는 앞선 두 여인의 모습의 위로가 된다.



 켈리 레이차트의 영화를 감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만 <어둠 속에서>, <웬디와 루시> 등의 전작들에서 길의 이미지를 통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갔다는 점은 알고 <어떤 여인들>을보러 극장으로 향했다. 길이라는 테마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담긴다. 그것은 밝고 즐겁고 경쾌할 수도 있고,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일 수도 있으며, 험난한 장애물일 수도 있다. <어떤 여자들>은 주위가 텅 비고 황량한 길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가져와 에피소드의 뉘앙스를 만들어낸다. 달리는 차를 잡는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언제나 여성 캐릭터의 얼굴을 잡아내고, 창에 비친 길의 모습과 함께 얼굴을 보여준다. 이미지가 곧 감정으로 작용하는 영화적 연출은 <어떤 여인들>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영화 리뷰 > 2017'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 파티> 샐리 포터 2017  (0) 2018.08.30
<사랑의 마녀> 애나 빌러 2016  (0) 2018.08.30
<원더우먼> 패티 젠킨스 2017  (0) 2018.08.30
<버블 패밀리> 마민지 2017  (0) 2018.08.30
<개의 역사> 김보람 2017  (0) 2018.08.30

 DCEU의 마지막 희망, 여성 감독이 연출한 첫 블록버스터이자 첫 여성 슈퍼히어로 단독 주연 작품. 잭 스나이더의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에서 슈퍼맨(헨리 카빌)과 배트맨(벤 애플렉)이 어머니의 이름으로 시시껄렁한 마무리를 맞았을 때 스포트라이트를 가져간 것은 다름 아닌 원더우먼(갤 가돗)이었다. 많은 기대와 걱정을 동시에 받으며 제작된 DCEU의 두 번째 솔로 영화 <원더우먼>은 결과적으로 성공이다. 전작에서 원더우먼이 보여준 에너지가 이번 영화에서도 이어지며, 이세계에서 인간들의 세계로 넘어온 인물의 천진난만한 정의로움은 영화의 톤을 경쾌하게 만들어준다. MCU의 <퍼스트 어벤저>를 연상시키는 시대 배경과 플롯이지만 훨씬 더 매끄럽고, 폴 페이그의 <고스트버스터즈>만큼 과감하진 못하지만 성역할을 뒤집는 장면들은 즐겁다. 온통 CG로 범벅된 <닥터 스트레인지>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 2>의 가벼운 액션과는 다른 양상의 슈퍼히어로 액션은 ‘초인의 모습이 이런 것이었지’하는 느낌을 되살려준다. 슈퍼히어로와 다른 장르를 뒤섞는 최근의 트렌드와는 다르게 정공법으로 만들어진 <원더우먼>은 정직한 재미를 제공한다. 개인적으로 악평을 남기긴 했지만 저평가된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이 MCU와는 다른 결의 모습으로 기대감을 안겨주었다면, <원더우먼>은 그것과 또 다른 모습으로 MCU와, 그리고 엑스맨 유니버스와 DCEU의 차이점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원더우먼>은 MCU에서 나오기 어려운 작품이다.



 <원더우먼>과 같은 영화가 MCU에서 나오기 힘든 이유는 몇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여성 캐릭터를 대하는 방식에서 나온다. 사실 첫 여성 슈퍼히어로의 단독 영화라는 점에서부터 (<캣우먼>이나 <엘렉트라> 같은 괴작들은 빼자) 어느 정도 차별화된다. 대부분의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메인을 맡은 인물은 남성이고, 간혹 등장한 여성 캐릭터들(스칼렛 위치, 블랙 위도우, 스톰, 진 그레이 등)은 사이드킥 혹은 연인관계의 상대역이 되기 위해 등장한 느낌을 풍겼다. 물론 실제로도 그랬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킥애스>의 힛걸이나 <엑스맨> 프리퀄 트릴로지의 미스틱 같은 인물도 있지만, 그들은 언제나 서사의 중심으로 나서지 못했다. 반면 <원더우먼>은 여성 중심의 슈퍼히어로 영화로써 그 역할에 충실하다. 여성들로만 구성된 데미스키라의 다인종 구성과 안티오페 장군(로빈 라이트)과 여왕 히폴리타(코니 닐슨) 등 그들이 보여주는 액션, 메인 빌런은 아니지만 신 스틸러 서브 빌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닥터 포이즌(엘레나 아나야) 등 원더우먼의 활약을 뒷받침해주는 여러 여성 캐릭터들의 모습은 기존 슈퍼히어로 영화 속 여성관을 깨는 부분이다.



 전통적인 성역할을 뒤집는 지점들도 흥미롭다. 앞서 말한 것처럼 과감하진 못하지만 눈에 띄게 이러한 지점들을 보여준 것은 <원더우먼>만의 장점이다. 남성 캐릭터인 스티븐 트레버(크리스 파인)를 그리는 모습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다. 트레버는 사이드킥이자 인간 세계에 원더우먼을 안내하는 가이드의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그리스 신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여성/여신의 목욕 장면을 우연하게 목격하는 남성의 이미지는 반대의 모습으로 영화 속에 그려지기도 한다. 동시에 원더우먼이 각성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하는 등 여성 캐릭터들이, 가령 <아이언맨 3>의 페퍼나 <다크 나이트>의 레이첼과 같은 캐릭터가 주로 맡아온 역할을 대신한다. 무엇보다 <아이언맨 2>의 블랙 위도우나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캣 우먼과 같은 아이캔디 역할이 남성 캐릭터에게 돌아갔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지점에서 <원더우먼>은 철저히 여성 중심의 서사로 구축되었음이 드러나고, <고스트버스터즈>를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무엇보다 전장의 여성이 영웅이 되어가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쾌감이 상당하다. 올해도 몇몇 전쟁영화가 개봉했지만, 모두 남성이 전장에서 영웅이 되는 이야기였으니까. 세계대전의 전장 속 여성을 그리는 흔치 않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원더우먼>만의 차별성이 드러난다.


 <배트맨 대 슈퍼맨>에서 짧게 등장한 원더우먼의 액션을 좀 더 많고 다양하게 볼 수 있다는 점도 <원더우먼>의 장점이다. 전장에서의 첫 액션 시퀀스는 평이해 보이기도 하지만, DCEU 속 초인 액션의 연장선상이라는 점에서 즐거움을 준다. 팔찌와 방패로 소총과 기관총을 비롯해 박격포까지 튕겨내며 돌진하는 원더우먼의 모습은 멋있다. 마을을 점령하는 반군을 소탕한 아이언맨의 첫 출격만큼이나 멋지다. 이 장면에서 원더우먼을 서포트해주는 트레버와 트레버의 팀은 원더우먼을 띄워주는 역할에 충실하다. 종종 슬로모션이 남용되는 듯 하지만, 심하게 거슬리는 수준은 아니다. 원더우먼 하면 가장 처음 떠오르는 무기인 진실의 올가미를 활용한 액션들은 기대 이상이다. 전작에서 맛보기로 짧게 등장한 올가미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원더우먼은 자신만의 액션 트레이드 마크를 획득한다. 다만 후반부 메인 빌런이 모습을 드러낸 뒤의 액션은 타셈 싱의 <신들의 전쟁>처럼 피상적인 화려함만을 그려낼 뿐 아쉽게 느껴진다.



 슈퍼히어로 영화의 전통적인 서사를 따라가는 이야기도 만족스럽다. 슈퍼히어로 장르 서사 자체의 고질적인 단점들이 따라붙지만, 140분의 러닝타임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성공에 가깝다. 이세계에서 인간 세계로 넘어온 원더우먼의 천진난만함이 영화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가운데, 그가 가진 정의의 가치관과 각성 과정이 순차적으로 전개된다. 영웅과 그의 조력자가 이끄는 오합지졸 같은 팀이 승리하는 서사는 수많은 전쟁영화를 비롯해 반복된 이야기지만, 여성 캐릭터가 홍일점이 아닌 리더가 될 때의 새로움이 <원더우먼>에존재한다. 영화 속 대사들은 소소한 재미를 주면서도 영화의 구심점이 여성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상기시켜준다. 런던에 처음 도착한 원더우먼이 “싸워야 한다”라고 이야기하자 트레버의 비서인 에타(루시 데이비스)가 “참정권이요?”라고 묻는 부분 같은 디테일이 존재한다. 페미니스트였던 원더우먼의 원작자 윌리엄 몰턴 마스턴이 원작에 담았던 의도가 적극 반영된 결과물로 느껴진다. 잠자리와 관련된 트레버와의 대화에서 원더우먼은 “12권짜리 쾌락론을 읽었어”라며 “출산을 위해서는 남자가 필요하다지만 쾌락을 위해서는 아니라고 하더군”이라고 대사를 날린다. 넷플릭스 영화가 아닌 1억 2천만 달러 블록버스터 슈퍼히어로 영화에서도 드디어 이런 대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통상적인 슈퍼 히어로 장르의 단점을 제외하면 <원더우먼>은 잘 만든 슈퍼히어로 영화이면서 동시에 그냥 잘 만든 영화이기도 하다. 그러니 <원더우먼>의 가장 큰 단점은 영화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비롯된다. 원더우먼을 연기한 갤 가돗이 강경한 시오니스트라는 것이다. 2014년 팔레스타인을 폭격해 민간인을 포함한 수많은 사상자를 낸 이스라엘 군의 행위를 응원하는 SNS 글을 올린 것이 현재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고, 레바논에서는 <원더우먼>의 상영이 금지되기도 했다.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된 폭격을 옹호하는 갤 가돗이 원더우먼이 되어, “무고한 사람들을 죽게 할 수는 없어”라는 대사를 읊고 있는 것을 보면 괴리감이 느껴진다. 그가 이스라엘 군에서 2년간 복무한 것은 의무라고 할 수 있지만, 비인간적인 행태를 옹호한 것은 현실의 논란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영화를 감상하는데도 영향을 미쳤다. 물론 갤 가돗의 외모와 연기 등의 이미지는 원더우먼과 잘 어울린다. 그러나 비인간적 폭격을 감행하고 이에 대한 옹호 발언을 했으며 이에 대한 사과나 정정도 하지 않은 배우를 진정한 원더우먼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영화 리뷰 > 2017'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의 마녀> 애나 빌러 2016  (0) 2018.08.30
<어떤 여자들> 켈리 레이차트 2016  (0) 2018.08.30
<버블 패밀리> 마민지 2017  (0) 2018.08.30
<개의 역사> 김보람 2017  (0) 2018.08.30
<겟아웃> 조던 필레 2017  (0) 2018.08.3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