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2017' 카테고리의 글 목록 (13 Page) :: 영화 보는 영알못

<버블 패밀리>는 어느 집의 늦둥이 외동딸로 태어난 마민지 감독의 가족사를 기록한 다큐멘터리이다. 80년대 말 서울 강남의 아파트 키드로 태어난 감독의 부모님은 도시 개발의 붐을 타고 중소규모의 건설업자로 중산층의 꿈을 이룬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1997년 IMF로 인해 버블은 무너졌고, 아파트 건너편의 작은 빌라로 넘어와 살게 되었다. 1년이면 다시 아파트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지만, 15년이 지나도록 빌라에서 살게 된 가족의 이야기를 <버블 패밀리>는담고 있다. 박정희 정부에서 시작해 IMF사태로 끝나는 30년간의 버블 부동산은 마민지 감독의 가족사를 어떻게 만들었고, 감독의 부모님은 여전히 부동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까? 다큐멘터리 제작지원금 100만 원을 부동산에 투자하자고 말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그들이 부동산에 집착하게 된 이유를 궁금케 한다.



 본래 울산의 화학공장 노동자로 일하던 마민지 감독의 아버지는 80년대 초반 서울의 도시계획 붐을 따라 상경한다. 집장사로 돈을 불려 본 경험이 있는 어머니와, 큰 리스크를 짊어지지만 과감한 투자를 하던 아버지는 88 올림픽에 맞춰 지어진 중산층의 상징인 잠실의 아파트에 입주하게 된다. 덕분의 마민지 감독의 어린 시절은 유복했고, 그의 어머니는 홈 비디오로 그 일상을 기록했다. 1997년, IMF에서 끊기는 홈 비디오의 기록은 그러한 그들의 가족사가 단순한 가족사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듯하다. 한국, 특히 서울 강남의 역사와 맞닿아 있는 <버블 패밀리>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버블 위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가족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로또 말고는 돈 들어올 방법이 없다”라는 자조적인 말은 부동산 버블에 로또 맞은 듯이 돈을 벌었던 부모님의 과거를 돌아보게 만든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부모님의 부동산에 대한 집착의 원인은 이러한 구조에 있던 것이 아닐까? 딸의 학비로 쓸 수 있었던 돈으로 딸에게 줄 땅을 몰래 사두는 바람에 학자금 대출에 허덕이게 된 마민지 감독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아이러니가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분위기가 된다. 영화 말미에서 딸에게 이런 비밀을 밝히는 어머니의 모습과 그 땅을 직접 찾아간 마민지 감독에서 느껴지는 어이없음과 아주 작은 안도감의 양가적인 표정은 <버블 패밀리>의 주제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영화는 마민지 감독의 가족사와 박정희 정부~IMF에 이르는 현대사를 동시에 그려낸다. 어쩌면 그의 가족사는 현대사의, 버블경제의 흐름에 그대로 편승해왔을 뿐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감독은 자신의 홈 비디오부터 온갖 뉴스 영상, 부동산 경제에 맞춰 개사한 가사를 부르는 소방차의 공연 영상까지 다양한 자료화면을 이용한다. 한국인의 공통적인 지점들을 함께 편집해낸 연출법과 가족의 화해 등을 이끌어내려는 대신 지금의 모습을 직시하는 태도는 마민지 감독의 이야기가 개인적인 가족사일 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공감을 이끌어낸다. 영화에 담긴 가족사는 모두가 조금씩은 공유하는 이야기로 남는다.



 잠실에 사는 가족의 이야기이기에, 잠실 롯데월드와 롯데월드타워의 모습이 끊임없이 카메라에 잡힌다. 진득하게 담기는 건설 중인/완공된 모습의 롯데월드타워는 스크린 밖에서 롯데월드타워가 사람들의 시선에 담기는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강 건너 왕십리에 사는 나에게도 조금만 시야가 트인 곳에 가면 높다란 월드타워의 모습이 보인다. 월드타워가 얼마나 잘 보이는지에 따라 미세먼지농도를 예측할 수 있을 정도이다. 월드타워를 볼 때마다 다양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지만, <버블 패밀리> 속 월드타워를 보고 든 생각은 하나뿐이다. “자본이 서울에 트로피를 세웠구나” 결국 승자가 정해져 있는 게임 속에 마민지 감독의 가족은 휩쓸렸던 것이고, 거대 자본은 IMF에서도 살아남아 505m짜리 거대한 트로피를 잠실에 건설했다. <버블 패밀리>를 본 지금, 월드타워가 단순한 랜드마크가 아닌 거대 자본의 트로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김보람 감독은 카메라를 들어 동네의 한 백구를 촬영한다. 대관령 슈퍼의 주인아저씨가 밥을 주고 산책도 시켜주며 지내는 이름 없는 백구, 한 다리를 다쳐 절뚝거리며 걷는 늙은 백구. 김보람 감독은 백구의 역사를 알아내기 위해 동네 사람들을 탐문하기 시작한다. 백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작은 기억들을 풀어놓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개의 역사를 알아가는 듯 영화가 진행된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 김보람 감독은 자신의 목소리로 백구의 역사를 알아내는데 실패했다고 이야기한다. 대신 감독의 카메라는 백구처럼 이름 없는 존재들을 담아내기 시작한다. 매일 같이 스쳐 지나가지만 이름은 모르는 이웃, 붙여진 이름이 있을까 싶은 골목길, 어린 시절의 기억과는 다르게 변해버린 학창 시절의 동네, 동네 정자에 앉아있는 어르신들의 모습, 무리 지어 돌아다니는 비둘기들 등이 카메라에 담긴다.



 개의 역사를 알아내는데 실패했듯이 다른 이름 없는 것들의 역사를 알아내는데도 실패한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에는 너무 나이 들어버린 어르신들, 백구와 마찬가지로 어디서 와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 수 없는 비둘기를 비롯한 동물들, 계획 없이 난잡하게 만들어진 골목길들…… <개의 역사>는 이렇게 외롭고 관심 가져주는 사람도 없는 대상을 담아낸다. 그들의 역사는 알아내지 못했어도, 각 대상 개개의 이야기를 끌어와한 편의 영화로 완성시킨다. 때문에 중심점이 없는 이야기처럼 영화가 느껴질 수도 있지만, 오히려 주변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엮어 새로운 서사구조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독창적으로 느껴진다. 거친 질감의 촬영과 편집이 다소 불편하고 어지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카메라의 시선은 수평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고, 기울어져 있다. 과하게 줌을 당겨 화질이 조금 깨지는 장면도 많다. 이러한 화면들은 스크린 밖의 현실에서 영화가 담아내려는 대상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 그리고 동시에 감독의 시선을 반영한다. 우리는 그 대상들을 삐뚤어지게, 흐릿하게 바라보고 지나치지 않았을까? 영화에서 몇 차례 핸드헬드로 찍은 몇몇 장면이 등장한다. 이 장면들은 독특하게도 하나의 영상으로 쭉 이어가기보다는 버퍼링에 걸린 것처럼 정지화면으로 진행된다. 영상으로 쭉 이어졌다면 놓쳤을 골목, 보도블록, 창문, 표지판, 복도등이 관객의 눈에 들어온다. 영화 상영 후 토크를 진행한 세컨드 필름 매거진의 정경희 에디터는 “이름 없는 것들의 찾지 못한 이름들을 발굴해 호명하는 영화”라고 <개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러한 독특한 영상은 이름 없는 것들을 호명하는 영화의 주제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개의 역사, 걔의 역사, 개개의 역사, 말장난 같지만 영화의 주제를 함축하는 (그리고 감독이 나름 노렸다고도 말한) 평이다. <개의 역사>는 항상 스쳐 지나가던 모든 것들의 역사를 다시 조명하려 하고, 결국 개개의 역사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개개의 역사를 조명하려는 행위가 가지는 의미를 담아내는 것은 가능했고, 일정 부분 성공한다. 김보람 감독이 담아낸 단편적인 개개의 역사는 83분의 영화로 엮여 하나의 서사를 이룬다.

*스포일러 포함


 사진작가인 크리스(다니엘 칼루야)는 여자 친구인 로즈(앨리슨 윌리암스)의 집으로 초대받는다. 크리스는 로즈의 집으로 가기 전 걱정거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은 흑인이고 로즈는 백인이라는 것. 그런 걱정을 안고 로즈의 집으로 찾아간 크리스는 로즈의 부모님인 딘(브래드리 휘트포드)과 미시(캐서린 키너)를 만난다. 평범해 보이는 부유한 백인 가정의 모습으로 보이는 모습이지만, 저택에서 일하는 흑인 하인들의 행동이 어딘가 어색하다. 자신과 같은 흑인처럼 행동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크리스는 위화감을 느낀다. 그러던 중 로즈의 집안과 친한 백인들이 모이는 파티가 열리고, 그곳에서 백인들의 공동체가 공유하는 충격적인 비밀이 밝혀진다. 코미디언으로 활약하던 조던 필레 감독의 장편 데뷔작 <겟아웃>은, 스탠리 크레이머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의 이야기에 하우스 호러부터 러브크래프트의 코스믹 호러를 연상시키는 장면까지 다양한 하위 장르를 뒤섞은 장르영화로 탄생했다. 또한 시놉시스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그리고 조던 필레 감독이 영화 이전에 해오면 코미디의 내용을 생각해보면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에 대한 맥락이 영화 속에 녹아들어있다. <겟아웃>은 이런 신선한 소재에 직설적인 메시지를 담은 무난한 완성도의 장르영화이다.


 <겟아웃>은 시작부터 노골적이다. 로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가던 둘은 사슴을 차로 치어 죽이게 되고, 경찰은 차를 운전하지도 않은 크리스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신분증을 요구한다. 그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당연하게, 그리고 불필요하게 신분증이 요구되는 상황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영화가 시작한다. 딘은 흑인들만이 하인인 저택의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크리스에게 그들의 과거사를 설명하며 “우리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님”을 재차 이야기한다. 하긴 어느 포비아가 자신이 포비아라고 직접 고백할까? 영화는 인종차별의 다양한 상황과 대사를 호러라는 장르 영화의 틀 안에 녹여내며 전개된다. 크리스가 느낀 위화감의 원인이 미시의 최면과 관련 있음을 드러낸 영화는 더욱 노골적으로 변화해간다. 과거 노예제도 시절 노예를 경매에 붙이듯 크리스의 육체를 놓고 빙고를 가장한 경매를 벌이는 장면, 흑인들의 ‘유전자적으로’ 우월한 육체를 놓고 그 스테레오 타입으로만 흑인을 바라보는 시선 등은 영화의 주요한 전략인 ‘인종차별 호러’로써의 장치가 된다.



 흑인에게 최면을 걸어 노예로 부리는 듯한 상황에서, 뇌수술을 통해 마치 <존 말코비치 되기>처럼 나이 들고 부유한 백인들이 흑인의 건강하고 젊은 육체 안으로 들어간다는 설정으로 변화하는 지점은 나름의 반전으로 작용한다. 흑인을 인간으로 보는 대신 육체로, 껍데기로만 바라보는 시선이랄까? 사회적 맥락에서 대상화를 통한 인종혐오가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들은 흑인의 육체를 (성적인 면을 포함해) 다방면에서 찬양하지만, 그들의 인격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크리스의 육체를 낙찰받은 백인은 “왜 백인의 몸은 아니지?”라는 물음에 대답을 하지 못한다. 기저에 깔린 인종적 스테레오 타입에 대한 비판이 영화 속에서 이어진다. 마치 처녀의 피를 영생을 위한 연금술사의 돌로 여기는 다른 장르영화처럼, 흑인의 육체를 영생을 위한 수단으로만 바라본다. 그러나 이런 비판들은 인종문제를 다룬 다른 영화들처럼 통렬하거나 열성적인 비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몇몇 대사를 통해 부유한 백인이 흑인의 몸을 얻는 것에는 단순히 영생의 꿈 이외에도 자아실현의 수단 등의 의미가 부여된다. 알고 보니 흑인들을 낚아오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로즈의 정체가 드러난 이후, 로즈 역시 최면에 걸린 것처럼 행동하는 몇몇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은 영화 속 백인에게 어떤 면죄부를 쥐어주려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크리스의 친구 로드(릴 렐 호워리)는 납치당한 흑인들이 성노예로 팔려갔다고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흑인이 육체적으로, 더군다나 성적으로 잘한다는 스테레오 타입을 흑인 캐릭터가 나서서 강조한다. 조던 필레 감독이 코미디언으로 활약할 때 주로 이용하던 수단이다. 이러한 캐릭터 로드의 존재로 인해 <겟아웃>은 104분 러닝타임의 농담처럼 느껴진다. 호러 장르의 외피를 하고 있지만, 공포를 조성하는 것에 앞서 비꼼의 태도를 놓지 않는 모습에서 진지한 비판의 태도보다 독한 농담의 향기가 느껴진다. 본인들에게 쏟아지는 스테레오 타입과 차별을 비꼬고 뒤틀어 전시하는 농담조의 영화로 <겟아웃>은 읽힌다. 진지한 비판이라기 보단 조던 필레가 가진 스타일에 호러 장르의 컨벤션을 빌려온 농담이랄까. 영화가 그려내는 거대해 보이는 진실이 크리스의 탈출 과정에서 생각 보다 수월하게 무너지는 것처럼 보이는 영화의 후반부는 <겟아웃>이 영화 스케일의 농담이라는 것에 힘을 실어준다. 어쩌면, “이렇게 간단하게 뒤집을 수 있는 문제잖아?”라고 반문하는 것처럼 착착 맞아떨어지는 엔딩을 그려낸 것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겟아웃>은 호러 영화로써의 매력은 조금 아쉽다. 사슴이 차에 부딪히는 사고에서부터 조성되는 긴장감은 음악을 통해 러닝타임 내내 이어지지만, 너무나도 수월하게 탈출에 성공하는 크리스의 모습에서 영화가 가져야 할 서스펜스가 반감된다. 백인 공동체 속 이상행동을 보이는 흑인들을 보는 크리스의 모습에서 압박감이 느껴지지만 그것이 관객에게 곧장 공포로 치환되어 전달되지는 못한다. 크리스가 미시의 최면에 빠져 심연으로 빠지는 코스믹 호러적 느낌으로 연출된 장면은 인상 깊지만, 그 장면 자체가 큰 공포로 작용하지는 못한다. 결국 <겟아웃>은 조던 필레가 언제나 해오던 인종차별에 대한 농담의 영화 버전으로 남게 된다. 생각보다 무섭지 않은 호러영화 <겟아웃>은, 괜찮은 블랙코미디 영화로 볼 수 있지만 ‘호러’ 영화로써 좋은 영화라고 할 수 있을지엔 의문이 남는다.

*스포일러 포함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은 걸작이었다. 제임스 카메론, 데이빗 핀처, 장 피에르 주네가 뒤이어 만든 영화들도 (호불호와는 별개로) 각자의 개성이 녹아들어 있는 작품이었다. 1998년의 <에이리언 4> 이후 명맥이 끊겨있던 프랜차이즈를 다시 가동한 것은 시리즈의 창조주 리들리 스콧이었다. 2012년 프리퀄 아닌 프리퀄 영화 <프로메테우스>를 연출했고, 그 영화를 통해 인류의 창조주와 에이리언 종족의 등장을 알렸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시점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조금 더 상세한 에이리언의 기원을 그린다. 프랜차이즈의 창조주인 리들리 스콧이 창조주로써의 자의식을 마음껏 드러낸 영화랄까? 자신의 창조주를 찾아 탐사선 프로메테우스를 보낸 피터 웨이랜드(가이 피어스)의 욕구와, 웨이랜드의 창조물인 A.I. 데이빗(마이클 패스벤더)이 그를 보고 키운 창조의 욕망은 리들리 스콧의 자의식을 에이리언의 세계관에 고스란히 투영한다. <프로메테우스>가 전자의 욕구를 담았다면,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후자의 욕망을 담았다. 다만 SF 호러 장르로의 회귀와 리들리 스콧의 욕망은 종종 엇나가면서 영화 전채를 애매하게 만들어 버린다. 결과적으로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 1편 사이 어딘가에 자리 잡은 영화가 되었다.



 <프로메테우스>에서 엘리자베스 쇼(누미 라파스)와 함께 엔지니어의 함선을 타고 떠난 데이빗은, <에이리언: 커버넌트>에서 엔지니어의 행성에 도착하고, 검은 액체를 뿌려 그곳의 생명체를 학살함과 동시에 그들을 숙주로 삼아 에이리언들을 탄생시킨다. 함선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데이빗의 시점으로 등장하는 플래시백 시퀀스는 창조주의 전지적인 시점에서 진행되는 재앙-창조의 스펙터클을 담아낸다. 프랜차이즈의 기원을 자신의 손으로 창조하고, 창조했음을 알리려는 과시적인 장면이다. 마이클 패스벤더를 데이빗과 신형 A.I.인 월터로 분리하고, 데이빗이 월터를 파괴하게 되는 설정에서도 창조주가 되려는 리들리 스콧의 마음이 엿보인다. 인간이 가진 어떤 절제, 선함을 상징하는 월터를 데이빗과 같은 형상으로 설정한 뒤 데이빗이 그를 파괴하게 되는 전개는, 방해 요소를 제거하고 자신의 세계를 만들겠다는 데이빗의 행동과 리들리 스콧의 자의식이 뒤섞인 장면이다. 이런 경향은 데이빗이 바그너의 ‘신들의 발할라 입성’을 들으며 커버넌트호 안의 태아 보관실로 들어가 냉동된 페이스 허거의 유충을 보관함에 넣는 장면까지 이어진다. 바그너의 음악을 블록버스터 크리처 영화에 녹여내는 것은 물론, 연출자의 자의식을 1억 달러 예산의 블록버스터에 과시적으로 집어넣을 감독이 또 있을까? 그 결과물이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리들리 스콧의 뚝심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데이빗과 월터를 제외한 캐릭터들은 납작해지고, 어느 부분에선 납득하기 힘든 대사와 행동을 이어간다. 포스터 상 주인공이었던 대니얼스(캐서린 워터스틴)의 존재감은 미미한 수준이고, 그의 연인이자 선장인 제이크는 왜 제임스 프랭코라는 이름값을 사용했는지 모를 정도로 짧은 분량 동안 출연한다. 제이크의 뒤를 이어 선장이 된 오람(빌리 크루덥)의 행동은 ‘저 사람이 어떻게 식민화 프로젝트의 선원이 되었을까’하는 의문을 남긴다. 테네시(대니 맥브라이드) 등 다른 선원들의 행동을 보면 그들이 2000명의 냉동인간과 1000여 개의 태아를 운송 중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는 있는 것인지 의심하게 된다. 이마저도 창조주의 관점에서 캐릭터들을 소비한다는 리들리 스콧의 시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렇게 관객이 마음 둘 캐릭터 하나 없이 영화를 전개시킨다는 것은 SF 호러 장르로서의 기능을 반감시킨다. 이입할 수 있는 캐릭터가 없는데 어떻게 공포를 느낄 수 있을까? 네오모프의 탄생처럼 몇몇 잔혹하고 끔찍한 장면이 있지만, 그 장면들은 그저 잔혹하고 끔찍하기만 할 뿐 공포스럽지는 않다. 스크린에서 만나는 제노모프와 하얀 피부가 인상적인 네오모프의 모습은 기괴하지만 공포보단 스크린에서 만나 반갑다는 감정이 먼저 피어오른다.



 결국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 사이에 존재하는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이도 저도 아닌 영화가 되어버렸다. 인간의, 생명의 기원을 탐구하는 과정을 압도적인 비주얼을 동원해 보여주던 <프로메테우스>의 철학적 면모는 SF 호러 장르에 희석되었고, SF 호러 장르가 지녀야 할 기괴함과 공포, 서스펜스 역시 리들리 스콧의 과시적인 연출이 파묻혀버렸다. 애매한 자리에 위치한 이 영화는 관객의 상상에 맡겼을 때 가장 재미있었을 부분을 프랜차이즈의 창조주가 경전에 새겨버리는 영화다. 창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과도한 간섭은 오히려 흥미를 떨어트린다. 프랜차이즈를 마무리 짓는 적절한 시점을 놓쳐버린 영화의 결과물은 그저 아쉬울 뿐이다.

 케이트 블란쳇이 뮤지션, 노숙자, 과학자, 노동자, 주부, 아나운서, 기상캐스터, 교사 등의 모습으로 공산당 선언, 플럭서스, 다다이즘, 도그마 95, 팝아트 등에 대한 선언을 장례사, 식전 기도, 엘리베이터 안내, 프레젠테이션, 수업 등의 형태로 읊는다. 원래 미술관의 멀티채널 영상 설치 작업이었던 <매니페스토>는 편집을 거쳐 러닝타임 99분의 극장용 영화로 재탄생되었다. 선언이라는 의미의 제목처럼 현대 예술/미학에 대한 중요한 예술적 선언들을 다양한 모습의 사람이 다시 한번 선언한다. 선언에 대한 선언, 선언 그 자체를 예술로써 다루는 영화는 반예술적 기조의 선언들을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를 통해 시각화한다. 



 상당한 분량의 사전 지식이 필요한 영화이다. 영화 속에서 언급되는 선언에 대한 맥락과 내용을 파악하려면 두세 학기 정도의 수업이 필요할 지경이다. 영화 속에 언급되는 매니페스토 중 공부했었던 내용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노숙자에 입으로 발화되는 공산당 선언에 대한 대사, 장례식에서 장례사로 등장하는 다다 선언, 초등학교 수업으로 등장하는 도그마 95 선언 등의 장면은 흥미로웠다. 각 매니페스토의 성격과 그것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영화 속에서 그것을 발화하는 사람과 상황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관찰할 수 있었달까. 사전 지식이 얼마나 많은지에 따라 감상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영화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한 인물들이 한 번에 스크린에 등장해 각각의 매니페스토를 읊는 것으로 끝난다. 매니페스토를 읊는 인물들의 목소리는 마치 교향곡처럼 구성된다. 각기 다른 음조로 매니페스토를 읊으며 그것이 음악처럼 섞이는 마지막은 그 모든 것이 뒤섞여 현재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영화에 등장하는 온갖 매니페스토들에 대한 공부를 하고 다시 이 영화를 본다면 감상이 얼마나 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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