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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거: 유관순 이야기>의 제작 소식을 들었을 때 감독의 이름을 보고 많은 걱정이 들었다. 한국영화 ‘망작’을 꼽을 때 심심치 않게 들어가는 <10억>의 조민호 감독이 <항거>의 연출을 맡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귀향> 같은 영화들처럼, 자칫 선정적인 장면들로만 가득한 영화로 나올 수도 있는 소재이기에 더욱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항거>는 감독이 스스로를 최대한 내려놓고 유관순(고아성)과 김향화(김새벽), 권애라(김예은), 이옥이(정하담) 등의 서대문 감옥 8호실의 여성들에 집중하는 작품이었다. 좋은 영화들을 만든 감독은 아닌지라, 연출적인 부분에서 종종 아쉬움이 남기는 한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히 애국심을 고양시키는 신파로 흘러가지 않는다. 



 <항거>는 기본적으로 3.1 만세운동과 독립투사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고아성을 비롯해 김예은, 김새벽, 정하담 등의 여성 배우들은 그 위에 여성들 간의 연대가 피어나는 과정을 그려낸다. 학생, 기생, 농부, 어머니, 딸, 서울 사람, 지방 사람 등 다양한 위치에서 우연히, 혹은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은 어찌 보면 필연적인 갈등을 겪는다. 영화는 이들이 결국 연대하게 되는 과정을 쫓아간다. ‘유관순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었지만, 김새벽, 김예은, 정하담 같은 독립영화계의 스타들이 8호실 감방동료들을 연기했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이들은 단순히 유관순을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캐릭터가 아니다. 이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독립보다 더 큰 자유를 위해 만세를 외치던 개별자들이고, 옥중이라는 상황에서 이를 이어가기 위해 연대한 것이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배우들의 연기다. 10억 원 정도의 적은 예산, 기존의 태도를 버리고 자세를 낮춘 채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는 연출과 대사의 아쉬움을 8호실을 가득 채운 여성 배우들이 매워준다. 대사는 너무 직설적이고, 비유는 지루하고, 연출은 단조롭다. 하지만 만세운동 이후의 갈등으로 시작하여 이해와 연대로 나아가는 과정은 배우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통해 스크린 위에 그려진다. 영화에 출연한 남성 배우들의 (많이) 아쉬운 연기와 대비되기도 한다. <항거>에 출연한 배우들, 고아성, 김새벽, 김예은, 정하담의 얼굴은 그 자체로 “자유는 하나뿐인 목숨을 내 마음대로 쓰는 것”이라는 극 중 유관순의 대사를 보여주고 있다.


 <풀잎들>에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형식들이 즐비하다. 마야 데렌의 실험들을 연상시키는 계단 오르내리기, 오버 숄더 쇼트, 그림자와 주고받는 숏-리버스 숏 등은 홍상수의 전작들에서 찾아볼 수 없던 형식들이다. 동시에 그가 가장 잘하는 것들, 패닝을 통해 탁구처럼 감정을 주고받는 장면들 또한 존재한다. 어쩌면 <풀잎들>은 홍상수가 김민희와 협업한 이후 시작된 변화의 완전판일지도 모른다. 흑백으로 불필요한 정보들을 정제한 화면과 서사를 뭉개버림으로써 패닝에 실려 인물들 사이를 오가는 감정들만으로 66분을 채운 홍상수의 22번째 장편 <풀잎들>은 그의 영화에서 만날 수 있는 강렬함과 놀라움의 밀도가 빽빽한 작품이었다.



 <풀잎들>은 대화로 가득하다. 영화 내내 김민희(극 중 인물들의 이름은 엔드크레딧을 통해서야 확인할 수 있다)를 제외한 인물들은 짝을 이뤄 대화를 이뤄나간다. 공민정과 안재홍, 기주봉과 서영화, 이유영과 김명수. 카메라는 풀숏으로 이들의 서로에 대한 탐색을 보여주기 시작해서 서서히 줌인을 하다가 결국 두 인물의 얼굴을 오가는 패닝을 통해 대화를 담아낸다. 스매싱 없이 기계적인 랠리만 계속하는 테니스 경기처럼 카메라는 두 인물의 얼굴 사이를 거의 일정한 간격으로 오가기만 한다. 이러한 패닝은 두 인물의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균열, 부탁, 거부, 질문을 실어 나른다. 그리고 절대 긍정 혹은 동의의 언어를 담지 않는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의 소재는 죽음이다. 공민정은 친구 승희의 죽음이 안재홍의 책임이라 쏘아붙이고, 기주봉은 자살을 시도했었다 고백하며, 김명수는 친구였던 교수의 자살이 이유영의 책임이라며 술주정을 부린다. 이들의 대화는 죽은 사람을 불러오거나, 죽음은 사람을 살아 돌아오게 한다.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을 밑거름 삼아 새로운 대화,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사랑, 새로운 감정을 말하는 풀잎들이다. 그들이 카페 앞에 높인 고무대야에 성의 없이 심어진 풀잎들에 담배연기를 내뿜는 동안, 그들의 대화 사이에서는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죽은 사람들이 소환되고, 사람들은 “어차피 다 죽을 거면서” 죽음과 자신을 분리해낸다.



 그중에서도 이유영-김명수 짝을 촬영하는 카메라는 독특하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오버 숄더 숏이 등장하고, 둘의 얼굴을 오가는 대신 고정된 화면에서 이유영의 얼굴과 김명수의 뒤통수 사이로 카메라 포커스의 움직임이 등장하고, 카메라는 각 개인의 얼굴을 오가는 대신 둘의 모습과 둘의 그림자 사이에서 패닝 한다. 결국 두 사람이 대화에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발현된 둘의 감정이 아닌, 그림자-유령의 형상으로 등장한 죽음이 존재한다. 둘이 대화하는 장소가 대부분의 인물이 지박령처럼 붙잡혀 있는 카페가 아닌 인근의 어느 식당이라는 점에서 둘은 죽음과 더욱 가까워 보인다. 동시의 김민희의 동생 커플(이 둘은 극 중 유일하게 명확한 이름이 등장한다)은 한 번도 카페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 다른 짝들보다 죽음과 거리를 둔 둘은 동네를 부유하듯 떠돈다. 둘은 옷차림마저 홍상수 영화의 인물 같지 않으며, 마지막 장면에서 여느 20대 커플처럼 한복을 입은 채 기념사진을 찍는 이색적인 순간을 그려낸다. 다른 인물들이 죽음을 새로운 감정으로, 벗어나기 위한 걷기로, 죽음을 거름 삼아 대화하는 “별것도 아닌 것들 사이에 끼기 위한 예행연습(김새벽의 계단 걷기 장면)으로 죽음을 상대할 때, 두 커플은 죽음을 인식하지도 못 하는 것만 같다. 냉소적인 관음증으로 카페 안의 대화들을 관찰하던 김민희가 어떤 질문에도 대답해내던 동생 커플에게 소리를 지르고야 마는 것은, 당연한 일이자 그가 다시 카페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관성 작용이다. 어떤 식으로든 죽음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짝(이유영-김명수)과 죽음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는 동생 커플 이외의 인물들은 결국 카페라는 공간 안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김새벽은 어느 계단에서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 카페로 다시 돌아가야 할 것을 알기에, 그곳에서의 대화를 상대하기 전의 예행연습을 하려는 것처럼 반복해서 몸을 움직인다. 카메라는 잠시 문 밖으로 나간 김새벽을 클로즈업한 뒤, 다시 뒤로 빠져 계단을 오르내리는 김새벽을 따라 위아래로 틸팅 한다. 좌우로의 패닝 대신 위아래로 움직이는 카메라는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측정하듯이, 김새벽은 그러한 공간을 만들어내려는 듯이 움직인다. 그는 엄청나게 많이 움직였으나, 결국 같은 위치를 오르내릴 수밖에 없는 계단처럼 폐쇄된 궤적을 그리며 카페로 복귀한다. 영화의 마지막, 카페의 사람들은 돌아가며 담배를 피우러 나온다. 카페 앞에 놓인 고무대야의 풀잎들을 내려다 보기도, 카페 밖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한복 입은 사진을 찍는 동생 커플을 보기도 한다. 바통터치하듯 돌아가며 카페의 유리문을 넘나드는 그들은 다시 한번 작은 폐곡선을 그리며 짝과 함께 대화를 이어간다. 죽음이라는 다가올 혹은 지나간 사실을 회피하며 혹은 밑거름 삼아 감정과 관계와 사랑과 질문을 이어가던 그들은, 결국 고무대야에 뿌리내린 풀잎들처럼 카페에 뿌리내린 채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엔드크레딧 이전에 등장하는 텅 빈 카페의 스틸 사진들은, 아무도 없지만 도리어 가득 찬 어느 대화를 마지막으로 한 번 잡아낸다. 결국 우리는 자리를 벗어날 수 없으면서 고무대야의 닫힌 둘레만을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는 풀잎들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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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포함


 대학원을 준비하는 수현(조현철)과 방송국에서 일하는 지영(김새벽)은 7년 차 커플이다. 동거생활을 하던 둘은 이사를 준비하고, 그러던 중 각자의 부모님을 찾아 뵐 일이 생긴다. 각자의 부모님들은 그들의 인생에 조언 아닌 조언을 건네려 한다. <초행>은 제목 그대로 ‘처음 가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우스갯소리처럼 ‘모두가 인생 1회차’라고 말하며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개인의 삶이라는 것에 대해 마치 지켜져야 하는 사회적 합의인 양 정해진 길이 존재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령 초중고를 무난히 졸업하고 20살에는 대학에 꼭 가야 한다거나, 20대 중반에는 졸업하고 취직을 해야 한다거나, 30살 내외에는 결혼을 해야 하고 30대 중반에는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등 모두의 삶이 일반적인 무언가로 정해진 것처럼 그들은 이야기한다. 하지만 지금 20~30대의 삶은 어떨까, 과연 일반적으로 정해진 삶을 따라가기에도 버거운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그게 무엇일지는 몰라도)마저 저버리라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요구처럼 느껴진다. 그렇다고 아무도 가보지 못한 길을 처음 내딛는 사람들이 온전할 수는 없다. 하이퍼 리얼리즘에 가깝도록 현실적으로 묘사된 <초행> 속 커플의 이야기는 어느 곳에 가도 초행길인 인생 1회차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화가 시작하면 수현은 형에게 아버지의 환갑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전화를 받는다. 지영은 생리가 멈춘 지 꽤 되었다며 임신을 의심한다. 이사를 앞둔 뒤숭숭한 집에서 둘은 마지막 남은 음식인 계란을 먹는다. 그들은 먼저 지영의 집을 찾는다. 인천으로 이사한 지영의 부모님은 공무원이고 부동산업자다. 안정된 생계를 꾸리고 살아가는 그들은 지영과 수현에게 결혼을 묻는다. 당연히 당장의 여건도 되지 않는 데다가 임신을 의심 중인 지영은 그런 질문들이 못마땅하다. 며칠 뒤 그들은 삼척에 있는 수현의 집을 찾는다. 별거 중인 수현의 부모님은 각각 공장 경비원과 횟집에서 일한다. 지영은 삼척에 도착하자마자 수현의 어머니를 도와 전을 부치고, 수현은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임신, 대학원 입시, 결혼, 이사 등 어디 하나 지영과 수현에게 초행이 아닌 것이 없다. 수현은 계속해서 “몰라”라는 말을 반복하고 지영은 끝내 “무섭다”라고 외친다. 구체적인 대사 없이 상황만 제시하면서 촬영했다는 <초행>의 이러한 대사와 제스처들은 영화 속 주인공들과 동년배인 김새벽, 조현철 두 배우의 자연스러운 현재가 녹아들어 있는 것만 같다. 그 둘 역시 배우라는 직업만이 있을 뿐, 현재 대한민국의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는 젊은 세대라는 점에서 수현과 지영을 비롯한 인물들, 영화를 보는 관객들과 다르지 않은 사람이다. 그렇기에 더욱 돋보이는 순간들이 <초행> 속에 존재한 것이 아닐까?



 영화는 두 사람이 삼척에서 서울로 돌아와 광화문 광장의 촛불시위를 목격하고, 차에서 내려 행진에 참여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영화 내내 집, 학원, 식당, 자동차 등 실내의 답답한 프레임 속에 있던 둘은 인파로 가득한 촛불 광장에서야 숨통이 트여 보인다. 마지막 장면의 카메라는 내내 두 인물의 뒤통수만을 쫓아 가지만 굉장히 자유롭게 움직인다. 실제 작년 촛불의 현장에서 촬영된 이 장면에서 수현과 지영은 사람들의 흐름을 따라가다가 “응? 다들 반대로 가는 것 같은데?”라면서 다시 반대 방향으로 걷는다. “반대 방향으로 걸으니 다들 또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 같은데?” 둘이 주고받는 대사는 방향성이 정해지지 않는 당시의 정국과 그들의 삶이 묘하게 교차되는 지점이다.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행진, 바로 다음 주의 정국을 예측할 수 없는 땅, 보통의 삶을 따르기에는 버겁고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엔 처음 가는 그 길을 전혀 모르겠고 무서운 상황. 영화 말미에 등장한 촛불 광장은 지금을 가장 명확하게 담아내는 공간이다. 모든 길이 정해져 있다고 믿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사실 매일 지나가는 길도 처음 가는 곳이잖아요. 그 길을 어떻게 정할 수 있나요.”

최근 홍상수의 영화들은 이야기적으로 매끄러워지고 형식적으로 안정화되고 있으며, 감정적으로 진해지고 있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는 반성을,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에서는 존경과 존중의 고백을,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는 자기파괴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의 21번째 장편영화인 <그 후>는 사랑이라는 테마를 정면으로 대하며 믿음이라는 태도로 이를 대한다. 홍상수 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플래시백, 캐릭터로 등장하는 유부남 주인공의 아내 등의 요소는 이러한 태도와 변화를 반영한다. 출판사 사장 봉완(권해효)의 꼬여버린 하루는 투명하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인물들에 의해 홍상수의 태도를 대변한다.



 첫 쇼트는 오프닝 크레딧이 등장하기도 전에 음악과 함께 시작된다. 새벽에 일어나 아내(조윤희)가 차려준 밥을 먹고 출근을 준비하는 그는, 아내와 대화하던 중 바람피우던 상대가 있다는 것을 들킨다. 회사에 출근한 봉완은 그 날 첫 출근한 아름(김민희)을 맞이한다. 중국집에서 함께 점심을 먹은 뒤 아내가 갑자기 회사로 찾아와 아름에게 “네가 그 년이지?”라면서 욕설을 퍼붓는다. 봉완이 도착하고 괴상한 3자 대면 끝에 아내는 집으로 돌아간다. 봉완은 저녁자리에서 일을 그만두겠다는 아름을 달랜다. 그러던 중 봉완의 불륜 상대인 창숙(김새벽)이 찾아오고, 봉완은 다시 창숙과 함께하려 한다.



 이전의 홍상수에서 볼 수 없었던 플래시백의 활용은 굉장히 새롭게 다가온다. 특히 영화의 쇼트 순서와 실제 촬영의 순서가 동일한 홍상수의 작업방식을 생각해보면, 그의 영화 속 플래시백은 영화의 시제를 어그러트린다. 이런 어그러짐은 영화의 전체의 이야기가 온전히 설명되지 못한 초반부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가령 화장실에서 나온 봉완이(첫 번째 쇼트) 아내가 차려준 밥을 먹다 불륜 사실을 들키고(두 번째 쇼트) 출근을 위해 아파트를 나선 뒤(세 번째 쇼트) 영화는 갑자기 다른 옷을 입은 술 취한 봉완과 그를 부축해주는 창숙을 보여주고(네 번째 쇼트) 지하주차장에서 애정을 나누는 둘을 보여준다(다섯 번째 쇼트). 그리고 다시 돌아와 출근을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는 봉완(여섯 번째 쇼트)가 등장한다. 출근하는 봉완의 머릿속에서 벌어진 플래시백으로 보는 것이 보통의 영화문법이겠지만, <그 후>를 보는 관객은 저 플래시백이 과거인지 출근 이후 봉완의 모습인지 단박에 이해할 수 없다. 극 중 시간이 밤인지 새벽인지 분간할 수 없는 흑백의 영상은 플래시백과 함께 영화의 시제를 어질러 놓는다. 지하철에서의 플래시백이 숏-리버스 숏을 통해 출근길의 봉완으로 돌아오는 쇼트, 아름이 출근한 모습을 보여준 이후 이후 출판사에서 일하는 창숙을 보여주는 플래시백 역시 계속해서 시제를 어그러트린다.



 물론 영화 속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은 하루 동안의 사건이다. 봉완은 새벽에 출근해 첫 출근한 아름을 맞이하고,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고, 아내가 회사에 찾아오고, 닭볶음탕을 저녁으로 먹고, 창숙과 재회한다. 그러나 영화의 쇼트 순서대로 진행되는 촬영은 배우들에게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연기하는 것으로 다가왔을 것이고, 영화 속 인물들의 몇몇 행동, 가령 봉완의 손을 잡는 아름 등은 그 속의 시제를 다시 한번 어그러트린다. 영화 속 인물들은 그 시간 속을 살아가는 투명한 인물들이고, 홍상수는 그 시간을 지나 남은 잔존물을 실존이라 부르려 한다. “만질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으세요”라고 봉완에게 물으면서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종교적 믿음을 고백하고 기도를 올리는 아름의 모습은 홍상수가 바라는 믿음 그 자체를 드러낸다. 과거-현재 그리고 그 후를 관통하는 감정의 잔존물이 중국집에서 아름과 봉완이 논하던 실존이고, 에필로그에서 봉완이 아름에게 준 소세키의 소설 『그 후』는 눈에 보이는 물질로 치환된 믿음과 경험의 잔존물이다.



 봉완과 아름이 만나는 에필로그로 마무리되는 <그 후>는동명의 나쓰메 소세키 소설에서 제목을 따왔다. 책을 읽어보지 않아 여기에 덧붙일 코멘트는 없지만, 영화는 ‘그 후’라는 제목이 누구의, 어느 사건의, 어느 시점의 그 후인지 궁금해지게 만든다. 홍상수와 김민희가 함께 한 세 편의 겨울 영화 그 후일까, 봉완과 창숙의 작당모의 그 후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제목의 그 후가 어떤 시간을 말하는 것인지는 홍상수만이 알고 있겠지만,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진행시키는 <그 후>의 그 후는 영화를 만들고 관람한 모두에게 다른 시점으로 남는다. 홍상수는 그 시간을 뚫고 남은 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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