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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급된 영화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빌런이 좋은 영화는 무엇일까

 슈퍼히어로장르의 빌런을 생각하면 어떤 캐릭터들이 떠오르는가? <다크 나이트>(2008)의 조커(히스 레저)?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2018)의 타노스(조쉬 브롤린)? 혹은 시대를 더 앞질러서, <배트맨>(1989)의 조커(잭 니콜슨), <슈퍼맨>(1978)의 렉스 루터(진 헤크먼)을 떠올릴 수도 있다. 이들 영화 속 빌런이라는 존재들은 히어로의 안티테제로 존재해왔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스타크 씨(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아이언맨이 된 이후 특별한 능력을 지닌 존재들이 늘어났고, 세상을 위협하는 사건도 비례해서 늘어났죠라는 비전(폴 베타니)의 대사는 이를 증명하듯 등장한다.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는 배트맨(크리스찬 베일)에게 네가 나를 완성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언브레이커블>(2000)에서 <글래스>(2019)까지 이어진 M. 나이트 샤말란의 3부작은 슈퍼히어로 코믹스에서부터 이어진 슈퍼히어로-빌런의 상관관계를 괴상하게 재구성한 작품이기도 했다. 결국 슈퍼히어로 장르에서 슈퍼히어로의 존재는 빌런의 존재를 보장한다. ‘빌런 없는 슈퍼히어로 영화는 불가능한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빌런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진부함을 가져온다. 이미 상상 가능한 빌런의 종류는 모두 쏟아져 나온 것만 같다. ‘절대 악혹은 순수 광기에 가까운 조커부터 전쟁이나 정치를 형상화한 <원더우먼>(2016)의 아레스(데이빗 튤리스)<퍼스트 어벤저>(2009)의 레드 스컬(휴고 위빙), 프롤레타리아 빌런이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스파이더맨: 홈커밍>(2017)의 벌처(마이클 키튼), 인종이나 젠더 등의 영역 속 소수자를 대변 혹은 은유하는 <블랙 팬서>(2018)의 킬몽거(마이클 B. 조던)<엑스맨>(2000)의 매그니토(이언 맥켈런), 심지어는 우주적 존재인 <닥터 스트레인지>(2016)의 도르마무(베네딕트 컴버배치-목소리)까지 수많은 종류의 빌런들이 쏟아졌다. 실사영화의 영역을 넘어, MCU TV드라마나 <인크레더블>(2004)와 같은 애니메이션,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2015)와 같은 유사-슈퍼히어로 영화까지 영역을 넓히면, ‘슈퍼히어로 장르 속 빌런의 종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많은 영화들은 빌런을 통해 영화의 정체성이 규정된다. 팀 버튼의 배트맨 영화 두 편이 그랬고,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또한 그러하며,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는 오롯이 빌런 타노스를 위한 영화였다.

 

 그렇기에 남초 커뮤니티와 팬보이들로 인해 과잉대표된 강력한 빌런혹은 좋은 빌런이 좋은 슈퍼히어로 영화의 기반이라는 의견은 종종 오해를 낳게 된다. MCUDCFU의 몇몇 영화들, 혹은 <엑스맨: 아포칼립스>(2016)와 같은 영화들이 마주한 비판이 그러하다. “빌런이 약하다는 평은 어느새 슈퍼히어로 영화의 만듦새를 결정짓는 문장이 되어버렸다.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3>(2007)부터 <아이언맨2>(2009), <토르: 다크 월드>(2013),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2016) 등의 영화들이 이러한 비판에 직면했다. 물론 이 영화들이 잘 만든 영화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빌런이 약하다라는 평이 슈퍼히어로 영화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자리잡은 상황에서 느껴지는 지겨움이 있다. ‘빌런이 약하다라는 평은 영화의 만듦새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원더우먼>이나 <데드풀>(2016),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2018)와 같은 작품들도 빌런이 강한영화는 아니지 않나? <아쿠아맨>(2018)에서 옴(패트릭 윌슨)이나 블랙 만타(야히아 압둘 마틴 2)의 존재감이 부족하다고 이 영화를 혹평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빌런의 존재감에 영화의 완성도를 떠맡기는 일은 지금까지 나온, 그리고 앞으로도 쏟아져 나올 슈퍼히어로 영화들을 설명하거나, 그들의 완성도를 끌어올리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리어 강력한 빌런에만 집착하는 경향은 히스 레저의 조커와 같은 사례에 과몰입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수어사이드 스쿼드>(2016)의 조커(자레드 레토)가 이러한 집착적 경향의 가장 나쁜 예시를 보여준다. 영화 속 조커의 모습과 영화 밖 자레드 레토의 모습은 그저 광인처럼 느껴질 뿐이다. 게다가 강력한 빌런에 집착하게 된 몇몇 팬보이들은 이제 빌런을 추앙하고 있다. 이제 조커와 타노스는 팬보이들의 형님으로 자리잡았다. 강력한 빌런 담론을 통해 빌런에 대한 과몰입과 추종이 한국의 알탕영화들 속 악역(가령 <신세계>(2013)이나 <베테랑>(2015), <범죄도시>(2017)과 같은 영화 속 악역들)에 대한 추종과 유사하다고 슬쩍 주장해보고 싶기도 하다.

 


 빌런 없는 슈퍼히어로 영화의 등장

 개인적으로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의 개봉 이후 슈퍼히어로 영화 속 빌런과 강력한 빌런이 좋은 영화의 기본전제라는 담론이 지겨워지고 있었다. 전쟁, 욕망, 정치, 환경오염, 광기, 빈곤, 절대 악이 개별자로 형상화된 빌런을 그만 보고 싶어졌다. <캡틴 마블>은 이러한 욕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주는 작품이었다.

 

 나는 <캡틴 마블>빌런 없는 슈퍼히어로의 등장이라고 평하고 싶다. 물론 형식적인 빌런은 존재한다. 영화의 초반부에서는 스크럴 족의 탈로스(벤 맨델슨)이 빌런으로 제시되고, 캐럴 댄버스(브리 라슨)의 과거가 밝혀진 이후부터 욘-로그(주드 로)와 크리 스타포스팀이 빌런에 위치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캡틴 마블>의 빌런이 아니다. 슈퍼히어로 장르의 컨벤션으로써 형식적으로 삽입된 캐릭터일 뿐, 빌런이라 불리던 다른 영화 속 캐릭터들과는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 영화가 전개되며 두 캐릭터가 갖게 되는 변화, -로그는 조력자에서 빌런으로, 탈로스는 빌런에서 조력자로의 변화는 특정한 캐릭터로 형상화되지 않은 <캡틴 마블>의 진짜 빌런을 자연스럽게 폭로한다.

 


 그렇다. <캡틴 마블>의 빌런은 시스템이다. 시스템은 조력자를 빌런으로, 빌런을 조력자로 변화시킨다. 아니, 조력자의 위치에 선 캐릭터가 빌런이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빌런으로 등장하는 캐릭터가 조력자, 친구, 동료라는 사실을 은폐한다. 이러한 시스템의 은폐 과정은 슈프림 인텔리전스(아네트 베닝)에 의해 지워진 기억을 되찾는 캐럴 댄버스의 여정을 통해 영화 전반에 걸쳐 폭로된다. 슈프림 인텔리전스의 명령에 의해 지워진 기억은 욘-로그의 가스라이팅으로 인해 지속된다. “감정을 배제해라”, “과거에 연연하지 말라는 욘-로그의 말은 가장된 조력자가 건네는 은폐의 속삭임이다. -로그의 가스라이팅은 되찾은 기억의 파편 속에서 등장하는 캐럴의 아버지나 공군 남성 조종사의 대사와 공명한다. “위험하니까 타지 말랬지”, “여자는 조종석에 앉을 수 없어라는 말들은 욘-로그의 대사들이 작동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로그, 아버지, 남성 조종사의 연쇄적 가스라이팅은 은폐를 통해 작동되는 시스템을 유지하는 원동력이다. 현실의 가부장제, 제국주의, 자본주의 등으로 읽어낼 수 있는 이 시스템은 젠더, 인종, 경제적 계급을 만들어내고, 하위 계급에 속한 사람들을 착취함으로써 지속된다. 흩어진 퍼즐처럼 제시되는 캐럴의 기억은 이러한 시스템()의 존재를 드러내는 단서이자 징후이고, 이들이 하나의 기억으로 통합되었을 때 캐럴은 각성하게 된다.

 

 캐럴의 각성을 만들어내는 존재는 그의 절친이자 싱글맘이며 전투기 조종사인 마리아 램보(라샤냐 린치)이다. 그는 등장부터 영화가 끝날 때까지 위치가 변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언제나 캐럴의 조력자, 동료, 친구, 가족이다. 불변하는 그의 위치는 캐럴의 기억을 짜맞추는 마지막 퍼즐이다. 동시에, 조력자의 위치로 옮겨간 탈로스 또한 캐럴의 각성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가 크리족의 침략으로 인해 우주난민 신세가 된 스크럴 종족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이다. 그 역시 시스템의 피해자인 셈이기 때문이다. 유사한 작동원리를 지닌, 그리고 거의 모든 경유에서 함께 작동하는 가부장제와 제국주의는 캐럴 댄버스가 조종사가 되는데 방해물을 만들었고(이것은 마리아 램보 또한 마찬가지이다), 탈로스를 난민으로 만들었다. 이들에게 직접적인 장애물이 되는 욘-로그와 크리 스타포스는 진짜 빌런인 시스템의 하수인이다. 그 시스템은 <닥터 스트레인지>의 도르마무처럼 하수인을 내세운 개별적인 존재이거나,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의 제모(다니엘 브륄)처럼 악의를 품은 배후의 인물이 아니다.

 


모습을 바꾸는 빌런-시스템

 여기서 의문점이 생긴다. <캡틴 마블>에서 시스템은 슈프림 인텔리전스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가? 심지어 어떤 형태를 띄고 의인화된 존재로 영화에 등장한다. 하지만 이 질문은 굉장히 쉽게 해소될 수밖에 없다. 영화 상에서 슈프림 인텔리전스는 크리 종족의 운명을 관장하는 인공지능이다. (크리족의 컴퓨터 체계가 인간과 비슷하다면) 무수히 많은 선택지를 지닌 알고리즘의 한 종류인, 가상적인 존재이다. 그는 오프라인에서는 존재를 드러낼 수 없다. 그는 헬라 행성의 특정 접속 장소 내지는 크리족 함선의 기계장치를 통해서만 접속 가능하다. 분명 존재하고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만 어디까지나 가상적으로 가정된 존재이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은 시스템에 접속한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떠올리는 모습을 모방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것은 신성하고, 남에게 발설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슈프림 인텔리전스는 비어스, 캐럴 댄버스에게는 마-(아네트 베닝)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비어스는 캐럴 댄버스가 마-벨을 존경했음을 기억하지 못한다. 슈프림 인텔리전스는 마-벨의 모습으로 캐럴 댄버스에게 가스라이팅을 가해, 그를 고귀한 크리족 전사 비어스인 상태에 머물게 한다. 결과적으로 이 과정에서 시스템은 더더욱 배후에 머물게 된다. 시스템은 특정 인물로 지목되지도, 지목될 수도 없다. 그것은 그냥 가정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구조를 직조하고, -로그, 캐럴의 아버지, 캐럴을 비웃는 남성 조종사 같은 인물들을 생산해 구조를 유지한다. 다소 결정론적인 이야기일 수는 있지만, 결국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서 로난(리 페이스)의 모습 또한 가부장제-제국주의 구조를 등에 업고 나타난 것 아닌가? 동시에 마-벨의 형상으로 나타남으로써 적이 아닌 적을 상정하도록 한다. 마치 난민인 탈로스가 전쟁의 원흉인 것으로 가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모습을 바꾼다라는 것은 <캡틴 마블>에서 꽤나 중요한 소재이기도 하다. 캐럴 댄버스를 고귀한 크리족 전사 비어스의 정체성으로 고정시키려고 한 것처럼, 시스템은 언제나 개인들을 특정한 정체성으로 규정하고, 고정하려 한다. 하지만 개인은 절대 고정적인 하나의 정체성만을 가지지 않는다. 슈프림 인텔리전스가 침략자로 고정시키려 했던 스크럴이 형태변환자라는 것은 이를 가장 강력하게 드러내는 소재다. 시스템은 모든 사람을 특정한 정체성으로 고정시키려 하고,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려 한다. 하지만 <캡틴 마블> 속 인물들은 어떠한가? 당장 마리아는 캐럴이 자신을 절친으로써, 엄마로써, 조종사로써 지지해주었다고 말하지 않는가? 캐럴 또한 여성이기에 받은 차별적 경험, 미 공군 소속 전투기 조종사라는 직업, 크리족 전사라는 정체성, 슈퍼히어로로 각성한 정체성이 뒤섞인 총체로서 존재하는 인물이다. 결국 모든 개인은 라는 정체성을 중심에 두고, 수많은 정체성의 스펙트럼을 오가는 트랜스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시스템은 개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여성이기에 OO를 할 수 없어”, “너는 침략자/빌런일 뿐이야라는 낙인을 찍고, 그 낙인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고정시킨다.

 


교차성으로 빌런의 부재-시스템의 존재를 드러내기

 배후의 배후의 배후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공작은 부재로써 존재하는 시스템에 의해 행해진다. 깊숙이 숨은 시스템을 드러내려면 그에 맞는 도구가 필요하다. <캡틴 마블>은 페미니즘을 그 도구로 꺼내 든다. ‘캡틴 마블로 각성하는 순간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쓰려 졌다 다시 일어나는 캐럴의 모습을 담은 몽타주로 대표되는 <캡틴 마블>의 임파워링은 가부장제-제국주의 시스템에 그대로 돌진하여 균열을 낸다. 큰 상황을 보자면 당장 지구에 닥친 위기를 구했을 뿐이지만, 우주 난민이 된 스크럴족의 새 고향을 찾아주러 함께 떠나는 모습과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노바 콥스가 큰 희생을 치르며 격퇴한 로난의 함선을 맨주먹으로 물리치는 힘은 영화가 끝난 이후 펼쳐질 이야기의 거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성차별이라는 낙인에 기반한 가스라이팅, ‘증명할 것을 요구받는 일상에서 해방된 여성은 무한한 가능성을 얻게 된다. <캡틴 마블>은 이것을 캐럴과  마리아, 모니카(아키라 아크바), -벨 등 여성 간의 여성연대, 소수자의 위치에 놓인 탈로스와의 연대, 동료의식에 기반한 닉 퓨리(사무엘 L. 잭슨)과의 연대를 통해 가능케한다. 슈퍼히어로 장르의 컨벤션 하에서 사이드킥의 지위를 가진 마리아 또한 딸 모니카의 지지를 통해 우주에 진출하고 (캐럴과 웬디 로슨으로서의 마-벨은 실패했던) 처음 보는 외계 우주선의 격퇴에 성공했으니까 말이다.


 이러한 연대의 기반에는 교차성이 있다. <캡틴 마블>에서 가장 부각되는 것은 당연히 여성연대지만, 이것은 인종과 젠더를 포괄하는 연대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들의 연대는 심지어 고양이(인 줄 알았던 외계생물 플러큰)마저도 포괄하지 않는가.

 

 이러한 교차적 연대는 시스템이 규정하는 정체성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캐럴은 마리아와 탈로스를 통해 기억을 되찾은 뒤 캡틴 마블로 각성하고, 마리아는 다시 조종석에 올라가며 탈로스는 침략자라는 누명을 벗게 된다. 탈로스가 자신의 녹색 피부를 본모습이라고 칭하지만, 다른 외형으로 형태를 변환했을 때도 탈로스이듯, 개인은 언제나 를 중심으로 늘어선 다양한 스펙트럼 사이를 오간다. ‘라는 구심점은 내가 타인이 아닌 존재임을 증명할 뿐, 나의 정체성은 시시각각 변화한다. 캐럴과 연대관계에 속하는 캐릭터 중, 후에 쉴드라는 조직의 국장이 되는 닉 퓨리만이 별다른 정체성 변화를 겪지 않는 것은 조직/구조/시스템 안에 완전히 편입되고 고정된 정체성을 지니게 된 존재임을 드러난다. 생각해보면 닉 퓨리는 <캡틴 마블>의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신분증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지 않는가?

 


 결론적으로, 시스템을 벗어난, 혹은 벗어날 수 있는 연대는 부재한 것처럼 은폐된 시스템을 드러내고, 그것을 타파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캡틴 마블>은 그것의 주요한 도구로 교차성 페미니즘을 선택한 것이다. 이는 가부장제-제국주의 시스템의 성차별적 구조를 드러내고, 이들이 여성과 난민 등의 소수자를 착취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역할을 수행한다. 빌런 없는 슈퍼히어로 영화는 이를 통해 가능해진다. 아니, <캡틴 마블>은 기존의 슈퍼히어로 장르가 빌런이라 지칭하는 특정한 캐릭터군 대신 시스템을 빌런으로 한 작품이다. 조커나 타노스와 같은 강력한 빌런은 가시적인 존재이다. 물론 그런 악은 여전히 남아있다. 슈프림 인텔리전스가 그러하듯,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가장된 모습으로 여기저기서 등장할 뿐이다. 그것이 조커이고, 타노스이고, -로그였던 것뿐이다. 결국 슈퍼히어로 장르에 페미니즘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캡틴 마블>의 가장 큰 성과는 바로 이것이다.

 

빌런 없는 슈퍼히어로 영화로 진짜 빌런을 드러내기. 그리고 교차성 페미니즘으로 이를 가능케 하기



 


*스포일러 포함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이 충격적인 결말 이후 <어벤저스: 엔드게임> 이전에 개봉하는 MCU 영화들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져 있다. <앤트맨과 와스프>는 MCU 내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재확인하면서, 두 편의 <어벤저스> 사이에 중간다리를 놓는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다. 반면 <인피니티 워>의 쿠키영상에서 그 로고만이 공개되었을 뿐인 <캡틴 마블>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사실 MCU의 첫 여성 슈퍼히어로 단독 영화라는 점에서 기대가 더 컸다. 물론 캡틴 마블/캐롤 댄버스를 연기한 브리 라슨이 “<캡틴 마블>은 페미니즘 영화”라고 발언한 뒤부터 ‘자칭’ 팬보이들의 불매 선언이 이어지고 있기는 하다. 역대 MCU 솔로 영화 중 최대 예매량을 기록 중이라 흥행에 큰 문제는 없어 보이지만 말이다. 더욱이 MCU 최초로 여성 감독이 연출(애너 보든이 라이언 플렉과 공동연출)을 맡았다는 점에서 많은 기대가 되었다.



<캡틴 마블>은 작년 말 세상을 떠난 스탠 리를 추모하는 오프닝 타이틀로 시작한다. 지구에서의 기억을 잃은 캐롤 댄버스는 비어스라는 이름으로 크리족의 전사로 생활하고 있다. 캐롤은 크리족 멘토인 욘-로그(주드 로)와 미네르바(젬마 첸), 코라스(디몬 하운수) 등으로 이루어진 팀과 함께 활동 중이다. 어느 날 슈프림 인텔리전트에게 외진 행성을 침략한 스크럴족과 그들의 리더 탈로스(벤 맨델슨)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캐롤은 작전 중 스크럴족에게 납치당하고, 이들이 끄집어 놓은 지구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심하게 된다. 탈출 과정에서 지구로 추락한 캐롤은 쉴드 요원 닉 퓨리(사무엘 L. 잭슨)와 전투기 조종사 시절 친구인 마리아(라샤나 린치)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지워진 과거를 찾아내고, 캡틴 마블로 각성하게 된다.



 <캡틴 마블>은 페미니즘 영화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 문장에 딴지를 걸기는 어려울 것이다. <캡틴 마블>은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고스트 버스터즈>, <원더우먼> 등 앞서 개봉한 여성 히어로 중심의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만들어 둔 길을 따라 질주한다. “여자라서 위험한 운동/군인 훈련/전투기 조종사는 안 돼”라는 말을 듣고 살았던 과거, MCU 세계관 내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얻었음에도 기억이 지워지고 크리족에 의해 힘을 제한당하는 현재는 캐롤 댄버스가 캡틴 마블로 각성하면서 부서진다. 영화 내내 여성에게 가해지는 직설적인 차별, 보호를 명목으로 한 통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난 이후의 캐롤 댄버스에 의해 산산이 박살 나고 만다. “나에게 너 자신을 증명해보라”는 욘-로그의 말에 “내가 그걸 증명할 필요는 없지”라고 말하는 캡틴 마블의 대사는 여성의 삶에 놓인 끝없는 증명의 장벽을 진부한 장르 클리셰와 함께 박살 내 버린다.



 캐롤 댄버스가 캡틴 마블로 거듭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캐릭터들이 여성들이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캐롤 댄버스의 절친이자 가족 같은 인물인 마리아는 정체성을 일깨워주고, 그의 멘토와 같은 마-벨(아네트 베닝)은 캡틴 마블로 각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었으며, 마-벨의 겉모습을 한 슈프림 인텔리전트는 영화의 빌런으로써 각성의 기회를 제공한다. 캐롤 댄버스의 여정에서 남성 캐릭터들은 과도한 비중을 차지하지도 않고, 도리어 캐롤의 각성을 방해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가령 닉 퓨리는 적당한 동행의 수준으로 등장하고, 우주 난민(이것을 현실세계의 전쟁 난민 문제와 일대일로 연결하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을 것이다)인 스크럴족의 탈로스는 각성에 대한 부차적인 기회를 제공하며, 욘-로그는 센트럴 인텔리전스의 하수인 역할에 불과하다. 결국 <캡틴 마블>은 여성 주인공이 여성 조력자와 함께 여성(의 모습을 한 인공지능) 빌런에 대항하는 이야기이다. MCU의 영화 중 이렇게 여성으로 가득한 영화가 나온 적이 있었나?



 서사적으로도 꽤나 흥미롭다. 캐롤 댄버스의 여정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피터 퀼(크리스 프랫)을 연상시키지만, 후자의 여정이 지루해지게 된 함정을 피해 간다. 두 캐릭터 모두 지구인으로 태어났지만, 외계인에게 납치되었고, 그들의 피/DNA가 섞인 채 외계의 방식으로 살아온 인물이다. 피터에게 납치는 유사부자관계와 백인 남성 너드로 이어지는 과정이었지만, 캐롤에겐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과정이었다. 다시 말해, 캐롤 댄버스는 납치를 통해 잃어버린 기억과 시간을 오롯이 ‘자신’을 통해 다시 채우며 성장한다. 그러나 피터 퀼은 자신의 뿌리에 집착하고, 이는 속편의 진부한 이야기로 이어지고 말았다. 단순히 두 유사한 플롯의 우열을 가리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캡틴 마블>의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후반부의 해방감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비롯해 다른 MCU의 영화에서 만나보지 못한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플롯은 <엔드 게임> 이후 제작될 속편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펼쳐나갈 자유도를 제공한다. 같은 세계관의 다른 영화들에서 보지 못한 해방감과 자유, 그리고 이를 만끽하며 질주하는 여성 슈퍼히어로의 모습이 담긴 <캡틴 마블>의 후반부는 그야말로 페미니즘적이다. 이제는 짧지 않은 역사를 지니게 된 슈퍼히어로 장르이지만, <캡틴 마블>에 와서야 드디어 ‘페미니스트 슈퍼히어로’를 만나게 되었다.


어벤저스 원년멤버라고 할 수 있는 캐릭터 중 유일하게 솔로영화가 아쉬웠던 토르의 세 번째 솔로영화이다. ‘라그나로크’라는 무게감 있는 제목을 가져오고 인디영화 씬에서 <뱀파이어에 관한 아주 특별한 다큐멘터리>와 같은 톡톡 튀는 작품들을 만들어온 타이카 와이티티를 영입한 마블의 선택은 적중했다. <토르: 라그나로크>를 잘 짜인 작품이냐, 혹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나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저>와 같은 MCU의 베스트 중 한편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실망스러웠던 <토르: 천둥의 신>이나 페이즈 2의 다른 작품들보다 아쉬웠던 <토르: 다크 월드>를 생각하면 이런 방식의 틀을 깨는 선택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비주얼에 경도되어 이야기의 부실함이 여지없이 드러났던 <닥터 스트레인지>나 백인 남성 중심의 코드를 과하게 집어넣어 불쾌해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2>, 이전 스파이더맨들에 비해 빈약한 액션과 어딘가 미덥지 않은 악당을 다루는 태도를 보여준 <스파이더맨: 홈커밍>에 비하면, <토르: 라그나로크>는 제대로 깔아 둔 판 위에서 한바탕 노는, 어떤 불쾌함이나 쎄함 없이 즐길 수 있는 영화였다.



 영화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인피니티 스톤을 찾아 우주를 여행하던 토르(크리스 햄스워스)는 아스가르드로 돌아오지만, 로키(톰 히들스턴)의 계략으로 힘이 약해진 오딘(안소니 홉킨스)이 죽자 죽음의 신 헬라(케이트 블란쳇)가 아스가르드를 침공한다. 헬라에 의해 추방당한 토르는 그랜드마스터(제프 골드브럼)가 지배하는 사카이르 행성에 떨어지고, 그곳에서 재회한 로키와 헐크(마크 러팔로) 그리고 아스가르드의 전사였던 발키리(테사 톰슨)와 힘을 합쳐 헬라에게 복수한다. 단순한 이야기를 채우는 것은 유머이다. <토르: 라그나로크>의 유머는 MCU의 다른 영화들과는 살짝 결이 다르다. 타이카 와이티티가 전작들에서 보여주었던 유치하지만 적중률이 높은, 마치 어린 남자아이들이 떼를 써가며 싸우는 모습을 보는 것과 같은 유치함이 영화 속에 가득하다. 이러한 유치함은 명백히 단점이 아닌 장점으로 작용한다. 가령 <파워레인저>나 <벡터맨> 같은 전대물을 보면서 느꼈던 즐거움, <울트라맨> 같은 특촬물을 보면서 느낀 즐거움이 <토르: 라그나로크>에 가득하다.



 동시에 이 영화에는 토르 시리즈에 바라던 신화적인 비주얼이 가득 등장한다. 헬라와 발키리 군단의 전투를 담은 발키리의 회상 시퀀스, 헬라가 아스가르드의 전사들과 일당백의 전투를 벌이는 장면, 비프로스트에서 벌어지는 마지막 전투 시퀀스 등은 북유럽 신화를 차용한 이야기에 걸맞은 비주얼을 선사한다. 동시에 <스타트렉>이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같은 영화들에서 봐온 스페이스 오페라적인 함선과 도시의 비주얼, <반지의 제왕> 같은 중세 판타지 영화에서 따온 듯한 비주얼들이 한 편에 영화 속에 꾹꾹 눌러 담겨 있다. <해리포터>의 퀴디치 월드컵 장면을 연상시키는 사카이르의 검투사 대결 장면이나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묘하게 BBC 드라마 <셜록>을 연상시키는 주소를 집어넣는 등의 재치는 익숙한 즐거움을 불러온다. 영화의 액션은 다소 게임의 시네마틱 트레일러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만 각 캐릭터의 특징에 알맞은 (특히 발키리와 헬라의 액션들은 기대 이상이다) 액션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만족스럽다.



 결과적으로 <토르: 라그나로크>는 MCU의 세계관 속에 갇힌 영화이기는 하다. 한 편의 거대한 드라마처럼 줄줄이 개봉하고 있는 MCU의 영화들은 관객이 보고 싶어 하는 코믹스 속 어떤 장면, 가령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의 대격돌이나 이번 영화의 토르 vs 헐크 장면과 같은 장면들을 보여주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 사이를 어떻게 채우는지가 마블 크리에이터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가 되었다. 페이즈 3의 영화들이 대부분 진부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캐스팅 혹은 비주얼적인 측면이나 기존 코드를 답습할 뿐이라면, <토르: 라그나로크>는 인디 b급 영화적 스타일을 적절히 차용했다는 점에서 만족스럽다. MCU 세계관의 장면들을 직접적으로 패러디하는 장면들은 물론, 캐스팅에 걸맞은 캐릭터의 매력을 드러내면서 감독의 취향을 뒤섞은 유머와 각종 영화들에서 따온 장면들은 잡탕이 따로 없지만 어쨌거나 맛있다. 동시에 MCU의 다른 영화들에 비해 잘 쌓아 올려진 이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은 MCU의 다른 영화들과 차별화되는 <토르: 라그나로크>의 장점이기도 하다.

*영화에 대한 최대한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MCU의 클라이맥스이자 종착점, 혹은 반환점과도 같은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마침내 개봉했다. 예상대로 엄청난 숫자의 스크린을 점령하면서 온갖 흥행 신기록을 세우고 있다.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는 스포일러 대란이 일어났고, 박지훈 번역가의 오역 논란은 청와대 청원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뭘 이렇게까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인피니티 워> 광풍 속에서, 지난 10년간 즐겁게 MCU 영화를 즐겨왔던 기억과 함께 개봉일 극장을 찾았다. 영화가 시작된 지 채 5분도 안 되어 (드디어) 사망하는 로키(톰 히들스턴), ‘인피니티 워’라는 부제가 공개되었을 때부터 죽음이 예측됐던 비전(폴 베타니)의 (무려 살려내서 다시 한번 죽이는) 죽음, 포스터에 등장한 캐릭터 중 절반 가량이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엔딩은 많은 관객들에게 충격을 줌과 동시에, 올해 6월 말 개봉할 <앤트맨 앤 와스프>, 내년 3월 개봉할 <캡틴 마블>, 그리고 내년 5월에 다시 돌아올 <어벤져스4>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킨다. 


 최근 MCU를 보면 볼수록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19편의 영화를 통해 쌓아온 세계관을 즐긴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MCU를 보는 관객이 즐기는 것은 한 편의 영화라기보다는, 거대한 드라마를 극장에서 개봉하는 성격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앞서 개봉한 <블랙팬서>의 경우 블랙 프라이드를 스크린 위에서 가장 흥미롭게 그려낸 사례이기에 한 편의 영화로서 가치와 흥미를 이끌어내지만, 그 밖의 다른 영화들에는 의문부호만 붙고 있다. 이젠 각 캐릭터들이 데뷔하는 첫 영화(가령 <닥터 스트레인지>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아니고서야 해당 영화를 제대로 즐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팬덤을 10년 넘게 유지시키면서, 가공할 흥행을 이끌어내는 충성심을 길러냈다는 것이 존경스러울 정도이다.



캐릭터성 밖에 없는 캐릭터 

 <인피니티 워>는 각기 다른 트랙을 달려온 캐릭터들이 하나의 이벤트로 뭉치게 된 MCU라는 드라마 시즌1의 피날레이다. 그도 그럴게, <인피니티 워>에서의 어벤져스 캐릭터 묘사는 전편들을 보지 않았다면 따라가기 어려운 부분이 많을뿐더러, <인피니티 워> 속의 캐릭터들에겐 제대로 된 기승전결이 존재하지 않는다. 타노스(조쉬 브롤린)의 등장이라는 사건은 여러 슈퍼히어로들을 움직이게 만들지만, 여기서 각 캐릭터들의 동선과 감정선은 타노스의 행동에 대한 리액션일 뿐이다. 앞선 어벤져스 영화들과 비교해 본다면 이러한 단점은 더욱 두드러진다. <어벤져스>에서는 로키의 침공에 맞서기 위해 아이언 맨(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 토르(크리스 햄스워스), 블랙위도우(스칼렛 요한슨), 헐크(마크 러파로), 호크아이(제레미 레너) 등 6명이라는 비교적 소수의 캐릭터들이 하나의 팀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려냈다. <어벤져스>에는 캐릭터가 많이 않았기에 각각의 캐릭터들이 소개된 첫 영화들을 보지 않았어도 충분히 이들을 소개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여기에 <인크레더블 헐크> 이후 헐크 역의 배우가 에드워드 노튼에서 마크 러팔로로 변경되었다는 점은 <어벤져스>가 불가피하게 다시 한번 캐릭터를 소개해야 된다는 과제를 부여하기도 했다. 여기에 블랙위도우, 호크아이 등 개별 영화가 없던 캐릭터들에겐 전사를 부여하면서 캐릭터를 쌓아가는 과정이 있었다. 로키의 헬리캐리어 습격으로 캐릭터들을 흩어 놓은 뒤 뉴욕 전투에서의 협동으로 귀결되는 서사는 어벤져스라는 팀에 단일한 서사를 부여하면서 성공적으로 어벤져스라는 팀을 만들어낸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은 <어벤져스>에서 완성된 캐릭터를 유지하면서 퀵실버(애런 테일러 존슨), 스칼렛 위치(엘리자베스 올슨), 비전 등 새로운 캐릭터에게 서사를 부여함으로써 각 캐릭터의 서사와 개성을 만들어낸다. 울트론(제임스 스페이더)이라는 빌런의 맹목적인 목표는 새로운 캐릭터들이 자연스럽게 어벤져스라는 팀 캐릭터 속에 스며들 수 있는 배경이 된다.  


 <인피니티 워> 역시 로키나 울트론처럼 타노스라는 단일한 적을 통해 20명이 넘는 캐릭터를 하나의 서사로 엮으려 한다. 그러나 지구에서 우주로 확장된 배경은 그들을 단번에 한 공간으로 모으기 어렵다. 때문에 아이언 맨,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 스파이더맨(톰 홀랜드), 스타로드(크리스 프랫), 맨티스(폼 클레멘티에프) 등은 타이탄 행성, 토르, 로켓(브래들리 쿠퍼), 그루트(빈 디젤)를 니다벨리르로 향하는 여정, 캡틴 아메리카, 윈터솔져(세바스찬 스탠), 블랙팬서(채드윅 보스먼), 스칼렛 위치, 블랙 위도우 등이 비전을 지키기 위해 와칸다로 각각 나뉘어 영화가 진행된다. 어벤져스라는 한 팀으로 묶여 단일성을 지닌 한 팀이 아닌, 아이언맨, 토르, 캡틴 아메리카라는 세 개의 축으로 나뉘어 서사가 진행된다. 때문에 각각의 캐릭터가 지닌 이야기를 풀어낼 시간은 149분의 긴 러닝타임 속에서도 부족하고, 영화는 그저 앞선 영화들에서 보여줬던 캐릭터들을 끌어와 반복한다. 싸움에 임하는 각각의 동기도 다르기 때문에, 이들은 좀처럼 하나의 서사로 묶이지 않는다. 가령 토르는 로키와 아스가르드인들에 대한 복수를 위해 싸우고, 블랙팬서는 단순히 와칸다를 비롯한 지구를 침략한 적에 맞서기 위해, 아이언 맨은 로키의 뉴욕 침공에서부터 쌓인 한을 풀기 위해, 스타로드는 가모라(조 샐디나)의 복수를 하기 위해 타노스에 맞선다. 결국 이들에겐 공통의 적만 있을 뿐 공통의 서사는 없다. <인피니티 워> 속에서 성장, 발전 등 익숙한 슈퍼히어로 서사는 없다. 타락, 추락 등 그 반대로의 서사 또한 없다. 업그레이드된 슈트나 무기가 캐릭터의 성장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20명이 넘는 어벤저들은 각자가 기존의 보여줬던 모습만을 반복하고, 그것은 죽음 또는 상실이라는 결말로 귀결된다. 결국 어벤져스의 서사에는 타노스라는 발단과 죽음/상실이라는 결말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피니티 워>라는 한 편의 영화 안에서 기승전결의 완결되는 서사를 지닌 캐릭터는 타노스 한 명뿐이다. 영화의 주인공이 어벤져스가 아닌 타노스로 생각하고 <인피니티 워>를 이해하면, 이 영화는 타노스라는 주인공이 우주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어벤져스라는 빌런을 상대하는 다크 히어로 영화가 된다. 영화 속 모든 캐릭터의 출연 분량 중 절반 가까이를 타노스가 가져간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영화의 제목을 <타노스: 인피니티 워>로 바꾸는 게 정확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영화를 연출한 루소 형제는 타노스에게 다양한 서사를 부여하며 그의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가령 그의 행성인 타이탄은 인구 과잉과 식량 부족으로 인해 멸망했고, 유일한 생존자인 그는 생명의 절반을 죽이는 것이 해결책이라는 답을 내놓는다. ‘생존’이라는 키워드를 내거는 순간 타노스는 <스파이더맨: 홈커밍>의 벌처(마이클 키튼) 등의 빌런과 유사한 지위를 가지게 된다. 여기에 소울 스톤을 얻는 과정에서 발생한 가모라와의 부녀 이야기는 타노스에게 아버지 서사를 부여함으로써 그의 다양한 면모를 부각하려 한다. 때문에 가모라라는 캐릭터에게 기존 영화들에서 보지 못한 전사가 추가되긴 하지만, 결국 타노스의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한, 타노스에 대한 리액션으로서 가모라의 서사가 구축되는 모양새가 된다. 여기에 타노스의 손에 죽임을 당하게 되는 가모라의 최후와, 추락하는 가모라와 눈물 흘리는 타노스의 얼굴을 디졸브(심지어 MCU 전체에서 디졸브는 찾아보기 어렵다)로 담는 편집은 타노스의 서사를 위해 가모라라는 캐릭터를 황망하게 희생시켜 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수많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만큼, 타노스의 캐릭터로 영화가 집중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어쩌면 <인피니티 워>라는 이벤트를 영화화할 때의 한계점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의 원작이기도 한 코믹스 이벤트 [인피니티 건틀렛] 또한 타노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MCU는 코믹스가 아니다. 러닝타임이 어찌 됐든, 등장하는 캐릭터가 몇이든, ‘어벤져스’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인피니티 워>는 분명 어벤져스의 이야기를 담아내야 할 영화이다. 타노스라는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해 과도한 분량과 서사를 부여하고, 기존의 캐릭터들을 단순하게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허망하게, 그것도 매우 짜증 나는 방식으로 몇몇 캐릭터를 소비해버린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어쩌면 그간 MCU가 받아온, 빌런이 약하다는 지적에 대한 가장 뒤틀린 방식의 대응이 아닌가 싶다. 빌런을 강화하기 위해 전체 비중의 절반 가까이를 할애하고, 캐릭터를 희생시켜가면서 캐릭터를 구축한다. 이러한 방식은 여러모로 효과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정작 강조해야 할 주인공인 어벤져스에 실릴 힘을 앗아간다는 점에서 아쉽기만 하다. 모두가 빌런을 기억하는 여러 영화들, 가령 <다크 나이트>나 <양들의 침묵>은 조커와 한니발의 길지 않은 등장시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존재감을 러닝타임 내내 과시했다. 이는 효과적인 몇몇 장치, 가령 강렬한 오프닝, 여러 조연 캐릭터의 대사, 영화 속 뉴스 등을 이용한 홍보 등을 통해 가능해진다. <인피니티 워>의 타노스는 이러한 장치들의 과잉으로 가득하다.



클로즈업뿐인 액션 

 <인피니티 워>는 과잉의 영화다. 등장하는 캐릭터의 수부터 앞서 언급한 빌런의 과잉까지,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과 149분 안에 수많은 정보를 담아내야 하는 영화도 버거운 수준이다. 이를 어느 정도 정돈하고, 수많은 정보량이 정리되는 부분이 액션 장면이다. 뉴욕을 시작으로 스코틀랜드, 타노스의 우주선, 타이탄 행성, 와칸다 등 다양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액션은 예상대로 수많은 캐릭터들의 협동과 개별적인 캐릭터들의 능력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가령 타이탄 전투에서 닥터 스트레인지는 길을 열어주고, 스파이더맨은 거미줄로 타노스를 묶으며, 아이언 맨과 스타로드는 화기를 통해 타노스를 직접 공격하고, 맨티스는 타노스의 정신을 공략한다. <반지의 제왕> 스타일의 백병전으로 진행되는 와칸다 전투는 캐릭터 각각의 전투 방식을 강조한다. 방패를 이용한 캡틴 아메리카, 아크로바틱 한 근접 액션을 선보이는 블랙팬서와 블랙위도우, 오코예(다나이 구리라) 공중전을 도맡는 워머신(돈 치들)과 팔콘(안소니 맥키), 염력을 이용하는 스칼렛 위치 등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러한 액션들엔 풀숏이 부족하다. 우리는 여러 캐릭터들과 타노스가 싸우고 있다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 그들이 전체적으로 어떤 그림 안에서 싸우고 있는 것인지 당최 알 수가 없다. <어벤져스>의 뉴욕 전투는 비행이 가능한 아이언맨을 통해 멤버들을 잇는 롱테이크를 선보이며 각 캐릭터의 개성과 전체적인 액션의 동선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측면은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무너지는 것만 같다. <어벤져스>의 원년멤버들만이 등장하는 오프닝의 하이드라 기지 습격 장면은 전편과 유사한 방식으로 액션의 밑그림을 그리지만,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소코비아 장면은 익스트림 롱샷과 클로즈업만 존재하는 괴상한 구조의 액션 설계로 구성되어 있다. 비슷한 문제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의 공항 전투 등 비중 있는 캐릭터가 과도하게 많이 등장하면서 발생하기 시작한다. 거기에 <홈커밍>의 선상 전투 장면이나 <토르: 라그나로크>의 바이프로스트 전투 등 액션이 주는 타격감보다 캐릭터의 개성을 강조하는 비주얼을 선택하면서 액션 본연의 쾌감이 줄어드는 문제 또한 발생한다. 카메라는 지나치게 가까이 들어가거나 지나치게 자유롭다. 캐릭터와 상대방이 어떤 동선으로 움직이는지, 넓은 지역과 많은 캐릭터를 한 번에 다룬다면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다뤄야 한다.


 <인피니티 워>는 이런 부분이 부족하다. 등장하는 인원이 적은 뉴욕이나 스코틀랜드 액션 장면은 무난하고, 몇몇 부분은 잘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타이탄이나 와칸다 장면으로 넘어가면, 여러 캐릭터들을 자랑하기 위해 근접한 위치에서 그들을 담아낸 쇼트들로 가득할 뿐이다. 특히 와칸다 장면에선 여러 캐릭터가 협동하는 모습마저 제대로 담기지 못한다. 가령 윈터솔저가 로켓을 들고 360도 돌며 근방의 적들을 쏘는 장면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유사한 장면에 비해 답답하게 느껴진다. 어정쩡한 위치에서 둘을 잡는 카메라는 둘의 협동 액션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물론 1.90:1 아이맥스 화면비로 촬영된 이 영화를 2.39:1의 화면비로 상영되는 일반관에서 봤을 때 느껴지는 어정쩡함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아이맥스 관에서 관람하고 나니 애초에 어정쩡하게 촬영된 장면임을 알 수 있었다. 적과 싸우는 스칼렛 위치를 블랙위도우와 오코예가 협동하여 구하는 장면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아쉬운 점은 위치가 불분명한 캐릭터들이 갑자기 튀어나와 액션을 펼친다는 점이다. 타이탄 장면에서 타노스에 대한 맹공이 쏟아질 때, 어디에 숨어 있던 것인지 알 수 없던 맨티스가 등장해 타노스의 정신을 컨트롤하려 한다. 그전에 마찬가지로 위치가 불분명한 드랙스(데이브 바티스타)가 어디선가 나와 타노스의 다리를 공격한다. 각 캐릭터들이 타노스를 붙잡고, 아이언맨과 스파이더맨이 건틀렛을 벗기려는 장면에서 스타로드의 돌발행동과 함께 맨티스의 정신 공격이 무력화된다. 다시 움직이는 타노스에 의해 캐릭터들이 내동댕이쳐지는데, 앞의 쇼트에서 보이지 않던 닥터 스트레인지가 함께 내동댕이쳐진다. 과연 그는 어디에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와 날아가버린 것인가? 마찬가지로 오코예와 블랙위도우의 합동 액션에서, 그들의 구출 대상이었지만 외화면으로 실종되어 버린 스칼렛 위치가 난데없이 적을 날려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인피니티 워>는 수많은 캐릭터들을 이렇게 갑툭튀 시키는 방식으로 후반부 액션들을 전개해나간다.  


누구를 위한 아이맥스인가 

 <인피니티 워>는 영화 전체가 아이맥스로 촬영된 최초의 블록버스터이다. 아리 알렉사 아이맥스 카메라를 통해 촬영된 이 영화는 1.90:1의 위아래로 넓은 화면비를 자랑한다. 기존의 영화들, 가령 <블랙팬서>나 <시빌 워> 같은 작품들 역시 아이맥스로 촬영되었지만 영화의 몇몇 부분뿐이었다. 이렇게 일부분만 아이맥스로 촬영된 작품들은 일반관과 아이맥스관에서 동일하게 본래의 화면비(2.39:1)로 상영되고, 아이맥스로 촬영 혹은 컨버팅 된 장면들에서 컷이 넘어가거나 위아래가 슬그머니 늘어나면서 1.90:1의 화면비로 변경된다. 때문에 전체적인 영화 속 쇼트의 구성들은 2.39:1의 화면비에 맞춰지게 되고, 1.90:1 화면비의 화면은 일종에 보너스 같은 개념이 된다. 


 반면 <인피니티 워>는 모든 쇼트가 1.90:1의 화면비로 촬영되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같은 화면비를 소화할 수 있는 상영관은 아이맥스관뿐이다. 일반적인 상영관에서 <인피니티 워>는 2.39:1의 화면비로 상영된다. 이러한 선택은 본래 화면의 위아래를 크롭한 판본이 일반관에서 상영된다는 점이다. 때문에 1.90:1의 화면비를 기반으로 쇼트의 구도와 스케일을 맞춘 <인피니티 워>의 영상들은 일반관에서 온전히 감상할 수 없다. 많은 장면에서 화면의 위아래가 잘림으로써 발생하는 어정쩡함을 느낄 수 있는데, 가령 블랙오더가 탄 우주선이 뉴욕에 도착하는 장면이나, 대화 장면에서 타노스를 미디엄숏으로 잡는 장면, 모르도르 행성에서 소울 스톤을 구하는 장면 등이다. 아이맥스 화면비에서 온전하게 그려지던 이 장면들은, 일반관에서 상영되는 화면비에선 블랙오더의 우주선은 절반 가량이 화면에서 잘려나가고, 타노스를 잡는 미디엄숏에서 타노스의 이마가 잘려나가고, 소울 스톤이 숨겨져 있는 제단과 같은 장소는 그 스케일이 온전히 담기지 못한다. 이 장면들뿐만 아니라 여러 액션 장면, 몸집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타노스와 다른 캐릭터들의 대화 장면, 보르미르 비롯해 타이탄, 노웨어, 니다벨리르 등의 거대한 우주공간과 와칸다 등 광활한 지역을 담아내는 많은 숏은 일반관에서 온전히 즐길 수 없다. 작년 크리스토퍼 놀란의 <덩케르크>이 선보인 1.43:1 화면비를 일반관에서 경험할 수 없던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렇다고 모든 관객이 아이맥스 관에서 <인피니티 워>를 관람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이 제시되지는 않는다. 답은 불가능에 가깝다. 국내 18개 관 밖에 없는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지금처럼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하고 있는 <인피니티 워>의 관객들을 소화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영관의 숫자도 적을뿐더러, 높은 가격(이번 가격 인상으로 인해 평일 저녁 아이맥스관 가격은 18000원으로 올랐다), 지역적 한계 때문에 극도로 접근성이 떨어지기도 한다. 게다가 조조부터 심야까지 매진사례를 기록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으로써 아이맥스 관에서의 <인피니티 워> 관람은 더더욱 어렵기만 하다. 이러한 상영에서 영화 전체를 아이맥스로 촬영하고, 숏의 구도를 그 화면비에 맞추어 일반관에서의 관람을 온전하지 못한 경험으로 남기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인지에 의문이 든다. 1.43:1과 2.20:1의 극단적인 화면비 차이를 보인 <덩케르크> 또한 관객의 관람 경험을 질적으로 다르게 만드는 영화였다. <인피니티 워>의 경우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현재(5월 2일) <인피니티 워>를 관람한 625만의 관객 중 아이맥스를 통해 영화를 관람한 관객은 24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전체 관람객의 25분의 1 정도만이 아이맥스를 통한 온전한 <인피니티 워> 관람을 한 것이다. 결국 <덩케르크>나 <인피니티 워>가 취하고 있는 아이맥스라는 포맷은, 그것이 지닌 영화적 효과와 성취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다수의 대중이 아닌 예매 전쟁에서 승리한 소수의 관객을 위할 뿐이다.



 그래서 <인피니티 워>는 관객들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강력한 충격요법은 앞으로 개봉이 예정되어 있는 세 편의 MCU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주었고, (어벤져스의 입장에서) 미완성의 서사로 끝나버린 영화는 관객들이 하염없이 1년을 기다리게 만든다. 관객들이 MCU에 가지고 있는 충성도는 이제 폭발 상태에 가깝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피니티 워>는 MCU의 세계관이 점점 거대해지고, 수많은 캐릭터가 등장하면서 발생하는 한계점을 여실 없이 드러내는 작품으로 느껴졌다. 물론 <인피니티 워>는 즐겁게 볼 수 있는 작품이자, 10년간 MCU를 지켜봐 온 오랜 팬이라면 놓칠 수 없는 이벤트이긴 하다. 그러나 서사적으로, 수많은 캐릭터를 온전히 그려낼 수 없다는 측면에서, 안일하게 만들어지는 액션의 모습에서 일정 부분 한계점에 봉착해있다. <인피니티 워> 직전에 개봉한 <블랙팬서>는 같은 세계관 안에서 얼마나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는지 시도하고 일정 부분 성공한 작품이었다. <인피니티 워>는 “우주는 유한하다”는 타노스의 대사처럼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확장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만 같다. 어벤져스의 절반을 먼지로 만들어버린 엔딩을 보고 있자면, 절반을 죽여 균형을 맞춘다는 아이디어는 타노스만의 것이 아닌 것 같다.

 MCU의 수장 케빈 파이기를 비롯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홍보문구들은 영화사의 클라이맥스가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도 그럴게, 수억 달러의 예산, 10년 동안 18편의 영화를 통해 쌓아온 거대한 세계관, 수십 명에 달하는 주연급 배우들의 출연 등은 분명 전례 없던 거대한 이벤트가 맞긴 하다. 그러나 ‘영화사의 클라이맥스’ 같은 사건은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수십 명의 슈퍼히어로 캐릭터를 한 영화 안에 불러 모으고, 모두에게 역할을 부여하며 분량을 분배하는 일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니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 조 루소와 안소니 루소는 그것을 다시 한번 해낸다. 이것은 분명히 영화 역사상 가장 거대한 팬서비스임은 틀림없다.  



 아이언맨, 스파이더맨,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닥터 스트레인지, 블랙팬서…… 열거하기에도 숨이 가쁜 등장인물들의 목록이나 영화 속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앞으로 개봉할 <앤트맨 앤 와스프>, <캡틴 마블>, <어벤저스 4>을 예측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그보다도 왜 <인피니티 워>가 팬서비스에 머물고 말았는지, 혹은 결국 이것이 이 영화의 태생적인 한계인지를 생각해보는 게 더욱 흥미로울 것 같다. MCU는 원작 코믹스를 그대로 따르는 것과 달리 (물론 이러한 방식은 마블 원작 코믹스 세계관을 생각해봤을 때 절대 불가능하다) 여러 코믹스 속에 담긴 사건들을 조립하여 하나의 영화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추구했다. <인피니티 워>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원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인피니티 건틀렛] 이벤트를 분해하고, 앞서 개봉한 영화들의 사건과 인물로 그 사이를 메운다.  



 이러한 과정에서 MCU가 항상 지적당하는 것은 강력한 빌런의 부재였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울트론이나 <아이언맨 3>의 만다린은 원작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무리수를 둬 탄생한 실패작들이었다. 다만 최근 <스파이더맨: 홈커밍>의 벌처나 <토르: 라그나로크>의 헬라 등 매력적인 빌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블랙팬서>에 이르러서는 빌런의 존재감이 히어로를 압도하려는 위치에 서기 이르렀다. <인피니티 워>는 세계관 전체를 관통하는 배후인 타노스가 드디어 전면에 나서는 작품이다. 루소 형제는 그동안 빌런이 약했다는 평을 의식한 듯, 타노스에 다양한 서사를 부여하며 다채로운 캐릭터로 탄생시키려 한다. 그러다 보니 <인피니티 워>의 전체 캐릭터 중 타노스가 절반에 가까운 분량을 가져간다. 어떻게 보면 이는 당연한 처사다. 타노스를 상대하는 캐릭터는 수십 명인데, 당연히 빌런에게 많은 러닝타임을 활용해서 서사를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서사는 한국 신파영화를 보는 것만 같다. 영화 속 특정 장면에서는 조쉬 브롤린이 아닌 황정민이 타노스를 연기하는 줄 알았다. 그렇다고 타노스라는 캐릭터의 매력을 보여주는데 아주 실패한 것은 아니긴 하지만, 우리가 기대하던 것은 적어도 신파 서사를 지닌 타노스는 아니었다. ‘어벤져스는 돌아온다’(Avengers Will Return)이라는 익숙한 문구 대신 등장하는 ‘타노스는 돌아온다’(Thanos Will Return)라는 문구는 <인피니티 워>의 주인공이 타노스라고 선언하는 것 같다. 



 어찌 됐든 <인피니티 워>는 MCU에 기대하던 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기는 한다. 아이언맨, 토르, 캡틴 아메리카라는 세 인물을 주축으로 세 갈래로 나뉜 히어로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타노스에 대항하고, 종국에는 하나로 뭉쳐 이에 맞선다는 이야기는 교통정리가 잘 되어 있다. 와칸다에서의 백병전, 수많은 히어로들이 주고받는 액션의 합, MCU 특유의 유머 스타일,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던 몇몇 캐릭터의 사망 등 관객이 기대하던 거의 모든 것이 149분의 러닝타임 속에 채워져 있다. 몇몇 캐릭터의 깜짝 등장은 어색하기도, 반갑기도 하다. 어서 <어벤져스 4> 혹은 <앤트맨 앤 와스프>나 <캡틴 마블>이 개봉하길 바라게 되는 충격적인 엔딩은 MCU가 사활을 걸고 둔 수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던 MCU의 영화들은 <인피니티 워>에 이르러 스페이스 오페라와 <반지의 제왕> 스타일의 판타지로 귀결되려는 것 같다. 결국 <인피니티 워>는 MCU가 항상 하던 것을 가장 거대한 사이즈로 만들어낸 작품이다. 때문에 <인피니티 워>는 팬의 입장에서 즐거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작품임과 동시에, 역사상 가장 거대한 팬서비스라는 의의 이외의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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