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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이 충격적인 결말 이후 <어벤저스: 엔드게임> 이전에 개봉하는 MCU 영화들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져 있다. <앤트맨과 와스프>는 MCU 내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재확인하면서, 두 편의 <어벤저스> 사이에 중간다리를 놓는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다. 반면 <인피니티 워>의 쿠키영상에서 그 로고만이 공개되었을 뿐인 <캡틴 마블>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사실 MCU의 첫 여성 슈퍼히어로 단독 영화라는 점에서 기대가 더 컸다. 물론 캡틴 마블/캐롤 댄버스를 연기한 브리 라슨이 “<캡틴 마블>은 페미니즘 영화”라고 발언한 뒤부터 ‘자칭’ 팬보이들의 불매 선언이 이어지고 있기는 하다. 역대 MCU 솔로 영화 중 최대 예매량을 기록 중이라 흥행에 큰 문제는 없어 보이지만 말이다. 더욱이 MCU 최초로 여성 감독이 연출(애너 보든이 라이언 플렉과 공동연출)을 맡았다는 점에서 많은 기대가 되었다.



<캡틴 마블>은 작년 말 세상을 떠난 스탠 리를 추모하는 오프닝 타이틀로 시작한다. 지구에서의 기억을 잃은 캐롤 댄버스는 비어스라는 이름으로 크리족의 전사로 생활하고 있다. 캐롤은 크리족 멘토인 욘-로그(주드 로)와 미네르바(젬마 첸), 코라스(디몬 하운수) 등으로 이루어진 팀과 함께 활동 중이다. 어느 날 슈프림 인텔리전트에게 외진 행성을 침략한 스크럴족과 그들의 리더 탈로스(벤 맨델슨)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캐롤은 작전 중 스크럴족에게 납치당하고, 이들이 끄집어 놓은 지구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심하게 된다. 탈출 과정에서 지구로 추락한 캐롤은 쉴드 요원 닉 퓨리(사무엘 L. 잭슨)와 전투기 조종사 시절 친구인 마리아(라샤나 린치)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지워진 과거를 찾아내고, 캡틴 마블로 각성하게 된다.



 <캡틴 마블>은 페미니즘 영화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 문장에 딴지를 걸기는 어려울 것이다. <캡틴 마블>은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고스트 버스터즈>, <원더우먼> 등 앞서 개봉한 여성 히어로 중심의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만들어 둔 길을 따라 질주한다. “여자라서 위험한 운동/군인 훈련/전투기 조종사는 안 돼”라는 말을 듣고 살았던 과거, MCU 세계관 내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얻었음에도 기억이 지워지고 크리족에 의해 힘을 제한당하는 현재는 캐롤 댄버스가 캡틴 마블로 각성하면서 부서진다. 영화 내내 여성에게 가해지는 직설적인 차별, 보호를 명목으로 한 통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난 이후의 캐롤 댄버스에 의해 산산이 박살 나고 만다. “나에게 너 자신을 증명해보라”는 욘-로그의 말에 “내가 그걸 증명할 필요는 없지”라고 말하는 캡틴 마블의 대사는 여성의 삶에 놓인 끝없는 증명의 장벽을 진부한 장르 클리셰와 함께 박살 내 버린다.



 캐롤 댄버스가 캡틴 마블로 거듭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캐릭터들이 여성들이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캐롤 댄버스의 절친이자 가족 같은 인물인 마리아는 정체성을 일깨워주고, 그의 멘토와 같은 마-벨(아네트 베닝)은 캡틴 마블로 각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었으며, 마-벨의 겉모습을 한 슈프림 인텔리전트는 영화의 빌런으로써 각성의 기회를 제공한다. 캐롤 댄버스의 여정에서 남성 캐릭터들은 과도한 비중을 차지하지도 않고, 도리어 캐롤의 각성을 방해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가령 닉 퓨리는 적당한 동행의 수준으로 등장하고, 우주 난민(이것을 현실세계의 전쟁 난민 문제와 일대일로 연결하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을 것이다)인 스크럴족의 탈로스는 각성에 대한 부차적인 기회를 제공하며, 욘-로그는 센트럴 인텔리전스의 하수인 역할에 불과하다. 결국 <캡틴 마블>은 여성 주인공이 여성 조력자와 함께 여성(의 모습을 한 인공지능) 빌런에 대항하는 이야기이다. MCU의 영화 중 이렇게 여성으로 가득한 영화가 나온 적이 있었나?



 서사적으로도 꽤나 흥미롭다. 캐롤 댄버스의 여정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피터 퀼(크리스 프랫)을 연상시키지만, 후자의 여정이 지루해지게 된 함정을 피해 간다. 두 캐릭터 모두 지구인으로 태어났지만, 외계인에게 납치되었고, 그들의 피/DNA가 섞인 채 외계의 방식으로 살아온 인물이다. 피터에게 납치는 유사부자관계와 백인 남성 너드로 이어지는 과정이었지만, 캐롤에겐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과정이었다. 다시 말해, 캐롤 댄버스는 납치를 통해 잃어버린 기억과 시간을 오롯이 ‘자신’을 통해 다시 채우며 성장한다. 그러나 피터 퀼은 자신의 뿌리에 집착하고, 이는 속편의 진부한 이야기로 이어지고 말았다. 단순히 두 유사한 플롯의 우열을 가리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캡틴 마블>의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후반부의 해방감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비롯해 다른 MCU의 영화에서 만나보지 못한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플롯은 <엔드 게임> 이후 제작될 속편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펼쳐나갈 자유도를 제공한다. 같은 세계관의 다른 영화들에서 보지 못한 해방감과 자유, 그리고 이를 만끽하며 질주하는 여성 슈퍼히어로의 모습이 담긴 <캡틴 마블>의 후반부는 그야말로 페미니즘적이다. 이제는 짧지 않은 역사를 지니게 된 슈퍼히어로 장르이지만, <캡틴 마블>에 와서야 드디어 ‘페미니스트 슈퍼히어로’를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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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로시아(아네트 베닝)는 남편과 이혼하고 아들 제이미(루카스 제이 주만)와 함께 산다. 도로시아는 집의 방 몇 개를 내놓아 셰어하우스로 이용한다. 페미니스트이자 사진작가인 애비(그레타 거윅)와 뉴에이지에 빠진 목수 윌리엄(빌리 크루덥)이 도로시아의 집에서 함께 살아간다. 제이미와 어릴 적부터 절친한 친구였던 줄리(엘르 패닝)는 도로시아의 집에 살다시피 하는 단골손님이다. 어느 날 도로시아는 애비와 줄리에게 제이미가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마이크 밀스의 <20세기 여성>(<20th Century Women>이라는 원제를 <우리의 20세기>라는 개봉명으로 바꾼 것에 반대하기에 <20세기 여성>으로 표기한다)은 도로시아와 그의 집에서 살아가는 제이미, 애비, 그리고 줄리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그들이 살아가는 1979년의 산타바바라의 풍경과, 20세기의 이야기지만 현재에도 유효한, 시대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은 치밀하게 짜인 각본과 형식을 통해 전달된다.



 도로시아는 1924년에 태어났다. 비행기 파일럿이 되고 싶었던 그는 2차 세계대전이 터질 무렵 비행학교에 지원해 훈련을 받지만 전쟁이 끝나 파일럿이 되는데 실패한다. 적성을 살려 항공회사에서 일하던 그는 남편이 될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제이미를 낳은 뒤 이혼한다. 그는 직장을 계속 다니면서 제이미를 양육한다. 전시에 노동자가 되어 경제를 뒷받침하고, 전후에 해고당해 돌봄 노동자가 되어버린 다른 여성들과는 달리, 도로시아는 자신의 적성을 찾아 행동했고 전후에도 노동을 이어간다. 헤비스모커이지만 건강에 덜 해롭다는 샬럿 담배를 피우고, 제이미가 조퇴를 원하면 조퇴 사유를 써주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가부장제 체제에 억눌려 살아가는 인물이 아닌, 자신의 성격과 생각이 확실하게 드러나며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인물이 도로시아이다. 동시에 제이미가 ‘남성성’을 획득한 성인 남성으로 자라나길 바라는, 어쩔 수 없이 가부장제를 내화한 인물이기도 하다. 도로시아가 애비와 줄리에게 제이미를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것에는 이러한 저의가 깔려있다.



 애비는 1955년에 태어났다. 사진작가인 그는 뉴욕의 예술학교 출신이다. 교수와 사랑에 빠져 시간을 보내던 그는 자궁경부암에 걸린 것을 알고 산타바바라로 넘어오게 된다. 스투지스나 블랙 플래그 같은 하드코어 펑크 밴드의 음악을 사랑하는 펑크족인 그는 도로시아와 제이미, 줄리를 펑크 클럽으로 데려가기도 한다. 그는 불타오르다가도 언제든지 꺼질 수 있는 불꽃처럼 빨간 머리를 하고 있다. 암이 신체의 다른 부위까지 전이되었는지, 수술 경과에 대한 불안함을 안고 영화에 처음 등장한 그는 자신의 24시간을 사진으로 기록하기도 하고, 자신의 모든 소지품을 사진으로 남기려고 하기도 한다. 도로시아의 표현대로라면 ‘하드코어 페미니스트’인 애비는 제이미를 도와달라는 도로시아의 부탁을 받고, 제이미에게 여러 페미니즘 도서를 준다. 보스턴여성건강서공동체에서 출간한 『우리 몸, 우리 자신』(Our Bodies, Ourselves), 로빈 모건의『자매애는 강하다』(Sisterhood Is Powerful) 등의 책이 영화에 등장한다. 제이미는 이 책들을 읽고 맨박스와 그 밖의 경계에 걸쳐지는 인물로 성장한다.



 줄리는 1962년에 태어났다. 심리상담치료사 어머니를 둔 그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운영하는 십대 대화상담 프로그램에 반강제로 참여하게 된다. 일찍이 이혼한 어머니는 한 남성과 재혼하고, 줄리에겐 여동생이 생기게 된다. 제이미가 학교에서 만난 가장 친한 친구인 줄리는 종종 제이미의 방으로 몰래 들어가 한 침대에서 잠을 자곤 한다. 그러나 둘이 섹스를 하지는 않는다. 그는 섹스가 우정을 망칠 것이라 말하며 섹스를 거부한다. 하지만 줄리는 다른 십대들과는 섹스를 즐긴다. 남자들과 자면 어떤 기분이냐는 제이미의 질문에 “50%는 기분 나빠”라고 답하는 줄리는 “나머지 50%는 좋잖아”라며 답변을 마무리한다. 줄리는 애비처럼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실천하려는 사람은 아니지만, 자신이 몸과 행동의 주체로써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다. 때문에 영화 후반부 등장하는 지미 카터의 ‘Crisis ofConfidence’ 연설 이후 이어지는 식사 자리에서 등장하는 애비의 페미니스트 모먼트에 이어 줄리는 자신의 성경험을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이야기한다. 2세대 페미니즘을 이론적으로 배워 체득한 사람이 애비라면, 줄리는 경험적으로 이를 체득한 인물로 그려진다. 때문에 줄리는 애비와 함께 제이미에게 섹슈얼리티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알려주게 된다.



 <20세기 여성>은 이렇게 세 여성을 묘사하고, 그들에게 영향을 받는 한 십대 남성을 그린다. 영화는 전쟁을 겪은 20세기 초반에 태어난 여성과, 전쟁 이후 페미니즘과 펑크 문화 한복판에 존재하는 여성을 통해 20세기라는 한 시대를 결산하고, 시대를 통과하는 여성들과 그들을 통해 성장하는 남성을 그린다. 전체적인 스토리의 얼개만 보면 도로시아, 애비, 줄리가 제이미의 어머니 역할을 분담하는 성장영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20세기 여성>은 놀랍도록 모성애를 영화의 주제에서 배제시킨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불타는 차량이 보인다. 이혼한 도로시아의 남편이 남긴 유일한 흔적이다. 영화는 도로시아의 가족에서 남성성의 흔적을 불태우면서 시작한다. 때문에 도로시아는 윌리엄을 통해 남편/아버지/남성성의 부재를 채워 제이미를 성인 남성으로 성장시키려 하지만, 제이미가 이를 거부하며 실패하게 된다. 때문에 애비와 줄리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게 되는 것이다. 제이미는 세 여성의 영향을 흡수하는, 혹은 셋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추는 존재로써 영화에 위치한다.



 이러한 구도를 더욱 명확하게 해주는 것이 내레이션이다. 영화의 도입부는 산타바바라 인근의 바다를 비추며 시작해 불타는 도로시아의 자동차로 이어진다. 여기서 등장하는 내레이션은 도로시아의 목소리로 시작했다가 어느 순간 제이미의 목소리가 끼어든다. 한두 줄씩 번갈아 가며 내레이션을 하는 두 인물의 목소리로 영화 대부분이 이어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도로시아와 제이미, 애비, 줄리의 전사를 각 캐릭터의 파트를 나눠 설명하는 영화의 전반부이다. (윌리엄의 전사도 내레이션을 통해 설명이 되지만, 따로 자막이 등장하며 별개의 파트가 주어지지 않는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제이미와 윌리엄, 즉 남성 캐릭터의 전사를 설명하는 내레이션은 도로시아의 목소리이고, 도로시아와 애비, 줄리의 전사를 설명하는 내레이션은 제이미의 목소리라는 것이다. 도로시아는 제이미의 성장을 위해 윌리엄이라는 남성을 끌어들인다. 그는 주체적인 개인으로써 존재하는 인물이지만 제이미가 가부장제적 남성성을 지닌 성인으로 성장하 길 바란다. 그러나 제이미가 보고 들으며 자란 것은 세 여성의 이야기이다. 제이미의 목소리로 세 여성 캐릭터의 전사를 설명하는 내레이션은, 그가 어쩔 수 없는 시대/사회 배경 속에서 맨박스의 갇힌 모습을 드러낼지라도 그 밖의 존재에게서 영향받으며 전혀 다른 개인으로 성장한다는 것을 굉장히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그렇기에 <20세기 여성>의 서사는 부재하는 부성애를 모성애로 대체하려는 시도도 아니고, 남성성을 여성성으로 뒤바꾸려는 시도도 아니다. 진로/인간관계/섹슈얼리티/문화 등 삶의 많은 영역에서 남성성을 제거하고 제거된 남성성을 다시 채워줄 남성 캐릭터 또한 부재시키면서(윌리엄이 존재하지만 그가 뉴에이지 사상에 빠져 있고, 그에게 할당된 파트가 없다는 점에서 그는 제이미가 아닌 도로시아와 애비의 캐릭터를 상대하는 캐릭터로 존재한다), 세 명의 여성 캐릭터가 주는 영향력으로 제이미라는 캐릭터를 채운다. 때문에 제이미의 성격은 남성성/여성성의 이분법으로 구분되지 않는 어떤 회색지대에 속한 인물로 탄생한다. 세세하게 짜인 도로시아, 애비, 줄리의 세 캐릭터의 전사와 그것에서 비롯된 성격이 이러한 서사를 가능케 한다. 동시에 세 명의 캐릭터가 시대를 사는 남성이 아닌 여성 캐릭터이기에 가능하고 성립하는 이야기이다. 때문에 <20th CenturyWomen>에서 ‘Women’을 탈락시킨 <우리의 20세기>라는 개봉명은 (원제가 그랬다면 모를까) 영화의 주제를 가리는 잘못된 작명이다. <20세기 여성>은 어디까지나 20세기를 살아온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1999년 3월 폐암 판정을 받고 사망한다”는 내용의 영화 중반부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도로시아의 내레이션은 ‘20세기’와 그 시대를 통과하고 살아간 ‘여성’이라는 존재를 부각한다. 영화가 <20세기 여성>이라는 제목에 이렇게도 충실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극장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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