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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급된 영화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빌런이 좋은 영화는 무엇일까

 슈퍼히어로장르의 빌런을 생각하면 어떤 캐릭터들이 떠오르는가? <다크 나이트>(2008)의 조커(히스 레저)?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2018)의 타노스(조쉬 브롤린)? 혹은 시대를 더 앞질러서, <배트맨>(1989)의 조커(잭 니콜슨), <슈퍼맨>(1978)의 렉스 루터(진 헤크먼)을 떠올릴 수도 있다. 이들 영화 속 빌런이라는 존재들은 히어로의 안티테제로 존재해왔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스타크 씨(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아이언맨이 된 이후 특별한 능력을 지닌 존재들이 늘어났고, 세상을 위협하는 사건도 비례해서 늘어났죠라는 비전(폴 베타니)의 대사는 이를 증명하듯 등장한다.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는 배트맨(크리스찬 베일)에게 네가 나를 완성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언브레이커블>(2000)에서 <글래스>(2019)까지 이어진 M. 나이트 샤말란의 3부작은 슈퍼히어로 코믹스에서부터 이어진 슈퍼히어로-빌런의 상관관계를 괴상하게 재구성한 작품이기도 했다. 결국 슈퍼히어로 장르에서 슈퍼히어로의 존재는 빌런의 존재를 보장한다. ‘빌런 없는 슈퍼히어로 영화는 불가능한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빌런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진부함을 가져온다. 이미 상상 가능한 빌런의 종류는 모두 쏟아져 나온 것만 같다. ‘절대 악혹은 순수 광기에 가까운 조커부터 전쟁이나 정치를 형상화한 <원더우먼>(2016)의 아레스(데이빗 튤리스)<퍼스트 어벤저>(2009)의 레드 스컬(휴고 위빙), 프롤레타리아 빌런이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스파이더맨: 홈커밍>(2017)의 벌처(마이클 키튼), 인종이나 젠더 등의 영역 속 소수자를 대변 혹은 은유하는 <블랙 팬서>(2018)의 킬몽거(마이클 B. 조던)<엑스맨>(2000)의 매그니토(이언 맥켈런), 심지어는 우주적 존재인 <닥터 스트레인지>(2016)의 도르마무(베네딕트 컴버배치-목소리)까지 수많은 종류의 빌런들이 쏟아졌다. 실사영화의 영역을 넘어, MCU TV드라마나 <인크레더블>(2004)와 같은 애니메이션,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2015)와 같은 유사-슈퍼히어로 영화까지 영역을 넓히면, ‘슈퍼히어로 장르 속 빌런의 종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많은 영화들은 빌런을 통해 영화의 정체성이 규정된다. 팀 버튼의 배트맨 영화 두 편이 그랬고,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또한 그러하며,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는 오롯이 빌런 타노스를 위한 영화였다.

 

 그렇기에 남초 커뮤니티와 팬보이들로 인해 과잉대표된 강력한 빌런혹은 좋은 빌런이 좋은 슈퍼히어로 영화의 기반이라는 의견은 종종 오해를 낳게 된다. MCUDCFU의 몇몇 영화들, 혹은 <엑스맨: 아포칼립스>(2016)와 같은 영화들이 마주한 비판이 그러하다. “빌런이 약하다는 평은 어느새 슈퍼히어로 영화의 만듦새를 결정짓는 문장이 되어버렸다.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3>(2007)부터 <아이언맨2>(2009), <토르: 다크 월드>(2013),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2016) 등의 영화들이 이러한 비판에 직면했다. 물론 이 영화들이 잘 만든 영화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빌런이 약하다라는 평이 슈퍼히어로 영화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자리잡은 상황에서 느껴지는 지겨움이 있다. ‘빌런이 약하다라는 평은 영화의 만듦새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원더우먼>이나 <데드풀>(2016),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2018)와 같은 작품들도 빌런이 강한영화는 아니지 않나? <아쿠아맨>(2018)에서 옴(패트릭 윌슨)이나 블랙 만타(야히아 압둘 마틴 2)의 존재감이 부족하다고 이 영화를 혹평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빌런의 존재감에 영화의 완성도를 떠맡기는 일은 지금까지 나온, 그리고 앞으로도 쏟아져 나올 슈퍼히어로 영화들을 설명하거나, 그들의 완성도를 끌어올리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리어 강력한 빌런에만 집착하는 경향은 히스 레저의 조커와 같은 사례에 과몰입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수어사이드 스쿼드>(2016)의 조커(자레드 레토)가 이러한 집착적 경향의 가장 나쁜 예시를 보여준다. 영화 속 조커의 모습과 영화 밖 자레드 레토의 모습은 그저 광인처럼 느껴질 뿐이다. 게다가 강력한 빌런에 집착하게 된 몇몇 팬보이들은 이제 빌런을 추앙하고 있다. 이제 조커와 타노스는 팬보이들의 형님으로 자리잡았다. 강력한 빌런 담론을 통해 빌런에 대한 과몰입과 추종이 한국의 알탕영화들 속 악역(가령 <신세계>(2013)이나 <베테랑>(2015), <범죄도시>(2017)과 같은 영화 속 악역들)에 대한 추종과 유사하다고 슬쩍 주장해보고 싶기도 하다.

 


 빌런 없는 슈퍼히어로 영화의 등장

 개인적으로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의 개봉 이후 슈퍼히어로 영화 속 빌런과 강력한 빌런이 좋은 영화의 기본전제라는 담론이 지겨워지고 있었다. 전쟁, 욕망, 정치, 환경오염, 광기, 빈곤, 절대 악이 개별자로 형상화된 빌런을 그만 보고 싶어졌다. <캡틴 마블>은 이러한 욕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주는 작품이었다.

 

 나는 <캡틴 마블>빌런 없는 슈퍼히어로의 등장이라고 평하고 싶다. 물론 형식적인 빌런은 존재한다. 영화의 초반부에서는 스크럴 족의 탈로스(벤 맨델슨)이 빌런으로 제시되고, 캐럴 댄버스(브리 라슨)의 과거가 밝혀진 이후부터 욘-로그(주드 로)와 크리 스타포스팀이 빌런에 위치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캡틴 마블>의 빌런이 아니다. 슈퍼히어로 장르의 컨벤션으로써 형식적으로 삽입된 캐릭터일 뿐, 빌런이라 불리던 다른 영화 속 캐릭터들과는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 영화가 전개되며 두 캐릭터가 갖게 되는 변화, -로그는 조력자에서 빌런으로, 탈로스는 빌런에서 조력자로의 변화는 특정한 캐릭터로 형상화되지 않은 <캡틴 마블>의 진짜 빌런을 자연스럽게 폭로한다.

 


 그렇다. <캡틴 마블>의 빌런은 시스템이다. 시스템은 조력자를 빌런으로, 빌런을 조력자로 변화시킨다. 아니, 조력자의 위치에 선 캐릭터가 빌런이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빌런으로 등장하는 캐릭터가 조력자, 친구, 동료라는 사실을 은폐한다. 이러한 시스템의 은폐 과정은 슈프림 인텔리전스(아네트 베닝)에 의해 지워진 기억을 되찾는 캐럴 댄버스의 여정을 통해 영화 전반에 걸쳐 폭로된다. 슈프림 인텔리전스의 명령에 의해 지워진 기억은 욘-로그의 가스라이팅으로 인해 지속된다. “감정을 배제해라”, “과거에 연연하지 말라는 욘-로그의 말은 가장된 조력자가 건네는 은폐의 속삭임이다. -로그의 가스라이팅은 되찾은 기억의 파편 속에서 등장하는 캐럴의 아버지나 공군 남성 조종사의 대사와 공명한다. “위험하니까 타지 말랬지”, “여자는 조종석에 앉을 수 없어라는 말들은 욘-로그의 대사들이 작동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로그, 아버지, 남성 조종사의 연쇄적 가스라이팅은 은폐를 통해 작동되는 시스템을 유지하는 원동력이다. 현실의 가부장제, 제국주의, 자본주의 등으로 읽어낼 수 있는 이 시스템은 젠더, 인종, 경제적 계급을 만들어내고, 하위 계급에 속한 사람들을 착취함으로써 지속된다. 흩어진 퍼즐처럼 제시되는 캐럴의 기억은 이러한 시스템()의 존재를 드러내는 단서이자 징후이고, 이들이 하나의 기억으로 통합되었을 때 캐럴은 각성하게 된다.

 

 캐럴의 각성을 만들어내는 존재는 그의 절친이자 싱글맘이며 전투기 조종사인 마리아 램보(라샤냐 린치)이다. 그는 등장부터 영화가 끝날 때까지 위치가 변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언제나 캐럴의 조력자, 동료, 친구, 가족이다. 불변하는 그의 위치는 캐럴의 기억을 짜맞추는 마지막 퍼즐이다. 동시에, 조력자의 위치로 옮겨간 탈로스 또한 캐럴의 각성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가 크리족의 침략으로 인해 우주난민 신세가 된 스크럴 종족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이다. 그 역시 시스템의 피해자인 셈이기 때문이다. 유사한 작동원리를 지닌, 그리고 거의 모든 경유에서 함께 작동하는 가부장제와 제국주의는 캐럴 댄버스가 조종사가 되는데 방해물을 만들었고(이것은 마리아 램보 또한 마찬가지이다), 탈로스를 난민으로 만들었다. 이들에게 직접적인 장애물이 되는 욘-로그와 크리 스타포스는 진짜 빌런인 시스템의 하수인이다. 그 시스템은 <닥터 스트레인지>의 도르마무처럼 하수인을 내세운 개별적인 존재이거나,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의 제모(다니엘 브륄)처럼 악의를 품은 배후의 인물이 아니다.

 


모습을 바꾸는 빌런-시스템

 여기서 의문점이 생긴다. <캡틴 마블>에서 시스템은 슈프림 인텔리전스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가? 심지어 어떤 형태를 띄고 의인화된 존재로 영화에 등장한다. 하지만 이 질문은 굉장히 쉽게 해소될 수밖에 없다. 영화 상에서 슈프림 인텔리전스는 크리 종족의 운명을 관장하는 인공지능이다. (크리족의 컴퓨터 체계가 인간과 비슷하다면) 무수히 많은 선택지를 지닌 알고리즘의 한 종류인, 가상적인 존재이다. 그는 오프라인에서는 존재를 드러낼 수 없다. 그는 헬라 행성의 특정 접속 장소 내지는 크리족 함선의 기계장치를 통해서만 접속 가능하다. 분명 존재하고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만 어디까지나 가상적으로 가정된 존재이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은 시스템에 접속한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떠올리는 모습을 모방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것은 신성하고, 남에게 발설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슈프림 인텔리전스는 비어스, 캐럴 댄버스에게는 마-(아네트 베닝)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비어스는 캐럴 댄버스가 마-벨을 존경했음을 기억하지 못한다. 슈프림 인텔리전스는 마-벨의 모습으로 캐럴 댄버스에게 가스라이팅을 가해, 그를 고귀한 크리족 전사 비어스인 상태에 머물게 한다. 결과적으로 이 과정에서 시스템은 더더욱 배후에 머물게 된다. 시스템은 특정 인물로 지목되지도, 지목될 수도 없다. 그것은 그냥 가정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구조를 직조하고, -로그, 캐럴의 아버지, 캐럴을 비웃는 남성 조종사 같은 인물들을 생산해 구조를 유지한다. 다소 결정론적인 이야기일 수는 있지만, 결국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서 로난(리 페이스)의 모습 또한 가부장제-제국주의 구조를 등에 업고 나타난 것 아닌가? 동시에 마-벨의 형상으로 나타남으로써 적이 아닌 적을 상정하도록 한다. 마치 난민인 탈로스가 전쟁의 원흉인 것으로 가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모습을 바꾼다라는 것은 <캡틴 마블>에서 꽤나 중요한 소재이기도 하다. 캐럴 댄버스를 고귀한 크리족 전사 비어스의 정체성으로 고정시키려고 한 것처럼, 시스템은 언제나 개인들을 특정한 정체성으로 규정하고, 고정하려 한다. 하지만 개인은 절대 고정적인 하나의 정체성만을 가지지 않는다. 슈프림 인텔리전스가 침략자로 고정시키려 했던 스크럴이 형태변환자라는 것은 이를 가장 강력하게 드러내는 소재다. 시스템은 모든 사람을 특정한 정체성으로 고정시키려 하고, 이러한 사실을 은폐하려 한다. 하지만 <캡틴 마블> 속 인물들은 어떠한가? 당장 마리아는 캐럴이 자신을 절친으로써, 엄마로써, 조종사로써 지지해주었다고 말하지 않는가? 캐럴 또한 여성이기에 받은 차별적 경험, 미 공군 소속 전투기 조종사라는 직업, 크리족 전사라는 정체성, 슈퍼히어로로 각성한 정체성이 뒤섞인 총체로서 존재하는 인물이다. 결국 모든 개인은 라는 정체성을 중심에 두고, 수많은 정체성의 스펙트럼을 오가는 트랜스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시스템은 개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여성이기에 OO를 할 수 없어”, “너는 침략자/빌런일 뿐이야라는 낙인을 찍고, 그 낙인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고정시킨다.

 


교차성으로 빌런의 부재-시스템의 존재를 드러내기

 배후의 배후의 배후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공작은 부재로써 존재하는 시스템에 의해 행해진다. 깊숙이 숨은 시스템을 드러내려면 그에 맞는 도구가 필요하다. <캡틴 마블>은 페미니즘을 그 도구로 꺼내 든다. ‘캡틴 마블로 각성하는 순간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쓰려 졌다 다시 일어나는 캐럴의 모습을 담은 몽타주로 대표되는 <캡틴 마블>의 임파워링은 가부장제-제국주의 시스템에 그대로 돌진하여 균열을 낸다. 큰 상황을 보자면 당장 지구에 닥친 위기를 구했을 뿐이지만, 우주 난민이 된 스크럴족의 새 고향을 찾아주러 함께 떠나는 모습과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노바 콥스가 큰 희생을 치르며 격퇴한 로난의 함선을 맨주먹으로 물리치는 힘은 영화가 끝난 이후 펼쳐질 이야기의 거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성차별이라는 낙인에 기반한 가스라이팅, ‘증명할 것을 요구받는 일상에서 해방된 여성은 무한한 가능성을 얻게 된다. <캡틴 마블>은 이것을 캐럴과  마리아, 모니카(아키라 아크바), -벨 등 여성 간의 여성연대, 소수자의 위치에 놓인 탈로스와의 연대, 동료의식에 기반한 닉 퓨리(사무엘 L. 잭슨)과의 연대를 통해 가능케한다. 슈퍼히어로 장르의 컨벤션 하에서 사이드킥의 지위를 가진 마리아 또한 딸 모니카의 지지를 통해 우주에 진출하고 (캐럴과 웬디 로슨으로서의 마-벨은 실패했던) 처음 보는 외계 우주선의 격퇴에 성공했으니까 말이다.


 이러한 연대의 기반에는 교차성이 있다. <캡틴 마블>에서 가장 부각되는 것은 당연히 여성연대지만, 이것은 인종과 젠더를 포괄하는 연대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들의 연대는 심지어 고양이(인 줄 알았던 외계생물 플러큰)마저도 포괄하지 않는가.

 

 이러한 교차적 연대는 시스템이 규정하는 정체성을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캐럴은 마리아와 탈로스를 통해 기억을 되찾은 뒤 캡틴 마블로 각성하고, 마리아는 다시 조종석에 올라가며 탈로스는 침략자라는 누명을 벗게 된다. 탈로스가 자신의 녹색 피부를 본모습이라고 칭하지만, 다른 외형으로 형태를 변환했을 때도 탈로스이듯, 개인은 언제나 를 중심으로 늘어선 다양한 스펙트럼 사이를 오간다. ‘라는 구심점은 내가 타인이 아닌 존재임을 증명할 뿐, 나의 정체성은 시시각각 변화한다. 캐럴과 연대관계에 속하는 캐릭터 중, 후에 쉴드라는 조직의 국장이 되는 닉 퓨리만이 별다른 정체성 변화를 겪지 않는 것은 조직/구조/시스템 안에 완전히 편입되고 고정된 정체성을 지니게 된 존재임을 드러난다. 생각해보면 닉 퓨리는 <캡틴 마블>의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신분증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지 않는가?

 


 결론적으로, 시스템을 벗어난, 혹은 벗어날 수 있는 연대는 부재한 것처럼 은폐된 시스템을 드러내고, 그것을 타파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캡틴 마블>은 그것의 주요한 도구로 교차성 페미니즘을 선택한 것이다. 이는 가부장제-제국주의 시스템의 성차별적 구조를 드러내고, 이들이 여성과 난민 등의 소수자를 착취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역할을 수행한다. 빌런 없는 슈퍼히어로 영화는 이를 통해 가능해진다. 아니, <캡틴 마블>은 기존의 슈퍼히어로 장르가 빌런이라 지칭하는 특정한 캐릭터군 대신 시스템을 빌런으로 한 작품이다. 조커나 타노스와 같은 강력한 빌런은 가시적인 존재이다. 물론 그런 악은 여전히 남아있다. 슈프림 인텔리전스가 그러하듯,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가장된 모습으로 여기저기서 등장할 뿐이다. 그것이 조커이고, 타노스이고, -로그였던 것뿐이다. 결국 슈퍼히어로 장르에 페미니즘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캡틴 마블>의 가장 큰 성과는 바로 이것이다.

 

빌런 없는 슈퍼히어로 영화로 진짜 빌런을 드러내기. 그리고 교차성 페미니즘으로 이를 가능케 하기



 


*스포일러 포함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이 충격적인 결말 이후 <어벤저스: 엔드게임> 이전에 개봉하는 MCU 영화들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져 있다. <앤트맨과 와스프>는 MCU 내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재확인하면서, 두 편의 <어벤저스> 사이에 중간다리를 놓는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다. 반면 <인피니티 워>의 쿠키영상에서 그 로고만이 공개되었을 뿐인 <캡틴 마블>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사실 MCU의 첫 여성 슈퍼히어로 단독 영화라는 점에서 기대가 더 컸다. 물론 캡틴 마블/캐롤 댄버스를 연기한 브리 라슨이 “<캡틴 마블>은 페미니즘 영화”라고 발언한 뒤부터 ‘자칭’ 팬보이들의 불매 선언이 이어지고 있기는 하다. 역대 MCU 솔로 영화 중 최대 예매량을 기록 중이라 흥행에 큰 문제는 없어 보이지만 말이다. 더욱이 MCU 최초로 여성 감독이 연출(애너 보든이 라이언 플렉과 공동연출)을 맡았다는 점에서 많은 기대가 되었다.



<캡틴 마블>은 작년 말 세상을 떠난 스탠 리를 추모하는 오프닝 타이틀로 시작한다. 지구에서의 기억을 잃은 캐롤 댄버스는 비어스라는 이름으로 크리족의 전사로 생활하고 있다. 캐롤은 크리족 멘토인 욘-로그(주드 로)와 미네르바(젬마 첸), 코라스(디몬 하운수) 등으로 이루어진 팀과 함께 활동 중이다. 어느 날 슈프림 인텔리전트에게 외진 행성을 침략한 스크럴족과 그들의 리더 탈로스(벤 맨델슨)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캐롤은 작전 중 스크럴족에게 납치당하고, 이들이 끄집어 놓은 지구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심하게 된다. 탈출 과정에서 지구로 추락한 캐롤은 쉴드 요원 닉 퓨리(사무엘 L. 잭슨)와 전투기 조종사 시절 친구인 마리아(라샤나 린치)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지워진 과거를 찾아내고, 캡틴 마블로 각성하게 된다.



 <캡틴 마블>은 페미니즘 영화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 문장에 딴지를 걸기는 어려울 것이다. <캡틴 마블>은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고스트 버스터즈>, <원더우먼> 등 앞서 개봉한 여성 히어로 중심의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만들어 둔 길을 따라 질주한다. “여자라서 위험한 운동/군인 훈련/전투기 조종사는 안 돼”라는 말을 듣고 살았던 과거, MCU 세계관 내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얻었음에도 기억이 지워지고 크리족에 의해 힘을 제한당하는 현재는 캐롤 댄버스가 캡틴 마블로 각성하면서 부서진다. 영화 내내 여성에게 가해지는 직설적인 차별, 보호를 명목으로 한 통제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난 이후의 캐롤 댄버스에 의해 산산이 박살 나고 만다. “나에게 너 자신을 증명해보라”는 욘-로그의 말에 “내가 그걸 증명할 필요는 없지”라고 말하는 캡틴 마블의 대사는 여성의 삶에 놓인 끝없는 증명의 장벽을 진부한 장르 클리셰와 함께 박살 내 버린다.



 캐롤 댄버스가 캡틴 마블로 거듭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캐릭터들이 여성들이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캐롤 댄버스의 절친이자 가족 같은 인물인 마리아는 정체성을 일깨워주고, 그의 멘토와 같은 마-벨(아네트 베닝)은 캡틴 마블로 각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었으며, 마-벨의 겉모습을 한 슈프림 인텔리전트는 영화의 빌런으로써 각성의 기회를 제공한다. 캐롤 댄버스의 여정에서 남성 캐릭터들은 과도한 비중을 차지하지도 않고, 도리어 캐롤의 각성을 방해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가령 닉 퓨리는 적당한 동행의 수준으로 등장하고, 우주 난민(이것을 현실세계의 전쟁 난민 문제와 일대일로 연결하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을 것이다)인 스크럴족의 탈로스는 각성에 대한 부차적인 기회를 제공하며, 욘-로그는 센트럴 인텔리전스의 하수인 역할에 불과하다. 결국 <캡틴 마블>은 여성 주인공이 여성 조력자와 함께 여성(의 모습을 한 인공지능) 빌런에 대항하는 이야기이다. MCU의 영화 중 이렇게 여성으로 가득한 영화가 나온 적이 있었나?



 서사적으로도 꽤나 흥미롭다. 캐롤 댄버스의 여정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피터 퀼(크리스 프랫)을 연상시키지만, 후자의 여정이 지루해지게 된 함정을 피해 간다. 두 캐릭터 모두 지구인으로 태어났지만, 외계인에게 납치되었고, 그들의 피/DNA가 섞인 채 외계의 방식으로 살아온 인물이다. 피터에게 납치는 유사부자관계와 백인 남성 너드로 이어지는 과정이었지만, 캐롤에겐 정체성을 재정립하는 과정이었다. 다시 말해, 캐롤 댄버스는 납치를 통해 잃어버린 기억과 시간을 오롯이 ‘자신’을 통해 다시 채우며 성장한다. 그러나 피터 퀼은 자신의 뿌리에 집착하고, 이는 속편의 진부한 이야기로 이어지고 말았다. 단순히 두 유사한 플롯의 우열을 가리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캡틴 마블>의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후반부의 해방감은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비롯해 다른 MCU의 영화에서 만나보지 못한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플롯은 <엔드 게임> 이후 제작될 속편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펼쳐나갈 자유도를 제공한다. 같은 세계관의 다른 영화들에서 보지 못한 해방감과 자유, 그리고 이를 만끽하며 질주하는 여성 슈퍼히어로의 모습이 담긴 <캡틴 마블>의 후반부는 그야말로 페미니즘적이다. 이제는 짧지 않은 역사를 지니게 된 슈퍼히어로 장르이지만, <캡틴 마블>에 와서야 드디어 ‘페미니스트 슈퍼히어로’를 만나게 되었다.


<하이라이즈> 등을 연출했던 벤 휘틀리가 액션 영화를 연출했다. 총기 거래를 진행하는 두 갱단이 총격전을 벌이게 된다는 단순한 플롯을 가진 영화 <프리파이어>는 낡은 창고라는 단 하나의 공간과 13명의 등장인물(목소리까지 14명)만이 등장한 간결한 작품이다. 크리스(킬리언 머피), 프랭크(마이클 스마일리), 버니(엔조 실렌티), 스티브(샘 라일리)는 총을 사러 왔고, 버논(샬토 코플리)과 마틴(바부 치세가), 해리(잭 레이너), 고든(노아 테일러)은 총을 팔려하며, 오드(아미 해머)와 저스틴(브리 라슨)은 두 집단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중개인이다. 이들이 낡은 창고에 모여 총기 거래를 진행하던 와중에, 거래 전날 술과 약에 취한 스티브가 해리의 사촌을 공격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총격전이 벌어진다. 두 집단 사이에 총알이 오가던 중 어디선가 나타난 호위(패트릭 버긴)와 지미(마크 모네로)가 라이플로 그들을 저격하려 한다.



 <프리파이어>의 기본 세팅은 단순하다. 편 가르기는 단순하고, 총격전의 시발점이 되는 스티브와 해리의 갈등도 깔끔하게 등장하고, 총격전이 시작되자마자 모든 인물의 팔다리에 총알이 한두 방씩 박혀 모두가 땅을 기어 다니게 된다. 크리스, 프랭크, 스티브, 저스틴, 오드, 버논, 해리 등주요 캐릭터들의 성격 역시 총격전 이전의 장면들에서 확실하게 제시된다. 총격전이 시작하기 전까지 10~15분의 준비시간이 지나면, 남은 러닝타임 동안 질질 끄는 시간 없이 총알과 욕설과 대사가 난무하는 난장판이 펼쳐진다. <하이라이즈>의 과시적인, 혹은 늘어지는 디졸브 몽타주 플래시백 같은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상 리얼타임에 가깝게 진행되는 영화는 그저 난장판을 즐길 수 있도록 낡은 창고로 관객을 안내한다. <프리파이어>는 ‘재미’라는 키워드에 아주 충실한 장르영화다. 또한 영화는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요소들, 가령 전화라던가 총격전 이후에 창고를 찾은 리어리(톰 데이비스) 등의 요소들을 하나씩 제거해가면서 끊임없이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때문에 각자의 이유로 악인이며 서로에게 욕설을 담은 입과 총구를 겨누고 있는 등장인물들의 싸움과 그 결과에 오롯이 집중하게 된다.



 아쉬운 점이라면 여성 캐릭터인 저스틴과 흑인 캐릭터인 마틴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모두가 백인 남성인 <프리파이어>에서 두 인물만이 일종의 소수자성을 띠고 있다. 창고 속 인물들은 끊임없이 카메라의 프레임 속에 등장한다. 끊임없이 욕설을 포함한 대사를 뱉어대는 목소리들은 프레임 밖에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계속해서 드러낸다. 영화 속 백인 남성들은 잊을만하면 프레임 속으로 들어와 아직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린다. 그러나 저스틴과 마틴은 어느샌가 영화에서 사라진다. 저스틴과의 데이트를 약속한 크리스는 저스틴에게 계속해서 창고 밖으로 도망칠 것을 요구하고, 그녀가 어느 정도 현장에서 벗어난 순간 카메라는 자신의 프레임 속에 그녀를 담지 않는다. 마틴은 총격전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머리에 총격을 당한다. 그는 계속 그렇게 쓰러져 있다. 사실 아직 죽지 않았다며 일어나 상황을 반전시키는 듯했으나 다시 영화에서 퇴장당하고 만다. 저스틴은 영화의 후반부가 되어서야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다. 다른 인물들은 끊임없이 영화 속에 존재했다면, 저스틴과 마틴은 영화가 그들을 필요로 할 때만 프레임 속에 소환된다. 저스틴을 데이트 대상 그 이상도 이하로도 대하지 않는 크리스와 버논의 태도와 더불어, 여성과 흑인 캐릭터를 사용하는 벤 휘틀리의 방식에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어쨌든 <프리파이어>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90분의 짧은 러닝타임은 그것보다 훨씬 짧게 느껴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흘러간다. 두 차례 흘러나오는 존 덴버의 ‘Annie’s Song’은 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의 시대를 알려줌과 동시에 쓸데없는 센티멘탈함을 집어넣어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여성과 흑인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에서는 아쉬움이 남지만, 그것을 만회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는 작품이다. 상영관을 가득 메우고 있는 최근의 상업영화들이 이렇다 할 즐거움을 주지 못하는 와중에 극악의 상영 환경에 놓인 <프리파이어>는상영관이 적은 게 아쉬운 즐거움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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