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선미' 태그의 글 목록 :: 영화 보는 영알못

*스포일러 포함

 <강변호텔>은 처음부터 강렬하고 잔혹하다. 강한 햇빛을 받으며 호텔방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시인 영환(기주봉)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고, 죽음, 후회, 체념으로 가득한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그는 경수(권해효)와 병수(유준상), 두 아들을 불러 놓고 기다리던 중이다. 한편 상희(김민희)는 자신을 찾아 호텔로 온 연주(송선미)와 함께 수다를 떨고 낮잠을 자고 산택을 하며 시간을 때운다. 영환은 아들들을 기다리며 산책을 하다 상희, 연주와 대화를 나누고, 두 아들을 만나 그들과도 대화를 이어간다.

 익숙한 홍상수의 이야기가 흘러가지만, <강변호텔>은 또 다른 홍상수를 볼 수 있는 영화다. 우선 홍상수의 영화에서 처음으로 삼각대를 사용하지 않은 촬영이 등장한다. 그것도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강렬한 흑백 콘트라스트의 화면과 함께 조금씩 흔들리는 화면이 보인다. 95분의 러닝타임을 가득 채우는 죽음의 징후는 오프닝 쇼트의 고정되지 않은 카메라에서부터 시작된다. <강변호텔> 속 죽음은 <풀잎들>이나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자유의 언덕> 등에서 드러나는 죽음 혹은 유령과는 조금 다르다. <강변호텔>은 홍상수의 유령들이 떠돌던 폐쇄된 미로들과는 다른, 죽음이라는 소실점을 정확하게 응시하며 진행되는 직진의 영화로 볼 수 있다. 영환은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을 응시하며 마지막 남은 아름다움을 찾아다니고, 경수와 병수는 죽음을 똑바로 응시하기는커녕 두려워하며 그것에서 멀어지려는 말만을 던진다. 반면 상희와 연주는 이미 죽음에서 해방된 마냥 남성들을 향해 조소를 보내고, 관조하고, 때로는 동조하기도 한다. 상희와 연주는 다른 세 캐릭터들과 한 공간에 존재하긴 하지만, 경수와 병수는 (심지어 연주가 경수의 장갑을 훔쳤음에도) 이 둘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영환은 죽는다. 개인적으로 홍상수의 영화에서 (GV를 통해 듣기로는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의 빠진 날> 이후로 처음) 죽음이 직접적으로 화면에 등장하는 것은 처음 목격하는 일이다. 영환은 영화의 오프닝에서부터 응시하던 죽음으로 그대로 직진한다. 영환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징후는 영화 곳곳에서 드러난다. 영환과 두 여성 캐릭터가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갑자기 내린 눈은 초현실적인, 일견 신성해 보이기까지 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이 장면에서 분명 강은 얼어 있고, 그 위에 흰 눈이 쌓여 있다. 그 뒤 호텔로 돌아온 영환은 두 아들은 만난다. <강변호텔>은 만 하루 동안의 사건을 다룬다. 그러나 어느새 창밖으로 보이는 강은 흐르고 있다. 영환이 홀로 산책하는 플래시백(으로 추정되는) 장면에서는 다시 강이 얼어 있다. 흐르는 것과 정지된 것, 고정된 카메라 대신 어깨에 메고 촬영해 흔들리는 카메라. 단순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것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지만, 움직임, 생에 관심을 두며 죽음이나 그에 대한 이야기를 회피하려는 이들은 더더욱 지금에 고정되어버린다. 반면 죽음을 응시하거나 그것에 개의치 않아하는 인물에겐 정지된 삶 혹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미세한 진동이 허락된다.

 영환만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과 관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죽음을 향해 전진한다. 얼어붙은 강은 정지된 듯 보이지만 계속 흐르고 있고, 녹은 뒤 다시 흘러갈 것이다. 영환은 죽음 이후에도 계속 흘러갈 것이다. 마치 상희가 애인에게 버림받은 뒤 연주와 함께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처럼 말이다. 영환은 강한 콘트라스트의 흑백 미장센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들을, 경수는 ‘병신’이라면서 놀리지만 영환 자신이 부여한 병수라는 이름의 아름다움을, 실패 또한 사랑의 한 부분임을 모두 끌어안으려 한다. 영환이 마지막으로 낭독한 시의 주인공 피터(신석호)의 모습은 흐릿하게 포커스아웃 된 모습으로만 볼 수 있다. 숨을 거두어가는 영환의 모습 또한 포커스아웃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는 ‘이사 가는 것’을 스스로에게 허락한 사람이 되고, 흐릿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난다. 죽음을 맞이한 사람은 더 이상 죽음을 응시할 필요가 없다. 죽음을 향해 전진하는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는 사람과의 연대만이 함께할 뿐이다.

*스포일러 포함


 <북촌방향>과 <다른나라에서>를 시작으로 영화 속 시간에 대한 실험을 이어온 홍상수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통해 이야기 자체의 변화까지 보여줬다. 그러한 변화는 홍상수 영화 속 여성 캐릭터의 변화를 통해 드러난다. (홍상수 본인을 포함한 것으로 확실시되는) 영화 속 찌질한 남성들의 구애를 받아내는 위치였던 영화 속 여성에게 솔직함을 드러내고(<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그들을 존대하기 시작했다(<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현실 속 여러 논란과 겹치는 이야기를 담은 그의 신작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다른나라에서>의 이자벨 위페르가 있지만) 홍상수 영화의 첫 여성 원 톱 주연 영화이다. 홍상수의 페르소나로 느껴진 전작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밤의 해변에서의 혼자>의 주인공 영희(김민희)는 영화 내외적으로 홍상수의 페르소나가 아닌 그의 영화 세계 안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인물이다. 그렇기에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홍상수가 조금씩 보여오던 변화가 비로소 완성되고, 새로운 단계의 홍상수를 만날 수 있는 영화였다.



 영화는 홍상수 영화의 마스코트와도 같은 손글씨 오프닝 크레딧을 버리면서 시작한다. 타자기로 적당히 친 것 같은 폰트의 오프닝 크레딧은 그의 전작들을 볼 때와 사뭇 다른 느낌을 주며 영화의 문을 연다. 2부로 구성된 영화의 1부는 영희와 지영(서영화)이 함부르크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영희는 함부르크로 찾아올지 아닌지도 모를 불륜관계에 있던 영화감독이자 유부남 상원(문성근)을 기다린다. 영희는 공원에 있는 다리를 건너기 전, 절을 하며 소원을 빈다. 그의 소원은 상원이 오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앞길을 바라는 소원이다. 2부에서는 영희가 준희(송선미)를 만나기 위해 강릉을 찾고, 선배인 천우(권해효)와 명수(정재영) 등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다. 천우, 명수, 준희, 명수의 애인인 도희(박예주)와 함께 하는 술자리와, 우연히 만나게 된 조감독 승희(안재홍)를 통해 만난 상원과 영화 스태프들과의 술자리, 총 두 번의 술자리가 등장한다. 사랑, 관계,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내는 영희의 대사는, 때로는 현실의 논란이 생각나 실소가 터지기도 하지만, 자리의 다른 인물들을 찍어 누르며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홍상수의 자기파괴적인 영화이다. 2부의 세 남자 상원, 천우, 명수는 그간 홍상수 영화에 여러 차례 등장했던 배우들을 기용하고, 전작에 등장했던 캐릭터들을 다시 소환해낸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두 차례의 술자리 장면에서 괴력의 연기를 선보이는 김민희의 영희는 홍상수의 남자들을 대사로, 표정으로 찍어 누르고 압도하며 영화를 장악해나간다. 다시 말하자면, 영희는 홍상수의 남자들을 영화 속에서 부수어버린다. 홍상수는 자신의 영화 속에서 자신의 페르소나를 김민희의 연기를 빌어 파괴한다. 손글씨를 버린 오프닝 크레딧에서부터, 원경에서 인물을 잡은 쇼트나 풍경을 잡은 쇼트 등 홍상수 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장면들이 등장한다. 영화의 시간을 탐구해온 작가는 조금씩 자신의 변화를 영화 속에 반영시켰고, 이번 영화를 통해 (그리고 현실의 사건을 빌어) 자신을 파괴한 뒤, 그 내면을 영화로 담아낸다. 김민희의 몸을 빌어 진행되는 홍상수의 자기파괴는 김민희에겐 자기 반영으로 느껴진다.



 1부와 2부엔 각각 검은 옷을 입은 의문의 남자가 등장한다. 1부의 남자는 공원에서 난데없이 영희와 지영에게 시간을 묻는다. 모른다는 둘에게 “핸드폰 그런 것도 없어요?”라고 되묻는다. 그리고 1부의 마지막, 남자는 해변에서 김민희를 둘러업고 저 멀리 달려간다. 2부의 남자는 영희의 숙소 베란다 창문을 닦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그 방에 있는 영희, 준희, 천우 모두 남자의 존재를 그가 마치 유령인 것처럼 인식하지 못한다. 계속해서 남자는 창문을 닦지만, 깨끗해지기는커녕 여전히 더럽기만 하다. 어느샌가 그는 닦는 것을 포기하고 바다를 바라본다. 박홍열 촬영감독이 연기한 이 남자는 홍상수가 영화 속에 등장한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준다. 누군가의 시간 안에 들어오고, 그를 데려가며, 투명해지려 계속 창을 닦지만 깨끗해지지 못하는 사람. 자기파괴적인 그의 영화에 등장한 (그의 영화 세계에서) 전대미문의 캐릭터는 그의 분신으로써 영화에 끼어든다. 이야기 자체에 영향력을 행사하진 않지만, 유령으로써 영화 안에 등장하고 다가온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지금까지 조금씩 변화를 보이던 그의 영화가 만든 하나의 결과물이다. 현실과 영화가 뒤섞인 감상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그의 신작은, 자기파괴적인 모습을 보이며 본인의 영화 세계의 새 단계를 연다. 그의 영화를 모두 본 것은 아니지만 (초기작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를 만든 영화가 아닐까? 이자벨 위페르와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추고, 그의 영화에 처음 출연하는 정진영, 어김없이 다시 출연하는 김민희가 뭉친 홍상수의 차기작 <클레어의 카메라>가 기대된다.6/22096712587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