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 태그의 글 목록 :: 영화 보는 영알못

 영화는 용접 불꽃과 거대한 쇳덩어리로 가득한 어느 작업장을 비추며 시작한다. 한 남성의 인터뷰 음성이 보이스오버로 등장한다. 프레임 속의 누군가의 것으로 생각되는 목소리는 자신의 직업과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느 순간 카메라를 든 장윤미 감독의 목소리가 “아빠”라며 누군가를 부른다. 장윤미의 첫 장편영화 <공사의 희로애락>의 주인공은 그의 아버지다. 70년대부터 40년 넘게 건설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그는 거제, 구미, 광주 등을 오가며 수많은 건축물에 흔적을 남겼다. 아버지를 인터뷰하며 삶의 흔적을 쫓아가는 영화는 사적인, 그렇기에 보편적인 이야기를 꺼내 든다.



 건설노동자는 건축가가 아니다. 그들은 도면에 그려진 내용을 바탕으로 평면 속의 형상을 건축물로 제작하는 역할을 맡는다. 때문에 완성된 건축물엔 그들의 생각이 들어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자재들을 직접 만지면서 건물을 쌓아 올린 노동자들의 기억은 건축물 안에 남겨져 있다. 기억이라는 비물질적인 것이 물질적인 건축물을 통해 기록되는 것이다. 영화 속 아버지는 40여 년이 지난 일들을 굉장히 세세하게 기억하기도 한다. 그가 노동자로 참여한 건축물은 그의 기억을 다시 꺼내게 되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장윤미는 아버지와 함께, 또는 홀로 아버지가 지은 건축물과 노동을 위해 오간 길로 향한다. 예천 시장의 아케이드, 거제 조선소의 기숙사와 같은 건물들, 광주에 있는 어느 기업의 건물 등은 건축 당시와 똑같기도, 그렇지 않기도 하지만, 장윤미의 아버지는 거기서 자신의 기억과 흔적을 읽어낸다. 보편적이고 공적인 외면을 지닌 건축물은 아버지의 기억과 상호작용하며 사적인 모뉴먼트가 된다. 이들이 마지막으로 찾는 장소가 죽은 할머니, 아버지의 어머니의 묘와 생가인 이유 또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묘지는 인간이 마지막으로 머무르게 되는 건축물이자, 산 어딘가에 숨어 가끔씩 기억을 상기시켜주는 모뉴먼트이다. 건축물을 통해 되살아나는 기억은 삶을 경유해 종착지로 보이는 공간으로 향한다. 딸과 함께 자신의 기억을 다시 쫓아가던 아버지가 “자식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계속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라고 내뱉는 순간은 영화 후반부에 등장한 묘지라는 공간과 관객의 머릿속에서 결합한다. 결국 건축물 안에 자신의 기억을 봉인하게 될 어느 건설노동자의 삶은 이 순간 사적인 삶의 궤적에서 뛰쳐나와 보편의 공간으로 향한다.



 장윤미는 서울과 구미, 광주, 거제 등을 오가는 길을 끈질기게 기록한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맨 앞자리에서 찍은 것으로 보이는 영상들은 아버지가 노동을 위해 오갔던, 아니 오가는 길조차 노동이었던 순간의 기록이다. 건설노동자의 삶은 건축물에도 남지만, 같은 길을 반복해서 오가는 다른 영역의 노동자들처럼 자신이 오간 길에도 존재한다. 도로 위에서도 트럭, 레미콘, 포크레인 같은 건설용 차량에 시선이 머무는 장윤미의 카메라는 도로 위의 경험을 사적인 것으로 맥락화 한다. 핸들을 조작하는 버스 운전사의 손을 클로즈업한 쇼트와 운전하는 아버지의 손을 클로즈업한 쇼트는 길 위에서의 반복적인 이동 또한 노동의 과정임을 밝힌다. 이러한 맥락 하에서 길 위에서 국가경제발전이라는 이름 하에 자행된 노동착취와 기업들의 노동자 착취 등을 읽어낼 수 있다. <공사의 희로애락> 속 도로의 재맥락화는 아버지의 목소리와 함께 가장 사적이기에 보편을 향한다.



 최근 많은 한국 독립다큐들의 감독 자신 혹은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사적영역의 이야기를 공적영역, 보편영역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마민지의 <버블 패밀리>, 이원우의 <옵티그래프>, 성향은 조금 다르지만 라야의 <집의 시간들>이나 김보람의 <개의 역사>도 이러한 틀 안에서 해석할 수 있는 작품이다. 장윤미 감독은 <콘크리트의 불안> 등 자신의 전작을 통해 드러낸 건축에 대한 관심을 통해 사적이기에 보편이 되는 경험을 한국 현대사 안에서 재맥락화 한다. 장윤미는 영화 중간 카메라에 찍힌 자신의 모습이 늙어 보인다는 아버지를 자신의 스마트폰 카메라로 촬영하고, 아버지 또한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카메라 뒤에 선 딸의 모습을 찍는다. 이 모습은 영화의 마지막 쇼트, 카메라를 정리하는 딸의 모습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다.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것을 물질화된 기억으로 (정확히 말하면 비물질적 디지털 메모리지만, 사진을 찍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진을 물질적 기억으로 간주하기에) 담을 수 있는 시대이다. 이러한 아버지의 모습은 그의 삶을 영화로 기록하려는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 딸의 모습과 공명한다. 비물질적인 기억을 건축물이라는 물질 속에서 되새기려는 <공사의 희로애락>의 시도는 서로의 사진을 찍는 부녀의 모습을 통해 영화 전체의 태도로 확장된다. 이러한 태도를 통해 장윤미 감독은 쏟아지는 유사한 테마의 작품들 속에서 자신만의 성취가 무엇인지를 공고히 한다.

*스포일러 포함


 대학원을 준비하는 수현(조현철)과 방송국에서 일하는 지영(김새벽)은 7년 차 커플이다. 동거생활을 하던 둘은 이사를 준비하고, 그러던 중 각자의 부모님을 찾아 뵐 일이 생긴다. 각자의 부모님들은 그들의 인생에 조언 아닌 조언을 건네려 한다. <초행>은 제목 그대로 ‘처음 가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우스갯소리처럼 ‘모두가 인생 1회차’라고 말하며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개인의 삶이라는 것에 대해 마치 지켜져야 하는 사회적 합의인 양 정해진 길이 존재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령 초중고를 무난히 졸업하고 20살에는 대학에 꼭 가야 한다거나, 20대 중반에는 졸업하고 취직을 해야 한다거나, 30살 내외에는 결혼을 해야 하고 30대 중반에는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등 모두의 삶이 일반적인 무언가로 정해진 것처럼 그들은 이야기한다. 하지만 지금 20~30대의 삶은 어떨까, 과연 일반적으로 정해진 삶을 따라가기에도 버거운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그게 무엇일지는 몰라도)마저 저버리라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한 요구처럼 느껴진다. 그렇다고 아무도 가보지 못한 길을 처음 내딛는 사람들이 온전할 수는 없다. 하이퍼 리얼리즘에 가깝도록 현실적으로 묘사된 <초행> 속 커플의 이야기는 어느 곳에 가도 초행길인 인생 1회차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화가 시작하면 수현은 형에게 아버지의 환갑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전화를 받는다. 지영은 생리가 멈춘 지 꽤 되었다며 임신을 의심한다. 이사를 앞둔 뒤숭숭한 집에서 둘은 마지막 남은 음식인 계란을 먹는다. 그들은 먼저 지영의 집을 찾는다. 인천으로 이사한 지영의 부모님은 공무원이고 부동산업자다. 안정된 생계를 꾸리고 살아가는 그들은 지영과 수현에게 결혼을 묻는다. 당연히 당장의 여건도 되지 않는 데다가 임신을 의심 중인 지영은 그런 질문들이 못마땅하다. 며칠 뒤 그들은 삼척에 있는 수현의 집을 찾는다. 별거 중인 수현의 부모님은 각각 공장 경비원과 횟집에서 일한다. 지영은 삼척에 도착하자마자 수현의 어머니를 도와 전을 부치고, 수현은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임신, 대학원 입시, 결혼, 이사 등 어디 하나 지영과 수현에게 초행이 아닌 것이 없다. 수현은 계속해서 “몰라”라는 말을 반복하고 지영은 끝내 “무섭다”라고 외친다. 구체적인 대사 없이 상황만 제시하면서 촬영했다는 <초행>의 이러한 대사와 제스처들은 영화 속 주인공들과 동년배인 김새벽, 조현철 두 배우의 자연스러운 현재가 녹아들어 있는 것만 같다. 그 둘 역시 배우라는 직업만이 있을 뿐, 현재 대한민국의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는 젊은 세대라는 점에서 수현과 지영을 비롯한 인물들, 영화를 보는 관객들과 다르지 않은 사람이다. 그렇기에 더욱 돋보이는 순간들이 <초행> 속에 존재한 것이 아닐까?



 영화는 두 사람이 삼척에서 서울로 돌아와 광화문 광장의 촛불시위를 목격하고, 차에서 내려 행진에 참여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영화 내내 집, 학원, 식당, 자동차 등 실내의 답답한 프레임 속에 있던 둘은 인파로 가득한 촛불 광장에서야 숨통이 트여 보인다. 마지막 장면의 카메라는 내내 두 인물의 뒤통수만을 쫓아 가지만 굉장히 자유롭게 움직인다. 실제 작년 촛불의 현장에서 촬영된 이 장면에서 수현과 지영은 사람들의 흐름을 따라가다가 “응? 다들 반대로 가는 것 같은데?”라면서 다시 반대 방향으로 걷는다. “반대 방향으로 걸으니 다들 또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 같은데?” 둘이 주고받는 대사는 방향성이 정해지지 않는 당시의 정국과 그들의 삶이 묘하게 교차되는 지점이다.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행진, 바로 다음 주의 정국을 예측할 수 없는 땅, 보통의 삶을 따르기에는 버겁고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엔 처음 가는 그 길을 전혀 모르겠고 무서운 상황. 영화 말미에 등장한 촛불 광장은 지금을 가장 명확하게 담아내는 공간이다. 모든 길이 정해져 있다고 믿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사실 매일 지나가는 길도 처음 가는 곳이잖아요. 그 길을 어떻게 정할 수 있나요.”

*스포일러 포함


 금산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는 모금산(기주봉)은 보건소에서 위암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매일 출근하고, 수영장에 들르고, 치킨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집에서 자는 일상을 반복하던 그는 젊은 시절 꿈꿔왔던 영화배우의 꿈을 다시금 떠올린다. 모금산은 서울에서 영화학과에 다니던 아들 스데반(오정환)과 그의 애인 예원(고원희)을 불러 자신이 직접 각본을 쓰고 주연을 맡을 단편영화 <사제폭탄을 삼킨 사나이>의 제작을 도와달라 부탁한다. 임대형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죽음을 영화라는 예술로 승화시킨다던가 하는 고리타분한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는 ‘예술’ 같은 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보다도 영화, 특히 찰리 채플린의 영화로 대표되는 쓸쓸함과 사랑스러움이 공존하는 캐릭터와 시간에 관심을 둔 작품이다.



 영화의 내용은 아주 단순하고 직선적이다. 다섯 개의 챕터로 나눠져 있는 영화는 모금산의 일상을 보여주고, 오랜만에 아들을 만나고, 단편영화라는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영화를 촬영하고, 완성하여 상영하는 것에 이른다. 흑백으로 촬영된 영화는 묘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고, 동문서답이나 혼잣말로 이어지는 대화, 모금산의 단편영화를 비롯하여 슬랩스틱을 포함한 유머 등은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의 감정을 단순히 쓸쓸함에 머물지 않게 만든다. 영화가 보여주는 감정적인 섬세함은 모금산을 둘러싼 여러 캐릭터를 다루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가령 모금산이 수영장에서 만나게 된 은행원 자영(전여빈)이나 아들의 애인인 예원 등의 캐릭터는 단순히 영화를 진행시키기 위한 존재로 남거나, 모금산의 감정선을 고조시키기 위한 장치로 낭비되지 않는다. 모금산이 자신의 과거를 추억하고, 존 웨인, 잉그리드 버그만, 제인 폰다와 같은 배우들을 추억하듯이 각 캐릭터들 또한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추억한다. 다시 말해 각자의 삶이 쌓여 <사제 폭탄을 삼킨 사나이>라는 단편영화와 그 영화를 관람하는 각 캐릭터가 된달까?



 <사제 폭탄을 삼킨 사나이>는 제목 그대로 폭탄을 삼킨 사나이가 주인공이다. 찰리 채플린처럼 양복에 모자를 쓴 주인공은 홀로 강냉이 폭탄을 개발했다. 어느 날 집에서 강냉이를 집어 먹다 실수로 강냉이 폭탄까지 집어 먹은 그는 기폭 스위치를 누를 곳을 찾아 서울 곳곳을 돌아다닌다. 한강의 다리 위, 국회 앞, 교회 앞 등의 장소를 돌아다니지만 실패하고, 밤이 되자 남산의 어느 공원에 오른다. 그는 결심한 듯 기폭장치를 누르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다 입에서 연기만 뿜어져 나올 뿐 폭탄은 불발되고 만다. 영화 속에서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모금산은 서울의 병원에서 수술을 받을 준비를 한다. 잠들지 못하고 깬 그는 창 밖의 불꽃놀이를 바라본다. 모금산의 영화 속에서 불발된 폭탄은 아름다운 불꽃의 모습으로 그의 눈 앞에 나타난다. 그가 암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았는지, 아니면 이미 너무 진행되어 시한부의 삶을 살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극복이나 희망 같은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 않는다. 대신 삶의 어떤 순간이라도 그저 지나갈 뿐이며, 쓸쓸함과 사랑스러움이 뒤섞여 공존하는 어느 중년의 삶을 긍정하는데 그친다. 그렇기에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어떤 정도를 아는 영화처럼 느껴진다. <사제 폭탄을 삼킨 사나이>가 상영되는 장면을 보는 많은 관객들이 눈물을 글썽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누군가의 삶을 착취하면서 눈물을 짜내는 것은 쉽지만, 누군가의 삶을 긍정하면서 눈물을 얻어내기는 어렵다.

*스포일러 포함


 영화는 두 가족의 하루를 교차하며 전개된다. 자동차 부품 공장의 인사관리팀장 준석(오동민)은 생산라인의 노동자에게 사직을 권고하라는 지시를 받고 괴로워한다. 준석의 아내 은혜(이상희)는정신질환 약을 먹을 정도로 육아에 시달리고 있고, 은행에 다녀오라는 준석의 닦달에 아기를 데리고 병원에 들렀다 은행으로 향한다. 은행 앞에 세워둔 차에 아기를 두고 잠시 은행에 다녀오는 사이 차가 견인 당하자 은혜는 망연자실한다. 다른 가족은 준석과 같은 공장 생산라인에 근무하는 반장 현태(장준휘)는 부하직원을 권고사직시키라는 지시에 괴로워한다. 현태의 아내(조시내)는아들(김현빈)을 데리고 병원을 찾고, 아들이 난독증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아내는 다친 팔목의 깁스를 풀고, 아직 다 낫지 않은 상태로 일터로 향한다. 아들은 난독증임에도 국어시간에 낭독해야 할 시를 계속 들여다본다. 영화는 두 이야기가 조금씩 겹쳐가며 대구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소시민들에게로카메라를 향한다. 두 가족, 다섯 사람의 이야기를 펼쳐간다. 그들의 힘겨운 삶은 말 그대로 물속에서 질식해가며 살아가는 것만 같다.



 영화는 각 인물의 이야기를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제시한다. 그들의 삶이 가진 시간차는 준석과 은혜의, 현태와 아내의 전화통화를 통해 좁혀진다. 96분의 러닝타임은 같은 시간을 각 인물의 시각에서 다시 보여주고, 각각의 시간을 모두의 하루로 봉합해가며 진행된다. 이렇게 진행되는 영화는 질식할 것 같은 삶을 살아가는, 생활이 아닌 생존을 위해 ‘물속에서 숨 쉬는 법’을 익히려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단일한 주인공을 내세우는 대신 다섯 명의 인물을 번갈아 가며 보여주는 방식은 그들 각자의 생존법을 보여주고, 이것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도록 몰아가는 사회적인 혹은 가족 사이의 사건들을 전시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가면 술에 취해 추운 밤거리를 돌아다니며 괴로워하던 현태가 객사한 채로 발견되고, 은혜가 자동차에 두고 내린 아기 역시 응급실에 도착하지만 사망한다. 영화는 다섯 인물 각각의 삶과 고난을 전시하고, 그중 몇몇을 택해 그들이 죽은 모습을 담아낸다. 결국 소시민들에게 물속에서 숨 쉬는 법 따위는 없는 것이다.



 문제는 영화가 이러한 소시민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고발하기 위해 각 인물들의 불행을 전시하는데 그친다는 점이다. 전화통화로만 이어지는 준석과 은혜, 현태와 아내의 소통은 좁혀지는 시간차처럼 무언가 거리를 좁혀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실상은 각자의 고통과 비극으로 이어진다. 고현석 감독은 이러한 편집을 통해 어떤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다섯 사람이 고통받는 모습을 제각각 보여준다는 의미 외에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또한 영화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인물인 현태에겐 클로즈업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에게 바스트 숏 이상의 클로즈업이 들어간 장면은 뮤직 펍에서 신청곡도 가능하냐고 묻는 장면 딱 하나뿐이다. 다른 인물들에겐 골고루 클로즈업이 들어갔지만,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 현태에겐 주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촬영은 관객이 그에게 다가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현태의 모습은 완전히 타자화된다. 산후우울증에 시달리는 은혜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가 약을 먹는 장면은 제시되지만 극 중 그것이 산후우울증 때문이라는 것은 제대로 제시되지 않고, 준석의 윽박지름과 은혜가 저지르는 몇몇 사고만이 등장할 뿐이다. 결국 영화 속 캐릭터들에게 허락되는 것은 그들이 겪는 고통을 보여주는 것뿐이다. 관객이 개입할 여지없이 그들의 고통만 전시하는 영화는, 그 질식할 것만 같은 공기와 짜증만을 남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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