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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FU에서 처음 <저스티스 리그>와 연관이 없는 영화를 내놓았다. <샤잠!>은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아쿠아맨 등의 슈퍼히어로의 존재가 알려진 세상을 배경으로 한다. 펜실베니아에 사는 빌리 뱃슨(애셔 엔젤)은 어릴 적 어머니를 잃어버리고 위탁가정을 전전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어떤 마법의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고, 그곳의 마법사(디몬 하운수)가 빌리에게 초인적인 능력을 주게 된다. “샤잠!”이라고 외치면 ‘솔로몬의 지혜, 헤라클레스의 힘, 아틀라스의 체력, 제우스의 권능, 아킬레스의 용기, 머큐리의 스피드’를 지닌 슈퍼히어로 샤잠(제커리 레비)으로 변하는 것이 그 능력. 갑작스레 주어진 능력에 빌리는 위탁가정에서 같은 방을 쓰는 슈퍼히어로 덕후 프레디(잭 딜런 그레인저)에게 도움을 부탁하고, 함께 능력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아가기 시작한다. 한편 어린 시절 마법사의 선택을 받지 못한 시바나 박사(마크 스트롱)는 7개 죄악의 힘을 받고 샤잠의 힘을 얻기 위해 빌리에게 접근한다.

 <샤잠!>을 연출한 데이비드 F. 샌드버그 감독은 유튜브에 5분 내외의 짧은 호러 단편들을 올리다가 제임스 완에게 픽업되어 <라이트 아웃>으로 장편 데뷔를 했다. 그의 두 번째 장편이 DCFU의 대형 블록버스터인 <샤잠!>이라는 것은 제임스 완이 현재 할리우드에서 지닌 파워를 입증하는 것만 같다. 아무튼 <아쿠아맨>을 통해 호러와 액션 블록버스터를 넘나드는 자신의 영화적 취향을 보여줬던 제임스 완과 유사하게, 데이비드 F. 샌드버그 또한 <샤잠!>을 통해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려 한다. 때문에 종종 호러적인 장면 연출이 돋보이는 지점도 있고, 현시점의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삼았기에 다양한 인터넷 밈이나 유튜브 등이 자주 등장하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지점들이 <아쿠아맨>에서처럼 성공적이지는 않다. 슈퍼히어로 덕후라는 프레디 캐릭터의 설정은 너무 모든 것을 대사로 설명해버리고, 빌리가 샤잠의 능력을 탐색하는 과정은 지지부진하다. 빌런인 시바나 박사와 격돌하는 장면 또한 <맨 오브 스틸>과 같은 영화에서 빌려온 장면 정도가 인상적일 뿐, 큰 감흥이 없다. 마치 인터넷 밈이 영화나 TV쇼에서 잘라온 장면들을 사용하는 것처럼, <샤잠!>은 장면만 떼어놓고 본다면 재밌지만 전체 맥락을 따라가면 금세 지루해진다. 또한 ‘인클루전 라이더’가 적용된 것인지 인종과 젠더의 측면에서 조연과 엑스트라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인종과 젠더의 배우들이 보이지만, 결국 세 명의 백인 남성(빌리, 프레디, 시바나)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그들의 취향에 맞춰진 영화라는 한계점 또한 지닌다.

 다만 후반부에서 이러한 단점들을 일정 부분 만회한다. 스포일러이기에 장면을 묘사하기는 어렵지만, <데드풀 2>가 ‘가족영화’ 운운하며 이상한 짓거리를 해댄 것을 생각하면 <샤잠!>의 후반부는 슈퍼히어로 장르 안에 가족 드라마 장르를 포섭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빌리와 프레디를 제외한 위탁 가정의 나머지 캐릭터들은 다소 설정을 위한 캐릭터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하게 속편이 예고될 영화이기에, <샤잠!> 이후의 다양한 활약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몇몇 아쉬운 점, 가령 코스튬 디자인의 아쉬움이나 능력에 대한 설명 등이 부족하긴 하지만, 분명 주목할만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DCFU의 <저스티스 리그>가 사실상 해체를 맞이한 이 시점에서 <샤잠!>은 (좋은 작품은 아니지만) 그 이후를 조금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 발판 정도의 역할은 해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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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완의 <컨저링>으로 시작한 ‘컨저링 유니버스’의 4번째 작품이다. 극 중 시간 순서로는 가장 앞선 시대에 위치한 작품이며, 전작 <애나벨>의 프리퀄인 형식을 취한다. 인형에 애나벨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 인형에 악마가 깃들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작품이다. 여러 단편 작품과 그중 한 편을 장편화한 <라이트 아웃>을 통해 호러 장르의 연출력을 인정받은 데이비드 F. 샌드버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시끄러운 호러 영화를 보면서도 잠들 수 있다’라는 명제를 참으로 만들어준 <애나벨>은 거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실망스러운 작품이었지만, 연출자의 재능이 한껏 발휘된 이번 작품은 컨저링 유니버스의 작품 중 (<인시디어스> 시리즈까지 포함해도) 가장 공포에 충실한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서프라이즈 시퀀스를 잔뜩 집어넣어 공포감을 조성하는 대신 관객을 놀라게 함으로써 공포를 느낀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여타 호러 영화들과는 다르게, <애나벨: 인형의 주인>은 관객을 놀라게 할 타이밍을 철저하게 계산해서 공포감을 조성한다. 81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으로 밀도 있게 소재를 이끌어가던 <라이트 아웃>에 비해 109분의 <애나벨: 인형의 주인>은 조금 늘어지는 느낌이 있긴 하지만, 이만하면 여름 한 시즌을 족히 보낼 수 있는 웰메이드 오락영화가 아닐까?



 영화는 전작보다 24년 전의 시점에서 시작한다. 인형을 만들어 파는 사무엘(앤서니 라파글리아)과 에스더 멀린스(미란다 오토) 부부는 딸 비(사마라 리)를 교통사고로 잃고 만다. 그로부터 12년 뒤, 멀린스 부부는 과거를 잊기 위해 소녀원의 고아 소녀들을 집으로 들인다. 소아마비로 인해 한쪽 다리가 마비된 재니스(탈리타 베이트먼)를 비롯해 그의 단짝인 린다(룰루 윌슨) 등 6명의 소녀와 그들을 지도하는 수녀 샬롯(스테파니 시그만)이 멀린스 부부의 집에서 살게 된다. 건강이 악화된 에스더는 방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사무엘은 비가 쓰던 방문을 잠근 채 들어가지도 못하게 막는다. 어느 날, 재니스는 비의 방에서 어떤 소리를 듣고 방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방 안에서 우연히 흰 드레스를 입은 인형을 찾게 되고, 인형과 연관된 것 같은 초자연적이고 사악한 사건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애나벨: 인형의 저주>가 공포를 만들어내는 장면에서 주목할 점은 인형이 움직이는 장면을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형을 공포의 대상으로 삼는 영화들에서 으레 등장하는, 목이 돌아가거나 인물을 향해 공포스럽게 걸어오거나 표정을 바꾼다거나 하는 장면들이 없다. <토이 스토리>에서 우디가 목을 돌리며 말을 하자 소스라치게 놀라던 시드의 모습을 생각해보자. 인형 혹은 장난감이 공포의 소재가 되는 이유는 움직여선 안 될 것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애나벨: 인형의 저주>는 이를 영리하게 활용한다. 인형이 움직이는 장면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인형과 그것으로부터 숨은/그것을 지켜보는 인물을 숏-리버스 숏으로 담아내며 인형이 움직였음을 관객에게 통보한다. 인형이 움직이는 순간은 관객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한다. 영화는 인형이 등장한 순간부터 영화의 마지막까지 애나벨의 움직임을 상상하도록 유도한다. 인형을 움직이는 악마의 존재는 어둠 속에 남겨둔 채 정지해 있지만 움직이는 인형을 집요하게 보여줌으로써 공포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진득하면서도 날카롭게 조성된 사운드와, 탈리타 베이트먼(이번 영화 최고의 발견이다)을 비롯한 아역 배우들의 연기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감독의 의도를 말끔하게 수행한다.



 다만 호러 영화 치고는 조금 길게 느껴지는 109분의 러닝타임은 어딘가 늘어진다는 인상을 준다. 아마 컨저링 유니버스에 속한 작품으로써 전작들의 설정과 이야기의 통일성을 맞추기 위해 늘어난 부분들이 아닐까 싶다. 가령 <애나벨>과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영화의 엔딩은 시리즈를 본 관객이라면 알아챌 수 있는 포인트이지만 그렇지 않은 관객에게는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장면이다. 쿠키영상을 통해 이 장면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악마의 얼굴이 드러나는 찰나의 한 두 쇼트이다. 철저히 어둠 속의 존재로써 인형을 움직이던 악마의 얼굴이 분장한 배우의 얼굴임이 드러나는 순간은 0.1초 단위의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드러나서는 안 될 영화의 치부를 발견한 듯한 기분은 순간적으로 공포로의 몰입을 깨트린다.



 몇몇 단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우스 호러와 오컬트라는 하위 장르는 한국의 관객이 쉽게 감정이입할 수 있는 장르도 배경도 아니다. 심지어 이름이 알려진 배우가 단 한 명이라도 출연하는 것조차 아니다. 그럼에도 <애나벨: 인형의 주인>은 자신의 목표를 알고, 목표를 수행하며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더군다나 <맨 인 더 다크>와 같은 소수자를 손쉽게 괴물화/악마화함과 동시에 소수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작품이 큰 호평을 받는 (나도 처음엔 호평을 보냈지만 곰곰이 생각해볼수록 불쾌한 작품이다) 지금의 메이저 호러 영화판에서, 이러한 성향을 가장 적게 드러내면서도 효과적으로 공포를 자아내는 데이비드 F. 샌드버그와 같은 감독의 존재는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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